'2009/05'에 해당되는 글 42

  1. 2009/05/31 조갑제, 문제는 조갑제가 아니다 26
  2. 2009/05/31 충격영상, 이명박 트리플엑스와 노인폭행 82
  3. 2009/05/30 고백, 이회창은 왜 대통령이 될 수 없었나 2
  4. 2009/05/30 박원순, 자살은 노무현 개인의 문제다 16
  5. 2009/05/30 경향, 잠자는 국민 깨워주고 떠난 임 2
  6. 2009/05/30 김동길, 정권교체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25
  7. 2009/05/30 한명숙, 다음 세상에서는 대통령하지 마세요 1
  8. 2009/05/29 전유경, 인터넷에서 스타되기
  9. 2009/05/27 아고라의 노무현 타살 음모론 3
  10. 2009/05/26 노무현 고시합격기,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 4
  11. 2009/05/26 누가 죽음을 미화하는가? 15
  12. 2009/05/25 자살만이 유일한 해결책인가 20
  13. 2009/05/25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미화할 일은 아니다 82
  14. 2009/05/25 김동길, 지금은 할 말이 없습니다 23
  15. 2009/05/25 '자살 전염병' 옮기는 언론에 경고
  16. 2009/05/25 자살보도지침, 한겨레신문 곽병찬
  17. 2009/05/25 한국예술종합학교 총학생회와 학생비상대책위원회 공동성명 4
  18. 2009/05/24 [근조] 노사모인 자와 노사모가 아닌 자 147
  19. 2009/05/24 노무현 지지자들, 봉하마을서 KBS 취재 거부 37
  20. 2009/05/23 노무현, 담배 한 대 피우고 가시지 16
  21. 2009/05/23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 전문 5
  22. 2009/05/20 황석영, "난 안 변했다" 동영상 2
  23. 2009/05/19 민중의소리, "경찰폭력 좌시할 수 없다" 7
  24. 2009/05/18 유시춘, '5.18광주민중항쟁' 그 숭고한 열흘 4
  25. 2009/05/17 댓글삭제와 IP차단,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14
  26. 2009/05/16 황석영, 문단에선 이미 변절자로 찍힌 사람 5
  27. 2009/05/15 참 나쁜 블로거 2, 도아의 소통 이야기 28
  28. 2009/05/14 황석영의 변절이라고? 17
  29. 2009/05/13 이명박, 그리고 자다 인나 삽질하는 키워들 22
  30. 2009/05/12 리드미, 미네르바 명예훼손 건 등에 대한 입장 1
어느 분이 댓글로 "조갑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주셨습니다. 자신은 '조갑제를 삻어한다'는 단서를 붙여서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글을 약간 정리하여 옮깁니다.


조갑제닷컴

조갑제닷컴 www.chogabje.com


조갑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구요? 그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인물에 대한 평가를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는 조갑제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특히 자신의 주관도 없고, 그 결과 당연히 주체성 혹은 정체성도 없이 시류에 휩쓸리고 다중에 영합하는 이즈음의 세태에서는 보기 드물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역사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자기 정체성은 역사의 발전을 추동하는 힘입니다. 굳이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도저도 아닌 주장이 역사를 만들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진중권 관련 글에서 나온 질문이니 진중권의 경우를 들어 말하자면, 이건 이를테면 조갑제가 있었기에 진중권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진중권이 조갑제에게 바치는 헌사,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익히 아시겠지만, 진중권은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책에 대한 비판을 담아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두 권의 책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보기에 이건 진중권이 조갑제에게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입니다. 게다가 내가 듣본 게 짧은 탓이겠지만, 이같은 일은, 다시말해 어떤 이의 책을 두 권 분량의 책에 담아 비판하고 나선 사례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헌사라도 대단한 헌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아는 조갑제는 매사가 반듯한 사람입니다. 다른 이의 말에 귀기울일 줄 알 뿐만 아니라, 아니다싶은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아니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언제나 분명하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기자와 논객이 갖춰야 할 자세로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도 별로 많지 않다고 봅니다. 마땅히 배워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한계도 있습니다. 예컨대, 며칠 전에 옮긴 김동길씨의 글 가운데 나오는, "조직이 없이 그토록 거대한 광장의 행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겠느냐?"는 식의 인식[footnote]나 혼자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또 하나의 정부”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존재한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그 정부보다 훨씬 유능하고 조직적이고 열성적인 또 하나의 정부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국민장이니 만큼 정부의 도움이 있기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정부의 능력만 가지고는 이렇게 완벽한 장례를 치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역시 보이지 않는 정부의 조직력이 크게 작동한 것이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김동길의 글 중에서>
-
http://blog2.mintong.org/596 [/footnote]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김동길씨도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이들이 살아온 사회에서는 그게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갑제의 문제는 조갑제가 아니라, 조갑제를 넘어서지 못하다는 데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을 보면 조갑제는 마치 '악의 화신'이나 되는 듯 합니다. 특이한 것은 이같은 경향이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조차도 조갑제 하면 마치 벌레 보듯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수구 꼴통'이라면서 말이지요. 자신은 그 정도까지 '수꼴'은 아니라는 얘기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런 치들이야말로 오히려 더 수구에 더 꼴통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어보입니다.

내가 보기에 지금 조갑제의 문제라고 떠벌이는 문제의 대부분은 실은 조갑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조갑제를 넘어서지 못 하고 있는 이들의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진중권이 10여년 전에 조갑제를 넘어서기 위해 그에게 두 권의 책을 써서 바쳤지만, 아직도 여전히 조갑제가 벽으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한마디로 지금 조갑제의 문제는 그만큼의 자기 목소리를 가진 기자 혹은 논객이 없다는 사실의 방증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조갑제는 우리 언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다루면서 '서거'라는 표현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을 한 바 있습니다. 거친 방식으로였기는 하지만, 그 취지에서만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바른 지적이었습니다. 대중이 조갑제를 노망 든 노인네 정도로 폄하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언론이 왜 조갑제를 불편해 하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자, 이 나라 언론 종사자들이 여전히 기자 조갑제를 넘어서지 못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조갑제의 문제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뚜렷한 자기 주관을 가진 기자 혹은 논객이 있다면 문제 자체가 되지 않을 문제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러분 가운데 혹시 조갑제를 넘어서는 기자 혹은 논객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 분이 있다면 좀 알려주세요. 나는 도무지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요.  



2009/05/31 21:16 2009/05/31 21:16
오늘 충격적인 영상을 두 개 봤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미 내전상태에 접어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영상들입니다.
 
 








<덧붙이는글> 이건 뭐.. 인민재판 수준이 아니고 그냥 막가파 수준이네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건 도대체 그 노인이 무슨 말을 했기에 저들이 저렇게 인간 말종에 가까운 반응을 내보인 걸까요? 혹시 아시는 분 있나요?
 
<덧2> 프리존뉴스의 김주년 기자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안 것까진 좋은데, 그 영상만으로 끝냈다면 훌륭했을 영상을 뒤쪽에 쓸데없는 영상을 덧붙여서 삼류 영상물로 만들어버렸군요. 게다가 편집 조작까지 한 영상이라니.. 지금이라도 두 개의 건을 분리하여 영상을 다시 만들면 충분히 가치있는 영상으로 남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덧2> 아무리 상대를 까고싶다고 해도 그렇지.. 뒤쪽에 붙은 영상은 아닙니다. 안습.. -_
/ 하민혁 2009/05/30 23:15

<덧4> 깐죽이님이 다른 영상을 링크로 알려주셨기에 추가합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2009/05/31 01:34 2009/05/31 01:34
1997년 2002년 대통령 후보 이회창과 2007년 대통령 후보 이명박.

객관적인 지표와 상황만을 두고 판단한다면 이회창은 대통령이 되었어야 하고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회창은 대통령이 되지 못 했고,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다.
 
왜일까? 여러가지 이설과 분석이 있지만, 내가 보는 이유는 딱 하나다.
이회창의 경우, 선거 캠프가 개판이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해괴한 글 하나가 떠돌고 있다. [고백] 나는 한나라당 부대변인이었다는 글이다.
 

딴지일보


딴지일보에 올라 있는 이 글의 요지는 자신이 전 한나라당의 미디어분과에서 한 자락 한 사람으로서 '이명박에게 충고를 하나 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가 찰 노릇이다. 어떤 기준에 비춰봐도 필승이던 대통령 후보로도 패한 주제에 선거에서 승리한 진영에 대고 충고를 하겠다니 하는 말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글은 당시 선거 캠프가 얼마나 개판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친구들이 선거 캠프에 포진하고 있었으니 어찌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겠느냐는 얘기다. 만일 이같은 친구를 캠프에 두고도 선거에서 이겼다면 그게 더 비정상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진중하시라. 그리고 누구한테 충고하겠다고 설레발치기 전에 우선 한쪽 구석에 두 손 들고 꿇앉아 딱 석달 열흘만 반성부터 먼저 하고 볼 일이다. 그게 주제에 걸맞는 행동일 터니. 



<덧붙이는글> '뭐가 뛰니 뭐도 뛴다'더라고, 시절이 하수상하니 이젠 별 해괴한 얘기가 다 고백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인터넷을 떠돌고 있네요. 이건 뭐.. 철 따라 이동하는 철새로 분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랄까.. 그냥 한마디로 개판 5분 전인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에효~
2009/05/30 20:04 2009/05/30 20:04
비통하다.
억울하고 분노스러웠을 순간들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참고 살아 그 억울함이 해소되고 업적이 평가되는 그런 좀 더 좋은 날들을 기다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진실로 수천억의 돈을 뇌물로 먹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전직 대통령들은 아직도 당당하게 살고 있는데 왜 좀 더 독하게 마음먹지 못하고 그렇게 허망한 삶을 마감했을까
죽음까지 결심한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는 우리로서는 안타깝기만 하다.

이해할 수 없다.
대통령 퇴임 후에 나라의 원로로서, 사회의 리더로서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말다니!  퇴임후에도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그런 대통령을 우리는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도대체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어떤 일이 있어났던가.

'노무현 대통령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박원순 변호사가 하고 있는 말이다.

박원순씨는 "도대체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어떤 일이 있어났던가"를 묻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니다. 노무현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말인데, 박씨와 같은 인식틀로는,
 
참여정부 내내 시행착오와 갈등이 수없이 빚어졌다. 뜻은 좋은데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정책도 적지 않았다. 지지세력이나 시민단체들마저 등을 돌리기도 하였다. 개혁은 혁명보다 더 힘들다고 했던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우리는 그래도 참여정부가 훨씬 나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퇴임 후 아름다운가게 명예점장을 맡으면 어떠냐고 공개제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향리 봉하마을에 돌아가 마을만들기에 집념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는 무상한 것, 새로이 권력을 잡은 측과 몇몇 언론들은 집요하게 그를 공격했고 괴롭혔다.

640만불의 돈을 받았다고 그가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엄격히 법적으로 보면 뇌물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노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아주 과거부터 막역한 친구이고 오랜 후원자여서 뇌물을 받는다는 의식을 별로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뇌물을 받으려고 했다면 왜 박연차 회장에게서만 받았겠는가. 돈을 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텐데. 수사하는 그 검찰, 그 검찰의 수사를 즐기고 있었던 여당, 그 배후의 현 정부, 그들은 노전대통령만큼 깨끗한가. 나는 언젠가 이 정부가 노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이번 자결사건으로 큰 부메랑을 맞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갔다.
슬프고 고통스런 일이다.
그 슬픔을 딛고 정의를 바라는 사람들은 살아남아서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하지 않는가.

죽었다 깨나도, '새로운 세상'은 열어갈 수 없다.
몇몇 그들만의 새로운 세상은 열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박원순

박원순 wonsoon.com

 
2009/05/30 17:22 2009/05/30 17:22
“잠자는 국민 깨워주고 떠난 임, 잊지 않을게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은 남녀노소 조문객들이 29일 새벽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북받치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있다.
| 김정근기자/경향신문


“마음 아프다, 가지말라”… 노란바다, 눈물바다
‘민주주의 성지’ 재확인한 서울광장
“놓아줄 수 없습니다” 서울역까지 가득 메운 시민들
운구차량 들어오자 장내 숙연…권 여사, DJ 손잡고 끝내 오열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40여만 시민들 ‘마지막 가는 길’ 뒤따르며 배웅
상록수…사랑으로… 盧 전대통령 상징곡들 울려퍼져
“시대의 새벽 길 홀로 간 당신, 벌써 보고싶어…”

‘잔인한 땅’에 눈물 뿌리고 이제 하늘로…
어록으로 본 노무현 전 대통령의 꿈과 정치
“바위같이 당신곁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마음 아프다, 가지말라”… 노란바다, 눈물바다


* 이 시각 현재 경향신문 주요 기사 모음입니다. 노 코멘트.
2009/05/30 12:55 2009/05/30 12:55
2009/05/30(토) -정권교체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395)

 
김동길

김동길 www.kimdonggill.com


자살로 생을 마감한 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민장은 가히 “세기의 장례식”이라고 할 만큼 역사에 남을 거창한 장례식이었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가 암살되어 화장으로 국장이 치르어졌을 때에도 우리나라의 이번 국민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중국의 모택동 주석이나 북의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도 2009년 5월 29일의 대한민국 국민장을 능가하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서울에서만 해도 40만~50만의 인파가 애도의 뜻을 품고 서울광장에, 그리고 수원 연화장으로 가는 연도에 운집하였다고 하니 전국적으로는 추모객의 수가 능히 1백만은 넘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황중계를 시청하다가 꺼버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TV 앞에 앉아 오후 시간을 몽땅 보냈습니다. 그리고 정말 놀랐습니다. 노란 모자, 노란 풍선, 서울광장은 완전히 황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노사모 회원이 전국적으로 몇 명이나 되는지 알 길이 없지만 장례식 준비만은 완벽하였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또 하나의 정부”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존재한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그 정부보다 훨씬 유능하고 조직적이고 열성적인 또 하나의 정부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국민장이니 만큼 정부의 도움이 있기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정부의 능력만 가지고는 이렇게 완벽한 장례를 치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역시 보이지 않는 정부의 조직력이 크게 작동한 것이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방송 3사가 총동원되어 노무현 씨를 하나의 “순교자”로 “희생양”으로 부각시키는 일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장례식이 끝난 뒤에는 그 어느 누구도 노무현 씨를 비판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한마디 하는 사람은 예외가 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노무현 씨는 “순교자”도 아니고 “희생양”도 아니고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다 누렸고, 저승으로 가는 길도 본인이 선택한 것일 뿐, 누구의 강요나 권고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2007년 대선을 통해 여당은 야당이 되고 야당은 여당이 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정부가 보이는 정부보다 훨씬 능력이 있다면, 이명박 후보를 전적으로 지지한 1천만은 낙동강의 오리알이 되는 겁니다. 왜 대통령이 되셔가지고 우리를 모두 이렇게 만드십니까. 속시원한 말이라도 한마디 들려주세요. 답답하여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김동길
http://www.kimdonggill.com/

<덧붙이는글> 광장을 회의하는 구시대는 이미 저물었는데, 광장의 새시대를 책임질 세력은 아직도 눈물 타령입니다. 이미 저문 구 시대가 여전히 광장의 주인인 양을 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2009/05/30 12:41 2009/05/30 12:41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

그리고 쓰러져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꽃피우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29일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한명숙 전 총리가 낭독한 조사의 전문이다.
2009/05/30 12:26 2009/05/30 12:26
글이 자꾸 삭제되고 있습니다. 퍼가주세요!

언론과 그때까지 알려진 사실을 가지고 추리했기 때문에 그때그때 상황이 다릅니다.
잘 판단해서 읽어주세요. (퍼온글입니다)  


2009.05.23 토 20:53
역시 나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군!
친필유서가 아니라 컴퓨터에 저장된 문서파일유서.
그것도 서거 당일날 몇시간 전에 작성.
내용은 급조한 것이 확연히 들어나도록 짧고,조잡한데 제목은 길기도 하지!
파일명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

영혼에 베인 습관은 변할 수 없는 것!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무리 인터넷을 좋아했어도 나이가 육십이 넘은 할아버지가 유서를 한글타자로 남겼다는건
월드컵 경기를 본 날 야구 꿈을 꿨다는 얘기만큼 독특하군!
내가 범죄심리학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죽기 바로 직전 유서를 남기는 자살자들은 99.9% 손목을 긋거나,목을 메지!
음독자살을 하거나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유서를 당일날 작성하지 않아!
왜냐하면 음독과 투신이란 방법에는 사전준비(약,장소)라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투신자살하는 사람들이 아무데나 가서 뛰어내리는 것 같지?
그건 나이아가라 폭포나 금문교 같이 물이 끌어당길 때의 얘기이고
사람은 점찍어 두었던 익숙한 장소로 걸어가게 되어 있어!
결국 음독과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사전에 계획했단 얘기이고 유서를 미리 작성해 놓는다는 뜻이지!
기네스북에 오른다면 가장 긴 유서제목이 되겠군!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렇게 모르나?
만약 진짜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이 자살하러 나가기 전에 급히 작성한 유서의 제목이라면
그 제목은 분명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였을거야!
유서제목이 신기하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바람을 대변해주는군!
정말 신기한 일이지!
유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썼는데 왜 유서제목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대변할까?
세상은 속여도 나는 못속이지!


2009.05.23 토 12:45
그자가 어떤 인생을 살았건,이유가 무엇이건,죽음으로 무엇을 말하고,이루려 했건 자살은 옳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자살이란 선택을 한 당사자가 전직 대통령이라면 그건 더욱 더 옳지 못한 행동인 것이다.
무슨 일이건 일어날 수 있으니 세상이다.
충격받을 일도 아니고,감싸고 이해해줄 일은 더더욱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진짜 자살을 했다면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으며,책임감이 결여된 비겁한 도피일 뿐이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발표를 믿지 않는다.
차분히 유서까지 남기고 준비된 자살을 할 사람이
조용히 집에서 죽을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을 뒤로 한 채
하필 단 한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뒷산으로 향했다는 얘기는 마치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어 바로 앞에 있는 물병뒤에 숨어있던 간장을 마셨다는 얘기처럼 비논리적이다.
물론 목이 마를 때에도 물대신 콜라나 우유를 선택할 수는 있다.
두명의 경호원을 대동했다거나 조용히 혼자 산에 올라가 뛰어 내렸다면 자살발표를 믿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일기가 경호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주장은 아니다.
내 머리가 지금보다 조금 나쁘다면 그렇게 의심하겠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동한 단 한명의 경호원] 이란 정의는 이번 사건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상상을 사전에 불식시킬 역 알리바이인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로 얼마전 헬기를 거부했다.
노무현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함께 죽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달전 유시민 전 장관을 만났다.
어떤 방향으로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불행을 예감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에서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랬다.
아침먹고 멀쩡히 출근했던 가장이 들어올 때는 시신이 되어 돌아오고,
어제 웃으며 안부 전화를 했던 아들이 오늘 사망했다는 전화가 걸려오던 시절이었다.
 
다시 역사가 되돌려지고 조만간 최루탄이 컴백하신단다.
그때처럼 의문의 죽음이 생겨나는 것도 전혀 이상할게 없다.
'노무현 죽이기' 를 하더니 진짜 죽인 것일까?
그런 귀여운 질문은 하지 말아라!
답은 나도 모른다 이니...
 
분명한건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끝까지 살아 남으려면 강해야 한다.
 
남한과 북한은 영원히 둘로 갈라져 둘중에 하나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만 할 운명인가 보다.
불행한 나라에 태어난 국민에게 불행을 헤쳐나갈 용기는 선택이 아닌 필연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인 것이다.


