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중항쟁', 그 서럽고 아름다운 운명
(서프라이즈 / 유시춘 / 2009-05-18)


다시 5월이 왔다. 청자빛 하늘아래 신록이 짓푸른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지만 우리 현대사의 5월은 혹독하고 슬프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우두머리로 하는 정치군인들이 학생들의 순결한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채 여린 싹을 틔우기도 전에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로부터 18년간 오로지 ‘산업화’라는 유일의 목표를 향해 그들은 진군, 또 진군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물며 문명국가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인권’쯤이야 그저 헌법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장식물에 불과했다.


종신집권체재였던 유신왕조가 박정희의 사망으로 일순간에 붕괴하자 군사정권의 후예들은 다시 탱크와 총칼을 앞세웠다.


29년 전 오늘부터 이후 열흘간 광주는 의로운 함성으로 들끓었다. 그리고 모가지가 툭 부러져 낙하하는 동백꽃처럼 그렇게 서럽고 슬프게 스러져갔다.


80년 5월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가 태어나기 위해 치러야했던 혹독한 산통이었다. 산모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숨져갔다. 그러나 이후 5.18광주민중항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장점이 되었다. 5월광주로부터 모든 것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의로운 분노, 자유를 향한 부단한 열망, 국민의 평등한 삶을 위한 지극한 소망들이 자라났다. 그리고 이들을 하나의 힘으로 조직하기 위한 지혜도 샘솟았다.


그리고 87년 6월 한달 내내 우리 국민들은 그 무시무시한 계엄령 풍문에도 결코 꺽이지 아니하고 6월민주항쟁을 성취했다. 그 지연된 승리는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와 그리고 민노당, 진보신당등을 낳았다. 이제 우리 국민은 그 누구도 군사쿠데타의 악몽에 떨지 않게 되었다. 영장없이 체포되어 고문당하는 야만으로의 회귀를 걱정하지 않는다. 모두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싹이 돋아 6월민중항쟁으로 잎을 피운 민주주의의 진화로 인한 것이다.


이를 두고 저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거짓선동을 일삼는다. 기득권을 잃어버린 그들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찾은 우리들에게는 때로 불만스럽기도 했지만 대체로 ‘진화하는 10년’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역주행하려고 한다. 실업자는 넘쳐나고 거리의 사람들은 다시 대량으로 연행되고 있다.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온 남북관계는 바야흐로 박살나는 중이다.


이러한 때에 작가 황석영의 ‘중도실용’발언이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문단 말석에 이름을 얹은 사람으로 너무 가슴 아프다.


황석영은 이 시대가 낳은 빼어난 ‘천출광대’이다. 청춘시절에 내 가슴을 친 그의 ‘객지’ ‘삼포가는 길’ ‘낙타누깔’ ‘한씨연대기’등을 어찌 잊으랴? 70년대를 향해 날린 그의 소설 ‘장길산’은 역사라는 옷을 걸친 걸출한 사회소설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사회가 아끼고 보듬어야하는 귀중한 문화자산이다.


더구나 5월광주와 관련해 그는 그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처음으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상재해 처음으로 5월광주의 실상을 단행본으로 알렸다.


5월광주에 관한 한 나는 그를 믿고 싶다. 황석영 자신도 그를 믿어달라고 한다. 나는 그의 분단극복의지를 또한 믿는다. 북한 체류 당시 김일성 주석이 그를 가리켜 ‘민족의 재간동이’라 했다한다. 그의 ‘배암장수’ ‘요코하마 엘레지’등을 비롯한 삼삼한 구라를 듣고 있자면 나는 그와 같은 빼어난 재간동이와 함께 동시대를 산다는 것이 즐거워진다.


그런데 왜그랬을까? 의문이다. 그는 혹시 모두들 우울한 우리를 한바탕 신명나게 웃겨주려고 그랬을까? 일단 그의 말을 모두 믿어주고 싶다.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 심정이리라.


이 시대가 선물한 빼어난 황구라여! 돌아오라, 지난 일주일간여의 삼삼한 ‘구라’를 깨고 부디 빛나는 자신의 자리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오늘 다시 5.18을 맞아 아직 5월광주의 열흘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서프앙을 위해 여러 자료를 총합해 내가 간추려 놓은 ‘광주열흘’을 첨부한다. 다소 길게 정리했으나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정리했다고 본다.


두고두고 참고해 아직 잘 모르는 이들에게 전파했으면 한다.



ⓒ 유시춘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광주민중항쟁', 그 숭고한 열흘 ( 기록정리 - 유시춘 )


전야

80년 5월 18일 밤 9시. 중앙청 국무회의실에는 비상국무회의 소집연락을 받은 국무위원들이 모였다. 무슨 안건을 심의해야하는지 사전 연락도 없었다. 그런데 국무회의실 복도 양편에는 착검한 소총을 든 무장군인들이 늘어서서 일일이 국무위원들의 신분을 확인하는등 살벌한 분위기였다.


