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에 해당되는 글 31

  1. 2009/02/28 MBC, 민주주의 논하기 전에 개념부터 챙기시라 32
  2. 2009/02/28 MBC 노조, 이런 걸 뿌리고도 부끄럽지 않을까 122
  3. 2009/02/27 나는 신경민 앵커의 멘트가 불편하다 172
  4. 2009/02/26 미디어법 기습상정, 누가 그들에게 방망이를 주었나 19
  5. 2009/02/25 다음 블로거뉴스의 트래픽 선물을 받다 9
  6. 2009/02/24 미디어워치, 미디어오늘 겨냥하여 창간한다? 12
  7. 2009/02/23 패거리주의 논리와 상식의 논리 15
  8. 2009/02/22 파리대왕과 유신헌법, 그리고 소문에 대하여 2
  9. 2009/02/21 조삼모사, 태터앤미디어의 항복선언? 29
  10. 2009/02/20 인터넷시대 여론, 누가 만들고 전파하는가 4
  11. 2009/02/19 김정훈 유고집,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8
  12. 2009/02/18 참, 나쁜 블로거 105
  13. 2009/02/17 김수환 추기경, 모든 좋은 일은 쉽지 않다 6
  14. 2009/02/16 용산참사, PD수첩 그리고 정직한 목격자 46
  15. 2009/02/15 허만 멜빌의 <모비딕> 중에서 4
  16. 2009/02/14 한국의 진보, 기생의식부터 버려야 산다 26
  17. 2009/02/13 독설과 인신공격은 다른 말이다 (1) 28
  18. 2009/02/12 용산참사, 김석기는 무고한 희생양일 뿐(?) 22
  19. 2009/02/11 이명박과 mbn 기사삭제, 돌발영상사태의 재판으로 가는가 19
  20. 2009/02/10 현인택과 구두닦이, 참 이상한 사람들의 나라 9
  21. 2009/02/09 세익스피어의 <햄릿> 중에서 10
  22. 2009/02/08 블로그의 광고매체화, 찬성하십니까? 23
  23. 2009/02/07 민주노총 성폭행과 이명박의 닌텐도 47
  24. 2009/02/06 사천만 모두가 '걸면 걸리는' 나라 6
  25. 2009/02/05 도대체,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 81
  26. 2009/02/04 PD수첩, '편집된 사실'은 '정연한 거짓'의 다른 말이다 79
  27. 2009/02/03 게오르규의 <25시> 중에서 3
  28. 2009/02/02 진보-보수, 한국사회를 떠도는 유령 23
  29. 2009/02/02 파스칼의 <팡세> 중에서 (1) 2
  30. 2009/02/01 시골 이야기 6
지난 25일 한나라당의 기습적인 법안 상정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세칭 미디어법과 관련하여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모니터링 의무화’ 조항 법안의 국회 직권 상정에 대한 입장"이라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요지는, 성윤환 의원이 낸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정보통신망법’)'안 중 제44조 7항(불법정보의 유통금지)에 신설된 7의 1항 2의2와 5항이 "인터넷 상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크게 훼손하고 인터넷 산업을 위축시키며, 민간 사업자에게 판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행 불가능한 책임을 지우는 내용으로서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내용입니다.

보도자료를 보면서 어제 엠비씨(MBC)가 세계를 향해서 뿌려댄 UCC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반화하긴 살짝 거시기하지만, 인터넷기업협회가 주장하고 있는 이같은 방식이 바로 엠비씨 노조가 세계인을 향해 종주먹 들이대며 외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는 바로 그 '민주주의'고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엠비씨가 하는 행태를 보면, 이같은 민주주의에 대해 이들은 도무지 관심도 없어보입니다. 그저 요상한 그림이나 동영상 만들어 뿌려대면서 국민을 몰모트나 되는 듯이 이용하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MBC, 이런 짓 할 시간에 너희가 고양이 아니라는 증거부터 보일 일입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footnote]김종삼의 '북치는 소년' 중에서[/footnote]
 


그렇게 잉어 한마리씩 들고 서서, 아무 말도 없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려는 한나라당을 막아달라'고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만 보면 이건 시위라기보다는 거의 공갈이고 사기에 가깝습니다.

고양이는 뭐고 생선은 또 뭐라는 말인가요? 무엇보다, 어떤 위기 속에서도(그들이 그렇게 앙망해 마지않는 민주주의가 신음하고 독재가 판을 칠 때조차도) 국내 최고의 보수를 받으면서 잘 먹고 잘 산 엠비씨 자신이 고양이가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래서 묻고싶어집니다.

"그 생선, 누가 먹을 건데?"

뭐라고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하는 행태를 보건대, 저 생선의 주인은 저들인 듯만 싶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고싶습니다. 왜 너희가 먹을 생선까지 국민이 나서 지켜줘야 하는 거냐고. 너희는 도대체 어느 하늘서 뚝! 떨어져내린 '신의 아들들'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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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인터넷기업협회에서 배포한 "‘모니터링 의무화’ 조항 법안의 국회 직권 상정에 대한 입장"이라는 보도자료 전문입니다. 타당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함 해보시길 바랍니다.


보도자료 전문 보기..


 
<참고> 사단법인 한국인터넷기업협회(회장 허진호, www.kinternet.org (새 창으로 열기))는 국내 인터넷 관련 대표 기업들로 구성된 비영리 민간 경제 단체로서 현재 구글코리아, 네오위즈게임즈, 다음커뮤니케이션, 야후코리아, 옥션, SK커뮤니케이션즈, KT, NHN, G마켓 등 170여 개 회원사들이 가입돼 있다.
 
<덧붙이는글> 엠비씨가 정권의 개였을 때에도 국민은 민주주의 잘 지켜왔습니다. 그러니 민주주의 말하기 전에 엠비싸는 먼저 자신의 저 부박하고 저급한 인식틀부터 바꿀 일이겠습니다.
  
2009/02/28 19:10 2009/02/28 19:10

엠비씨(MBC) 언론노조에서 만들었다는 "MBC 아나운서들이 세계인에게 전하는 메세지"라는 동영상을 봤습니다. 동영상을 보면서 발바닥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을 느끼기는 또 처음입니다.
 

MBC언론노조

MBC언론노조, 이런 걸 뿌리고도 부끄럽지 않을까

밥그릇 지키기거나 말거나, '언론장악'이라는 멘트까지는 그래도 뭐 어떻게든 봐줄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독재국가가 되었다느니,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느니, 민주주의가 위태롭다느니.. 이런 말들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걸 세계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고흥길'과 국회의장 '김형오'한테 전화까지 하랍니다. 하도 아동스러워서 두드러기가 다 돋을 지경입니다. 말끝마다 달고 다니는 저 '독재'와 '민주주의'의 뜻이나 알고 저 말을 내뱉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참 저질스럽다 아니할 수 없는 동영상입니다. 어느 분 말씀대로 '부끄러운 줄 쫌.. 아십시다". 쫌~
 


 
 
 
다음은 위 영상에 나오는 아나운서들의 멘트 모음입니다.

멘트모음 보기..

 
<덧붙이는글> 시주는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했다. 옛말 그른 데 없다. 맞는 말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래도 싸움판 벌리고 나앉은 친구들이다.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딴죽을 걸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영상 메세지는 도를 넘었다. mbc가 어디 얼라들 소꿉장난하는 데도 아니고, 한 나라의 대표적인 공영방송에서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내가 판단컨대는, 이 영상물 기획,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부끄러운 짓이다. 폐기하시라.  mbc가 좋아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권한다.

<덧2> 위의 덧글을 쓰고 블로고스피어를 보니, 아뿔싸~ 다른 생각은 아예 비집고 들어설 여지가 없을 정도다. 저 동영상으로 블로고스피어가 아주 도배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봐도 다들 제정신들이 아닌 듯싶다. 흡사 신유집회장의 광신도들 모습이다. 위 덧글의 '폐기' 발언은 포기한다. -_
  
2009/02/28 03:23 2009/02/28 03:23

아는 블로거에 들렀더니, 신경민 앵커의 사진이 큼지막히 붙어 있다. 뭔가 글이 쓰여 있는데, 잘 안 보여서 그림을 크게 볼까싶어 클릭을 했더니 아고라의 이슈청원 방으로 날아간다. "신경민-박혜진앵커 중징계와 언론악법 직권상정 반대"라는 서명이 진행중이다.


나는 신경민 앵커의 멘트가 불편하다

나는 신경민 당신의 클로징 멘트가 불편합니다



이런저런 사설 빼고 말하자면, 서명의 요지는 신경민 앵커로 하여금 계속 클로징 멘트를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젠장~ 이게 무슨 헷소린가 싶다. -_-;
 
줄여서 말하자.  나는 신경민의 클로징멘트가 불편하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자주 듣볼 수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그 클로징 멘트 하지 말라고 청원이라도 하고싶다. 그런데 신경민 앵커가 그걸 계속해서 하게 해달라고 청원하는 서명운동이라니,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얘기다.  

역시 줄여서 말하자. 내가 신경민 식의 멘트를 불편해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원칙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MBC는 공영방송이다. 신경민은 개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공영방송의 메인뉴스 클로징멘트로 날릴 권리는 없다.




누질르시면 글자가 제대로 보입니다

<덧붙이는글> 신경민 식의 멘트가 지금 당장은 내게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들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허용되는 순간 그것은 언제라도 내게 독으로 날아들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2009/02/27 04:57 2009/02/27 04:57
유감스럽게도 최근 며칠 사이 뉴스를 보지 못 했다. 오늘 한나라당이 세칭 '미디어법'을 기습상정했다고 한다. 민주당은 이를 두고 '날치기'에 절차성 하자가 있다며 적법성을 문제 삼고 있고, 한나라당은 '이미 끝난 일'이라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언론노조는 오늘부터 바로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블로고스피어도 한나라당의 기습상정을 비난하며 들고 일어선 모양새다.  

몇 개의 기사를 보면서, 그리고 블로거들의 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선 "아니, 그럴 줄 몰랐다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회기에 이미 미디어법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오늘의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법안 상정이 법원까지 가서(민주당이 국회 사무처에 최종판단을 요청해둔 상태라지만, 여기서 무효로 판단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무효로 결론이 난다고 한들, 그래서 다시 4월로 연기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기본적으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도 4년이나 남아 있다. 게다가 마치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오늘 이 대통령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각오"를 내각에 주문하고 있는 판이다. 이 싸움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계속 간다고 해도 그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는 것이다.

경험칙에 의하면, 민주 사회에서는 '방망이 쥔 넘'이 장땡이다. 하물며 방망이만 쥐어준 게 아니고 아예 쪽수까지 떼거리로 밀어준 판이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이제 와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말인가? 뒤집어 엎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혹자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계속 엥기면 국민적 저항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때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한마디로 한심한 소리다. 객관적인 지표를 보면 이런 소리 나오기 힘들다. 몇 십만이 촛불을 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찻잔 속 태풍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의 지지도나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졌다고는 하나 여기서 떨어져 나간 지지도를 받을만한 곳은 없다.

이같은 상황은 지난 대선이 익히 말해주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명박 대통령은 역대 대선 후보 가운데 최약체였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깨졌다. 왜인가? 대항마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동영을 찍었어야 하리? 아니면 권영길을? 그것도 아니면 누굴 찍어야 했을까?

지금 이 상황도 저 상황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다. 야당이 뭐라고 한들 딴지와 딴죽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한미 FTA를 누가 시작했는가? 지금 결사 반대 외치고 있는 이들이 추진했던 일이다. 무슨 말을 더 할까? 이런 이들에게 신뢰를 보낼 국민은 없다.

국민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게 국민이다. 특히 한번 속은 이들에게 두번은 속지 않는 게 국민이다. 국민을 허재비 취급하며 주디로만 국민을 들먹이는 윤똑똑이들은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회를 폭파하라

뒤집어야 산다. 국회를 폭파하라.


무튼, 그렇다면 가야 한다. 아예 다 넘기고 한판 뒤집기를 시도해야 한다. 미디어법이고 나발이고 하고싶은 대로 걍 하도록 내비두라는 말이다. 그게 악법이어서 문제가 된다고? 그래서 반대한다고? 웃기잡는 소리다. 문제가 될 법이라면 더구나 냅둬버려야 한다. 이 점에서 이번에 진보신당이 내놓은 논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보신당은 세칭 미디어법 직권상정과 관련한 논평에서 "언론관계법 직권상정으로 벌어질 모든 사회적 갈등은 결국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스스로 조장한 것"이라며, "당명은 한나라이지만, 결국 나라를 두 나라로 갈라놓으려는 한나라당의 행태는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확한 논평이다. 그렇다. 지금 상황에서 한나라당에 준엄한 심판을 내릴 주체는 야당이 아니다. 야당은 한나라당에 앞서 이미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마당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마당에 머물러 있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에 준엄한 심판을 내릴 주체는 국민밖에 없다.

세칭 미디어법이 악법인가? 그렇다면 내비 두라. 악법의 폐해가 하늘에 닿아 국민이 들고 일어날 수 있도록 하라. 국민이 준엄한 심판을 내릴 수 있도록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막 가도록 하라. 와이 낫?:



 
2009/02/26 05:22 2009/02/26 05:22
딴지일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몇 년도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누적 방문자 수 1,000,000 만명 돌파'로 언론을 떠들석하게 했던 곳입니다. 당시로서는 누적 방문자 수 1백만 명이면 진기록이었다는 얘기인데, 지금에 와서 보면 먼 나라 얘기인 듯싶기도 합니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으나, 요즘 블로그 가운데 누적 방문자 수 1백만 명이 넘는 블로그가 상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장 제가 드나드는 블로그 가운데도 몇 백만을 거뜬히 넘어서는 블로그가 자주 눈에 띌 정도니까요.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제가 오늘 자랑할 일이 하나 생겨서입니다.
오늘 제가 드뎌 다음 블로거뉴스의 트래픽 선물을 받았습니다.


트래픽 폭탄

다음 블로거뉴스의 선물이 말 그대로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_____^



지난 며칠 동안 쫓기던 일을 마치고 조금은 널널한 마음으로 블로그에 접속했습니다. 그동안 밀린 댓글을 다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댓글 하나 달 때마다 방문객 수가 늘어납니다. 리퍼러를 확인해봤습니다. 그 유명한 다음 블로거뉴스의 선물이 말 그대로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 드뎌 나도 블로거뉴스에서 뭔가 대박을 쳤나보다싶었습니다. 잽싸게 리퍼러에 링크된 주소를 누질렀습니다(동시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런 대박 글을 쓴 기억은 없었습니다. -_-). 그리고 그 실체가 이내 드러납니다. 아연실색. 혹은. 허탈. -_-


다음 블로거뉴스

네. 맨 아래 있는 추천 16개 받은 글 - 선물을 받은 제 글입니다. ^^



이렇게 캡처까지 해서 올려도 아마 그 연유를 찾지 못하시는 분 있을 듯싶은데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이 글 위에 있는, 그리고 위에서 내려오면서 보자면 맨 아래 있는 추천 16개 받은 글 - 이번에 선물을 받은 제 글입니다.  ^^

보아 하니, 제 블로그 하루 평균 방문객이 800~1,200명 수준이니까 다음 블로거뉴스의 관련글로 묶인 저 글 하나로 오늘 하루 대략 2,000 트래픽 정도의 선물을 받은 듯싶습니다. 이에, 자축합니다. : )



<덧붙이는글> 이 포스팅에서 더 하고싶었던 이야기들
1. 내가 받은 추천 지수 16은 지금까지 블로거뉴스에 송고한 기사 중 최고 점수였다는 것.
2. 맨아래 허접하게 걸린 관련 글 하나가 이 정도라면, 직접 걸린 글의 경우 그 트래픽이 어느 정도일지를 처음으로 실감했다는 것(그동안에는 그저 말로만 들어온 터라).
3. 블로거뉴스에 수백의 추천을 받아 걸려 있는 글들이 과연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글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 더불어 추천시스템에 문제가 없는 건지도 함께 생각해봤다는 것.
4. 저 정도의 시스템이면 세상을 위해 더 나은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5. 딴지일보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 - 초기의 독투에서부터 사이트 리뉴얼 건에 이르기까지.
6. 다음의 블로거뉴스 말고 블로고스피어의 블로거뉴스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
7. 지금 상태라면 이 블로그가 1,000,000 히트를 찍는 때는 올해 연말 쯤이 되리라는 것 등.
2009/02/25 23:56 2009/02/25 23:56
미디어오늘에 들렀다가 흥미있는 기사(미디어오늘 겨냥 미디어워치 3월 창간)를 만났습니다. 보수단체에서 미디어오늘과 미디어스 등의 매체비평지에 맞서 보수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체비평지 '미디어워치'를 창간한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미 예상된 일이기에 이상하지도 놀랍지도 않은 소식입니다. 다만 참고삼아 기록으로 남깁니다.  

인터넷신문협회와 인터넷기자협회에 대응하여 인터넷미디어협회가, 민주언론시민연합과 언론개혁시민연대를 비판하며 공정언론시민연대와 미디어발전국민연합이 각각 설립되고, 이번에 미디어오늘과 미디어스 등의 매체비평지에 맞서 미디어워치가 창간됨에 따라 이제 이른바 마이너 그룹에 속하는 언론 분야도 확실하게 양대진영을 갖춘 셈이 되었습니다.

재밌는 일입니다. 쌍수를 들어서 환영해마지 않을 일이고 아주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워치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해마지 않습니다. 모쪼록, 기왕 시작한 일, 어중간하게 하지 마시고, 제대로 함 박 터지게 싸워주시길 기대합니다.