2009.05.24 일 16:08
역시나 의학적 정황들도 나의 주장을 뒷받침 해주네요!
올해 63세의 당신은 일명 자살바위라 일컬어지는 30미터 높이 70도 경사각의 암벽에서 추락했어요!
그곳은 30대인 내가 떨어진다 해도 즉사할만큼 위험한 장소이죠!
암벽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뛰어 내리지 않아요!
인간은 암벽을 보면 반사작용으로 주춤하게 되기 때문에
자살자는 무의식적으로 먼곳을 보면서 최대한 멀리 뛰어 내리죠!
그렇게 뛰어내려 바위에 닿는 1차 충격으로 뼈가 부서지면서 장기가 파열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의 직접 사인은 두개골 골절 등 두부의 손상 이예요!
즉 당신은 떨어져서 구른게 아니라 구르면서 떨어진 것이죠!
스스로 뛰어 내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 뒤에서 밀쳤다는 얘기예요!
당신은 분명 평소의 트레이드 마크대로 양팔을 위로 들고 손을 흔들다가
뒤에서 미는 충격으로 푸쉬업의 자세로 암벽을 짚으며 굴렀어요!
그 충격으로 양팔이 골절된 것이죠!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과정이 당신을 살게 했지요!
스스로 뛰어내렸다면 즉사했을텐데
누군가 뒤에서 밀어 굴러 떨어졌기 때문에 당신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암벽으로 부터 최대한 자신을 방어했죠!
경호원은 분명 거짓증언을 하는게 아니예요!
처음 떨어졌을때 당신은 분명 살아있었어요!
의식이 분명했고,경호원과의 대화도 가능했어요!
당신의 정확한 투신 시간은 23일 오전 6시 45분이었어요!
당신은 멀쩡했고,경호원은 당신을 살려야 한다는 의지가 분명했기에
경호원은 초인적인 일념으로 당신을 들쳐업고 달려 자동차를 이용해 30분만에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이동한 거예요!
여기까지가 1단계예요!
문제는 병원을 옮기는 과정이죠!
당신은 처음 도착한 세영병원에서 청와대에 보고를 한 직후 부산대 병원으로 옮겨졌어요!
23일 오전 7시 34분 까지 당신은 경호원 한명이 부축해 병원을 데려올 수 있을 만큼 멀쩡한 상태였어요!
김해의 세영병원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시골병원이 아니예요!
충분한 의료시설을 갖춘 현대식 병원이죠!
그런데 당신은 이상하게도 조금의 의논도 없이 부산대 병원으로 옮겨졌어요!
마치 그곳이 당신이 죽어야 할 장소인 것처럼...
결국 당신은 부산대병원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부산대 병원 도착 1시간만에 숨을 거두었죠!
정말 신기하죠?
젊은 사람이 실족을 해도 즉사를 할 만한 암벽에서 63세의 노인이 자살을 하려 뛰어 내렸는데
척추등 모든게 멀쩡해서 경호원 한명이 살릴려고 번개처럼 날라다 병원에 모셔다 놓았더니
죽지도 않았는데 청와대로 보고부터 하고 당신은 도토리 키재기같이 비슷한 병원으로
응급처치 기능도 없는 조그만 앰블런스에 실려 느릿느릿 옮겨져
마치 죽을 장소에 도착한 사람처럼 쓸쓸히 눈을 감았죠!
그 나이에 자살하려고 암벽에서 뛰어 내렸는데 어떻게 몇시간 동안이나 살아있었나요?
그래요! 당신은 옛날부터 초인이었으니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죠!
당신 죽으면서 어이가 없어 웃었군요!
요즘 대한민국에 쓸만한 조폭이 없어요!
특A급들은 다 연희동으로 갔거든요!
대통령씩이나 지냈으면서 당신은 왜 세상을 몰랐나요?
그들은 알고 있었는데
청와대를 나와 사저로 갔을 때는 사설경호부대를 운영해야 안전하다는 것을
경호원은 분명 진실만을 말하고 있지만 기억의 퍼즐조각들을 잃고 있어요!
선진국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당장 최면수사에 들어갈 겁니다.
당신의 죽음은 타살일 가능성이 90% 를 넘어요!
타살이 아니라 해도 이건 분명 의문사라고 봐야죠!
당신이 죽어서 누가 이득이냐구요?
그럼 당신이 살아있다면 누가 손해를 볼까요?
김해세영병원에서 양산부산대병원으로 옮겨지는 40분동안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건가요?
맘먹고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이 암벽에 머리를 부딪히면 절대 3시간이나 살아 있을 수 없어요!
그것도 그 자리에서 당장의 치료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말이죠!
풀밭에 떨어졌다 해도 피가 흥건해서 혈흔을 일부러 고생해 찾을 일도 없거니와
투신자살을 한 사람을 업고 병원으로 옮기면 옮긴 사람의 옷에 피가 가득 베이게 마련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대한민국을 위해 당신이 품고 있는 블랙박스를 보여주세요!
어떤 것이 먼저였습니까?
암벽에서 굴러 떨어져도 불굴의 의지로 살아있던 당신.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이 나중 아니었던가요?
아니면 머리를 둔기로 맞고 떨어진건가요?
두정부는 검도를 한 조폭들이 각목이나 쇠파이프를 휘두를때 많이 노리는 곳이죠!
암벽에서 구른 사람이 왜 하필 머리 위쪽 부분에 11cm 정도의 찢어진 상처를 남겼나요?
머리가 찢어지는건 각목으로 맞았을 때이죠!
먼저 때리고 암벽에서 굴리는건 조폭들에겐 이미 고전이 된 살해 방법입니다.


2009.05.24 일 05:41
후후후~ 왕거니가 하나 걸렸군!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문사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해줄 증거는 바로 경호원이 증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말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몽고인이 아닌 이상 300미터 밖의 사람을 보고 사람이 지나간다라 말하지는 않지!
산에는 나무가 있고,5월은 나뭇잎의 무성함이 절정에 달할 때.
아무리 높은 산정상에 서있다 하여도 사람을 보는 것은 바로 밑의 코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곧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 바로 아래쪽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았다는 뜻!

첫째 부엉이 바위의 구조는 뒷편은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한쪽면으로만 투신이 가능한 구조.
결국 그 얘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래를 보며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라고 말을 하면
경호원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방향을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자 여기선 두가지 상황이 성립되지!
먼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절벽 가까이로 걸어가면 직책상 요인보다 뒷편에 서있는 경호원은 직분상
"각하 위험합니다." 라고 만류하게 되고 (뛰어내리는 것이 불가능 해짐.)
다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경호원이 발걸음으로 이동없이 바로 뛰어 내릴 수 있는 위치까지 간 것이라면
이는 100% 경호과실인 것이지!
즉 한눈을 파는 사이 뛰어 내렸다는 증언은 전혀 말이 안된다는 것.(경호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뒷쪽에 서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기 때문)

둘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말한 다음 그 자리에 앉아 책한권을 읽고 뛰어 내린 것이 아니야!
경호원은 분명 바로 뛰어내렸다고 증언했지!
부엉이 바위의 높이는 30미터.
30미터 절벽위에서 성인남자가 떨어지는데 저기 지나간다던 그 사람이 그걸 몰랐을리가 없지!
봉화산이 서울 시내에 위치한 남산이었다면 저기 지나가던 그 사람은 겁많은 도시청년일 수도 있지!
무서운 생각에 그냥 도망갔을 수도 있어!
그러나 경남 김해의 가파른 암벽 및을 꼭두새벽부터 혼자 걸어가던 그 사람이 소심한 여고생일리는 없는 것!
30미터 절벽위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도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다는건 전혀 설득력이 없어!

정리하자면
한눈을 파는 사이 뛰어내렸다는 경호원의 증언은 100% 거짓이며,
이 경호원이 인생을 종칠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혼자서 노 전대통령을 수행하며 초긴장을 했을 텐데
그런 경호원이 달음박질 없이 바로 뛰어 내릴 수 있는 위치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면
그건 경호원이 노 전대통령을 죽였다는 얘기나 진배없는 것이라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목격자부터 찾는 것은 수사의 기본.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전직 대통령이 서거했는데
서거 직전 전직 대통령의 입으로 직접 언급한 '저기 지나가던 그 사람(목격자)은 왜 수소문해 찾지 않나?"

어째 일제시대부터 우매한 대한민국 국민들 쉽게 속여가며 권력을 유지해오다 보니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부 닭대가리로 보이던가?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나?
가끔은 돌연변이로 대한민국에 나같은 사람도 태어나는 것이거든
차라리 "저기 비행접시가 날아가네!" 라 말하고 경호원을 따돌렸다 주장해라!


2009.05.25 월 15:50
이놈들이 전직 대통령을 폭행 살해하고서 대국민 사기극을 꾸미고 있네!
그러나 트릭은 아무리 치밀해도 결국 깨어지게 마련이지!
김해 세영병원 손과장이 말한 세영병원의 도착시간은 오전 7시경.
경남지방경찰청이 24일 오전 2차 브리핑을 통해 밝힌 노 전 대통령의 투신시간은 오전 6시 45분.
양쪽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결국 거짓말은 경호과장이 하고 있는 것이지!
부엉이 바위 위에서 세영병원까지 단 20분만에 도착했다는 얘기인데
경호과장도 부엉이 바위에서 굴러 내려왔나?
부엉이 바위에서 내려오는 시간 + 노 전 대통령을 업고 차로 가는 시간 + 차로 세영병원으로 이동하는 시간 = 20분? 절대 불가능 하지!
노전대통령이 오전 7시 35분에 김해 세영병원을 출발해 양산 부산대 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8시 13분이야!
엠블런스에 싣고 도로를 달려가도 40분이 걸리는데
그 많은 일들을 겪으며,놀라서 손이 부들부들 떨려 사고가 안나면 다행인 상황에
부엉이 바위 위에서 세영병원까지 도착하는데 그 절반인 20분이 걸렸다고
니가 무슨 슈퍼부엉이냐? 아니면 본래부터 죽일 계획이라 심장이 평온했던 것이냐?
혹시 너도 고향이 봉하마을이라 세영병원 가는 길을 통달했던 것이냐?
아니면 범행전에 미리 동선 코스를 답사해놨던 것이냐?
봉하마을 택시기사가 가도 니보다는 느리겠다.
결국 답은 하나.
최종적으로 일을 마무리한 장소가 부엉이 바위 아래가 아닌 세영병원에서 가까운 장소였다는 뜻이지!

더 간이 오그라들게 만들어 줄께!
거기에 세영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과장과 노전대통령만 왔던 것이 아니라
경호실 차량에 비서진과 경호팀이 동승했다고 증언하고 있어!
이건 무엇을 증명할까?
이동시간이 플러스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사저를 나갈 때는 둘이서만 나갔는데 비서진과 경호팀이 동승해서 세영병원에 왔다는 말은
결국 이과장이 노전대통령을 싣고 사저에 들러 비서진과 경호팀을 태웠던지,
아니면 이과장이 무전을 해서 비서진과 경호팀이 사고장소로 왔다는 뜻이지!
어때? 부엉이 바위 꼭대기에서 세영병원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20분이 아니라
이 시간만 해도 20분은 걸리지!
결국 답은 하나.
틀린 그림을 찾았나?
그렇지 바로 그거지!
노전대통령과 이모과장은 차를 타고 나오지 않았어!
즉 이모과장이 무전을 해서 사람들을 불렀다는 뜻이지!
다음 과정을 볼까?
심장이 멈추도록 만들어 주지!

경남지방경찰청은 이렇게 발표했지!
"수행 경호과장이 사고 직후 무전 등으로 문모 비서관에게 연락했고 문 비서관으로부터 다시 연락받은 박모 비서관이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유서를 처음 발견했다."
유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동행한 이과장으로부터 무전을 받은 문 비서관에게 연락을 받은 사저의 박모비서관 이었어!
이거 완전한 그림이 나오잖아?
이과장은 현장에,박모 비서관은 사저에,그럼 문 비서관은 어디에 있었던 건데?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래서 이동시간이 빨랐던 것!)
그리고 노전대통령이 추락했다는 무전을 받고 노전대통령의 컴퓨터 바탕화면부터 확인한 박 비서관은 뭐하는 새낀데?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닌가?
세상에 어떤 상식있는 인간이 전직 대통령이 암벽에서 추락했다는 무전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부터 확인하나?
상식적으로 경호원이라면 추락했다는 무전을 받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거 아닌가?
방으로 들어가려면 권여사에게 먼저 알렸어야지!
처음부터 컴퓨터 조작하는게 임무가 아니라면 어떤 미친놈이 추락했다는 무전받고 노전대통령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부터 확인해?
이건 완전히 책을 나눈 조폭들이야!
현장(행동대원)조,운송대기조,마무리조.

다시 현장으로 이동해 볼까?
너희들은 한가지 사실을 간과했지!
거기엔 노전대통령을 진짜 지켜주려는 착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
경비3초소에 있던 순진한 전경 1명이 오전 6시 20분 경호상황실에 '현재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 있다'고 보고했어!
25분 전에 부엉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목격한 전경,
그리고 25분 전에 부엉이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을 보고받은 경호실 요원들이 모두
200미터 뒤 30미터 암벽에서 성인남자가 추락하는 것을 보지도,듣지도 못했다고?
거기 있는 사람들은 다 며느리 들인가?

세영병원으로 가보지!
세영병원에 도착했을 당시 노전대통령은 피범벅 이었어!
게다가 피가 많이 묻은 노전대통령의 상의 또한 발견됐지!
어머! 그런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노전대통령은 피범벅이 되어 세영병원에 실려오고,노전대통령의 피묻은 상의는 발견이 되었는데
어째 현장에서 노전대통령의 혈흔은 하루가 지나도록 발견을 못한거야!
아직까지도 어디서 얼마만큼의 혈흔이 발견되었다는 정통한 소식이 없네!
참 신기하기도 하지?
피범벅이 된 사람,피묻은 상의가 벗겨진 사람이 왜 현장엔 그토록 혈흔찾기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을까?
답은 하나.
노전대통령은 그곳에서 살해된게 아니었기 때문이지!

후후후~ 범인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줄 아는 놈이었지만 법의학 상식이 부족한 놈이었어!
암벽에서 추락을 해도 상의는 벗겨지지 않는 단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
멍청한 범인은 노전대통령이 이곳에서 굴렀다는 증거를 꾸미기 위해
상의와 등산화 한짝을 이용했지!
그런데 바보같은 놈이 상의의 위치를 잘못 잡은 거야!
상의는 낙하지점으로부터 11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어!
나무에도 걸리지 않았는데 상의가 벗겨져 11미터 밖으로 도망가 버리는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왜 11미터 일까?
답은 두개야!
하나는 부엉이 바위 위에서 상의를 던진 것이지!
둘은 다른 곳에서 급하게 그 지점에 상의를 갖다 놓느라고 아무데나 놔버린 것이지!

경찰은 상의가 이과장이 노전대통령을 업고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졌을 것이라 말했어!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결국 경찰도 추락하는 동안은 상의가 벗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인데
추락하는 동안에도 벗겨지지 않던 상의가 업고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져?
그렇다면 그것은 떨어진게 아니라 일부러 벗긴 것이지!
범인이 피해자의 옷을 벗기는 이유는 단하나.
피해자가 항상 품에 간직하고 다니던 물건을 노릴 때이지!

여태까지 내가 올렸던 모든 추론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사건을 대충대충 넘겨 빨리빨리 끝내기 위해 국민들을 속이려고 하지만
미리 서로 입을 맞춘 것이 아니고 사건의 진행동안 변수가 생겼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말이 어긋나고 있는게 분명해!
먼저 노전대통령을 수행한 경호과장의 진술은 100% 신빙성이 없으며
그에 따라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23일 오전 6시 45분에 뛰어 내렸다는 부분부터 다시 재고가 되어야 해!
일단 떨어진건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게 밀려 떨어진 것인지,아니면 위협을 피해 뛰어 내린 것인지도 분명치가 않아!
분명한건 단 한가지 사실 뿐이야!
노전대통령과 이모경호과장이 단둘이 사저를 나갔다는 것!
그게 산책이었는지,그 방향이 부엉이 바위였는지,둘이서 밖으로 나간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무 것도 결론을 내릴 수 없어!

개판.
수사법이 바뀌어야 해!
사건이 일어나면 지방경찰은 국과수가 올 때 까지 현장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일체의 출입을 금지 시켜야 해!
전직 대통령이 서거했는데 동네경찰이 수사를 한다는게 말이 되나?
정말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졌다면 사저의 경호원들은 바로 통제에 들어가야지!
23일 오전 6시 45분 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들락거리고 사건현장을 오갔나?
무개념.
그 자체가 이미 범행인거야!


2009.05.25 월 08:32
난 대한민국 경찰의 노력과 양심은 믿지만 실력은 인정할 수가 없어!
노력이고 양심이고 간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건 지능이고,실력인거야!
미국이나 영국의 수사팀이 와서 조사후 자살발표를 하기 전에는
내 홈피에서 만큼은 타살로 잠정 결론 내리겠다.

추리는 상상이 아니라 검증과 실험을 통한 과학적 인과론이야!
추론을 음모론이라 칭하는 무식한 나라는 미개한 후진국 한국이 유일하지!
내가 가진 최고의 의문점은
63세의 노인이 자살을 마음먹고 30미터 높이 70도 경사각의 암벽 위에서 뛰어 내렸는데
과연 3시간 동안이나 특별한 조치도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게 가능할만큼 살아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야! (그것도 사인이 두부손상인데 말이야)
지금 많은 네티즌들이 가장 의문을 갖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사람이 추락했으면 척추를 비롯 온몸의 뼈가 다 절단이 났을텐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경호원 혼자 업고 가서 승용차로 병원까지 데리고 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인데
그건 아주 간단한 문제야!
즉 척추도 온몸의 뼈도 멀쩡했다는 뜻이지!
추락해서 절단난 사람을 어떻게 혼자 업고 갔느냐? 가 아니라 멀쩡했으니 혼자 데리고 간 것이지!
여기선 두가지 결론이 성립되는 거야!
하나는 자살하려고 뛰어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고 몸을 보호해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은 처음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암벽에서 추락한게 아니라는 것이지!
봉화산은 경남 김해에 위치한 시골산이지만
부엉이 바위는 사저에서 20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고
알잖아? 당시 사저 주변에 얼마나 많은 기자들과 사람들이 24시간 눈을 부릅뜨고 특종거리와 볼거리를 노리고 있었는지
그런데 30미터 높이에서 먼지가 아닌 성인남자가 추락하는 것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어!
시골마을 고요한 아침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굴러 떨어져도 그 소리는 상당한 파장력을 소유하지!
사람은 자살을 한다 해도 긴 비명은 아니라도 충격으로 인한 단말마의 소리라도 내지르게 되어 있어!
아무도 보지 못했고,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
덧붙여 새로운 사실 하나가 나왔지!
권양숙 여사도 산행에 동행하려 했어!
분명 혼자 올라간 남편이 궁금해서 봉화산 쪽을 수시로 쳐다봤을 거야!
아니 일부러 쳐다보진 않았다 해도 신경이 봉화산 쪽으로 쏠려 있었겠지!
왜 암벽에서 떨어진 사람이 머리가 깨져야지 하필 정수리 부분에 찢어진 상처를 남기나?
궁금하면 머리통을 바위에 박아 보라고 과연 정수리가 찢어지나?
박은게 아니라 맞은 거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것은 어떤 분야로도 논리적인 설명이 안돼!
범죄 심리학적으로 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분명 몇주전부터 계속 우울한 기미를 보였다고들 증언했어!
그런데 유서를 자살하러 나가기 20분전에 남기나?
법의학적으로 살펴 볼까? 3백미터 암벽에서 추락해도 점퍼는 벗겨지지 않아!
점퍼가 벗겨지려면 팔을 벌려야 하는데 추락하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팔을 웅크린다고
성인남자가 떨어지는데 나뭇가지 정도에 걸릴 거 같나?
걸리더라도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점퍼가 찢어지지!
나무에 걸렸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았어야지!
나무에 걸려 살아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점퍼를 벗어 버리고 도망치는데 쫓아가서 각목으로 후려쳤다면 말이 되지!
지능이 모자라기 때문에 추론이 나오면 소설을 쓴다고 빈정대는 거야!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
이번 사건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그려 원래 계획대로 죽었어야 하는데 안죽었으니 어쩌겠나?
범인은 목표가 어긋나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후회가 밀려 오는거야!
죽일 사람이 멀쩡하니 최선을 다해 살리는 수 밖에
그런데 살아있던 사람이 진짜 죽었어! 언제?
청와대에 전화하고 병원으로 이동해서 도착하는 동안에
40분전엔 가망이 있어서 큰 병원으로 옮기는데
40분뒤엔 이미 심폐소생술도 못할만큼 저승사람이 되어 버리나?
누굴 바보로 아나?
그건 니들같은 닭대가리들이나 속아 넘어가는 것이고
죽을 사람이면 세영병원에서 죽게 내비두고 사저의 권양숙 여사한테 먼저 전화를 하는게 순서이고
옮겨서 살 사람이 40분만에 송장이 됐다는건 옮기는 40분동안 죽였다는 뜻이지!
처음부터 세영병원은 예정에 없던 돌발수였지!
암벽에서 추락해도 바로 죽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변수였으니까
원래 계획은 암벽에서 추락. 즉사하거나 의식이 없었다면 바로 부산대병원으로 가는 것이었지!
그러니까 니가 바보인 것이지!
청와대에 중간 보고는 왜 하나?
그러니까 니가 똥줄타는 아마추어인 거야!
봐라!
청와대에 보고를 하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완전히 서거한 다음에 하는 것이 정상이지!
그게 아니고 그토록 급하게 먼저 해야 했다면 떨어지자 마자 했어야지!
세영병원에 도착해서 전화를 했다는건 뭔가?
일이 틀어졌단 얘기 아닌가?
마지막으로 내가 여기다 싸인하나 해주지!
난 이모과장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제 3 의 인물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임무를 완수하면 니놈은 살 수 있을 것 같나?
니놈도 삼년안에 죽을테니 두고 보라고
그리고 집착해서 기다릴 필요도 없어!
내가 아무리 베플을 즐겨한다 해도 이런 내용을 공론화 시키지는 않으니까
중요한건 어떤 글이냐 하는 것이지,어디에 쓰면 어떠한가?
내가 쓴 글은 돌고 도는 동안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엔 들어갈 사람 귀에 다 들어가더라고


2009.05.25 월 03:54
많은 사람들이 고 안재환 씨의 누나를 욕했지만
난 안재환 씨의 누나와 타고난 성격이 비슷한 사람이기에 그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분이 동생의 불행과 의문의 죽음을 해결할 수 있기를 아직까지 응원하고 있다.

무기력하고 무지하며 가증스런 인간들.
그게 한국인들의 공통점이다.
국장? 꼴값떨고 있네!
자살한 전직 대통령이 무슨 명예가 있다고 국장을 치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자살로 끝나면 노무현의 명예는 없는 것이다.
노무현이 죽음으로 누가 이득을 보냐고?
노무현이 자살을 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노무현 자신이다.
국민들 가슴속에 영원히 측은하고,불쌍한 대통령으로 남는 것은 명예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분향소를 찾아가지만
그 눈물과 발걸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국민들이 흘렸던 그 눈물과 발걸음이 아닌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이 서거가 되고 노무현의 명예가 지켜지기 위해선 그의 죽음의 본질적 원인 자체가 격상 되어야지
장례형식 따위가 격상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명복은 무슨 얼어죽을
허구한 날 명복을 빌면 죽은 사람이 살아오나?
죽으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 눈물 흘리고,아쉬워 하고,명복 빌고 다 부질없고 가증스런 짓거리들이다.
진짜 애정은 그런게 아니다.
진짜 애정은 우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진짜 애정은 떠난 자의 영혼이 잘됨을 비는 것이 아니라 떠난 자의 이름이 잘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진짜 애정은 잊는 것이 아니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진짜 애정은 분향소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루트를 답사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먹으로 발로 심장으로 하는 것이지! 세치 혀로 하는게 아니다.
장난하나?
노무현이 담배 못피워 한맺힌 사람인가?
유시민이 대표로 한대 피게 했으면 됐지!
뭘 줄나라비를 서서 담뱃불을 붙여놓나?
한국인들은 그저 모든게 형식. 오직 같잖은 형식일 뿐이다.

