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저 불꽃같이 타오르던 사랑의 홍역을 경험한 모든 이들을 위한이 소설은 '시대의 후미진 하늘 한 모퉁이를 우리가 알 수 없는 찬연한 빛으로 불타며 져간 한 쌍의 젊음을, 그들의 쓸쓸한 사랑과 그 현란한 추락을,' 그 이야기를 바로 그들 중의 한 사람인 남주인공의 입을 통해 몰아치듯이 전하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그라쯔.
알프스가 끝나는, 전형적인 북유럽의 수려한 풍광이 자랑인 그 지방 교외의 한 민박집에서 어떤 젊은이가 사랑하는 여자의 가슴에 총알을 박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여자의 가슴에 총알을 박은 바로 그 젊은이의 고해와도 같은 이야기로 그 '서장(序章)'을 시작한다.
때는 1969년.
막걸리와 생맥주, 젓가락 장단과 통기타 반주, 목 자른 군화와 청바지, 다방과 고고홀, 가락국수와 라면, 국산품 애용과 수출입국, 개인윤리와 집단윤리, 고전적인 성도덕과 서구적인 성개방, 또는 성적인 편견과 편의주의, 이런 상반된 모든 것들이 어떤 경계선에 위치해 있던 시기였다.
그 해 5월도 거의 다 갈 무렵의 어느 날, 마로니에 잎새가 드리워진 교정의 벤치에서 그들은 만났다.
임형빈과 서윤주.
그들의 만남은 실로 불꽃같은 것이었으나 그것은 또한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이기도 했다. 임형빈은 법대 2학년의 전형적인 시골 수재였고 문리대 신입생인 서윤주는 개방적이고 활달한 도시 여자였다.
'참다운 사랑은 일생에 한번밖에 앓지 않는 홍역과 같은 것'
그러나 환상과 열정으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종내는 시들고 말 '그 해의 화사했던 장미' 한 다발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태양을 향해 하늘로 솟아오르다가 추락하고 마는 젊은 이카루스와도 같이 비극적인 종말을 향하여 앞으로 내달았으니, 그 사랑의 열정은 이미 얼레에서 풀려난 운명의 실이 되어 그들을 질기게 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첫 구멍부터 이미 잘못 끼워진 단추 같은 사랑이었다'.
그들은 그런 언밸런스한 모습으로 "불꽃 속에서의 한 계절"을 살아간다. 잘못 끼워진 단추는 처음부터 다시 끼우면 되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저 운명의 질긴 실을 끊을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광기 어린 열정이 낳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이런 사정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을 휘감고 있는 저 운명에의 불안을 서윤주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모르겠어. 귀한 것을 힘들여 찾아낸 기쁨보다는 무언가 시작해서는 안될 일을 시작한 듯한 불안 뿐이야."
수락산으로 산행을 다녀오던 길에 비뚤어져 혼자 뒤에 처진 임형빈을 만나 달래면서 서윤주가 하고 있는 말이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나는 아까 네가 버스에 오르지 않고 갑자기 돌아서서 그 희고 꾸불꾸불한 시골길로 뛰어갈 때 이런 생각을 불쑥 했었지. '저 애는 참으로 어렵게 살 애로구나. 왜 넓은 길과 편한 버스와 돌아가야 할 도시를 그만두고 좁은 시골길로 낯선 곳을 향해 뛰어 갈까' 그러나 버스가 산굽이를 돌고 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뭐랄까, 갑자기 (....) 너를 혼자 보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같이 길을 잃고 헤매게 되더라도 네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후회 비슷한 감정이 생긴 거야 (....)"
"그런데 불안은 왜 ?"
"너를 만나고 나니, 그리고 다시 큰길을 찾아 돌아 나오는 걸 보니, 갑자기 내가 쓸데 없는 걱정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거야. 애초에 네가 그 길로 뛰어간 것도 나 때문이었고, 또 내가 되돌아오지 않아도 너는 훌륭히 네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앤데, 하는. 거기서 갑자기 앞으로도 언제나 네가 어긋진 길을 가게 만드는 것은 나일 것 같고, 나는 또 그런 너를 제자리로 돌아가게 한다는 게 오히려 함께 길을 잃어 두 사람 모두 어둡고 험한 곳을 헤매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어. 아니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야...."
