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에 해당되는 글 41

  1. 2009/03/31 진보, 민중속으로 진보하라 28
  2. 2009/03/30 진보, 썩어빠진 불판부터 버릴 일이다 32
  3. 2009/03/29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14
  4. 2009/03/28 헤르만 헷세, 안개 속에서 6
  5. 2009/03/27 MBC PD수첩과 철부지 블로거들 119
  6. 2009/03/27 미네르바 재판과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25
  7. 2009/03/26 [동영상] MBC 이춘근 PD가 남긴 육성 메세지 112
  8. 2009/03/26 한국PD연합회, 니들도 살짝 미친 듯 31
  9. 2009/03/25 레디앙 참세상 편집자라면 나는 자폭한다 35
  10. 2009/03/24 하민혁에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 31
  11. 2009/03/23 정명훈,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 239
  12. 2009/03/23 신동아 미네르바의 권모씨, 동아일보에 직격탄 6
  13. 2009/03/22 고재열과 원쑤 언론사주, 그리고 고 장자연 29
  14. 2009/03/21 유창선과 카더라통신, 그리고 장자연리스트 63
  15. 2009/03/21 장자연 리스트? 까지 말라고 해도 깐다 43
  16. 2009/03/20 태터앤미디어 사태, 그 후가 궁금하다 14
  17. 2009/03/19 미네르바, 죽었는가 살았는가 19
  18. 2009/03/19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그리고 다빈치 코드 6
  19. 2009/03/18 이문열과 진중권 22
  20. 2009/03/18 진중권의 광견병 13
  21. 2009/03/17 진중권이 기가 막혀, 한국은 소통 힘들어~ 45
  22. 2009/03/17 이문열의 금시조, 추락하다 - 풍장 風葬 5
  23. 2009/03/17 아픈 우리 젊은날의 사랑,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6
  24. 2009/03/16 휴먼스테인을 보며 인간의 굴레를 떠올리다 4
  25. 2009/03/15 이문구의 <유자소전>, 대천 바다 이야기(2) 4
  26. 2009/03/14 권력의 법칙 48가지, 로버트 그린 4
  27. 2009/03/13 이외수, 선생님 혹시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 12
  28. 2009/03/13 이문구의 <유자소전>, 대천 바다 이야기(1) 4
  29. 2009/03/12 조선일보 부르대는 한심한 중생들에게 48
  30. 2009/03/11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 그가 돌아온다 30
대한민국 진보가 요 왜 모냥 요 꼴이냐는 얘기를 하면 으레히 돌아오는 답이 하나 있다. 진보의 역사가 일천한 때문이라는 대답이다. 한마디로 넌센스다. 지롤 쌈 싸먹는 소리라는 얘기다.

이같은 답을 하는 친구들이 자주 기독교를 가리켜 '개독'이라며 욕을 퍼부어댄다.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욕지거리 싸지르고 다닐 시간은 있으면서도 기독교가 왜 그렇게 번성했는지에 대해서는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왜 그렇게 번성하고 있는가? 여러가지 분석과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빠질 수 없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가장 낮은 데서 신음하며 고통받고 있는 이들, 곧 바로 자신의 이웃을 찾아 돌보는 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개척교회를 하는 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함께 울고 함께 웃는다. 작은 콩 쪼가리 하나도 나눠먹고 이웃이 헐벗으면 자신도 기꺼이 헐벗기를 마다 하지 읺는다. 그렇게 그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을 만나 그들에게 스며든다. 그리고 결과가 바로 '개독'이라 불리는 기독교의 가장 큰 성장 요인 가운데 하나다.

그 시각에 이 땅의 진보연 하는 세력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가?
이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해마지 않는 저 좃선일보의 첫 글자 붙잡고 깊이 함 생각해볼 일이다.


단독대표로 선출된 노회찬 대표 [출처: 진보신당]

단독대표로 선출된 노회찬 대표 [출처: 진보신당]


진보연 하는 친구들이 또 자주 들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동학농민운동이다. 이번에는 존니 추켜세우는 지점에서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그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학농민운동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른바 지금 진보연 하는 친구들이 부르대는 '진보 20년'이면 진보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는 얘기다. 더구나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스피드 시대 아니던가?

동학농민운동이, 그 성패 여부를 떠나서 민중의 지지를 받아 운동으로 설 수 있었던 이유도 저 기독교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그 운동이 민중속으로 들어간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은 몇 몇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가장 낮은 데 위치한 민중과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보 20년 동안 이 땅의 진보세력은 무엇을 했던가? 민중과 함께 하긴 커녕 쥐뿔 잴 것도 없는 치들이 앞에 나서 잰 채를 하며 설레발을 쳐대며 민중을 희롱하고 농락해왔을 뿐이다. 민중이 쟁취한 민주화의 성과마저 자기들이 이룬 것인 양으로 부르대며 민중과는 철저히 이반되는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이 땅의 이른바 진보세력은 그렇게 민중과는 유리된 채 귀족노조에 빌붙어 그들에게 아양을 떨어대는 짓으로 호구지책을 삼아왔다. 이런 상황이니 뭘 어떻게 하겠다는 자신의 비전이 있을 리가 없다. 장기적인 전략이고 전술 따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판이니 허구헌날 독재타도나 외치고 건건마다 종주먹 들이대며 딴죽을 거는 일로 날을 지샐 밖에는 없는 일이다.

그런 주제에 또 입으로는 또 입술이 부르트도록 민중을 부르대고 있으니, 이 친구들은 민중이 무슨 지네들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갖고 노는 호구인 줄 아는 모양이다. 분명히 하자. 민중은 이른바 진보한다는 친구들이 갖고 놀만큼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 아니다.

무튼, 저 윤똑똑이들이 벌이는 진보놀음이 이제는 블로고스피어에까지 만연해 있는 모냥새다. 아무리 봐도 자기 이웃 하나와도 함께 하지 못 할 성부른 웃기잡는 친구들이 자칭 진보를 부르대면서 울타리 두르고는 그 우리 속에 똬리를 틀고앉아 방구석 진보의 맹탕 헛소리만 지끼고 자빠졌다. 이 땅의 진보가 진보하고자 한다면, 도대체 이런 자들부터 먼저 경계하고 나아가 교육할 일이다.

에니웨이, 이 땅의 진보가 지금 이 시기에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민주의도도 독재타도도 아니다. 가장 낮은 데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민중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진보하고싶은가?
그렇다면 왼갖 희번득한 헷소리 접고 지금 당장 민중 속으로 진보하라.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취임사(2009.3.29) 전문 보기


노회찬 17대 대선후보경선 출마 선언문(200.3)


 
<덧붙이는글>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로 새 출발을 했다는 소식이다. 노회찬 대표의 취임사 전문을 옮긴다. 원래는 노 대표의 취임사를 하나하나 분석하며 글을 써볼 요량이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취임사를 듣보며 든 생각을 횡발수발 늘어놓는 걸로 대신한다.
 
2009/03/31 15:56 2009/03/31 15:56
"불판을 갈아야 한다."

17대 총선에서 저 유명한 어록을 남기며 국회에 입성한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가 지난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에게 석패했다. 이를 두고 이런저런 분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딱 하나였다.

"진보, 불판을 갈아야 하는 것은 바로 너희였던 것을!"

지난 3개월 동안 블질을 하면서,
그 블질을 위해 인터넷 구석구석을 떠돌면서 느낀 것은 바로 저 생각의 확인이었다.


진보하고 싶은가

진보하고싶은가? 그 종주먹부터 내릴 일이다!


진보의 불판은 타도 너무 탔다. 허구헌날 스테레오 타입으로 틀어댄 저 진보의 불판은 갈아서 쓸 수 있는 정도를 이미 넘어서버렸다. 타도 너무 타서 아예 철판 속까지 썩은 기름 덩어리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자기 비전이란 도무지 없이 어느 먼 하늘 아래서 기생질로 먹고사는 아해들의 삼류 주장을 다시 재탕하는 기생질로 날을 새고, 20세기의 어느 후미진 구석방에서나 읊었을 법한 독재타도 민주주의 만세를 21세기가 열리고도 한참을 지난 지금까지도 눈만 벌어지면 부르대고 자빠졌다.

이런 따위에 어찌 진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을까?
뻔뻔하기가 짝이 없는 짓이다.

진보의 불판을 갈아야 한다고?
아니다. 지금 갖고 있는 진보의 불판으로는 백날을 갈아봤자 고기만 태울 뿐이다.

진보하고싶은가?

그렇다면, 찌들대로 찌든 저 낡은 불판부터 던져버릴 일이다. 대가리 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독선과 아집부터 청소할 일이다. 삼류 양아치 이론이나 수입하고, 독재타도나 부르대며 먹고사니즘을 해결하려드는 저 빌어먹을 기생의식부터 청산할 일이다.

 
  
2009/03/30 23:51 2009/03/30 23:51

1.
사람들은 자신의 거의 모든 시간을 살아가기 위한 일에 바친다. 그러다가도 약간의 한가한 시간이 생기게 되면 이를 어쩔 줄 몰라 하며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채 기를 쓰고 그 시간을 없애려 든다.

1.
세상의 일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딱 부러지게 결정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인간의 감정과 행동에는 실로 다양한 변화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
무슨 이야기를 하건, 그 이야기 끝에서는 항상 "물론..."이라는 말로 토를 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일반적인 명제라 할지라도 예외란 있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 자신의 말이 반드시 정확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아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조금이라도 경솔하거나 일반적인 말, 혹은 불확실한 말을 했다 싶으면, 먼저 한 말을 새롭게 한정하거나 수정하면서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 놓아서, 결국은 어떤 얘기가 핵심적인 것이고 어느 얘기가 지엽적인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게 하고 만다.

1.
인간의 본성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 기쁨이나 슬픔이나 고통 등이 어느 일정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견뎌낼 수 있지만, 그 단계를 넘게 되면 인간은 결국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두고서 인간이 약하다거나 강하다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정신적인 측면에서나 육체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까지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어 버린 사람을 두고 비겁하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이 불행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병상을 지키고 있는 건강한 사람이 병상에 있는 환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1.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다.

1.
환경의 변화를 추구하는 마음은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조급함은 어디를 가든 나를 뒤쫓아 오는 것이 아닐까?

1.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비교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것과 비교한다. 때문에 행복과 불행이란 결국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어떤 대상과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1.
나는 일 처리가 간결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일단 어떤 일을 종료하고 나면 그것을 다시 꺼내어 뒤적거리지 않는 성격이다.

1.
고지식한 사람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속 상하는 일도 없다. 그런 사람은 대개 모든 행동이 노처녀만큼이나 까다롭고, 자신에게 만족하는 일이 결코 없으며, 누가 도움을 주는 일이 있어도 거기에 감사할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괴롭게 만든다. 

1.
자기 자신의 척도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내 자신의 일만으로도 힘에 벅차서 남의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원한다.

1.
사람들의 정신은 한 자리라도 더 윗자리로 오르려는 생각으로만 꽉 들어차 있다. 그렇지만 가장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최고의 일을 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1.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건강이나 명예나 즐거움이나 휴식 등의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해 기를 쓰고 덤빈다. 그것은 대개가 어리석음이나 무지, 혹은 좁은 생각 등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이런 이전투구의 싸움이 다른 사람을 위한 호의에서 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1.
인간이란 누구나 희망에 속고 기대에 배신 당하는 법. 나라고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1.
하늘은 인간의 운명을 이렇게 정해 놓았다; 이성을 지니기 이전과 이성을 잃어 버린 이후를 제외하고는 행복해질 수 없도록.

1.
막을 올리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단지 그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망설여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안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기 때문일까?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는 사람이 없는 때문일까? 확실한 것을 모르는 경우, 혼돈과 암흑만을 예상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의 정신적인 특징이다.

1.
죽음.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 우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기 존재의 처음과 마지막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인간은 그토록 제한된 세계에 살고 있다.

1.
불가피한 일에 접했을 때는, 험한 산을 넘는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체념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산이 없다면 길을 가기가 훨씬 편하고 거리도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야 하는 길이고 현실적으로 산이 거기에 있다면 그 산을 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more..


 

<덧붙이는글> 음.. 이 글은 어제 의무방어전 하느라 제대로 검토도 못 하고 바로 쳐올려둔 글인데, 지금 정신 좀 차리고 보니, 정신 제대로 박혔을 때 올린 글보더 훨씬 더 주옥같은 얘기들만 있다는. 그래서 보기에 좋다는.. ^^ (이상, 여전히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는 쥔장의 말씀이었습니다.)

2009/03/29 23:51 2009/03/29 23:51
   
      
하민혁의 민주통신
 

안개 속에서

이상하구나,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숲과 들이 모두 외롭고
나무들은 서로를 보지 않으니
모두가 다 혼자이어라.

내 삶이 빛으로 밝을 때에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지만,
그러나, 이제 안개가 드리우고 나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어둠은 조용히 피할 수도 없이
사람들을 격리시킨다.
이 어둠을 모르는 사람을
누가 현명하다 말할 것인가.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삶이란 정녕 고독한 것.
누구도 다른 이를 알 수 없으니
사람이란 결국 모두 다 혼자인 것을.



 
    
하민혁의 민주통신
   

방랑의 길에서 (크눌프를 기리며)

슬퍼하지 말아라, 이제 곧 밤이 온다.
그러면 푸르스름한 들판 위에는
차가운 달이 소리없이 미소지으리라.
그 때 손을 맞잡고 가기로 하자.

슬퍼하지 말아라, 이제 곧 때가 온다.
우리는 잠이 들고 우리를 위해 두 개의 십자가는
환한 길가에 나란히 서게 되리라.
그 위에 비 오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그리고 또 가리라.



 
   
하민혁의 민주통신
   

어디엔가

햇볕에 타며 세상의 사막 위를 나는 방황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무거운 짐에 깔려 신음했다.
하지만 어디엔가, 거의 잊혀진 곳
서늘한 그늘이 드리운 꽃피는 뜰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또 어디엔가 꿈처럼 먼 곳에서 몸 풀고 쉴 곳이 기다린다.
이 영혼이 또다시 고향을 갖고,
엷은 잠과 밤과 그리고 별들이 기다리는 그 어디엔가.


 
  
   
하민혁의 민주통신
 

  

    
2009/03/28 23:08 2009/03/28 23:08

엠비씨 피디 애들이 요 며칠 아주 쌩쑈를 하고 자빠졌습니다 있습니다. 거기에 또 무슨 피디연합회인가 하는 애들이 '미쳤다'고 집단 발광을 하면서 언론자유가 어쩌고 민주주의가 어쩌고 하면서 쌩나발을 불어대고 있습니다. 온갖 기생층이란 기생층은 다 붙어 지달들을 떨어대는 형국입니다.

이 좋은 쌩쑈에 블로고스피어의 일부 철부지들이 빠질 리가 없습니다. 당근 '미쳤다'고들 아주 난리 부르스들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암만 봐도 미친 건 지들인 것같은데 말이지요. 에효~


이춘근

쌩쇼의 주인공 이춘근 - 노컷뉴스 화면


언론자유? 당근 있어야 합니다. 정권이 언론을 함부로 밀어붙이는 짓 하지 말아야지요. 언론탄압 어쩌고 하는 고상한 표현 접더라도 그거 일단 억울할 뿐더러 진짜 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아, 함 당해봤거든요. 무튼, 그래서 언론에 대한 압수 수색을 한다거나 언론인에 대한 영장 발부 되었다거나 하는 야구 들으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건은 좀 다릅니다. 보통 사안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건 지금 언론탄압이라고 부르대는 친구들 말대로 군사독재 시대 이후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사안 자체가 그만큼 위중하다는 반증이지요. 실제로 클 수밖에 없습니다. 엠비씨 피디 애들도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백 만 촛불을 이끌어낸 방송이었다고 말이죠. 

문제는 저 프로그램에 나오는 핵심 화면이 조작된 화면이었다는 건데요.
번역까지 의도적으로 왜곡했고, 메인 피디의 멘트 또한 새빨간 거짓말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까요? 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엠비시 피디 애들이 이에 대한 사실을 확인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검찰 출석이 아니라 하민혁이한테 출석을 해서라도 왜 그런 거짓 방송을 했는지 밝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footnote]검찰한테 가기 싫어서 그러는 거면 하민혁이한테 와서라도 꼭 밝히도록 하세요. 나는 그거 무쟈게 궁금하거든요.[/footnote] 

이건 언론 자유의 문제이기 이전에 진실의 문제고 책임의 문제입니다. 언론 탄압이라고만 부르댈 게 아니고, 대체 왜 저렇게 쌩 거짓말을 했는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게 맞습니다. 이건 두 살만 먹어도 답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이춘근

석방되는 이춘근 - 잘 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송일준 이춘근 조능희 김보슬, 니들 모두 사이좋게 손 잡고 가서 조사받고 오면 안 되겠니?
니들이 사랑하시는 그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내 생각에는 니들이 그래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응?

 

서비스 글 더 보기


<덧붙이는글> 여칠 전에 내가 "이춘근 피디 체포는 잘못되었다"고 외치고 있는, "이 정권이 미쳤다"고 부르대고 있는 블로그 99곳(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내 글은 삭제하는 곳이 많습니다)을 돌아다니면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춘근 피디는 체포되어서는 안 되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답한 블로거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99곳 가운데 단 한 군데도 말이지요. -_-
이거 진짜 웃기잡는 얘기 아닌가요? 눈물 콧물 다 빠지도록 웃기는, 그러다가 문득 슬퍼지는 정말 웃기잡는 코메디 아니냐는 얘깁니다. 아닌가요?
무튼, 지금 판이 이만큼이나 웃기잡는 판입니다. 내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두루들 다 미쳤어요. -_

<덧> 에이, 이 덜 떨어진 쉐이들.. (이건 순전히 덜 떨어진 쉐이들한테 하는 얘기니까.. 이하 생략)
2009/03/27 23:27 2009/03/27 23:27
아,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그러니까, 이런 친구가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다는 말인지.. 나는 처음에 메신저로 누가 던져준 김 교수의 저 글을 읽고는 어느 덜 떨어진 대학교 2학년 학생이 쓴 글인 줄 알았습니다. -_-

무튼, 다음은 아고라에 올라온 김태동 교수의 글 전문입니다.

