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이문구의
<유자소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 소설집에는 <유자소전> 말고도 9편의 소설이 더 실려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변사또의 약력>이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이 또한 내 사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터입니다. 언뜻 신난스러워 보이는 변사또의 삶이 이상할 정도로 가슴 아득한 훈훈함으로 닥아오는 것도 이 때문이겠구요.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단편입니다.
작가네 집 머슴이던 최서방의 고적한 삶을 그리고 있는 <명천유사>는 그러나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못합니다. 작가의 고향과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너무 잔잔한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담담한 작가의 시선이 오히려 일말의 거부감을 안겨주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동만필.1.2>에는 우리의 정치사에 대한 작가의 해학과 익살이 희화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자유당 말기에 민주당의 무슨 국장을 잠깐 지냈다는 사실로 문국장이라 불리는, 그렇게 불리는 것을 적잖이 흐뭇해 하는 문승관과 뚜렷한 이념도 없이 국회의원 출마를 꿈꾸고 있는 이만업의 정치꾼(기실 제대로의 정치꾼도 되지 못하는)적인 성향을 통해 작가는 얼룩진 우리 정치사의 이면과 거기에서 살아가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짙은 페이소스가 깔려 있습니다.
<강동만필.3>은 석촌 호수 부근에서 "더울 때 바깥 만큼이나 더웁고, 추울 때는 바깥 만큼이나 추운 이동식 포장마차"를 하며 살아가는 남씨와 "본색이 농투성이었으나 농사치가 저수지로 수몰되는 바람에" 예까지 흘러 온 서씨, 그리고 뚜렷한 직업없이 "입때껏 생무지로" 살면서 "아무데서나 두루춘풍으로 홍이야 홍이야 해 온 맨탕"인 나, 이 세 사람의 세상살이를 그들이 늘상으로 모이는 호수 주변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태와 놀이 문화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사뭇 시니컬합니다. 작가의 재담이야 이력이 있는 터고, 실제로 소설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재담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기왕지사 옮기는 재미 붙인 마당이니, 호수 주변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는 것 가운데서 두어 개를 골라 직접 한번 들어보기로 합니다.
듣보실 분만 클릭~
이 호수는 만호 장안에 유일한 시민 공원이라는 것이 사줄 만하면서도 그 둘레의 환경이 조촐하지 못하고 사뭇 난한 것이 흠이라면 큰 흠이었다. 만나면 시작이 먹고 마시고 춤추고 자러 가든가, 먹고 마시고 노래하다 다투고 헤어지든가, 좌우간 요즈음의 풍속에 익숙해진 이라면 생전 이민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게 놀기겸 살기로 더할나위 없이 흐뭇한 곳이겠지만, 겨우 밥 빌어다가 죽 쑤어 어른도 한 그릇 애도 한 그릇으로 홍뚱항뚱하면서 이리 둘리고 저리 발리고 하여, 밑빠지게 살고도 서울 것이 못 되어 서울이 서울이 아니라 서서 울기 좋은 한 데로 여겨온 사람들에게는 판이 달라도 영판 다른 이방 지대인 거였다.
이 호수 공원의 주변은 전판이 먹자판이자 놀자판이었다.
하늘을 먹어간 건물마다 간판이 여관인 건 서울에 내집이 없는 사람이 절반이란 말 그대로 그래서 그런가보지?
글쎄, 가서 자봤어야 알지.
여관마다 내걸은 것이 룸 사우나 선전인데 그건 더러운 세상탓에 때묻은 인간이 흔해 그런가보지?
글쎄, 가서 해 봤어야 알지.
해만 넘어가면 그믐날 밤에도 하늘이 훤하게 붉은 십자가가 총총 뜨던데. 그건 세상이 어지러워 빌고 빌어야 용서받을 인간이 그만큼 숱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글쎄, 빌러 가 본 적이 웂어서 잘 모르겄는디.
가면 갈수록 느는 것이 시간있는 사람들 오라는 시설 뿐이니 우리도 더러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글쎄, 더러가 아니라 자주 가 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넘고 처져도 예사로 어릿거릴 곳이 아니었다.