왼쪽에 있는 사람, 오른쪽에 있는 사람

왼쪽에 있는 사람, 오른쪽에 있는 사람



다음은 미디어오늘이 전하고 있는 미디어워치 창간 참여 단체와 인사들입니다.

공동창간위원장
이동복(북한민주화포럼 대표), 이헌(시민을위한변호사들 공동대표), 변희재(실크로드CEO포럼 회장).
고문
현소환 (전 YTN 사장), 신국환(전 산업자원부 장관), 이원창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강길모(미디어개혁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 최홍재(공언련 사무처장).
편집장 대행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실크로드CEO포럼 전문위원).
편집위원
허현준(뉴라이트재단 사무국장), 전경웅(인터넷미디어협회 사무국장), 이동훈(공언련 정책실장), 박주연(웹진 다요기 편집위원), 김민준(실크로드CEO포럼 이사).
창간위원
현소환(뉴스앤뉴스 대표), 신국환(전 산자부 장관), 강길모(미디어개혁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 최홍재(공언련 사무처장), 이동훈(공언련 정책실장), 허현준(뉴라이트재단 사무국장), 신혜식(독립신문 대표), 류태현(소비자를위한신문 대표), 백봉현(시큐리티뉴스 대표), 이원창(프런티어타임즈 대표), 전경웅(인터넷미디어협회 사무국장), 정광일(청년안중근아카데미 대표), 정인대(뉴스프리즘 대표), 조영환(올인코리아 대표), 조중근(바른사회옴부즈맨 대표), 박주연(다요기 편집위원), 이영진(퓨즈커뮤니케이션 대표), 여원동(마이미디어대표), 김영한(인터넷미디어협회 고문), 김민준(BNF 대표), 우석기(아트뮤 대표), 김명기(소나무미디어 대표), 송승한(쏜다넷 대표), 김태오(인터리치 이사), 김영덕(빅뉴스 편집부장), 오금열(메디플래너 대표), 양기용(서울포스트 대표), 신인균 (자주국방 대표), 소찬호(더 타임스 대표), 변희재(실크로드CEO포럼 회장), 이헌(시민을위한변호사들 공동대표), 이동복(북한민주화포럼 대표)

<덧붙이는글> 트랙백을 주신 학주니님 블로그를 통해 아이뉴스24의 기사를 보니, 내달 15일에 발행 예정인 미디어워치의 창간호에 실릴 내용이 ▲"MBC, 주인없는 노조 재벌 원하나"(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단독 인터뷰) ▲"MBC는 노조가 사측을 견제하는 미래 모델"(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 인터뷰) ▲"네이버, 뉴스캐스트 시행 절반의 성공?"(인터넷미디어 분석) ▲"조선일보의 실크세대 VS 경향신문의 88만원세대"(언론 비교 비평) ▲"왜곡방송, 국민의 저항과 외면받을 것"(내부칼럼 논설) 등이라고 합니다.
만일 기본적인 포맷이 정말로 저렇게 나오는 거라면 좀 암담해집니다. 이 포스트의 본문 글에서 언급한 "뽀대나게 함 싸워주었으면 한다"는 기대가 실로 무망한 노릇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의제를 리드하는 모습은 뵈질 않고 기생질하려는 모습만 보이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최소한 창간호만이라도 저런 기생질보다는 의제를 생산하는 미디어워치이길 바래봅니다.
2009/02/24 23:41 2009/02/24 23:41

얼마 전 기자 한 분과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일상의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한 대화였지만, 몇 가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사회적 현안에 이르러서는 대화가 사뭇 격렬해기도 했다. 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미 있는 것은 그 차이를 해소하고자 동원한 방식이었다.
대화가 부닥칠 때마다 우리는 서로 '상식'을 말했다.

NPC를 처음 정초할 때 생각이 났다. 우리는 그때도 자주 '상식'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우리는 '네티즌의 상식'을 믿었고, NPC의 미래를 그 '상식'에 걸었다. 지금도 그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NPC의 믿음이다. 나는 지금도 '네티즌의 상식'을 굳게 믿고 있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고 상식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그러나 나는 많이 당혹스러웠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상식'을 말하고 있었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그 상식 사이에는 끝내 좁혀지지 않는 어떤 간극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 우리의 대화는 매번 서로의 '상식'을 확인하는 그 지점에서 좌초되곤 했다.

'네티즌의 상식'이 바른 언론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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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가 웹에 둥지를 튼 이후 참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DJ 2중대' '전라도 찌라시'라는 평가에서 시작하여, '수구꼴통' '조선일보 2중대' '한나라당 알바'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최근에는 '기회주의' '변절자'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는 모양이다. 모두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기동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이야기들이다.

지난 기사를 아무리 뒤지고 살펴봐도 NPC는 예전이고 지금이고 변한 게 없다. NPC는 출범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NPC 고유의 시각을 놓아본 적이 없다. 우리가 지향하는 바, 바른 언론과 건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고, 일관된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랬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는지 모른다. 시류에 편승하여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에게 있어 NPC의 변하지 않는 자세는 충분히 '이적행위'로 비쳤을 법 하다. 극과 극을 오가는 NPC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바로 거기서 기인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NPC의 어떤 기사도 'DJ'나 '조선일보' '한나라당'을 위해 쓰인 적이 없다. 사실 지금까지 숱한 비판이 쏟아지기는 했으나, 그 가운데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비판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우리 편이 아니므로 적이다'는 패거리주의 논리가 다였을 뿐이다.

패거리주의 논리와 상식의 논리

최근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우리 사회에 상식이 부재한 탓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 우리의 부박한 '패거리주의' 문화가 있다. 패거리주의는 자기 패거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를 원천적으로 불허한다. 때문에 이러한 패거리주의에는 '의사소통 가능성'으로서의 상식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노무현 정부 들어 부쩍 유행하기 시작한 '코드론'도 우리 사회 저변에 팽배해 있는 패거리주의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코드가 맞아야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회는 건전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패거리에서만 통하는 '방언'이 상식을 대신한다. 코드가 다른 사람과의 생산적인 담론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주 "내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고 항변하곤 한다. 본래 의도가 잘못 전달되고 있다면서 전달자인 언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두번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의도가 매번 그렇게 잘못 전달되고 있다면 그것이 꼭 언론만을 탓할 일은 아니겠다. 그것은 노 대통령의 '코드'가 패거리주에 빠진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NPC가 패거리주의가 아니라 '상식'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기를 바란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패거리 논리가 아니라, 누구하고라도 유의미한 담론이 가능한 상식의 논리가 통하는 공간이기를 바란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것을 위해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언론의 길이라고 믿는다. <2003-06-01, 통신보안>


 

<덧붙이는글> 의무방어전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편법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형식이 의식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모쪼록 그래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덧2> 전혀 엉뚱한 포스팅은 아닙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머물러 뒤를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 말한 시인이 있습니다. 새로운 글쓰기가 저어될 때는 지난 글을 통해 현재의 위치를 가늠해보는 것도 무용한 일인 것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에서 리바이벌하는 글입니다. 현재 블로고스피어에서 일고 있는 여러가지 논란을 지켜보면서, 저 글의 '언론'과 '네티즌' 대신에 '블로고스피어'와 '블로거'를 넣는대도 그 의미가 크게 어긋나지 않겠다 여겨져서입니다.
2009/02/23 23:55 2009/02/23 23:55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이라는 소설이 있다. 198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전세계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다음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이 소설의 줄거리다

핵전쟁의 위험을 느낀 영국은 25명의 어린 소년들을 핵전쟁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로 옮기려 했으나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가 그만 바다에 추락한다. 부상당한 조종사와 랠프·잭·피기 등의 소년들은 무인도에 상륙한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며 랠프의 지휘에 따라 조종사를 보살피고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구조되려면 바닷가에 오두막을 지어야 한다는 랠프와 사냥을 강조하는 잭은 사사건건 대립하고, 결국 잭과 로저는 갱단을 만들어 무리를 이탈한다. 짐승을 찾아나선 사이먼이 잭 일당에게 살해되고, 섬에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소년들은 안전을 위해 잭의 갱단으로 들어가고 결국 랠프와 피기만 남는다.

문명세계의 사회관습은 붕괴되고, 인간 본성에 잠재한 권력욕과 야만성이 드러나 섬은 지옥으로 변한다. 광기에 찬 잭과 로저는 점점 더 포악해지고 피기마저 죽임을 당한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랠프와 소년들은 가까스로 영국 순양함에 의해 구조된다.
 
  
우리가 만일 저 소설 속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느쪽에 서게 될까?

사람들은 자주 박정희를 이야기한다. 비판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당게판에서도 가끔 박정희를 비판하는 분이 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소설에 빗대어 단순화한다면, 박정희가 바로 '잭'의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터닝포인트는 사이먼이 죽는 부분이다.
보다 정확히는, 사이먼의 죽음을 통해 ' 섬에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대목이다.

박정희는 군중을 다스릴 줄 알았다. 소설 속의 잭처럼. 박정희는 끊임없이 '소문'을 만들어냈고, 그 소문이 두려워서 군중은 박정희에게 순치되어갔다. 박정희나 잭이나 둘 모두 그것이 '필요악'임을 내세웠다(중략). 그러나 모든 군중이 그 소문에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소문의 진실성에 회의하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박정희가 기초한 것이 제4공화국 헌법, 즉 우리가 '유신헌법'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헌법이다. 유신헌법이 비난 받는 이유는 여러가지(과정상-내용상)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헌법상에 있는 '긴급조치 조항(제53조)'은 대표적인 비판 대상이다. 이 조항은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막고 사고와 행동까지를 제약하는 유신헌법의 독소조항이다.

다음은 제4공화국 헌법상의 긴급조치 조항(제53조)이다
① 대통령은 천재 ·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 ·외교 ·국방 ·경제 ·재정 ·사법(司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② 대통령은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③ 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를 한 때에는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④ 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는 사법적(司法的)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⑤ 긴급조치의 원인이 소멸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⑥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긴급조치의 해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으며,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
 
이 긴급조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당시 유신체제에 저항하던 국민들을 탄압하는 데 활용되었다.

당게판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는 당원들의 목소리가 높다. 나 또한 그 주장이 나오고 있는 배경에는 공감을 표한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나는 당게판 폐쇄 주장에 반대한다.

첫째, 지금 당게판의 문제로 꼽고 있는 '당게판 황폐화' 문제는 엄밀하게 말해 당게판의 문제가 아니라 당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게판을 없애거나 옮긴다고 해서 해소되거나 사그라질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둘째, 게시판은 자체적인 정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때문이다. 게시판이 정화 기능을 갖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게시물 자체가 하나의 공개적인 기록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당게판에서 몇 가지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해온 것은 그것이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당내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어서다. 지금 당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누가 뭐를 어쨌다더라' 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누군가'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를 못 하다.

소문을 들은 반응은 이내 '글마 나쁜 넘이네'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방식으로 확대재생산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두가 믿는 '사실 아닌 사실'이 되어버린다. 당사자는 변명 한번 못 해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하의 나쁜 넘'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당원간 반목 및 당내 분란이 일어나고 있는 방식이다. 이건 정상적인 시스템이 아니다. 당사자에게 한번 확인만 해도 금세 확인될 일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소문이 유통되는 통로 자체가 이해관계에 따른 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적인 통로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당게판을 폐쇄하자니..

목전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혹은 목전의 유용함을 위해 더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고 해서, 바르지 않은 일에 동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제안] 당게시판을 지키기 위해 게시판 폐쇄를 제안합니다
[동의] 당을 죽이고 있는 게시판 당분간 패쇄합시다
[결정] 다수의 폐쇄 동의를 받아들여 게시판의 한시적 폐쇄 안건을 수렴하겠읍니다

 
하지만 아는가? '긴급조치'를 포함하고 있는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찬성(91.5 %)으로 확정되었으며, 대통령 취임일에 전 국민의 경하를 받으며 공포·시행되었다는 사실을. <2004-03-02>




<덧붙이는글> 참고로, 당을 살리기 위해 당게판 폐쇄가 불가피하다고 부르대던 이들은 당게판 폐쇄 후 같은 논리로 곧 당 홈페이지를 폐쇄해버렸다. 그런 다음 그들이 비판하던 이들과 함께 당 자체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저들이 필요로 한 것은 당 그 자체 혹은 당의 정신이 아니었다. 그 정신이 새겨진 간판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적인 영달을 위해 그 간판이 필요했고, 결국 그걸로 한 자리씩을 얻어 떠나갔다. 그 출발점이 소통의 차단과 소문의 유통이었고.

<덧붙이는글>
블로고스피어가 소문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최근 들어 부쩍 그 속도를 더하는 성부르고. 정보가 유통되는 방식이 투명하지 않은 탓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블로고스피어의 근간은 블로그다. 블로그의 힘은 그 투명성에 있다. 블로그는 라이프니쯔가 말한 '모나드(단자)'와 같다. 블로그 각각은 서로 독립하여 존재하지만, 그 투명성으로 인해 상호 소통한다.

블로그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가 유통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블로고스피어의 일이 아니다. 투명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문'의 형태로 작동하며, 편가르기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늘 듣보잡는 바로 그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굳이 블로그라는 타이틀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블로그의 가장 큰 특성 가운데 하나-어쩌면 본질이라 할 수 있는-를 저버린 곳에서 굳이 블로그 운운할 이유는 없는 일이겠다.
 
2009/02/22 23:53 2009/02/22 23:53
태터앤미디어(TNM, 이하 티엔엠)가 입장을 발표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블로그마케팅에서 앞으로는 "모든 글의 첫머리에 아래와 같은 문구를 적시, 해당 글의 기업 후원 사실을 알리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블로거들은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일부는 '항복 선언'으로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이로써 그동안 블로고스피어를 뜨겁게 달군 태터앤미디어의 광고리뷰 사태도 일단락이 되는 모양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비난과 욕설이 난무하던 문제의 논란이 겨우 이 정도로 사그라질 문제였단 말인가? 솔직히 좀 어이가 없다는 느낌이다.


이 글은 0000의 블로그 체험단에 참여하여 ##를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체험단 활동은 0월 ~ 0월까지 0개월 동안 진행됩니다.


앞으로 마케팅에 참여하는 티엔엠 소속의 블로거는, 위와 같은 문구를 모든 글의 첫머리에 넣도록 하겠다는 게 이번 논란에 대해 티엔엠이 내놓은 입장의 전부다. [footnote]이밖에 특별히 언급된 다른 얘기는 없어 보인다. '블로그마케팅에 대한TNM의 입장'도 발표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것은 이번 논란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얘기들이다.[/footnote] 그러니까 티엔엠의 이번 대책이란 기껏, 이전에는 글 아래쪽에 넣던 '광고리뷰' 사인을 글 위쪽으로 올리겠다는 게 다인 셈이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항복선언'이 된다는 말인가? '이 글은 광고성 글입니다'는 바이라인이 위에 달리는 것과 아래에 달리는 것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얼마나 있다는 말인가?

티엔엠의 입장 발표에 대해 '티엔엠의 항복선언이다' 혹은 '이로써 문제가 해소되었다'고 말하는 일부 블로거의 반응에 선듯 공감하기가 어려운 건 이 때문이다. 나아가 <장자>의 저 '조삼모사' 이야기가 생각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고.


TNM 사태와 장자의 조삼모사

TNM 사태와 장자의 조삼모사




2009/02/21 23:42 2009/02/21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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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뒷북인가?

이 글은 원래 묻혀야 했을 글이다. 이미 타이밍을 놓친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자 <동아일보> 사설의 '언론사 길들이기'라는 말이 다시 눈에 밟혔다.

대통령의 '반성' 이후 날이면 날마다 재탕 삼탕으로 그 빛나는 승전보를 우려먹는 언론 방송의 행태에 밥맛이던 차였고, '언론단 신설'과 '방송법 제정' 등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자기 방어와 자기 이익 챙기기를 보는 일에 더욱 맛이 가 있던 차였다. 제쳐두었던 어설픈 글발을 다시 올리기로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발생한 몇몇 사안에 대처하는 정부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언론의 지적은 옳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고언에도 공감해마지 않는다. 원론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얘기들이다.

민심에 귀기울여 바른 정치를 하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신문 방송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개운치 않은 구석이 없지 않다. 너무 호들갑스럽고 너무 과대 포장하는 인상이다. 대통령 당선과 더불어 그리고 그 이후 상당 기간 '신용비어천가' 부르기를 마다 않던 신문 방송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모든 사안에 침소봉대로 일관하는 저들의 행태에 행여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인가?

불협화음과 시행착오

현 정부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룬 정부다. 몇 번의 정권 교체기를 거쳤다고는 하나,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의 정권 아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기간 특정한 세력의 손아귀에 있던 권부가 바뀌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은 하나의 집단에서도 책임자가 바뀌는 경우에는 불협화음과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것이 한 국가인 경우에야, 그리고 그런 경험이 전무한 마당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기왕의 기득권 세력에 의한 상당한 저항과 초보 운전을 해야 하는 권부의 미숙함이 있게 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상당한 불협화음과 시행착오가 있었음을 익히 듣보아 온 터다. 권부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구안기부의 업무를 인계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매 사안마다 시종일관 '공작'임을 주장하며 딴지를 걸고 나서는 거대 야당의 필사적인 저항, 국민연금제도 시행이나 한일간 어업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현 정부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대처에 이르기까지 숱한 불협화음과 시행착오를 봐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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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공기(公器)임을 자처하는 언론이 취해야 할 길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각 사안마다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차분한 대안의 제시여야 할 것이다. 다시말해 사안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달려들어 선동적으로 까발리는 방식이 아닌, 사태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냉철한 파악이어야 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언론 매체에서 이런 방식의 대응 자세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오히려 떠도는 루머에 온갖 개연성을 엮어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내기에 바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기에 바쁜 모습이다. 예컨대 최근 언론은 고관집 절도, 고급옷 로비, 검찰 파업유도, 김태정 유임, 손숙 격려금 수수 등과 같은 사안들을 들어, 이것이 현 정권이 도덕성을 상실한 결과라면서 연일 질타해마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현 정권의 도덕성 탓만으로 돌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각론상으로야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고 일단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일이겠다. 하지만 총론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문제의 본질은 결코 거기에 있지 않다. 그것은 현 정부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며,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당장 해소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문제가 아닌 때문이다.