 
미네르바

아, 미네르바


미네르바 판사님, 고맙습니다. 궁금합니다.

난생 처음 형사사건을 심리하는 법정에 섰다.
지난 23일이다. 그날 나는 미네르바 재판을 맡으신 유영현 판사님 덕분에 많은 것을 공짜로 배웠다.

유영현 판사님 매우 고맙습니다.

첫째. 내 인생에 어느 하루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배우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둘째. 증인이 변호사 및 검사의 여러 가지 신문(訊問)에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하여 가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고라 벗님네들, 저는 일주일 정도 최선을 다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30페이지 분량의 준비를 하여 갔는데, 결과는 건성으로 준비해 간 것보다 못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판사로 출세하실 분들은 2009년 3월 23일 미네르바 재판에서 유영현 판사의 편파적인 재판진행 사례를 배우시면 앞으로 출세하시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저는 박대성씨만을 위하여 일주일 최선의 준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제2, 제3의 언론자유 말살행위가 검찰과 판사의 결탁 하에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국회에서 미네르바를 구실로 ‘사이버모독죄’를 신설하는 것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응한 것입니다.

셋째,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진실로 참는 것이다’는 격언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신 것에 대해 고맙습니다.

유판사는 제 발언을 수도 없이 여러번 제지하였습니다. 저는 점점 시간의 제약을 느끼면서 답변하여야 했습니다. 속으로는 첫 번째 제재를 받을 때부터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피고인을 위해서....

OECD보고서를 영어 원문대로 단 세줄 읽을 때, 유판사는 기록인에게 “이런건 기록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왜 영어자료는 전혀 증빙자료가 되지 못하는지, 정권인수위원장을 지낸 어린쥐(orange) 이경숙 숙대총장에게 물어 보고 싶습니다. 초등학생까지 영어 사교육에 내모는 정권하에서, 공익을 다투는 재판에는 정작 영어가 쓸모없다니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재정부 번역은 오역)

22일 밤을 꼬박 새웠고, 23일 아침 1시간 반쯤 눈을 붙인 뒤, 다시 일어나서 오후 한 시까지 판사님에게 올릴 ‘의견서’(23쪽)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서를 판사는 받지 않았습니다. 수십년 변호사를 하신 박찬종 변호사께서 제가 와서 말만 하는 것보다 의견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면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 미리 말씀하셔서 이중으로 준비(①저 자신의 증언을 위한 참고용 자료, ② 판사님께 올릴 의견서)한 것인데, ①은 되도록 보지 말고 이야기 하라는 명령을 셀 수 없이 받았고 ②는 아예 휴지조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대접을 받으셨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저는 묵묵히 참았습니다. 인내의 한계를 느끼면서 말이죠. 인간 취급도 아니고 아예 개돼지 취급을 받는 모욕감을 느꼈지만 참았습니다. 1998년 제1 외환위기를 극복하는데 저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서 위기극복에 나름대로 일역을 담당한 사람입니다. 박찬종 변호사가 증언 첫머리에 저의 경력을 말씀하셨으니까, 유판사는 제가 과거에 어떤 경력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저를 개돼지 취급, 또는 “포로로 잡힌 적의 졸개” 취급 하면서 한시간 여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넷째, 사법부가 국회나 행정부보다 더 비민주적이고,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권력이라는 정치공부를 하게 해주셔서 매우매우 고맙습니다.

재판은 두시에 시작하여 5시 40분쯤 끝났습니다. 저는 4시반쯤 마지막으로 증언하였고, 그 4시반까지는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변호사의 질문은
1) 12월 29일 박대성씨의 글 (달러 매수 금지, 긴급업무명령)이 허위라는 검사측 공소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2) 12월 24일 기획재정부가 각 언론기관에 비보도(보도하지 말아달라) 요청한 문건에 대한 평가 (이것 아주 중요합니다)
3) 12월 17일 “한국은 smoothing opration(미세조정)에 국한된 외환시장 개입을 하여야 한다”는 OECD의 정책권고에 대한 나의 생각
4) 12월29일 미네르바 글이 22억달러 정부에 손해를 끼치는 등 공익을 해쳤다는 재정부 문건에 대한 나의 평가
5) 7월30일 “드디어 외환보유고가 터지는구나”라는 미네르바의 글이 허위사실이고 공익을 해쳤다는 공소장 내용에 대한 나의 평가 등을 물었습니다.


이 다섯가지의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고, 내일부터 연속해서 제 답변과 준비자료를 가지고 아고리언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고리언이 진정한 재판관입니다. 어제 낮에는 또하나의 변호인인 박재승 변호사(전 대한 변호사협회 회장)를 뵈웠는데, 그분도 박찬종변호사도 유판사처럼 편파적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사람은 요즘 거의 보지 못했고, 유신때에도 드물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최근 인사이동으로 미네르바 담당 판사가 바뀌었는데, 그 전 판사는 문제의 신영철 대법관이 그 밑의 누군가와 협의해서 추천했던 사람이라 합니다. 유판사는 전임판사와 비교할 때 더 편파적인 것같다는 변호인측의 판단은 사건 배당 흑막을 더 궁금하게 합니다.

그들의 승진을 위해서, 탄탄대로를 위해서는, 담당판사가 누가 되든간에 이런 인권탄압, 언론자유 봉쇄 같은 시국사건은 재판관의 판결이 이미 나와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재판진행의 불공정성은 모든 일에 의심이 가게 만듭니다. 많은 아고라 친구들이 그래서 저보고 둘러리 서느니 아예 증인으로 출석하지 말라고 충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출석하였습니다. 재판에 지더라도, 편파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비겁하지만 현명한 포기’보다 “승산없는 무모한 투쟁’이 더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다만 저도 알만큼 아는 사람이기에 두 가지를 준비하였습니다. 하나는, 검정 넥타이를 매고 간 겁니다. 딱 하나 가지고 있는 검정 넥타이, 그 넥타이를 문상(問喪)갈 때 외에 맨 것은 처음입니다. 저는 1994년 담시(譚詩)‘21세기의 5적’을 쓰면서 언도(언론도적), 법도(법률도적), 공도(공무원도둑) 등 신오적이 21세기 새천년에도 건재할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법도(法盜) 3형제는 검도(검찰도둑), 판도(판사도둑), 변도(변호사도둑)를 뜻합니다. 무료변호만 하시는 박찬종 변호사의 판단으로는 변호사도 대부분 도둑놈이라는 확인를 해주셨습니다. 박변호사는 지하철타고 찬바람 맞으며 박대성씨 면회가는데 새파란 젊은 변호사들이 고급차를 타고 휙 지나간다는 거지요. 저는 이런 이야기 안들어도 사법정의가 사망하였다고 믿는 사람이기에, 증인으로 나선 첫 번째 법원 방문에 검정 넥타이가 제격이라 판단한 겁니다. 예상이 적중해서, 딱 맞는 판사님을 알현하게 된 것이지요.

또하나는 30쪽에 달하는 준비물, 10여 가지의 참고자료 등이었습니다. 증인은 위증을 하지 않는다는 선서를 합니다. 사소한 통계라도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던 겁니다. 1998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할 때, 대통령께 드리는 보고서를 만들 때만큼, 최선을 다하여야 했습니다. 그 고생을 감당한 보람이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끝나고 아고라 친구인 짱님을 처음 맞대면 하였을 때, 모든 피로가 사라지는 기쁨을 가졌습니다. 준비과정에서 가르침을 주신 좋은 분들도 새로 알게 되어 그것도 저에게는 큰 보상입니다. 사법개혁이 왜 필요한가 절실히 깨닫게 된 것도 큰 배움입니다.  

일개 증인의 입장에서도 이런데, 박대성씨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 그것은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저는 그와 만난적이 없고, 법정에서도 끝난 뒤 악수만 하고 헤어졌습니다. 방청하셨던 분들 말로는, 검찰측 증인이 발언할 때, “근거가 없다”는 등 부정하는 제스쳐를 보였다 합니다. 제가 증언할 때는 수차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도 솔직히 그가 진짜 미네르바인지 100% 확신은 못합니다. 그의 옥중보고서가 실제로 그가 쓴 것이라면, 저의 판단으론 진짜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봅니다. 그 글은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 그가 설사 가짜라 하더라도 그는 풀려나야 합니다. 인터넷 언론자유의 존속 여부가 이 사건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날 재판에는 ‘국경없는 기자단’에서 온 사람이 방청의 일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박대성씨가 기자도 아닌데 먼 길 출장 올 정도면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그 귀추가 주목되는 대사건이 되어 버린 겁니다.

박대성씨의 체포뒤 이 사건을 기사화한 외국언론은 Washington Post, LA Times, Christian Science Moniter, Wall Street Journal, Financial Times, Guardian, Economist, Times 등 여러 유수의 곳입니다. 영어로만 검색하였으므로 독일어, 불어권에서도 분명 보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해외 독자분 들은 자신의 거주국에서 언론에 난 것이 있으면 매체명과 날짜, 제목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한국이 태국도 겪지 않는 제2 외환위기를 겪는 것도 괴롭고 수치스런 일인데, 이명박 정권은 미네르바 구속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비민주정권임을 드러내서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아, 판사님에 대한 고마운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23일의 치욕은 아직 가슴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 측면 이외에 더 중요한 ‘헌법적 기본권’이란 측면의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로, 법을 공부할 의욕을 선사하신 것에 대해 유판사님깨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공부하니까 고려대 박경신 교수, 김승환 헌법학회 회장, 전북대 송기춘 교수님 등이 미네르바를 ‘허위사실유포죄’로 잡아넣은 것은 위헌이라는 요지의 글들을 많이 쓰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들 글을 많이 보십시오!

사실 박대성씨 변호인단은 이미 재판부에 ‘위헌제청’신청서를 냈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판사라면 이 위헌제청신청에 대해 Yes냐 No냐를 먼저 결정하고 나서, 재판을 진행하여야 하는데, 신영철식 촛불재판관들보다 못한 비열한 방법을 택하고 있다고 하네요. 즉 Yes면 판사가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하는 것이고, 판사가 No로 기각하면 변호사가 직접 헌재에 소원을 제출할 수 있는 것인데, 마음속으로 No이면서 기각을 하지 않으니까 변호인단도 위헌문제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이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고, 유판사가 전기통신기본법이란 악법에 기초하여 진행하는 재판에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판사란 분 얼마나 교활한 분입니까? 박찬종, 박재승 등 유신때부터 인권유린에 대한 재판을 많이 변호하신 분들이 꼼짝없이 당하고 있으니, 그 분들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겠습니까? 저는 반나절 가서 당하고도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데, 그분들은 앞으로도 여러번 유판사를 법정에서 보고 게속 당하여야 하는 입장이시니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새삼 촛불시위건에서 위헌제청을 한뒤 법복을 벗은 박재영 전판사님이 돋보입니다. 그런 휼륭한 분은 판사 수백명 중 한 분 있을까 말까합니다.

이 정도면 제가 얼마나 유판사님 고맙게 생각하는지 충분히 말씀드린 것같네요. 다음에는 궁금한 것 간단간단히 말씀드리지요.

첫째, 형사소송법 어디에 증인이 사전에 준비한 자료를 읽지도 말고, 보는 것도 삼가라는 규정이 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박찬종 변호사님은 많이 준비할수록 좋다고 하시면서 형사소송법상 다 허용된다고 하셨는데, 왜 유판사님은 재판을 그렇게 진행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피고인과 만난 적도 없고, 미리 누구와 말을 맞춘 적이 없습니다. 저는 교통사고의 목격자처럼 그런 증인이 아니라, 외환과 거시경제의 전문가로서 소위 감정(鑑定)증인으로 출석한 것입니다.

둘째, 짧게 유죄인지 무죄인지 결론만 증인에게서 들을거면 뭐하러 증인을 부르는지 궁금합니다. 나같은 사람까지 증언대에 세웠으니까 재판은 공정했다고 포장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 나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재판전에 하면 제가 증언을 안 할까봐 변호인측이 나중에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변호인측은 재판에서 증인은 하고싶은 이야기를 뭐든 다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증인들은 모두 재판 시작할 때 증인선서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신없는 증인은 짧게 이야기하는 것이 상책일수도 있겠지요. 나는 어디서든 할 말은 다하는 사람입니다. 수백만이 보는 TV토론이든, 권력자 앞에서든, 국회의 재벌은행만들기 상임위에서든, 장충단공원 3만명 앞에서 전두환, 노태우 처단을 외칠 때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판사가 주재한 23일 재판에서는 할 말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더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판사는 거절하였고, 제가 우기자 1분 시간을 주면서, 그 1분을 넘기면 쫓아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제 뒤에서는 廷吏(정리)가 저를 잡고 내치려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고 방청객들은 말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저는 외쳤습니다.

“공정한 재판이라면 먼저 2006년 이래 외채 급증기에 아무 대비책을 못 내놓은 재정부(구 재경부) 고위관료, 금감위 고위관료, 한국은행 고위직, 작년 이후 위기극복을 제대로 못하고 있고 제2 외환위기를 인정하지 않고 감추는 재정부, 금융위, 한국은행 사람들 합계 수십명을 재판해야 한다. 그들이 공익을 해친 것은 수십조, 아니 앞으로 수백조원으로 늘어날 것이다. 미네르바는 공익을 해치지 않았고 국가신인도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를 구속하여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비민주성을 보인 검찰과 사법부가 나라체면을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셋째, ‘생동감 있게’또는 ‘생생하게’ 재판이 진행되어야 하니까 준비물을 읽지 마라. 저는 별로 읽지 않았습니다. 이곳 저곳 띄엄띄엄 읽은 부분을 다 합해도 30쪽 중 두 페이지가 안될 겁니다.

그런데 재판이 무슨 스포츠 중계라도 되는 겁니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국가 권력자도 관심을 크게 갖는 사건에 피고측 증인으로 가서 머리에 생각나는 것 몇마디만 하면 되겠습니까? 사꾸라 증인이라면 그렇게 하겠지요. 저는 그 자리에 나온 수구세력의 언론도둑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도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가듯’ 신중하게 조심조심 발언한 것뿐입니다. 조중동 중 한 신문은 제가 검사의 질문에 답한 것만, 그것도 왜곡해서 실었습니다. 하나라도 실언을 하였다면, 그 실언의 내용이 대문짝만하게 나왔을 텐데 그런 일은 없었지요. 제가 그라프로 설명한 것은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이 미네르바가 아니라 정부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구언론은 물론 진보언론 어디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더군요. 그러나 아고라에 앞으로 나오면 많은 분이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 경제학은 고등학교 2학년 정도면 이해하는 거니까요. 제가 볼 때는 저의 증언은 하나하나가 공소장의 허점을 찌르는 날카로운 것이었답니다.

특히 박찬종 변호사가 제시한 문건, 짱의 글에 사진으로 나온 재정부의
비보도 요청문건은 선진국에서라면 최소 당시 장차관까지 목이 달아날 대단한 내용입니다. 제대로 된 기자라면 기사화할 내용이 너무 많아서 고민하였을 텐데, 언론의 현실은 진보쪽까지도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넷째, 변호인측 증인은 개돼지 한 마리이고, 검찰측 증인은 고명하신 세분이나 모셨는데, 왜 검찰측 증인이 더 필요한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개돼지 한 마리가 고명한 세사람을 막아낸 겁니까?

다섯째, 변호인측이 여러명에게 증인 부탁을 하였으나, 하겠다고 나선 자는 개돼지 한 마리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유신과 전두환독재시절에도 시국사건에 증인 얻기가 지금보다 어려웠는지, 이건 당신은 모르실테니 원로 변호사님께 여쭙겠습니다. 사법부와 관련하여서는 유신때와 비교해 나아진게 거의 없다는 두 박변호사님의 한탄이 귀에 쟁쟁합니다.

여섯째, 무슨 이유로 재판을 그렇게 서두르셨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무슨 중요한 져녁약속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두 변호사님은 8시까지도 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왜 5시 40분에 끝나야 했고, 이 불초 증인을 쫓아내려고 했는지 궁금합니다.

일곱째, 유판사보다 더 불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가 어디 계신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박찬종 변호사님은 “오늘같은 불공정 재판은 근래에 겪은 바가 없다” 하시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변호인단은 현단계에서 판사기피신청도 못한다고 하더군요.  

마지막으로, 펜은 칼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강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그건 궁금하지 않습니다. 물론 권력의 칼이 갖는 위력을 잘 알고 있을테니까요. 당신의 판결만큼이나 불을 보듯 뻔한데 궁금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고라 여러분

이렇게 훌륭하신 유영현 판사님은 앞으로 승승장구 승진을 하셔서 지방법원장을 거쳐 대법원장까지 되실 인물이니, 4월 6일(오후 2시)에 교대역(2호선, 3호선)에서 10분 도보거리에 있는 522호실로 오셔서 알현하십시오.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견이 다르시겠지만 30대 초반 전문대 출신 백수 박대성씨도 보시구요. 판사가 얼마나 공정한 재판을 하시는지, 주권자들이 감시하여야 합니다. 멀리 프랑스에서도 몇천불 비용을 들여서 오는데 (국경없는 기자회), 우리 스스로 주인 노릇하여야 합니다.