이 호수 공원에는 밤에 노둔하는 사람이 많았다. 가로등이 가로등에 가려 안 보이는 곳에서는 독서실에서 수험 공부로 철야한다고 나온 어린 것들이 머스매 서넛에 계집애 두엇 꼴로 대여섯 명 예닐곱 명씩 패를 지어, 기타를 치고, 디스코를 추고, 노래를 부르고, 비명을 지르고 하며 하늘이 동문을 열도록 하루에도 수수십 명씩 구석구석마다 밤들을 새웠다.
가로등이 호수에 얼비쳐서 자다가 깬 물결이 고기떼처럼 모여드는 둔덕에서는, 퇴근길에 만나서 호젓할 줄 알고 온 젊은이들이 시간이야 가 봤자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냐고, 소근거리고 티격거리고 앙알거리다가 어둑발이 걷히기 전에 물침대니 회전침대니 룸 사우나니 하고 입간판을 내놓은 그 옆의 여관으로 자러 가거나, 아예 출근 시간에 대어 일어날 때까지 나무 밑마다 신문지를 깔고 엉겨붙어 있었다.
날파리와 각다귀와 물것들이 제 세상을 차려 어지러이 들끓고 있는 가로등 밑에는, 여관. 호텔. 사우나탕. 안마 시술소가 겹겹이 문을 열고 있어도 못가는 축들이 청년 장년 중년 노년 할 것 없이, 혹은 끼리끼리 혹은 섞음섞음으로 에워앉아서 쌌느니 썼느니 싹쓸이니 전쓸이니 하고 쑥설거리며, 가로등이 나가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사방을 누벼대도 일어설 줄을 모르고들 눈이 벌개져 있었다.
장곡리 고욤나무
<장곡리 고욤나무>는 농가의 현실을 무시한 정부의 농어촌 발전 종합 대책과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답시고 만들어 놓은 "결국 죽는 사람만 죽어라 죽어라 하는" 법으로 인해 자기 집 마당의 고욤나무에 목을 맨 한 농부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단편입니다. 지방 자치제와 자식들의 재산 다툼이 곁가지로 걸쳐진 이 작품에서 작가는 오늘의 농촌 현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실농 정책과 이농 현상, 그리하여 전변하는 농촌의 실상이 읍내 풍경과 소갈머리 없는 촌 사람들의 의식을 통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이기출 영감이 헐값에라도 농지를 팔아 사업 자금을 대 달라는 큰 아들과의 언쟁 끝에 내뱉고 있는 다음과 같은 푸념은 그의 불편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두구보니께 이 고욤나무만이나 쓸다리 웂는 나무두 드물레 그려. 과일나문가 허면 그게 아니구, 그게 아닌가 하면 그것두 아니구.... 어린 것 같으면 감나무 접목허는 대목으루나 쓴다건만, 그두저두 아니게 늙혀놓니께 까치나 꾀들어서 시끄럽지 천상 불땔감이더먼."
그렇게 천상 불땔감이던 그 고욤나무에 이기출은 목을 맵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 고욤나무가 자신의 처지와 하냥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것이 "장곡리 농민 이기출이가 법을 친" 것인지도 모르겠구요.
"몰라서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제 보기엔 다들 할 수도 없고 말 수도 없는 것이 농사고, 팔 수도 없고 둘 수도 없는 것이 농토고, 살 수도 없고 뜰 수도 없는 것이 농촌 같은데.... 하지만 어떡하겠어요. 말 때가 되면 말 때 가서 말더라도 하는 날까진 하는 대로 하는 수밖에."