마녀사냥과 대통령의 반성

더욱이 현 정부 들어 지난 1년여 동안 이 나라의 최우선 과제는 IMF의 구제금융 체제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이전의 구악(舊惡)에 충분한 힘을 쏟을 여력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 아니던가? 그런 정부에다 대고는 국가 경제의 위기를 벗어나면서 동시에 이전의 모든 사회악에서 왜 자유롭지 못하느냐며 정권의 도덕성을 운운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그렇지만 신문과 방송은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정권의 도덕성과 연관시키기에 주저함이 없으며, 이는 결국 여론에 귀기울이지 않는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에 문제가 있다는 논리로 대통령의 반성을 촉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 여론을 따르겠다는 대통령의 '반성'이다. 

문제의 근인(近因)이야 현 정권의 어설픈 정국 운영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을 들어 여론몰이를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는 관료들의 도덕성에 대한 각성이나 오랫동안 이어져온 구악(舊惡)의 척결이 이뤄질 수 없다. 그것은 사태의 해결보다는 오히려 일시적인 미봉책만을 요구하고 기회주의자만을 양산하는, 혹은 혼탁한 사회 상황을 연출하여 사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드는 그런 결과만을 낳게 할 뿐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근본이 되는 원인(遠因)까지를 찾아 그것을 밝혀야 한다. 지금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정권만을 탓하는 것은, 그리하여 결국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방식은 결과적으로는 대통령 일인 체제로 정국을 운영하라는 주장에 다름 아니고 이 나라를 다시 비민주적인 총통 체제로 돌리라는 주문에 다름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의 해결은 언론에서 주장하듯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에서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혁신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언론은 그러나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분석은 외면한 채 온갖 추측과 재단으로 여론 만들기에만 열심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외환위기를 초래한 장본인들 곧 이전의 기득권 세력과 상업주의에 함몰되어 사회적 공기로서의 사명 따위는 내던져 버린 선동가로서의 언론을 만나게 되며, 대통령의 '마녀사냥' 발언에서 '반성'에 이르기까지 언론이 보여준 일련의 태도란 기득권 세력과 연합한 상업주의 언론의 정부와 '맞짱뜨기' 혹은 '대통령 길들이기'가 아니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된다.

누구에 의한 여론인가?

언론을 위시한 기득권 세력은 말한다. 초창기에는 그렇게 잘 나가던, 그 인기 좋던 정권이 지금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철저히 반성하라고. 그러면서 언론과 방송은 이런 모든 사태가 자신들이 전하는 민심과 여론을 수렴하지 않은 탓에 빚어진 일이라며 몰아 부친다. 거의 모든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여 들끓는 민심과 여론을 전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둔하고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들끓는다는 민심과 여론을 실생활에서 듣보기란 쉽지 않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일상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인 걸로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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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대체 신문과 방송에서 저렇게 떠들어대는 민심과 여론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여론의 정체는 무엇인가?

도대체 그 여론은 누가 만들어내고 누가 전파하는 것인가? 그 여론이란 행여 철저하게 그들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대 재생산된 것은 아니었던가?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여론에 얼만큼이나 근접해 있는 것인가? 그들이 대통령의 여론 수렴과정에 문제가 있다면서 지적해마지 않는 여론 조사의 허구성이란 기실 그들에게 더 유효한 것일 수 있지는 않는가? 

이미 실기(失機)한 사안이기도 한 터이므로 두 가지 경우만을 예로 들어 보겠다. 먼저 대통령의 해외 순방 기간 동안에 있었던 옷로비 의혹을 다루는 언론 방송의 태도이다. 그들은 우선 이 사안이 국민을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지게 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그런 다음 대통령의 해외 방문과 관련한 내용은 뒤로 한 채 연일을 두고 말 그대로의 '의혹'과 추측 기사들로 거의 모든 지면과 시간을 할애한다. 그리고 이런 언론과 방송의 태도는 손숙 환경부 장관의 격려금 수수 건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안들이 과연 그토록이나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해야 할만큼의 중차대한 사안들이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겠지만 당시에는 그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사안들이 적지 않았다. 한편 그들의 보도 자세는 과연 냉정하고 객관적인 것이었는가? 이것 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 옷로비 사건은 온통 추측들로만 이뤄진 짜맞추기식 이야기가 판을 쳤고, 격려금 수수 건은 억지 춘향식의 논리로 일관한 것이었다.

언론과 방송의 뉴스 만들기

신문과 방송의 이같은 태도를 일부에서는 '언론의 집단적인 보복'이라는 관점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개각 과정에서 정부가 특정 언론사에만 입각 예정자 명단을 흘렸고, 여기에 반감을 가지고 기회를 엿보던 언론이 집단적으로 들고 일어난 결과라는 것이다. 만일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역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상업주의와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언론 방송의 뉴스 만들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동아일보 사설 확 달라졌습니다

요즘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는 '동아일보 사설을 읽지 않고는 화제에 낄 수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동아 사설은 어떤 성역도 없이 할 말을 제대로 하기 때문에 속이 시원하다고들 합니다. 동아일보의 사설은 마치 통나무를 쪼갤 때, 도끼를 들어 결대로 조각내듯이, 있는 사실을 결에 따라 조리있게 분석하고 문제점을 들추어 냅니다. 권력이건 금력이건 가리지 않고 동아일보의 사설은 그 문제점을 과감히 파헤치고 비판해 나갑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 시시비비(是是非非)
언론의 사명입니다 - 창간 79주년 동아일보



마이다스 동아일보의 '사설' 코너 꼭대기에 걸려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우리의 여러 의문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먼저 언론이 그렇게 추앙해마지 않는 '오피니언 리더'의 정체성과 관련해서다.

위의 글에 따르면, 여론을 형성하고 전파하는 '오피니언 리더'란 언론을 통하지 않고는, 다시말해 언론에서 제공해주는 해설을 통하지 않고는 '화제에 끼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곧 이 글의 맥락에서 드러나는 '오피니언 리더'는 사태를 보는 자신의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한 채, 기껏 언론 매체의 주의주장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에 종사할 뿐인 이들인 것이다. 

여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요즘 부쩍 많이 듣보게 되는 말 가운데, 네티즌 의견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네티즌이란 기실 누구를 일컫는 것인가?

통신을 이용하거나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해본 사람이라면 쉬이 동의할 수 있겠듯이 그들 대부분은 아직 충분한 비판 능력을 가진 이들이 아니다. 철저하게 미디어 세대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어떤 사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보다는 순간적인 감성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그들의 주의 주장이란 것도 기실 각종 미디어에 의해 형성된 것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신문 방송의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경향성이 이러한 네티즌의 감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며, 아울러 네티즌의 이야기가 언론 매체의 주의주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어딘가에서 많이 듣본 이야기들이라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은 이들의 주장들까지도 여과없이 민심과 여론으로 기꺼이 원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최근 모든 언론 매체에서 활용하고 있는 옴부즈맨이라는 피드백 장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옴부즈맨이라는 이들은 언제나 정해져 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이란 하나같이 해당 매체의 주장을 완곡하게 대변하는 데 머물러 있다. 사소한 몇 가지를 지적하는 듯 하면서도 기실 핵심적인 이야기에 이르면 결국은 언론의 주의 주장을 그대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기사 해당 매체의 논조와 심히 다른 글이라면 어떻게 거기에 함께 실릴 수 있을 것인가?

인터넷시대의 언론매체는 네티즌 독자와의 영합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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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위의 글이 시사하는 바는 언론이 철저하게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은 뭔가 시원한 말을 듣고 싶어하고, 언론은 바로 대중의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매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이 글은 보여준다.

최근의 각 언론 매체는 독자 및 시청자 끌어안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거의 매일 현관의 초인종을 누르는 것은 신문 지국의 종사자들이고 날이면 날마다 경품 축제를 벌이고 있는 곳은 방송과 신문 인터넷 사이트들이다. 새로운 디지털 문명 세기로의 전환을 앞두고 기왕의 언론 매체에 대한 위기론이 대두되는가 하면 일순간에 채널을 바꾸어버리는 리모콘 타임이 지배하는 현 상황 앞에서 독자나 시청자를 확보하지 못하는 신문이나 방송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 매체가 독자나 시청자를 붙잡기 위해 취하고 있는 방식은 바로 위의 '선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선명성이다. 선명성 경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선명성 경쟁이 인지도를 높이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일 수 있는, 그러나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선정성과 선동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그리하여 대안없는 폭로성으로 일관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언론의 자유라 일컫는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 '죽이기'로 나가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사회, 리스트 정치, 폭로 정치가 일상화되어버린 사회 현상들이란 어쩌면 언론과 방송에서 앞서 부추긴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급옷 로비 사건'과 관련하여 대통령이 여론을 언급하자, 거의 모든 언론 매체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여론 조사가 얼마나 허구적인 건지를 밝히는 온갖 자료들로 도배를 하면서 대통령의 언급에 제동을 걸었다. 앞서 예로 든 네티즌과 옴부즈맨이 총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의견을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론을 조작하지는 못한다. 적어도 그것이 독재 체제가 아닌 한에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언론은 얼마든지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하고싶은 이야기란 단적으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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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길들이기'와 '대통령 길들이기'


대통령의 '마녀 사냥' 발언에서 시작하여 대통령의 '반성'으로 끝이 난 여론 게임에서 언론은 철저하게 여론 만들기로 일관하였고 그리고 지금 그 성공에 쾌재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여론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의 의견을 좇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최선인 것은 아니다. 이는 역사가 증거하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그 다수라는 것이, 그 다수의 생각이라는 것이 결국 누구에 의해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인가에 주목하게 되면 대중정치의 강조를 외치는 언론의 행태에는 마땅히 의혹과 경계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거의 반 세기 이전에 마르쿠제는 자신의 주체적 관점을 잃은 채 대중에 함몰되고 마는 '일차원적 인간'을 언급한 적이 있고 그보다 더 이전에 오웰은 '1984년'과 '동물농장'으로 여론몰이의 위험성에 대한 경종을 울린 바 있다. 저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 주체가 되는 거대 권력이란 이제 더 이상 마르쿠제나 오웰이 가리키고 있는 바의 정부가 아니다. 오늘날의 거대 권력이란 바로 여론을 만들고 그것을 전파하는 언론 매체는 아니겠는가?

이번에 그 실체를 드러낸 대통령과 언론의 패권 다툼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결과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옷 로비 의혹 사건이 그토록 대단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중대사안이었다고 여기지 않으며, 그 사안으로 인해 그들이 단정하는 바, 모든 국민이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 듯이도 보이지 않는 때문이다. 서민들의 반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거기에도 실은 언론이 깊이 관여한 바가 적지 않은 탓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요즘 언론과 방송을 통해 가장 흔히 듣볼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언론 길들이기'라는 말이다. 방송법 제정을 통해 대통령이 언론을 장악하려 한다면서 신문과 방송에서 주조해낸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언론이 여론을 빙자하여 혹은 여론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대통령 길들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할 것이다. 

대중정치를 위하여

민주 사회의 정치란 원칙적으로 여론에 입각해 이뤄져야 한다. 이런 원칙론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중세의 마녀사냥에서 보듯이, 불순한 의도에서 만들어지고 전파되는 여론이란 문제의 초점을 흐리고 진실을 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측면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여론의 정체에 대해 주목하고 경계해마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그것이 바로 최근에 벌어진 대통령과 언론의 여론 게임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유다.

여론에 의한 정치가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여론을 형성하고 전하는 과정에 신뢰가 담보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언론 매체에 의해 거론된 여론이란 신뢰성보다는 상업성에 우선하여 만들어지고 전파된 것이었으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대중과 영합한 사이비 여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언론 매체가 비단 금권과 권력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상업주의에 바탕을 둔 독자, 시청자와의 영합에서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올바른 여론을 위해서는, 건전한 언론 매체를 위해서는 그것이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때문이다.  <1999-07-13>



 
2009/02/20 21:09 2009/02/20 21:09
흘러간 옛 노래 하나를 듣다가도 문득 어떤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고,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뒤적이거나 때로는 그 책의 표지만 봐도 불현듯, 이젠 세월의 한 켠에 묻어버린, 그래서 사뭇 잊고 지내던 아득한 지난 시절의 기억들과 만나 새삼 거기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어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들으면서도 그랬습니다.

모든 것이 빛나기만 하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견뎌냈다'는 것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을 듯싶은 어떤 시기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그 시간들이 바로 눈앞에 선연히 떠올라 끝없이 이어져갔습니다. [footnote]나이가 들었다는 명징한 증거일 터다.[/footnote]

그리고 그 어느 어름에 김정훈의 유고집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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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혹은 이 책에 얽힌 얘기를 다 하자면 몇 날 며칠 밤을 새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시쳇말로 소설을 써도 몇 권은 됨직한 사연이 있어서입니다. 우선, 이 책은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footnote]내가 10권 이상을 선물한 책이기도 하다.[/footnote] 그래서 이 책을 보면 먼저 그 선물 준 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슴 한켠이 싸아하니 아파옵니다. 아픈 일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 시절의 누구나가 그렇듯이 많이 방황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하 략)  

이 책은 사제 서품을 3개월 앞두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노르 케테 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에 바로 어제 영면한 김수환 추기경이 있습니다.


김정훈 부제는 -사제품을 불과 몇 달 앞둔 그였는데-오스트리아 인스부루크 어느 산에서 불의의 조난으로 돌아오지 않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훈이와 내가 각별한 친분을 맺은 것도 아니다.단지 오스트리아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외국 여행 중에 국내에 있는 신학생들보다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기회가 한두 번 더 있었을 뿐이다.그러나 정훈이는 말이 적으면서 인상을 깊게 남기는 젊은이였다. 그는 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었고,언제나 참된 것을 찾는 철학도로 보였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한 법이다. 그러기에 그는 남달리 산을 좋아했던 것 같다.오스트리아 티롤(Tirol)지방의 눈 덮인 산들, 알프스의 높이 솟은 줄기는 정말 아름답다. 맑은 인품에다가 고독과 사색 속에 진선미를 찾는 사람은 그 수려한 산들과 대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곧 그의 일주기를 맞이하게 된다.우리들 눈 앞에서 그는 갔으나 우리들 마음 속에는 오히려 더욱 깊은 의미로 그는 살아 있다. 비록 김 부제는 사제품을 받지 못했으나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그 산에서 스스로를 깨끗한 제물로 바쳐졌으니 보다 값지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 김수환 추기경 서문 중에서


김정훈이 누구길래 추기경이 직접 서문까지 썼을까?

여전히 까칠한 성격이었는 데다가, 하늘 아래 것들은 모두 눈 알로 보고 살짝 시건방 떨기에 한창이던 내가 저 책을 선물로 건네 받으며 삐딱하게 내뱉은 첫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저 행동은 얼마나 치기어린 행동이었는지요. 그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저런 내 허세는 이내 무너져내리고 말았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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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는 김정훈이 생전에 쓴 일기와 메모들, 그리고 주고받은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즘은 일기도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일기는 한 사람의 가장 내밀한 기록입니다. 하물며, 자신이 사고사할 지도 모르는 이가 구도의 길에서 쓴 일기임에랴.

일기에는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 왜 이 땅에 사람으로 왔는지, 신앙인으로서 갖는 인간적인 갈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몸짓들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한 인간의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예컨대, 이런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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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법한 내용입니다. 신부행을 택한 이기에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 정리에서 힘들어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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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을 이어지고 있는 이같은 모습에, 이를 지켜보다 못한 신부가 한마디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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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이런 메모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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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책에는 고 김정훈이 직접 그린 여러 장의 수채화가 있습니다. 그림은 고인을 그대로 닮은 듯이 하나같이 수채화 특유의 담백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음은 어제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이 책에 서문으로 실은 4쪽 분량의 글 가운데 처음과 마지막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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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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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글> 이 포스트는 원래 어제 올리기를 예정한 글이었으나, 다른 글이 대신 올라가는 바람에 뒤로 밀렸습니다. 점심 후에 곧 외근을 나가야 하는 터라, 쓰다가 만 글을 그냥 올립니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글이 계속 떠 있는 게 뵈기 싫어서입니다. 미처 정리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얘기는 오늘 밤에 계속해볼 생각입니다. 인스브르크와 오지리는 개인적으로도 연이 있는 터라 하고픈 말이 꽤나 많은 포스팅입니다.  

<덧2> 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베텔불프 산 정상에 올라 눈밭에 남긴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그리고 김 베드로"에서 딴 것이라고 합니다.

2009/02/19 11:38 2009/02/19 11:38

황당하다.