모든 추측을 미루고서 라도 본래 경찰의 공식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다.
지금이야 공식발표가 나왔지만
이 나라는 어찌된게 경찰의 공식발표가 나오기도 전까지 사람이 죽기만 하면 무조건 다 자살이다.
야 이거 진짜 죽어도 한국에서는 죽지 말아야지!
나처럼 자살을 혐오하는 사람이 어느날 죽어도 이 나라에선 바로 자살로 종결 처리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절대 자살을 안할 사람들은 미리미리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죽으면 그건 절대 자살이 아니라고 알려두어라!
그래야 당신이 죽었을때 주변 사람들이 자살이 아님을 알거 아닌가?
이 나라에선 꿀먹은 벙어리처럼 살다간 어느날 억울하게 죽어도 당신은 분명 자살자로 처리된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노숙자가 죽어도 이토록 사건을 빠르게 종결하지는 않는다.
언제 제대로 된 수사라도 한번 해보았는가?
이건 완전히 "죽었다. 끝났다." 이다.
당연히 죽을 사람이 죽은 것처럼,이미 죽어있던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지지자들 마저 집단최면에 홀린 듯이 총체적 무지에 빠져 깊은 영혼의 웅덩이를 헤메고 있다.

무기력한거 착한거 아니다.
대가리 나쁜거 자랑 아니다.
남들하고 똑같이 사는거 올바르게 사는거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못된 새끼들,죽으면 무간지옥에 떨어질 새끼들이 바로 음모론을 펴지 말라는 놈들이다.
사이버수사대는 인터넷에서 [닥치고 명복이나 빌어주자] 는 놈들을 전부 잡아다가 조사를 해야 한다.
역사는 증명한다.
"대대로 입다무는 것들 치고 죄없는 놈 없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머리가 좋은 죄 뿐!
무식한 인간들이 내글을 이해 못한다고 해서 내글이 틀린 글이 되는 것은 아니요,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내글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3년 뒤에 이민갈 계획인가?
한나라당은 3년 뒤에 대통령 후보 내세우지 않을 작정인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부여당을 위해 전직 대통령의 죽음엔 한점 의혹도 없는 객관적 수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건 타살이 아니라도 의문사이다.
제대로 생각이 있는 사람들의 길을 막고 물어보라!
예순 넘은 우리 어머니도 노무현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 했다.
이 나라엔 젊어도 늙은 놈들,무기력하고 무식하고 착한척 하는 역겨운 위선자들로 가득차 있다.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인 범인이라면 인터넷에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닥치고 명복이나 빌어 줍시다."
닥치고 명복이나 빌어주자는 놈들 글과 내글은 이미 문장의 레벨 자체가 다르다.
사람들이 니놈보다 할일이 없어서 의문을 제기하겠는가?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대충 대충 좋은게 좋은거 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을 전부 쓸어내야 이 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걱정마라!
니가 죽었을 때는 닥치고 명복이나 빌어줄 테니...


2009.05.26 화 05:21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아마추어가 노전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제 무덤을 파고 있네!
천호선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25일 발표하기를
노전대통령이 서거 당일(23일) 정토원에 갔었다고 말을 했네!

대한민국엔 범죄심리학자가 단 한명도 없단 말인가?
이렇게 완벽한 증거가 나와도 그냥 자살로 처리하고 화장을 해?
봐라!
정토원이란 곳은 노전대통령이 뛰어 내렸다는 부엉이 바위에서 200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야!
그리고 노전대통령과 경호과장이 정토원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6시 30분.
그런데 내가 앞선 글에서 분명히 언급했었지!
경비3초소에 있던 전경 1명이 오전 6시 20분 경호상황실에 '현재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 있다'고 보고했다고
그렇다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자살하는 사람이 일단 부엉이 바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정토원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부엉이바위로 올라가서 뛰어내렸다고?
푸하하하~ 플로리다에서는 그렇게 증언하면 정신병동행이다.
자살하는 63세의 전직대통령이 혼자도 아니라 경호원을 대동하고 일단 부엉이 바위 위로 올라가서
전경에게 자신이 부엉이 바위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다시 200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정토원으로 내려가서 "저 자살하는거 맞습니다." 하고 흔적을 남겨주고
또 다시 200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부엉이 바위 위로 올라가서 뛰어 내렸다고?
천만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어!
첫째 자살자가 자살할 장소에 왔다가 그곳을 벗어나 다시 그곳을 찾아와 자살을 했다는건 범죄심리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얘기이고,
둘째 무슨 유격훈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몸도 안좋았다는 63세의 노인이 험한 산길을 25분안에 왕복했다는건 물리적으로 설명이 안돼!
봐라!
오전 6시 20분에 부엉이바위 -> 오전 6시 30분에 정토원 -> 오전 6시 45분에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컨디션도 안좋은 63세의 할아버지가 무슨 바쁘게 자살할 일이 있었나?
만약 진짜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까지 올라왔다 내려가 정토원에 들러 다시 부엉이 바위로 올라가자 말했다면
그순간 바보가 아닌 정상적인 경호원이라면 모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거야!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노전대통령을 그대로 절벽가까이 가도록 놔둔 것이라면 그 자체가 이미 중대한 경호과실이지!

이 트릭을 깨주지!
너희들은 언제나 한명이야!
대동한 경호원도 한명,부엉이 바위위에 있는 노전대통령을 목격한 전경도 한명.
내가 저번글에 언급한대로 노전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진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노전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 가지 않았어!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위에 가지 않았다면 경호원이 부엉이 바위에서 내려오는 시간은 없어지기 때문에
세영병원에 얼마나 빨리 도착했건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지!
6시45분에 투신을 했는데 세영병원 도착시간은 7시라는건 도저히 말이 안되지만
6시40분에 부엉이 바위 아래에서 폭행을 당했다면 세영병원 도착시간이 7시라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것이지!
처음 계획은 노전대통령을 부엉이 바위에서 밀어 버리는 것이었지!
그래서 뛰어내렸다는 정황을 만들기 위해 전경 한명이 목격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었어!
그런데 변수가 생겼어!
자신의 위험을 직감한 노전대통령이 갑자기 정토원으로 발걸음을 돌려버린거야!
확실한 공포가 엄습해 올 때 피해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지만
위험이 직감적으로 느껴질 때 피해자는 싸인을 남기는 법이지!
정토원은 노전대통령이 남긴 표식이야!
어떡하나? 따라가는 수 밖에!
그런데 거기서 부처님의 도움이 계셨지!
선진규 정토원장은 경호원과 눈이 마주치자 마자 이렇게 물었어!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이게 무슨 뜻인가?
사람이 정토원에 찾아오면 그 첫인사를 "무슨 일이 있으시냐?" 로 하는 원장이 세상에 어디 있나?
그만큼 무슨 일이 있어보였던거야!
그런데 재밌는건 선원장은 자살하려던 노전대통령을 보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던게 아니라
따라온 경호원과 눈을 마주친후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어!
왜 그랬을까? 경호원이 자살하려고 맘먹은 것도 아니었는데 경호원의 눈에서 뭘 느꼈길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을까?
그런데 여기서 경호원의 대답이 해답을 말해주지!
무슨 일이 있냐는 선원장의 질문에 경호원은 이렇게 대답했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게 상식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마 없겠지!
경호원의 정상적인 대답이라면 "네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였겠지!
아무 것도 아니다란 대답은 뭔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할 때
누가 갑자기 "너 뭐하냐?" 라고 물어오면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대답하는 것이지!
한마디로 사람은 상대방이 나에게 많은 말을 걸어오지 않기를 바랄 때,빨리 이 상황이 끝나주기를 바랄 때
바로 아무 것도 아니란 대답을 하게 되어 있는 거야!

어디까지 연결되고 누구까지 엮여있니?
24일 있었던 경찰의 브리핑에선 노전대통령이 정토원에 들렀다는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어!
경찰이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스스로 은폐한거니?
그건 아니었겠지!
그런데 왜 25일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발표가 나왔을까?
목격자인 정토원 원장님은 매수를 못했기 때문이지!
게다가 어떻게 할까 고민해보니 정토원에 들렀다고 발표를 하는게 자살의 당위성을 높여줄거라 착각했던거야!
그러나 너희들은 대한민국에도 나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
여기가 만약 미국이나 영국이었다면 뒤집어질 일이야!
한국에서 권력을 누리는걸 하늘에 감사하고 겸허하게들 살아라!
내가 왜 이런 글을 자꾸 올리냐고?
자존심이지!
내 머리에 대한 자존심.
난 내가 억울하게 죽는건 용서해도,바보같이 속아 넘어가는건 절대로 용서못해!
뭘 고개를 갸우뚱 거리니? 미련한 놈아!
나를 죽이는 남은 용서해도,속아 넘어가는 내 자신은 용서하지 못한다고...

2009.05.27 수 00:27
하하하~ 어떠니? 핏덩이들아^^
몸에 힘좀 있으니 사람 죽이는게 쉬워 보였지?
*만한 핏덩이들이 이 넓은 세상에 어떤 잘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깝치고 있네!
나원 같잖아서

내가 얘기했지?
위협을 직감한 노전대통령이 발길을 정토원으로 돌렸다고
거기서 니가 정토원장이랑 눈마주쳐서 버벅대는 사이에 노전대통령이 자살하러 부엉이 바위로 혼자간게 아니라
살기 위해 도망을 친 것이지!
놓쳐? 뭘 놓쳐?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작당을 한게 아니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전을 왜 치나?
노전대통령이 자살할 거란걸 미리 알고 있었어? 아니잖아!
니가 무전을 칠 그때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때 였어!
그런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무전을 왜쳐?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가잖아!
넌 깜짝놀라 무전을 쳤지?
왜 쳤을까?
바로 유서를 맡은 놈 때문이었지!
난 처음부터 왜 유서가 바탕화면에 떠 있었을까? 생각했어!
바로 이제 그 이유를 알게됐지!
사저에 남아있던 공범은 노전대통령의 컴퓨터가 있던 방에 두번을 들어간거야!
한번은 유서를 작성하러,그리고 또 한번은 놓쳤다는 무전을 받고 유서를 삭제하러
그런데 인기척이 들리자 미쳐 유서를 삭제못하고 급하게 컴퓨터도 못끈채 방을 나와버렸지!
무전의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
넌 형사가 아니라 경호원이야!
전직 대통령이 무슨 범죄자니?
니가 쫓아가서 뭔가를 해야할 입장이 아니라면 놓쳤다란 무전은 맞지가 않지!
폭행치사가 아니라면 노전대통령의 시신을 일본인 의사에게 정밀검사 하도록 맡겨봐!
한국은 독립할 지능이 안되는 나라.
난 일본인 만큼은 믿는다.
그래!
"놓쳤다", "보이지 않는다" 고 치자!
그리고 노전대통령이 널 따돌리고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했다고 치자!
그럼 너는 정말 용한 점쟁이로구나!
부엉이바위는 정토원 바로 옆에 있는 바위가 아니야!
아무리 봉화산이 뒷산이라도 거긴 서울이 아니지!
녹음이 우거진 5월의 시골산에서 200미터나 떨어진 부엉이바위 아래 노전대통령이 쓰러져 있을 줄 넌 도대체 어떻게 알았던 것이니?
내가 치명타를 날려 줄께!
너희들은 한놈이 아니었던 것이지!
도망치던 노전대통령이 부엉이 바위 아래에서 다른 놈과 마주쳤던 거야!
바로 등산객이 만났다던 혼자 거닐던 경호원은 니가 아니라 그놈이었지!
정토원에서 놓쳤다고 무전을 치던 니가 부엉이바위 아래 쓰러져 있던 노전대통령을 찾았다는건 말이 안돼!
넌 뒤에서 쫓아가고 한놈은 부엉이 바위 아래 숨어 대기하고 있었지!
왜? 부엉이 바위에서 밀어버리는게 애초 계획이었으니까 그놈이 거기 있었던건 본래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던거야!
만약 노전대통령이 정토원에 들렀다 도망치지 않았다면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셨겠지!
그런데 도착해야 할 시간에 도착을 안하니 궁금해서 숨어있다 나온 것이지!
그래서 등산객을 만나게 된거야!
너더러 사람들이 순간이동 했냐고 하더라!
어떻게 부엉이 바위에서 세영병원까지 20분만에 노전대통령을 옮기며 도착했는지
이젠 답이 나오잖아!
처음부터 부엉이 바위에서 내려올 일이 없었고,너흰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분명 세영병원에 도착했을때 너희들은 한명이 아니었다고 증언이 나왔지!
먼저 각목으로 두정부를 내리쳤니?
정신을 잃고 쓰러진 노전대통령의 양발을 붙잡고 배쪽으로 내리 눌렀니?
그래서 등산화를 양쪽다 벗겼다가 생각해보니 이상해서 한쪽은 다시 신겼니?
노전대통령이 도망치는 사이 메모라도 남겼을까봐 주머니를 뒤지려고 상의를 벗겨니?
직접사인은 두부손상,그리고 뼈들은 이곳저곳 부러졌는데 신기하게도 장이 파열됐다는 소견은 듣지 못했거든!
난 처음부터 의심을 했었지!
암벽에서 자살하려 한 63세의 노인이 어떻게 저렇게 오랫동안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으며,혈흔 찾기가 힘이 들었을까?
니가 한번 30미터 암벽에서 죽기로 마음먹고 뛰어내려 볼래?
니몸이 어떻게 되고 추락장소에 혈흔이 얼마나 남나?
그래서 니들은 아마추어.
폭행으로 추락사를 꾸미려니 대충 모양새는 유지했는데 장들 파열을 못시키고,뼈들을 분산시키지 못하고,피를 많이 뽑지 못했던거야!
하지만 의사들이 바보는 아니야!
언제 의사들이 제대로 된 정밀검사라도 할 여유가 있었니?
그대로 세영병원에 남아 있었다면 의사들도 의문을 제기했을 거야!
그런데 병원을 옮겼지!
왜?
세영병원은 애초에 목적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세영병원으로 갔을까?
엔딩타임 오전 7시 20분을 초과했기 때문이지!
원래 계획은 오전 6시 30분에 노전대통령을 부엉이바위에서 밀어버리고
곧장 양산부산대병원으로 가는 것이었지!
그런데 도망친 노전대통령 때문에 시간이 초과되니까 일단 세영병원으로 갔던 것이지!


2009/05/27 12:57 2009/05/27 12:57
많은 사람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어떻게 그 힘들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했냐고 묻곤 한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좀더 구체적으로 '공부를 어떤 식으로 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1975년 내가 제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당시는 물론이고, 20년이 거의 다된 지금까지도 내게 묻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칭찬도 반인 것 같고 호기심도 반인 것 같다. 그런데 그때마다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고 또한 조금은 숙스럽기도 해서였다. 그러나 혼자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고 흐뭇해진다. 남들보다 많이 힘든 상황에서 공부를 했고 시험에 합격해서 그런지, 내 인생을 되돌아볼 때 사법 고시에 합격했던 그 순간만큼 행복했고 성취감을 느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수험 잡지인 [고시계] 75년 7월호에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라는 제목으로 고시 합격기를 쓴 적이 있다. 이번에 책을 내기 위해 [고시계] 75년 7월호를 어렵게 구해 오랜 만에 내 합격기를 읽어보았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참으로 절망도 깊었고 일도 많았던 고시 공부 시절......

어릴 때 쓴 것이라 여기저기 어색한 데도 많고 유치하게 느껴지는 데도 있지만, 그 당시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하고 싶어 손보지 않고 그대로 싣는다. 그 동안 나의 고시 공부 시절에 대해 물어 보았던 분들께 만족스런 대답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무현 사법시험 합격기>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


1. 머리에

지나간 일은 언제나 아름답게만 보인다지요? 산꼭대기에서는 힘겹게 올라온 가파른 산길마저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듯이 말입니다. 또 승자의 과거는 그것이 자서전이든 타인의 작품이든 가끔 신화적으로 수식되어 있음을 봅니다. 사법시험의 합격, 이것이 긴 여정에서 하나의 중간 목적지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성취와 조그마한 승리로 평가될 수도 있기에, 막상 합격기라는 것을 쓰려 하니 자칫 어떤 승리감에 도취되거나 과거를 돌아보는 낭만적인 기분에 도취되어 힘겹고 괴로웠던 긴 수험 과정의 체험을 스스로 미화시켜 얘기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까 여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졸 합격자라는 다소 특이한 제 입장이 독학도들에게 어떤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둔한 솜씨나마 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억을 더듬고 그때의 생생한 감정들을 살려서 몇 자 쓰고자 합니다.

2. 동기-꿈을 키우던 시절

나는 경남 진영라는 읍에서 약 10리나 떨어진 산골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형님이 두 분으로, 큰형님은 부산 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를 준비하였으나, 본래 가난한 살림에 벅찬 대학 공부 때문에 가세는 더욱 기울어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쯤 끝내 응시도 해보지 못한 채 그마두고 말았다. 당시 나는 형님을 따라 마을 뒤에 있는 봉화사라는 절에 가서 그곳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형님 친구들의 법 이론이나 시국에 대한 토론을 자주 듣곤 했으며, 또 형님은 자신의 좌절에서 오는 울적한 심정을 털어놓기를 좋아했던 모양으로 가끔 상기된 어조로 나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물론 나는 그때의 얘기들이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았으나, 그들의 엄숙한 표정과 격한 어조의 토론은 만만한 젊음의 패기와 이상을, 그리고 격렬한 논쟁의 뒤에 주고받는 소탈한 웃음은 사나이들의 인간미와 호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느꼈고, 이것들이 고시 학도들의 속성이요 또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으로까지 생각했다. 결국 이런 분위기는 나에게 고시를 해보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살림은 더욱 기울어 작은 형님은 학업을 중단했다. 부모님의 노동 능력은 차츰 줄어갔고, 마침내 최후의 명줄로 남아 있던 조그만 과수원마져 빚에 쪼들려 처분해야 했다. 나는 3학년이 되면서 일찌감치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5급 공무원 시험을 거쳐 독학으로 고등고시에까지 밀고 나가 보겠다는 결심으로 옛날 형님께서 보시던 누렇게 바랜 [법제 대의]와 [헌법의 기초 이론(유진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는 일자리를 찾아 나갔던 형님께서 돌아와 내가 하는 꼴을 보고 크게 나무라시며 진학을 권하셨다. 나도 가정 사정을 들어 고집을 부려 보긴 했으나 끝내 강권에 못 이겨 부산 상고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예순이 넘으신 부모님들의 생활은 아무런 토지의 근거도 없이 자신들의 노동으로 해결하시도록 내버려 둔 채 작은 형님이 어렵고 힘든 직장을 전전하며 벌은 돈으로 내 숙식비를 부담해야 했으니, 대학 진학은 아예 엄두도 내어 보지도 못하고 취직 반에 들어갔다. 그래도 역시 막연하게나마 길러 오던 고시에의 꿈을 버릴 수는 없었던지 3학년 말 농협에 취직시험을 치른 후 발표도 나기 전에 65년도 11월호 [고시계]를 한 권 샀다.
고시의 냄새를 알기 위하여......

3. 출범, 그리고 표류

농협에의 낙방에 이어 개인 회사에 취직했으나 생각보다 급료가 박했고 근무 시간이 많았던 것 은 고시로 향한 출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야산 돌밭을 개간하여 심은 고구마와 영세민 취로 사업장에서 내주는 밀가루로 연명하시는 부모님들의 실망을 모른 체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한 달 반의 급료 6천원으로 몇 권의 책을 사고 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토담집을 손수 지어 '마옥당(磨玉堂)'이라 이름 붙인 후, '사법 및 행정 요원 예비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당시에는 학력 제한이 있었다). 책값을 벌겠다고 울산 한국비료 공장 건설 공사장에 막노동을 하러 갔다 가 이빨이 3개나 부러지고 턱이 찢어지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용케 11월에는 제7회 예시에 합격 하였다.

4개월 정도의 준비로 예시에 합격하는 행운과 함께 이제까지의 나의 처절한 투쟁은 막을 내렸 다. 나의 예시 합격에 자극받아 큰형님은 67년에, 작은 형님은 68년에 각각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7년에는 법률 서적을 살 형편이 못되어 예비 시험 과목을 새로 공부하고 있다가 68년 에는 군에 입대했다. 군에 있는 동안에도 공부를 해 보려고 애썼으나 영어 단어 하나 암기를 못 하고 3년을 표류하고 말았다.

4. 열풍에 돛을 달고 - 그리고 좌초

71년 제대를 하고 집에 오니 집안 사정은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4월부터 옛날의 '마옥당'을 수리하여 공부를 시작, 5월 2일에 3급 1차에 합격, 그리고 사법시험으로 전환, 처음 법률 책을 대하니 다소 흥분되기도 했으나 과연 이 어려운 것을 해낼 수 있을지 더럭 겁부터 났다. 그러나 소설을 읽듯이 마구 읽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겉만 슬슬 핥으니 그럴 수밖에……. 전과목을 무질서하게 읽었다. 행정법과 상법이 좀 어려운 듯했다. 민법을 모르니 그럴 수 밖에……. 소송법은 전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실체법을 전혀 모르니 그럴 수밖에……. 4개월에 걸쳐 오리무중을 헤매면서 전 과목 3회독을 마쳤다.

「고시계」를 66년도부터 소급해서 샀다, 그러나 합격기 말고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 동안의 체험과 「고시계」합격기에서 읽은 것을 정리하여 얻은 것은 책을 읽는 순서 정도였다. 이리하여 민법을 먼저 읽고 상법과 행정법에 들어가고 실체법을 먼저 읽고 소송법에 들어간다는 순서를 정하여 9월부터 시작했다. 새로 읽으니 과거의 3회독은 간 곳 없고 전혀 새로 읽는 기분이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다시 어려워졌다. 그러던 중 10월에 14회 공고가 났다. 외면하려 했으나 자꾸만 들떴고 마침내는 고시 사상 최단기 기록을 목표로 하여 무작정 덤볐다. 문제집을 샀다. 1차의 합격은 나의 이러한 만용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젠 문제집마저도 내 나름대로 밑줄을 긋고 그 부분만 골라 읽었다. 8개월 정도의 준비로 2차 시험에 응했다.