글 지으러 내려와 있는 문진서의 이 말로 시작되는 <인생은 즐겁게>라는 단편 역시 오늘의 농촌 실상을 그리고 있기는 <장곡리의 고욤나무>와 매 한 가지입니다. 단지 여기서는, 일찌감치 이농을 하고 읍내로 옮겨 앉아 복덕방업으로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윤일중과 웬일로 발기불능이 되어버린 주인공 문무진의 이야기가 기우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예컨대,
"정부와 야당과 재야라나 운동권이라나 하는 이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논이고 밭이고 산이고 아무리 농부 노릇하기가 어렵고 빚에 쪼달려 죽겠어도 팔 수도 없게, 다시 말하면 한 번 농부는 영원한 농부라는 듯이, 농부는 늙고 병들고 외롭고 해도 애오라지 논두렁에서 살다가 논두렁을 베고 쓰러지는 것이 제 분수요 팔자라는 듯이, 가로되 부동산 투기 억제요, 이르되 경자유전의 원칙이요 운운하는 빛깔 좋은 독약, 그 허울 좋은 농지 거래법을 만들어 놓아, 흙내나 두엄내가 나는 그 알량한 시골돈만 돌아다니게 하고, 도시에서 따로 사는 돈내 나는 돈은 생전 구경도 못 해 보고 죽게끔 얼기설기 얽어 옴나위를 못하는"
농촌의 현실을 그리고 있기는 이 작품도 <장곡리의 고욤나무>와 마찬가지라는 얘기입니다.
<달빛에 길을 물어>는 현장 답사를 통한 야사의 연구가 목적인 야승회라는 재야 단체의 여행 -- 이름하여 '야승회민정기행'에 따라 나섰던 주인공 이명천이 그 중도에서 떨어져 나와 현대판 노예선이라 불리는 멍텅구리배의 섬, 이를테면 한국적인 수용소 군도 중의 하나인 살섬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언젠가 TV와 신문에서 그 멍텅구리배의 기사를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헌데 그 기사는 그다지 세인들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의 의견이 있었댔는데, 이에 대해 소설의 주인공은 '빈곤의 정서, 다른 말로 하면 빈자소인론' 쪽에다 심정적인 동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기사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것은 곧 "가난에 찌들었던 사람들이 결과론자로 정착하여, 일이 되고 돈이 되는 짓이라면 수단과 방법의 곡직을 묻지 않게 되었으며, 인신매매라는 극단적인 현상조차도 자연스럽게 묵과하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여기에서 보릿고개 세대의 어려웠던 삶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헌데 주인공의 저러한 관점을 살섬으로 팔려가는 다홍치마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한 독자의 억측에 불과한 것일까요.
연평도
어촌에 관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이 작품에는, 그러나 그것이 여행길을 그리고 있음으로 당연히 나그네의 감상이나 나그네의 여수(旅愁)가 빠질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는 여행에서 느끼는 주인공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움인.
겨울의 여행은 선(線)의 여행이었다. 겨울의 선은 생태적인 비문명성과 생략 처리된 간결미로 하여 한결 호소력이 있었다. 선은 곧 생(生)의 곡절이었고, 보이지 않는 한계의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겨울에 하는 여행은 선의 추적이 그 내용이었다.
차도 낡고 길도 낡았지만 시간은 낡을 시간이 없었다. 낡지 않은 시간 속의 것들은 낡은 것이 없었다. 차는 선상(線上)으로 내닫고, 땟국이 흐르는 세한도(歲寒圖)가 얼비치고 있었다. 굽이마다 폭이 이어지는 그림이었다. 낯익은 그림이었다.
"고기잡어 사는 놈은, 고래등 같던 허우대가 새우등이 돼도록 배를 부려두 바다는 종내 잡지 못허는 벱이닌께."
늙은이는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고래등이나 새우등이나 한 가닥 굽은 선이기는 매일반인걸유."
명천도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하늘에는 해가 낚싯대 두어 간 남짓하게 남아 있었고, 하늘가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은 저마다 한 가닥씩 선명한 능선을 그어 그 나름의 곡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얼라, 이 아저씨점 봐, 샥시가 슴으로 시집오는 것두 그래서덜 오는 중 아시는가베. 그게 아니유. 샥시덜두 다 선이 있어서 임자 만나 오는 거지, 그런 식으루다가 무식허게 제 발등 밟어가면서 오는 게 아니라구유."
선이 있어서라. 명천은 다홍 치마를 찾아보려고 사방을 더듬다가 문득 한 선을 발견하였다. 차창 너머로 불쑥 떠오른 물마루, 아득하게 그어진 수평선이었다.
