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저 평화하게 하느적거리던 군대시절이었다. <꿈꾸는 식물>이라는 소설이었다. 'xxx' 정성들여  읽고나서 내뱉은 소감이 그것이었다. 하나 더 봤다. <칼>이든가 하는 제목을 가진 소설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이후 나는 그가 쓴 책이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여담이지만 그때 함께 근무하던 7명의 군발이 중에는 이외수와 절친한 육군 상병 하나가 있었다. 춘천 교대 후배인 그는 당시 내 직속고참이었다(그에게 야구 방망이로 몇 대 맞은 기억이 새롭다. 게기다가 잘못 맞은 탓에 - 사실 나는 내가 잘못 했을 때는 찍소리 안 하고 잘 맞아준다. 그 빈도가 넘 잦아서 탈이긴 했지만 -  제대를 하고서도 한참 동안 힘들었다. 날궂이를 했다는 뜻이다). 별명은 토미(말괄량이 삐삐에 나오는)였고,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칭구였다. [footnote]그도 곧 소설가가 되었는데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그는 이미 시인이기도 했다 - 재미는 없는(죄송.. ?) 그의 소설을 그래도 나는 꼬박꼬박 챙겨 읽는 편이다(이 글 쓰면서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전문 분야에서는 많이 유명한 분이신 듯하다. 필명으로만 활동한 탓에 몰랐다. -_-). [/footnote]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외수의 벽오금학도

이외수의 <벽오금학도>

어쩌다 들르는 서점에서 <벽오금학도>에 눈길이 미치면, 그 겉표지를 보게되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나의 턱없던 도전과 좌절의 기억이다.

<벽오금학도>를 처음 보게 된 것은, 그래도 시작한 일인데 한 권의 책이라도 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함께 일하던 이들의 얼굴이 있어, 그때는 이미 의욕만으로 시작했던 출판사 일(인문학총서기획)이 더이상 꾸려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뚝딱하게 책 한 권을 만들어 그 첫 배본을 나갔던 교보문고 앞에서였다.

거기에선 <벽오금학도>의 출간을 알리는 전단이 꽃가루처럼 뿌려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벽오금학도'(그림)를 지겹도록 보게되었고, 그 얼마 후에 우리는 문을 닫았다.  소설 <벽오금학도>는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러고도 18개월여가 지난 어젯밤, <벽오금학도>를 읽었다. [footnote]이 글은 1994년에 쓰인 글입니다.[/footnote]

어느날 친구와의 약속을 위해 전철을 기다리거나 우연히 들른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중에 문득, '선생님, 혹시 도道에 관심 있으십니까'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의 황당함이란 참 당혹스럽다 할 수 있는데, <벽오금학도>를 읽으면서 가진 느낌이 바로 그런 황당함이었다.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소설은 대체 어떤 부류에 속하는 소설인가. 진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구도소설인가, 아니면  어른을 위한 동화인가, 아니면 사회의 위악적인 요소들을 고발하고 질타하는 세태소설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대중을 깨우치기 위한 계몽소설인가.

구도소설이라기엔 너무 안이하다.
이 소설에는 구도소설에서 요구되는(?) 어떤 치열함도 없다.

동화라기엔 너무 되바라져 있다.
동화의 한 미덕이랄 수 있는 해맑은 순수함이나 희망을 이 소설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요소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도 거기에 해맑은 미소로 답하기가 쉽지않다.

왜일까.
 