이같은 예감은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는 충분한 위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서로 판이하게 다르면서 넉넉하지 못한 두 사람의 열악한 환경과 두 사람이 모두 갖고 있는 격렬하고 성급한 성격, 그리고 한 쪽은 개방적이고 다른 한 쪽은 독선적인 생각 등이 그것이었다. 그 운명의 끝을 서윤주는 이렇게 예감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잘못되는 날에는 둘 다 심각한 상처를 입을 거야. 어쩌면 남은 일생 내내 치유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거나 끝내 그것 때문에 죽고 말...."
그리고 서윤주의 이런 예감은 훗날 그대로 적중한다.
임형빈이 전하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듯 위태위태하게 계속된다.
어설프게 전개되던 그들의 사랑은 어느 날 서윤주가, '성합'을 원하는 임형빈에게, 자신은 동정녀가 아님을 밝히는 것으로 한 전기를 맞게 된다. 올곧고 순진하기만 한 시골수재 임형빈에게 있어 그 고백은 곧 파국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하여 그들의 사랑은 거기에서 일단 끝이 나는 듯 보이고, 그렇게 그들의 불꽃 속에서의 한 계절도 끝이 난다.
이제 서윤주는 (미국으로) 떠나고 임형빈은 귀향한다. 1970년 겨울의 일이다.
1971년. 맹목적인 열정과 집착에서 벗어난 스물 한 살의 임형빈에게는 이제 허탈감과 무기력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형빈의 몸부림이 소설의 행간을 메운다.
아픈 기억을 어느 정도 극복해가고 있던 어느 날, 다시 서윤주의 소식이 그에게로 전해진다. 서윤주는 꿈의 나라 미국이 아닌 '미국 달이 뜨는' 서울의 이태원을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만나지만 거기에는 짐승과도 같은 다툼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이문열 책장례식 풍장
그 불협화음의 시간이 지나간 후, 그들은 이른바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그리고 제법 '사랑의 잔치와도 같은' 안정된 나날을 보낸다. 허나 그 안정이란 온전한 화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또 한번의 파국을 맞게 된다.
파국을 부른 것은 임형빈의 말을 빌리자면 '두 사람의 정신 속에 깃든 악마였다'.
임형빈의 '소년적인 결벽증과 자존심'은 서윤주의 과거에 대한 번민을 낳게 하고, 서윤주의 개방적인 의식에는 그 생활이란 도무지 답답한 것으로만 여겨진다. 그런 감정은 서로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앙금으로 남아, 미국에 있는 언니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오는 날, 급기야는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서로가 슬퍼하고 위로해야 할 그 죽음 앞에서 그들은 다시 한 바탕의 다툼을 벌이고 임형빈은 집을 나간다. 때마침 상경한 아버지.
임형빈이 자신의 성마름을 탓하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긴 이별의 시작'이었다. 서윤주는 이제 참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그 방황의 끝에서 '아직 딱지도 앉지 않은 내상을 안은 채'로 임형빈은 입대를 한다.
육군하사 '임하사'.
어느 날, '입대하고 여덟 달인가 아홉 달만에 강원도 어떤 전방사단의 말단소대에서 신출내기 단기하사로 고참 병장들의 텃세에 시달리고' 있던 그에게, '아홉 달 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서윤주의 편지가 날아든다.
형빈
이게 정이랄까. 여러 번을 망설이다 이 글을 쓴다.
나는 그렇게 냉철하게 삶을 재단하려 했건만 아니, 내 앞에 펼쳐진 세월을 사는 게 아니라 채워 가려고 애썼건만,
아무래도 그런 이성의 사람은 못되는 모양이지.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 ---- 새삼스럽지만 나를 용서해 줘.
그리고 잊어 줘.
우리가 그렇게 억지스레 끼워 맞추려 애썼던 것은 첫 구멍부터가 잘못 끼워진 단추 같은 사랑이었어. 그 다음부터 아무리 잘해 보려 해도 바로잡아질 수 없는 그런.
그저 그만큼이라도 둘이서 함께 노력해 봤다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삼기 바란다.
그 집을 나오고 두 번인가 어둔 골목길에서 너를 훔쳐본 적이 있지.
우리를 기다리는 운명이 어떤 것이든 비척거리며 걷는 너를 보고 달려나가 부축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지....(후략)
1971년 9월 윤주
이제 그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 뒤 임형빈은 제대를 하고 어떤 대기업의 계열회사에 입사를 하고 결혼을 한다. 그리고 1982년 5월 회사의 미국지사 설립을 위한 선발대로 한국을 떠난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그는 서윤주를 찾기 위해 애써보지만 그러나 그것은 번번이 무위로 끝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산타모니카 해안으로 차를 몰아나간 임형빈은 거기에서 운명처럼 또 다시 서윤주를 만난다.