바다 가운데서 바라보는 물마루는 해벽(海璧)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보이는 한 줄기의 선, 무한정의 한정이었다. 해는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어둠의 시작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그 한 줄기 부동의 선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어둠을 펴고 구름을 펴는 일이며, 바람을 보내고 물결을 보내는 일이 모두 물마루의 일이었다. 배가 노래를 부르며 놓아가기 시작했다.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저문 바다를 바라본다.
설익은 햇살이 따라오고
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 간다.
나는 무심한 바다에 누웠다.
어쩌면 꽃처럼 흘러가고
바다처럼 사라진다.
이승의 꽃이랴 싶다.
연평도
다홍 치맛자락이 다시 눈결에 띄었다. 어쩌면 그 다홍 치마도 바다에 흘러가는 이승의 꽃일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홍 치마가 정녕 여린 소녀풍(少女風)에도 부질없이 눈뜨는 파란(波爛)과 더불어서 바다에 흘러가는 꽃이라면, 어느덧 속절없이 좌초하여 표류를 마감하는 곳은 또 어디일까. 꽃은 바닷물에서도 자라는가. 꽃은 자라지 않는다. 다 자란 것이 꽃이니까.
석양은 나그네의 하늘인지도 몰랐다. 다홍 치맛자락은 낙조의 물이 두 벌 들어서 다홍빛이 단홍빛으로, 단홍빛은 선홍빛으로, 선홍빛은 다시 자홍빛으로 거듭 피어나고 있었다. 꽃은 역시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피는 것이었다.
날이 풀려서 그런지 바다 가운데에서도 바람이 차지 않았다. 바닷새가 멀리 나가면 날씨를 믿을만하다고 들었으나 바닷새가 보이지 않는데도 물결은 비단이었다. 해파리가 연안으로 몰리면 태풍이 오고, 달무리나 햇무리에 바람기가 있으면 비가 올 조짐이며, 뱃고동소리가 멀리서 똑똑히 들려도 날이 궂을 징조라고들 하였으나, 해파리도 없고, 먼 뱃고동소리도 없고, 바다는 다만 다홍빛도 같고 자홍빛도 같은 낙조만이 소리없이 짙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해가 들어가고 있네유."
"니열 아침에 나올라면 시방쯤 들어가야 헐테지유."
해가 들어간 뒤에도 물마루께는 여전히 붉덩물이 가시지 않고 있었으나, 바다는 바야흐로 동녘 하늘과 함께 잉걸이 사윈 잿빛으로 바뀌면서 숙연한 표정으로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홍 치맛자락도 적갈색으로 어두워가고 있었다.
배에 불이 들어왔다.
"살슴은 아직 멀었지유?"
"멀었지유."
"멍텅구리배는 남어있겠지유?"
"배야 남어있지유."
"약내 나는 사람은 없더라면서유?"
"벌써 달이 떴네유."
아낙이 달을 가리켰다. 달이 밝았다.
그리고 기타 여러분
<그리고 기타 여러분>. 열 가지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어느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연작 형태의 소설입니다.
여기에는 이장 5년, 새마을 지도자 3년, 그리고 공화당 면 관리장과 군 행정 자문 위원을 각각 1년씩 지내는 동안에 살림을 거덜내고 첫새벽에 서울로 방 두 칸짜리 세방을 얻어 떠나는 위원님의이야기와 10월 유신의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일에 맞춰 낳은 아들의 '유신'이라는 이름을 이제는 다시 시대 정신에 따라 개명하려는 아비의 이야기, 어떻게 해서든 싸워서 이길 궁리를 하라는 아버지와 출세에 지장만 주게될 것이 뻔한 소설에 몰두하고 있는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통금 해제령으로 하루 아침에 경기를 잃어 버리는, 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야경꾼으로 일하던 아우와 농사를 작파하고 트럭을 사서는 통금 때문에 발이 묶인 승객을 실어 나르며 가외 수입을 올리던 형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독립 기념관 성금을 모으면서 이웃간에 빚어지는 친일 치부의 이야기와 부디 책을 아는 인물이 되라고 이름까지 제학(제학)이라고 지어 준 아들이 꿩약이나 만들고 있음에 분노하는 아비의 이야기, 기껏 공부하라고 올려놓은 대학생 아들이 향토사나 연구하는 것에 못견뎌 하는 맹부자네 이야기, 마을의 이장 자리를 놓고 이전 투구를 벌이는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세대론과 자리 다툼 이야기, 재야의 후배 모임에 이름을 지어준 탓으로 시국 사범으로 몰린 이와 계급에 한이 맺힌 조상 덕으로 출세하여 신도비까지 세우는 어느 국회의원의 이야기,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사진이 찍혀서 사진전에 출품되는 바람에 난데없는 곤혹을 치르게 되는 어느 촌로의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요런 얘기에 관심 있는 분은 함 읽어보세요. ^^
좀 장황하다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소설 얘기를 옮겨봤습니다. 우선은 이문구 하면 떠오르는 게 그의 입당이어서입니다. 가능하면 그의 이야기 하는 양을 좀 많이 들려주고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집의 주무대인 대천 지방과 나 사이에 있는 인연입니다.