시험장에서 고향의 중학교 후배를 만났다. 사법시험 준비는 나보다 훨씬 선배였다. 나의 공부 기간을 듣고는 "전 과목을 한 번 다 보지도 못했겠네요?" 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자신이 무시당하는 기분에 저으기 분개하면서 우습게 받아 넘겼다. "두고 보라지……."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 막강한 뱃심이었다. 이런 뱃심으로 시험에 응했다. 기막히게 더 잘 썼다. 내가아는 건 다 썼고 또 아는 건 그 뿐이었으며 집에 와서 책을 대조해 보지도 않았으니, 기막히게 잘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점수는 50점 얼마였다.

뒤에 읽어보니 문제집에 밑줄을 그어 두었던 부분이 모두 엉터리였다. 다른 색깔로 새로 밑줄을 고쳐야 할 형편이었다.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응시자를 젖히고(?) 과락 없이 300명선 안에 들어갔으니 다음에는 틀림없을 거라고 또 한 번 낙관했다.

그러나 발표 후 5~6개월을 이유 없이 허송했다. 제대 후 공부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 게 마음을 뺏기기 시작하여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열을 올리게 되고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 시험 직전에야 겨우 처녀의 마음을 함락시키고는 안도했는데, 이제 그녀 가 결혼 적령을 넘었다는 사실과 고시와 연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중론 사이에서 그녀와 나는 고 민의 연쇄반응을 일으켰고, 또 이틀이 멀다 하고 만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엇는 애정의 열도에 비 례하여 공부를 위한 시간에의 집착이 강하여 심리적 갈등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월에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장유암이라는 절에 들어갔다. 국사의 추가로 부담이 늘었지만 시험이 연기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 '수석 합격'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73년 1월에는 예년의 시험 대신에 그녀와 결혼했고 5월에는 아들도 낳았으나 나는 여전히 절에서 계속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 그런데…… 글쎄 정말 이럴 수가! 그렇게 끔찍이도 나를 아껴주시며 자신의 못 다한 소망을 나에게 걸어 꿈을 키워 주시던 큰형님이 5월 14일 교통사고로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리셨다. 한 줌 잿가루로 화해 버린 형님의 유해를 고향에 묻고 절로 올라 올 때는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이제부터 전혀 공부도 되지 않았다. 단지 타성에 의하여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과 고시와 출세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결론은 하나, 형님의 꿈 그리고 나의 꿈, 어떻든 고시는 필연적이었다. 15회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40여일 뿐,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책을 읽기만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며 답답해지는 알지 못할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시험을 한 달 앞두고 보따리를 싸들고 집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아직 산고가 풀리지 않아 부자유스러운 아내와 핏덩이 신걸이,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비탄……. 공부가 될 리 없으니 병은 점점 더해지고……. 수석 합격이라는 화려한 표어와는 달리 응시조차 포기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의 시선이 두려워 마지 못해 상경하였으나, 시험 첫 날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에 무엇이 치밀어 올라 우유와 계란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래도 기를 쓰고 책을 볼라치면 몸에서 식은 땀이 배어 나왔다. 「고시계」의 통계란에 따르면 결과는 90위 정도, 정리만 잘하면…… 하는 자신을 얻은 셈이었다.

5. 새로운 좌표 - 직업 의식

그러나 좀 쉬어야 했다. 책을 잡기만 하면 예의 증세가 나를 괴롭혔다. 고시를 그만둘까도 싶었다.
학교 성적이 우수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고시를 해야 할 필연적 이유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도 되었고, 법을 공부하면서 차츰 정의의 이념을 배워 가는 동안 '고시=권력=출세'라는 과 거에 내가 생각했던 등식이 우스운 것임을 느끼게 될 무렵 형님의 뜻 아닌 타계는 예시 과목의 철학 개론을 공부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해 오던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맹목적 출세주의와 '그 수단으로서의 고시'라는 과거의 생각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상고를 졸업한지 너무 오래되어 새로운 진로를 찾기는 어렵고 하여 고시를 그만두지는 못했다. 다만 이제는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배수의 진은 거두어 버리고, 하나의 직업인이 자기의 생각에 충실히 종사하듯이 고시 공부도 평범한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려 했다. '수석 합격'이라는 표어 대신에 '천직=소명'이라 써 붙이고, 숙소를 마옥당에서 집으로 철수하여 직장에 출퇴근하는 기분으로 낮에는 마옥당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집에 와서 여유가 있을 때만 공부하기로 하였다.

아기가 울면 달래기도 하고 기저귀도 갈아 채우고 밤이 늦도록 아내와 정담을 나누며 잠을 덜 자 면 이튿날 낮잠을 잤다. 그러나 가슴과 목의 증세는 쉽게 낫질 않아 16회 시험까지는 부담 없이 쉬었다. 16회 시험도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응시한 정도였고 성적은 15회보다 내려 130위 안팎으로 생각되었다. 17회 준비 1년간은 정말 순조로웠다. 절에 있을 때 만들었던 독서대의 실용 신안 특허 출원 관계로 9-10월에 조금 쉰 것 말고는 가금 아내와의 대판으로 선풍기 목이 부러지거나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활극이 연출되기도 하는 가운데에도 예전과 같이 재미있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10월 하순부터는 풀었던 긴장을 바짝 조여 이때부터는 아내가 들 건너 마옥당까지 점심을 날라다 주었고 잠은 여전히 집에서 잤으나 신걸이가 잠들기 전에는 우리 방에 못 오게 하고 책을 보았다.

그러나 17회 때에도 역시 정리가 다 되지는 않았다, 단지 다른 어느 때보다 정리 기간이 착실했으니 훨씬 낫겠지…….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신문 기자들이 수석 합격자 인터뷰하러 올테니 당신도 피력할 소감 한 마디 준비해 두지 그래."하고 허풍을 쳤다.

건강은 좋았고 시험은 순조로웠다. 집에 와서도 역시 출발 전의 호언장담을 되풀이했다. 3월 27 일 아침 먹고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진작부터 낮잠에 들어갔다. 꿈결에 "무현아! 무현 아!"하는 친구의 떨리는 목소리, 그도 뒷말을 잇지 못했고 더 들을 필요도 없이 아내는 내 무릎 에 엎드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형님! 지하에서도 신문을 보십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형님 생각에 자꾸만 우십니다."

6. 더하고 싶은 이야기

공부 방법, 책의 선택, 공부 장소, 독서 방법 등에 관한 문제는 각각 제 것이겠지요. 그래도 일 반론이 있다면 이미 많은 선배님들의 합격기가 말한 것과 나도 같습니다. 그래서 제 특이한 입장에 관한 것과 또 제가 따로 하고 싶은 얘기만 골라서 제 경험을 예로 들어 쓰렵니다. 다만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얘기하는 것은 객관성을 잃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마는, 어느 정도 참고는 되리라 믿습니다.

1) 독학에 대하여

응시자 중에 4년제는 물론 초급대학에도 안 간 사람들만을 독학도로 계산해도 그 수는 600명을 넘는데, 이 수는 서울대 출신 응시자 800명에 거의 육박하는 수임에도 합격자 수는 수년만에 하 나씩 나올 뿐으로 도저히 비교가 안된다. 이런 점을 보면 대학교에는 꼭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주로 경제 사정과 연령이 문제인 것 같으나, 경제 문제라면 요즘 일부 사립 대학에서 고시반을 편성하여 학비는 물론 숙식 일체까지 밀어 준다고 하니 오히려 독학보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가벼 울 것이다. 연령 문제도 생각 나름이 아닐까?

2) 그래도 구태여 독학을 하겠다면 독학도들의 고시 합격률이 지극히 저조한데 반하여 대학 출신자 중에는 법대 출신이 아니고도 고시에 합격하는 사람이 많고 17회에는 수석 합격자가 공대 출신이다. 이러한 결과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연유하는 것이겠으나 나는 이 점을 대학에서 얻게 되는 일반 교양 과정의 지식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과거 예비 고시에 합격한 후에도 법서를 살 형편이 못되어 군에 입대하기까지 1년간을 예시 과목의 책을 그대로 읽었고 이것이 제대 후 법서를 공부할 때 상당한 도움을 준 것 같았다. 이런 점에서 학력 제한이 철폐된 오늘의 제도보다 과거의 예비 시험 제도가 보다 합리적인 제도가 아닐까?

흔히 독학도들은 소위 공부 방법이나 수험 정보, 고시 기술론, 고시 분위기 등에 생소함을 걱정하게 되나 그런 점은 고시 잡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수험 기간 중 많은 사람들과 많은 얘기들을 나누어 보았으나, 수험 잡지의 합격기나 좌담회, 통계 기타 안내편에 나오는 이상의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3) 병역 문제

군에서 공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어차피 가야 한다면 일찍 갔다 오는 것이 좋을 것이 다. 나는 현역 복무 중 가는 세월을 한없이 초조하게 생각했으나, 마치고 나니 부담이 없어 좋았고 또 졸병 생활 자체가 하나의 수업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수험 과정 중에 필요했던 끈기 있는 자세는 군에서 몸에 익힌 바 큰 것이었다.

4) 연애와 결혼

처음 8개월에 걸친 일방적 구애 작전은 시간과 정력의 손실이 너무 컸다. 그러나 일단 결혼한 후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아내의 세심한 배려는 말할 것도 없고 점심을 가지고 올 때면 언제나 따라오는 개구장이 신걸이의 재롱은 식사시간을 즐겁게 해 주었다. 붉은 낙조를 바라보며 집 에 건너오면 또 반겨 주는 신걸이의 고사리 손이 하루의 긴장과 피로를 깨끗이 잊게 해 주어, 나는 침체기를 몰랐고 따로 휴식이나 기분 전환 거리가 필요 없었다. 애타는 애인들 있으면 결혼들 합시다.

5) 건강

절대적 조건임은 두말 할 것 없고 다만 공부로 오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보다 초조, 불안 등의 심리적 파탄에서 오는 손실이 훨씬 더 심각하고 장기적인 것이다.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생각이나 출세에의 지나친 집착, '최단기' '수석합격' 등의 욕심은 사람을 견딜 수 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하나의 직업인이 성실하게 직장에 임하듯 수험 생활에 임했더니 장기에 걸쳐 장소를 옮기지도 않고 공백 기간도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바꾸고도 곧잘 대성하더라. 일정시까지 안되면 직업을 바꾸면 그만이다. 여하튼 다소간의 긴장은 필요하겠으나 지나친 긴장 불안 초조는 금물이다.

또 며칠을 허송했다 하여 갑자기 초조해지고 그를 보상하겠다고 급하게 열을 올리고 무리를 하는 것은 잇달아서 또다시 며칠의 침체와 시간의 낭비를 강요하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다. 지나간 시간은 아무리 아까워도 깨끗이 잊는 것이 좋다. 장기전에서의 며칠의 허송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나는 최종 정리 기간에도 부부 관계는 억지로 금욕하지는 않았다.

여하튼 나는 이런 느슨한 자세로 공부했다. 그러나 결코 남보다 노력을 덜하지는 않았다. 보통 10시간은 넘게 공부했고 일단 책상에 앉으면 무서운 집중력을 구사했다. 머리가 혼란해지고 잡념이 생길 때에는 책을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책을 떠나면 고시는 깨끗이 잊었다. 이런 느슨하면서도 투철한 자세는 확고한 직업관에서 왔다고 생각되지만, 또 합격에의 신념으로 보완될 때 더욱 안정적이라 생각된다.

2009/05/26 21:59 2009/05/26 21:59
우리 사회는 죽은 자를 지나치게 존중하는 사회다. 김선일씨 사건은 대표적인 경우가 아니었던가 싶다.
<중략>
유명인들의 자살 사건에서도 같은 일은 반복된다. 2004년에는 업체로부터 억대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돼 있던 안상영 부산시장이 구치소에서 자살을 선택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친형에게 인사 청탁 대가로 수천만원을 건넨 혐의를 받던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비리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 박태영 전남지사도 역시 자살을 선택했다.

이분들에게 물론 억울한 사연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법정에서 진실을 가려야 마땅한 일이었는데 이들은 자신이 유죄가 입증되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안 시장의 경우에도 유죄가 되었다면 수감되는 것은 물론이고, 연금 혜택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모든 것이 무죄에 입각해서 처리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장례식은 시장(市葬)으로 치러졌다.

죽음은 때로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한나라당은 안 시장의 죽음을 ‘권력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했고 ‘현 정권이 안 시장을 회유해 이를 거부하다 자살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쳤다. 가족들조차 한나라당의 주장이 ‘소설에 불과하다’고 부인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피해자로 미화시켰다. 곧이어 치러진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여유 있게 승리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죽음의 미화에 언론사들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 누가 되었건 이들이 죽음을 선택한 뒤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억울하다고 말했다’느니, ‘오죽했으면 자살했겠느냐’는 식의 동정론에 입각하여 보도하기 때문에 원래 사건의 본질은 쉽게 사라지고 만다. <중략>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처벌과 비난까지도 감수하고 반성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만약 부당한 혐의와 비난을 받고 있다면 그에 맞서서 싸우는 용기 또한 필요로 한다.

언론에서는 사회적 명사든 연예인이든 죽은 자라고 해서 모든 책임을 면해주고 미화하는 일은 이제 삼갔으면 한다. 자살이 자신에 대한 모든 비난과 억울함을 해결해 주는 가장 손쉬운 길처럼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후략>
 
서홍관/국립암센터 의사·시인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195793.html
2009/05/26 07:08 2009/05/26 07:08
사회 저명인사들이 너무나 쉽게 목숨을 끊고 있다.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등에 이어 또다시 박태영 전남지사가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저명인사들의 이런 자살행렬을 정치·사회적 격변기에 일어날 수 있는 돌출사건 정도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양상이 너무나 심각하다. 자살에는 강한 전염성이 있는데, 저명인사들의 자살이 일종의 유행병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우려까지 들 정도다.

저명인사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주로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데 대한 절망감이나 억울함 때문으로 분석된다. 박 지사의 죽음 역시 검찰수사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 방식만이 유일한 해법인가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스스로 죽을 용기가 있다면 왜 꿋꿋이 살아 견뎌내지 못하느냐’는 너무나 당연한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죄가 없다면 살아서 끝까지 결백을 밝혀내야 하고, 만약 죄가 있다면 떳떳이 죄값을 치르고 반성하면 될 게 아니냐는 게 누구나 갖는 소박한 생각이다.


한겨레신문

한겨레신문 2009. 5. 25.


저명인사들의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부작용마저 수반한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가뜩이나 자살빈도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저런 사람들도 죽는데’라는 식의 충동을 불어넣기 쉽다. 실제로 자살예방센터 등에는 이런 내용의 전화 상담이 늘고 있다고 한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병든 사회다. 저명인사들의 잇따른 자살은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상층부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동안 우리 사회는 자살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분위기가 은근히 있었고, 심지어 이들의 자살을 미화하고 정치적 공방의 소재로까지 삼았다. 이제 이런 ‘자살 방조’ 행위가 용납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더 이상 불행한 자살행렬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겨레/사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 ··· 00057031


2009/05/25 23:20 2009/05/25 23:20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몰고 온 파장이 만만치가 않다. 특히 블로고스피어에서 만나게 되는 일부 지지자들의 모습은 흡사 무슨 신흥종교의 부흥성회를 보는 것처럼이나 광적이다.

일부 언론은 네티즌의 이같은 광기를 아예 부추기고 있는 모습이다. "자살은 질병이다"며 "자살은 안 된다"고 부르대던 바로 그 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애도하는 마음으로 추모는 하되, 그러나 노통의 자살을 지나치게 미화하지는 않을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살이 결코 미화할 일은 아니어서다.


오연호

오연호,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노무현을 죽였다


시사인

무슨 공모씩이나를 한다는 <시사인> 광고 화면 VS 슬픔을 이용하여 장사하지 않겠습니다


<덧붙이는글>
'자살'을 미화하다 못해, 이젠 아예 '타살'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오연호,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노무현을 죽였다 <오마이뉴스>" 그러나 '자살'을 '타살'로 몰아가는 이같은 주장은 한마디로 '궤변'이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군이 신문 때려치고 아예 정치판으로 나설 모냥이다. 굳이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2009/05/25 22:44 2009/05/25 22:44

사람이 죽었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여·야의 모든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어떤 “은퇴” 정치인은 자신의 반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고 비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청와대도 슬픔에 잠겼다고 들었습니다. 가게를 지키고 앉았던 사람들도, 길을 가던 사람들도 모두 슬픔을 금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의 임금님이, 예컨대 고종황제께서 붕어하셨을 때에도, 그 시대에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백성이 이렇게까지 슬퍼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현직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생각이 부족한 어느 한 측근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궁정동의 그 때 그 참사는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이기는 했지만 오늘과 같은 광경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김동길
그런데 이 나라의 모든 언론매체가 왜 이렇게도 야단법석입니까.
노무현 씨가 산에서 투신자살했기 때문입니까. 그러나 설마 국민에게 자살을 미화시키거나 권장하는 뜻은 아니겠지요.

내가 4월에 띠운 홈페이지 어느 칼럼에서 “노무현 씨는 감옥에 가거나 자살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하여 이 노인을 매도하며, 마치 내가 노 씨 자살의 방조자인 것처럼 죽이고 싶어 하는 “노사모님들”의 거센 항의의 글이 쇄도하여 나의 홈페이지는 한참 다운이 되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나는 내 글을 써서 매일 올리기만 하지 내 글에 대한 댓글이 천이건 만이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하도 험하게들 나오니까 내 주변의 가까운 이들은 “테러를 당할 우려가 있으니 혼자서는 절대 집을 나가지 말고, 밤에는 더욱이 외출 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에 내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늙어서 반드시 요를 깔고 누워서 앓다가 죽어야 한다는 법이 있나. 테러 맞아 죽으면 영광이지.” 아직은 단 한 번도 테러를 맞은 일이 없지만 앞으로도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다가 폭도들의 손에 매 맞아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위기에 처해도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이가 몇인데요. 여든 둘입니다.

사법부는 노 씨에 대한 모든 수사는 이것으로 종결한다고 하니 이건 또 어찌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어렵게 된 검찰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려는 속셈입니까. 이 나라에는 법은 없고, 있는 것은 감정과 동정뿐입니까. “검찰이 노무현을 잡았다.” - 이렇게 몰고 가고 싶은 자들이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 노무현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뿐입니다. 이 비극의 책임은 노 씨 자신에게 있습니다.

김동길
http://www.kimdonggill.com/

2009/05/25 21:34 2009/05/25 21:34

자살의 이해
"이 책에서 자살은 예방하고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서 다루어진다.

자살의 역사와 정의, 자살자들의 심리와 정신병리, 자살의 방법과 장소, 유전적 요인, 약물 및 사회·제도적 차원의 예방책 등이 두루 소개된다.

‘베르테르 효과’라 불리기도 하는 자살의 사회적 전염 현상과 그 과정에서 언론보도가 맡는 악역에 대해 경고하는 대목은 특히 흥미롭다.

반복적이고 과장된 보도, 자극적인 사진을 곁들인 선정적인 보도, 자살 방법의 자세한 묘사, 자살자를 미화하는 보도 등이 그에 해당한다.

카드 빚에 치인 서민들과 차별받는 비정규직 노동자, 명예와 권력을 잃은 고위층 인사들까지 자살이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 ··· 00060434 (새 창으로 열기)

2009/05/25 20:42 2009/05/25 20:42

세계보건기구가 자살 보도 기준을 제정해 신중한 보도를 권고하는 이유는 언론 보도의 이런 파급효과 때문이다. 한국에선 한국기자협회, 한국자살예방협회, 보건복지부가 공동으로 2004년 7월 자살 보도 지침을 채택해 각 언론사에 준수를 권고했다. 정몽헌·안상영·남상국·박태영씨 등 유명인의 자살이 잇따른 직후였다.

보도지침 전문은 “자살 의도를 가진 사람이 모두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아니며, 자살 보도가 그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어 다음의 사항을 권고했다.

자살자와 유족의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유명인이라도 장소와 방법, 자세한 경위를 묘사해선 안 된다. 불충분한 정보로 자살 동기를 판단해선 안 되며, 자살을 미화하거나 고통의 해결 방법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고, 속보 및 특종 경쟁의 수단으로 다뤄선 안 된다.

세계보건기구는 여기에, 자살자 주변 사람이 겪을 고통과 자살 시도의 후유증에 대해 언급하라는 요청까지 덧붙였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4373.html



» 한겨레신문 / 곽병찬 논설위원
2009/05/25 20:24 2009/05/25 20:24
한국예술종합학교 총학생회와 학생비상대책위원회 공동성명


1. 한예종 사태 개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 산하 특수대학인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는 매 2, 3년에 한 차례 10일 안팎의 정기감사를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2009년 3월 18일 시작된 종합감사는 이례적으로 40여일 이상 강도 높게 진행되었고, 문화부는 결국 지난 5월 18일(월) 감사결과를 통보해 황지우 총장과 일부 교수들에 대한 중징계 및 이론과 축소/개선, 서사창작과 폐지, U-AT 통섭교육 중지 등 12건의 주의, 개선, 징계 처분을 요구해 왔습니다. 이튿날인 19일 황지우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문화부가 제기한 중징계 사유들에 대해 해명하고 “유례없는 융단폭격식 표적감사였으며, 감사 결과의 상당수가 대학 교육의 자율성과 본교의 교권에 대한 침해 소지가 있어 보인다. 본교에 몰려 있는 수압을 덜어줘야 한다”며 총장직 사퇴를 선언했습니다.