- 아이가 오줌이 마려워서 눈을 뜨게 된 것은 새벽녘이었다.
- 불현듯 바깥에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전신을 휩싸고 있었다.  
- 싸늘한 냉기 한 모금이 폐부 깊숙이 스며 들어와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감각들을 소스라치게 만들고 있었다.
- 어둠이 어슴푸레하게 걷히고 있었다.
- 시간이 침잠하고 있었다. 침잠하는 시간 속으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소설의 어느 곳에서고 만나게 되는, 유치하다는 것 말고는 다른 표현을 찾기 힘든, 이런 류의 미숙한 언어구사가 어쩌면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을 동화로 받아들이기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footnote]이 글의 어디가 뭐이 어쨌다고 난리냐? 이 글이 통신에 올려졌을 때, 한 두 사람에게서 이런 질책성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위의 글은 이 글의 주체인 어린아이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휘들로 다.만. 치.장.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 줄에 나오는 오줌이 마렵다는 표현을 빼고는, 불현듯, 예감이 전신을 휩싸고, 냉기, 폐부, 감각들을 소스라치게, 침잠하는 시간 등.. 도대체 어느 것 하나 아이의 시선이라고는 볼 수 없는, 다만 작가의 '덜 떨어진' 의식을 보여주는 그런 표현들 뿐입니다.
여기저기서 감각적인 표현들을 줏어다 떼어붙인 여고생의 시구같은 이런 글들이란, 말 그대로 여고생의 시구에서라면 몰라도 소위 작가라는 타이틀을 내건 사람의 글에서 취할 바는 아닐 터입니다.[/footnote]

세태소설이라기엔 그 예봉이 너무 무디고 느리다.
이 소설에서 제기하는 현실의 문제들은 우리 모두가 이미 공감하여 그 해결책을 찾고 있는 문제들이다. 진부한  얘기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방식으로 재연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다시 또 지켜봐야 한다는 건 역겨운 지겨운 일이다.

계몽소설이라기엔 너무 배타적이다.
대중에 대한  어떤 애정도 이 소설은 담고 있지 못하다. 너와 나, 내 편 네 편으로 금 그어놓고 편가르기 놀음을 하는 양이 딱 그러하다. 우리 편은 선이고 다른 편은 악이다. 아, 이 우라질넘의 편가르기라니.   

다른 한편 이 소설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도 몇가지 약점을 안고 있다.
 

이외수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미숙한 문장력이다.

이 소설의 작문 수준은 아마추어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소설엔, 그 중요성을 한참 떠들어대던, 대학입시 문장강화용  훈련 텍스트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어색한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작가의 전략적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작가의  미숙함 내지는 불성실한 태도 이상은 안 보인다.

작가의 전략이 소설에서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의 소설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요건까지를 희생시켜도  좋을만큼은 아니다. 더구나 작가의 숨겨진 의도 따위가 도무지 없는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나는 이 소설에 뭐 그리 대단한 전략까지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같은 생각에는 나의 미처  덜 뜨인 '심안'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무튼 그렇다.

지나치게 잦게 사용된 비유법은 덜떨어진 문학 소녀의  유치 찬란한 글을 연상시키고, 요령부득인 어미 활용에다 막무가내인 시제 처리는 작가의 성실성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소설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피동과  사동의 어색한 사용은, 교열과정에서 그 오용이 충분히 인지될 수 있는 것이고, 게다가 이 소설을 내고 있는 출판사가 다름아닌 출판계의 명문이랄 수 있는 곳이기에 그 아쉬움을 차라리 출판사에 돌리고 싶을 정도다.
 

- 시간이 침잠하고 있다.
- 침잠하는 시간 저쪽에서 희뿌연 새벽 미명이 몰려와 문창호지를 적시고 있다.
- 자물쇠를 풀자 나지막한 비명 소리를 발하며 대문이 열렸다.
- 불이 꺼진 한옥 한 채가 어둠 속에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 소설의 두번째 약점은 그 넌센스적 내용들이다.

이 소설은 도무지 넌센스로 일관하고 있다. 하도 알아듣기 힘든 헛소리를 하는 터라, 그렇다면 이를 정신병적 관점에서 함 봐봐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를테면, 정신병원의 기원을 다루면서 미셀 푸코는 '정신병자도 실은 그의 논리 체계 속에서는 지극히 정합적이고 일관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걸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하는 건가 싶어서디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일상인의 기본적인 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접수해야 할까? 현자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몽상가로 봐야 할 것인가.