저를 알아보시기는 쉽습니다.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합격점을 받아 국민소득수준이 모자라는데도 싱가포르에 앞서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OECD에 가입하였습니다. 자랑스런 OECD 회원국의 주권자로서 힘과 지혜를 모읍시다.


(추가) 50대 선인님이 베스트에 올린 글을 쓴 사람은 두개이상 다른 글을 링크하면 좋은 글을 더 많은 사람이 보게된다고 댓글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은 제가 준비가 채 안되어서 직접 링크 못시킵니다마는 다음부터 꼭 할께요. 우선 짱의 어제글 (어제 날짜로 가셔서 찬성순으로 보시면 10위내에 있음: 23일 재판을 재미있게 묘사하시고, 법원 구내식당 식사까지 하셨나 봄. 정말 멋진 남자임. 법정 방청 방법 자세히 나와있음) 보시라고 권하고 싶고요.
또 하나 추천: '50대 선인' 화요일 글(24일): 역시 경방 - 베스트 - 찬성순에서 10위 정도에 나와 있습니다. 그 글 읽으시고,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서로 아이디어 교환하세요. 주권자의 힘은 열정과 창의에서 나옵니다.
50대 선인님, 진정으로 고맙습니다.



미네르바 판사님, 고맙습니다. 궁금합니다. 김태동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 ··· 3D600594 (새 창으로 열기)

 

<덧붙이는글> 김태동 교수님, 님은 대체 그 자리에 왜 서셨나요? 님은 피고인 박대성의 증인으로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김태동 님을 변호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선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뭐 하자는 플레이인 건지요? 님은 지금 피고인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님의 '똥폼'만을 잡고 계십니다. 님, 님의 이같은 행동이 피고인 미네르바에게 무슨 득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님이 쓴 글을 보니, 님은 도대체 님의 똥폼 잡는 거 말고, 피고인 미네르바 박대성이 풀려나는 일에 진정 관심이 있는지조차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래도 명색이 청와대 경제수석씩이나 하셨다는 분께서, 정말 왜 이러십니까?    
 
2009/03/27 03:09 2009/03/27 03:09
이춘근

회사에서 30박 31일 묵으며 퇴근 못한 두 회사원 이야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문제점을 다룬 '광우병 소.. 어쩌고' 하는 엽기적인 프로그램을 제작한 이춘근 PD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끌려갈 때를 대비하여 미리 찍어둔 동영상"이 있어 소개합니다. 타이틀부터가 아주 섹시합니다. "회사에서 30박 31일 묵으며 퇴근 못한 두 회사원 이야기" [footnote]정말 존 회사입니다. -_-  아, 곧 2탄이 공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기대가 큽니다. [/footnote]  



 
  

아래 옮기는 동영상은, 지난 3월 6일 PD연합회가 주최한 '한국PD대상' 시상식에서 역시 '광우병 미친 소 내 눈으로 직접 봤다. 어쩌고' 하는 엽기적인 프로그램으로 '올해의 PD상'을 수상한 이춘근 PD의 수상소감입니다. 꼭 함 보세요. 정말 잼있습니다. 정말 감동입니다. [footnote]한국 PD는 작은 거짓말을 하면 징계를 먹지만, 사회 전체를 뒤흔들어버릴 정도의 큰 왜곡을 하면 상을 받습니다. 한 넘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만 명쯤 죽이면 영웅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요. -_-[/footnote]





[하나더] 체포영장 발부된 김보슬 PD 인터뷰 동영상 보기




<덧붙이는글> 저 동영상들도 이내 자삭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예측 불가한 친구들이어서 말이죠. -_-
<덧> 자삭한 후 예상답변
1. 조선일보 때문이다.
2. 이명박 독재 타도! 언론자유 만세!
3. 보태준 것 있어요?

<덧> 이 블로그 쥔장께서는 가능하면 모든 댓글에 100% 답글을 드립니다. 단, 도배맨의 경우는 여기서 예외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도배맨이란 하나의 댓글로 가능한 얘기를 계속하여 새로운 게시물로 작성하면서 '도배'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예 : 이 글에 달린 '삶에 여유가..'의 경우)
2009/03/26 10:36 2009/03/26 10:36
한국 PD 연합회, 니들은 살짝 더 미친 듯.


이명박 정권은 미쳤다

이 정권은 미쳤다 니들도 살짝 미쳤다

   

미친 독재정권 심판의 촛불을 다시 든다

이명박 정권이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MBC < PD수첩> 이춘근 PD를 체포한 것은 이성을 상실한 독재정권의 발악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노종면 위원장 등 YTN 기자들은 일요일 이른 아침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잡아가더니, 이춘근 PD는 늦은 밤 집 앞에서 역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체포했다. 이성도, 도덕도, 양심도, 인륜도 없는 이명박 정권은 말 그대로 미친 독재정권이다.

노종면 위원장을 불법적으로 체포·구속한 것이 이명박 정권의 막장이라고 여겼더니 우리의 어리석은 오해였고, 순진한 착각이었다. 이는 언론을 상대로 공안의 미친 칼부림을 벌이겠다는 선전포고였을 뿐이었다. 이춘근 PD를 체포함으로써 이명박 정권은 마침내 전체 언론인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했다. 우리는 미친 정권의 이 무모하고도 어리석은 도발을 기꺼이 상대할 것이다. 이왕 시작된 전쟁이니 반드시 끝장을 볼 것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언론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니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고,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우리는 검찰이 < PD수첩> 제작진의 이메일과 통화기록을 압수수색했을 때 “검찰이 계속 < PD수첩>에 대한 강압적이고 억지스러운 표적수사를 벌인다면 단언컨대 국민적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했다. “우리 방송 PD들부터 검찰에 대한 심판에 앞장 설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YTN 기자들이 체포됐을 때도 “< PD수첩>에 대한 수사 또한 즉각 중단”하고 “언론의 정당한 비판에 귀 기울여라”라고 재차 경고했다. 우리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났고, 이제 실천에 나서는 길밖에 없다.


MBC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의 부실함을 지적하고 국민 건강권과 검역주권의 소중함을 새삼 상기시킨 < PD수첩>의 정당성을 다시 말하는 것은 이성을 상실한 독재정권에게는 사치일 뿐이다. 거대한 촛불 앞에 대통령이 두 번이나 머리 숙여 사과하고 재협상을 벌였음에도 이제와 다시 ‘명예훼손’ 운운하며 제작진을 잡아가는 미친 정권을 상대로 말로 타이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수사를 책임졌던 부장검사조차 부당한 수사였음을 실토한 마당에 기어이 제작진을 잡아가두는 미친 독재정권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춘근 PD 개인이나 < PD수첩> 제작진을 상대로 한 전쟁이 아니다. MBC만을 상대로 한 전쟁도 아니요, 우리 전체 PD들만을 상대로 하는 전쟁도 아니다. 언론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언론인, 그리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 모두를 상대로 이명박 정권이 벌인 전쟁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듯 지난해 봄 미친 소를 막기 위해 거대하게 타올랐던 촛불이 새봄과 함께 이제 미친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금 한국사회를 뒤덮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촛불을 우리부터 다시 들 것이다.


2009년 3월 25일
한 국 P D 연 합 회
 
 
 

 
2009/03/26 09:20 2009/03/26 09:20
내가 만일 레디앙과 참세상의 편집자라면 자폭한다.
왜냐고? 쪽 팔리니까.


레디앙

경악! 레디앙이 배설한 엽기기사


참세상

참세상의 슬픈 본색


그렇다. '정명훈 죽이기'로 일관하고 있는, 그것도 한갓된 자기 감정으로 한 인간을 죽이고 있는 저 기사 얘기다.  나는 저 기자를 탓하고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저걸 기사라고 대서특필한 편집진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그래서다. 내가 만일 저 기사를 기사화한 편집자라면 자폭할 거라고 말하는 이유는.

저런 게 기사면, 날아가는 새는.. 뭐더라? 그렇다. 저게 기사라면 날아가는 새는 똥파리다!





<덧붙이는글> 그래도 '모욕적인 인신공격'이 뭔지는 아는 모양이다. 댓글쓰기까지 막은 거 보면.  
 
레디앙

레디앙

 


<덧> 공지한 내용이 처음에는 위에 캡처해서 올린 것과는 많이 달랐네요.
인신공격의 피해자가 '글쓴이'라고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습니다.
 http://minoci.net/782 (새 창으로 열기)

위 해당 레디앙 기사 댓글 안내문
2009-03-24 20:40:28      
알려드립니다
독자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이 글과 무관한 모욕적인 인신공격성 댓글로 인해 필자께서 고통받고 계십니다. 필자는 저희에게 모든 댓글을 지워줄 것을 요구했으며, 편집국의 판단에 따라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비판적인 견해도 많이 있을 줄 압니다. 필자의 괴로움과 편집국의 판단을 널리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 글에는 더 이상 댓글을 달지 않아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편집국장 이광호.
  
2009/03/25 15:59 2009/03/25 15:59

곤혹스럽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라니.

엊그제 아웃사이더님으로부터 나에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의 바통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오늘 왼종일 이걸 화두로 붙들고 있다. 마감시한은 눈앞이고, 무엇보다 오늘 잠시 노닥거렸더니 해야 할 일도 산더미다.
 
여전히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못 했다.

화장실만 몇 번 들락거렸다. 이것도 병이다. 아웃사이더님으로부터 저 바통을 넘겨받기 전에 민노씨.네서 비슷한 얘기를 듣본 적이 있다. 그때 내가 한 답은 이랬다. "내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는 불로고스피어의 거의 모든 이들입니다."

맞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저 답 또한 실은 온전한 답은 아니다. (갑자기 또 떵이 마렵다. 잠시 쉰다)


선지자 하민혁의 민주통신

거미의 지혜


큰 일 보고, 담배도 한 대 풋고.. 그러면서 창문에 턱 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이 블로거는 이렇게 말하고 저 블로거는 저렇게 말하고.. 아, 이 블로거 웃기잡는.. 어, 저 블로거.. 음.. 내공이 상당한 거같으.. 그래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데 가능하면 싫은 야구는 빼고 뭔가 그럴싸하게 칭찬할 거 만들어서 그렇게 가면 되겠네.

하면서 들왔는데. 머리는 다시 하얘져 버렸다. 민노씨.네서 말한 저 댓글 아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 훼이크 아닙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그거 훼이크 맞다.

하민혁에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 하낙도 없다. -_

하고 적고 났더니,  
몇몇 블로거가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앗! 저거 잡아야 하는데..  쓰..

올오어낫씽!
이다. -_-


하민혁의 민주통신

하민혁의 민주통신





<덧붙이는글> 흑, 아웃사이더님, 정말 미안합니다. 다음에.. 다음에.. 꼭 하겠습니다.  -_-  
  
2009/03/24 22:54 2009/03/24 22:54
올블로그에 잠깐 들렀다가 괴상한 걸 하나 발견했다. 정명훈 관련 글 몇 개가 베스트로 내걸려 있었다. 웬일인가싶어서 관련 글들 몇 개를 찍어봤더니, 아뿔싸~ 또 저 지겨운 천둥벌거숭이들의 마녀사냥이다. 걸배이 근성이 뼛속까지 배인, 딱 아메바 수준의 뇌를 가진 듯싶은 단세포들이 벌이는 마.녀.사.냥.  -_-


정명훈

정명훈,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


뭐 자세한 내용이야 생략한다. 굳이 보고싶은 이들이 있다면, 레디앙에 올라온 전혀 충격적이지 않은, 충격, 지휘자 정명훈 "미국에 구걸하더니 이제와 촛불?" 이라는 걸배이 근성 가득한 충격적인 글을 보면 될 터다(클릭 비추다).

에니웨이, 이 친구들이 충격 먹었다는 정명훈의 말을 함 옮겨보기로 한다.


“이 합창단이 없어졌다고, 그 합창단을 살려야 되겠다고 지금 여기 와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기에. 그 사람들을 꼭 구해야 돼요?”

“한국은 합창단 해체해도 다음 날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 500명 금방 모입니다. 한국에서는 합창단 때문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대체 왜 해체했다는 겁니까, 이유가 뭐래요? ”

“그야 물론 경영효율, 예산 절감이 이유죠. 표면적인 이유는 상설 합창단을 둘 수 있는 규정이 없다는 거고.”

“거봐요. 예산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 예산 당신들이 어디서 만들 거예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건데. 당신들이 나서서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니요. 오히려 오페라단 예산은 올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예산 집행의 우선 순위를 잘못 두고 있는 게 문제죠.”

“이봐요. 내가 서울시향에 있는데 거기서 일 년에 5~6명씩 해고당해요. 여기만 해고당하는 사람들 있는 거 아니예요. 지금 온 나라가 다 그러구 있는데, 합창단 하나 없어졌다고... 이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그리고, 도대체 나더러 뭘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서명하라구?”

“그거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내가 한국 가서 이거 알아 볼 거예요. 오페라 단장한테 물어보죠. 어떻게 된 건지.”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 답변이다.
내가 정명훈이었다고 해도 저 상황에서 도대체 이보다 더 나은 다른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었을까싶다.

그런데도 이 친구들은 이같은 상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끝까지 걸배이 정신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보였고, 그러자 결국 정명훈은 항복 선언을 하고 만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그 100만 명이나 촛불 들고 거리에서 서서 미국 쇠고기 안 먹는다고 시위하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죠? 40년 전에는 미국에서 뭐 안 갖다주나 하면서 손벌리고 있더니, 이제 와서는 미국산 쇠고기 안 먹겠다고 촛불 들고 서 있는 그 사람들.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알았어요. 알았어.”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저기 아프리카나 가서 도와줘요. 여기서 그러지 말고.”

“도대체 제 정신을 좀 차리세요. 공부 좀 하란 말이야. 세상이 그런게 야니야. 이 계집애들이 말야. 한 밤 중에 찾아와서.”

비속어까지 서슴지 않는 그를 향해, 나는 그에게 제대로 적합한 말인 “정신차리라”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당신이나 정신 차리세요!”


정명훈의 저 말을 듣보면서 그의 답답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footnote]만일 내가 정명훈이었다면, 저기에 꼭 한마디를 더 했을 성싶다. 똥.떵.어.리.[/footnote] 그리고 이내 땁땁~해진다. 저런 숨 막히게 웃기잡는 짓이 하루도 빠짐없이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 현장을 내가 살아가고 있어서다.

그런 점에서 정명훈은 확실히 축복 받은 이임에 틀림없다.



<덧붙이는글> 날이면 날마다 꼬레안의 천민의식을 질타하는 블로거가 하나 있다. 그 친구한테 함 물어보고싶다. 저 친구들이 뚝뚝 흘리고 다니는 저 천민 행태는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_-
  
2009/03/23 20:54 2009/03/23 20:54
동아일보의 진상조사 보고서 발표와 함께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미네르바 사태가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제 2라운드를 시작할 것으로 보입니다.     

신동아 미네르바 사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권모씨(아고라 필명 '담담당당')가 오늘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동아일보사 진상조사 보고서'에 대해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신동아와 접촉하며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비망록 일부를 공개하면서입니다.

"동아일보사 진상조사 보고서에 대한 반박과 소견(전문)" <== 바로가기

그가 밝히고 있는 반박과 소견의 요지는 '동아일보사의 진상조사는 미리 방향을 정하고 짜맞춰진 조사'라는 것입니다. 권씨는 글에서 이에 대한 이유와 근거를 하나하나 짚은 다음 동아일보에 대해 이를 해명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특히, 진상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동아일보가 보여준 무례함과 희생양 찾기에 가까운 조사 방식에 상당한 불편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글도 거기서 비롯되고 있다는 인상이 들 정도입니다.


미네르바, 인터넷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 인터넷 경제 대통령


무튼, 권씨의 이 글을 계기로 잊혀져가고 있는 미네르바 문제가 다시 공론의 장으로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내용을 보면 상당 부분에서 진흙탕 싸움이 될 개연성이 없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문제는 동아일보의 진상보고서 한 장으로 이렇게 우습게 봉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덧붙이는글> 그가 계속 공개하겠다는 비망록에 대한 약속이 지켜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9/03/23 17:22 2009/03/23 17:22
고재열의 독설닷컴

고재열의 독설닷컴

"원쑤가 있는 한 절대로 총을 놓을 수 없다."

어디서 많이 듣보던 말입니다.
얼마 전부터 블로고스피어에 이 증오와 저주의 '원쑤론'을 들고 나온 '듣보잡' 블로거가 하나 있습니다. <시사인>이라는 '듣보잡' 주간지의 기자 고재열입니다. [footnote]아, 이건 '고재열식 표현'입니다. 자신과 다른 건 다 '듣보잡'이 되는. 아름답지 못한.[/footnote]

블로그에 있는 소개글을 보면, 이 친구는 지금 영혼에 상당한 내상을 입은 듯합니다.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심리치료를 요할 정도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 상처 입은 영혼이 하고자 하는 일이 또 '조중동 바로세우기'랍니다.

자기 회사 하나 바로 세우기도 힘든 세상에서, 아니 자기 한 몸 챙기기도 쉽지 않은 이 팍팍한 세상에서, 성치않은 영혼 달래가며 '원쑤'의 '조중동 바로 세우기'에 나선 그 모습이 정녕 장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청년이,
그렇잖아도 '상처 받은 이 젊은 영혼'이 요즘 상태가 부쩍 더 많이 불안정해보입니다.