한예종 학내 구성원들은 이번 감사결과와 일부 언론의 논평을 종합했을 때, 한예종의 근간을 흔들려는 모종의 계획이 진행 중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문화계 뉴라이트 인사들이 결집한 ‘(사)문화미래포럼’은 오는 27일 심포지움을 열어 한예종 개혁방안 및 설치령 개정안을 논의하겠다고 공언합니다. 그들은 소위 ‘좌파’로 분류된 교수들을 축출하고 음악학, 연극학, 영상이론, 무용이론, 미술이론, 한국예술, 예술경영, 서사창작 등 이론과들을 단계적으로 축소/폐지시킨 후, 최종적으로는 한예종을 전면 해체할 것을 주장해 왔습니다. 현 정부와의 친연성을 고려하면, 문화부 감사결과가 바로 문화미래포럼의 시나리오가 구체화되는 첫 신호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2. 한예종 학생비대위 결성과정

황지우 총장 사퇴 표명 직후, 감사결과가 미칠 파장이 축소/폐지 대상으로 지목된 이론과와 협동과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예종 존립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각 과별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가 자발적으로 구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감사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학교를 지키자는 성명서 발표가 이어지는 가운데, 영상이론과 비대위가 전체 학생을 아우르는 비상대책기구 구성을 제안함에 따라 21일(목), 학생 비상대책기구 출범을 위한 전학생 모임이 소집되었습니다. 회의에 모인 약 500여명의 학생들은 이번 사태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하는 한편, 대응방법을 숙고하였습니다. 회의는 자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다수의 자발적 주체들이 토론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열띤 토론은 새벽까지 이어졌습니다. 구성될 비상대책기구의 방향성, 당면 현황에 대한 분석, 효과적인 대책 수립 등이 주요 논점이었습니다. 결국 ‘한예종 학생 비상대책위원회’(이하 학생비대위) 발기인 35명이 선출되었고, 조직 구성과 방향성 수립을 위임받은 발기인들은 밤새워 발족을 준비했습니다. 22일(금) 오전 11시, 석관동 본부건물 앞에서 열린 발족식에서 낭독된 발기문에는 학생의 기본적인 학습권 침해와 부당한 감사로 빚어진 피해에 맞서기 위해 구성된 학생비대위의 역할 및 실천방향이 담겨 있습니다.

학생비대위는 제2차 발기인 회의를 열고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가운데, 현 사태에 대한 인식과 실천 차원에서 총학생회(이하 총학)와 어떠한 입장 차이도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양측은 현 사태에 대한 전면적 공동대응에 합의, 방성혁 총학생회장과 예술경영과 김영진 학우를 학생비대위 공동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실무기구로 홍보팀, 정책팀, 운영팀, 협력팀, 예술행동팀을 세웠습니다. 이로써 총학은 학생 대의기구로써의 정당성을 재확인 받고, 학생비대위는 현사태에 관해 전체 학생의 이해를 대변하는 대표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3. 현사태에 대한 한예종 총학과 학생비대위의 공동입장

총학과 학생비대위는 이번 사태가 교육과학기술부 주도 대학구조조정 정책에 문화부가 편승, 산하기관인 한예종을 시험대로 삼으면서 비롯된 것으로 진단합니다. 집권 2년차를 맞는 현 정부가 재정수지와 취업률 등 국정지표 개선을 위해 무리하게 교육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시장만이 절대선’이라는 단순 경제논리로만 보면 쓸데없지만, 전체 대학 중 14.5%, 학생 수로는 18.7%에 지나지 않는 국공립대학은 통폐합 대신 육성의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살인적인 등록금, 열악한 시설과 기자재, 부실한 교육과정 등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일부 사립예술대학 학우들을 보면, 문화미래포럼 소속 예술대 교수들의 한예종 해체 및 민영화 주장이 얼마나 악랄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줄 재단전입금 확충 요구 등은 외면한 채 한예종 해체로 얻게 될 반사이익에만 열을 올리는 저들의 주장은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교육 선진화 및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국민적 열망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입니다. 만약 문화부가 저들의 농간에 휘둘려 한예종에 대한 인위적 구조조정에 착수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교육 공공성의 포기이자 학생과 교직원 등 교육주체의 학습권과 교권을 돌이킬 수 없이 심각하게 침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코드인사 논란이나 정치보복 문제가 재차 이슈화됨으로써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현 정부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가중될 것입니다.

이에 총학과 학생비대위는 학내 구성원 및 동문, 학부모 여러분에게 아래와 같이 약속드립니다.

우리는 한예종의 교권과 학습권을 지켜내고, 이번 사태로 침해된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자율성을 항구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싸워 나가겠습니다.
우리는 국립예술대학 한예종의 존재 의의를 국민들 앞에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우리는 이론과와 협동과정을 포함한 한예종의 현재 구조와 중장기 발전계획이 본교의 설립 취지에 부합할 뿐 아니라, 21세기 창의적 예술인 양성에 필요불가결함을 주장하겠습니다.
우리는 장기적 안목의 문화정책 및 고등교육정책 수립을 요구하는 동시에, 뜻을 같이하는 모든 학생 및 교수단체, 예술단체, 시민사회단체와의 다각적 연대를 모색해 나가겠습니다.
우리는 이 사태와 관련해 각 언론매체의 사실에 근거한 품위있는 보도를 요청하고, 사태의 오도 및 악의적 왜곡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겠습니다.
우리는 학내 모든 구성원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교내외 문화 행동을 적극 지지하고, 이런 활동의 연결고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며, 가능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학내 전산망, 카페, 블로그, 소식지, 대자보, 선전물, 홍보부스 등 모든 통로를 동원해 학우 여러분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삼천 예종인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미래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깊은 관심과 연대를 호소합니다. 춤추는 자는 춤으로, 노래하는 자는 노래로, 그리고 몸짓으로, 그림으로, 영상으로, 글로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저들에게 보여줍시다.


2009년 5월 25일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비상대책위원장(공동)·총학생회장 방 성 혁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비상대책위원장(공동)                  김 영 진


주간미디어워치 11호 표지

▲ 주간미디어워치 11호 표지

2009/05/25 17:21 2009/05/25 17:21
노사모와 노무현 지지자들의 패악질이 도를 넘고 있다. 언론에 대한 불만이야 그렇다고 치자. 조문을 하겠다고 온 조문객에 대한 행패는 또 뭐란 말인가? 블로고스피어 일각에서 보게되는 'MB에게 지옥의 문이 열렸다' 어쩌고 하는 등의 악담은 그 독한 증오심에 차라리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다.

이들이 벌이는 패악질을 보면, 어느 네티즌의 말대로, 지금 대한민국에는 마치 노사모인 자와 노사모가 아닌 자들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얼척없는 일이다. 뭔가 한 마디 하려다가.. 그냥 접는다.

그래서 말인데, 진중들 좀 하시라. 노무현은 그대들의 소유물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대들이 패악질을 할 때가 아니다. 고인의 뜻에 따라 그를 정중히 보내드려야 할 때다.




이명박


이회창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05/24 14:01 2009/05/24 14:01
KBS가 봉하마을 데스크를 철수했다는군요. 노무현 지지자들이 취재를 강력히 거부한 때문인데요. 동영상을 통해 본 바로는, KBS에 항의하는 일부의 행위가 별로 바람직해뵈지 않습니다. 지나친 행동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사회가 어쩌다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이 독한 증오와 배척은 대체 어디를 향해 가려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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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지금 보니, 이같은 일이 KBS에만 있었던 게 아니네요. 앞서는 조중동이 타겟이었던 모양입니다.

관련 동영상 더보기

2009/05/24 01:40 2009/05/24 01:40

오늘 아침 '투신'으로 유명을 달리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 자꾸 걸립니다.

“혹시 담배를 가지고 있느냐”
“사람들이 지나가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엉이바위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노 전 대통령은 6시40분께 경호원에게 “혹시 담배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고, 경호원이 “없습니다. 가지고 올까요?”라고 하자,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마을 앞길을 걸어가던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지나가네”라고 말하자, 경호원이 잠시 노 전 대통령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이 순간 노 전 대통령은 갑자기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 ··· 502.html


죽음을 작정하고 오른 그 산마루에서 마지막 남긴 말이 '사람들이 지나가네..'였다니..

경호원의 눈길을 돌리게 한 말이라고만 보기에는 뭔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게 담배 있느냐는 말과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 막막함이 가슴에 와닿아서입니다. 

일부 비흡연자들은 담배 피우는 이들을 거의 혐오에 가까운 눈길로 쳐다보곤 하지만, 그래도 힘든 일에 부닥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담배 한 가치입니다. 그건 힘든 일을 끝마쳤을 때나 한없이 외로울 때, 혹은 끝이 없는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때 피워무는 담배 한 가치는 언제나 위안이고 평화함입니다.

투신 직전, 노통이 담배를 찾았다는 얘기는 그래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거 한 대 풋고 가셨으면 어땠을까 싶어서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거 한 대 피우셨다면 또 어땠을까 싶어서입니다. 그거 한 대 피우셨더라면 혹시 생각을 달리 하진 않았을까 하는 하릴없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노통의 죽음에 대해 다른 건 걸리는 게 없습니다. 어차피 하고싶은 것 다 하시고, 죽음까지도 자기 스스로가 선택한 고인에게 내같은 범인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무슨 말을 한다면 그게 오히려 주제넘는 일이겠다는 생각이구요. 그렇지만 담배 얘기만큼은 자꾸 걸립니다. 그거 한 대 피우고 가셨으면 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이지만, 노통.. 담배나 한 대 풋고 가시지 말이지요..


노무현과 담배

2009/05/23 18:53 2009/05/23 18:53
오늘 아침 자살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 전문입니다.  이 유서는 노 전 대통령이 평소 사용하던 사저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으며, 마지막 저장 시간은 23일 새벽 5시 21분이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무현 유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 내용
2009/05/23 14:26 2009/05/23 14:26

황석영, "남북관계 풀려는 뜻.. 난 안 변했다"

한겨레신문 인터뷰의 영상이다.
발언이 활자화되는 과정에서 그 뉘앙스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http://www.hanitv.com/haninews/sub_ind ··· _idx%3D7



<덧> 내 컴은 큰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하니티비 들어가서 영상 함 보기 넘 힘들다. 시스템에 투자 좀 하지 말이지.

2009/05/20 14:13 2009/05/20 14:13
민중의 소리, 경찰폭력 좌시할 수 없다

민중의 소리, [포토뉴스] "경찰폭력 좌시할 수 없다"


[포토뉴스] "경찰이 너무 무섭다" 
"도망가는 사람들을 밟고 때리고 끌고갔다. 너무 무섭다"
[동영상] 경찰, 무차별 연행
연행자 수 460명 넘어.."경찰이 미친 것 같다"



2009/05/19 00:50 2009/05/19 00:50
'5.18 광주민중항쟁', 그 서럽고 아름다운 운명
(서프라이즈 / 유시춘 / 2009-05-18)


다시 5월이 왔다. 청자빛 하늘아래 신록이 짓푸른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지만 우리 현대사의 5월은 혹독하고 슬프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군인들이 학생들의 순결한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채 여린 싹을 틔우기도 전에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18년간 오로지 ‘산업화’라는 유일의 목표를 향해 그들은 진군, 또 진군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물며 문명국가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인권’쯤이야 그저 헌법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장식물에 불과했다.


종신집권체재였던 유신왕조가 박정희의 사망으로 일순간에 붕괴하자 군사정권의 후예들은 다시 탱크와 총칼을 앞세웠다.


29년 전 오늘부터 이후 열흘간 광주는 의로운 함성으로 들끓었다. 그리고 모가지가 툭 부러져 낙하하는 동백꽃처럼 그렇게 서럽고 슬프게 스러져갔다.


80년 5월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가 태어나기 위해 치러야했던 혹독한 산통이었다. 산모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숨져갔다. 그러나 이후 5.18광주민중항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장점이 되었다. 5월광주로부터 모든 것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의로운 분노, 자유를 향한 부단한 열망, 국민의 평등한 삶을 위한 지극한 소망들이 자라났다. 그리고 이들을 하나의 힘으로 조직하기 위한 지혜도 샘솟았다.


그리고 87년 6월 한달 내내 우리 국민들은 그 무시무시한 계엄령 풍문에도 결코 꺽이지 아니하고 6월민주항쟁을 성취했다. 그 지연된 승리는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와 그리고 민노당, 진보신당등을 낳았다. 이제 우리 국민은 그 누구도 군사쿠데타의 악몽에 떨지 않게 되었다. 영장없이 체포되어 고문당하는 야만으로의 회귀를 걱정하지 않는다. 모두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싹이 돋아 6월민중항쟁으로 잎을 피운 민주주의의 진화로 인한 것이다.


이를 두고 저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거짓선동을 일삼는다. 기득권을 잃어버린 그들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찾은 우리들에게는 때로 불만스럽기도 했지만 대체로 ‘진화하는 10년’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역주행하려고 한다. 실업자는 넘쳐나고 거리의 사람들은 다시 대량으로 연행되고 있다.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온 남북관계는 바야흐로 박살나는 중이다.


이러한 때에 작가 황석영의 ‘중도실용’발언이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문단 말석에 이름을 얹은 사람으로 너무 가슴 아프다.


황석영은 이 시대가 낳은 빼어난 ‘천출광대’이다. 청춘시절에 내 가슴을 친 그의 ‘객지’ ‘삼포가는 길’ ‘낙타누깔’ ‘한씨연대기’등을 어찌 잊으랴? 70년대를 향해 날린 그의 소설 ‘장길산’은 역사라는 옷을 걸친 걸출한 사회소설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사회가 아끼고 보듬어야하는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더구나 5월광주와 관련해 그는 그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처음으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상재해 처음으로 5월광주의 실상을 단행본으로 알렸다.


5월광주에 관한 한 나는 그를 믿고 싶다. 황석영 자신도 그를 믿어달라고 한다. 나는 그의 분단극복의지를 또한 믿는다. 북한 체류 당시 김일성 주석이 그를 가리켜 ‘민족의 재간동이’라 했다한다. 그의 ‘배암장수’ ‘요코하마 엘레지’등을 비롯한 삼삼한 구라를 듣고 있자면 나는 그와 같은 빼어난 재간동이와 함께 동시대를 산다는 것이 즐거워진다.


그런데 왜그랬을까? 의문이다. 그는 혹시 모두들 우울한 우리를 한바탕 신명나게 웃겨주려고 그랬을까? 일단 그의 말을 모두 믿어주고 싶다.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 심정이리라.


이 시대가 선물한 빼어난 황구라여! 돌아오라, 지난 일주일간여의 삼삼한 ‘구라’를 깨고 부디 빛나는 자신의 자리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오늘 다시 5.18을 맞아 아직 5월광주의 열흘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서프앙을 위해 여러 자료를 총합해 내가 간추려 놓은 ‘광주열흘’을 첨부한다. 다소 길게 정리했으나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정리했다고 본다.


두고두고 참고해 아직 잘 모르는 이들에게 전파했으면 한다.



ⓒ 유시춘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광주민중항쟁', 그 숭고한 열흘 ( 기록정리 - 유시춘 )


전야

80년 5월 18일 밤 9시. 중앙청 국무회의실에는 비상국무회의 소집연락을 받은 국무위원들이 모였다. 무슨 안건을 심의해야하는지 사전 연락도 없었다. 그런데 국무회의실 복도 양편에는 착검한 소총을 든 무장군인들이 늘어서서 일일이 국무위원들의 신분을 확인하는등 살벌한 분위기였다.


신현확총리는 9시 42분에 제 42회 임시국무회의 개최선언 후,국방부에서 의안 360호로 제출한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을 상정하고 의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옥길 문교장관이 의안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지만 단 한번의 찬반토론조차 없이 단 8분만에 비상계엄확대선포안은 가결되었다. 최규하정부는 처음부터 신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은 내각의 권한을 박탈하고 정치권과 재야의 주요인사를 체포하고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인 학생운동을 궤멸시키는 12. 12군사반란 이후의 ‘제2의 쿠데타’를 시작했다.


10.26사건을 이유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일원에 선포된 비상계엄과 마찬가지로 이날, 대통령 공고 제 68호로 계엄사령관이 발표한 비상계엄확대조치는 유신헌법과 계엄법 규정에도 어긋나는 불법조치였다.


제주도를 포함해 전국에 계엄확대를 선포할만한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무런 비상사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역계엄의 경우 그 지휘계통이 대통령-국방부장관-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지는데 비해 전국계엄인 경우에는 대통령에서 곧바로 계엄사령관으로 내려가게 되기 때문에 국방장관은 업무권한 밖에 있는 점을 이용해 전두환의 직접통제하에 두고자 했던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로써 전두환이 장악한 합동수사본부는 내각과 정치권을 완전히 무력화시켜버렸다.


밤 10시. 유신의 본거지로 부귀영화를 누린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이세호등을 권력형 비리로 체포하고 김영삼등 야당주요정치인들은 가택연금으로 묶어버렸다.


가장 적대적이며 향후 잠재적 적대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민주인사 그룹들에게는 소요 배후조종혐의를 덧씌워 체포 감금했다. 이들은 김대중 문익환을 정점으로 예춘호 김동길 리영희 고은 인명진 이해동 등으로 각계에 포진한 민주인사들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18일 계엄포고령 10호를 발표해 국회의원과 정당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정치권의 저항을 원천봉쇄시킨 20일, 이미 소집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서는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병력이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국회의원의 등원을 막았다.


헌법상 계엄해제를 의결할 권한을 가진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킨 이러한 국헌문란행위를 문제삼거나 저지할 수 있는 국민역량이 성숙되지 않은 가운데 신군부의 행보는 아무런 거침이 없었다.


80년 봄 광주의 학생운동 역시 학생회부활,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쳐 비상계엄해제와 유신잔당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이 서울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5월13일 밤의 서울시내 가두투쟁을 전해들은 전남대는 14일 오후 교문의 경찰저지선을 돌파해 도청앞 광장으로 집결해 대규모집회를 열었다. 일반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 12. 12쿠데타의 내용과 신군부의 음모를 폭로했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는 않았으나 경청하고 유인물을 정독했다.


15일, 조선대 광주교대까지 합세해 도청분수대에는 1만 6천여명이 모였다. 여기에는 교수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참가했다. 경찰은 집회저지를 포기하는 대신 질서유지를 당부했다. 시위도중 시민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변화하면서 같이 구호를 외치고 학생을 격려하는 모습이 서울과 다른 모습이었다.


16일 오후, 5.16쿠데타 19주년에 벌어진 가두시위는 광주지역 학생회연합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었기에 9개대학 3만여명이 집결했다.


전날 ‘서울역회군’이후 서울의 대학들이 일제히 시위를 중단한 줄 알고 있었지만 신군부의 유신부활음모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학생들의 투쟁의지를 높이기 위해 집회를 결행했다. 바로 이날,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 ‘제2시국선언문’을 낭독했는데 후일 계엄사는 이를 김대중을 ‘광주사태 배후조종자’로 몰아가는데 악용하게 된다.


‘5.16화형식’을 끝으로 해산하기 전에 학생회지도부는 휴교령이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이후로는 매일 10시에 일단 학교 정문 앞에 모일 것을 결의했다.


17일은 전국이 모두 평온한 주말이었다. 19일 다시 시국성토대회를 열 준비를 하고 있던 전남대 총학생회실에 서울 이화여대 학생대표자회의를 급습한 검거선풍이 알려진 것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비상사태였다.


9시에 일단 전원 대지호텔로 피신한 결과로 잠시 후 밀어닥친 계엄군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본격적 검거가 시작된 11시부터 상황을 모른 채 자택에 있던 22명이 광주 505보안부대가 주도한 예비검속으로 합수부로 끌려갔다. 이중 12명이 학생지도부였다.


신군부는 주말의 공백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광주의 지도부를 일거에 와해시키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광주의 학생 시민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16일의 약속 ‘아침 10시 학교 앞’ 뿐이었다. 그리고 5월 18일 아침이 왔다.


7공수여단과의 첫 충돌 : 5월 18일


5월 17일 21시 40분 비상계엄확대안이 비상국무회의를 통과한 직후 신군부는 서울 광주 전주 대전에는 유사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공수부대를, 대구와 부산에는 해병대를 급파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서울, 광주가 신군부의 우선적인 주요목표였다.


서울에는 1,3,5,9,11,13등 7공수여단(여단장 신우식 준장)을 제외한 특전사병력 전부와 최강전투력을 보유한 20사단을 배치했다. 


2군 예하 중앙기동예비부대인 7공수여단은 수개월동안 시위진압훈련에만 몰두한 ‘신군부의 정예부대’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시위진압장비가 아닌 전투장비로 무장하고 광주에 투입되었다. 이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17일 자정 전남대에 진주한 33대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교내에 있던 학생들을 무차별로 진압봉과 군화로 초주검으로 만들었다. 이들이 맞아서 밤새 퉁퉁 부은 얼굴로 팬티만 입은 채 본관 1층 복도에 꿇어앉아 있는데 아침 7시경 휴교령이 내린 줄 모르는 면학파 학생들이 교문으로 들어가려다가 군인들에게 잡혀 구타당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들이 정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10시. 2백여명이 모이면서 용기를 얻은 학생들이 공수부대의 학교점령을 비난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 공수부대 물러가라’


33대대장 권승만 중령의 공격명령과 함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학생들은 피투성이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광주교대와 조선대, 전남의대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비록 지도부가 체포되거나 은신중이었지만 학생들은 이 소식을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스스로 도청 앞으로 행진했다. 전남대정문-광주역-공용버스터미날-카톨릭센터에 이르는 3km를 행진하는 동안 학생들은 시민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김대중 체포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시위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오후 3시, 구호와 함께 산발적 투석전을 벌이던 학생 시위조에 점차 시민들이 합세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천변을 지나면서 공원부근에 집결해 있던 5백여명과 환호하며 합세했다.


곧 이들에 의해 동명동 파출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이들이 청산학원부근에 이르러 경찰저지병력에 부딪힌 4시 반, 갑자기 공수부대의 공격이 덮쳤다.