신현확총리는 9시 42분에 제 42회 임시국무회의 개최선언 후,국방부에서 의안 360호로 제출한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을 상정하고 의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옥길 문교장관이 의안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지만 단 한번의 찬반토론조차 없이 단 8분만에 비상계엄확대선포안은 가결되었다. 최규하정부는 처음부터 신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은 내각의 권한을 박탈하고 정치권과 재야의 주요인사를 체포하고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인 학생운동을 궤멸시키는 12. 12군사반란 이후의 ‘제2의 쿠데타’를 시작했다.


10.26사건을 이유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일원에 선포된 비상계엄과 마찬가지로 이날, 대통령 공고 제 68호로 계엄사령관이 발표한 비상계엄확대조치는 유신헌법과 계엄법 규정에도 어긋나는 불법조치였다.


제주도를 포함해 전국에 계엄확대를 선포할만한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무런 비상사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역계엄의 경우 그 지휘계통이 대통령-국방부장관-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지는데 비해 전국계엄인 경우에는 대통령에서 곧바로 계엄사령관으로 내려가게 되기 때문에 국방장관은 업무권한 밖에 있는 점을 이용해 전두환의 직접통제하에 두고자 했던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로써 전두환이 장악한 합동수사본부는 내각과 정치권을 완전히 무력화시켜버렸다.


밤 10시. 유신의 본거지로 부귀영화를 누린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이세호등을 권력형 비리로 체포하고 김영삼등 야당주요정치인들은 가택연금으로 묶어버렸다.


가장 적대적이며 향후 잠재적 적대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민주인사 그룹들에게는 소요 배후조종혐의를 덧씌워 체포 감금했다. 이들은 김대중 문익환을 정점으로 예춘호 김동길 리영희 고은 인명진 이해동 등으로 각계에 포진한 민주인사들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18일 계엄포고령 10호를 발표해 국회의원과 정당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정치권의 저항을 원천봉쇄시킨 20일, 이미 소집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서는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병력이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국회의원의 등원을 막았다.


헌법상 계엄해제를 의결할 권한을 가진 국회의 기능을 정지시킨 이러한 국헌문란행위를 문제삼거나 저지할 수 있는 국민역량이 성숙되지 않은 가운데 신군부의 행보는 아무런 거침이 없었다.


80년 봄 광주의 학생운동 역시 학생회부활,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쳐 비상계엄해제와 유신잔당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이 서울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5월13일 밤의 서울시내 가두투쟁을 전해들은 전남대는 14일 오후 교문의 경찰저지선을 돌파해 도청앞 광장으로 집결해 대규모집회를 열었다. 일반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 12. 12쿠데타의 내용과 신군부의 음모를 폭로했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는 않았으나 경청하고 유인물을 정독했다.


15일, 조선대 광주교대까지 합세해 도청분수대에는 1만 6천여명이 모였다. 여기에는 교수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참가했다. 경찰은 집회저지를 포기하는 대신 질서유지를 당부했다. 시위도중 시민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변화하면서 같이 구호를 외치고 학생을 격려하는 모습이 서울과 다른 모습이었다.


16일 오후, 5.16쿠데타 19주년에 벌어진 가두시위는 광주지역 학생회연합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었기에 9개대학 3만여명이 집결했다.


전날 ‘서울역회군’이후 서울의 대학들이 일제히 시위를 중단한 줄 알고 있었지만 신군부의 유신부활음모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학생들의 투쟁의지를 높이기 위해 집회를 결행했다. 바로 이날,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 ‘제2시국선언문’을 낭독했는데 후일 계엄사는 이를 김대중을 ‘광주사태 배후조종자’로 몰아가는데 악용하게 된다.


‘5.16화형식’을 끝으로 해산하기 전에 학생회지도부는 휴교령이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이후로는 매일 10시에 일단 학교 정문 앞에 모일 것을 결의했다.


17일은 전국이 모두 평온한 주말이었다. 19일 다시 시국성토대회를 열 준비를 하고 있던 전남대 총학생회실에 서울 이화여대 학생대표자회의를 급습한 검거선풍이 알려진 것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비상사태였다.


9시에 일단 전원 대지호텔로 피신한 결과로 잠시 후 밀어닥친 계엄군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본격적 검거가 시작된 11시부터 상황을 모른 채 자택에 있던 22명이 광주 505보안부대가 주도한 예비검속으로 합수부로 끌려갔다. 이중 12명이 학생지도부였다.


신군부는 주말의 공백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광주의 지도부를 일거에 와해시키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광주의 학생 시민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16일의 약속 ‘아침 10시 학교 앞’ 뿐이었다. 그리고 5월 18일 아침이 왔다.


7공수여단과의 첫 충돌 : 5월 18일


5월 17일 21시 40분 비상계엄확대안이 비상국무회의를 통과한 직후 신군부는 서울 광주 전주 대전에는 유사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공수부대를, 대구와 부산에는 해병대를 급파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서울, 광주가 신군부의 우선적인 주요목표였다.


서울에는 1,3,5,9,11,13등 7공수여단(여단장 신우식 준장)을 제외한 특전사병력 전부와 최강전투력을 보유한 20사단을 배치했다. 