이 소설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있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세계이다. 작가는 현실을 금 안의 세계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금은 (이하 생략)

일상인의 세계는 이를테면 이런 세계다. "사람들은 대개 활자화된 내용이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맹점들을 간직하고  있다"거나, 이들의 "자존심을 적당히 이용할 경우 더욱 구매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거나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세계다(이하 생략).  

세번째는 도피적인 결말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짜증이 나는 것들이 있다. 작가가 끝내 그 의도를 숨긴 채 독자로 하여금 그 의도를 읽어달라고 말하는 경우다. 쥐뿔 그런 게 안 보이는 모호한 글(아무리 봐도 작가 자신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헷소리)을 던져놓고는 독자보고 그걸 읽어달라고 요구하는 건 가이소리다.

포커 판에서 이런 경우 많다. 일부러 상대가 내 패를 읽어주게 유도하며 승부수를 띄우는 경우다. 이같은 승부수는 잘만 하면 상대에게 카운터 블로를 먹여 일거에 판을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 또한 크다. 히든 카드가 뜻대로 먹히지 않는 경우 이제까지의 전략적인 희생보다 더 큰 카운터 블로를 내가 얻어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대개 이도저도 아니다싶을 때 마지막에 던진다.

모호한 방식으로 글을 써두고 거기서 대단한 어떤 뭔가를 독자더러 생각해 읽으라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 이외수는 지금까지 이런 방식의 승부수에서 성공적이었다. 번번이 독자가 먼저 나가 떨어진 덕분이다.

이외수는 과연 독자가 넘볼 수 없는 좋은 패를 가졌던 것일까?


이외수의 하악하악

힘든 일이겠지 하악하악 - 이외수와 정신병자들


아, 썰을 풀다보니 소설의 줄거리가 빠졌다. 한 줄로 요약하자.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러니까 '편재' 불능의 시공 속에서 '편재' 가능한 세계로의 이행을  꿈꾸던 주인공이 마침내 때(?)가 되어 저 선계로 가게되었더라는 이야기다. (이보다 더 자세한 줄거리를 알고싶은 분은 여기서 보시길.)

이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마음공부'다.

작가는 "세상만물 중에서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스승 아닌 것이 없으며", "아주 작은 먼지 한 점조차도 우주의 절대적인 요소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허나 그런 사실을 실감하려면 우선 마음으로써 모든 사물들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그리고 되도록이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낮추어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음을 닫아 걸고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좋은 얘기다. 참으로 공자같은 말씀이시다. 그러나 작가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마음을 닫아 걸고 현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작가가 마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란 적어도 이 소설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금 하나 그어놓고 그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차단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작가 쪽이다. 어지러운 현실만을 나열하여 비난할 뿐, 그 현실을 수용하려는 어떤 지극한 태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편재'를 시도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노력도 작가는 소설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작가는 도피만을 꿈꾼다. 그러므로 작가의  이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은 따로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에서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대개 활자화된 내용이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맹점들을 간직하고  있다"거나, 이들의 "자존심을 적당히 이용할 경우 더욱 구매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거나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대목들이다. 그래서 말인데,

어게인,

"선생님, 혹시 도道에 관심 있으십니까."

서점에서 책을 고르거나, 지하철에서 전철을 기다리다 종종 듣게 되는 소리다.

이 소설은 어쩌면 그런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람들은 대개 활자화된 내용이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맹점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독자의 "자존심을 적당히 이용할 경우 더욱 구매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작가의 "각본대로" 독자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기를 바라고 쓰인 책은 행여 아닌 것인가?


모를 일이다. [footnote]젠장, 이건 뭐.. 이외수 말대로 정신병원에나 함 가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_-[/footnote]



 

<덧붙이는글> 블로고스피어에 하민혁이 안티 팬이 수만이라는 말을 듣고(실은 그 말 듣기 이전에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는 참입니다) 자중 모드에 들어갑니다. 원래 새가슴인 터라 살짝 겁도 나고 해서 앞으로는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듣보기 좋은 글만 올리도록 할 생각입니다. -_-
 http://www.youtube.com/watch?v=AZRd8av4Leo

2009/03/13 22:02 2009/03/13 22:02

이문구의 소설 <유자소전>을 읽었다.