공수부대원들은 3인이 1조를 이루어 젊은이들에게 무조건 M 16개머리판과 곤봉으로 짓이기고 끌고 갔다.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면서 삽시에 살벌한 유혈공포가 거리를 메웠고 골목으로 피신한 학생들을 집집마다 숨겨주었다.


시내 여러 곳에서 공수부대의 처참한 공격을 목격한 시위대의 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무기가 될 만한 각목 쇠파이프 등이 쥐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두리동네인 산수동 계림동 부근에서는 시내에서 벌어진 시위를 전하는 유인물이 나돌았다.


이 시각에 광주소요를 보고받은 신군부는 11공수여단 본부를 선발대로 증파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성남 K-16비행장에서 C-123수송기 5대에 분승한 본대는 광주로 이동했다. 시위가 계속될 경우 대규모의 살상을 각오한 신군부의 기획이었다.


둘째 날, 19일 - 피의 일요일


공포 속에서 밤을 지샌 시민들은 날이 밝자 시내상황을 주시했다. 중심가의 몇 상가가 철시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미 7공수가 금남로 끝 유동삼거리 수창초등학교 앞에 집결해 전투준비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금남로에 일체의 차량통행이 금지된 가운데 시내 전역에는 군인과 경찰이 젊은이들을 보이는대로 무조건 연행했다.


이러는 가운데 10시부터 시민들이 모여들어 5천여에 이르자 ‘애국가’ ‘정의가’ 전남도민의 노래‘등을 부르기 시작했다.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에 시민들은 벽돌 각목 화염병으로 맞서며 맞섰다. 경찰이 밀리자 공수부대가 군용트럭 30여대에 분승, 도청앞과 광남로 네거리에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민들을 포위해 압박했다.


착검한 소총과 곤봉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병력은 시민들을 향해 돌진해 닥치는대로 휘둘렀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비명과 유혈이 낭자한 아비규환으로 떨어졌다.


오후 들어 건물과 골목에 피신해 있던 시민들은 다시 모였다. 오전에 볼 수 없었던 40대 이상의 장년과 부녀자들도 다수 참여했다. 공방이 계속되면서 시민들은 점차 불어났다.


4시경, 공수대원들은 총검술동작으로 시민들을 향해 돌진했다. 여러 명이 달려들어 무조건 구타하고 쓰러지면 끌고가 군용트럭 안에 던졌다. 하늘에서는 군용 헬기 2대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극소수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동조하지 말라며 선무방송을 했다.


이 때 카톨릭센터의 비극이 일어났다. 9층 옥상에서 무전기로 시위상황을 알리고 있는 공수대원 6명이 청년들의 눈에 띄었다. 옥상으로 올라간 2백여 청년들에 의해 공수대원들은 무장해제당했다. 청년들 중 몇이 대검에 찔려 병원으로 실려가는 한편으로 공수부대원을 공격한 청년들은 빼앗은 소총을 치켜들었다.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장갑차가 맹속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으며 이 순간에 센터 안에서 미쳐 나오지 못한 청년들은 들이닥친 공수대원들에 의해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급습에 밀려 중앙초등학교 후문 부근에서부터 화염병을 투척했다  열세를 면치못한 저항은 문화방송에 이르러 취재차량 2 대와 방송사 집기를 끌어내 불을 질렀다. 어용방송을 향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공수부대의 습격이 밀어닥치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시위대를 추격해 공격하던 공수부대원이 시민들의 포위와 역습으로 희생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양상은 점차 동구 학동과 남광주역 등 외곽으로 번져나갔다. 7여단 병력의 행동반경은 시내 중심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청년들을 뒤쫒아가 보는 대로 습격했으며 민가도 가리지 않았다.


이 유혈참극을 목격한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다만 소수의 학생들이 서로 격려하면서 공수부대와 숨바꼭질을 벌이면서 계엄해제와 김대중석방을 외치면서 산발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광주고 부근과 카톨릭센터 앞에 가까스로 600여명의 대오가 잠시 형성되었지만 공수부대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7시경부터 비가 내렸다. 흉흉한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광주를 구하자’. 요소요소 집결한 시민들은 흥분과 분노에 들끓었다.


계엄분소는 오후 6시를 기해 계엄공고 제 4호를 발표 밤9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로 통금을 연장했다. 11시에는 계엄군과 경찰을 묶어 36개 지점에 합동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폈다.


18일 7여단 33, 35대대의 행위는 시위진압이라기 보다는 시민을 상대로한 일대 학살극이었다. 진압봉과 군화뿐만 아니라 대검을 사용했으며, 그 대상도 청년은 물론 노약자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었다. 부상자에게 응급조치는커녕 개처럼 끌고 가 트럭에다 던져버렸다.


2군사령부 상황일지상으로 이날 연행자는 대학생149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시민 184명이다. 이중 68명이 두부외상, 자상등이었고 12명은 중태였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본다. 


셋째 날, 5월 20일의 ‘항쟁’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친 20일 10시경 대인시장 부근에 시민 1천여명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로 인근 상인과 주민들이었다. 새벽 6시경 사직공원 근처에서 온몸이 짓이겨진 참혹한 주검(김암부, 36세)으로 발견되는 등 전날 진압의 잔학성과 피해상황소식에 모두 치를 떨었다. 노인들은 6. 25보다 참혹하다고도 했다.


이들은 광주고를 돌아 시민회관 네거리로 나아갔다. 그러나 금남로에 도착하기 전에 공수부대와 대면했다. 그런데 19일과 달리 공수부대 진압방식이 다소 온순해져서 그저 군중의 결집을 저지하는데서 그쳤다.

시내 고교생들이 교내농성을 비롯해 시민들에게 합세할 기미를 보이자 시교위는 이날부터 임시휴교조치를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고교생들은 오히려 이를 기화로 거리로 쏟아졌다. 많은 상인들도 철시하고 거리로 나왔다.


금남로를 중심으로 배치된 공수부대는 이들 극도로 분노한 시민들에게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12시를 전후해 3여단 병력 1390명이 대거 시내에 투입되면서 상황은 잠시동안의 소강상태로부터 다시 19일과 같은 격전으로 변했다.


1시반의 상업은행 앞, 2시반의 충장로와 도청 앞은 특히 격돌한 지점이었다. 시내에서 다소 먼 계림동에서는 2천여명 시위대가 대형화분과 가드레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장갑차를 앞세운 63대대와 대치했다. 동문다리에서는 중학생 2백여명이 투석을 하기도 했다.


시위가 한층 격화된 3시부터 3개 여단 10개 대대는 대대적인 작전을 펼쳤다. 3여단 11대대는 금남로3가 - 신탁은행- 충장로- 광주극장 - 황금동지역을, 12대대는 광주시청부근, 13대대는 광주일고부근, 15대대는 누문동을, 3여단 본부는 전남대입구를 작전을 폈다.


7여단 33대대는 게림파출소- 광주고교, 35대대는 금남로 4가 한일은행,  11여단 61대대는 도청앞, 62대대는 광주우체국주변을 63대대는 대인파출소를 맡아 진압했다.


그러나 각 대대는 각각 수천명의 시위대와 대치해 있었고 공수부대가 이동한 공백을 또다른 시위대가 점령하면서 공수부대는 19일과는 달리 분리된 점과 선만이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시위대는 점차 도청을 향해 전진했다. 4시에 군중은 3만여에 육박했다.이 때 이미 이들은 맨 손이 아니었다. 이들은 근처에 있는 물건 중에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각기 스스로 알아서 집어 들었다.


비로소 신군부의 음모를 확연히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리고 모금으로 앰프부터 구입했다. 애국심으로 무장한 여성들이 시내를 돌면서 스피커로 시민들을 독려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시내곳곳에 유인물로 신군부의 야욕을 알렸다.


특히 운수노동자들의 집결이 주효했다. 3시경에 광주역 앞에 집결한 50여대의 택시는 일제히 경적을 울려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18, 19 이틀간 유혈참혹상을 가장 생생히 보았던 이들이었다.


6시경에 무등경기장에는 2백여대가 넘는 각종 차량이 모여들었다. 시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군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이들의 의중을 알아차린 11여단은 전일방송 앞에서 대형 바리케이트를 쳤다.


어둠이 내리는 시각에 12톤 대형트럭과 버스를 앞세운 차량시위대가 전조등을 밝히고 일제히 경적을 울리면서 금남로에 나타났다. 트럭위로는 20여명 청년들이 올라탄 채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 행렬과 군경의 접전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었다. 시위대는 군경의 거점인 파출소, 시청, 방송사들을 공격했다. 시민들은 피해상황에 대한 아무런 보도없이 태연히 오락프로를 내보내고 있는 방송에 분노했다. 결국 KBS와 MBC는 화염에 휘싸이고 말았다. 광주의 하늘을 밝힌 화염은 관제언론을 향한 시민의 타오르는 분노의 상징이었다.


광주신역은 또한 격전지역이었다.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요충지 신역을 12대대는 결사확보하려했다. 밤 11시경, 갑자기 총성이 어둠을 찢었다. 그러자 시위대에서 외침이 들렸다. ‘공포다. 물러서지 말자!’ 그러나 잠시 후 대열의 맨 앞줄에서 시민들이 쓰러졌다. 공포가 아니라 3여단은 시민을 겨누어 발포한 것이었다.


수세에 몰린 3여단은 시내 여러곳에 흩어져 작전중인 11. 13. 본부대대를 신역으로 불러들였다. 이날의 발포는 군의 문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직 20일밤과 21일 새벽 인근병원에 실려온 부상자의 진료기록부에만 남아있다.


그리고 3여단 소속이었던 한 사병의 국회청문회 기록으로 전한다. ‘광주역에 도착해 보니 군인들이 역건물을 뒤편으로 하고 일렬로 도열한 채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분수대쪽에서는 시민들이 탄 버스와 트럭이 돌진해오다 분수대에 쳐박혔다. 이때 3여단 운전병이 트럭에 치여 사망했고 20명 정도의 시민이 피가 흥건한 채 분수대 주위에 방치돼 있었다(1989, 2, 24광주특위 제 30차 청문회)’


자정무렵 금남로에는 20여만 시민이 집결했다. 거대한 군중은 계엄군을 포위했다. 시위대의 도청점거는 시간문제였다. 예광탄이 어둠을 가르며 날았고 총성이 몇 차례 울렸다.


도청 광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발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귀가하지 않았다.


새벽 1시. 세무서가 불탔다.


물론 발포가 진행 중이었으며 조선대 앞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불타버린 양 방송사, 그리고 편집이 중단된 광주지역 신문사와 더불어 외부로 통하는 시외전화마져 두절된 광주는 외로운 섬으로 변했다.


그러나 여러 지역의 격전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과도정부의 내각 신현확과 국무위원이 소요와 관련해 전원 물러났다는 발표만 있을 뿐 이때까지도 광주에 대하여 아무런 발표가 없었다.


넷째 날, 21일 - ‘초파일의 유혈참극’


계엄군의 발포후 광주전역의 병원은 총상환자들의 신음으로 넘쳐흘렀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실어나르는 운전자, 혼신으로 이들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의사와 간호원, 그리고 헌혈행렬이 광주의 풍경이었다. 오전 8시를 기해 전국각지에선 광주행 운행이 중단되었다.


전날 새벽까지 지속된 ‘신역공방’ 이후 3여단은 전남대로 철수하고 7여단 11여단은 조선대로 밀려났다. 동이 트자 신역에서 3여단이 미쳐 거두지 못한 시신 2구가 발견되었다.

태극기를 덮은 시신을 앞세우고 수만 시민은 행진을 시작했다. 10시경에 10만을 넘어섰다. 위대중 일부는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진입해 대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트럭20대를 몰고 나와 외곽의 시민들을 도청으로 실어 날랐다.


11시경 군중은 30만에 육박했다.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은 대표를 뽑아 도지사와 협상을 시도했다. 10시 50분경 도지사는 헬기로 금남로상공을 선회하면서 공수부대병력 철수요구와 질서유지를 당부했다.


이때 11공수여단은 전일빌딩을 경계로 저지선을 폈다. 시민들은 도시사의 병력철수노력을 기대하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미 시위진압에 소극적인 정웅 31사단장으로부터 공수부대 3개여단 10개대대의 지휘권을 사실상 박탈한 상태였다. 신군부핵심들은 직접 광주로 내려왔다.


진종채 2군사령관, 육본 김재명소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장세동 특전사 작전참모등은 공수부대 지휘소에 머물면서 여단장들을 모아 작전회의를 열어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21사단장 박준병소장은 20일밤 8시 이미 광주투입명령을 받고 효창운동장에 주둔해있던 61연대를 10시반에 급파했으며 그 자신은 62연대를 이끌고 광주로 갔다. 나머지 60연대 역시 21일 밤 광주로 합세하게 되어 인구 73만 광주에는 무려 2만에 육박하는 무장병력이 파견된 것이었다.


정오 넘어서도 공수부대가 철수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민들은 그들을 밀어내기로 결정했다. 지난 심야의 발포로 인해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시. 광성여객 버스가 접근하자 일부병력이 사격을 개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집단발포가 개시되었다. 공수대원들은 엎드려쏴 자세를 시민들을 조준해 일제히 사격했다. 메가폰으로 사격중지명령이 나기까지 10분간 계속되었다.


금남로는 피의 바다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최소한 54명이 사망하고 5백명 이상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무기를 찾아나섰다. 인근 나주경찰서, 광주 석산화약고, 화순탄광등으로부터 다량의 총기와 탄약을 접수했다.


같은 시각, 시가지 상공을 선회하던 헬기는 제봉로 부근에서 기총소사를 감행했다.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나딩굴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철수하고 정부가 사과할 것이라는 기대가 부질없는 환상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이때 젊은 시위대를 선두로 무기를 나누기 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무고한 희생을 막고 스스로 생명을 지키기 위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일컬어 ‘시민군’이라고 명명했다.


칼빈과 M1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중심가에 나타난 것은 3시 15분. 수천 시민이 따르는 가운데 시민군은 3시반 이후 도청 앞 저지선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비록 보잘것 없는 무기였지만 시민들의 단결과 기개가 충천했다.


양쪽의 총격전이 개시되었다. 어느새 ‘시가전’양상을 급속히 나타내기 시작했다.


4시. 광주의 공수부대는 주둔지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들은 새로운 주둔지인 화순 주남마을로 철수도중에도 총기를 난사하여 많은 시민들을 살상했다. 어두워질 무렵에 시민군은 도청으로 진입했다.


공수부대가 철수하고 난 다음에야 언론은 ‘폭도’ ‘폭동’ ‘약탈’ ‘무정부상태’등의 거짓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광주는 진실에 목말라 했다. 여기에 응답한 것이 ‘투사회보’였다.


투사회보는 5월 25일 8호까지 발간했다. 윤상원, 박용준을 중심으로 한 ‘들불야학’팀은 학살만행과 시민들의 행동강령등을 담아 배포했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항쟁 지도부’는 구성되지 않았다.


종일 총성과 피비린내가 만연했던 이날은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다섯째 날, 22일 - ‘사태수습위’구성


광주시민의 항쟁에 밀려 병력을 외곽으로 철수시킨 신군부는 항쟁이 전남일원으로 번지는 것을 보고 무력공격과 이념적 공격을 병행시켰다.


장악하고 있는 언론을 통해 항쟁을 고정간첩과 불순분자의 폭력난동으로 선전하는 한편으로 광주로 통하는 7개 주요도로를 점령하고 봉쇄했다. 그들은 시위대의 차량뿐아니라 모든 통행자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22일 새벽 외곽으로 나가는 효천철길, 그리고 오후 3시 적십자마크와 헌혈차라는 플래카드를 부착하고 화순으로 가던 도중 지원동 너릿재에서 집중사격을 받아 많은 희생이 생긴 대참사가 발생했다.


새벽에 도청으로 들어간 시민군은 1층 서무과를 상황실로 정하면서 점차 질서와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라톤회의 끝에 정오 지나서 ‘5.18사태 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독립투사 최한영옹)’를 결성하고 7개의 요구사항을 결의했다.


‘시위사태의 근본원인에 대한 언급없이 임시방편적인 수습에만 급급했다’는 불만이 많았지만 수습위원들이 상무대 전남북 계엄분소를 찾아 군 측과 협상했다.


도청 앞에서는 뚜렷한 주최측도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 토론이 이루어졌다. ‘유혈방지’와 ‘질서유지’에 대해서는 모두 적극 찬동했다. 또한 무기회수에 전원 동의함으로써 도청과 공원에서 2백여정의 총기가 회수되었다.


한편으로는 대학생이 책임져야 할 몫이 크다는 데 의견을 모아 학생들 중심의 ‘15인 학생수습위’를 구성했다. 이들은 총기회수, 차량통제, 수리 보수, 질서회복, 의료반등의 부서를 두고 질서회복에 주력했다.


외로운 도시, ‘해방광주’의 닷새


항쟁 6일째인 23일, 시 외곽에서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리는 가운데 날이 밝자 시내 남녀 고교생 7백여명이 대대적인 청소작업에 나섰다. 시민들이 이에 적극 호응해 함께 했으며 상가들도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전쟁상태’는 계속되고 있었다.


백운동에서의 시민군과 무장헬기의 충돌로 헬기에 타고 있던 3명이 사망하는가하면 저녁 무렵에는 화순으로 가던 시민군이 헬기로부터 기총소사세례를 받고 차량 안의 4명 전원이 사망했다.


오후 8시 광주교도소를 경비중이던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여러차례 충돌이 일어났으며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23일을 기해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전선이 형성된 시 외곽지역에는 광주를 빠져나가는 행렬이 이어졌다. 또한 광주에 학생 자녀를 둔 외곽의 많은 부모들이 대치지역을 피해 들판가운데로 난 소로를 통해 시내로 진입해 오기도 했다. 


한편 시민.학생수습위는 결사항전과 투항의 기로에서 번민하게 되었다. 회수한 무기 200여정을 계엄분소에 반납하고 연행자 34명을 데리고 돌아왔지만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계엄당국과의 협상 결과에 반발하는 시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습위는 5400여 정의 총기 중에 절반에 못미치는 2500여정만을 회수했다. 극도의 고립감과 계엄군 재진입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총기를 반납한 시민보다는 더 많은 이들이 총을 놓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대부분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한 이들로 기층민중 출신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매우 위험한 시외곽 경계임무와 26일에 탄생한 기동타격대의 역할을 자원함으로써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수습위는 두어차례 조직개편을 거치며 25일까지 활동한다.


한편 광주지역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청년활동가들은 대부분 도피중이거나 예비검속으로 505보안대에 감금되어 있었다.


21일의 학살만행을 참담하게 지켜본 활동가들은 조직적 역량이 성숙되지 않은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상황을 비관적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조직적 대응을 포기하고 각자 몸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층민중을 주축으로 한 시민군이 공수부대를 밀어내고 일시적으로나마 광주를 스스로 지켜낸 것은 이들 지식인 활동가들의 예상을 뒤엎은 것이었다. 항쟁이 전남일원으로 확산하는 기미와 무기반납을 둘러싼 갈등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소심함과 관념성을 두드리는 죽비와 같은 것이었다.


윤사원 김태종등은 22일 도청 앞의 자연발생적 대중집회를 보다 발전시키기로 하고 23일부터 홍보활동을 통합했다.


이후 매일 도청앞 광장에는 수만 시민이 모여 다섯 차례의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는 항쟁의 거점을 흔들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윤상원등은 우선 차량통제부서를 통해 모든 시민군 차량을 등록하게 하고 차량별로 각종 임무를 할당하고 시민군의 차량대기조를 40대 이상으로 증강시켜 기동성과 조직력을 보강했다.


도청수습위의 허술한 체계를 비집고 침투한 정보원들의 분열 책동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이들은 투항주의적 노선을 빠르게 투쟁노선으로 바꿔 나갔다.


24일부터 시외곽에서의 양민학살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격분했으며 시민군들 중에는 무기회수에 강력히 반발하는 이들이 늘었다. 기존의 수습위는 내분과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활동가들은 25일 10시 홍남순, 송기숙, 명노근, 조아라, 장두석, 윤영규 박석무등 재야인사들과 회합했다.


오후3시 3차 궐기대회에서 이들은 국민, 전국 종교인,전국민주학생, 희생자가족들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연대를 호소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성명서와 함께 종합적인 시민피해상황을 발표했다.


이들은 새집행부를 세워 결사항전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밤 10시 도청 내무국장실에서 이렇게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한다.


새지도부는 철야회의를 통해 상황과 과제를 점검했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시민들의 일상을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시내버스 정상운행, 관공서의 일상업무 정상화, 시장과 상가의 영업재개, 식량공급을 위한 시청 비축미 공급, 지역 언론기관의 재가동, 시외전화개통, 순찰대재편과 치안유지등이었다. 투항과 항전을 둘러싼 갈등은 투항파들이 수습위를 떠남으로써 정리되었다.


이와 함께 YWCA에 대기중이던 대학생 병력을 추가로 도청에 투입해 경비임무를 맡기고 여고 여대생 여성노동자들은 자진해서 취사 선전 간호임무를 맡았다. 새 지도부는 항쟁의 자연발생적 방어적 성격을 넘어서서 항쟁이 지닌 혁명성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26일, 날이 밝으면서 농성동을 경계중이던 시위대로부터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가 무전기를 타고 도청으로 흘러들었다. 최소한 유혈사태만은 막아보고자 한 수습위원들은 당황했다. 신부들이 맨 먼저 나섰다.


‘어른들이 총알받이로 나섭시다. 지금 이 상태로는 탱크 앞에 나서도 죽을 것이요, 여기 있어도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원 나갑시다’


김성용 조철현신부를 비롯해 홍남순 윤영규등 17명이 금남로에 일렬횡대로 섰다. 그들은 수창국교 광주교대를 거쳐 계엄군의 탱크가 포진한 농촌진흥청까지 4km 남짓 걸어갔다.