2군 예하 중앙기동예비부대인 7공수여단은 수개월동안 시위진압훈련에만 몰두한 ‘신군부의 정예부대’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시위진압장비가 아닌 전투장비로 무장하고 광주에 투입되었다. 이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17일 자정 전남대에 진주한 33대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교내에 있던 학생들을 무차별로 진압봉과 군화로 초주검으로 만들었다. 이들이 맞아서 밤새 퉁퉁 부은 얼굴로 팬티만 입은 채 본관 1층 복도에 꿇어앉아 있는데 아침 7시경 휴교령이 내린 줄 모르는 면학파 학생들이 교문으로 들어가려다가 군인들에게 잡혀 구타당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들이 정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10시. 2백여명이 모이면서 용기를 얻은 학생들이 공수부대의 학교점령을 비난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 공수부대 물러가라’


33대대장 권승만 중령의 공격명령과 함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학생들은 피투성이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광주교대와 조선대, 전남의대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비록 지도부가 체포되거나 은신중이었지만 학생들은 이 소식을 시민들에게 전하기 위해 스스로 도청 앞으로 행진했다. 전남대정문-광주역-공용버스터미날-카톨릭센터에 이르는 3km를 행진하는 동안 학생들은 시민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김대중 체포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시위대’를 형성하지 못했다.


오후 3시, 구호와 함께 산발적 투석전을 벌이던 학생 시위조에 점차 시민들이 합세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광주천변을 지나면서 공원부근에 집결해 있던 5백여명과 환호하며 합세했다.


곧 이들에 의해 동명동 파출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이들이 청산학원부근에 이르러 경찰저지병력에 부딪힌 4시 반, 갑자기 공수부대의 공격이 덮쳤다.


공수부대원들은 3인이 1조를 이루어 젊은이들에게 무조건 M 16개머리판과 곤봉으로 짓이기고 끌고 갔다.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면서 삽시에 살벌한 유혈공포가 거리를 메웠고 골목으로 피신한 학생들을 집집마다 숨겨주었다.


시내 여러 곳에서 공수부대의 처참한 공격을 목격한 시위대의 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무기가 될 만한 각목 쇠파이프 등이 쥐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두리동네인 산수동 계림동 부근에서는 시내에서 벌어진 시위를 전하는 유인물이 나돌았다.


이 시각에 광주소요를 보고받은 신군부는 11공수여단 본부를 선발대로 증파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성남 K-16비행장에서 C-123수송기 5대에 분승한 본대는 광주로 이동했다. 시위가 계속될 경우 대규모의 살상을 각오한 신군부의 기획이었다.


둘째 날, 19일 - 피의 일요일


공포 속에서 밤을 지샌 시민들은 날이 밝자 시내상황을 주시했다. 중심가의 몇 상가가 철시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미 7공수가 금남로 끝 유동삼거리 수창초등학교 앞에 집결해 전투준비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금남로에 일체의 차량통행이 금지된 가운데 시내 전역에는 군인과 경찰이 젊은이들을 보이는대로 무조건 연행했다.


이러는 가운데 10시부터 시민들이 모여들어 5천여에 이르자 ‘애국가’ ‘정의가’ 전남도민의 노래‘등을 부르기 시작했다.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에 시민들은 벽돌 각목 화염병으로 맞서며 맞섰다. 경찰이 밀리자 공수부대가 군용트럭 30여대에 분승, 도청앞과 광남로 네거리에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민들을 포위해 압박했다.


착검한 소총과 곤봉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병력은 시민들을 향해 돌진해 닥치는대로 휘둘렀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비명과 유혈이 낭자한 아비규환으로 떨어졌다.


오후 들어 건물과 골목에 피신해 있던 시민들은 다시 모였다. 오전에 볼 수 없었던 40대 이상의 장년과 부녀자들도 다수 참여했다. 공방이 계속되면서 시민들은 점차 불어났다.


4시경, 공수대원들은 총검술동작으로 시민들을 향해 돌진했다. 여러 명이 달려들어 무조건 구타하고 쓰러지면 끌고가 군용트럭 안에 던졌다. 하늘에서는 군용 헬기 2대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극소수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동조하지 말라며 선무방송을 했다.


이 때 카톨릭센터의 비극이 일어났다. 9층 옥상에서 무전기로 시위상황을 알리고 있는 공수대원 6명이 청년들의 눈에 띄었다. 옥상으로 올라간 2백여 청년들에 의해 공수대원들은 무장해제당했다. 청년들 중 몇이 대검에 찔려 병원으로 실려가는 한편으로 공수부대원을 공격한 청년들은 빼앗은 소총을 치켜들었다.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장갑차가 맹속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으며 이 순간에 센터 안에서 미쳐 나오지 못한 청년들은 들이닥친 공수대원들에 의해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급습에 밀려 중앙초등학교 후문 부근에서부터 화염병을 투척했다  열세를 면치못한 저항은 문화방송에 이르러 취재차량 2 대와 방송사 집기를 끌어내 불을 질렀다. 어용방송을 향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공수부대의 습격이 밀어닥치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시위대를 추격해 공격하던 공수부대원이 시민들의 포위와 역습으로 희생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양상은 점차 동구 학동과 남광주역 등 외곽으로 번져나갔다. 7여단 병력의 행동반경은 시내 중심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청년들을 뒤쫒아가 보는 대로 습격했으며 민가도 가리지 않았다.