최수철이 쓴 <얼음의 도가니>를 읽느라고 기진해 있었다. 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 베갯머리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었다. 한숨에 읽고, 그리고 일어나서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지금 새벽 기도를 나가야 하는 아내의 잠을 망쳤으면서도, 기분은 쾌하다.

<유자소전>은 실전소설이다. 작가가 한 친구의 생애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 친구의 이름은 '유자'이고 그는 길지 않았던 자신의 일생을 온몸으로 살다 간 사람이었다.


유자소전

이문구의 <유자소전>


실로 그의 생애는 뚜렷하고 우뚝한 것이었다. 이 소설은 질곡이 많았던 우리의 현대사에 관한 기록이면서 친구 유자를 애도하는 작가의 조사이고 그를 기리는 찬사이다.

유명이 갈렸건만 아직도 그대를 찾음이여
오롯이 더불어 살은 진한 삶이었음이네.
수필이 되고 소설이 되고 시가 되어 남음이여
그 정신 아름답고 향기로웠음이네.
아아 사십 중반에 만년이 되었음이여
남보다 앞서 살고 앞서 떠났음이로다.
붓을 놓으며 다시금 눈물 젖음이여
그립고 기리는 마음 가이없어라.

이 소설은 친구가 부르는 사모곡이다.

이 소설에는 감동이 있다. 여기에는 예의 저 최수철이 시간과 힘의 무익한 낭비고 소모일 뿐이라며 폐기 처분해버린 그런 이야기가 주는 감동이 있다. 최수철의 소설에서와 같은 강팍한 감정이나 지나친 긴장을 이 소설은 넉넉한 세상보기와 구수한 이야기로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진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세상살이가 팍팍할수록 아쉬어지는 것은 어쩌면 저러한 구수함과 넉넉함일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행여 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친구 하나는 이런 내 생각에 분명한 경계의 눈길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더하게 호도하는 것은 바로 저 지나친 강박 관념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허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자의 생각에는 여기에서 다 드러낼 수 없는 나름대로의 배경이 놓여 있겠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 인물의 생애를 하나의 짧은 이야기 속에서 이만큼이나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그리하여 이만큼이나 생생한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작가의 탁월한 이야기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최수철이 말한 바, 소설이 하나의 압축 파일이라는 표현은 역설스럽게도 이 소설을 두고 볼 때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그때를 아십니까!

유자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는 소설의 초반부는 그 시절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작가의 이야기 능력은 한낱 글에 지나지 않는 소설을 가히 아름다운 한 편의 영상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주인공 유자의 어린 시절을 읽는 일은 마치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그 영화의 주인공은 비단 유자만이 아니다. 때로는 가슴 아리는 서글픔으로 때로는 달뜬 흥분으로 안겨오는 유자의 어린 시절은 바로 우리 자신의 어린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 무렵은 바로,
성냥 하면 천안 조일표, 고무신 하면 군산 만월표밖에 몰랐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은 우둥퉁한 노파가 되어 십중팔구 하염없이 추억이나 되새기고 있을 조미령이 일쑤 새파란 과부로 분장하고 나와서, 밥만 먹고 잠만 자던 촌사람들의 무딘 가슴을 이리 집적 저리 집적하여, 육백을 치면서 조인다고 조여도 국진 열 끗이 목단 열 끗으로밖에만 안 보였던 어수룩하던 시절

이었으며, 또한 직업적인 선거꾼이 유세장마다 몰려다니며 민주당 후보의 확성기 줄부터 끊어놓고 난장판을 벌이던 그런 자유당 말기의 시절이기도 했다.