지금 한창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장자연 리스트'에 그 '원쑤' 언론사주의 이름이 올라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입니다. 그 '원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언론사주'로밖에는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이 상처입은 영혼에게는 차마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는 '그 언론사주'를, 그 '원쑤'를 끌안고 논개처럼 자폭이라도 하고 싶다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논개'가 되어서 그 언론사주를 안고 자폭하면 어떨까요?"


고재열

고재열 블로그 독설닷컴 중에서


한마디로, 그 원쑤의 이름을 "블로그에 확 까고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footnote]아서라~[/footnote]

물론 술자리서 객기로 한 얘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취중진담'이더라고 술 취해서 지끼는 말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 법입니다. 그냥 흘려만 들을 얘기는 아니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다른 언론인들이 굶어 죽고 괴로워 죽는 동안
그 수구꼴통 언론사주 분은 쪽팔려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같은 글에서 이 친구가 하고 있는 말입니다. 확실히 헷갈리는, 불안정한 모습입니다. 그 수구꼴통 언론사주 분이 언능 뒈졌으면 좋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진짜로 건강하시라는 말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설마 나중에 자신과 함께 자폭할 때까지 제발 건강하게 살아달라는 말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_-

그렇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이 친구가 지금 도무지 불안정해뵌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안정한 정신 상태 갖고 '조중동 바로세우기'는 커녕 어디 자기 자신 하나 제대로 바로 세울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고재열 기자님..


고재열

고재열, 님을 이 시대의 '논개 열사'로 임명합니다


제가 고재열님을 '논개 열사'로 임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괜히 쓸데없는 짓 할 생각 마시고 우선은 님의 상처입은 영혼부터 제대로 치유하시길 감히 권합니다. 내가 보기엔, 그게 순서일 것같아서입니다.  

이상, 대한민국 블로고스피어의 일등 매너 블로거 하민혁이었습니다.



more..




<덧붙이는글> '논개열사' 임명장은 언제라도 말씀해주세요. 즉시 만들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2009/03/22 23:00 2009/03/22 23:00

이른바 '카더라 통신'이라는 게 있습니다. 위키백과에서는 이 '카더라통신'을 이렇게 풀고 있습니다.

위키백과의 '카더라 통신' 설명 보기

유창선

유창선의 시선

유창선이라는 시사평론가가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로 데뷰하여 '방송 밥'까지 먹은 꽤 유명한 친구입니다.

'시사평론가'라는 직함이 말해주듯
시시콜콜 다른 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걸로 이름을 날린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들렀다가
오늘 저 '카더라 통신' 비슷한 얘기를 듣봤습니다.

요즘 한창 쌔우고 있는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한 글입니다.
제목은 장자연 리스트, 포털검색에서 삭제해달라? 입니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유창선의 블로그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지인으로부터 "장자연 리스트에 등장하는 언론사가 포털에 '장자연'이나 '장자연 리스트'의 검색결과를 삭제해달라는 '공문 아닌 공문'을 보냈다"는 요지의 얘기를 들었더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카더라 통신'인 셈인데요. 카더라 통신이 갖춰야 할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글입니다. 책임 소재가 일만한 대목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예컨대, 물음표를 붙인 제목서부터, '요구를 했다'고 전하면서도 '옮기는 내용의 표현은 실제와 다소 다를 수 있다'는 데까지 빠져나갈 구멍은 다 챙겨두고 있습니다.


유창선의 블로그
그런데 이 친구는 지금 왜 이같이 장황하게 지인의 얘기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지금 이 친구는 뭔가 껀 수를 하나 챙기고싶은 것입니다(실제로 이 친구가 최근에 쓴 글 10개 가운데 4개가 장자연 리스트에 관한 글입니다).

그 의도 또한 굳이 숨기지 않습니다. '보다 정확하고 생생한 인용을 위해 문서를 얻을 수 있는지'까지 묻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당근 '불가'인 터였지만요.  

무튼, 뭐 이런 따위 얘기를 하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닙니다.

유창선이라는 친구는 그래도 명색이 시사평론가입니다. 카더라 통신이 갖는 문제점을 모를 리 없고, 그것이 경계해 마땅한 일이라는 사실 또한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 친구가 카더라 통신임을 밝히면서까지 저 얘기를 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필시 정말로 하고싶은 뭔가 더 중요한 게 있을 터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창선은 확실히 하고싶은 얘기가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얘기입니다.
 

1. 지인의 얘기를 듣고 포털 검색창에서 '장자연 리스트'가 자동검색어로 나오는지를 확인해봤다.
2. 야후는 자동검색어로 '장자연 리스트'를 보여주었지만, 다음과 네이버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3. 고로, 모 신문사의 요구가 포털로 하여금 필요 이상으로 몸조심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확실히 의미있는 주장이고 훌륭한 추론입니다. 공감합니다.

유창선은 이 결과에 만족해 하며 모 신문사를 향해 의기양양 한마디 충고를 던집니다. "권리를 행사하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가면서 해야 한다"고, 그래야 자신들의 명예도 보호받을 수 있다"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유창선이 저 글에서 하고싶었던 말의 핵심은 여기에 있었던 셈입니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창선 자신은 과연 "지킬 것은 지켜가면서" 이같은 결론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대답은 '노!'입니다. 유창선은 다른 이에게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도덕질을 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정작 유창선 스스로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있지 않아 보입니다.

우선 유창선은 자기 주장의 전제 자체를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기업들이 포털 업체측에 이런 요구를 할 경우 이런 식으로 막가파식 요구를 하지는 않는다"고 유창선은 말합니다. 모 신문사가 팩스를 보낸 걸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유창선과 그 지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먼저 '막가파식 요구'라는 표현입니다. 나는 내가 만일 모 신문사의 경우에 처했다 할지라도 저 요구를 했을 법 하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정당한 요구겠다는 생각이구요. 적어도 '막가파'로 몰아서는 안 될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건 원칙의 문제입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그냥 답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예컨대 '유창선'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추잡한 리스트가 인터넷에 떠돈다고 할 때, 유창선이라면 어떨까요? '까짓 그게 뭐 대수인가' 하고 넘어갈까요? 유창선이라면 그럴 지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협조 요청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는 이게 지극히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봅니다. 그런데 유창선은 지금 이게 '막가파식 요구'라고 말합니다.

또한 유창선은 "'장자연 리스트'가 뜨지 않은 포털의 경우 모 신문사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자율적인 판단의 결과인지 알기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아무튼 모 신문사 측의 과도하고 무리한 요구가 포털 측으로 하여금 필요 이상으로 몸조심하게 만드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는 전혀 엉뚱한 결론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유창선의 이같은 웃기잡는 추론이 설사 맞다고 하더라도 포털의 대응은 정상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지, 유창선처럼 그걸 걸고 넘어질 일은 아닙니다. 앞서의 예를 다시 들어 설명하자면, 내가 '인권 침해' 등의 사유를 들어 정당하게 그 리스트의 검색 결과 배제를 요구하는 경우, 나는 포털이 그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footnote]내가 보기에 해당 포털은 이같은 요구가 정당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footnote]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유창선의 주장대로 포털이 나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한다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보는 때문입니다. 그건 포털을 인권 보호의 무방비 상태에 두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고 포털에 무한대의 권한을 주자는 얘기에 다름 아니어서입니다.

그런데도 유창선은 이같은 문제에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포털 사이트를 엿장수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겠다는 발상은 인정할 수 없다"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보는 '시사평론가' 유창선이 '장자연 사건'을 다루는 수준이 딱 이 정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창선 시사평론가한테 내가 한 가지만 정중하게 도덕질을 해드리고싶습니다.

유창선님, 포털은 말임다. 그거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절대 권력 아닙니다. 특히 지금 님이 '인정할 수 없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는 그 부분은 포털 아니라 포털 할애비라도 함부로 건들어서는 안 되는 '인권'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인권'은 그 대상이 유력인사든 길거리의 걸인이든지를 떠나서 님같은 분이 끝까지 끌안고 지켜줘야 하는 마지막 보루와 같은 것이랍니다.

그러니.. 님, 정신 좀 챙기세요. 왜 이래요, 아마추어같이.  
 

 
 

2009/03/21 20:18 2009/03/21 20:18
사람은 호기심의 동물입니다. 호기심이란 무엇인가요? 궁금한 건 뭐든지 알고싶어하는 감정입니다. 특히 그것이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거나 자신의 적이 관련되어 있는 경우에는 알고싶어서 거의 미치고 팔짝 뛰는 게 사람의 호기심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바로 이 호기심의 천국이 되어 있습니다.
 

장자연 리스트?

장자연 리스트? 까지 말라고 해도 깐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내용인즉, 장자연이 죽기 전 작성한 문서에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넘들, 이른바 '유력인사들'의 이름이 올라 있는데, 알고보니 그게 연예계의 술자리 시중과 잠자리 강요 곧 성접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함 보겠습니다.

이 사안은 그 자체가 사람들이 즐겨 흥미를 갖는 연예가의 일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사람의 오감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연예가의 은밀한 뒷 얘기, 곧 술자리와 잠자리 얘기이구요. 여기에 한창 젊은 여자 연예인의 죽음까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그 리스트에는 목하 혈전 중인 한 진영의 적장급까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찌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동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가히 손발이 오그라들고 정신은 거의 까무러칠 지경에 이를 정도일 터입니다.

좋습니다. 호기심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하물며 이토록 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심을 잃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이 훼이크건 포커 페이스건 그런 건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이런 경우 필요한 것은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자제력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호기심 천국은 이같은 자제력과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오감을 자극하는 드라마적 요소에 이성은 맥을 추지 못한 채 나자빠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애오라지 감각만이 살아남아 광기어린 춤을 쳐대고 있는 형국입니다. 왼갖 허재비들의 단세포적 주의주장이 난무하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다른 건 다 접겠습니다.
저 단세포들의 얘기를 일일이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손가락 아픈 노릇이어서입니다.  
여기서는 그냥 한 가지에만 주목하기로 합니다. 장자연 리스트의 공개 문제입니다.


진중권의 장자연

그거 반어법이었어요~ 소통이 힘들어요~

며칠 전 진중권이 뉴진보 사이트에서 저 리스트를 '까라'고 주문한 바 있습니다.

그 말이 갖는 함의를 모를 리가 없는 진중권인지라, 자신이 아침에 한 그 말을 저녁에 손바닥 뒤집듯이 바로 바꿔버리기는 했지만(그거 반어법이었어요~ 한국 사회는 소통이 힘들어요~ 어쩌고 하면서), 그의 글 갈피갈피마다에는 리스트를 까고싶다는 욕구가 절절하게 배어 있습니다.

진중권이 아니라 진중권 할애비라도 그런 생각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진중권의 저 욕구 자체를 두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것을 주장하는 방식입니다.

진중권은 저 글에서(그리고 이후 자기 말을 뒤집고 있는 다음 글에서도 여전히) 장자연 리스트를 공개해야 하는 이유 혹은 근거로 이전에 언론이 행한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중앙일보의 강호순 얼굴 공개와 문화일보의 신정아 누드사진 공개가 그것입니다. 이같은 사례에 비춰보건대 형평성의 차원에서라도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이들의 명단은 "까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건 넌센스입니다. 진중권은 두 가지 사례 모두에서 짐짓 딴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호순의 경우는 경찰의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습니다. 강호순 자신의 자백에 물증까지 나온 상황이었습니다. 정보지 수준에서 나온 애기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신정아 누드 사진의 경우는 더 합니다. 이건 해당 언론사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중징계까지 받은 사안입니다.

공개냐 아니냐의 표현만 같을 뿐 그 본질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단순하게 견주어 비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진중권은 이같은 사실을 오도하여 마치 이것들이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인 양으로 설레발을 치고 있습니다. 무책임한 입놀림이고 전형적인 선동질입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진중권씨에겐 사안이 가진 속성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는 걸 여지없이 보여줬던것 같더군요.
강호순 사건과 연예인 자살 사건과 관련된 명단 공개 문제는 서로 인권이라는 영역을 공유하고 있으나 전자의 경우 근본적으로 가해자의 자백과 물증을 통해 혐의 입증을 위한 근거가 마련된 사건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후자의 경우 피해자가 남겼다고 하는 문건만을 토대로 이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가해자가 누군지를 두고 밝혀야 할 사건이라는 성격을 서로 구분 못하고 있는것 같더군요."

<주> jawoon님의 댓글입니다. 제가 표현이 서툴러서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얘기를 댓글로 잘 정리해주셨기에 본문으로 옮겨 적습니다. 고맙습니다. / http://blog.mintong.org/502#comment4734 (새 창으로 열기)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둘러본 블로고스피어가 온통 진중권이 쌔운 저 논리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강호순이 얼굴 공개한 니들이 왜 장자연 리스트는 공개하지 않느냐는 것인데요, 한마디로 장자연 리스트를 속 션히 공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걸 주장하기 위해 떼다붙이고 있는 논리가 바로 저 진중권이 반어법으로 쌔운 논리인 거구요. 웃기잡는 일입니다.

더 웃기잡는 일은 그러나 따로 있습니다. 지금 블로고스피어에서 이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해선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반대를 했던 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정도면 이건 웃기잡는 차원을 넘어서 있습니다. 거의 도착에 가까운 정신 이상 증세 단계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쯤 되면 호기심 천국이 정신병동화하는 건 시간 문제라고 봐야 합니다. 정신병자들이 아니고서야 자신이 종주먹 들이대며 그토록 소리높여 주장했던 거를 불과 수 십일 만에 손바닥 뒤집듯이 그렇게 쉬이 뒤집어 정 반대의 주장을 할 수는 없는 일이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리 호기심이 동하고 적을 까부수고 싶어 안달이더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우리 일부 열혈 블로거님들은 우선 자신의 정신 상태부터 먼저 좀 챙길 일이겠습니다. 세상에 보기 역겨운 것 가운데 하나가 먹음직만 하다싶으면 그것이 똥인지 된장인지도 가리지않고 천방지축으로 입에 처넣는 일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서프라이즈

서프라이즈의 개념 글




<덧붙이는글> 장자연 리스트, 이거 까지 말라고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려도 깔 때 되면 다 깝니다. 그게 대한민국 언론입니다. 지금 그걸 까지 못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실체가 불분명한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독설에 자신있다고 말하는 친구마저 함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혈기 방정한 대한의 일부 블로거 여러분, 왼갖 헷소리 늘어놓으며 다른 이 개념 챙기려는 오지랖 넓은 뻘짓 접고 잠깐이라도 좋으니 제발 님들 정신줄부터 먼저 좀 챙기도록 하세요.
 
2009/03/21 07:00 2009/03/21 07:00
태터앤미디어(TNM, 이하 티엔엠) 사태가 이제 일단락되었나요? 관련 글을 찾아보기가 좀 힘들어서요. 태터앤미디어의 광고 리뷰 사태 이후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관련 글을 트랙백으로 엮어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무튼, 다음은 당시 제가 풀어보려던 문제는 대강 아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서로 다르게 다뤄져야 할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가 한꺼번에 논의되면서 정작 문제의 본질적 측면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었는데요. 그래서 문제를 몇 개의 클래스로 함 나눠서 정리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전혀 접근조차 하지 못 하고 말았지만요. 

태터앤미디어
첫번째 클래스
1. 블로그에 광고하는 행위, 어떻게 볼 것인가?
2. 블로거의 리뷰 행위, 어떻게 볼 것인가?
3. 블로거의 대가성 리뷰 행위, 어떻게 볼 것인가?


두번째 클래스
4. 블로그의 네트워크화, 어떻게 볼 것인가?
5. 파워블로거 그룹의 집단적 리뷰, 어떻게 볼 것인가?
6. 파워블로거 네트워크를 통한 미디어, 어떻게 볼 것인가?   


세번째 클래스
7. 파워블로거 그룹을 통한 리뷰 행위, 새로운 비지니스 모델의 가능성은?
 - 겨우 리뷰?
8. 신뢰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는?
 - 자금 동원으로 얼마든지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
9. 파워블로거의 자본 종속화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은?


네번째 클래스
10. 블로거 개인의 광고 행위와 집단적 광고 행위가 갖는 차이는?
11. 집단적으로 특정 상표에 대한 블로깅이 블로고스피어 일반에 미치는 영향은?


태터앤미디어와 장자의 조삼모사

태터앤미디어, 그리고 장자의 조삼모사


참고


<팁> 브라우저를 IE8로 업그레이드 했더니 텍스트큐브의 관리자 화면에서 하위 메뉴가 정상적으로 출력되질 않는군요. 이때는 저처럼 헤매지 마시고 IE7 호환성 모드를 이용해보세요.
- http://archvista.net/entry/internet-ex ··· EA%B8%B0
2009/03/20 23:55 2009/03/20 23:55
혹시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를 아시나요?


미네르바

미네르바


미네르바, 2009년 새해 벽두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한 인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를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의 이름에는 한결같이 '인터넷 최고의 논객', '경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2009년 초, 미네르바는 국민의 우상이었고,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의 운명이 늘 그러하듯이, 미네르바라는 우상 또한 그 숭배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상위그룹 가운데서도 0.001%에 속하는 최고위 계층, 최고 학부와 굴지의 회사를 두루 거친 최고 경영자 출신, 50대 유학파 등의 화려한 이력이 고졸 학력의 30대 백수 청년으로 드러나는 순간, 우상은 그 역할을 다 합니다. 일부 기자와 블로거들은 경악하고 그 중 일부는 이성을 잃고 광분합니다. 설 익은 음모론까지 들고 나와 설레발을 칩니다.