여느 때처럼 댓글 확인을 위해 댓글 알리미의 링크를 누르고 들어가니, 이상한 사이트가 뜬다. 다시 해봐도 마찬가지다. 내가 쓴 댓글에다 다른 사이트의 링크를 걸어둔 건가싶어서 블로그의 주소를 직접 주소창에 치고 들어갔다. 역시 앞서와 같이 다른 사이트가 뜬다. 이상하다 싶어서, 얼라 컴터를 켜고 접속해봤다.

아.. 그제서야 알았다. 아이피를 막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고, 내가 쓰는 아이피로 자기 블로그에 들어오면 그걸 아예 다른 사이트로 보내버린다는 것을. 당혹스럽다. 댓글을 막거나 트랙백을 차단한다는 건 듣보기라도 한 일이지만, 이건 도대체 듣도 보도 못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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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드는 생각은 내가 얼마나 싫었으면 그랬을까 내가 쓰는 글이 정말 문제가 많은 모양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황당한 일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크게 사교적이지 못하다는 거 잘 알고 있다. 글도 꽤 까칠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특정인에게 이 정도로 큰 증오심(그렇다. 이건 거의 증오에 가깝다)을 안겨주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럴만한 위인도 못 된다. 그런데 왜 이런, 어디 기네스북에서나 들어봄직한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도 소통을 중시한다는 유명한 파워블로거가.

게다가 나는 이 블로거에게 특별히 뭔가를 잘못한 기억이 없다. 그의 포스트를 두고 글을 엮은 적은 있지만 그게 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그 역시 반론 글을 썼고 나로서는 썩 만족스럽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 글이지만 그랬으면 되는 일이다. [footnote]비판을 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먼저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한다. 이건 상식이다. 비난에 가까운 온갖 비판을 일삼으면서도 자기 스스로에 대한 비판에는 한사코 귀를 막거나 못 견뎌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판을 운위할 자격이 없는 자이다.[/footnote]

나를 두고 저 블로거가 '싸이코패스'니, '인간'이 아니니 등의 험담을 하는 것 - 여기저기서 여러 번 봤다. 그러나 뭐 그럴 수도 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내가 싸이코패스' 아니니 된 일이고 그래도 어쨌거나 내가 '인간'이니 '인간' 아니라 한들 딱히 뭐라 할 꺼리도 안 되는 일이다. 시쳇말로 '그냥 나를 까고싶은가 보다' 하고 지켜볼 뿐이다.

그러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되는 일을 어떻게 이렇게 극단적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걸까?  인간이 너무 미워서? 미움이 강하면 이런 일을 할 수도 있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미움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렇다.

앞으로는 그냥 내 블로그에 글을 쓰지 말라고 할 수도 있고(댓글로 남길 수도 있고 메일로 보낼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내 블로그에는 접속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이트로 보내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생각까지를 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상대의 아이피를 일부러 확인하고, 그 아이피에 대해 다른 사이트로 날아가라는 코드를 넣고 하는 수고까지를 기꺼이 하게 한, 저 독한 증오심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못 돼먹어서?  그렇다면, 그렇다고 치자. 나는 못 돼먹은 넘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쳐도 오늘 저 블로거가 취한 행동은 무서운 행동이고, 참 나쁜 행동이다. 한 사람의 블로거 입장에서 말하건대,


그는, 참 나쁜 블로거다.



<덧붙이는글>
무엇보다, 저 이는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는 알고 있는 걸까? 이명박의 문제를 그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가, 이게 얼마나 정보를 왜곡하는 일인지, 이게 얼마나 폭압적인 행위인지,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 결과에 이르게 되는 일인지는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무서운 일이다. 저 이가 정보를 다루는 작은 권력이라도 가졌을 경우 무슨 짓을 했을지를 생각하면 끔찍하기까지 하다. 저 이에게 단지 소스 코드 고치는 정도의 재주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지금 당장 그에게 손톱만큼이나의 권력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안도해도 되는 것일까? 저 이가 이제 더 이상은 이보다 더한 짓은 안 한다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럴까? 모를 일이다. 피씨의 방화벽부터 다시 점검해봐야 할 터다.  

more..



2009/02/18 01:25 2009/02/18 01:25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는군요.
그러고보니, 이제부터는 故김수환님이시네요. 오늘 떠났어도 '이미 옛사람이 된'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림/네이버)


향년 87세.

같은 한 세상을 지내면서도 참 많은 걸 남기고 가는 분입니다.
뉴스를 뒤적이다보니 남긴 발자취를 더듬는 것만으로 한 두 지면으로도 벅차 하는 모습입니다.

내 기억에도 김수환 추기경이 있습니다.

"모든 좋은 일은 쉽지 않은 법입니다."


자신을 지켜가는 일이 너무 힘들어 그만 포기하고싶기까지 하던 어느 해,  
티비로 중계되는 신년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한 말입니다.

저  발언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 말 한마디에 힘을 입고, 그 시절을 견뎌냈던 기억만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고맙다."


오늘, 김수환 추기경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오랜동안 가슴에 담고, 되뇌이게 될 작별 인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며칠 전에 우리집 아이가 물었습니다.

- 아빠, 아빠가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야?
- 없어.
-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 없어.
- 그럼, 인상깊은 사람은?
- 칸트,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
- 누군데?
- 세 사람 모두 철학자야.
- 그게 다야?
- 아니. 세 사람 모두 혼자 살다 죽었고, 죽을 때 모두 같은 말을 남겼지.
- 그게 뭔데?
- 에스 이스트 굿. "좋다"는 말이야.
- 응.. 멋지구나.
- 그건 멋지다고 하는 게 아니야. 아름답다고 하는 거지.


<덧> 만일 저 세 사람이 철학자가 아니고 종교인이었다면
저들이 남긴 마지막 말 또한 '좋다'가 아니라 '고맙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2009/02/17 17:36 2009/02/17 17:36

요 며칠 뉴스를 거의 못 봤습니다. 일도 일인 데다가 사무실 이전 건까지 겹쳐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야 했던 탓입니다. 오늘 저녁, 잠깐 웹서핑을 하던 중에 우연히 기사 하나를 봤습니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궁금해하던 용산참사의 세입자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기사였습니다.

기사 내용 가운데 팩트가 있는 부분만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용산 세입자들은 대부분 재개발 계획이 확정된 이후 들어온 사람들이다.
- 전철연 소속 세입자 23명 가운데 재개발 사실이 확정된 이후 들어온 사람이 20명이다.
2. 철거 확정 지역이라 사실상 권리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3. 보증금도 세입자의 주장과는 달랐다.
- 보증금 8000만원이라고 주장한 집은 2004년에 보증금 5000만원,
- 2006년 재계약 때는 보증금 2300만원이었다.
-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0만원도 있었다.
4. 임대차계약서에는
- 1) 철거가 시작되면 바로 가게를 비우고, 2) 수리를 하지 말며,
- 3) 굳이 한다면 그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특약 조항과 각서까지 있었다.
5. 5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는 주장도 사실과 달랐다.
- 실제로 제시된 보상금은 8000만원이 넘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2044358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 ··· 21147751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11109


기사를 보면서 좀 허탈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6명이나 앗아간 사건인데,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기사를 쏟아내면서 언론은 왜 지금까지 저 정도 팩트 하나도 취재하여 전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지난번 글에서 내가 MBC PD수첩에 바란 것도 저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의견을 전하는 분이 없지 않지만, 지금도 나는 이번 참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래서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이같은 팩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이르는 가장 분명한 길이고,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는 첩경이라고 보는 때문입니다.
 

MBC PD수첩

MBC PD수첩, 당신들은 결코 '우리시대의 정직한 목격자'가 아닙니다!


물론 더 근본적인 원인을 파고 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재개발 일반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환경 일반, 산업화 일반, 사회 구조 일반의 문제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삶의 질의 문제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까지도 물을 수 있고, 또한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입니다. 그리고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일차적 자료가 팩트여야 함은, 곧 세입자에 대한 분석이어야 함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당사가가 곧 그들인 때문입니다.

하지만 MBC PD수첩을 비롯하여, 이같은 사실을 제대로 취재하여 보도한 언론 기사는 없었습니다. 그저 일방이 주장하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받아 전하기에 바빴을 뿐이지요. 이 뿐이라면 그러나 굳이 PD수첩을 비판하는 포스팅까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내가 PD수첩의 "용산 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 편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래서 "PD수첩, '편집된 사실'은 '정연한 거짓'의 다른 말이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이 참사를 자신들의 입맛(혹은 이익)에 맞춰 비틀어 전하고 있어서 였습니다.

지금도 나는 PD수첩이 '편집된 사실'로 '정연한 거짓'을 만들어 전한 나쁜 방송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글> PD수첩이 왜 저런 짓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지(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전합니다)에 대해서는 심증만 있을 뿐(언론법 문제 등), 물증을 찾기 힘들고(그들이 이실직고할 일은 없을테니) 무엇보다 그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므로 접는다 하더라도, PD수첩의 저런 짓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만은 다른 포스팅에서 곧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덧2> 덧붙여, 옮긴 기사가 사실이라면 이 부분에 대해 지금까지 '이른바 진보' 매체가 쏟아낸 그 많은 기사와 주장들은 모두 거짓에 근거한 기사고 주장이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위에서 '허탈했다' 말한 까닭입니다.


2009/02/16 04:18 2009/02/16 04:18
01. 행복과 불행

이 세상에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스한 체온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딘가 추운 데가 있어야 한다.
비교할 대상이 없이는 그 진미을 맛볼 수 없는 법이다.

만일 지난 날 오랫동안 행복했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행복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02. 인생은 끝이 없는 항해

우리는 배에 올랐다. 돛을 올리고 배는 강을 따라서 내려갔다.
강의 어귀에는 마을이 솟아 있고, 얼음을 뒤집어쓴 나무들이 차갑고 맑게 갠 하늘에 빛나고 있었다.
선창가에는 둥근 통들이 산처럼 쌓여 있고,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다 돌아온 포경선들이
소리도 없이 떼를 지어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통장이들의 통 만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새로운 항해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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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그토록 위험한 원양 항해가 한번 끝났다는 것은 곧 두번째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번째가 끝나면 다시 세번째가 시작되고...
이렇게 해서 다음에서 다음으로 그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끝이 없다. 아니,
세상사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렇듯 (끝이 없고 그래서) 견디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03. 위대함

비극적으로 위대한 모든 인물은 그들 특유의 어떤 병적인 개성과 운명을 소유하고 있다.
 
큰 뜻을 품고 있는 젊은이들이여!
모든 인간의 위대함이란 병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명심하라!


04. 진정한 용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란
위험에 직면해서 그 위험을 공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며,
무서움을 모르는 자는 겁장이보다 더 위험한 인간이다.

용기란 단순하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적인 것이 아니며,
무엇인가 물러설 수 없는 환경에 처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때문에 그것은 아무 때나 쓸모없이 남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05. 동료의 결함

인간이란 누구나 야비하고 나약한 면을 가진 존재인지 모른다.
이상을 품고 있는 인간은 참으로 숭고하고 찬란하며 장대하고 현란한 존재다.
이런 사람에게 약간의 수치스러운 결함이 드러나는 경우,
동료라면 아무리 값비싼 옷을 입고 있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벗어 결함을 덮어주어야 한다


06. 모욕

손으로 한번 얻어맞는 것은 매로 오십 번을 얻어맞는 것보다 더 화가 치미는 법이다.
모욕이란 살아있는 것들이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07. 카인이 아벨을 죽인 곳

자, 링은 만들어졌다. 이 세상이 바로 링인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곳도 바로 이 세상의 한복판이었다.

멋진 얘기다. (싸운다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신은 어째서 세상에 링을 만들게 했단 말인가?


08. 프로메테우스

스스로의 치열한 의식에서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된 인간,
그대의 심장은 영원히 독수리의 먹이가 되었고,
그 독수리야말로 바로 그대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09. 죽음

우리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참다운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쳐다보며
흙탕물을 가장 맑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내 육체는 나의 보다 훌륭한 부분의 찌꺼기인지도 모른다.
내 육체를 누군가가 가져가고 싶다면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내 영혼을 산산조각 내는 일은 주피터 신으로서도 할 수 없을 것이다.


10. 양심

양심은 상처와 같은 것이며,
이 상처의 출혈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란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11. 종교

나는 모든 사람들의 종교적인 의무에 대해서는
비록 그것이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짓이더라도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는 성품이다.
예컨대 개미떼들이 독버섯에 대해서 숭배를 한다고 해도 이를 경멸하지 않는다.

또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다른 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굴한 노예 근성을 가지고,
어떤 지주에게서 농토를 소작으로 빌려 경작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지주가 죽은 다음 그 지주의 흉상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이 비굴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2. 심판

지금 당장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
그런데도 그때 죽음과 심판을 생각하라고?
돛대 세 개가 뱃전에 마구 부딪치면서 연방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리고 파도가 앞뒤로 머리 위를 넘나드는 판에, 뭐?

죽음과 심판을 생각하라고?

아니, 나는 그때 죽음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어.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어.
에이헤브 선장이나 나나 모두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제일 가까운 항구에 닿을 수 있을까?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야.


13. 교훈

번뇌하기보다 명성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화가 따른다.
선 그 자체보다 선이라는 이름을 더 바라는 자에게는 화가 따른다.
이 세상에서 치욕을 감수할 용기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따른다.
구제를 받을 수 있음에도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따른다.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하면서도 그 자신은 무뢰한인 자,
그에게도 화가 따를 것이다.


14. 어느 포경선원을 위한 비문

열어서 보기..







문득. 다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난다.

<덧붙이는글> 얼마 전에 아들한테 모비 딕을 사줬다. 오늘 물어보니 다 봤댄다. 기특하다. 맨날 만화만 그리고 해서 책읽기는 아예 포기하고 지내는 줄 알았는데 그걸 그새 다 읽다니. 다른 걸로 하나 더 사주까 했더니, 노~란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그래도 이번 일 끝나고 나면 서점에 가서 하나 더 사줘봐야지.. ^^   _ 2008. 12. 03.  07:31


 
2009/02/15 19:15 2009/02/15 19:15
한국인은 걸배이 근성이 강하다

제목이 살짝 '거시기'합니다. 하지만 이 블로그에서는 자주 쓰는 말이니 개의치 않고 가겠습니다. 제목 자체가 료해 안 되는 분들이 있을 것같아서 잠깐 설명을 하고 가자면, '걸배이'는 '거지'의 다른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목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빌어먹고 사는 거지 근성이 강하다' 정도로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이 글은 일종의 후기입니다.
그만님의 "우리나라 사람 생산에 익숙치 않다"는 포스트에 강한 '삘'을 받고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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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처럼 습관적으로 메일링을 타고 들어갔다가, 저 글을 읽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무슨 '뻥'이냐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가진 그 느낌이었습니다.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전율.

'독고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 며칠 사이 갑자기 블로고스피어에서 자주 듣보는 말입니다.

저 말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에야 덜 하지만, 예전엔 주변에서 흔히 듣보던 말이고, 특히 제 경우는 학교 다닐 때나 사회 생활을 하면서 그 대상이 되어 자주 들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독불장군'의 다른 버전이었으니요. 하지만 뭐 크게 거슬리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 말이 주는 느낌이 그렇게 싫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고다이'라는 말이 내게 주는 느낌은 늘 '독한 외로움'이었습니다. '홀로'라는 데서 오는 일종의 '쓸쓸함'이 담긴. 언젠가 박목월이 얘기한 '불우감' 비슷한. [footnote]'독고다이'를 '고독이다'로 풀고 있는 이가 있더군요. http://minoci.net/735#comment16463 (새 창으로 열기) [/footnote]

독고다이, 그 고독한 행보에 대하여 

그랬습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읽으면서 크게 공감했던 것은 그러니까 내가 오랜동안 천착해왔으면서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문제들을 저 책이 깔끔하게 정리를 해둔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는, 그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게 내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과 거기서 오는 모종의 안도감(?)이었다고나 할까요. 무튼, 그런 생각이 들어 밤을 새워 읽었댔습니다

오늘 그만님의 포스트를 보면서 공감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는 생산의 문화가 아니에요. 위키도 그렇고 뭐든 문화를 수입하기만 하죠. 미국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인구대비 유학생 비율이 가장 높아요. 우린 배워서 오는 사람들이죠. 우리나라 문화가 새로 만들어져서 바깥으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철저하게 우리나라는 문화 수입국입니다."  _ http://ringblog.net/1506 (새 창으로 열기)


'문화 수입국'이라는 말에 필이 꽂혔댔습니다. 기생의식, 기생질, 기생층, 기생 같은 말들을 저 의미연관에서 해오던 터여서였지요. 어제만 해도 민노씨.네서 저 얘기를 하다 왔습니다. 살짝 삐딱선을 타고 있는 댓글이라 옮기기 거시기하긴 하지만, 글이 서 있는 지점은 동일합니다. [footnote]http://www.minoci.net/736#comment16466 (새 창으로 열기)[/footnote]

민노씨.네는 '진보를 통한 블로그 혁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름의 모색인데,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대고 혁명은 '이른바 진보'가 '진보'만 되어도 가능한 일이라는 댓글을 달았댔습니다. '이른바 진보'가 빠져 허우적이고 있는 '기생질'에서만 빠져 나와도, 그것이 곧 혁명일 거라는 얘기였습니다.

며칠 전에 민노씨.네가 여기서 "(하민혁은) 워낙에 기존의 지배적 관념을 (제가 보기엔 다소 과도한) 원칙론(혹은 역설적이게도 현실론)으로 비틀어 달리 판단하곤" 한다는 댓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footnote]http://blog.mintong.org/456#comment3309 [/footnote] 놀랬습니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히 짚고 있어서였습니다.