저 남녘이 고향이었던 내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무작정 상경하여(여기서 '상경'이라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의 기착지는 서울역이 아니라 인천항이었으니까요) 첫 외지 생활을 한 곳이 바로 대천 지방이었습니다.
어느 월요일 등교길에 마음이 동하여, 입고 있던 교복과 가방에 든 교련복 한 벌로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대략 1년 반여를 지냈습니다. 만리포와 연포 사이에 있는 한 작은 포구에서 멸치 잡이 배와 거잇(게잡이)배와 삼치 잡이 배를 탔습니다. 때론 서산이나 대천 등지로 들어가서 농사일을 거들기도 했구요.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시절의 일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강산이 몇 번을 바뀐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곳에 대한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골길,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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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서해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그 숱한 섬들과
그 섬들 사이를 하염없이 누비는 고기잡이 배를 기억합니다.
아침 서해 바다의 해돋이와 그 한낮의 찌는듯한 고요와 북새가 뜬 저녁 하늘과
고기 떼가 일으키던 수평선 위의 자욱한 은빛 물보라들과
그 온 바다를 에워 날던 수많은 갈매기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느닷없는 바람으로 회항을 하던 어느 폭풍우 치던 날의 무서운 파도들을 기억하고 있고,
포구 앞 대섬을 한 너울에 집어 삼키고 달려 오던 그 여름 날의 무서운 해일과
어금니를 사려 물어도 어찌할 수 없던 저 겨울 바다의 가슴 에이는 추위를,
그리고 짙게 끼었던 해우장(바다안개)과 그 막막했던 어두움을,
길을 잃은 뱃전에 쏘아대던 해병 기지의 저 무차별한 사격을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또한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봄날의 언덕 배기 밭들과 그 겨울의 빈 들판을,
그리고 온 천지가 백설로 뒤덮였던 어느 날 밤의 그 평화하던 세상을,
그곳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이야기를.
하모니카 하나로 말이 없던 소죽은 귀신 안 서방과
꿩 사냥 당근 서리에 귀신이던 감나뭇집 머슴 김**이를 기억합니다.
씨름 대회 때마다 등 떠밀려 나가서는 늘 이등만 하고 돌아오던 키다리 장총각과
김참봉네집 댕기머리의 하교 길목을 저녁만 되면 지켜 보던 우리 집 숙맥 김가와
주색 잡기라면 모르는 것이 없던 그 김참봉네 일꾼 차**와
그리고 건넌 마을 대밭에서 처자 하나 건드리고 돌아와 자랑하는 날 밤에 덜컥하니 수갑차고 붙잡혀가던 논다니 이**와
그지없는 일꾼이지만 술만 먹으면 건드릴 사람이 없던 개빙장이 이**과
우악스럽게 일을 하다가도 술만 들어가면 울어쌓던 홀애비 *씨를,
또한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우리 집 **이를,
망나니 짓만 하고 다니던 종합 농고의 한**를,
그리고 그가 쫓아 다니던 감나뭇집 여학생 김**이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또 기억하고 있습니다.