미네르바

미네르바, 신종 영웅놀이 (c) 초딩카툰 그림i아이들


그러나 이 마저도 이내 시들해져 갑니다. 사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그들의 음모론도 그 색깔을 달리하여 나타납니다. 마치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의 유력지 모니퇴르가 보여준 행태를 보는 듯 합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은 유배지 엘바섬을 탈출하여 20일만에 파리로 돌아옵니다.

다음은 당시 이를 보도하면서 모니퇴르지가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기사의 제목들입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가까워질수록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기사의 타이틀이 인상적입니다.

'악마, 유배지에서 탈출'
'코르시카 출신의 늑대, 칸에 상륙'
'맹호, 가프에 나타나다'
'폭군, 리용에 진입'
'보나파르트 북으로 진격 중'
'나폴레옹 내일 파리로'
'황제, 퐁텐블로궁에'
'만세! 황제폐하 어젯밤 취일리 궁전에 도착'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것은 모니퇴르가 아닙니다. 정작 부끄러운 것은 그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익히 알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자와 블로거들이 똑같은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나아가 이같은 짓을 하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희번득한 논리로 합리화하기에 바쁩니다. 19세기의 모니퇴르보다 못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진영주의 논리고, 최소한의 염치조차를 찾기 힘든 대한민국 언론과 블로고스피어의 현실입니다.

‘신동아 미네르바 오보’ 진상조사 보고서 (요약)


미네르바
동아일보와 신동아의 사과문

동아일보와 신동아의 사과문


이번 사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동아일보에서 어제 '신동아 미네르바 오보'에 대해 거듭 사과를 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동안 자체적으로 벌여온 '신동아 미네르바 오보’ 진상조사에 대한 보고서를 공개하면서입니다. ‘신동아 미네르바 오보’ 진상조사 보고서 (요약)

하지만, 음모론까지 들먹이며 거의 광분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준 일부 언론과 블로고스피어는 여전히 조용하기만 합니다. 자신들의 행태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전한 말 바꾸기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일부는 아예 입을 닫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연초의 저 열광이 마치 거짓말이나 되는 듯이 조용합니다.


미네르바

미네르바, 그는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덧붙이는글> 들을 음악이 없다, 사줄 음악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오늘 여기를 가보시라. 들을 음악이 있다, 사줄 음악이 있다!
 
2009/03/19 21:32 2009/03/19 21:32
전문가는 비전문가인 일반인에게 전문 영역을 일반적인 말로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빈치 코드는, 다빈치 코드를 쓴 작자는 확실히 해당 분야의 전문가적인 식견을 갖춘 사람이라고 봐도 좋겠다. 이에 비한다면 이문열의 경우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자주 이문열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의 아들'에 대해 장편으로 개작하기 이전의 중편이 훨씬 더 좋다고 이야기해왔다. 바로 위의 전문가론에 의해서다. 개작하기 이전의 중편 사람의 아들은 읽는 데 큰 부담이 없다. 기독교사 일반에 대한 이해가 없이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장편 사람의 아들 경우는 우선 읽는 일이 지겹다.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를 읽었다. [footnote]호모 엑세쿠탄스 - 이문열의 신작 소설을 읽고 있다. 3권으로 된 소설 가운데 이제 막 1권 읽기를 마쳤다. 지난 2002년의 여러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우선 '성민'이라는 주인공 이름이 낯익다. 2003년까지 내가 쓰던 닉이 '백성민'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은 성이 다른 '신성민'이고. 소설에 등장하는 대화와 장소들 또한 낯익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할 얘기가 꽤 있지싶다. 그러나 소설 읽기는 이쯤에서 마쳐야 한다.
도대체 사는 게 팍팍하다. 정리해야 할 일이 있다. 눈까풀은 밀려 내려오고. 일단은 커피부터 쏟아부어야겠다. 버텨야 할테니. -_   2007/02/05 11:17 [/footnote]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작가의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이 정도였는가 하는 점에서 그랬고, 무엇보다 현학적인 소설 내용을 읽기가 지겨워서였다. 다빈치코드는 단 한 챕터도 쉽게 건너뛰지 못할 정도의 응집력이 있다. 그러나 호모 엑세쿠탄스는 몇 페이지씩 건성으로 읽고 넘어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굳이 애써 읽지 않아도 좋은 내용들이 산더미다. 이건 작가의 현학적 취미를 충족시키는 것 외에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독자는 역사서를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설 읽기를 기대하고 호모 엑세쿠탄스를 택했을 터다. 호모 엑세쿠탄스는 독자의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소설이다. 경향성에 이야기가 잡아먹혀버린 꼴이다. 이에 대해 이문열은 황석영 등을 들며, 참여 아닌 작가가 있느냐고 투정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황석영 등을 비판해온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이고 보면 이 또한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덧붙이는글> 이 글은 아래 댓글 놀이에서 나온 호모 엑세쿠탄스에 대한 얘기를 보충하는 의미에서 대중없이 적는 글입니다.  http://blog.mintong.org/498#comment4664 (새 창으로 열기)
 
2009/03/19 02:24 2009/03/19 02:24
1. 이문열은 권력을 스스로 구축한다. 진중권은 권력을 기생질 아우라로 따낸다.
2. 이문열은 창조하지만, 진중권은 기생한다.

3. 이문열에게 이데올로기는 현실이나, 진중권에게 이데올로기는 관념이다.
4. 이문열이 최후까지 믿는 건 자기 자신이지만, 진중권이 마지막에 도망가는 곳은 '우리 엄마'다.
 
5. 이문열의 책은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 진중권의 책은 아무 데서나 읽어도 된다.
6. 이문열의 책은 끝까지 읽힌다. 진중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 사람은 없다. [footnote]단, 디씨 폐인들은 열외[/footnote]

7. 이문열은 보수지만, 진중권은 진보를 '지향'한다.
8. 이문열이 망가지는 지점은 현학이고, 진중권이 망가지는 지점은 재치 배설이다.

9. 맹언 시리즈
 - 이문열, 말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진다.  진중권, 니나 잘 하세요.
 - 이문열, 호모엑세쿠탄스의 황제를 위하여. 진중권, 짐바브웨가 왜 2MB OUT 을 외치는지 아세요?


이문열

이문열, 말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진다

진중권

진중권, 니나 잘 하세요~






<덧> 위에 언급한 것 말고 더 할 게 있다면 알려주세요. 위의 내용은 계속 업뎃 됩니다.

2009/03/18 17:45 2009/03/18 17:45
광우병은 잠복기간이 20년인가 그렇다고 하니 확실히 광우병은 아닐 터다. 그렇다면 이 친구는 자기 말마따나 광견병이 맞지싶다. 언젠가 경찰한테 뚜드러맞았다더니 그때 걸린 모양이다. 몹쓸맞게도 주디에 걸레를 물고 발광하는 병이라니. 쯧~


진중권, 주디에 광견병 걸렸다

진중권, 주디에 광견병 걸렸다

 

경찰, 광견병 걸렸다



2009/03/18 15:13 2009/03/18 15:13

진중권, 한국은 소통이 힘들어

진중권, 한국은 소통이 넘 힘들어

천하의 진중권이 자신의 발언을 기사화한 기자들을 향해 '황당'하다고 설레발이네요.

자살한 탤런트의 접대 건에 명단 오른 넘들 명단 까자고, 언론의 행태를 조롱할 양으로 한 마디 했더니 이 몽매한 기자들이 그 반어법조차를 이해하지 못 한 채 이상한 기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하는 말이 왈,

"한국에서는 소통이 참 힘든 것" 같답니다. ^^

앞서 저 기사 보고 거의 난생 처음으로 진보신당 게시판이라는 데를 찾아가봤습니다

사이트 주소부터가 영낙없는 사이비 짝퉁입니다. 도대체 뉴진보(newjinbo)가 뭡니까, 뉴진보가.. 에효~

웃기잡는 주소까지 치고 진보신당 사이트를 찾은 이유는 오늘 포털과 블로고스피어를 화려하게 장식한 '진중권이 명단 까라 했다'는 기사를 봐서였습니다. 비록 진중권이 입이 걸레인 건 맞지만, 그래도 정신까지 걸레인 건 아닌 친구인데, 이 친구가 이게 지금 뭔 헛소리댜?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거 '조크'였다고 하는군요. 반어법씩이나를 담고 있는. -_-

무튼, 그렇다면 그걸로 열심히 썰을 풀어댄 기자님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진중권, '명단 까라'는 절통한 반어법이었다!" 뭐 이런 후속 기사가 나가는 건가요? 미친. [footnote]아고라나 블로고스피어의 일부 아메바과 허재비들은 뭐 열외로 쳐드리겠습니다. -_- [/footnote]


다음은 이 친구가 하고 있는 야그입니다. 직접 함 보시지요.
 

more..


 
2009/03/17 21:05 2009/03/17 21:05
이문열 책 풍장 風葬

'풍장'을 위해 허공에 매달린 이문열의 책들


지난 2002년 3월 1일, 충북 옥천에서는 이색 행사 하나가 열렸습니다. 이름하여 "삼일절맞이 이문열 '금시조' 동상 제막식". 당시 요원의 불길과도 같이 번지던 안티조선 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날 행사의 포인트는 '이문열 책의 풍장 행사'였습니다.

2001년, 이문열의 사숙 부악문원 앞에서 행해진 '이문열 책 장례식 행사'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이문열 돕기 운동'으로, 옥천신문사 편집주간 오한흥씨의 자택 마당에서 열렸습니다.

오늘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자료를 찾다보니 저 사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당시 행사에 참석한 친구가 일반 카메라로 찍어온 걸 스캔으로 뜬 거라서 사진의 질이 아니 좋습니다. 원판 필름이 있으니 다음에 올릴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깨끗하게 출력해서 올리겠습니다.

즐감하시길.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철사로 꿰인 이문열의 책들




이문열 책 풍장 風葬

'풍장'을 위해 매달린 이문열의 책들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more..



more..





 
  
풍장[風葬]
1. 시체를 태우고 남은 뼈를 추려 가루로 만든 것을 바람에 날리는 장사.
2. 시체를 한데에 버려두어 비바람에 자연히 없어지게 하는 장사법. 
 
2009/03/17 18:40 2009/03/17 18:40
젊은 날의, 저 불꽃같이 타오르던 사랑의 홍역을 경험한 모든 이들을 위한

이 소설은 '시대의 후미진 하늘 한 모퉁이를 우리가 알 수 없는 찬연한 빛으로 불타며 져간 한 쌍의 젊음을, 그들의 쓸쓸한 사랑과 그 현란한 추락을,' 그 이야기를 바로 그들 중의 한 사람인 남주인공의 입을 통해 몰아치듯이 전하고 있다.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그라쯔.

알프스가 끝나는, 전형적인 북유럽의 수려한 풍광이 자랑인 그 지방 교외의 한 민박집에서 어떤 젊은이가 사랑하는 여자의 가슴에 총알을 박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여자의 가슴에 총알을 박은 바로 그 젊은이의 고해와도 같은 이야기로 그 '서장(序章)'을 시작한다.

때는 1969년.

막걸리와 생맥주, 젓가락 장단과 통기타 반주, 목 자른 군화와 청바지, 다방과 고고홀, 가락국수와 라면, 국산품 애용과 수출입국, 개인윤리와 집단윤리, 고전적인 성도덕과 서구적인 성개방, 또는 성적인 편견과 편의주의, 이런 상반된 모든 것들이 어떤 경계선에 위치해 있던 시기였다.

그 해 5월도 거의 다 갈 무렵의 어느 날, 마로니에 잎새가 드리워진 교정의 벤치에서 그들은 만났다.

임형빈과 서윤주.

그들의 만남은 실로 불꽃같은 것이었으나 그것은 또한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이기도 했다. 임형빈은 법대 2학년의 전형적인 시골 수재였고 문리대 신입생인 서윤주는 개방적이고 활달한 도시 여자였다.

'참다운 사랑은 일생에 한번밖에 앓지 않는 홍역과 같은 것'

그러나 환상과 열정으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종내는 시들고 말 '그 해의 화사했던 장미' 한 다발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태양을 향해 하늘로 솟아오르다가 추락하고 마는 젊은 이카루스와도 같이 비극적인 종말을 향하여 앞으로 내달았으니, 그 사랑의 열정은 이미 얼레에서 풀려난 운명의 실이 되어 그들을 질기게 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첫 구멍부터 이미 잘못 끼워진 단추 같은 사랑이었다'.

그들은 그런 언밸런스한 모습으로 "불꽃 속에서의 한 계절"을 살아간다. 잘못 끼워진 단추는 처음부터 다시 끼우면 되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저 운명의 질긴 실을 끊을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광기 어린 열정이 낳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이런 사정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을 휘감고 있는 저 운명에의 불안을 서윤주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모르겠어. 귀한 것을 힘들여 찾아낸 기쁨보다는 무언가 시작해서는 안될 일을 시작한 듯한 불안 뿐이야."


수락산으로 산행을 다녀오던 길에 비뚤어져 혼자 뒤에 처진 임형빈을 만나 달래면서 서윤주가 하고 있는 말이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나는 아까 네가 버스에 오르지 않고 갑자기 돌아서서 그 희고 꾸불꾸불한 시골길로 뛰어갈 때 이런 생각을 불쑥 했었지. '저 애는 참으로 어렵게 살 애로구나. 왜 넓은 길과 편한 버스와 돌아가야 할 도시를 그만두고 좁은 시골길로 낯선 곳을 향해 뛰어 갈까' 그러나 버스가 산굽이를 돌고 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뭐랄까, 갑자기 (....) 너를 혼자 보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같이 길을 잃고 헤매게 되더라도 네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후회 비슷한 감정이 생긴 거야 (....)"
"그런데 불안은 왜 ?"
"너를 만나고 나니, 그리고 다시 큰길을 찾아 돌아 나오는 걸 보니, 갑자기 내가 쓸데 없는 걱정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거야. 애초에 네가 그 길로 뛰어간 것도 나 때문이었고, 또 내가 되돌아오지 않아도 너는 훌륭히 네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앤데, 하는. 거기서 갑자기 앞으로도 언제나 네가 어긋진 길을 가게 만드는 것은 나일 것 같고, 나는 또 그런 너를 제자리로 돌아가게 한다는 게 오히려 함께 길을 잃어 두 사람 모두 어둡고 험한 곳을 헤매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어. 아니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야...."


이같은 예감은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는 충분한 위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서로 판이하게 다르면서 넉넉하지 못한 두 사람의 열악한 환경과 두 사람이 모두 갖고 있는 격렬하고 성급한 성격, 그리고 한 쪽은 개방적이고 다른 한 쪽은 독선적인 생각 등이 그것이었다. 그 운명의 끝을 서윤주는 이렇게 예감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잘못되는 날에는 둘 다 심각한 상처를 입을 거야. 어쩌면 남은 일생 내내 치유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거나 끝내 그것 때문에 죽고 말...."


그리고 서윤주의 이런 예감은 훗날 그대로 적중한다.
임형빈이 전하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듯 위태위태하게 계속된다.

어설프게 전개되던 그들의 사랑은 어느 날 서윤주가, '성합'을 원하는 임형빈에게, 자신은 동정녀가 아님을 밝히는 것으로 한 전기를 맞게 된다. 올곧고 순진하기만 한 시골수재 임형빈에게 있어 그 고백은 곧 파국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하여 그들의 사랑은 거기에서 일단 끝이 나는 듯 보이고, 그렇게 그들의 불꽃 속에서의 한 계절도 끝이 난다.

이제 서윤주는 (미국으로) 떠나고 임형빈은 귀향한다. 1970년 겨울의 일이다.
1971년. 맹목적인 열정과 집착에서 벗어난 스물 한 살의 임형빈에게는 이제 허탈감과 무기력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형빈의 몸부림이 소설의 행간을 메운다.

아픈 기억을 어느 정도 극복해가고 있던 어느 날, 다시 서윤주의 소식이 그에게로 전해진다. 서윤주는 꿈의 나라 미국이 아닌 '미국 달이 뜨는' 서울의 이태원을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만나지만 거기에는 짐승과도 같은 다툼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이문열 책장례식

이문열 책장례식 풍장


그 불협화음의 시간이 지나간 후, 그들은 이른바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그리고 제법 '사랑의 잔치와도 같은' 안정된 나날을 보낸다. 허나 그 안정이란 온전한 화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또 한번의 파국을 맞게 된다.

파국을 부른 것은 임형빈의 말을 빌리자면 '두 사람의 정신 속에 깃든 악마였다'.

임형빈의 '소년적인 결벽증과 자존심'은 서윤주의 과거에 대한 번민을 낳게 하고, 서윤주의 개방적인 의식에는 그 생활이란 도무지 답답한 것으로만 여겨진다. 그런 감정은 서로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앙금으로 남아, 미국에 있는 언니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오는 날, 급기야는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서로가 슬퍼하고 위로해야 할 그 죽음 앞에서 그들은 다시 한 바탕의 다툼을 벌이고 임형빈은 집을 나간다. 때마침 상경한 아버지.

임형빈이 자신의 성마름을 탓하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긴 이별의 시작'이었다. 서윤주는 이제 참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그 방황의 끝에서 '아직 딱지도 앉지 않은 내상을 안은 채'로 임형빈은 입대를 한다.

육군하사 '임하사'.

어느 날, '입대하고 여덟 달인가 아홉 달만에 강원도 어떤 전방사단의 말단소대에서 신출내기 단기하사로 고참 병장들의 텃세에 시달리고' 있던 그에게, '아홉 달 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서윤주의 편지가 날아든다.