지극히 원칙적인 것이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원칙론 혹은 현실론"은 나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이면서 또한 동시에 나를 있게 하는 원동력인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하민혁의 딜레마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민노씨.네가 정확히 꿰뚫어 지적을 한 것입니다. [footnote]언젠가 인/사 쟁토방에서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footnote]

그렇습니다. 나는 자주 원론적인 얘기를 늘어놓습니다.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원칙을 따지고 듭니다. 이 블로그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도 하민혁은 지나치게 원칙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 배경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하민혁은 지극히 현실적인 넘입니다. 민노씨.네가 그랬듯이, 살짝 한번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내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친구들 가운데 하나가 뜬구름 잡는 얘기 하는 친구들입니다. 블로그에 있는 몇 개의 포스트나 댓글만 읽어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위에서 '딜레마'라는 표현을 썼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건 딜레마가 아닙니다. 역량이 안 되는 탓에 이를 풀어 설명하는 데에 이르질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기생의식은 사이비 보수와 얼치기 진보가 낳은 기형의식이다  

진보건 보수건을 떠나서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들입니다. 원칙에 충실하면 이내 해소되거나 성립조차 되지 않을 문제들이 눈앞의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내몰리면서 결국 문제 아닌 문제를 양산해내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입니다. 자신이 말한 것을 자신이 잡아먹는 행태를 보임으로써 결국 문제 자체를 형해화해버리는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컨대, 보수를 말하는 이가 전통을 깨부수는 데는 먼저 나서고 진보를 말하는 자가 청동기 시대로 돌아가지 못해 더 안달해 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 뿐이라면 말도 안 합니다. 이들은 허구헌날 기생질을 일삼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자신들의 비전이나 논리는 보여주질 못한 채, 허구헌날 원산지도 불분명하고 해석조차가 제멋대로인 '수입산' 비전과 이론들을 놓고 니가 맞네 내가 맞네 하면서 날을 지샙니다.

이런 얘기의 종착점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바로 자신이 한 말을 자신이 잡아먹는 결과입니다. 종국에는 도대체 어느쪽이 보수고 어느쪽이 진보인지를 모를 판이 되고 맙니다. 자기 원칙만 제대로 고수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문제를 만들어서 말 그대로의 흰 까마귀인지 검은 까마귀인지 모를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례를 찾아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블로고스피어에도 만연해 있습니다.

얼치기 진보, 블로고스피어의 기형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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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는 진보를 부르대고 있지만 하는 짓을 보면 어떻게 이런 꼴통이 있나싶을 정도의 어처구니들로 넘쳐납니다. '소통'하자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일수록 댓글이나 트랙백 차단에서는 귀신같이 빠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르다싶으면 여지없이 차단해버립니다. 만일 그 빠르기로 진보를 가르는 거라면 귀신같은 그 신속함에서는 영낙없이 진보인 게 맞다 해도 좋겠습니다.

깡통같은 논리에 동문서답인 대화도 이들의 공통적인 특성입니다. 말도 안 되는 헷소리를 '상식'이라고 강변하면서도 그게 왜 상식이냐고 묻기라도 할라치면 이런 '상식'을 모르는 몰상식한 넘이라면서 뒷골목 양아치들마냥 종주먹을 들이밀며 달겨듭니다. 이런 좃선 같은 넘, 이런 한나라당 같은 넘, 이런 쥐박이 같은 넘.. 하는 얘기를 앵무새처럼 되뇌면서.

이들의 머릿속에 든 진보라는 개념은 그러니까 기껏 이런 것입니다.

진보의 이념이나 비전, 뭐 이 따위는 알지도 못 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누가 뭐라 하건 그 대답으로  "이런 좃선 같은 넘, 이런 한나라당 같은 넘, 이런 쥐박이 같은 넘.." 만 열심히 외쳐대면 '진보의 전위'가 되는 그런 진보인 셈입니다. 맨날 똑같은 주문으로 스스로의 믿음을 강제하는 광신교도 집단에서나 비견됨직한, 도대체 대화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족속들입니다. [footnote]이런 이들은 자신은 도대체 듣도보도 못한, 입에 담기조차 힘든 온갖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주제에 국민의 천민의식을 개조하겠다고 설치고 다닙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하지만 뭐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건 진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개인의 인성 문제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도대체 그 인성에서 나올 수 있는 의식이 얼마나 진보에 값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개조되어야 할 대상은 바로 그 천박하고 부박한 의식일 듯싶어서입니다.[/footnote]

한국의 위키피디아, 집단지성을 묻다  

애니웨이, 다시 그만님 얘기로 돌아가보면, 이같은 현상은 위키 문제의 경우에도 일정 부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때 위키에 참여해보려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하고 있는 일 쪽에서 더러 정보가 빈약하다 여겨서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온라인의 특성은 '괴짜'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미 너무 '격식을 따지고 객관성을 따지고 복잡한 규율이 이미 갖춰져 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보다 활성화가 잘 안 된다."

그만님의 글에 나오는 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글을 올리면 이내 삭제하고 다시 바꿔서 올려도 또 삭제하고 하는데, 대체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내가 보기에는 운영진이 기껏 학부 아니면 대학원생으로 이루어진 듯 한데 이들의 개입과 간섭이 거의 전횡에 가까웠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토할 법한 사항도 그들은 몇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삭제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려면 거기에 오픈 백과라는 타이틀을 달 일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냥 몇몇 운영진의 이름을 거는 게 차라리 낫지 싶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의 진보, 기생의식을 버리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진보의 의의 혹은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진보를 말할 때 떠올리게 되는 으뜸 가는 덕목은 '자유함'입니다. 자유한 의지, 자유한 상상력, 자유한 표현과 행동이 배제된 곳에서 운위되는 진보는 진보가 아닙니다. 사이비일 뿐이지요.

자유함은 기생의식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빌어먹고 사는 이들의 최고 행동 준칙은 어떻게든 빌붙어 사는 주인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누구인가를 묻는 주체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 뿐입니다.  

마르크스가 어쩌고 레닌이 어쩌고 김일성 어버이 수령이 어쩌고 공산당 선언이 어쩌고 자본론이 어쩌고 자본주의가 어쩌고 제국주의가 어쩌고 신자유주의가 어쩌고 사회주의가 어쩌고 사회민주주의가 어쩌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어쩌고 해체주의가 어쩌고 체 게바라가 어쩌고 라깡이 어쩌고.. 진보가 어쩌고 보수가 어쩌고..

무튼, 주구장창 뭐라고들 뭔가를 읊고 있지만, 여기 어디서도 그들의 논리나 비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수입을 허하여준 주인에 감사하며 개처럼 짖어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기생층의 젖을 빨고 사는 강아지들이 허구헌날 짖어대는 레파토리 또한 늘 똑같습니다.

이명박이 저쩌고 쥐박이가 저쩌고 명바기가 저쩌고 명텐도가 저쩌고 경상도가 쩌쩌고 대운하가 저쩌고 청와대가 저쩌고 딴나라당이 저쩌고 한날당이 저쩌고 수구가 저쩌고 꼴통이 저쩌고 친일파가 저쩌고 독재가 저쩌고 박정희가 저쩌고 이승만이 저쩌고 언론이 저쩌고 좃선일보가 저쩌고 조중동이 저쩌고..


기생의식에 찌든 기생질이자, 한국에서 진보연하며 먹고사는 기생층들의 현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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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글> 그만님의 글을 오독한 거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왜냐면, 그만님이 전하는 얘기의 논점은 '기생질'이 한국 문화의 특질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를 제대로 알고 활용하자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주장과 내 얘기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서 있는 지점이 서로 다른 때문입니다. 그는 학자이기에 분석을 한 것이고, 나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므로 기생의식을 타파하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덧2> 이 글의 원래 제목은 "한국인은 걸배이 근성이 강하다"였습니다. 이게 적합한 제목이라 여기지만, 불필요한 언쟁을 피하기 위해 현재의 제목으로 바꾸었습니다.  


2009/02/14 22:49 2009/02/14 22:49
바야흐로 '독설'의 시대가 도래한 듯합니다. 자칭 타칭의 '독설가'들이 여기저기서 '나름의 독설'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블로고스피어도 예외가 아닙니다. 댓글을 통해서나 오가던 독설들이 이제는 공공연히 메인 다툼을 벌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같은 현상을 두고 바람직하다 혹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독설' 그 자체가 좋거나 나쁘다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독설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 한계에 대한 인식만 분명히 하고 있다면, 혹은 그 한계에 대한 서로의 이해만 공유된다면 독설은 확실히 달콤한 사탕발림(혹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그 '칭찬') 못지 않게 유용합니다. 달콤한 말이 주지 못 하는 모종의 카타르시스까지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때로 칭찬보다 더한 효용성을 갖습니다.

직설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찌르거나, 적절한 풍자로 허를 드러나게 하는 데는 독설만한 게 없습니다. 독설이 자주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고 느끼)는 시기에 유행하는 건 이 때문입니다. 이같은 시기에 사람들은 독설에 목 말라 하고 또한 독설에 환호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독설이 필요한 시기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독설이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보입니다. 나는 이같은 현상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독설'이 자주 '인신공격'과 혼동된다는 점입니다.
'독설'은 '인신공격'이 아닙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말입니다.


독설가의 홈페이지

어느 독설가의 홈페이지


우선 독설과 인신공격은 문제의 대상을 무엇으로 설정하고 있느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독설'은 문제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문제의 핵심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거나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논거를 파고듭니다. 우회하는 길도 있습니다. 통렬한 풍자와 해학으로 그 주변을 발가벗겨 문제의 핵심이 드러나게 합니다. 

그러나 인신공격은 으레 사람을 그 대상으로 합니다. 문제가 무엇인지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문제점을 파고듭니다. 그래서 인신공격은 항용 문제의 핵심과는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많다는 정도를 넘어 거의 전부가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 있습니다. 문제의 약점이나 허점을 치기보다는 생뚱맞게 다른 문제를 끌어들이거나 사람에 대한 소문이나 생김새같은 걸 물고늘어집니다.  

독설과 인신공격의 또다른 차이점은 사용되는 언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독설은 막말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되 문제와의 연관성을 놓치지 않습니다.  때문에 독자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막말은 독자 일반의 감성에 호소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 기능합니다. 감성적으로 쾌변감(카타르시스)을 느끼면서도 이성적으로는 논점을 놓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반면에 인신공격에서는 문제의 논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다만 사람에 대한 증오와 욕설만이 남습니다.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는 지점입니다. 논점이 사라지고 한것된 욕설이 '그저 배설될 뿐'인 곳에 독자 일반의 공감대가 들어설 여지는 없습니다. 다만 편견에 찌들고 아집에 사로잡힌 저열한 편가르기만이 남겨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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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받은 어떤 댓글입니다. 저 글이 왜 저 자리에서 나와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은 '분'이시고, 다른 한 사람은 '저 자' 혹은 '그 자'입니다. 저열한 편가르기가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댓글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그냥 까대는 인신공격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트랙백 지웠다고 "싸가지 없는 새퀴"라고 욕하는 블로그 쥔장의 얘기가, '트랙백 지우라'고 요청하는 꿈틀군의 주장과 잘 어울려 보입니다. 이런 걸 보고 아니러니라고 하나요? 참 그로데스크한 풍경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인신공격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친구가 입만 열면 부르대는 것이 '꼬레안의 저급한 천민의식'인 때문입니다. 한국민의 저급한 의식을 개조하고, 블로거들의 천민의식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친구가 의존해 있는 논리가 기껏 저런 정도의 인신공격이고 천박한 패거리의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일은 비단 저 친구에 한정된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는 더 황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more..



나는 아직도 저 친구들이 왜 저렇게 표독한 입술을 놀려대고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저들의 저 독한 증오심이 대체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 것인지는 더욱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덧> 위의 그림에 나오는 독설가의 홈페이지는 지난 세기에 운영하던 홈페이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덧붙이는글> 이 글은 어떤 얘기를 하기 위해 초를 잡은 글입니다. 일종의 서론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오늘 본론에 해당하는 글을 하나 쓰려 했는데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2009. 02. 14. 오후 11:00

  
2009/02/13 23:18 2009/02/13 23:18
사람이 6명이나 생떼같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것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경찰에 의한 죽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인명사고를 예견할 수 있을 정도의 시너와 화염병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경찰은 특공대까지 투입하여 무리한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가 6명의 죽음이었습니다.

검경은 이에 대해 사고였다고 말합니다.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였다고 해서 그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의 99%는 사고사입니다. 그렇지만 교통사고의 경우에도 그 책임은 묻습니다.

이번 용산참사는 아무리 느슨하게 보더라도, 다시말해 검경의 발표대로 그것을 사고로 본다고 해도, 그 사고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경찰의 무리한 진압 작전이었습니다.


용산 2009. 1. 20.

"철거민, 우리는 썩은 세상에 우리의 분노를 던진다!"


우선 경찰은 농성 25시간만에 진압을 서둘렀습니다. 특공대까지 투입하는 강경 진압을 시도하면서도 예상되는 안전사고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시너로 인한 화재에 물대포를 쏘아댔고, 추락에 대비한 에어매트 한 장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컨테이너에 실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망루로 경찰을 투입했습니다. 더 죽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지경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건 정신 나간 짓 한 게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신나간, 무리한 작전을 펼쳤으면서도, 그 결과 무려 6명의 목숨이 불에 타 스러져갔는데도 경찰은 이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검찰 또한 이에 대해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습니다. 상식이 무너지는 지점입니다.

이 작전의 최종 책임자이자 작전을 최종 승인한 경찰 총수가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통령 각하는 이 사실이 못내 받아들이기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이를 두고 실로 비통해마지 않으셨다는 소식입니다. 김석기 아버지의 스토리까지 언론에 띄우면서 금세 다른 요직에 쓰겠노라는 의지까지 표명하는 모양새입니다.

그런데 김석기의 낙마를 안타까워 하는 이가 여기 또 하나 있었습니다.
중앙일보에서 만평을 담당하는 김상택이라는 친구입니다.


[김상택 만평] 2월 11일

[김상택 만평] 2월 11일


김상택의 만평에 따르면 김석기는 없는 '죄'를 뒤집어쓴 '희생양'입니다. 그런데 이 희생양은 보통 희생양이 아닙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고 따져묻고 있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희생양입니다.

우연히 저 카툰을 보면서 할 말을 잃습니다. 횡발수발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입니다. 도대체 초딩만도 못한 인식틀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아무리 애증이 크다고 해도 그래도 명색이 일간지의 만평란을 맡고 있는 이의 균형 감각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어서입니다.  

우리집 초딩도 이 정도의 균형감각은 있습니다. -_-


초딩카툰

[초딩카툰] 용산 2009. 1. 20.







2009/02/12 00:15 2009/02/12 00:15
"이명박, 이제부터 그대는 대통령이 아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 이같은 타이틀로 글을 하나 적고 있었다. 이 대통령이 "용산사고, 터지려거던 좀 늦게 터지지.." 라고 말했다는 포스팅을 보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였다.

- 이명박대통령 曰 "용산사고 좀 늦게 터지지.."

마르키온-진실은 외경 속에 있다

http://marcion.tistory.com


그런데 글을 쓰다가 다시 들어가보니 저 포스트에서 링크한 MBN의 기사 원본이 사라져버렸다. 기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댓글들만 뎅그라니 남아 그곳이 한때 기사가 있던 자리임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 http://mbn.mk.co.kr/news/newsread.php? ··· mbn00006


MBN

MBN, 그리고 사라진 기사


아래 그림은 처음 MBN의 기사 내용을 보도한 미디어오늘의 캡처화면이다(이 대통령 “아까운 사람 나가” 발언 논란). 결국 그림에 보이는 저 기사가 사라지고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은 빈 공간만 남은 것이다.


미디어오늘

미디어오늘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 상황을 보면서 먼저 떠오른 것은 지난 해 이맘 때 있었던 YTN 돌발영상 기사 삭제 사태다.


- YTN 돌발영상, 영악하고 비겁했다
- 돌발영상, 웃기잡는 YTN 영웅 만들기


만일 저 기사 삭제가 사실이라면, 이번 사태 또한 지난 번의 YTN 돌발영상 기사 삭제 사태 때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것이다. MBN의 기사가 사실인가, 아니면 MBN과 기자가 청와대의 압력에 굴한 것인가 하는 논쟁이 일 것임은 자명하다.

게다가 이번 건은 지난 번 YTN 사태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지난 번 YTN 사태 때는 문제의 동영상이 갖는 한계가 없지 않았지만(엠바고 문제 등) 이번 기사 삭제 건은 그런 경우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보냐 아니냐의 문제이므로, 더 격렬한 논쟁에 휩싸일 공산이 크다.

아직은 뭐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다. 지금으로선 MBN 기사 삭제가 단순한 프로그램상의 오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실 관계는 좀더 기다려봐야 나올 성부르다. 그래서 다른 얘기는 다른 상황이 나오는대로 더 하기로 하고, 이 포스팅은 일단 여기서 끊는다. 





<덧붙이는글>
11일 오후 3시 현재, 위에서 전한 내용에 더하거나 할 다른 상황은 없습니다. 매경에서도 특별한 언급이 없고 다른 언론에서 이를 문제삼는 곳도 없습니다.  