주인공 유자는 육이오 난리 이듬해에 작가가 다니고 있던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리고 전학하고 며칠이 되지 않아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낸다. 어린 시절의 그는 확실히 우리와는 다른, 그래서 우리의 추억 속에서 쉬이 그 존재를 기억해낼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아무데서나 주워대는 그 입담이 밑천이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아이들이 밥 먹을 때 모이를 먹고, 다른 아이들이 죽 먹을 때 여물을 먹었는지, 나이답지 않게 올되고 걸었던 그 입은, 상급생이나 선생님들 앞에서도 놓아먹인 아이처럼 조심성이며 어렴성이라곤 없이 넉살좋게 능청을 떨어대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물은 되잖게 입만 되바라졌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숫기가 좋고 붙임성이 있었다. 예컨대,
그는 보매보다 반죽이 무름하고 너울가지가 좋아 붙임성이 있었고, 싸움난 집에서 누룽지를 얻어먹을 만큼이나 두룸성이 있었으며, 하다못해 엿장수를 상대로 엿치기를 해도 따먹은 엿토막이 앞에 수북할 정도로 눈썰미와 손속이 뛰어난 터수였다.
나이가 한참이나 위인 중학생들과 예사로 너나들이를 하고, 가는 데마다 시덥지 않은 성님과 대가리 굵은 아우가 수두룩했던 것이 다 그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던 일이었다.

여기서 그의 어린 시절을 다 더듬고 있을 수는 없다. 써커스와 가설 극장의 국민학교 시절과 "어금니 꽉 다물어, 안 그러면 이빨 안 남어나"로 겁을 주고는 두 볼을 사정없이 처돌리던 호랑이 실업 선생의 중학 시절을 거치면서 그의 학창 시절은 끝이 난다.

주인공 유자의 청년기와 장년기, 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추억하는 소설의 중반부와 후반부를 읽는 것 역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다. 주인공 유자가 살아가는 삶은 바로 우리 자신이 살아온 그 삶이고 그가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가 바로 우리가 부대끼며 겪어온 그 역사인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과연 우리가 그가 살아온 것만큼이나 그렇게 치열하고 올곧게 살아왔는가 하는 점 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것 또한 각자의 삶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영사기사의 꿈으로 시작된 그의 사회 생활은 유세장의 확성기 줄을 손보아 주면서 야당 붙이가 되고 사월 혁명의 여덕으로 반짝 경기를 누리기도 한다. 정치 식객 생활은 그러나 오월의 군사 정변으로 마감되고 그의 길은 군대 생활로 이어진다.

당시 '군대는 가면 숟가락도 놓기 전에 꺼지는 배로 하여 허천들린 듯이 먹어대던 시대였지만, 그의 병영 생활은 훈련병 시절부터 배를 곯아 본 일이 없었다. 입이 벌어먹인 덕이었다.' 입영 열차에서 우연히 얻게 된 당사주책과 천세력이 그의 타고난 입담을 바탕으로 그를 유도사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해서,
입소 동기생들이 땡볕에서 낮은 포복이다, 높은 포복이다 하고 군살을 빼는 동안, 그는 도사답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군살이 찔 것 같은 그늘에 앉아서 졸(卒)을 함부로 죽여가며 초한전(楚漢戰)으로 실전 훈련을 쌓았고, 궁이 면줄에 몰릴 지경으로 다된 판을 붙들고 늘어져 빗장을 부르는 흘떼기 장기와, 보리바둑 주제에 반집짜리 끝내기 패로 시간을 끌면서, 남들이 다들 어려워 했던 신병 시절을 유감없이 마쳤다.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자동차 운전까지를 배운 그는 제대를 하고 난 얼마 뒤에 재벌 그룹 총수의 승용차 운전대를 잡는다. 그의 열정적인 독서 생활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그의 승용차 기사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는 총수의 사생활에 대한 불경죄로 좌천되어 노선 상무로 근무케 된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이 노선 상무 시절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보여 주고 있는 그의 남다른 노력은 실로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엿보는 일은 오로지 독자의 몫일 터다.