이 유혈참극을 목격한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다만 소수의 학생들이 서로 격려하면서 공수부대와 숨바꼭질을 벌이면서 계엄해제와 김대중석방을 외치면서 산발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광주고 부근과 카톨릭센터 앞에 가까스로 600여명의 대오가 잠시 형성되었지만 공수부대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7시경부터 비가 내렸다. 흉흉한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광주를 구하자’. 요소요소 집결한 시민들은 흥분과 분노에 들끓었다.


계엄분소는 오후 6시를 기해 계엄공고 제 4호를 발표 밤9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로 통금을 연장했다. 11시에는 계엄군과 경찰을 묶어 36개 지점에 합동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폈다.


18일 7여단 33, 35대대의 행위는 시위진압이라기 보다는 시민을 상대로한 일대 학살극이었다. 진압봉과 군화뿐만 아니라 대검을 사용했으며, 그 대상도 청년은 물론 노약자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었다. 부상자에게 응급조치는커녕 개처럼 끌고 가 트럭에다 던져버렸다.


2군사령부 상황일지상으로 이날 연행자는 대학생149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시민 184명이다. 이중 68명이 두부외상, 자상등이었고 12명은 중태였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본다. 


셋째 날, 5월 20일의 ‘항쟁’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친 20일 10시경 대인시장 부근에 시민 1천여명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로 인근 상인과 주민들이었다. 새벽 6시경 사직공원 근처에서 온몸이 짓이겨진 참혹한 주검(김암부, 36세)으로 발견되는 등 전날 진압의 잔학성과 피해상황소식에 모두 치를 떨었다. 노인들은 6. 25보다 참혹하다고도 했다.


이들은 광주고를 돌아 시민회관 네거리로 나아갔다. 그러나 금남로에 도착하기 전에 공수부대와 대면했다. 그런데 19일과 달리 공수부대 진압방식이 다소 온순해져서 그저 군중의 결집을 저지하는데서 그쳤다.

시내 고교생들이 교내농성을 비롯해 시민들에게 합세할 기미를 보이자 시교위는 이날부터 임시휴교조치를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고교생들은 오히려 이를 기화로 거리로 쏟아졌다. 많은 상인들도 철시하고 거리로 나왔다.


금남로를 중심으로 배치된 공수부대는 이들 극도로 분노한 시민들에게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12시를 전후해 3여단 병력 1390명이 대거 시내에 투입되면서 상황은 잠시동안의 소강상태로부터 다시 19일과 같은 격전으로 변했다.


1시반의 상업은행 앞, 2시반의 충장로와 도청 앞은 특히 격돌한 지점이었다. 시내에서 다소 먼 계림동에서는 2천여명 시위대가 대형화분과 가드레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장갑차를 앞세운 63대대와 대치했다. 동문다리에서는 중학생 2백여명이 투석을 하기도 했다.


시위가 한층 격화된 3시부터 3개 여단 10개 대대는 대대적인 작전을 펼쳤다. 3여단 11대대는 금남로3가 - 신탁은행- 충장로- 광주극장 - 황금동지역을, 12대대는 광주시청부근, 13대대는 광주일고부근, 15대대는 누문동을, 3여단 본부는 전남대입구를 작전을 폈다.


7여단 33대대는 게림파출소- 광주고교, 35대대는 금남로 4가 한일은행,  11여단 61대대는 도청앞, 62대대는 광주우체국주변을 63대대는 대인파출소를 맡아 진압했다.


그러나 각 대대는 각각 수천명의 시위대와 대치해 있었고 공수부대가 이동한 공백을 또다른 시위대가 점령하면서 공수부대는 19일과는 달리 분리된 점과 선만이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시위대는 점차 도청을 향해 전진했다. 4시에 군중은 3만여에 육박했다.이 때 이미 이들은 맨 손이 아니었다. 이들은 근처에 있는 물건 중에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각기 스스로 알아서 집어 들었다.


비로소 신군부의 음모를 확연히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리고 모금으로 앰프부터 구입했다. 애국심으로 무장한 여성들이 시내를 돌면서 스피커로 시민들을 독려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시내곳곳에 유인물로 신군부의 야욕을 알렸다.


특히 운수노동자들의 집결이 주효했다. 3시경에 광주역 앞에 집결한 50여대의 택시는 일제히 경적을 울려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18, 19 이틀간 유혈참혹상을 가장 생생히 보았던 이들이었다.


6시경에 무등경기장에는 2백여대가 넘는 각종 차량이 모여들었다. 시민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군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이들의 의중을 알아차린 11여단은 전일방송 앞에서 대형 바리케이트를 쳤다.


어둠이 내리는 시각에 12톤 대형트럭과 버스를 앞세운 차량시위대가 전조등을 밝히고 일제히 경적을 울리면서 금남로에 나타났다. 트럭위로는 20여명 청년들이 올라탄 채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 행렬과 군경의 접전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었다. 시위대는 군경의 거점인 파출소, 시청, 방송사들을 공격했다. 시민들은 피해상황에 대한 아무런 보도없이 태연히 오락프로를 내보내고 있는 방송에 분노했다. 결국 KBS와 MBC는 화염에 휘싸이고 말았다. 광주의 하늘을 밝힌 화염은 관제언론을 향한 시민의 타오르는 분노의 상징이었다.