형빈

이게 정이랄까. 여러 번을 망설이다 이 글을 쓴다.
나는 그렇게 냉철하게 삶을 재단하려 했건만 아니, 내 앞에 펼쳐진 세월을 사는 게 아니라 채워 가려고 애썼건만,
아무래도 그런 이성의 사람은 못되는 모양이지.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 ---- 새삼스럽지만 나를 용서해 줘.
그리고 잊어 줘.
우리가 그렇게 억지스레 끼워 맞추려 애썼던 것은 첫 구멍부터가 잘못 끼워진 단추 같은 사랑이었어. 그 다음부터 아무리 잘해 보려 해도 바로잡아질 수 없는 그런.
그저 그만큼이라도 둘이서 함께 노력해 봤다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삼기 바란다.

그 집을 나오고 두 번인가 어둔 골목길에서 너를 훔쳐본 적이 있지.
우리를 기다리는 운명이 어떤 것이든 비척거리며 걷는 너를 보고 달려나가 부축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지....(후략)


                                                  1971년  9월   윤주
 


이제 그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 뒤 임형빈은 제대를 하고 어떤 대기업의 계열회사에 입사를 하고 결혼을 한다. 그리고 1982년 5월 회사의 미국지사 설립을 위한 선발대로 한국을 떠난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그는 서윤주를 찾기 위해 애써보지만 그러나 그것은 번번이 무위로 끝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산타모니카 해안으로 차를 몰아나간 임형빈은 거기에서 운명처럼 또 다시 서윤주를 만난다.

잔치와도 같은 그들의 사랑은 다시 시작되고....,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불협화음으로 일그러진다. 이제 그들의 사랑에 종말이 다가온다. 그들은 '우리들의 날개', 추락을 위한 그 날개를 준비한다. 임형빈은 리벌버 38구경 권총을 하나 산다.
 
"아니, 너는 무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죽는다는 게 왜 그리 끔찍 하기만한 끝장이야? 기억해? 옛적에 함께 읽었던 잉게보르크만의 시 ----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추락은 우리가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죽음을 끝 모를 추락이라고 보더라도 ---- 그 때문에 우리의 날개는 더 크고 화려해질 수도 있지. 죽음이 휴식이거나 완벽한 고통의 면제라면 그건 더 바랄 나위가 없고...."


임형빈이 그 권총을 서윤주의 앞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그 권총과 특유의 뻗대기로 이후 두어 번의 진정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런 시위도 이제는 무용한 데까지에 이르고 만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의 그라쯔,

그 풍광이 수려한 시골 마을의 한 민박집에서 그들의 현란하고 광기 어린 사랑은 그 종말을 맞게 된다. 서윤주가 경멸의 말을 쏘아붙이는 순간, 임형빈은 그미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훅, 하는 거센 숨소리 같은 것뿐, 그녀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쓰러졌습니다. 그녀가 두 손으로 싸안은 가슴에서 피가 번져 나온 것을 보고서야 나는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황급히 그녀를 쓸어안았을 때 흘깃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눈길이었습니다. 그게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천 번이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그렇게도 만족과 평온에 찬 사랑의 눈길이 있을까요? 거기다가 또 그녀는 정신을 잃기 직전, 안간힘을 다해 내 귀에 속삭였습니다.

"그래.... 됐어.... 실은 나도 하루하루 꺼져가는 촛불 같은 우리 삶을.... 망연히 보고 있기가 괴로웠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바보 같이 너는 왜.... 일찌감치 내게서 달아나지 않았어? 그렇게도 여러 번.... 기회를 주었더랬는데.... 이렇게 함께 추락하는 것이 안쓰러워...."


그들의 불꽃같은 만남은, 그들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난다.
임형빈의 이야기는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설도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more..





<덧붙이는글> 중간에 서비스로 넣어둔 사진은 지난 2002년 3월 1일 충북 옥천에서 있은 이문열 책 장례식 '풍장' 행사 사진이다. 우리는 지금 다름이 허용되지 않는 야만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2009/03/17 05:25 2009/03/17 05:25
영화 <휴먼스테인>을 봤다. 오늘 SBS 영화특급에서 방영한 영화다. 포스터에 적힌 그대로 '초호화 캐스팅'이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수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퓰리처상에 빛나는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란다. 이 정도면 대박을 쳤어야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던 모양이다.


휴먼스테인

휴먼스테인


영화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이 그거였다. 실패한 게 당연했겠다. -_-

원래 영화 보고나서 잼없으면 잘 아니 끄적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몇 글자 적는 것은 나중에 책이라도 함 사봤으면 해서다. 다시 말해, 영화가 웬지 모르게 99% 부족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영화는 상당히 많은 것을 건들고 있다. 단순히 사람은 누구나 감추고싶은 비밀 혹은 오점을 가지고 있다는 따위가 아니라, 인간이기에(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거다. 불완전하기에 인간인 거고) 겪는 여러 갈등과 번민들을 터치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드러내보여주지 못 했다는 인상이다. 기껏 흑인이면서 백인 행세를 해야 하는 데서 오는 번민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 하지만, 더 많은 것을 건들고 있다. 예컨대 니콜 키드만이 연기한 퍼니아의 경우만 해도 그녀가 지닌 매력이 무엇인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뿐더러 그녀가 왜 그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도 충분히 설득적이지 못 하다. 또한 끝까지 그의 주변을 맴도는 전 남편의 행동에 대해서도 온전한 설명을 내놓지 못 한다.

내가 보기에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하나로 담아내기에는 어려운 주제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원작을 읽었으면 한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영화는 차라리 이리저리 얽힌 여러 소재 가운데 몇 가지에만 집중했다면 더 나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싶다.

에니웨이, 영화를 보면서 예쁜 여자의 삶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쁜 여자들은 왜 자주 술집에서만 보이는지에 대한 생각이다(이 얘기 더 하면 안 될 것같기에 여기까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를 생각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인 터라 내 멋대로 각색되어 있기 십상이긴 하지만, 무튼 그 소설에 나오는 필립과 밀드레바가 자꾸 떠올랐다. [footnote]근데, 왜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떠오르지 않았을까? '추락..'을 읽으면서는 '인간의 굴레'가 떠올랐는데 말이다. 이 때문이었을까? 이문열이 '추락..'을 자신의 작품에서 굳이 배제하고싶어 하는 이유가? 다시말해 인간일반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다는? [/footnote]




<덧붙이는글> 영화 보면서 불편했던 거 두 가지 - 더빙의 안습, 무자비한 삭제. 영화를 보면서 즐거웠던 거 - 그래도 니콜 키드먼은 넘 예뻤다. 영화 <디 아더스>의 그 니콜 키드먼이 살짝 비쳤다.
 
2009/03/16 03:34 2009/03/16 03:3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엊그제 이문구의 <유자소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 소설집에는 <유자소전> 말고도 9편의 소설이 더 실려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변사또의 약력>이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이 또한 내 사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터입니다. 언뜻 신난스러워 보이는 변사또의 삶이 이상할 정도로 가슴 아득한 훈훈함으로 닥아오는 것도 이 때문이겠구요.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단편입니다.

작가네 집 머슴이던 최서방의 고적한 삶을 그리고 있는 <명천유사>는 그러나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못합니다. 작가의 고향과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너무 잔잔한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담담한 작가의 시선이 오히려 일말의 거부감을 안겨주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동만필.1.2>에는 우리의 정치사에 대한 작가의 해학과 익살이 희화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자유당 말기에 민주당의 무슨 국장을 잠깐 지냈다는 사실로 문국장이라 불리는, 그렇게 불리는 것을 적잖이 흐뭇해 하는 문승관과 뚜렷한 이념도 없이 국회의원 출마를 꿈꾸고 있는 이만업의 정치꾼(기실 제대로의 정치꾼도 되지 못하는)적인 성향을 통해 작가는 얼룩진 우리 정치사의 이면과 거기에서 살아가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짙은 페이소스가 깔려 있습니다.

<강동만필.3>은 석촌 호수 부근에서 "더울 때 바깥 만큼이나 더웁고, 추울 때는 바깥 만큼이나 추운 이동식 포장마차"를 하며 살아가는 남씨와 "본색이 농투성이었으나 농사치가 저수지로 수몰되는 바람에" 예까지 흘러 온 서씨, 그리고 뚜렷한 직업없이 "입때껏 생무지로" 살면서 "아무데서나 두루춘풍으로 홍이야 홍이야 해 온 맨탕"인 나, 이 세 사람의 세상살이를 그들이 늘상으로 모이는 호수 주변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태와 놀이 문화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사뭇 시니컬합니다. 작가의 재담이야 이력이 있는 터고, 실제로 소설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재담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기왕지사 옮기는 재미 붙인 마당이니, 호수 주변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는 것 가운데서 두어 개를 골라 직접 한번 들어보기로 합니다.
 

듣보실 분만 클릭~




장곡리 고욤나무



<달빛에 길을 물어>는 현장 답사를 통한 야사의 연구가 목적인 야승회라는 재야 단체의 여행 -- 이름하여 '야승회민정기행'에 따라 나섰던 주인공 이명천이 그 중도에서 떨어져 나와 현대판 노예선이라 불리는 멍텅구리배의 섬, 이를테면 한국적인 수용소 군도 중의 하나인 살섬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언젠가 TV와 신문에서 그 멍텅구리배의 기사를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헌데 그 기사는 그다지 세인들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의 의견이 있었댔는데, 이에 대해 소설의 주인공은 '빈곤의 정서, 다른 말로 하면 빈자소인론' 쪽에다 심정적인 동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기사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것은 곧 "가난에 찌들었던 사람들이 결과론자로 정착하여, 일이 되고 돈이 되는 짓이라면 수단과 방법의 곡직을 묻지 않게 되었으며, 인신매매라는 극단적인 현상조차도 자연스럽게 묵과하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여기에서 보릿고개 세대의 어려웠던 삶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헌데 주인공의 저러한 관점을 살섬으로 팔려가는 다홍치마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한 독자의 억측에 불과한 것일까요.


연평도

연평도


어촌에 관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이 작품에는, 그러나 그것이 여행길을 그리고 있음으로 당연히 나그네의 감상이나 나그네의 여수(旅愁)가 빠질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는 여행에서 느끼는 주인공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움인.
 

겨울의 여행은 선(線)의 여행이었다. 겨울의 선은 생태적인 비문명성과 생략 처리된 간결미로 하여 한결 호소력이 있었다. 선은 곧 생(生)의 곡절이었고, 보이지 않는 한계의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겨울에 하는 여행은 선의 추적이 그 내용이었다.
차도 낡고 길도 낡았지만 시간은 낡을 시간이 없었다. 낡지 않은 시간 속의 것들은 낡은 것이 없었다. 차는 선상(線上)으로 내닫고, 땟국이 흐르는 세한도(歲寒圖)가 얼비치고 있었다. 굽이마다 폭이 이어지는 그림이었다. 낯익은 그림이었다.

"고기잡어 사는 놈은, 고래등 같던 허우대가 새우등이 돼도록 배를 부려두 바다는 종내 잡지 못허는 벱이닌께."
늙은이는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고래등이나 새우등이나 한 가닥 굽은 선이기는 매일반인걸유."
명천도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하늘에는 해가 낚싯대 두어 간 남짓하게 남아 있었고, 하늘가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은 저마다 한 가닥씩 선명한 능선을 그어 그 나름의 곡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얼라, 이 아저씨점 봐, 샥시가 슴으로 시집오는 것두 그래서덜 오는 중 아시는가베. 그게 아니유. 샥시덜두 다 선이 있어서 임자 만나 오는 거지, 그런 식으루다가 무식허게 제 발등 밟어가면서 오는 게 아니라구유."
선이 있어서라. 명천은 다홍 치마를 찾아보려고 사방을 더듬다가 문득 한 선을 발견하였다. 차창 너머로 불쑥 떠오른 물마루, 아득하게 그어진 수평선이었다.

바다 가운데서 바라보는 물마루는 해벽(海璧)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보이는 한 줄기의 선, 무한정의 한정이었다. 해는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어둠의 시작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그 한 줄기 부동의 선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어둠을 펴고 구름을 펴는 일이며, 바람을 보내고 물결을 보내는 일이 모두 물마루의 일이었다. 배가 노래를 부르며 놓아가기 시작했다.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저문 바다를 바라본다.
설익은 햇살이 따라오고
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 간다.
나는 무심한 바다에 누웠다.
어쩌면 꽃처럼 흘러가고
바다처럼 사라진다.
이승의 꽃이랴 싶다.


연평도

연평도


다홍 치맛자락이 다시 눈결에 띄었다. 어쩌면 그 다홍 치마도 바다에 흘러가는 이승의 꽃일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홍 치마가 정녕 여린 소녀풍(少女風)에도 부질없이 눈뜨는 파란(波爛)과 더불어서 바다에 흘러가는 꽃이라면, 어느덧 속절없이 좌초하여 표류를 마감하는 곳은 또 어디일까. 꽃은 바닷물에서도 자라는가. 꽃은 자라지 않는다. 다 자란 것이 꽃이니까.

석양은 나그네의 하늘인지도 몰랐다. 다홍 치맛자락은 낙조의 물이 두 벌 들어서 다홍빛이 단홍빛으로, 단홍빛은 선홍빛으로, 선홍빛은 다시 자홍빛으로 거듭 피어나고 있었다. 꽃은 역시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피는 것이었다.

날이 풀려서 그런지 바다 가운데에서도 바람이 차지 않았다. 바닷새가 멀리 나가면 날씨를 믿을만하다고 들었으나 바닷새가 보이지 않는데도 물결은 비단이었다. 해파리가 연안으로 몰리면 태풍이 오고, 달무리나 햇무리에 바람기가 있으면 비가 올 조짐이며, 뱃고동소리가 멀리서 똑똑히 들려도 날이 궂을 징조라고들 하였으나, 해파리도 없고, 먼 뱃고동소리도 없고, 바다는 다만 다홍빛도 같고 자홍빛도 같은 낙조만이 소리없이 짙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해가 들어가고 있네유."
"니열 아침에 나올라면 시방쯤 들어가야 헐테지유."
해가 들어간 뒤에도 물마루께는 여전히 붉덩물이 가시지 않고 있었으나, 바다는 바야흐로 동녘 하늘과 함께 잉걸이 사윈 잿빛으로 바뀌면서 숙연한 표정으로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홍 치맛자락도 적갈색으로 어두워가고 있었다.

배에 불이 들어왔다.
"살슴은 아직 멀었지유?"
"멀었지유."
"멍텅구리배는 남어있겠지유?"
"배야 남어있지유."
"약내 나는 사람은 없더라면서유?"
"벌써 달이 떴네유."
아낙이 달을 가리켰다. 달이 밝았다. 


그리고 기타 여러분



좀 장황하다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소설 얘기를 옮겨봤습니다. 우선은 이문구 하면 떠오르는 게 그의 입당이어서입니다. 가능하면 그의 이야기 하는 양을 좀 많이 들려주고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집의 주무대인 대천 지방과 나 사이에 있는 인연입니다.

저 남녘이 고향이었던 내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무작정 상경하여(여기서 '상경'이라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의 기착지는 서울역이 아니라 인천항이었으니까요) 첫 외지 생활을 한 곳이 바로 대천 지방이었습니다.

어느 월요일 등교길에 마음이 동하여, 입고 있던 교복과 가방에 든 교련복 한 벌로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대략 1년 반여를 지냈습니다. 만리포와 연포 사이에 있는 한 작은 포구에서 멸치 잡이 배와 거잇(게잡이)배와 삼치 잡이 배를 탔습니다. 때론 서산이나 대천 등지로 들어가서 농사일을 거들기도 했구요.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시절의 일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강산이 몇 번을 바뀐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곳에 대한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골길,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시골길,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more..

그래서입니다. 이문구의 <유자소전>을 읽고 나서 이래 주절이주절이 소설 얘기를 읊어대고 있는 까닭이요. 지금도 내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곳에 대한 정서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이 도무지 소설인지 내 지난 시절인지를 모를 정도인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천 지방에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대천의 해변가에다 땅을 좀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 남녘에서 하고 있던 조선소의 제 2공장을 세워볼 요량에서였는데, 그러나 그 계획은, 갑작스럽게 발표된 정부의 서해안 종합 개발 계획으로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용도가 변경된 그 자리에는 이제 공장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입게된 경제적 손실은 상당했습니다. 우리로선 그 땅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해서 받은 그 땅값이란 게 시쳇말로 똥값 만도 못한 것이어서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날강도를 당해도 유분수지, 참으로 절통할 노릇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일이 다 내가 우겨서 비롯된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대천 땅에 대해 갖게 되는 감정이 남다를 수밖에는요.

에니웨이, 정리합니다.

내가 처음 접한 이문구의 소설은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관촌수필>이었습니다. 군 입대를 수십여일 앞둔 시점이었는데, 다 읽지 못한 채 군엘 갔습니다.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관촌수필> 읽기를 그만 둔 것은 순전히 그 소설에 대한 모종의 거부감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생래적이라 할 수 있는 이 거부감은 그러니까 작가가 보여주는 '군자연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다른 글에서 전하고 있는 내 유년 시절 얘기와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 내 청소년 시절을 보면 아시겠듯이, 나는 생래적으로 '~체' 하는 거를 잘 견디지 못 합니다. 특히 그것이 상대의 대가리에 잘못 박힌 고정관념에서 나온 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당시 <관촌수필>을 읽으면서 그런 거를 강하게 느꼈다는 기억입니다. 확실히 관촌수필에서는 작가와 작중 인물들 사이에 거리감이 있었고 그게 영 밥맛이었고 그래서 끝내 그 거부감을 못 이긴 채 팽개쳐버렸더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유자소전>은 작가의 저런 비릿한 경향성을 벗어나 있습니다. 작가 자신이 중심에서 사라지고 작중 인물이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하긴 지금 관촌수필을 다시 본다면 또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저때야 내 의식 수준 또한 모 아니면 도 식의 덜 떨어진 막가파 수준이었으니요).