"용산 사고가 일어 나려면 늦게 나든지 했어야지 바로 터졌다" 다시 봐도 도무지 정상적으로 뵈지 않는 이 대통령의 저 발언만이 블로그와 게시판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문제의 기사는 포털에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매경 내부에서 같은 내용의 기사가 검색되고 있지만, 동영상이 아닌 텍스트 형식의 기사만 제공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 이 사건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1. 매경에서 [단독]으로 문제의 기사를 보도한다.
2. 미디어오늘과 네티즌들이 문제의 발언에 주목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3. 매경이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인지한다.  
  - 매경이 [단독]으로 터뜨리면서 주목한 부분은
  - 문제의 발언이 아니고 대통령이 김석기를 끔찍하게 여겼더라는 대목이었다.(?)
4. 동영상 기사를 삭제한다.
  - 청와대 등의 외압 여부 논란이 발생할 수 있는 지점이다.
5. 기사 삭제에 대한 의혹이 인다.
6. 매경은 동영상 기사 대신 텍스트 기사를 다시 올린다.
  - 처음 올라온 동영상 기사의 등록일시 - 2009년 02월 09일 23:14 
  - 현재 올라온 텍스트 기사의 등록일시 - 2009년 02월 11일 09:08 

이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의로 추정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경에 전화를 해서 이에 대한 해명을 듣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나아가는 데는 개인적으로 부담스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단 여기까지 정리하고, 이 건이 아무것도 아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제2의 돌발영상 삭제 사태로 가게 되는지를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2009/02/11 01:59 2009/02/11 01:59

어제, 우연찮게 현인택 통일부장관 내정자의 청문회 모습을 스치듯이 잠깐 지켜봤다. 외근 나갔다 들른 어느 사무실에 켜진 티비로 청문회가 중계(였는지 아니면 녹화화면이었는지는 모르겠다)되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십니까?
아뇨~
오토바이를 탈 때나 발부되는 헬멧 미착용 범칙금이 부과되었는데..
웃음..


티비에서는 이런 내용의 문답이 진행되고 있었다. 질문을 하는 쪽은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고, 현인택인가 하는 친구는 능글능글 웃고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가 딱 역겨웠다. 그때 마침 기다리던 사람이 와서 더 이상 봐야 하는 고역을 면했지만 일을 마치고 들올 때까지도 그 능글거리는 웃음이 자꾸 떠올라서 기분이 영 찝찝했다.


현인택

현인택 통일부장관 내정자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 뉴스를 보니 어제의 저 친구가 장관에 임명될 거라는 소식이다.
어제 일이 떠올라서 잠깐 뉴스를 검색해봤다.

가관이다. 파면 팔수록 '고구마줄기'처럼 온갖 의혹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양파 껍질처럼 비리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야당과 야당지들은 일제히 '현인택 종합비리세트"라며 설래발이다.

늘 듣보던 얘기고 상황인 터라 별 감흥도 없고 딱히 와닿는 것도 없다. 한마디로 그렇거나 말거나다.  기껏해야 '또냐?' 정도의 반응이 고작이다.

비핵개방3000 입안이 어쩌고, 통일 반대 주장이 어쩌고, 그로 인한 대북관계 악화가 어쩌고,  편법증여가 어쩌고, 임대소득 탈루가 어쩌고, 논문 중복게재가 어쩌고, 연구업적 부풀리기,가 어쩌고, 자녀의 이중국적이 어쩌고, 위장전입이 어쩌고, 배우자 국민연금 미납이 어쩌고, 고등학생 때의 부동산이 어쩌고, 국 복무 시절의 부동산이 어쩌고 하는 부정과 의혹의 사례들은 도무지 어디 아득히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다.

여기에 비한다면 어제의 저 헬멧 미착용 얘기는 실로 리얼하다. 유일하게 내가 경험한 내용이어서다. 교통경찰이 말한다. 작은 걸로 끊어줄테니 면허증 주세요. 이거 과속이나 뭐 가벼운 교통위반 걸릴라치면 교통한테서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저 친구의 경우도 십중팔구는 이같은 연유로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헬멧 미착용의 범칙금 통지서를 받았을 게다. 그게 아니라면 오토바이도 탈 줄 모른다는 친구가 도대체 헬멧 미착용의 범칙금 딱지를 받을 일은 없는 일일테니. 살짝 웃음이 난다.

세상에, 무슨 택시회사의 사장씩이나 되는 부모를 둔 덕분에, 고등학생 때부터 땅을 사고팔았으며 군대에 있으면서도 땅을 사고 파는 복을 타고난 우리의 현 부자께서도 그러니까 기껏 저런 얍삽이 짓이나 하고 다녔더란 말이지? 그러면서도 지금 한 나라의 장관질 한번 해보겠다고 저렇게 땀 삐질삐질 흘려가며 토 나오는 웃음을 흘리고 있는 거란 말이지? -_-;;

감투. 좋기는 좋은 건가 보다. 아니 좋은 건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게 저렇게도 쓰고싶은 것일까?
제가 한 온갖 추잡한 짓이 다 까발려지고 있는데도, 아니 까발려지기 이전에 스스로가 자신이 한 짓을 익히 알고 있는 마당에 기어이 그것을 그렇게 쓰고싶은 것일까? 부끄러움 하나 없이.

참 이상한 사람이다.
그리고 참 이상한 사회다.
저런 정도의 염치를 가진 자가 나라의 장관으로 앉는, 혹은 않겠다고 설래발을 치는 사회라니 말이다.

에니웨이, 현인택 관련 기사를 검색하던 중에 이상한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중앙일보가 전하는 “민생 무너져~ 솟아날 구멍 막혀~” 라는 기사다. 어느 구두닦이 눈을 통해 바라본 '민생의 현장' 르뽀 기사다. 동 시대 민생의 현장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니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사교육비

월수입 200만, 사교육비 160만원



건성으로 읽어내려가다 저 박스 기사에서 눈이 멎었다. 월 수입 200만원에 큰 아들(아직 둘이나 더 있으시댄다 -_-) 사교육비로만 120만원을 지출한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강아지 개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말인가?

뭔가 잘못된 거겠거니 싶어 처음부터 기사를 다시 함 봤다. 같은 얘기다. 약간 차이가 있다면, 월수 2백만원은 순전히 기사의 주인공이 구두닦이로 버는 돈이고, 아내가 녹즙 장사로 80만원 정도를 보탠다는 정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가족 전부가 버는 돈의 절반을 한 아이의 사교뷱비로 몽땅 쓰고 있다니.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앞서 현인택의 경우를 보면서 도대체 와닿지 않던 어디 먼 나라의 얘기를 바로 지금 '민생의 현장' 르뽀를 통해 듣보는 기분이 영 아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웃기잡는 건지를 깨닫기라도 하라는 듯이 신해철이 이상한 방식으로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마치 "도대체 왜? 학원 안 보내느냐"는 듯이. 이게... 뭥미..?



신해철

신해철, 도대체 왜?







<덧1> 땅투기 하는 넘들 이유 불문하고 총살하는 법은 만들 수 없을까?
<덧2> 사교육, 이거 정말 다른 대책은 없는 것일까?
2009/02/10 21:52 2009/02/10 21:52
1.
말(馬)을 지나치게 부려먹으면 숨이 끊어지듯이,
말(語)도 너무 써먹으면 값이 떨어진다.


1.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말라.

벗과 친하게 사귀는 것은 좋지만 너무 허술히 접근하지는 말라.
일단 좋은 벗임이 확인되면 절대 놓치지 말라.

섣부른 햇병아리들과의 지나친 악수로 손바닥 살이 굳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필경은 사람마저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함부로 싸움판에 뛰어들지 말라.
하지만 일단 뛰어들었으면,
철저하게 해치워서 네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보여주라.
다음부터는 그들이 너를 주의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쉽게 동의하는 일은 삼가하라.
다른 사람의 의견은 경청하되, 시비를 가리는 데는 신중하라.


의복은 인격을 나타낸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 옷은 비싼 것을 택하되 품위가 있어야 한다.
저속한 화려함이나 허식에 빠져서는 안된다.

돈은 빌리지도 말고 빌려주지도 말라.
돈을 빌려주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게 되며, 돈을 빌리면 경계심을 잃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에게 충실하라. 그렇게 하면,
밤이 지나 아침이 오듯이 자연 다른 사람에게도 충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겉으로 내보이는 슬픔은 장식을 위한 옷에 지나지 않는다.

1.
각자의 분수에 따라 대우한다면, 뭇매질을 당하지 않을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햄릿

<햄릿> 표지 (c) yes24.com



1.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마음 속에 담고 참는 게 고귀한가,
아니면 밀물처럼 밀려오는 고난에 맞서 그것을 물리치는 게 고귀한가.


죽는 일은 잠드는 일. 다만 그뿐이라면,
잠들면서 시름을 잊을 수만 있다면, 인간의 온갖 숙명적인 고통을 잊을 수만 있다면,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 인생의 극치일 것이다.


죽는 일은 잠드는 일. 잠이 들면 꿈도 꾸게 되겠지.
아, 그러나 그것이 문제다.
삶의 온갖 번민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죽음 속에서 꿈을 꾸게 될 일을 생각하면,
죽음으로의 발길이 망설여질 밖에는.
이런 망설임 때문에 우리는 비참한 인생을 지루하게 살아가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한 자루의 단검만으로도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판에,
세상의 채찍과 조소를 누가 참고 있을 것이며,
또한 폭군의 무도한 행위와 권세가의 우쭐거리는 무례를,
버림받은 사랑의 아픔과 법률의 태만과 관리들의 불손함을,
그리고 선량한 사람이 불한당들로부터 받고 견디는 온갖 모욕을
도대체 누가 참고 견딜 것인가.


죽음 뒤에 무엇이 올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기에,
죽음을 넘어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과
그 미지의 나라에 대한 불안감이 있기에,
비참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무거운 짐으로 땀 흘려 신음하면서도
죽음을 향한 우리의 결심은 흐려지고,
저 알 수 없는 세상에서의 미지의 고통을 받느니보다는
이 세상에 남아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려 하는 것이다.


사리를 분별하는 의식이 우리를 겁장이로 만든다.
불타오르던 결심은 창백한 생각으로 약해지니, 마침내는
저 웅대한 계획도 이런 잡념 때문에 옆길로 빠져 그 실천력을 잃게 된다.


1.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그 정숙함과 미모가 지나치게 가깝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숙함과 미모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니,
정숙함이 미인을 정화시키는 일보다,
미모가 정숙한 여인을 타락케 하는 일이 더 쉬운 때문이다.


1.
악행은 반드시 폭로된다.
비록 온 세상이 감추려 한다 해도 악행은 그 모습을 반드시 드러낸다.


1.
정숙한 처녀는 달빛에서라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봄철의 어린 꽃봉오리는 활짝 피기도 전에 벌레먹기 십상이고,
아침이슬처럼 빛나는 싱싱한 젊음일수록 무서운 독기에 찔리기 쉬운 법이니.


1.
호레이쇼, 나의 벗이여.
이 사건의 진상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내가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은 오명뿐일 것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나를 위한다면 부디 죽음의 행복을 잠시 보류하고
이 험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살아 남아 나의 운명을 이야기해 다오.


1.
대사는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고함을 지르거나 웅변하는 투로 떠들어 댈 양이라면,
차라리 거리의 전령사를 불러다 시키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또한 손은 허공에 대고 그렇게 톱질하듯이 휘젓지 않아야 한다.
제스처는 항상 부드러워야 하는 것이다.


감정이 격하여 분수처럼 솟구치거나 폭풍이나 회오리 바람처럼 일어날 때에도,
자제력을 잃지 않고 그것을 유연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에 가발을 쓴 왈패들이 나와서는 목청껏 고함을 질러대고 과장된 감정 표현으로
극의 감동을 망쳐놓는 걸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말도 되지 않는 무언극이나, 큰 소리와 엉터리 수작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싸구려 입석 관중을 상대하고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그런 배우들은 그야말로 채찍으로 갈겨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활기가 없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분별력으로 대사와 행동, 행동과 대사를 잘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자연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연극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된다.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을 거울에 비추어,
선과 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면서,
그 사회의 시대적 상황과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목적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혹은 간과하는 경우,
그 연극은 어줍잖은 관객을 웃길 수는 있겠지만
식견이 있는 관객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극장 안을 가득 채운 박수갈채보다도
식견이 있는 단 한 사람의 비난이 더 무서운 터다.


1.
여자의 걱정은 사랑이 깊어갈수록 커진다.
없을 때는 두 가지 다 없지만, 있을 때는 두 가지 모두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1.
인간은 자신의 마음이 정한 바를 쉬이 자신이 깨뜨린다.
마음이 세운 뜻은 기억할 수 있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다.

그것이 태어나는 힘은 강하지만 자라는 힘은 약하기 짝이 없다.
이는 설익은 과일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익게 되면 누가 흔들지 않더라도 저절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기자신의 마음에 진 빚은 스스로가 갚기를 쉬이 잊는다.
열정 속에서 행한 맹세는 그 열정이 다하면 스러진다.
슬픔이나 기쁨이나 그 열정이 식게 되면, 그 뜻도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슬픔 역시 극에 달하며,
슬픔은 이내 기쁨으로 변하고 기쁨은 곧 슬픔으로 변한다.


모든 세상사는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사랑이 운명과 더불어 변화한다 한들 무엇이 이상할까.
사랑과 운명,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강한 것인가는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도 일단 몰락하면, 따르던 무리조차 그를 떠나게 되고,
미천한 사람도 출세를 하면 원수지간이라도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면,
우리네 인간의 사랑이란 결국 운명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더 이상 친구가 필요없는 부유한 사람에겐 넘치도록 친구가 많지만,
정작 친구가 필요한 가난한 이는 친구를 사귀려다 오히려 적만 만들고 있으니.


사람의 뜻과 운명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린다.
때문에 사람이 세우는 계획은 언제나 쉽게 무너진다.
마음은 분명 자신의 것인지라 뜻을 세우기는 어렵지 않으나,
운명의 목표는 알 수가 없으니 결과는 항상 뜻밖이기가 쉬운 것이다.


1.
이 피리를 불어보라. 피리를 부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너는 나를 뭘로 보는 거냐? 도대체 피리 소리 하나도 제대로 낼 줄 모르는 네가,
나에게서는 온갖 소리를 내게 하려 든단 말이더냐?
너는 마치 피리의 누르는 구멍을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내 마음 속 비밀의 소리를 꾀어내려 하고 있구나.


이 작은 피리 속에도 아름다운 소리와 풍부한 음악이 들어 있다.
그런데 너는 이 피리 소리조차 낼 수 없지 않느냐?
그래 너에게는 나를 다루는 게 피리를 다루는 일보다 더 쉽단 말이냐?
나를 악기 취급하는 것은 좋다만,
그러나 이처럼 하다가는 나를 화나게 할 수는 있어도 나를 연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1.
습관이란 나쁜 행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먹어치우는 괴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선한 행동에 아름다운 옷을 입혀 점차 몸에 맞도록 만들어주는 천사이기도 하다.
오늘 하루를 참으면 내일은 참는 일이 더 쉬어지고,
다음날엔 그것이 더욱 더 쉬어진다.
습관은 우리의 타고난 성질마저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니.


1.
나쁜 병에 걸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를 숨기다 보면,
결국은 목숨까지 잃게 된다.


1.
아첨을 잘하는 사람은 스펀지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의 총애와 포상과 권세를 실컷 빨아들일 수 있으며,
아울러 얼만큼의 시기 동안은 상대방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빨아들인 것을 필요로 할 경우, 상대방은 그를 비틀어 쥐어짜게 된다.
그러면 아첨장이는 스펀지처럼 같이 이내 말라버린다.


1.
민중이란 이성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눈으로만 보고서 좋다 싫다를 결정하려 든다.
그들은 죄인이 받는 처벌만을 생각하지, 죄 그 자체는 보려 하지 않는다.


1.
참으로 위대한 것은 중대한 이유가 있을 때 몸을 일으키는 것이지,
사소한 이유로 경거망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명예와 관련된 일일 때는
지푸라기 하나를 두고서도 당당히 싸워야 한다.


1.
사랑을 하는 데도 때가 있는 법이다.
애정이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그 불꽃이 강해지는가 하면 약해지기도 한다.
애정 안에는 바로 그 불꽃을 약화시키는 심지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일도 한결같이 좋은 상태를 계속하여 유지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일도 그것이 과도하게 되면
그 과도함으로 인해 도리어 그 장점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마음 먹은 일이라면 즉각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자 하는 마음은, 세인들의 말이나 행동이나 다른 여러가지 일로 해서,
쉽게 약해지거나 흔들릴 수 있는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결심은 한숨과 마찬가지로 내뱉을 때마다
일시적인 기분전환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꾸 하다보면 몸에는 해롭다.


1.
별이 빛나는 것을 의심하시요. 태양이 움직이는 것을 의심하시요.
진리도 거짓이 아닌가 의심해 보시요.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나의 사랑만은 의심하지 마시요.


1.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신의 섭리는 깃들어 있다.
죽음이 지금 온다면 이후에는 오지 않을 것이고,
후에 올 예정이라면 지금은 아닐 것이다.
또한 지금 오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오게 될 것이고.


중요한 것은 평소의 마음가짐이다.
언제 죽게 될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죽을 때 우리 모두는 빈손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젊어서 죽는 일을 슬퍼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009/02/09 22:36 2009/02/09 22:36

블로그가 광고매체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대답은? 이보다 더한 우문이 있을까싶다. 블로그는 개인적인 공간이다. 그런 사적인 영역에 대고 누가 광고를 하라 마라 할 수 있겠으며, 또한 '나는 반대요'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블로그는 당연히 광고매체로 사용될 수 있다. 블로그가 광고 매체로 사용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더 정확히는 '찬성하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무용하다는 의미다. 이같은 전제를 달고 블로그에 광고를 싣는 일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면, "블로그에 광고를 싣는 일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블로그가 광고매체로 사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블로그의 광고매체화, 찬성하십니까?