광주신역은 또한 격전지역이었다.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요충지 신역을 12대대는 결사확보하려했다. 밤 11시경, 갑자기 총성이 어둠을 찢었다. 그러자 시위대에서 외침이 들렸다. ‘공포다. 물러서지 말자!’ 그러나 잠시 후 대열의 맨 앞줄에서 시민들이 쓰러졌다. 공포가 아니라 3여단은 시민을 겨누어 발포한 것이었다.


수세에 몰린 3여단은 시내 여러곳에 흩어져 작전중인 11. 13. 본부대대를 신역으로 불러들였다. 이날의 발포는 군의 문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직 20일밤과 21일 새벽 인근병원에 실려온 부상자의 진료기록부에만 남아있다.


그리고 3여단 소속이었던 한 사병의 국회청문회 기록으로 전한다. ‘광주역에 도착해 보니 군인들이 역건물을 뒤편으로 하고 일렬로 도열한 채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고 분수대쪽에서는 시민들이 탄 버스와 트럭이 돌진해오다 분수대에 쳐박혔다. 이때 3여단 운전병이 트럭에 치여 사망했고 20명 정도의 시민이 피가 흥건한 채 분수대 주위에 방치돼 있었다(1989, 2, 24광주특위 제 30차 청문회)’


자정무렵 금남로에는 20여만 시민이 집결했다. 거대한 군중은 계엄군을 포위했다. 시위대의 도청점거는 시간문제였다. 예광탄이 어둠을 가르며 날았고 총성이 몇 차례 울렸다.


도청 광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발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귀가하지 않았다.


새벽 1시. 세무서가 불탔다.


물론 발포가 진행 중이었으며 조선대 앞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불타버린 양 방송사, 그리고 편집이 중단된 광주지역 신문사와 더불어 외부로 통하는 시외전화마져 두절된 광주는 외로운 섬으로 변했다.


그러나 여러 지역의 격전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과도정부의 내각 신현확과 국무위원이 소요와 관련해 전원 물러났다는 발표만 있을 뿐 이때까지도 광주에 대하여 아무런 발표가 없었다.


넷째 날, 21일 - ‘초파일의 유혈참극’


계엄군의 발포후 광주전역의 병원은 총상환자들의 신음으로 넘쳐흘렀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실어나르는 운전자, 혼신으로 이들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의사와 간호원, 그리고 헌혈행렬이 광주의 풍경이었다. 오전 8시를 기해 전국각지에선 광주행 운행이 중단되었다.


전날 새벽까지 지속된 ‘신역공방’ 이후 3여단은 전남대로 철수하고 7여단 11여단은 조선대로 밀려났다. 동이 트자 신역에서 3여단이 미쳐 거두지 못한 시신 2구가 발견되었다.

태극기를 덮은 시신을 앞세우고 수만 시민은 행진을 시작했다. 10시경에 10만을 넘어섰다. 위대중 일부는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진입해 대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트럭20대를 몰고 나와 외곽의 시민들을 도청으로 실어 날랐다.


11시경 군중은 30만에 육박했다.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은 대표를 뽑아 도지사와 협상을 시도했다. 10시 50분경 도지사는 헬기로 금남로상공을 선회하면서 공수부대병력 철수요구와 질서유지를 당부했다.


이때 11공수여단은 전일빌딩을 경계로 저지선을 폈다. 시민들은 도시사의 병력철수노력을 기대하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미 시위진압에 소극적인 정웅 31사단장으로부터 공수부대 3개여단 10개대대의 지휘권을 사실상 박탈한 상태였다. 신군부핵심들은 직접 광주로 내려왔다.


진종채 2군사령관, 육본 김재명소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장세동 특전사 작전참모등은 공수부대 지휘소에 머물면서 여단장들을 모아 작전회의를 열어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21사단장 박준병소장은 20일밤 8시 이미 광주투입명령을 받고 효창운동장에 주둔해있던 61연대를 10시반에 급파했으며 그 자신은 62연대를 이끌고 광주로 갔다. 나머지 60연대 역시 21일 밤 광주로 합세하게 되어 인구 73만 광주에는 무려 2만에 육박하는 무장병력이 파견된 것이었다.


정오 넘어서도 공수부대가 철수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민들은 그들을 밀어내기로 결정했다. 지난 심야의 발포로 인해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시. 광성여객 버스가 접근하자 일부병력이 사격을 개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집단발포가 개시되었다. 공수대원들은 엎드려쏴 자세를 시민들을 조준해 일제히 사격했다. 메가폰으로 사격중지명령이 나기까지 10분간 계속되었다.


금남로는 피의 바다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최소한 54명이 사망하고 5백명 이상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무기를 찾아나섰다. 인근 나주경찰서, 광주 석산화약고, 화순탄광등으로부터 다량의 총기와 탄약을 접수했다.


같은 시각, 시가지 상공을 선회하던 헬기는 제봉로 부근에서 기총소사를 감행했다.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나딩굴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철수하고 정부가 사과할 것이라는 기대가 부질없는 환상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이때 젊은 시위대를 선두로 무기를 나누기 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무고한 희생을 막고 스스로 생명을 지키기 위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일컬어 ‘시민군’이라고 명명했다.