그나저나, 참 장황한 이야기인 셈인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까지 제대로 읽으신 분은 아마 없지 싶습니다. 나부터도 다른 이가 쓴 긴 글은, 게다가 지 경험담 늘어놓는 글들은 도무지 읽지 않는 터니까요. 무튼, 그런 의미에서 여기까지 읽으신 어떤 이가 있다면 그 이에겐 분명 신의 은총이 함께 할 거라는.





 <덧붙이는글> 없습니다! 더 하면 몰매 맞을 거 같으서.. ^^
   
2009/03/15 04:36 2009/03/15 04:36
오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 인터넷서점 YES24 '오늘의 책'으로 소개되고 있는 책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고 카피도 죽입니다. 
"당신이 차지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쥐고 당신을 조종할 것이다!"

그래서 목차를 함 훑어봤습니다.
 

1부 권력의 원천

Law 1 자신을 재창조하라: 자기 혁신
Law 2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라: 조력자와 먹잇감
Law 3 적의 평정심을 흐트러뜨려라: 감정의 맹점 공략
Law 4 이미지와 상징을 앞세워라: 권력의 아우라
Law 5 목숨을 걸고 평판을 지켜라: 대중의 지지


2부 권력 획득의 법칙

Law 6 무슨 수를 쓰든 관심을 끌어라: 루머와 신비화 전략
Law 7 덫을 놓고 적을 불러들여라: 주도권 장악
Law 8 말이 아닌 행동으로 승리를 쟁취하라: 논쟁의 부작용
Law 9 정직하고 아량 있는 태도를 보여라: 경계심 풀기
Law 10 자비나 의리가 아니라 이익에 호소하라: 협상의 기술
Law 11 돈의 노예가 되지 마라: 공짜 점심의 함정
Law 12 친구처럼 행동하고 스파이처럼 움직여라: 정보전
Law 13 상대보다 멍청하게 보여라: 의심 회피 전략
Law 14 힘을 집중하라: 집중과 분산
Law 15 신앙심을 이용해 추종자를 창출하라: 메시아 전략
Law 16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짜라: 전략적 수 읽기
Law 17 별다른 노력 없이 성과를 달성한 척하라: 능력 포장하기
Law 18 사람들의 환상을 이용하라: 대중의 기대심리
Law 19 왕 대접을 받으려면 왕처럼 행동하라: 왕관의 전략


3부 권력 유지의 법칙

Law 20 주인보다 더 빛나지 마라: 신중한 아부
Law 21 불행하고 불운한 자들을 피하라: 불행 바이러스 차단하기
Law 22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라: 네트워크 만들기
Law 23 적은 완전히 박살내라: 잠재적 위험 제거
Law 24 품격과 신비감을 높여라: 부재와 존재의 법칙
Law 25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쌓아라: 적정 교란
Law 26 자신만의 요새를 짓지 말라: 고립의 위험성
Law 27 어느 누구에게도 헌신하지 마라: 관계의 기술
Law 28 완벽한 궁정신하가 되라: 우회 조종술
Law 29 적당한 때를 기다려라: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
Law 30 본심은 감추고 남과 같이 행동하라: 동화 전략
Law 31 후광에 의존하지 마라: 정체성 쇄신
Law 32 중심인물을 공격하라: 추방과 고립
Law 33 너무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지 마라: 질투심 원천봉쇄
Law 34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라: 성공공식의 진화


4부 권력 행사의 법칙

Law 35 친구를 멀리하고 적을 이용하라: 라이벌 활용법
Law 36 의도를 드러내지 말라: 유인책과 연막술
Law 37 최소한의 말만 하라: 침묵의 효과
Law 38 일은 남에게 시키고 명예는 당신이 차지하라: 성과 가로채기
Law 39 싸워서 질 바에야 항복을 선택하라: 전략적 후퇴
Law 40 더러운 일은 직접 하지 말라: 앞잡이와 희생양
Law 41 대담하게 행동하라: 자신감의 힘
Law 42 당신이 돌린 카드로 게임하게 하라: 선택권 통제
Law 43 사람들의 약점을 공략하라: 심리적 무장해제
Law 44 가질 수 없는 것들은 경멸하라: 무시 전략
Law 45 한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말라: 급진적인 개혁의 부작용
Law 46 상대의 마음을 유혹하라: 은밀한 설득
Law 47 상대를 허상과 싸우게 하라: 거울 전략
Law 48 승리를 거두면 멈출 때를 알라:
승자의 저주


그리고 다 봤다는 느낌입니다.

도대체 저 주옥같는 저 말들 말고 이 책에서 더 봐야 할 내용이 있을까싶어서입니다. 혹시 이 책 읽으신 분 가운데 그런 대목 있으면 '책을 사보시오~' 권해주시길 바랍니다. 함 사보겠습니다.

 
48가지 권력의 법칙

48가지 권력의 법칙





<덧붙이는글> 아무리 의무방어전이라지만,
그래도 너무 날로 먹는 글인 것같아서 법칙 가운데 밑줄 몇 개 그어봅니다. ^^
 
2009/03/14 19:03 2009/03/14 19:03

이외수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저 평화하게 하느적거리던 군대시절이었다. <꿈꾸는 식물>이라는 소설이었다. 'xxx' 정성들여  읽고나서 내뱉은 소감이 그것이었다. 하나 더 봤다. <칼>이든가 하는 제목을 가진 소설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이후 나는 그가 쓴 책이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여담이지만 그때 함께 근무하던 7명의 군발이 중에는 이외수와 절친한 육군 상병 하나가 있었다. 춘천 교대 후배인 그는 당시 내 직속고참이었다(그에게 야구 방망이로 몇 대 맞은 기억이 새롭다. 게기다가 잘못 맞은 탓에 - 사실 나는 내가 잘못 했을 때는 찍소리 안 하고 잘 맞아준다. 그 빈도가 넘 잦아서 탈이긴 했지만 -  제대를 하고서도 한참 동안 힘들었다. 날궂이를 했다는 뜻이다). 별명은 토미(말괄량이 삐삐에 나오는)였고,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칭구였다. [footnote]그도 곧 소설가가 되었는데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그는 이미 시인이기도 했다 - 재미는 없는(죄송.. ?) 그의 소설을 그래도 나는 꼬박꼬박 챙겨 읽는 편이다(이 글 쓰면서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전문 분야에서는 많이 유명한 분이신 듯하다. 필명으로만 활동한 탓에 몰랐다. -_-). [/footnote]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외수의 벽오금학도

이외수의 <벽오금학도>

어쩌다 들르는 서점에서 <벽오금학도>에 눈길이 미치면, 그 겉표지를 보게되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나의 턱없던 도전과 좌절의 기억이다.

<벽오금학도>를 처음 보게 된 것은, 그래도 시작한 일인데 한 권의 책이라도 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함께 일하던 이들의 얼굴이 있어, 그때는 이미 의욕만으로 시작했던 출판사 일(인문학총서기획)이 더이상 꾸려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뚝딱하게 책 한 권을 만들어 그 첫 배본을 나갔던 교보문고 앞에서였다.

거기에선 <벽오금학도>의 출간을 알리는 전단이 꽃가루처럼 뿌려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벽오금학도'(그림)를 지겹도록 보게되었고, 그 얼마 후에 우리는 문을 닫았다.  소설 <벽오금학도>는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러고도 18개월여가 지난 어젯밤, <벽오금학도>를 읽었다. [footnote]이 글은 1994년에 쓰인 글입니다.[/footnote]

어느날 친구와의 약속을 위해 전철을 기다리거나 우연히 들른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중에 문득, '선생님, 혹시 도道에 관심 있으십니까'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의 황당함이란 참 당혹스럽다 할 수 있는데, <벽오금학도>를 읽으면서 가진 느낌이 바로 그런 황당함이었다.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소설은 대체 어떤 부류에 속하는 소설인가. 진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구도소설인가, 아니면  어른을 위한 동화인가, 아니면 사회의 위악적인 요소들을 고발하고 질타하는 세태소설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대중을 깨우치기 위한 계몽소설인가.

구도소설이라기엔 너무 안이하다.
이 소설에는 구도소설에서 요구되는(?) 어떤 치열함도 없다.

동화라기엔 너무 되바라져 있다.
동화의 한 미덕이랄 수 있는 해맑은 순수함이나 희망을 이 소설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요소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도 거기에 해맑은 미소로 답하기가 쉽지않다.

왜일까.
 

- 아이가 오줌이 마려워서 눈을 뜨게 된 것은 새벽녘이었다.
- 불현듯 바깥에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전신을 휩싸고 있었다.  
- 싸늘한 냉기 한 모금이 폐부 깊숙이 스며 들어와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감각들을 소스라치게 만들고 있었다.
- 어둠이 어슴푸레하게 걷히고 있었다.
- 시간이 침잠하고 있었다. 침잠하는 시간 속으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소설의 어느 곳에서고 만나게 되는, 유치하다는 것 말고는 다른 표현을 찾기 힘든, 이런 류의 미숙한 언어구사가 어쩌면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을 동화로 받아들이기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footnote]이 글의 어디가 뭐이 어쨌다고 난리냐? 이 글이 통신에 올려졌을 때, 한 두 사람에게서 이런 질책성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위의 글은 이 글의 주체인 어린아이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휘들로 다.만. 치.장.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 줄에 나오는 오줌이 마렵다는 표현을 빼고는, 불현듯, 예감이 전신을 휩싸고, 냉기, 폐부, 감각들을 소스라치게, 침잠하는 시간 등.. 도대체 어느 것 하나 아이의 시선이라고는 볼 수 없는, 다만 작가의 '덜 떨어진' 의식을 보여주는 그런 표현들 뿐입니다.
여기저기서 감각적인 표현들을 줏어다 떼어붙인 여고생의 시구같은 이런 글들이란, 말 그대로 여고생의 시구에서라면 몰라도 소위 작가라는 타이틀을 내건 사람의 글에서 취할 바는 아닐 터입니다.[/footnote]

세태소설이라기엔 그 예봉이 너무 무디고 느리다.
이 소설에서 제기하는 현실의 문제들은 우리 모두가 이미 공감하여 그 해결책을 찾고 있는 문제들이다. 진부한  얘기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방식으로 재연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다시 또 지켜봐야 한다는 건 역겨운 지겨운 일이다.

계몽소설이라기엔 너무 배타적이다.
대중에 대한  어떤 애정도 이 소설은 담고 있지 못하다. 너와 나, 내 편 네 편으로 금 그어놓고 편가르기 놀음을 하는 양이 딱 그러하다. 우리 편은 선이고 다른 편은 악이다. 아, 이 우라질넘의 편가르기라니.   

다른 한편 이 소설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도 몇가지 약점을 안고 있다.
 

이외수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미숙한 문장력이다.

이 소설의 작문 수준은 아마추어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소설엔, 그 중요성을 한참 떠들어대던, 대학입시 문장강화용  훈련 텍스트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어색한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작가의 전략적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작가의  미숙함 내지는 불성실한 태도 이상은 안 보인다.

작가의 전략이 소설에서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의 소설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요건까지를 희생시켜도  좋을만큼은 아니다. 더구나 작가의 숨겨진 의도 따위가 도무지 없는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나는 이 소설에 뭐 그리 대단한 전략까지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같은 생각에는 나의 미처  덜 뜨인 '심안'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무튼 그렇다.

지나치게 잦게 사용된 비유법은 덜떨어진 문학 소녀의  유치 찬란한 글을 연상시키고, 요령부득인 어미 활용에다 막무가내인 시제 처리는 작가의 성실성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소설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피동과  사동의 어색한 사용은, 교열과정에서 그 오용이 충분히 인지될 수 있는 것이고, 게다가 이 소설을 내고 있는 출판사가 다름아닌 출판계의 명문이랄 수 있는 곳이기에 그 아쉬움을 차라리 출판사에 돌리고 싶을 정도다.
 

- 시간이 침잠하고 있다.
- 침잠하는 시간 저쪽에서 희뿌연 새벽 미명이 몰려와 문창호지를 적시고 있다.
- 자물쇠를 풀자 나지막한 비명 소리를 발하며 대문이 열렸다.
- 불이 꺼진 한옥 한 채가 어둠 속에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 소설의 두번째 약점은 그 넌센스적 내용들이다.

이 소설은 도무지 넌센스로 일관하고 있다. 하도 알아듣기 힘든 헛소리를 하는 터라, 그렇다면 이를 정신병적 관점에서 함 봐봐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를테면, 정신병원의 기원을 다루면서 미셀 푸코는 '정신병자도 실은 그의 논리 체계 속에서는 지극히 정합적이고 일관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걸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하는 건가 싶어서디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일상인의 기본적인 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접수해야 할까? 현자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몽상가로 봐야 할 것인가.

이 소설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있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세계이다. 작가는 현실을 금 안의 세계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금은 (이하 생략)

일상인의 세계는 이를테면 이런 세계다. "사람들은 대개 활자화된 내용이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맹점들을 간직하고  있다"거나, 이들의 "자존심을 적당히 이용할 경우 더욱 구매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거나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세계다(이하 생략).  

세번째는 도피적인 결말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짜증이 나는 것들이 있다. 작가가 끝내 그 의도를 숨긴 채 독자로 하여금 그 의도를 읽어달라고 말하는 경우다. 쥐뿔 그런 게 안 보이는 모호한 글(아무리 봐도 작가 자신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헷소리)을 던져놓고는 독자보고 그걸 읽어달라고 요구하는 건 가이소리다.

포커 판에서 이런 경우 많다. 일부러 상대가 내 패를 읽어주게 유도하며 승부수를 띄우는 경우다. 이같은 승부수는 잘만 하면 상대에게 카운터 블로를 먹여 일거에 판을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 또한 크다. 히든 카드가 뜻대로 먹히지 않는 경우 이제까지의 전략적인 희생보다 더 큰 카운터 블로를 내가 얻어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대개 이도저도 아니다싶을 때 마지막에 던진다.

모호한 방식으로 글을 써두고 거기서 대단한 어떤 뭔가를 독자더러 생각해 읽으라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 이외수는 지금까지 이런 방식의 승부수에서 성공적이었다. 번번이 독자가 먼저 나가 떨어진 덕분이다.

이외수는 과연 독자가 넘볼 수 없는 좋은 패를 가졌던 것일까?


이외수의 하악하악

힘든 일이겠지 하악하악 - 이외수와 정신병자들


아, 썰을 풀다보니 소설의 줄거리가 빠졌다. 한 줄로 요약하자.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러니까 '편재' 불능의 시공 속에서 '편재' 가능한 세계로의 이행을  꿈꾸던 주인공이 마침내 때(?)가 되어 저 선계로 가게되었더라는 이야기다. (이보다 더 자세한 줄거리를 알고싶은 분은 여기서 보시길.)

이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마음공부'다.

작가는 "세상만물 중에서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스승 아닌 것이 없으며", "아주 작은 먼지 한 점조차도 우주의 절대적인 요소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허나 그런 사실을 실감하려면 우선 마음으로써 모든 사물들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그리고 되도록이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낮추어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음을 닫아 걸고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좋은 얘기다. 참으로 공자같은 말씀이시다. 그러나 작가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마음을 닫아 걸고 현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작가가 마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란 적어도 이 소설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금 하나 그어놓고 그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차단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작가 쪽이다. 어지러운 현실만을 나열하여 비난할 뿐, 그 현실을 수용하려는 어떤 지극한 태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편재'를 시도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노력도 작가는 소설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작가는 도피만을 꿈꾼다. 그러므로 작가의  이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은 따로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에서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대개 활자화된 내용이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맹점들을 간직하고  있다"거나, 이들의 "자존심을 적당히 이용할 경우 더욱 구매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거나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대목들이다. 그래서 말인데,

어게인,

"선생님, 혹시 도道에 관심 있으십니까."

서점에서 책을 고르거나, 지하철에서 전철을 기다리다 종종 듣게 되는 소리다.

이 소설은 어쩌면 그런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람들은 대개 활자화된 내용이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맹점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독자의 "자존심을 적당히 이용할 경우 더욱 구매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작가의 "각본대로" 독자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기를 바라고 쓰인 책은 행여 아닌 것인가?


모를 일이다. [footnote]젠장, 이건 뭐.. 이외수 말대로 정신병원에나 함 가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_-[/footnote]



 

<덧붙이는글> 블로고스피어에 하민혁이 안티 팬이 수만이라는 말을 듣고(실은 그 말 듣기 이전에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는 참입니다) 자중 모드에 들어갑니다. 원래 새가슴인 터라 살짝 겁도 나고 해서 앞으로는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듣보기 좋은 글만 올리도록 할 생각입니다. -_-
 http://www.youtube.com/watch?v=AZRd8av4Leo

2009/03/13 22:02 2009/03/13 22:02

이문구의 소설 <유자소전>을 읽었다.

최수철이 쓴 <얼음의 도가니>를 읽느라고 기진해 있었다. 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 베갯머리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었다. 한숨에 읽고, 그리고 일어나서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지금 새벽 기도를 나가야 하는 아내의 잠을 망쳤으면서도, 기분은 쾌하다.

<유자소전>은 실전소설이다. 작가가 한 친구의 생애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 친구의 이름은 '유자'이고 그는 길지 않았던 자신의 일생을 온몸으로 살다 간 사람이었다.