다만 그의 운전 윤리에 대한 댜음과 같은 전언은
꼭 이즈음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 이 자리에 그대로 옮겨 본다.
그는 운전자의 운전 윤리에 누구보다도 반듯하였다. 그러므로 운행 중에 때아닌 곳에서 과속으로 앞지르기를 하거나, 옆에서 끼어들어 진로 방해를 하거나, 차선을 함부로 넘나들거나, 신호등이 바뀌기 전부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거나, 운전 상식이나 도로 질서에 도전하는 자를 보면, 매양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기를 잊지 않았다.

"츤한늠.... 저건 아마 즤 증조할애비는 상전덜 뫼시구 가마꾼 노릇허구, 할애비는 고등계 형사 뫼시는 인력거꾼 노릇 허구, 애비는 양조장 허는 자유당 의원 밑에서 막걸리 자즌거나 끌었던 자식일겨. 질바닥서 까부는 것덜두 다 계통이 있는 법이니께."

그리고 이제 유자는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열정적이고 올곧았던 그의 삶을 뒤로 한 채.
이에 그의 불꽃 같은 삶을 기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는 두 편의 시가 이 소설에는 실려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이미 이 글 허두에서 소개한 이문구 씨의 것이고 아래에 있는 산문시는 시인 이시영 씨의 것이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유자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기에 그 전문을 옮겨 적는다.

제목은 '유재필 씨'이다.

비가 구죽죽이 내린 날, 유재필 씨의 시신은 영구차에 실려 답십리 삼성병원 영안실을 떠났습니다. 그 뒤를 호상 이문구 씨가 따랐습니다. 번뜩이는 익살과 놀라운 재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지만 자신은 이 지상에 한 편의 소설도 시도 남기지 않은 채 새파란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갔습니다.

오늘은 또한 벗 채광석의 일백 일 탈상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일백 일 전 오늘 유재필 씨는 채광석 장례의 지관이 되어 이산 저산을 뒤지며 터를 잡고 돌집에 내려와서는 '시인 채광석의 묘'라고 새긴 돌값을 깎았습니다. 돌값을 깎고 내려와선 양수리 한강변에서 장어를 사먹었던가요.

햇빛에 그을은 새까만 얼굴과 단단한 어깨, 넘치는 재담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길지 않은 생애의 대부분의 직업이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사고 처리반 주임이었으니까요. 죽음은 어쩌면 그와 가장 친숙한 길동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않은지요. 그는 우리들을 잠시 놀라게 하려고 이웃 마실에 간 것만 같습니다.

오늘은 일백 일 전에 세상을 떠난 광석이와 그를 묻고 돌을 세운 유재필 씨가 한강변의 이산 저산에서 만나는 날입니다.

"잘 있었나?"
"예, 형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이 곳에 좀 먼저 온 죄로 터를 닦아놨습니다.
야, 얘들아 인사드려라, 재필이 성님이다. 소설가 이문구 씨 친구."
"이문구 씨가 누구요?"
"야 씨팔놈들아, 저세상에 그런 소설가가 있어!"

유재필 씨는 아직 아무말이 없습니다. 남들이 묻힐 자리를 찾기 위해 수차례 오갔지만 아직은 좀 서먹한 산천과 무엇보다도 세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슬픔이 뼈끝에 시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구는 잘 갔는지, 그 자식은 내가 없으면 어려운 일 당했을 때 뉘를 찾을지도 궁금하여 안심이 안됩니다.

"형님, 제 교통 사고건 맡아 처리하시느라고 수고 많으셨다메요. 저번 사십구재 때 내려가서 가족들이 얘기하는 것 들었습니다. 술도 한 잔 못 받아 드리고....."

그러나 유재필 씨는 아직 말이 없습니다. 저 세상에 비가 내리는지 누운 자리가 좀 끕끕합니다. 그리고 강물소리가 시원히 들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덧붙이는글> 진짜 재밌는 얘기는 2편에 있습니다. -_-
<덧2> 김기자님, 앞으로 이런 글만 올리면 되나요? -_-;;
 
2009/03/13 01:16 2009/03/13 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