칼빈과 M1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중심가에 나타난 것은 3시 15분. 수천 시민이 따르는 가운데 시민군은 3시반 이후 도청 앞 저지선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비록 보잘것 없는 무기였지만 시민들의 단결과 기개가 충천했다.


양쪽의 총격전이 개시되었다. 어느새 ‘시가전’양상을 급속히 나타내기 시작했다.


4시. 광주의 공수부대는 주둔지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들은 새로운 주둔지인 화순 주남마을로 철수도중에도 총기를 난사하여 많은 시민들을 살상했다. 어두워질 무렵에 시민군은 도청으로 진입했다.


공수부대가 철수하고 난 다음에야 언론은 ‘폭도’ ‘폭동’ ‘약탈’ ‘무정부상태’등의 거짓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광주는 진실에 목말라 했다. 여기에 응답한 것이 ‘투사회보’였다.


투사회보는 5월 25일 8호까지 발간했다. 윤상원, 박용준을 중심으로 한 ‘들불야학’팀은 학살만행과 시민들의 행동강령등을 담아 배포했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항쟁 지도부’는 구성되지 않았다.


종일 총성과 피비린내가 만연했던 이날은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다섯째 날, 22일 - ‘사태수습위’구성


광주시민의 항쟁에 밀려 병력을 외곽으로 철수시킨 신군부는 항쟁이 전남일원으로 번지는 것을 보고 무력공격과 이념적 공격을 병행시켰다.


장악하고 있는 언론을 통해 항쟁을 고정간첩과 불순분자의 폭력난동으로 선전하는 한편으로 광주로 통하는 7개 주요도로를 점령하고 봉쇄했다. 그들은 시위대의 차량뿐아니라 모든 통행자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22일 새벽 외곽으로 나가는 효천철길, 그리고 오후 3시 적십자마크와 헌혈차라는 플래카드를 부착하고 화순으로 가던 도중 지원동 너릿재에서 집중사격을 받아 많은 희생이 생긴 대참사가 발생했다.


새벽에 도청으로 들어간 시민군은 1층 서무과를 상황실로 정하면서 점차 질서와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라톤회의 끝에 정오 지나서 ‘5.18사태 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독립투사 최한영옹)’를 결성하고 7개의 요구사항을 결의했다.


‘시위사태의 근본원인에 대한 언급없이 임시방편적인 수습에만 급급했다’는 불만이 많았지만 수습위원들이 상무대 전남북 계엄분소를 찾아 군 측과 협상했다.


도청 앞에서는 뚜렷한 주최측도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 토론이 이루어졌다. ‘유혈방지’와 ‘질서유지’에 대해서는 모두 적극 찬동했다. 또한 무기회수에 전원 동의함으로써 도청과 공원에서 2백여정의 총기가 회수되었다.


한편으로는 대학생이 책임져야 할 몫이 크다는 데 의견을 모아 학생들 중심의 ‘15인 학생수습위’를 구성했다. 이들은 총기회수, 차량통제, 수리 보수, 질서회복, 의료반등의 부서를 두고 질서회복에 주력했다.


외로운 도시, ‘해방광주’의 닷새


항쟁 6일째인 23일, 시 외곽에서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리는 가운데 날이 밝자 시내 남녀 고교생 7백여명이 대대적인 청소작업에 나섰다. 시민들이 이에 적극 호응해 함께 했으며 상가들도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전쟁상태’는 계속되고 있었다.


백운동에서의 시민군과 무장헬기의 충돌로 헬기에 타고 있던 3명이 사망하는가하면 저녁 무렵에는 화순으로 가던 시민군이 헬기로부터 기총소사세례를 받고 차량 안의 4명 전원이 사망했다.


오후 8시 광주교도소를 경비중이던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여러차례 충돌이 일어났으며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23일을 기해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전선이 형성된 시 외곽지역에는 광주를 빠져나가는 행렬이 이어졌다. 또한 광주에 학생 자녀를 둔 외곽의 많은 부모들이 대치지역을 피해 들판가운데로 난 소로를 통해 시내로 진입해 오기도 했다. 


한편 시민.학생수습위는 결사항전과 투항의 기로에서 번민하게 되었다. 회수한 무기 200여정을 계엄분소에 반납하고 연행자 34명을 데리고 돌아왔지만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계엄당국과의 협상 결과에 반발하는 시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수습위는 5400여 정의 총기 중에 절반에 못미치는 2500여정만을 회수했다. 극도의 고립감과 계엄군 재진입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총기를 반납한 시민보다는 더 많은 이들이 총을 놓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대부분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한 이들로 기층민중 출신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매우 위험한 시외곽 경계임무와 26일에 탄생한 기동타격대의 역할을 자원함으로써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수습위는 두어차례 조직개편을 거치며 25일까지 활동한다.


한편 광주지역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청년활동가들은 대부분 도피중이거나 예비검속으로 505보안대에 감금되어 있었다.


21일의 학살만행을 참담하게 지켜본 활동가들은 조직적 역량이 성숙되지 않은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상황을 비관적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조직적 대응을 포기하고 각자 몸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층민중을 주축으로 한 시민군이 공수부대를 밀어내고 일시적으로나마 광주를 스스로 지켜낸 것은 이들 지식인 활동가들의 예상을 뒤엎은 것이었다. 항쟁이 전남일원으로 확산하는 기미와 무기반납을 둘러싼 갈등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소심함과 관념성을 두드리는 죽비와 같은 것이었다.