유자소전

이문구의 <유자소전>


실로 그의 생애는 뚜렷하고 우뚝한 것이었다. 이 소설은 질곡이 많았던 우리의 현대사에 관한 기록이면서 친구 유자를 애도하는 작가의 조사이고 그를 기리는 찬사이다.

유명이 갈렸건만 아직도 그대를 찾음이여
오롯이 더불어 살은 진한 삶이었음이네.
수필이 되고 소설이 되고 시가 되어 남음이여
그 정신 아름답고 향기로웠음이네.
아아 사십 중반에 만년이 되었음이여
남보다 앞서 살고 앞서 떠났음이로다.
붓을 놓으며 다시금 눈물 젖음이여
그립고 기리는 마음 가이없어라.

이 소설은 친구가 부르는 사모곡이다.

이 소설에는 감동이 있다. 여기에는 예의 저 최수철이 시간과 힘의 무익한 낭비고 소모일 뿐이라며 폐기 처분해버린 그런 이야기가 주는 감동이 있다. 최수철의 소설에서와 같은 강팍한 감정이나 지나친 긴장을 이 소설은 넉넉한 세상보기와 구수한 이야기로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진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세상살이가 팍팍할수록 아쉬어지는 것은 어쩌면 저러한 구수함과 넉넉함일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행여 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친구 하나는 이런 내 생각에 분명한 경계의 눈길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더하게 호도하는 것은 바로 저 지나친 강박 관념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허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자의 생각에는 여기에서 다 드러낼 수 없는 나름대로의 배경이 놓여 있겠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 인물의 생애를 하나의 짧은 이야기 속에서 이만큼이나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그리하여 이만큼이나 생생한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작가의 탁월한 이야기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최수철이 말한 바, 소설이 하나의 압축 파일이라는 표현은 역설스럽게도 이 소설을 두고 볼 때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그때를 아십니까!

유자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는 소설의 초반부는 그 시절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작가의 이야기 능력은 한낱 글에 지나지 않는 소설을 가히 아름다운 한 편의 영상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주인공 유자의 어린 시절을 읽는 일은 마치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그 영화의 주인공은 비단 유자만이 아니다. 때로는 가슴 아리는 서글픔으로 때로는 달뜬 흥분으로 안겨오는 유자의 어린 시절은 바로 우리 자신의 어린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 무렵은 바로,
성냥 하면 천안 조일표, 고무신 하면 군산 만월표밖에 몰랐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은 우둥퉁한 노파가 되어 십중팔구 하염없이 추억이나 되새기고 있을 조미령이 일쑤 새파란 과부로 분장하고 나와서, 밥만 먹고 잠만 자던 촌사람들의 무딘 가슴을 이리 집적 저리 집적하여, 육백을 치면서 조인다고 조여도 국진 열 끗이 목단 열 끗으로밖에만 안 보였던 어수룩하던 시절

이었으며, 또한 직업적인 선거꾼이 유세장마다 몰려다니며 민주당 후보의 확성기 줄부터 끊어놓고 난장판을 벌이던 그런 자유당 말기의 시절이기도 했다.

주인공 유자는 육이오 난리 이듬해에 작가가 다니고 있던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리고 전학하고 며칠이 되지 않아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낸다. 어린 시절의 그는 확실히 우리와는 다른, 그래서 우리의 추억 속에서 쉬이 그 존재를 기억해낼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아무데서나 주워대는 그 입담이 밑천이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아이들이 밥 먹을 때 모이를 먹고, 다른 아이들이 죽 먹을 때 여물을 먹었는지, 나이답지 않게 올되고 걸었던 그 입은, 상급생이나 선생님들 앞에서도 놓아먹인 아이처럼 조심성이며 어렴성이라곤 없이 넉살좋게 능청을 떨어대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물은 되잖게 입만 되바라졌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숫기가 좋고 붙임성이 있었다. 예컨대,
그는 보매보다 반죽이 무름하고 너울가지가 좋아 붙임성이 있었고, 싸움난 집에서 누룽지를 얻어먹을 만큼이나 두룸성이 있었으며, 하다못해 엿장수를 상대로 엿치기를 해도 따먹은 엿토막이 앞에 수북할 정도로 눈썰미와 손속이 뛰어난 터수였다.
나이가 한참이나 위인 중학생들과 예사로 너나들이를 하고, 가는 데마다 시덥지 않은 성님과 대가리 굵은 아우가 수두룩했던 것이 다 그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던 일이었다.

여기서 그의 어린 시절을 다 더듬고 있을 수는 없다. 써커스와 가설 극장의 국민학교 시절과 "어금니 꽉 다물어, 안 그러면 이빨 안 남어나"로 겁을 주고는 두 볼을 사정없이 처돌리던 호랑이 실업 선생의 중학 시절을 거치면서 그의 학창 시절은 끝이 난다.

주인공 유자의 청년기와 장년기, 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추억하는 소설의 중반부와 후반부를 읽는 것 역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다. 주인공 유자가 살아가는 삶은 바로 우리 자신이 살아온 그 삶이고 그가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가 바로 우리가 부대끼며 겪어온 그 역사인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과연 우리가 그가 살아온 것만큼이나 그렇게 치열하고 올곧게 살아왔는가 하는 점 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것 또한 각자의 삶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영사기사의 꿈으로 시작된 그의 사회 생활은 유세장의 확성기 줄을 손보아 주면서 야당 붙이가 되고 사월 혁명의 여덕으로 반짝 경기를 누리기도 한다. 정치 식객 생활은 그러나 오월의 군사 정변으로 마감되고 그의 길은 군대 생활로 이어진다.

당시 '군대는 가면 숟가락도 놓기 전에 꺼지는 배로 하여 허천들린 듯이 먹어대던 시대였지만, 그의 병영 생활은 훈련병 시절부터 배를 곯아 본 일이 없었다. 입이 벌어먹인 덕이었다.' 입영 열차에서 우연히 얻게 된 당사주책과 천세력이 그의 타고난 입담을 바탕으로 그를 유도사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해서,
입소 동기생들이 땡볕에서 낮은 포복이다, 높은 포복이다 하고 군살을 빼는 동안, 그는 도사답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군살이 찔 것 같은 그늘에 앉아서 졸(卒)을 함부로 죽여가며 초한전(楚漢戰)으로 실전 훈련을 쌓았고, 궁이 면줄에 몰릴 지경으로 다된 판을 붙들고 늘어져 빗장을 부르는 흘떼기 장기와, 보리바둑 주제에 반집짜리 끝내기 패로 시간을 끌면서, 남들이 다들 어려워 했던 신병 시절을 유감없이 마쳤다.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자동차 운전까지를 배운 그는 제대를 하고 난 얼마 뒤에 재벌 그룹 총수의 승용차 운전대를 잡는다. 그의 열정적인 독서 생활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그의 승용차 기사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는 총수의 사생활에 대한 불경죄로 좌천되어 노선 상무로 근무케 된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이 노선 상무 시절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보여 주고 있는 그의 남다른 노력은 실로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엿보는 일은 오로지 독자의 몫일 터다.

다만 그의 운전 윤리에 대한 댜음과 같은 전언은
꼭 이즈음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 이 자리에 그대로 옮겨 본다.
그는 운전자의 운전 윤리에 누구보다도 반듯하였다. 그러므로 운행 중에 때아닌 곳에서 과속으로 앞지르기를 하거나, 옆에서 끼어들어 진로 방해를 하거나, 차선을 함부로 넘나들거나, 신호등이 바뀌기 전부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거나, 운전 상식이나 도로 질서에 도전하는 자를 보면, 매양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기를 잊지 않았다.

"츤한늠.... 저건 아마 즤 증조할애비는 상전덜 뫼시구 가마꾼 노릇허구, 할애비는 고등계 형사 뫼시는 인력거꾼 노릇 허구, 애비는 양조장 허는 자유당 의원 밑에서 막걸리 자즌거나 끌었던 자식일겨. 질바닥서 까부는 것덜두 다 계통이 있는 법이니께."

그리고 이제 유자는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열정적이고 올곧았던 그의 삶을 뒤로 한 채.
이에 그의 불꽃 같은 삶을 기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는 두 편의 시가 이 소설에는 실려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이미 이 글 허두에서 소개한 이문구 씨의 것이고 아래에 있는 산문시는 시인 이시영 씨의 것이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유자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기에 그 전문을 옮겨 적는다.

제목은 '유재필 씨'이다.

비가 구죽죽이 내린 날, 유재필 씨의 시신은 영구차에 실려 답십리 삼성병원 영안실을 떠났습니다. 그 뒤를 호상 이문구 씨가 따랐습니다. 번뜩이는 익살과 놀라운 재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지만 자신은 이 지상에 한 편의 소설도 시도 남기지 않은 채 새파란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갔습니다.

오늘은 또한 벗 채광석의 일백 일 탈상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일백 일 전 오늘 유재필 씨는 채광석 장례의 지관이 되어 이산 저산을 뒤지며 터를 잡고 돌집에 내려와서는 '시인 채광석의 묘'라고 새긴 돌값을 깎았습니다. 돌값을 깎고 내려와선 양수리 한강변에서 장어를 사먹었던가요.

햇빛에 그을은 새까만 얼굴과 단단한 어깨, 넘치는 재담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길지 않은 생애의 대부분의 직업이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사고 처리반 주임이었으니까요. 죽음은 어쩌면 그와 가장 친숙한 길동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않은지요. 그는 우리들을 잠시 놀라게 하려고 이웃 마실에 간 것만 같습니다.

오늘은 일백 일 전에 세상을 떠난 광석이와 그를 묻고 돌을 세운 유재필 씨가 한강변의 이산 저산에서 만나는 날입니다.

"잘 있었나?"
"예, 형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이 곳에 좀 먼저 온 죄로 터를 닦아놨습니다.
야, 얘들아 인사드려라, 재필이 성님이다. 소설가 이문구 씨 친구."
"이문구 씨가 누구요?"
"야 씨팔놈들아, 저세상에 그런 소설가가 있어!"

유재필 씨는 아직 아무말이 없습니다. 남들이 묻힐 자리를 찾기 위해 수차례 오갔지만 아직은 좀 서먹한 산천과 무엇보다도 세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슬픔이 뼈끝에 시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구는 잘 갔는지, 그 자식은 내가 없으면 어려운 일 당했을 때 뉘를 찾을지도 궁금하여 안심이 안됩니다.

"형님, 제 교통 사고건 맡아 처리하시느라고 수고 많으셨다메요. 저번 사십구재 때 내려가서 가족들이 얘기하는 것 들었습니다. 술도 한 잔 못 받아 드리고....."

그러나 유재필 씨는 아직 말이 없습니다. 저 세상에 비가 내리는지 누운 자리가 좀 끕끕합니다. 그리고 강물소리가 시원히 들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덧붙이는글> 진짜 재밌는 얘기는 2편에 있습니다. -_-
<덧2> 김기자님, 앞으로 이런 글만 올리면 되나요? -_-;;
 
2009/03/13 01:16 2009/03/13 01:16
누가 일등신문 조선일보를 두려워하는가?


누가 일등신문 조선일보를 탓하는가?

일등신문 조선일보, 누가 나를 두려워하느뇨. 한심한 중생들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누가 조선일보를 탓하는가?
한심한 중생들입니다.

허구헌날 조선일보 부르대며 날을 지새는 이 한심한 중생들은 이번에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책을 들고 돌아온 우리의 호프 유시민 선생께서 하신 주옥같은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나, 유시민은 독재정권의 엄혹한 교육 아래서 자랐지만, 독재정권에 반대하고 저항했어요."

맞는 말입니다.

교육이 아무리 체제이데올로기를 강제한다 해도, 교육이 인간을 개조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저 '가소성이론'을 차용한 어떤 가열찬 이데올로기 교육으로도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는 '인자' 자체를 어찌 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싫으면 내가 안 볼 수 있는 신문 따위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정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단지 조선일보 까대기 놀음을 하고있을 뿐입니다. 최신에 유행한다는 저 놀이에 끼지 않으면 왕따 될 지도 모른다는 그 유아틱한 두려움에서 말이지요. 두려움에서 떨쳐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게 어른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 여기까지만 하면 서운해 하실 분들 당근 있겠습니다.

일등신문 조선일보를 보는 일이 영 불편한 분들입니다(복통까지 가는 친구들도 없지는 않아보이지만, 그거야 뭐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픈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면 그냥 불편하다고 말하세요.

"나는 조선일보가 불편하다!"

하구요. 그리고 안 보면 됩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다만, 그러고 나서도 남아도는 힘이 있다면 일등신문 조선일보 넘어서는 특등신문 하나 만들면 되는 일입니다. 조선일보 까대는 그 주디와 그 정성이면 그깟 일 하나 못 하겠나싶은데 말이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오버질 엔간히들 하라는 얘기입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 오버액션 보는 일 나도 넘 불편합니다. -_-




 
2009/03/12 14:48 2009/03/12 14:48

'지식 소매상' 유시민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제16, 17대 국회의원',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대한민국 헌법[footnote]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footnote]을 들고서다. 정치의 계절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일 터다.


유시민

지식소매상 유시민과 정치인 유시민 사이


그런데, 역시 유시민이다. “진보정당, 죄인이 미운 나머지 촛불까지 외면하진 말라”
말장난부터 시작한다.
 

유 전 장관은 자신의 비판에 대한 진보정당의 반발과 관련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죄 많은 사람이 손에 든 촛불이라도 때로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죄인이 미운 나머지 촛불까지 외면해버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 ··· %3D98505 (새 창으로 열기) (이하 동일)


유시민 전 장관이 그가 새롭게 펴낸 책,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하고 있다는 말이다. 재밌다.

도대체 선한 사람들은 다 어디 가서 뒈지고 없길래, 저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필이면 저 죄 많은 넘이 촛불을 들고 있어야 했을까? - 지금 무슨 영화 찍냐?

죄 많은 사람이 들고 있는 촛불이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은, 그래서 외면하는 것은 죄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 넘이 언제 촛불 가지고 장난 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깜깜한 데 있는 길을 택하는 게 더 낫다. 아니면 내가 켜거나.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촛불의 효용은 그리 오래 가는 게 아니다. 외면하는 정도에서 그칠 게 아니라 죄인이 든 촛불을 아예 끄고 어둠에 익숙해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나은 정도를 넘어 더 근본적인 대책일 수도 있다. - 비유로 흥한 넘 비유로 망하는 법이다.

버뜨! 여기서 그친다면 당근 유시민이 아니다. 새겨야 할 말도 했다.
 

유 전 장관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그는 “소위 ‘진보적 정책정당’은 이념적 편협함과 경직성이라는 비슷한 질병을 앓고 있다”며 “당 안팎에서 경쟁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과격함과 자기성찰의 부족이 마치 이념적 투철함의 발로인 것처럼 통용되는 한, 진보 정당이 국민 속에 뿌리내리기는 앞으로도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는 “민노당은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 세력’ 또는 ‘짝퉁 진보’라고 공격했다”며 “그 ‘짝퉁’이 ‘짝퉁’임을 폭로하면 ‘명품 진보’ 민노당의 대중 기반이 강화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진보진영 전체의 지지율 동반 하락 현상을 지적했다.
유 전 장관은 “진보 정당이 국민 속에 뿌리내리려면 무엇보다 먼저 가까운 이웃을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진보 정당들은, 내부에서는 많은 성찰과 자기비판을 하는지 몰라도, 밖에서 보기에는 외부의 비판에 대해서 귀를 닫은 정당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현상만에 주목한 결과다.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어 있다. 유시민이 말한 '진보 정당'은 '이른바 진보' 정당, 곧 '자칭 진보' 정당일 뿐이다.

이거 모를 리 없는 유시민이다. 그런데, 왜 이러실까?

간단하다. 이번에는 진보 정당이 이용해먹을만하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지난 번에는 노무현과 개혁당이 이용할 가치가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헛소리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순진한'이다.


그는 “인기 없는 대통령의 예상치 못한 제안들은 거의 언제나 엄청난 정치적 역풍을 일으켰다”면서 “그러나 모두 대통령의 의도 자체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상황에서 나까지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과 함께 비판의 소나기를 맞는 쪽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노무현의 괴벨스'라는 표현에 걸맞는 발언이다. 잘 못 한 거면 대통령 할애비라도 잘 못 한 거지, 차마 자신만은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 없었다니 이건 또 무슨 헷소린지 모르겠다. 소나기가 오리라는 것 뻔히 알고 있었다면서 일부러 쫓아가 소나기를 맞고 자빠졌을 이유는 없는 일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 그렇게 할 일이 없었나? 소나기 맞는 놀이나 하고 있을만큼?

그러나 역시 유시민이다. 소나기를 함께 맞아주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유시민이 괴벨스와 다른 것은 유시민은 소나기 정도는 기꺼이 맞아줄 수 있지만, 결코 노무현과 함께 죽지는 않는다는 점에서다.

유시민은 '괴벨스의 길'에서 이렇게 빠져나간다.
 

유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이 임기가 거의 다 끝나가던 무렵 “유 장관,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적은 없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계몽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저질렀던 것 같아”라고 토로했다고 소개했다


멋지다. 저 계몽주의에의 오류는 그러니까 노무현의 문제였던 셈이다. 만쉐이~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

 


 

<덧붙이는글> 이 글은 유시민의 책을 소개하는 기사(광고)를 보면서 언듯 떠오른 생각을 적은 인상비평입니다. 이 글에서 애써 논리 찾고 할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사봐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주문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마 오늘 밤이 고비지 않을까싶습니다.  ^^
 
2009/03/11 16:52 2009/03/11 1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