잔치와도 같은 그들의 사랑은 다시 시작되고....,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불협화음으로 일그러진다. 이제 그들의 사랑에 종말이 다가온다. 그들은 '우리들의 날개', 추락을 위한 그 날개를 준비한다. 임형빈은 리벌버 38구경 권총을 하나 산다.
"아니, 너는 무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죽는다는 게 왜 그리 끔찍 하기만한 끝장이야? 기억해? 옛적에 함께 읽었던 잉게보르크만의 시 ----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추락은 우리가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죽음을 끝 모를 추락이라고 보더라도 ---- 그 때문에 우리의 날개는 더 크고 화려해질 수도 있지. 죽음이 휴식이거나 완벽한 고통의 면제라면 그건 더 바랄 나위가 없고...."
임형빈이 그 권총을 서윤주의 앞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그 권총과 특유의 뻗대기로 이후 두어 번의 진정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런 시위도 이제는 무용한 데까지에 이르고 만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의 그라쯔,
그 풍광이 수려한 시골 마을의 한 민박집에서 그들의 현란하고 광기 어린 사랑은 그 종말을 맞게 된다. 서윤주가 경멸의 말을 쏘아붙이는 순간, 임형빈은 그미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훅, 하는 거센 숨소리 같은 것뿐, 그녀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쓰러졌습니다. 그녀가 두 손으로 싸안은 가슴에서 피가 번져 나온 것을 보고서야 나는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황급히 그녀를 쓸어안았을 때 흘깃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눈길이었습니다. 그게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천 번이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그렇게도 만족과 평온에 찬 사랑의 눈길이 있을까요? 거기다가 또 그녀는 정신을 잃기 직전, 안간힘을 다해 내 귀에 속삭였습니다.
"그래.... 됐어.... 실은 나도 하루하루 꺼져가는 촛불 같은 우리 삶을.... 망연히 보고 있기가 괴로웠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바보 같이 너는 왜.... 일찌감치 내게서 달아나지 않았어? 그렇게도 여러 번.... 기회를 주었더랬는데.... 이렇게 함께 추락하는 것이 안쓰러워...."
그들의 불꽃같은 만남은, 그들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난다.
임형빈의 이야기는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설도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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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의 만화 <금간종>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저 만화가 자꾸 생각났다. 이 둘이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였다. 허영만의 저 만화를 보게 된 건 하던 일과 연애에서 두루 바람을 맞고 하릴없이 방구석에 누워 뒹굴거나 기껏 만화방이나 기웃거리던 시기였다.
당시 이현세와 이두호의 만화를 주로 보았댔는데, 그들의 만화가 주는 충격과 재미도 이제는 도대체 만화같기만 해서 사뭇 시들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의 어느 날, 허영만의 <금간종>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듯 서가의 맨 아래쪽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었다.
이후 <금간종>이 주는 상당한 울림에 이끌려 허영만의 다른 작품들을 거의 다 섭렵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금간종>만큼 울림을 주는 만화는 읽을 수가 없었다. 다른 작가들의 만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당시 내가 이미 만화를 보는 일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 때문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 방학 기간이 되었다.
함께 지내던 이들이 모두 시골을 가고 이번에는 비디오에 빠져 지냈다. 만화의 그 죽어 있는 동작과 과장되고 뻔한 스토리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사람의 움직임과 조금은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보고 듣고 싶었던 것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비디오를 본 것도 그때였다. 비디오를 보고 난 느낌은 뭔가 2% 부족했다. 허영만의 만화에서 그리는 것에 미치지 못 했다(내게는 이 둘이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소설 <추락하는 날개가 있다>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 때문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글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던 것이다.
책을 보는 일은 그러나 여의치가 않았다.
룸펜 생활은 이내 끝이 났고, 나는 곧 영일 없는 사회 생활로 다시 내몰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야 나는 비로소 그 원작을 읽게 되었다. 비디오를 보면서도 생각한 거지만 소설을 읽고 난 지금 생각해봐도 그 영화는 그런 대로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다. 서윤주 역의 주인공도 그녀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듯싶고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도 제법 그럴 듯했다.
하나 마나 한 얘기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이 훨씬 더한 사실감(?)을 주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이점 중의 가장 대단한 것이란 결국 소설 속의 인물들을 독자가 직접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선택을 강요받은 고정된 이미지의 한 배우를 통해서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그런 것이겠기 때문이다.