언제 어디로부터 총알이 날아들지 알 수 없는 ‘죽음의 행진’ 뒤로 수많은 시민이 뒤를 이었다. 탱크 앞에서 정지한 행진은 상무대에서 협상을 열었다.


그러나 자정까지 무기를 모두 반납하라는 최후통첩 이외에는 그 어떤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성용 신부는 한계를 절감하고 이후 번민을 거듭한 뒤 고립무원의 광주를 빠져나온다. 그는 사태를 외부에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어둠을 헤치고 서울로 향했다.


‘죽음의 행진’ 소식에 접한 광주대교구 윤공희 주교는 계엄사에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참극을 막고자 했던 주교는 계엄사에 간청한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전날인 25일 광주를 다녀간 최규하는 수습위원들은 만나지도 않고 계엄분소만을 다녀간 후 진압을 격려하는 일방적인 담화문을 이미 발표한 후였다.


공수부대가 광주비행장에서 도청진압작전 리허설을 하고 있던 오후 3시에 항쟁지도부는 5차 범시민궐기대회를 열고 있었다. 상공에서는 군용헬기가 ‘소탕작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전단을 대량 살포했다.


죽음의 행진을 끝내고 협상을 벌이던 수습위원들로부터 전갈이 당도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오늘밤 공격해 올 것 같다는 통첩이었다.


지도부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시민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두행진에 나섰다. 계엄군과의 대치선까지 갔다가 다시 도청으로 돌아오자 5천여 행렬 중 3백여명이 남았다. 최후의 전사들이었다.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지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27일, 최후의 새벽


도청을 기습타격 할 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은 완전무장을 갖추었다. 얼룩무늬제복 대신 일반보병 전투복 위에 방탄조끼를 입고 20사단이 봉쇄선을 편 주남마을로 공수되었다.


7, 11여단 역시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했다. 20사단 역시 새벽 3시 30분까지 전병력이 시내 중심가를 포위한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했다.


계엄군은 작전개시 전에 광주와 전남일원사이의 전화선을 차단했다. 물론 시내전화선도 끊어버렸다. 전화선이 끊기기 직전에 제보로 계엄군진입을 알게 된 항쟁지도부는 비상령을 내린후 최후항전을 기다렸다.


칠흑 어둠 속에 모든 것은 정지해 있었다. 가두방송의 두 여학생이 토해내는 절규만이 심야의 정적을 찢으며 잠들지 못하는 시민들의 창자를 끊어 놓았다. 73만 광주시민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4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민군은 도청 전면과 측면에 3명 1개조로 배치해 있었다. 건물 내부에 1층에서 3층까지 복도 유리창을 깨어내고 광장을 내다보았다. 바로 앞에 다가온 죽음을 느낀 한 청년이 고등학생들은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고 외쳤다.


3여단 특공조는 소총을 자동으로 갈기면서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이들이 ‘전광석화 같은 기습공격을 감행’해 ‘폭도소탕작전’을 완수하는데 걸린 시간은 1시간 20분여. 3공수여단은 소탕이 끝났음을 확인한 후 20사단에 도청을 인계한 후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20사단은 시신과 부상자를 밖으로 끌어냈다.


군의 기록에 의하면 새벽 5시를 전후해 신군부는 무려 2만여의 무장병력을 동원해 ‘광주시를 탈환’했다.


그들은 작전 시간에 공군기의 무력시위지원을 위해 제1비행단과 전교사간에 협조체재를 조치하고 전차18대, 멫 9대, 지휘용 헬기 1대, 무장 헬기 4대, 수송용 헬기와 코브라 무장헬기등 엄청난 장비를 총동원했다. 거기다 휴전선 상공과 한국해역에는 미군의 조기경보기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외부의 위협’을 차단하고 있었다.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최후의 전사들의 명단은 불행히도 신군부가 남긴 기록밖에 없다.


국민을 상대로 벌인 이 참혹한 전쟁에서 산화한 시민군은 처참한 군사적 패배만큼 명백한 정치적 패배를 신군부에 죽음으로써 안겨 놓았다.


이로써 열흘에 걸친 5.18민중항쟁은 끝났다.


광주와 인근15개 시, 군에서 100여만명이 참여하여 공식확인된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4명, 상이후 사망 95명, 부상 3310명, 구속 구인자 1430명, 총 5063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았다.


광주, 공동체의 귀감


광주의 열흘은 고난 가운데 자율적 나눔의 정신을 구현한 따뜻한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었다.


외부와의 교통 통신이 두절된 상태임에도 누구 하나도 생필품을 사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함께 부상자에게 피를 나누었으며 한꺼번에 두 되 이상의 쌀을 팔지도 사지도 아니했다. 수천 정의 총과 폭약이 수중에 있었지만 단 한 건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식품점과 약국은 다투어 시민군에게 음식과 의약품을 제공했다. 여성들은 김밥을 말아 학생 청년들을 먹였다. 수천억 현금이 보관된 은행의 금고는 안전했으며 관공서와 주요시설물을 스스로 경비했다.


광주는 인간의 선한 의지와 이성이 꽃피운 대동 세상을 잠시나마 보여주었다.


5.18의 주검들은 땅에 묻혔지만 그 정신과 혼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가슴에 불씨처럼 살아남아 7년만에 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부활했다.


5.18민중항쟁은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의 씨앗과 성장점이 되었다.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어 97년 마침내 군사반란과 학살의 주역인 신군부의 핵심들은 법정에서 단죄 받았다.


이어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함으로써 광주민중항쟁은 폭도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97년에는 또한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민주화운동정신을 기리게 되었다. 항쟁 발생 17년만에 일어난 변화이다.


그러나 아직도 과제는 남아있다. 정확한 사망자수와 시신의 암매장 장소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80년 5월 21일 오후 도청 앞 30만 군중을 향해 집단발포를 명령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가리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쟁 당시의 주한미군사령관의 발언과 그 이후 미국의 문서들을 미루어 볼 때 미국이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우방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걸려있다.


미국은 신군부가 항쟁진압을 할 수 있도록 20사단과 33사단 일부병력의 작전통제권을 넘겨주었고, 광주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80년 8월 전두환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 결정했으며 레이건은 국가원수 가운데 제일 먼저 전두환을 초대함으로써 정치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민족자주’의 화두를 우리에게 던졌으며, 이는 현재도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




[기고] '5.18광주민중항쟁’, 그 서럽고 아름다운 운명
(서프라이즈 / 유시춘 / 2009-5-18 13:47)

원문 보기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 ··· %3D42572

2009/05/18 16:31 2009/05/18 16:31
"말이 말을 만드니 말을 말까 하노라."

블로고스피어의 떠도는 글들을 보면 가끔씩 답답할 때가 있다. 말이 안 되는 말을 만들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가지고 자기 주장을 펴는 경우다. 이른바 '허수아비 논법'이다. 예컨대, 무한님이 글의 모티브로 삼고 있는 "블로거 소통거부는 독이고 악일 뿐인가" 하는 글을 한번 보자.

이 블로거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블로거 소통거부는 독이고 악일 뿐이다"고 말한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블로거 소통거부를 가리켜 '독이고 악일 뿐'이라고 말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넌센스 곧 헛소리일 뿐이다.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법인 셈이다.

무한님이 "IP차단과 댓글 삭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묻고 있다. 역시 넌센스에 가까운 우문이다.


무한의 노멀로그


우선, IP차단과 댓글 삭제는 블로그의 기본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을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게 물음이 될 문제라면 블로그에 이같은 기능이 탑재되어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러므로 위의 우문에 굳이 답을 한다면, "블로거 마음이다"는 게 내 대답이다. IP차단과 댓글삭제는 블로거가 사용하라고 있는 기능인 때문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댓글삭제와 IP차단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원칙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헌법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헌법은 일반적인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복잡다기한 세상의 이해관계를 모두 다 커버할 수가 없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법률과 령, 조례, 규약 등이 존재하는 이유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만, 이 주권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에게 위임되어 있는 식이다.

지금 무한님의 물음은 그러므로, 기본 원칙에 관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다시말해, 'IP차단과 댓글 삭제를 해야 하는가 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이게 가능한 선을 어디까지로 봐야 할 것인가의 문제, 즉 우리는 어떤 경우에 '정당하게' IP 차단과 댓글 삭제를 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무한님의 질문은 대상을 특정하여 구체적으로 상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하나마나한 '무한 공론'이 될 개연성이 크고 나아가서는 문제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각기 서로 다른 허수아비를 만들고 거기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될 개연성이 다분해서다. 결국 말이 말을 만드는 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같은 백그라운드를 깔고 내 경우를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앞서 나는 '댓글삭제와 IP차단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 역시 댓글 삭제를 한다. IP차단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다만, 무조건적인 건 아니다. 내가 세부적으로 세우고 있는 하위 기준에 의해서다. 예컨대, 댓글 삭제나 IP차단에 대해 내가 택하고 있는 기준은 이렇다.


1. 쥔장의 블로그에서 쥔장의 이름이나 아이디, 닉네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다.
2. 똑같은 내용의 댓글을 서로 다른 글에 계속해서 다는 경우, 즉 도배를 하는 경우다.
3. 쥔장이 아닌 쥔장의 가족, 특히 쥔장의 아이들을 거론하며 인신공격을 하는 경우다.[footnote]이밖에 이른바 '악플'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비난'과 '욕설'이 있지만, 내 경우에는 '비난'과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댓글을 삭제하거나 IP를 차단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미 밝힌 바가 있기에 생략한다.[/footnote] 
 

나는 이같은 경우 댓글을 삭제한다. 1번의 경우는 글을 주고받는 이의 정체성을 혼란케 하여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교란하기 때문이고, 2번의 경우 역시 다른 이들과의 정상적인 소통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3번의 경우는 지금까지 딱 한 번이 있었으니 사례라 들기는 뭐 하지만, 이 글을 본 이 가운데 그 사례에 해당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기에 굳이 적은 경우다.

물론 위의 경우라고 해서 즉시 삭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몇 번은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데도 이같은 행위가 계속 반복될 때는 삭제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고와 삭제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 무시할 때는 결국 IP까지 차단한다. 그러나 IP차단을 영구적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루쯤 지나면 다시 푼다. 왜냐면, 도배나 인신공격성 댓글은 대부분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리하자.
"IP차단과 댓글 삭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내 대답은 '블로그 쥔장의 마음대로'다.
좀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블로그의 쥔장이 세우고 있는 나름의 기준과 원칙에 따라서다. 와이 낫? [footnote]물론, 이와 별개로 'IP 차단과 댓글 삭제'에 대한 문제점을 말해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를 일반론으로 접근하는 데는 문제가 따른다. 제각각의 허수아비를 만들 공산이 너무 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얘기는 한 숨 자고 인난 다음에 함 더 해보려 한다.[/footnote]




<덧붙이는글> 밤샘을 하고 눈을 붙이려던 참에 무한님의 글을 보고 적은 글이어서 거친 대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듣보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다면 일러주세요. 인난 다음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2009/05/17 14:01 2009/05/17 14:01
작가 황석영은 진실의 광장으로 나와라!
 07.02.08 11:17 ㅣ최종 업데이트 07.07.09 18:40
 

이 글은 지난 2월 5일자 <오마이뉴스>에 실린 작가 황석영씨의 기고문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에 대한 반론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이승철 시인이 보내온 것이다. 토론의 장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가감없이 반박기고를 게재한다. <편집자주>


▲ 파리에서 황석영씨.
ⓒ 황석영

@BRI@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선배작가인 황석영씨와 그동안 쌓아온 문학적 우정에 금이 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은 황석영씨가 현실정치의 새판짜기를 위해 총대를 메겠다는 의도에 상당 부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글은 곳곳에 작가 조정래, 고은 시인 등 특정 문인에 대해 비아냥과 조롱이 가득 담겨있고, 최근 우리 민족문화예술계의 현안으로 대두된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 변경 문제에 대해서도 객관적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번쯤 그 정당성을 생각해봐야 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진실과 대의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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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황석영 작가의 기고문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는 적잖은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황씨는 지난 1월 2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새정치질서 만들기에 총대 멜 생각 있다"며 정치참여 의사를 피력한 바 있다.

'뻘밭' '진흙탕'에 비유되는 현실정치판에 작가가 직접 나선다는 것은 별 실효성도 없거니와 다분히 작가적 오명을 각오해야 할 일이기에 오랜 세월동안 하나의 금기사항이었다.

이러한 금도를 모를 리 없는 황 작가가 공개선언한 현실정치 참여 문제는 지금 문단과 지식사회에서 찬반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왜 하필 명망있는 작가가 자신에게 문학적 오명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을 감행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점이 든다.

물론 작가 황석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역시 황석영답다'라며 통큰 행동주의적 태도에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엇갈리는 반응도 있다.

작가 조정래씨는 지난 1월 29일 장편소설 <아리랑> 100쇄 돌파 기자간담회에서 "작가와 지식인은 정치인들을 더 많이 감시할 책무가 있다, 작가가 현실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자유지만 정치세력에 들어가 부화뇌동하는 것은 자기파멸의 길인 동시에 문학에 대한 배반이다"고 황씨를 비판한 바 있다.

김용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은 어느 사석에서 "총이 있어야 총대를 멜 것 아니야, 구랏빨만 가지고 어떻게 총대를 메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문단의 전통에 크게 어긋나는 황석영씨의 정치적 발언은 차기 정권 창출 문제에 자신의 명망성을 내걸어 적극 개입하겠다는 의사표현인 바, 이는 문단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정치권에도 향후 적잖은 파장을 예고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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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8·15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한 소설가 황석영씨.
ⓒ 노순택
황석영씨는 현재 유럽에서 생활하고 있는 중이다. 약 2년 동안 영국에 머물다가 지난 2006년 초부터 미라보 다리가 보이는 프랑스 파리 센 강변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한국의 정치현실과 좀더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 코리아의 문제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창작활동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던 그가 느닷없이 귀국하여 여야를 불문하고 여러 현실정치인, 명망있는 인사들과 만나는 회동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 배경이 황씨 말마따나 '작가로서 얼룩을 튀는 것을 감수하고' 행하는 순교적 행동인지, 아니면 특정 정치집단의 음모에서 나온 행동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진보적 작가라고 일컬어지는 황씨가 지난 3주 동안 보수언론을 대표하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사주와 잇달아 회동하여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회동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밑그림과 논리, 현실정치판의 새판짜기에 나선 그 이유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국의 명망있는 작가가 한국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3개 언론사 사주와 잇따라 회동한 사실만으로도 이는 쇼킹한 뉴스다.

이 3주 동안 종횡무진으로 여야 인사와 사회단체 인사, 각계 지도급 명망가들과 회동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작가 황석영씨에게 직접 전해들은 바 있다. 말하자면 황씨 표현대로 '개똥폼' 잡고 있는 여러 인사들과 오찬과 만찬을 하고 그리고 새벽 4시까지 인사동에서 통음을 마다 않으면서 자신의 주머니돈을 써가며 정치철학을 피력하고 다닌 것이다. 평소 그를 아는 문학예술계 인사들은 모두 그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5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이후 현실정치판에 기웃거리기를 거부한 그의 성품과 행동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느닷없는 돌출행보에 커다란 의아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무슨 까닭일까?

이번에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고문의 내용을 보면 황석영 작가가 살아온 인생역정과 글쓰기의 변화과정 그리고 작금의 현실정치 문제에 대해 이러저러한 진단과 함께 '87체제의 종언'을 부르짖고 있다.

이어 '우리 다함께 87체제 이전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자 벗들이여. 그때로!' 라고 호소하면서 그의 정치적 밑그림을 설파하고 있는데, 이는 1970~80년대 민주세력들이 현실적, 정치적 소속 관계를 떠나 대동단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가 주창하는 새판짜기의 밑그림을 보자.

"큰 선은 보수나 진보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세력을 줄이고 통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라는 깃발을 들어보이는 것이다. 현재 우리 앞에 공의 핵심을 뚫는 것이 중도"라고 한다. "그 프레임 안에 누가 들어오든 살아서 온다면 그에게 깃발을 쥐어주리라"며 올 대선 정국에 그에 걸맞는 인물을 선정하여 후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황석영씨는 누구든 '중도'라는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면, 그가 한나라당 후보든 그 누구든 간에 당적을 따지지 않고 지지하겠다는 의도를 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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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씨가 <오마이뉴스>에 기고문을 쓴 또다른 목적은 현재 민족문화예술 진영에 뜨거운 감자로 대두된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 변경 문제에 대해 견해와 심정을 밝히고자 함이다. 그는 명칭 변경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을 대변하는 발언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기고문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 변경 보류를 힐난하면서 명칭 변경을 반대하는 회원들을 비판하기 위함임을 우린 알 수 있다. 또한,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문단 사람이라면 그가 언급한 작가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끔 적시하면서 이들에 대해 인격모독에 가까운 발언을 하고 있다.

황씨는 기고문에서 "나는 큰목소리를 내던 내 동년배 작가를 지난 위기의 시대, 어느 현장에서도 어느 글귀의 서명란에서도, 심지어는 회비목록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등등 작가 조정래씨에 대해 사실무근의 음해성 발언을 하였다. 왜 그는 동년배이자 동국대 동문인 작가 조정래씨에 대해 이러한 언사를 했나.

조정래씨는 최근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 변경에 대해서 "시대는 변해도 민족이라는 울타리는 여전하다, 민족은 낡은 개념이 아니다, 지켜야 할 가치까지 폐기한다는 것은 신사대주의다"라며 명백한 반대의사를 표명한 적이 있다.

나는 지난 시절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간사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군사독재 시절 조씨가 사무국 살림에 적잖은 보탬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씨는 주변 문인들에게 술과 밥을 사고, 누구보다 회비를 꼬박꼬박 잘 냈다. 김영삼정권이 안기부법과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킬 때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밤샘농성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석영씨는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비꼬고 있다.

또한 황석영씨는 기고문에서 조정래씨를 '긴급조치 시절 문협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구속문인 석방운동에 비협조적인 인물'로 묘사했는데, 이는 명백한 사실 오류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당시 문협의 사무국장은 조정래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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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규탄 집회를 마친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문인들이 '한국군 파병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좌로부터 정희성, 구중서, 고은, 황석영, 강형철.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와 함께 황씨는 기고문에서 '노벨상' 운운하면서 지난 2년 동안 외신을 통해 한국의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된 고은 시인을 겨냥한 여러 발언을 하고 있다.

황씨는 기고문에서 "노벨상 캠페인 따위는 그야말로 아이들 말로 쪽이 팔려서 스스로 벌인 적이 없다"고 '초연'한 태도를 보이면서 "노대가들이 늙어가면서 글을 쓰는 행위를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대해 구토를 느낀다"고 과도한 혐오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먼산에는 거짓이 많다"라고 고은 시인의 시 구절을 인용하다가 "모두들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고 일침을 가한다.

말하자면 한국정치판의 새판짜기를 위해 화해와 상생, 중도와 통합의 이념을 부르짖던 황석영 작가가 기실은 자신의 생각과 입장에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롱과 힐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뿐만이 아니라 문단 내부에서는 황씨가 최근 3년 동안 수억원의 적잖은 돈을 써가며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생활하면서, 육십이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어학연수 과정을 다니고 그 곳 출판계 인사들과 활발한 인적 교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물론 배움에 있어서 나이를 따진다는 것은 상식 밖의 유치한 일이기에 나는 그것을 비판하진 않겠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잇따른 유럽 체류의 목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을 갖고 있다.

황씨는 "세계체제의 작가로서 나 자신과 한반도로부터의 거리는 코리아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기 위함이다"고 말한 바 있는데, 정말 외국에 살아야만 한국을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기는 것인지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의아할 뿐, 그 속사정을 잘 이해 못한다.

그러기에 지난해 3월 MBC가 황씨의 유럽 체류에 대해 "우리나라의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자이고, 이 상을 유럽국가인 스웨덴이 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행보"라고 보도한 것은 여러 시사점을 안겨준다.

그러나 황석영씨는 짐짓 노벨문학상에 초연한 듯 말하고 있다. 이번 기고문에서 "노벨상에는 몇 가지 도그마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딛고 있는 대지와 구체적인 현실에서 애매모호하게 멀어지게 하는 점이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문단 실정에 어느 정도 알만한 사람들이라면 그가 왜 몇년째 유럽에 상주하면서 그 곳에서 자신의 여러 저서들을 잇따라 번역, 출간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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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 시인,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다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실의와 비탄에 빠진 한국문학의 부흥을 위해 기꺼운 일이 될지언정 비판과 조롱거리는 결코 아니리라. 그 수상자가 고은이면 어떻고, 또 황석영이면 어떤가. 또한 한 작가가 자신의 발품을 팔아가면서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은 찬사를 받을지언정 결코 비판받을 일 또한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특정 작가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그의 발언을 나는 지지할 수 없다. 나는 황씨가 고은 시인의 실명을 언급하면서 문인들이나 기자가 있는 사석에서 "아무개는 노벨상을 위해 전세계로 오가는데 꼴불견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직접 들은 바 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이 기고문도 누구를 겨냥한 발언인지 알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선배문인, 그의 표현대로 '노대가'의 글쓰는 자세에 대해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구토를 느낀다'고 거칠게 폄하하는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황씨가 인격모독에 가까운 언사를 퍼부어댄 두 사람의 문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 변경에 대해 반대 의사를 명백히 표명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국정치판의 새판짜기를 위해 화해와 상생, 중도와 통합의 이념을 부르짖던 작가가 기실은 자신의 생각과 입장에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롱과 힐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이게 최소한, 작가로서의 기본적 양식을 갖춘 발언인가. 지난 40년간 한국문단을 대표해온 명망있는 작가로서 합당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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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총회장. 양성우 시인이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소설 김정한씨가 회장으로, 시인 고은, 문학평론가 백낙청씨가 부회장으로 피선됐다.
ⓒ 민족문학작가회의

지난 1월 하순 민족문학작가회의 총회가 열리기 사흘 전 나는 인사동의 한 술집에 들렀다가 우연히 몇 년 만에 황씨를 보았고, 황씨가 기어이 합석을 권유하는 통에 함께 자리를 했다.