블로그의 광고매체화, 찬성하십니까?


국가 권력을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에 비유하며 경계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전 사회를 집어삼키고 있는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리바이어던은 더 이상 국가 권력이 아니다. 자본 권력이다.
 
블로그를 1인 미디어라고 말한다. 광고매체로서의 블로그가 문제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과거에는 미디어 즉, 언론이 일정 부분 국가 권력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미디어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자본 권력이며, 그 권력이 현실적으로 표출되는 방식이 바로 광고다. 한마디로 미디어를 먹여살리는 것이 광고고, 그 광고가 나오는 것은 자본 권력으로부터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디어는 과거 국가 권력에 대해 그래 왔던 것처럼 자본 권력과의 관계에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한다. 그 바탕에는 엄격한 트레이닝 과정과 이를 통해 얻은 기자로서의 소명 의식과 자긍심, 그리고 기자 윤리가 있다.
 
블로그의 광고매체화 논의 이전에 광고블로거의 윤리의식 제고가 우선이다

하지만 이제 갓 태동기에 있는 블로그에서 이같은 소명의식이나 기자 윤리를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블로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디어 윤리 일반을 체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트레이닝이나 검증 과정이 아직은 부재하다는 의미에서다. 블로그가 광고매체로 사용되는 것에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상당한 교육과 훈련을 거친 기자의 경우에도 자본 권력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서 아무런 미디어적 소양이 없는 블로거가 자본 권력에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는 굳이 그 결과를 보지 않아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도배하다시피 붙어 있는 숱한 광고와 그 광고주에 영합하는 포스팅을 블로그에서 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블로그의 가장 큰 강점이자 미덕은 그 자유함에 있다. 그러나 블로그에 광고를 싣는 순간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은, 적어도 그 광고에서는 이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 "블로그가 광고매체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찬성하느냐"는 물음에 흔쾌히 '옛스'라고 답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끝>



월간 아임앤애드<IM>

월간 아임앤애드<IM> 2008년 8월호


 
위에 옮긴 글은 월간 아임앤애드(이하 <IM>) 2008년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월간<IM>은 2008년 5월에 창간된 잡지로 온라인 마케팅 전문지입니다.[footnote]그렇다고 해서 '듣보잡' 아닙니다.  웹디자인 웹프로모션 분야에서 상당한 지명도와 영향력이 있는 월간<web>의 ㈜웹스미디어컴퍼니가 발행하는 잡지입니다.[/footnote] <IM>에는 <zigzag>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시의성이 있는 이슈에 대해 네 명의 필자가 yes/no의 의견을 밝히는 꼭지인데, 8월의 이슈는 '블로그가 광고매체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찬성하십니까?' 였습니다.

"블로그인가, 광고판인가"라는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구글 애드센스로 시작된 '광고 붙이기'가 '돈 된다'는 입소문을 타고 거의 '기습했다' 할 정도로 블로고스피어를 급속히 파고들던 때였습니다.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던 그 광고 공세가 어찌나 거셌던지 듣보는 이의 눈살이 다 살짝 찌푸려질 정도였지요. 그래서 내뱉듯이 쓴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월간<IM>이 이 포스트를 보고 '블로그 광고매체화'에 대한 찬반을 묻는 8월호 <zigzag> 꼭지에의 참여를 요청해왔고, 기꺼이 응했습니다.

제 경우는 일종의 구색 맞추기였습니다. 기고한 글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질문 자체가 '우문'이었습니다. NO라는 답 자체가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지요. 게다가 <IM>이라는 잡지는 마케팅 전문지입니다. 해당 호의 특집 기사는 '바이럴 마케팅'이었구요.[footnote]블로그의 광고 매체화에 대한 이슈가 <zigzag>의 주제로 정해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footnote] 처음부터 NO는 없는 질문이었다는 뜻입니다. [footnote]이게 문제라거나 뭐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저런 사항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응한 기고였습니다.[/footnote]

이같은 사정은 위에 첨부한 그림의 실제 기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다른 세 분 모두(당연히!) 찬성을 하고 있습니다(저의 경우는 'YES OR NO'로 나와 있군요). 기사를 보여줄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요. 그럴 수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위에 옮긴 제 글의 경우는, 원래 글 만드는 재주도 없는 데다가 스탠스까지 어정쩡해서 어설프지만, 다른 세 분의 글은 그야말로 명문입니다. 블로그가 광고매체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기회가 닿는대로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에니웨이, 뜬금없이 작년 8월에 쓴 저 글을 옮기는 이유는 요 며칠 사이에 일고 있는 '테터앤미디어 논쟁' 때문입니다. (관련 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글> 일단, 여기서 글을 끊습니다. 쓰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입니다.
사실 위에 옮긴 저 기고문을 전하던 당시 블로그에 올릴 요량으로 꽤 긴 글 하나를 더 썼댔습니다. 원체 글재주가 없는 터라 제한된 지면으로는 하고싶은 말을 다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잡지가 나오면 함께 묶어 올릴 요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잡지가 나왔을 즈음에는 새로운 프로젝트 건으로 블로깅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냥 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최근 여기저기서 테터앤미디어의 블로그마케팅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는 터라 그 글을 찾았습니다. '날로 먹는 포스팅'을 하나 함 심산이었겠지요. 헌데 이게 어느 구석에 짱 박혔는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우선 메일로 보낸 기고문을 찾아 싣고, 여기에 다른 얘기를 얹어보려 합니다.
<덧2> 설날 명절 동안 한 보름여 자리를 비운 데다 요즘 살짝 한눈을 팔았더니 일이 장난 아니게 밀렸습니다. 관련 포스팅은 아무래도 하루 이틀 늦어질 것같습니다.

2009/02/08 00:15 2009/02/08 00:15

올블에 들렀더니 온통 '명텐도' 얘기입니다. 이게 뭔가싶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닌텐도 얘기를 해서라는군요. 그래서 뉴스를 뒤져봤습니다. 정확한 발언을 전한 곳 찾기부터 쉽지가 않습니다. 기사마다 조금씩 그 뉘앙스에 차이가 있어서 말이지요.


우리도 닌텐도 같은 것을 개발해볼 수 없느냐

우리도 닌텐도 같은 것을 개발해볼 수 없느냐



예컨대, 가장 비중있게 기사를 생산하고 있는 프레시안의 경우 "'요즘 닌텐도 게임기를 초등학생들이 많이 가지고 있던데. 우리나라는 왜 닌텐도 같은 게임기 못 만듭니까?'라면서 '우리도 일본의 닌텐도같은 물건을 만들어 보라'는 주문을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전하는 팩트는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것을 초등학생들이 많이 가지고 있고 한 명이 사면 따라 산다고 하더라. 이런 것들을 개발해볼 수 없겠느냐?"는 정도입니다(물론 여기서 그친다면 천하의 오마이뉴스가 아니겠습니다. 제목부터가 "소프트웨어 죽여 놓고 '닌텐도' 만들라고?"입니다. 타이틀만 보는 이로서는 이 대통령이 닌텐도를 만들라고 지시라도 한 것 처럼 보이는 제목입니다).

다른 언론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는 오마이뉴스가 전하는 수준에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발언 자체를 아예 빼버리고 '이 대통령이 닌텐도를 만들라'고 주문했다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기사도 상당수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블로고스피어의 글들은 거의가 팩트와는 상관없이 아예 제멋대로의 이상한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요즘 초등학생들이 닌텐도 게임기를 많이 가지고 있던데 우리도 닌텐도 같은 것을 개발해볼 수 없느냐"는 게 이명박 대통령이 했다는 발언의 대강입니다.

그런데 이게 과연 패러디까지 만들어가면서 그렇게 조롱해마지 않을 문제일까요? 대통령이 관련부처를 찾은 자리에서 해외의 제품 하나를 사례로 들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이토록이나 많은 비판을 불러올 정도로 그렇게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을까요?


도를 넘은 이명박 까대기, 니들은 재밌어도 보는 이는 역겹다
- 모든 게 노무현 탓이라던 수구꼴통과 니들이 다른 게 무엇인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쏟아져 나온 기사와 글들로 미루어보면 이는 그리 정상적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명박 까대는 재미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 다음에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대통령의 발언이 이토록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게 된 다른 무슨 특별한 이유(내가 미처 알지 못한)를 알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일러주셨으면 합니다.

에니웨이,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 이상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한편에서는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행 사건이 있었습니다. 민주노총 간부 하나가 여조합원을 강제로 성폭행한 사건입니다. 그것도 그냥 성폭행에서만 그친 게 아니라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피해자에게 거짓 진술까지 강요한 사건입니다.

관련기사 : 민주노총 간부 성폭력…조직적 2·3차 가해 파문 


민주노총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대국민 사과문



언젠가 한나라당 의원 하나가 술자리서 누구 어깨를 끌안았더라는 기사가 터졌을 때 온갖 패러디가 등장하고 해당 의원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의 탑을 차지하고 P2P 사이트에 동영상 파일까지 뿌려지던 데 비하면 이 성폭행 사건은 거의 기괴하다 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합니다.

기사에 따르면 이건 거의 강간 미수에 해당하는 성폭행 사건입니다. 게다가 성폭행을 한 이는 수구 꼴통 집단인 한나라당 의원이 아니고 새로운 사회를 약속하고 있는 진보 진영의 대표격인 민주노총 간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말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어야 할 사안입니다. 지금까지의 사례로 보면 특히 블로고스피어는 이 문제로 거의 뒤집어져 있어야 정상일 터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조용한 가족' 모드입니다. 올블의 경우는 아예 키워드에조차 오르지 못하고 있으며, 이글루스에서는 이 건을 다룬 블로거가 거의 왕따를 당하는 분위기까지 연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태와 괴이하기 짝이 없는 '침묵의 카르텔'
- 눈만 벌어지면 비판하는 수구언론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는가?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실 내 경우에는 이게 전혀 놀랍거나 한 일도 아닙니다. 그들이 보여준 행태를 보건대 익히 예견된 일이었으니까요. 이 블로그에서도 자주 하는 얘기지만 나는 저들이 말하는 진보가 내가 아는 진보와는 사뭇 다르다고 여겨온 때문입니다. 단지 권력의 근처에 머물 기회가 없었을 뿐, 권력 주변에 이르면 더한 짓도 서슴치 않을 이들이라 보고 있다는 거지요.

암튼(좀 피곤해서 -_-) 이 사건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러나 저 성폭행 사건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바로 이 사건에 접근하는 언론의 태도입니다.

기사에 따르면 이 성폭행 사건은 지난 해 12월 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른바 진보 진영 내부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알려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기사가 나오기 이전까지 거의 모든 매체는 이를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사실 이 정도의 사건이라면, 보수쪽 언론의 경우는 몰라도, 그동안의 전례에 비추어볼 때 이른바 진보 진영 매체의 경우는 이 사건에 대해 충분히 숙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구 언론의 행태를 그렇게 비판해마지 않는 그들이 왜 이 건에 대해 그동안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까요? 왜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 싶은 마지막 순간에야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것일까요?

성폭행 사건도 문제지만, 성폭행 사건에 못지 않게, 오히려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이른바 진보 진영 매체의 이같은 이중적 행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약간의 보론을 더 하겠습니다).

어제 어느 분이 댓글로 '언론의 당파성이 뭐가 문제냐'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맞습니다. 당파성은 나쁜 거 아닙니다. 동시에 벌써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하는 거지만, 당파성과 진실은 서로 모순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당파성을 갖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당파성을 말하며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이 지점입니다. 당파성에 빠져서 진실을 외면하는 그 저열하고 독한 '패거리의식'을 문제 삼는 것이고 거기에 딴지를 거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민주노총 지도부의 성폭력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비판이 두려워, 혹은 그들에게 이용 당할 것을 우려하여 사건에 대해 침묵하는 그 부박한 인식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 용기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 자신감 하나 없는 기생의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각(7일 오후 10시)에도 블로고스피어는 이 문제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평소 진보연하는 친구들로 들끓던 블로고스피어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들이 패거리주의에 빠진 기생층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고, 그들이 입만 열면 부르대는 그 진실 또한 당파적 이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2009/02/07 04:36 2009/02/07 04:36
사천만 모두가 '걸면 걸리는' 나라 (1)


다시 사정 놀음이 시작되고 있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으레 있어왔던 일이 아니던가.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IMF라는 상황 때문에 약간 뒤로 미뤄져 진행된다는 것만 다를 뿐이겠다. 정치권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사회가 어수선할 때마다 늘 일어서는 이 사정 놀음을, 그러나 이제는 제발 그만두었으면 한다. 너무 역겹다.

그것은 언제나 국면 전환용일 뿐이었고, 사정이 사정으로서의 제 기능을 다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정의 칼날에 맞아 쓰러지는 것은 언제나 힘없고 빽 없는 불쌍한 어린 백성들뿐이었다. 그런 마당에 또다시 이 무슨 얼어 죽을 놈의 사정 놀음이란 말인가? 제발 이제 그만 좀 해두자.

헛소리 말라는 따가운 질책의 소리가 들리는 듯만 싶다. 무슨 책잡힐 일이라도 한 모양이라는 의혹의 눈길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무슨 책잡힐 일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헛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정을 그만 하라는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고, 시원해야 할 사정을 역겹다고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행해져온 방식의 사정이란 본질적으로 성공할 수가 없는 사정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나 먼저 한번 들어보자.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그런 다음에 따져보기로 하자.

작금에 불고 있는 사정 바람의 뿌리를 찾자면야 끝도 없이 그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야 하겠지만 그러나,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요점만을 전하는 데는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삼청 교육대까지 갈 것도 없다. 바로 직전 정권이었던, 자칭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부의 사정하는 양을 한번 살펴보기만 해도 된다. 그렇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하기로 하겠다.


가장 오랜 사정을 한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강력한 사정 의지를 표명해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바로 사정의 칼날을 뽑아든다. 대내외적으로 일고 있는 혁신에의 바램을 그는 사정을 통해 충족시키려 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사정을 제일 오래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칙이 결여된 사정이란 말 그대로 사정(私情)에 흐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토록 오랜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부패와 비리로 얼룩져 있는 현실이 이런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동안 우리는 실패한 사정에 대한 수도 없이 많은 진단과 사정의 성공을 위한 수도 없이 많은 전문가적 처방을 들어왔다. 이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수백 권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의 진단과 처방을 더하는 것은 도대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그런 전문가적 식견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그러므로 그런 일일랑은 여전히 전문가들 몫으로 남겨두고, 여기서는 다만, 대체 어떤 곡절이 숨어 있었기에 그 사정은 그렇게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사정의 바람에 동승하여 한번 살펴보기만 하는 걸로 만족하기로 하자.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방식으로 말이다.

자칭 문민정부를 표방하고 나선 김영삼 정부였다. 민생과 관련한 사정이 우선적인 것임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무원의 부정부패 일소 및 지역 토호 세력의 비리 척결이었다. 의도는 좋았다. 그것을 두고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 사회에 총체적으로 만연해 있는 부패와 비리의 한 온상일 수 있는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법론이란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계획도 없었고 원칙이나 철학도 없었고 비전도 없었다. 그런 사정 작업이 어찌 성공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그 사정은 처음부터 벽에 부닥쳤다. 단적인 이유는 사정의 칼날을 쥔 자들이 결코 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지역 유지, 토호 세력이라는 말을 하는데,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 그리고 사정의 칼날을 쥔 그들이 어울리는 부류들이 과연 어떤 이들인지를 한번 살펴보라. 사정의 칼날을 쥐고 있으면서 동아리를 만들어 그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바로 지역의 유지이고 토호 세력은 아니던가? 이런 사정(事情)은 사실 정부 말고는 누구라도 알고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첫 사정은 실패를 맞는다. 그리고 뒤늦게 이런 사실을 눈치 챈 김영삼 정부의 '빌린 머리들'은 잽싸게 움직였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전국 지검과 지청의 검사들을 일거에 자리 이동시킨다는 대책이었다. 참으로 단순 명쾌한, 너무 단순해서 한편으로는 무식하게 여겨질 정도의 계책이었다. 그게 왜 무망한 노릇이었는지는 이후에 언급될 것이다. 하여튼 멋지게 치켜든 두 번째의 사정 또한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자 김영삼 정부의 '빌린 머리들'은 다시 제2차로 자리 바꾸기를 단행한다. 이번에는 사정의 선봉에 서 있는 전국 검찰의 수장들을 모두 포함한 대대적인 물갈이였다.


그러나, 사정은 실패로 끝나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아름다운 사정이었는가? 그래서 이제 사회는 아름답게 정화되었던가? 김영삼 정부가 원하는 깨끗한 사회가 되었던가? 아니다. 애꿎은 사람들만이 그 더러운 사정의 오물을 쓰고 사회의 쓰레기로 전락되어 갔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사정은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공을 들인 사정이, 그토록 집요하게 추진했던 그 사정이 왜 아름다운 사정이 될 수 없었는가? 사정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던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왜 그 빌린 머리들의 사정은 성공할 수 없었는가? 무엇 때문에 실패했는가?