윤사원 김태종등은 22일 도청 앞의 자연발생적 대중집회를 보다 발전시키기로 하고 23일부터 홍보활동을 통합했다.


이후 매일 도청앞 광장에는 수만 시민이 모여 다섯 차례의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이는 항쟁의 거점을 흔들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윤상원등은 우선 차량통제부서를 통해 모든 시민군 차량을 등록하게 하고 차량별로 각종 임무를 할당하고 시민군의 차량대기조를 40대 이상으로 증강시켜 기동성과 조직력을 보강했다.


도청수습위의 허술한 체계를 비집고 침투한 정보원들의 분열 책동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이들은 투항주의적 노선을 빠르게 투쟁노선으로 바꿔 나갔다.


24일부터 시외곽에서의 양민학살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격분했으며 시민군들 중에는 무기회수에 강력히 반발하는 이들이 늘었다. 기존의 수습위는 내분과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활동가들은 25일 10시 홍남순, 송기숙, 명노근, 조아라, 장두석, 윤영규 박석무등 재야인사들과 회합했다.


오후3시 3차 궐기대회에서 이들은 국민, 전국 종교인,전국민주학생, 희생자가족들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연대를 호소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성명서와 함께 종합적인 시민피해상황을 발표했다.


이들은 새집행부를 세워 결사항전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밤 10시 도청 내무국장실에서 이렇게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한다.


새지도부는 철야회의를 통해 상황과 과제를 점검했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시민들의 일상을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시내버스 정상운행, 관공서의 일상업무 정상화, 시장과 상가의 영업재개, 식량공급을 위한 시청 비축미 공급, 지역 언론기관의 재가동, 시외전화개통, 순찰대재편과 치안유지등이었다. 투항과 항전을 둘러싼 갈등은 투항파들이 수습위를 떠남으로써 정리되었다.


이와 함께 YWCA에 대기중이던 대학생 병력을 추가로 도청에 투입해 경비임무를 맡기고 여고 여대생 여성노동자들은 자진해서 취사 선전 간호임무를 맡았다. 새 지도부는 항쟁의 자연발생적 방어적 성격을 넘어서서 항쟁이 지닌 혁명성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26일, 날이 밝으면서 농성동을 경계중이던 시위대로부터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가 무전기를 타고 도청으로 흘러들었다. 최소한 유혈사태만은 막아보고자 한 수습위원들은 당황했다. 신부들이 맨 먼저 나섰다.


‘어른들이 총알받이로 나섭시다. 지금 이 상태로는 탱크 앞에 나서도 죽을 것이요, 여기 있어도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원 나갑시다’


김성용 조철현신부를 비롯해 홍남순 윤영규등 17명이 금남로에 일렬횡대로 섰다. 그들은 수창국교 광주교대를 거쳐 계엄군의 탱크가 포진한 농촌진흥청까지 4km 남짓 걸어갔다.


언제 어디로부터 총알이 날아들지 알 수 없는 ‘죽음의 행진’ 뒤로 수많은 시민이 뒤를 이었다. 탱크 앞에서 정지한 행진은 상무대에서 협상을 열었다.


그러나 자정까지 무기를 모두 반납하라는 최후통첩 이외에는 그 어떤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성용 신부는 한계를 절감하고 이후 번민을 거듭한 뒤 고립무원의 광주를 빠져나온다. 그는 사태를 외부에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어둠을 헤치고 서울로 향했다.


‘죽음의 행진’ 소식에 접한 광주대교구 윤공희 주교는 계엄사에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참극을 막고자 했던 주교는 계엄사에 간청한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전날인 25일 광주를 다녀간 최규하는 수습위원들은 만나지도 않고 계엄분소만을 다녀간 후 진압을 격려하는 일방적인 담화문을 이미 발표한 후였다.


공수부대가 광주비행장에서 도청진압작전 리허설을 하고 있던 오후 3시에 항쟁지도부는 5차 범시민궐기대회를 열고 있었다. 상공에서는 군용헬기가 ‘소탕작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전단을 대량 살포했다.


죽음의 행진을 끝내고 협상을 벌이던 수습위원들로부터 전갈이 당도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오늘밤 공격해 올 것 같다는 통첩이었다.


지도부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시민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두행진에 나섰다. 계엄군과의 대치선까지 갔다가 다시 도청으로 돌아오자 5천여 행렬 중 3백여명이 남았다. 최후의 전사들이었다.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지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27일, 최후의 새벽


도청을 기습타격 할 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은 완전무장을 갖추었다. 얼룩무늬제복 대신 일반보병 전투복 위에 방탄조끼를 입고 20사단이 봉쇄선을 편 주남마을로 공수되었다.


7, 11여단 역시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했다. 20사단 역시 새벽 3시 30분까지 전병력이 시내 중심가를 포위한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했다.