그날 황씨는 <중앙일보> 사주와 만나고 오는 길이라면서 그 신문사 논설위원들, 직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특유의 목소리로 자신의 장기인 넉살과 우스갯소리를 끝없이 선보이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한국 정치현실 변화를 위해 올 대선정국에 총대를 메겠다"고 발언하였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사비를 털어 최근 보름 동안 수많은 정치권 인사와 진보 진영, 시민운동권의 여러 명망가들을 연일 몇 사람씩 만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 손학규도 만났고, 지난 70~80년대 나와 인연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 그리고 최근에는 조중동 3개 언론사 사주들도 만났어. 아름다운 재단의 박원순이도 만나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살지 마라'고 충고도 했지. 박원순에게 내가 지금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대선 후보로 네 이름이 살짝 거론되면 이름 좀 팔라고 했어. 그랬더니 그러마 하고 수긍하더라. 현재의 정치구도가 깨어져야 해. 예컨대 손학규를 범여권 후보로 끌어오면 우리에게 승산 있는 게임이 될 거야."

나는 황씨가 지난 1970년대부터 손학규씨와 절친하다는 것을 익히 알던 터라 그의 현실정치 선언이 다름아닌 현재 대권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는 손학규씨를 염두에 둔 발언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나라당 후보군 중에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을 가진 손학규씨를 끌어오는 것이 범여권 진영에서 하나의 방법론으로 이미 몇 차례 언론지상에서 오르내리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바 있는 '외부선장론'을 한번 상기해보라).

이 때문에 나는 이번 기고문에서 황씨가 지난 70년대와 80년대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촉구한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킹메이커로 나서겠다고 한 것이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인사동에서 나는 김근태나 정동영에 대해 들은 바 없고, 손학규라는 이름을 두세 차례 들었기 때문이다.

손학규씨가 운동권 경력을 지녔고 한나라당 여타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이라고는 해도, 나는 아직 손씨가 남북 문제 등과 관련 한나라당의 보수 노선에 크게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없다.

만약 손씨가 당적 변경 가능성이 있다면 속히 안개 속에서 걸어나와 입장을 천명하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내심 범여권 후보를 겨냥하면서 몸값을 올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한나라당에 잔류한다면, 대권쟁취를 위한 하나의 편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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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날 황씨는 그즈음 조중동 3개 언론사 사주와 만났다는 사실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했다.

나는 진보진영의 대표적 작가로 일컬어지는 황씨가 보수언론사 대표들을 만났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황씨가 몇년 전 '동인문학상'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 보도 태도에 반기를 든 칼럼을 써서 '안티조선' 작가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후 그가 <조선>과 화해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명망높은 작가라고 해도 조중동 3개 언론사 사주를 잇따라 회동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무슨 일로 만났는지 묻자 황씨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중앙일보> 사주를 만났고, 얼마 전 <조선> <동아> 사주도 만났지. 한국문학의 발전, 아니 세계문학의 부흥을 위해 큰 그림을 한번 그려보라고 권유했지. 예컨대 노벨문학상 상금이 현재 100만달러인데, 당신들이 나서서 300만 달러의 상금을 주면 세계 최고의 문학상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래서 프랑스의 르 끌레지오 같은 작가를 제1회 수상자로 하고, 나를 2회 수상자로 한다면 노벨문학상에 필적하는 세계 최고의 문학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권했지. 그러면서 나는 <조선> 사주에게 내가 이름팔 일이 생기면 이제 글을 써주겠다고 했어."

'안티조선' 작가로 세간에 알려진 황씨가 <조선>에 자청해서 기고문을 쓰겠다는 말에 나는 귀가 번쩍 열렸다. 그렇다면 작가로서의 그의 용기에 박수를 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또한 기고문에서는 노벨상 따위에 매우 초연한 것처럼 보였던 황씨가 조중동 3개사 사주를 만나 이런 어마어마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에 내심 크게 놀랐다. 또 1·2회 수상자 명단까지 제시했다는 그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300만 달러라면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0억이 넘는 큰 돈이다. 한국 문학상으로 최고 상금이 현재 1억원인데 30억이라면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의 문학상에 걸맞는 상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는 뉴스를 통해 미국 CIA가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도록 배후조종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런 음모로 이제 조중동의 주도로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 제정된다면 이것은 과연 누구의 배후조종이 될 것인가.

어느 한 작가의 의도대로 문학상이 운영된다면 그게 공정성 있는 세계적인 문학상이 되겠는가고 강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국문학계도 문학상에 얽힌 여러 좋지 않는 추문이 오가는 판인데 이제 그 어떠한 문학상을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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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날 황씨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 변경 문제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이번 기고문에서 "총회 전날에야 명칭 변경 문제가 안건인 줄 전해들었다"고 밝혔다. 그의 명석한 기억력에 대해 알고 있는 나로서는, 바로 얼마 전의 일을 날짜까지 틀리게 말한다는 건 뭔가를 숨기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즈음 여러 신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 변경에 찬동하는 취지로 1면 톱기사는 물론 스트레이트 기사·사설까지 써대던 때였다. 이 문제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총회에서 어떻게 처리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된 시기에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인 선배작가 황씨는 이날 후배문인들에게 명토박듯 말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을 바꾼다는 얘기를 들었다. 잘한 일이야. 세계가 인터넷으로 하루 생활권에 들고 전세계의 모든 상황과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파악되는 이 세계체제 시대에 '민족문학'이라는 간판을 달고다니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 난 이번 총회날 지방에 갈 일이 있어 참석하진 못하지만 총회날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명칭에서 '민족문학'이라는 글자를 떼어내지 못하면 이 단체를 '탈퇴'할 거야."

그러면서 황석영 작가는 문학평론가 백낙청씨도 이미 이 문제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나는 굳이 언론과 민족문화 예술계에 이슈거리를 만들어가면서 서둘러 '민족문학' 명칭을 폐기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기에 황씨의 발언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문제가 황씨가 지난 30년 동안 활동해온 단체를 과감히 '탈퇴'할 만큼 중대한 사실인지 아직도 납득 못하고 있다.

황씨는 이번 기고문에서 '민족'이라는 명칭을 떼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민족의 헛것에서 놓여날 때에 통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설파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민족'이라는 헛것에 놓여나지 못해 통일을 하지 못한 것인 양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회원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사무총장을 비롯한 몇몇 집행부 인사와 특정 작가의 의도대로 '조직의 탈퇴' '사무총장직 사임'까지 운운하면서 회원들의 의사를 강요하는 태도와 자세는 황석영씨 표현대로 '선진 민주사회'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와 다른 의견이 있기 때문에 '너희와 이제 한집에서 같이 놀지 못하겠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는 강변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그 자리에서 문단의 원로인 고은 선생과 동년배인 조정래 작가에 대해 황씨가 비꼬는 투로 말하는 걸 듣고서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마 거기 모인 김준태 시인 등 여타 문인들도 씁쓰레했을 것이다.

특히 문단 사람들만이 아니라 유력 신문사의 논설위원도 함께 하고 있는 자리에서 특정 작가를 거명하며 몰아붙이는 것을 보고, 나는 이러저러한 생각들로 우울하고, 착잡했다. 이 때문에 나와 김준태 시인은 일산행 합승 택시에 작가 황석영씨와 동행했지만 거의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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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 시인.
선배작가 황석영씨의 언행에 대해 새카만 후배시인이 감히 이러쿵저허쿵하는 것은 나로서도 작가적 명예를 걸고 하는 발언이다. 나는 시인·작가들이란 예민하고 날카로운 존재들이어서 구태여 어떤 사안에 대해 일일이 선배작가들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사물의 이치를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어느 작가가 과연 작가로서 품위를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고명한 작가가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위해 자신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특정작가를 공개석상에서 매도한다고 해도 그 특정작가에게 만약 고매한 인품과 작품적 성과가 있다면 그게 손상될 까닭도 없으니, 그저 침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들이란 상처받기 쉬운 존재여서 한 마디 말이 던져주는 폭력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글을 마치면서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작가로서의 자존을 생각해 본다. 글 또한 사람이 쓰기 때문에 인간성과 정비례할 수는 없을지라도 인간성과 반비례하는 작가라면 그 글이 아무리 좋다고 해서 작품만을 따로 떼어내어 평가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진실만이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다.

더구나 혼돈과 카오스의 시대에 '중도'와 '통합'의 정신을 이야기하며 새정치질서 만들기에 총대를 메겠다고 할 때는 그 순수성에 걸맞는 인품의 소지자가 앞장설 때라야 비로소 대중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일국의 시인·작가로서 혹은 당대 문제를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지식인으로서 최소한의 금도를 지키며 활동하는 것을 '개똥폼' 잡는 것쯤으로 치부한다면 과연 그러한 논리가 한국의 정치발전에 얼마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이는 명망의 과실로 명예와 부귀를 누려온 작가 자신의 문학에 대한 자기 모욕에 불과할 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한심한 수준과 내용을 그대로 까발려 자백하는 우울한 행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 마디 하겠다.

작가 황석영은 진실의 광장으로 나와라!
 

덧붙이는 글 | 이승철 기자는 1958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1983년 시 전문무크 <민의> 제2집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월아, 삶아>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 <당산철교 위에서> 등을 펴냈고, 산문집으로 <58개띠들의 이야기>(공저) 등이 있다. 현재 광주전남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겸 사업단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국장, 시 전문지 <시경>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09/05/16 18:52 2009/05/16 18:52

하민혁이라는 이름 석 자만 쓰면 올블 추천 글 베스트는 따논 당상인 모냥이다. 그만큼 하릴없는 청춘들이 많다는 방증일 터다. 오늘도 보니, 하민혁이 어쩌고 하는 글이 추천 베스트에 올라 있다. 뭔 얘기인가싶어 드가봤더니.. 이건 뭐.. 무슨 말인지도 모를 소리들이다. -_

며칠 전에 이명박의 조크 하나를 가지고 노스트라다무스 찾고 이명박이 눈깔 찾고 하는 게 하 같잖어서 그러지 말라고 한마디 했더니 그게 내심 걸렸던 모냥이다. 하기사 쓴소리 듣고 그걸 기꺼워할 사람은 없는 일일 터다. 더구나 하릴없는 청춘임에야 더 말해 뭐 하겠는가. 그런가 보다 할 밖에는.

그런데 그 글에 달린 댓글들이 아주 가관이다. 하민혁이라는 이름만 보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댓글을 쎄우는 바로 그 친구들이다. 저 내용 없는 글이 왜 올블 베스트가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댓글 가운데서도 단연 압권인 것은 도아라는 친구의 글이다.

이 친구가 누구인가? 눈만 뜨면 명박산성 들먹이며 이명박 대통령의 '소통 부재'를 비난하면서 또 정작 자신의 블로그는 그보다 더 높은 '소통 차단'의 산성을 쌓아두고 있는 친구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자기 혼자 산성 쌓고 있는 게 부끄러운 행태라는 건 알았던지 그 초절정의 산성쌓기 기술을 마침 하민혁이 까고 있는 어리숙한 친구 하나에게 전수하겠다고 설레발이다.

이른바 범죄의식을 나눠갖기 위한 '공범 만들기'에 나선 셈인데,
대체 이게 뭔 퐝당한 시추에이션인지 모르겠다. 시쳇말로 손발이 다 오그라들 지경이다. 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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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글> 그래서 말인데, 도아씨, 그 산성은 대체 언제까지 쌓아두고 있을 거에요?  -_
2009/05/15 14:31 2009/05/15 14:31
황석영이 이명박과 함께 진보진영 공공의 적으로 우뚝 섰다. 어떤 이는 이문열이 차라리 더 낫다고 말할 지경이다. 황석영이 지난 며칠 동안 보여준 행보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의미겠다.

황석영의 행태에 대해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는 단연 어떻게 황석영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너무 하십니다, 황석영 선생님은 그 결정판이다.


황석영

부패정치세력 집권저지와 민주대연합을 위한 비상시국회의 결성식 때의 황석영 (2007.12.13)


딴은 통탄할 일이기도 하다. 바로 위의 사진이 보여주듯, 황석영은 지난 2007년 대선 직전에 열린 "부패정치세력 집권저지와 민주대연합을 위한 비상시국회의 결성식"의 주역이었으니 하는 말이다.

그러나 감상은 감상이고, 정작 이 문제를 통해 이른바 진보진영이 얻어야 하는 교훈은 따로 있다.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는 길이다.

이에 대해 바스님은 황석영, 아니 황구라를 위한 변명을 통해 황석영이 지닌 시대적 아픔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데올로그를 벗어난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 했다. 나는 그 소리가 절규로 들렸다"고 말한다. 황석영이 지고 있는 짐이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일 수 있다는 얘기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다.

황석영이 변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지점은 '변화하지 않는 진보' '진보하지 않는 진보'가 변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이다. 내가 보는 이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명박을 수구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그 직전에 노무현을 수구로 몰아갔던 것은 다름아닌 진보라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이다. 이른바 진보진영이 말하는 진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진보인지, 어디로 가자는 진보인지를 물어야 하는 지점이어서다.





<덧>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겠다.
<메모> 1. 진중권은 차라리 귀엽기라도 하다. 2. 유창선의 경우는 전형적인 기생질이다. 3. 7대악법, 지금 초등학생 운동회 하자는 것인가.  
 
2009/05/14 20:09 2009/05/14 20:09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가운데 하나가 이념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틀린 말입니다. 이념보다 더 무서운 게 있습니다. 바로 유행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명박 까대기 놀이가 한창입니다. 이념보다 무섭다는 저 유행의 수준입니다. 이건 한때 유행한 적이 있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는 놀이와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명바기 까자면 자다 인나 삽자루 들고 키보드 두드리는' 수준이어서입니다. 시쳇말로 거의 광적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사실 이 놀이는 그렇게 만만한 놀이는 아닙니다. 우선 이 놀이는 이명박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뉴스에서 전하는 그의 말 한마디, 그가 구사하는 토씨 하나까지 놓치지 않아야 가능한 놀이입니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고도의 이명박 빠돌이가 아니고서는 감히 꿈도 꾸기 힘든 정도로 관심과 집중을 요하는 놀이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난해한 놀이를 날이면 날마다 즐기는 키워들이 있습니다. 정성이 대단한 친구들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명박 대통령이 우즈베키스탄 방문 중에 자신의 핸디캡인 작은 눈을 가지고 살짝 조크를 한 모양입니다. "눈이 작아서 미래가 잘 보인다"고 말이지요. 이명박 까대기 놀이에 한창인 키워들이 이 좋은 꺼리를 그냥 넘길 리 없습니다. 기어이 놀이로 만듭니다. 이름하여,

"이명박은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였다!"는 놀이입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재밌는 친구들입니다. 무튼, 놀이를 만들었으니 이제 열심히 보급에 나서야 합니다.  


이명박
 
이명박

이명박

 
이명박은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였다!

"이명박은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였다!"


두 개의 블로그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실 잠깐 들른 아고라는 더 가관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거 일일이 주소 찾아 적기도 귀찮고 해서 아래 두 블로거를 오늘의 대표 선수로 선발키로 합니다. 대표 선수로 선발된 만큼, 앞으로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화이링~    
 
http://neowave.tistory.com/166
http://savenature.tistory.com/2958

 

 
2009/05/13 10:20 2009/05/13 10:20

“미네르바” 박대성씨 명예훼손 외 관련 고소건 선임계 제출 요청

변호사님,

자칭 “미네르바” 박대성씨가 다음 아고라 네티즌 리드미(영문: readme)에 대해 제기한 명예훼손 외 관련 고소건에 관한 사항입니다.

1. 지난 5월 1일 경찰서에 진술조서를 작성한 바, 변호사님께 알렸던 단순 사실과는 달리, 박대성씨의 명예훼손 고소건(사건 3090 - 2009.3.16) 외에도, 명예훼손 추가 1건 및 박대성씨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김승민씨 명의의 명예훼손 1건, 그리고 박대성씨가 스스로 인터넷에서 짜깁기했다고 주장하는 글에 대한 저작권위반에 대한 고소건까지 총 3건이 본인에게 제기되었습니다.

2. 한편 지난 5월 7일 박대성씨(또는 김승민 박찬종 양씨)에 의하여 명예훼손 1건(또는 몇 건)이 추가로 경찰서에 접수되었다고 하며, 이로써 박대성 김승민 박찬종 삼인이 법률을 남용하여 야비하고 교묘한 협박을 네티즌 리드미 본인에게 자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아울러 아고라 경제토론 게시판 등에서도, “올바른사람들”이란 필명의 김승민씨를 주축으로 15여명 이상의 전문 글장이(속칭 알바 또는 소통위원)들이 선동 또는 매수되어, 본인과 본인의 의견에 동조하는 절대다수 네티즌들에게 교활하며 악질적인 글과 댓글로써 위협과 모욕과 모함이라는 대규모 흑색선전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본인은 자기방어의 정당한 수단으로서는 물론 시민의 알 권리라는 최상위 공익의 수호를 위하여, “가짜 미네르바”의 변호인 박찬종씨에 의해 주도되고, 박대성씨와 김승민씨로 구성된 조직 사기단(이하 “조직 사기단”)의 행패를 지속적으로 폭로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4. 박대성씨가 지난 1월 7일 구속된 이후부터, 검찰과 정부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의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수구신문이 강변하는 “박대성=미네르바” 이론을 국민들은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이미 박대성씨의 변론을 자청했던 박재승 전변협회장과 여러 민변 변호사들이 “가짜 미네르바”가 감추고 있을 “인혁당 사건” 류의 냄새를 의심하였습니다. 박대성씨의 허위성은 동 사건에서부터 철저히 배제된 또는 철수한 정보기관과 경찰의 침묵에서부터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짜 미네르바” 사건은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청와대와 일부 검찰 그리고 여론 조작자인 수구언론이 꾸며낸 그들만의 막장 정치극일 뿐입니다.

5. 박대성씨가 1심 무죄판결로 석방된 지난 4월 20일 이후를 기점으로 하여, 더욱 악랄해진 “조직 사기단”의 전방위적이며 편집광적인 공격은, 박대성의 허위성을 최초 제기한 리드미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짜 미네르바”가 아고라에 게시하였던 글을 서로 나누어 읽었을 뿐인 수십만 순수한 네티즌들을 범죄자로 몰아가며, 그의 글에 대해 단순히 토론하였던 “인터넷 카페”들까지도 연루시켜, 마치 “미네르바”의 유명세를 팔아 불법적으로 사익을 추구하려는 범죄단체처럼 도색하여, 나아가 국민에게 마지막 남은 진실의 광장인 아고라를 폐쇄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6. 이상으로 미루어볼 때, “가짜 미네르바 조직 사기단”의 리드미에 대한 적반하장 격인 명예훼손과 저작권위반 소송 등은, 미네르바의 진실에 대해 단순히 네티즌 리드미의 침묵을 강요하는 공갈을 넘어서, 이명박 현 정권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계획된, 진실 가리기 - 국민 바보 만들기 - 인터넷 길들이기 – 수구신문에 의한 언론장악 – 친일매국 독재정권의 구축 이라는 수순 밟기의 두번째 걸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7.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약자의 인권을 위하여 싸워오신 변호사님께서는, 이번 “가짜 미네르바 조직 사기단”에 의한 리드미 고소건의 복잡성과 정치적 중요성을 이해하시고, 이 사태가 결국 한나라당이 기도하고 있는 언론탄압 악법의 통과에 간교하게 이용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필요하다면, 변호사님의 판단으로 각 분야에 걸출한 전문가를 선정하여 최강의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주십시오. 이것은 이미 리드미 개인의 차원을 떠나 있지만, 본인은 민주와 정의를 위해 싸우실 변호인단의 활동을 개인적으로 전액 부담토록 할 것입니다.

8. 본인이 재판정에 직접 나가 “가짜 미네르바 조직 사기단”의 실체를 밝히기 전이라도, 그들의 집요한 사전 공격에 대해 네티즌 리드미가 자기방어의 정당한 수단을 계속 행사할 수 있도록, 변호사님께서는 법적으로 조치해주십시오. 또 (1)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의 피의자로서 박대성씨가 과연 제3자 리드미에 대해서 고소를 제기할 있는지, (2) 박대성씨 변호인의 보좌역을 자처하는 김승민씨가 과연 박대성씨의 고소대리인이 될 수 있는지, (3) 김승민씨가 과연 박찬종 변호사에 의해 정식으로 고용된 경우인지 아니면 임시 계약에 의한 사건브로커로서 이 경우 변호사와 사건브로커 간의 야합은 법률에 의해 금지되어 있지 않은지의 여부 등에 대해 법리적으로 완벽히 준비해주십시오. (4) 아울러 인터넷 상에서 본인 리드미를 야비한 언사와 허구의 사실로 폄훼하는 “조직 사기단”의 일원들에 대해서도 명예훼손이나 모독의 형사처벌 적용을 검토해주십시오.

9. 우선적으로 아래의 해당 경찰서에 선임계를 제출하셔서, “가짜 미네르바 조직 사기단”의 리드미에 대한 변태적 고소장 남발을 차단하여, 경찰에게 지워진 불필요한 수사 업무와 피고소자 본인의 되풀이되는 부담을 덜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변호사님의 수임 승낙서와 함께 수임 계약금, 그리고 은행계좌를 알려주시면 바로 이체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5월 11일

네티즌 필명 readme

변호의뢰인

담당경찰서

리드미 사건 관련 게시물

* 아고라 경제토론방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 ··· d%3Dd115 에서 글쓴이 readme로 검색
* 또는
http://agora.media.daum.net/profile/li ··· p_id%3D1
* 리드미의 미네르바 관련 글모음 - http://invisible.economist.free.fr/dm/
* 기타 다음 뉴스 또는 구글에서 “readme 미네르바”로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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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21:17 2009/05/12 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