30년 어부 생활에 술밖에 남은 것이 없다던 그 마음씨 좋은 늙은 어부 심씨와
무슨 일인가로 쫓기고 있던 어두운 눈빛의 청년 김군을,
줄창으로 싸워 대던 언덕 배기 집의 털보 *씨와
어느날엔가 퉁퉁 부은 시체가 되어 떠올랐던 그의 억척같은 아내를,
회칼을 양손에 들고는 부두를 질주하던 거잇배의 떠돌이 장발 청년과
웃통 벗어 제치고 문신 투성이의 온몸에 칼자욱을 그어대던 차부의 노랑 머리 ***와
그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화사하기만한 모습이던 대천 하우스의 미쓰 민을,
또한 화투방에만 앉으면 날새는 줄 모르던 우리 **호 선장과
말끝마다 기름밥 20년을 들먹이던 우리 배 기관장과 노상 의리 빼면 시체라던 우리 갑판장을.
그리고 또 나는 기억합니다.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항상 헤설프게 웃어대던 열 여섯 살의 그 아이 **이를,
그리고 그 아이를 벼르고 있던 어판장의 저 날나리 ** 형을,
노래 자랑이 열렸던 한가위 날과 그 이후로 나날이 사위어 가던 그 아이의 웃음을,
그리고, 가방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차부로 향하던 그 아이의 늘어진 어깨와 그 마지막 뒷모습을.
나는 아직도 이 모든 것들을 바로 어제 일인 듯 선연히 기억합니다.
하루 왼종일을 앉아 썰을 푼대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래서입니다. 이문구의 <유자소전>을 읽고 나서 이래 주절이주절이 소설 얘기를 읊어대고 있는 까닭이요. 지금도 내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곳에 대한 정서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이 도무지 소설인지 내 지난 시절인지를 모를 정도인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천 지방에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대천의 해변가에다 땅을 좀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 남녘에서 하고 있던 조선소의 제 2공장을 세워볼 요량에서였는데, 그러나 그 계획은, 갑작스럽게 발표된 정부의 서해안 종합 개발 계획으로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용도가 변경된 그 자리에는 이제 공장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입게된 경제적 손실은 상당했습니다. 우리로선 그 땅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해서 받은 그 땅값이란 게 시쳇말로 똥값 만도 못한 것이어서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날강도를 당해도 유분수지, 참으로 절통할 노릇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일이 다 내가 우겨서 비롯된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대천 땅에 대해 갖게 되는 감정이 남다를 수밖에는요.
에니웨이, 정리합니다.
내가 처음 접한 이문구의 소설은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관촌수필>이었습니다. 군 입대를 수십여일 앞둔 시점이었는데, 다 읽지 못한 채 군엘 갔습니다.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관촌수필> 읽기를 그만 둔 것은 순전히 그 소설에 대한 모종의 거부감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생래적이라 할 수 있는 이 거부감은 그러니까 작가가 보여주는 '군자연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다른 글에서 전하고 있는 내 유년 시절 얘기와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 내 청소년 시절을 보면 아시겠듯이, 나는 생래적으로 '~체' 하는 거를 잘 견디지 못 합니다. 특히 그것이 상대의 대가리에 잘못 박힌 고정관념에서 나온 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당시 <관촌수필>을 읽으면서 그런 거를 강하게 느꼈다는 기억입니다. 확실히 관촌수필에서는 작가와 작중 인물들 사이에 거리감이 있었고 그게 영 밥맛이었고 그래서 끝내 그 거부감을 못 이긴 채 팽개쳐버렸더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유자소전>은 작가의 저런 비릿한 경향성을 벗어나 있습니다. 작가 자신이 중심에서 사라지고 작중 인물이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하긴 지금 관촌수필을 다시 본다면 또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저때야 내 의식 수준 또한 모 아니면 도 식의 덜 떨어진 막가파 수준이었으니요).
그나저나, 참 장황한 이야기인 셈인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까지 제대로 읽으신 분은 아마 없지 싶습니다. 나부터도 다른 이가 쓴 긴 글은, 게다가 지 경험담 늘어놓는 글들은 도무지 읽지 않는 터니까요. 무튼, 그런 의미에서 여기까지 읽으신 어떤 이가 있다면 그 이에겐 분명 신의 은총이 함께 할 거라는.
<덧붙이는글> 없습니다! 더 하면 몰매 맞을 거 같으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