비디오를 보면서나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의 실제적인 경험이 없이도 하나의 작품이 쓰일 수 있는 것일까. 하나의 작품에서 작가의 순수한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허구는 얼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일까 하는.
이를테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임형빈이나 서윤주의 나약하면서도 폭발적인 삶의 형태는 작가의 순전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그런 아픈 사랑의 가슴앓이를 경험한 후에 나온 것일까, 아니면 그 두 가지의 요소가 작가의 힘을 빌어 어우러지면서 전혀 다른 하나의 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소박하게 말하자면 당근 마지막 가정이 가장 합리적일 듯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행여 두 번째 가정이 더한 작용을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작가는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선 어떻게 컨트롤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어떻게 그것을 수용하고 극복해내는 것일까 하는 생각.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작가의 부단한 관심과 인식에서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고 한다면 저들의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이해란 기실 얼마나 치열한 것이어야 할 것인가. 다양한 인간의 정서와 삶의 여러 양상들 속에서 저렇듯 보편적인 인간 정서와 삶의 양상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작가의 힘이란 어느 정도여야 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운명이라고, 팔자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저 지난한 삶의 편린들을 하나의 소설 속에서 저렇듯 리얼하게 그려낼 수 있는 작가의 대단함에,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문득문득씩 주눅이 들어야 했다.
이 소설은 임형빈과 서윤주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전하되, 여기엔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선, 인간을 생각하게 하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복잡 다단한 인간 의식의 한 단면을 칼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문열의 작품으로는 다소 거친 감이 없지는 않지만(실제로 작가는 이 소설에 대해 '가장 부끄러운 작품'이라고 어딘가에서 말한 것으로 기억된다. 짐작할 수 있는 이유만도 여럿이지만 약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경우 그 거칠음이 오히려 인간의 의식을 더 날 것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대목을 두어 군데 옮겨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글이 너무 길었다.
임형빈은 그들의 긴 사랑 이야기에 덧붙여 아니, 이야기를 끝내고 한참 있다가 혼잣말처럼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그리고 소설도 그 물음과 함께 끝이 난다.
"그런데, 어느 쪽이 진실이었을까요? 그녀가 방을 나서려 하며 가로막는 내게 쏘아붙인 말들과 끌어 안겨 피 흘리며 내게 속삭인 말들 가운데서....아니, 그녀는 어떤 여자였을까요? 여자라는, 성으로 구분된 보편적인 집단의 한 예외였을까요? 아니면 70년대 초의 한국적 상황과 한참 위세를 떨치던 아메리카즘이 우리 딸들을 돌게 해 만들어낸 한 특수한 예외였을까요...."
나(소설 속 화자)는 제법 진지하게 그 답을 생각 해보았다. 하지만 (....) 그 답은 얻어지지 않고, 임형빈이 얘기 도중에 인용한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구만이 휑한 머릿속을 떠다닐 뿐이었다.
-----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 -----
나도 모르겠다. 작가는 어쩌면 임형빈의 마지막 말 - 70년대 초의 한국적 상황과 한참 위세를 떨치던 아메리카니즘 운운 - 에 주목하여 이 소설을 구상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 딸들의 저러한 예외를 경계하려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저 마지막 말을 다음과 같이 함 바꾸어보고 싶다.
"그녀는.. 한 특수한 예외였을까요? 아니면 여자라는 보편적인 집단의 한 전형이었을까요? 나의 지나친 열정과 독선 탓에 그만 그것을 미처 다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한 그런 이였을까요."
하고. 다시 말해, 그녀가 방을 나서려 하면서 쏘아대던 저 악다구니들도 진실이고, 피 흘리며 끌어 안겨 속삭이던 말들 역시 진실인 것 아니냐는 얘기다. 보편적인 집단의 한 예외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예외가 아니라 보편적인 집단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건지도 모르겠다는 얘기고.
-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
- 인간은 모두 숨겨진, 다른 누구도 거기에 이를 수 없는 어떤 속성이 있다.
무튼, 이 소설을 읽으면서 허영만의 <금간종>을 떠올렸고, 써머셋 모옴의 <인간의 굴레>를 떠올렸다. <금간종>의 주인공들을 생각했고 <인간의 굴레>에 나오는 필립과 밀드레드를 생각했다. 그들의 운명과 사랑을, 그리고 '사람'을 생각했다.
<덧붙이는글> 중간에 서비스로 넣어둔 사진은 지난 2002년 3월 1일 충북 옥천에서 있은 이문열 책 장례식 '풍장' 행사 사진이다. 우리는 지금 다름이 허용되지 않는 야만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