계엄군은 작전개시 전에 광주와 전남일원사이의 전화선을 차단했다. 물론 시내전화선도 끊어버렸다. 전화선이 끊기기 직전에 제보로 계엄군진입을 알게 된 항쟁지도부는 비상령을 내린후 최후항전을 기다렸다.


칠흑 어둠 속에 모든 것은 정지해 있었다. 가두방송의 두 여학생이 토해내는 절규만이 심야의 정적을 찢으며 잠들지 못하는 시민들의 창자를 끊어 놓았다. 73만 광주시민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4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민군은 도청 전면과 측면에 3명 1개조로 배치해 있었다. 건물 내부에 1층에서 3층까지 복도 유리창을 깨어내고 광장을 내다보았다. 바로 앞에 다가온 죽음을 느낀 한 청년이 고등학생들은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고 외쳤다.


3여단 특공조는 소총을 자동으로 갈기면서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이들이 ‘전광석화 같은 기습공격을 감행’해 ‘폭도소탕작전’을 완수하는데 걸린 시간은 1시간 20분여. 3공수여단은 소탕이 끝났음을 확인한 후 20사단에 도청을 인계한 후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20사단은 시신과 부상자를 밖으로 끌어냈다.


군의 기록에 의하면 새벽 5시를 전후해 신군부는 무려 2만여의 무장병력을 동원해 ‘광주시를 탈환’했다.


그들은 작전 시간에 공군기의 무력시위지원을 위해 제1비행단과 전교사간에 협조체재를 조치하고 전차18대, 멫 9대, 지휘용 헬기 1대, 무장 헬기 4대, 수송용 헬기와 코브라 무장헬기등 엄청난 장비를 총동원했다. 거기다 휴전선 상공과 한국해역에는 미군의 조기경보기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외부의 위협’을 차단하고 있었다.


죽음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최후의 전사들의 명단은 불행히도 신군부가 남긴 기록밖에 없다.


국민을 상대로 벌인 이 참혹한 전쟁에서 산화한 시민군은 처참한 군사적 패배만큼 명백한 정치적 패배를 신군부에 죽음으로써 안겨 놓았다.


이로써 열흘에 걸친 5.18민중항쟁은 끝났다.


광주와 인근15개 시, 군에서 100여만명이 참여하여 공식확인된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4명, 상이후 사망 95명, 부상 3310명, 구속 구인자 1430명, 총 5063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았다.


광주, 공동체의 귀감


광주의 열흘은 고난 가운데 자율적 나눔의 정신을 구현한 따뜻한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었다.


외부와의 교통 통신이 두절된 상태임에도 누구 하나도 생필품을 사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함께 부상자에게 피를 나누었으며 한꺼번에 두 되 이상의 쌀을 팔지도 사지도 아니했다. 수천 정의 총과 폭약이 수중에 있었지만 단 한 건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식품점과 약국은 다투어 시민군에게 음식과 의약품을 제공했다. 여성들은 김밥을 말아 학생 청년들을 먹였다. 수천억 현금이 보관된 은행의 금고는 안전했으며 관공서와 주요시설물을 스스로 경비했다.


광주는 인간의 선한 의지와 이성이 꽃피운 대동 세상을 잠시나마 보여주었다.


5.18의 주검들은 땅에 묻혔지만 그 정신과 혼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가슴에 불씨처럼 살아남아 7년만에 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부활했다.


5.18민중항쟁은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의 씨앗과 성장점이 되었다.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어 97년 마침내 군사반란과 학살의 주역인 신군부의 핵심들은 법정에서 단죄 받았다.


이어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함으로써 광주민중항쟁은 폭도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97년에는 또한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민주화운동정신을 기리게 되었다. 항쟁 발생 17년만에 일어난 변화이다.


그러나 아직도 과제는 남아있다. 정확한 사망자수와 시신의 암매장 장소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80년 5월 21일 오후 도청 앞 30만 군중을 향해 집단발포를 명령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가리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쟁 당시의 주한미군사령관의 발언과 그 이후 미국의 문서들을 미루어 볼 때 미국이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우방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걸려있다.


미국은 신군부가 항쟁진압을 할 수 있도록 20사단과 33사단 일부병력의 작전통제권을 넘겨주었고, 광주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80년 8월 전두환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 결정했으며 레이건은 국가원수 가운데 제일 먼저 전두환을 초대함으로써 정치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민족자주’의 화두를 우리에게 던졌으며, 이는 현재도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




[기고] '5.18광주민중항쟁’, 그 서럽고 아름다운 운명
(서프라이즈 / 유시춘 / 2009-5-18 13:47)

원문 보기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 ··· %3D42572

2009/05/18 16:31 2009/05/1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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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린이 2009/05/19 1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앗 1등인가?

    • 하민혁 2009/05/21 0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기서는 이따위 허접한 소설에는 아예 답글도 안 단답니다. ^^

      <덧> 유시민도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써재끼더니, 그 누나도 오월 광주를 아예 논리적 가능세계의 절대시점으로 묘사하고 있네요. 대단한 오누이입니다. ^^

  2. 두애아빠 2009/05/21 1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시춘선생님.

    제 고등학교때 국어선생님이셨는데..

    그냥 그렇다구요~

  3. 어린이 2009/05/22 1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접한 소설이 댓글이에욤?

    일등 놀이 안 할게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