실패의 원인을 찾아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저 빌린 머리들이 취한 사정이 현장에서 진행되는 과정을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여기서 그 과정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 앞서 한 마디 하자면, 저 '빌린 머리들'의 발상이란 기실 유치원생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생각이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만일 그들 빌린 머리들처럼 이전 책임자를 믿지 못해 사정이 지지부진했던 거라고 한다면, 사정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자리를 바꿔 앉은 책임자에게서 바로잡힐 거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자리를 옮긴다고 해서 호박이 수박 된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더란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기대한다. 한 마디로 웃기지도 않는 한 바탕의 코미디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아주 진지하게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그들은 혹시 그렇게 한번 자리를 바꾸면 이 나라가 서로 영원히 아니 보고 살 수 있는 그런 광대한 나라라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건지, 아니면 그런 시스템을 갖춘 훌륭한 나라라고 생각한 것이었는지 그건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디에 있든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 그런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는 저 빌린 머리들의 기대란 기실 무망한 노릇일 뿐이다. 빌린 머리들 생각처럼 이전 책임자가 정말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정도에 대한 대책 하나 없이 가만히 앉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도대체 얼마나 순진한 발상인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추적 범위를 보다 좁혀보도록 하겠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 사정의 현장을 따라가 그 사정이 진행되는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정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결국 몇 번의 소동을 거쳐 이제 전국 지검과 지청에 새로운 수장들이 부임을 하게 된다. ‘역사적 사정의 임무’를 띠고 부임한 그들에게 있어 그 과업이란 지상 명령에 다름 아니다. 대통령의 의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이 승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당이니, 그 일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문제는 낯설고 물설은 곳에서 단기간에 사정 과업에 걸맞는 건수를 올려야 하는 일이다. 사실상 그런 일에 건수가 할당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아니라고 우긴다면 할 말이야 없겠지만 말이다.

에니웨이, 느닷없이 새로운 임지로 부임을 하게된 검사의 입장에서는 참 막막할 노릇이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아니 보다 구체적으로는 어디서부터 건수를 채워나가야 할 것인가?
 

그건 그렇고, 여기서 우리가 역할 분담을 한번 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다. 모든 이가 선망해마지 않는 검사 노릇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읽는 당신과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함께 말이다. 싫다고?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느 소도시에 새롭게 부임한 지청장 역할을 해라. 나 또한 새롭게 발령 받아온 그 아래 평검사 노릇을 한번 해보겠다.

당신은 오늘 아침, 검사들을 불러 모은 다음 근엄한 표정으로 말한다. 우리는 지금 사정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곳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 역사적 과업에 착수하려 한다. 내 목이 여기에 걸려 있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한 건도 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평생의 은인은 결코 되지 못하리라는 점만은 강조해 두고싶다. 이상.


만만한 사람을 찾아라


수장인 당신도 황당한 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당신 말을 듣고 있는 나도 참 황당하기만 하다. 정해진 기간 내에 대체 무슨 수로 건수를 채우라는 것인가? 에고,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는 법. 이번 일이라고 해서 어찌 방법이 없겠는가? 우선 잠시 나의 상황을 정리하고, 그리고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리해보도록 해야겠다. 현재 나는 모든 것이 생소한 곳에 갑작스럽게 부임을 받아왔다. 그리고 제한된 기간 내에 역시 배당 받은 건수를 챙겨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우선은 이곳 경찰의 협조를 받도록 해야겠다. 도무지 생소하기만 한 이곳에서 내가 그나마 ‘목표물’을 낚아챌 수 있으려면 이곳 사정에 밝은 저 경찰들의 협조를 받는 일이 가장 우선적인 일이겠다. 뭐라고? 그 경찰들은 토착세력이 아니냐고? 하참나, 이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나? 신성한 경찰에 의심의 눈길을 두시다니... 그런데, 이것봐, 당신 누구야? 한번만 더 그따위로 말하면 당신부터 먼저 표적 사정에 들어가는 수가 있어! 알았어? 음... 그렇지, 그렇게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게 신상에 좋아, 특히 지금과 같은 이런 칼날 사정 상황 아래서는 말이야.

그나저나, 경찰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황금 같은 시간이 벌써 이틀이 지나가 버렸군. 뭐라고? 그 동안 지역 유지들과는 만나지 않았느냐고? 이 양반이... 지금이 때가 어느 때라고 그런 말을 해? 나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물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전해 듣기는 했지). 그나저나, 이것 봐, 내가 조용히 엎어져 있으랬지? 음... 어쨌든 좋아. 이제 경찰들에게 나름대로의 건 수를 할당해두었으니 그들이 몇 개 정도는 알아서들 챙겨올 거야. 나는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야 있나? 그렇지! 이번 사정의 목표가 지역 토착세력의 비리에 관한 것이었어.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없지만은 않겠어. 어이~ 여기 말이야, 이전 사건 기록들 전부 한번 가져와 봐. 바쁘니까 빨리!

역시 나는 머리가 좋아. 학교 다닐 때, 내가 뭐 폼으로 늘 수석 먹었겠어? 분명 이 사건들 중에 조금은 냄새나는 게 없지 않을 게야. 검토하다 보면 분명 엮어 넣을 만한 한두 개의 건수는 있기 마련이라구. 내가 익히 경험해본 터이니 그걸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은 아니지. 어디 보자. 역시 그렇군. 여기 적당한 게 하나 있어. 아니, 이거 봐라. 이거야 뭐, 수두룩 부지기수인 걸. 기소 유예, 기소 유예라... 이거야말로 사정의 목표에 명실상부한 건 수일 수 있겠어. 음... 이것들만 요리해도 잘 하면 할당된 건 수는 모두 채울 수 있겠어. 어이~ 이봐, 여기 이거 말이야. 약간 이상하군. 이 치들 말이야, 가서 한번 데리고 와 봐.


모래시계 검사를 위하여


뭐라고? 무슨 꺼리로 데리고 오느냐구? 이런 등신! 그냥 끌고 오면 되는 거지, 꺼리는 무슨 우라질 놈의 꺼리야? 언제부터 이 나라 검사의 말발이 그렇게 안 통했어? 하여튼 좋아. 껄끄럽게 굴거든 아무거나 몇 가지 덧붙여서 데리고 와? 걸면 걸린다는 법칙도 몰라? 모르면 국회의원 김문수라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고! 뭣이라? 그래도 그쪽이 따지면서 뎀빌 수가 있다고? 이런 덴장~ 꼭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야 뭐 어쩔 수 없지. 뜨거운 맛을 뵈주는 수밖에는. 지금 보니 말이야, 판사가 내 동창의 후배 친구래. 수색 영장 바로 발부 받아 줄 테니까, 가서 그쪽 사무실에 있는 것 모두 모조리 사그리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훑어와 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봤어?

뭐라? 그 사람이 당신 사돈의 팔촌의 사돈의 외사촌 되는 사람이라고? 이거 봐, 이거 보셔! 당신 지금 때가 어느 땐지나 알고 그딴 소리 하는 거야? 가서 데리고 와! 그래 그래야지. 데리고 왔어? 뭐라고? 지금 없다고? 오늘 아침에 외국 출장 떠났다고? 이런~ 이봐, 당신 자꾸 이럴래? 당신 혹시 그치한테 미리 얘기해서 몰래 빼돌린 것 아냐? 그런 다음 없다고 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라고? 음... 뭐 좋아,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어쨌든 당신 도움이 필요한 게 사실이니니까... 이번에는 내가 참도록 하겠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알겠어?

그러면 말이야, 이 사람 한번 데리고 와 봐? 뭐라고? 그 사람 집어넣으면 조금 시끄럽게 된다고? 당신 이거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야? 나 지금 열심히 사정 중인 검사야, 알아? 혹시 말이야. 당신 그 사람하고 무슨 안면 있는 것 아냐? 그래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뭐야, 그냥 호형호제 하는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이런~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때? 뭐야, 이 사람도 안돼? 그 사람하고는 함께 하는 사업이 있다고? 이거 봐, 이 사람 족치면 혹시 당신 걸려 들까봐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기사 뭐, 맨날 밤낮으로 얼굴 마주 보고 사는 처지에 조금 껄끄럽기도 하겠구먼.

좋아 좋아, 다 좋아. 그렇다면 그냥 당신이 여기 이것들 대강 훑어보고 말이야, 어디 엮어 넣을만한 만만한 사람 없는지 한번 살펴 봐. 그리고 알아서 대강 몇 사람 데리고 와 보라구. 알았어? 에구, 빌어먹을 진작 이러고 말 것을... 내가 무슨 모래시계 검사라고. 편한 지름길이 있는 거를 애써 둘러 갈 필요는 없는 거였잖아.


여기까지만 하겠다. 아니, 글을 아니 쓰겠다는 것은 아니고, 검사 역할 하는 거는 여기까지만 하겠다는 거다. 내가 뭐, 능력이 있어 실제로 검사가 돼본 것도 아니고 또 계속 하다보면 그거 재밌어져서 이 나이에 검사 시험 봐볼 맘 생길지도 모르겠고 해서.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 이제 검찰과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그야말로 표적 수사에 돌입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걸려들 사람이 누구일 거같은가? (계속)




사천만 모두가 '걸면 걸리는' 나라 (2)



딱 걸렸어~
이런 상황에서 누가 검경의 사정 그물에 걸려들 것인가? 물론 중앙에서야 시범 케이스로 큰 물건(?!)도 하나쯤 걸리고 하겠지만 지방에서라면 사정은 조금 다르다. 사정의 이름에 걸맞으면서도 잡아들이는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그야말로 만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란 누구인가? 자신이 지금 역사적 과업인 표적 사정의 포위망에 걸린 줄을 알 리가 없는 사람, 이전에 사소한 사건으로 들어왔다가 가볍게 벌금 얼마쯤 물고 나와서는 그 사건이 온전히 끝난 줄 알고 있는 사람 - 그런 사람이 아마 가장 적격(?!)인 사람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전에 변호사 수임료만 챙길 수 있게 할 정도의 미미한 사안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실조차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정 팀의 압수 수색을 통해 사정의 대상이 된, 소위 검찰에게 새롭게 '인지된' 사건의 당사자이기가 십상이다.


구속 영장 신청해! "걸면 걸린다"


에이, 아무려니 그런 경우가 어디 있겠느냐고? 순진하시기는. 그렇게 이야기해도 모르겠는가? 그러면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사무실에 있는 휴지 한 조각까지 쓸어가서 그것을 까발려 보라! 그리고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 없다던 저 검찰의 말을 한번 상기해 보라! 그러나 그런 것도 귀찮다면 내로라하는 대기업조차도 사무실 압수 수색이나 세무조사를 나간다고 하면 초비상이 되는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런 상황이 되면 미리 예고까지 하고 공개적으로 수색과 조사가 이뤄지는 대기업조차가 벌벌 떠는 마당에, 하물며 세상 물정 아무 것도 모르는 시골 벽지의 하루 먹고 하루 살기에도 바쁜 소기업은 그냥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일단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면 말이다.

내가 하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설득력이 없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런가? 그렇다면 좋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여기는 어느 도시 외곽의 중소기업 사무실. 그곳으로 어느 날 사정 팀이 들이닥친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서류를 그야말로 먼지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쓸어 담아 간다. 이제 분석이다. 아하~ 그리고 거기에서 공무원들에게 건넨 떡값이 기록된 장부 하나를 찾아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소유예 되었던 이전 사안에 이제 새로운 죄목 하나가 덧붙여진다. 이름하여, 뇌물공여죄. 이번 사정에 딱! 들어맞는 죄목이다. 잡아들이고, 구속 영장 신청해! 상황 끝.

너무 싱거운가? 하지만 이런 일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검찰에서 이런 사안을 찾아내기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왜 그런 거냐고? 세상에...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니. "걸면 걸린다"는 저 유명한 법칙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더란 말인가? 하지만 뭐, 굳이 설명을 하란다면 못할 것도 없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 간단히 말하겠다.

작은 업체라도 운영해본 이라면, 자신의 업체와 관련 있는 담당 공무원에게 아무런 인사도 없이 명절 등을 넘길 수 없다는 건 익히 아는 바다. 물론 그것을 꼭 색안경 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냥 우리 사회의 한 풍속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도 그것은 족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주고받은 당사자들은 그것을 뇌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정(司正)에서 그런 사정(事情)이나 사정(私情)이 들어설 여지란 없다. 그러니 그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죄를 더 추가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은 죄, 그래서 그것을 장부에 기록하여 남기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일을 한 보통사람이라는 죄.


"이실직고하렸다!"


에니웨이, 잡아들였으면, 이제는 '이실직고 하렸다!' 이거만 열심히 외치면 된다. 무슨 그런 경우가 다 있느냐구? 거부하면 될 게 아니냐구? 거부한다고? 거기서 거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그야말로 구제불능인 사람이다. 세상에 뇌물공여죄를 걸어서 걸려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더구나 사정의 칼바람이 횡행하는 이 시기에? 검경이 건수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설치는 이 마당에?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뭐, 그래도 상황 파악을 못한 채 끝까지 우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냥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일단 구속하고, 해당 업체의 관련 업무를 보는 모든 공무원들을 불러들이는 거다. 떡값의 뇌물성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 공무원들은 당연히 해당 부서의 모든 서류를 싸 짊어지고 검사 앞으로 행차해야 한다. 행여 뇌물을 먹고 미비한 서류를 통과시켜준 것은 아닌지를 검사님께서 직접 확인해봐야 하니까 말이다.

이쯤 되면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첫째는 공무원들의 반응이다. 공무원들은 이제 문제가 된 그 업체라면 이를 부득부득 갈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건수 올리기에 안달 나 있는 검사한테 그냥 건수 하나 챙겨주고 나오면 서로가 편할 일을, 멍청한 인간이 결과가 뻔한 일을 두고 고집인 바람에 할 일도 못한 채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칫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이 두려우니 그 업체의 일이라면 이제 눈에다가 쌍심지를 켜고서 모든 일에 원칙만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회사는 이미 반은 갔다고 생각해도 좋다.

왜냐고? 원칙을 강조하는데 왜 회사가 가느냐고? 하~참, 이건 진짜로 순진한 건지 순진한 척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하나의 예만 더 들어보자. 지하철이나 버스 회사들이 여차 하면 들고 나오는 것이 원칙 준수 운행이다. 감이 가는가?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 파업의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다. 원칙이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경쟁사에는 해당되지 않은 원칙이 한 곳에만 일방적으로 강요될 때, 그 회사는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는 바로 그런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언론 매체의 '밥'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어떻게든 버텨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현실이 무더기로 앞을 막아선다. 일단 회사의 대표가 구속되는 경우에 가장 심한 타격을 입는 것은 언론 매체에 의해서이다. 만일 그것이 작은 소도시라면 그 타격은 더욱 크다. 대중의 흥미를 먹고 사는 언론은 사정 바람에 춤을 춘다. 더구나 현재 이뤄지고 있는 사정 작업은 그야말로 역사적 과업이 아니던가? 역사적 사명을 띠고 기꺼이 동참해야 한다. 작은 사건이라고 해서 어찌 그냥 넘어가거나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작은 거라도 어떻게든 크게 크게 알려야 할 막중한 책임 의식마저 느껴야 할 판이다.

검찰 주변을 맴돌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언론 종사자에게 이와 같은 사건보다 더한 먹이감도 없다.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째로 굴러 들어온 셈이라고나 할까? 그럴듯한 명분까지 생긴 것이니, 이제 바야흐로 그들의 먹이사냥이 시작된다. 시간대별로 발가벗기는 일로 그들은 신이 난다. 얼떨결에 잡혀온 저 순진한 사람은 그들의 더할 데 없는 밥이 된다. 그렇다. 말 그대로 '밥'이다. 그들은 그걸로 결국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므로.

그러고 보면 기자라는 직업은 참 많이 생각해보고 나서 선택해야 할 일인 듯싶다.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있겠지만, 하여튼 다른 이가 밥을 못 먹는 일이 많아야, 예컨대 큰 재난이 닥쳐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죽어 넘어지거나, 이렇듯 사정 바람에 걸려 죽을 지경에 처하는 사람이 있어야 밥을 챙겨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인 건 사실이니 말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취재하여 보도하는 양을 보고 있노라면 저들에게도 과연 부모형제가 있고 자식들이 있는 것인지 자주 궁금해지곤 한다.

사건에 접근하는 그들의 행태는 그만큼이나 비이성적이다. 부모가 있고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저렇게까지 몰아세울 수 있을까 싶도록, 참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그들은 사람을 몰아세운다. 법원의 확정 판결이 있기 이전에 벌써 여론으로 재판을 끝내버리는 것이 저들의 행태이다. 그들에게는 무죄추정의 원칙 같은 것은 아예 발 디딜 틈도 없다. 검사의 부름을 받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이미 죄인이 되어버린다. 이거 말이 많이 헛나갔다. 여기에 대한 더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를 빌어 다시 하도록 하겠다. 사정 이야기를 계속하자.


검찰은 결국 건수 하나를 채우고


검찰

애썼어요, 검찰 나으리~

일단 그렇게 지역 언론의 밥이 되고 난 다음이면 이제 본격적인 시련이 닥쳐온다. 그 회사는 거래처 혹은 고객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고, 그러면 이제 그 회사의 운명은 다한 것일 수밖에 없다.

회사의 대표가 구속된 마당에 어느 은행에서 여신을 줄 것이며, 어떤 고객이 있어 그 회사에 일을 맡길 것인가? 은행은 기존의 여신에 대한 일시 상환을 서두르고, 고객은 맡겼던 일도 다른 곳으로 돌리려 들 것이다. 문을 닫아걸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정도에 이르게 되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그제서야 자신이 뭐를 잘못하고 있는 건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밸'이라는 게 있다.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또한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또 한번 버텨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회에서 매장 당하는 결과밖에는 없다. 그야말로 산송장이 되는 길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정도의 회사를 운영하는 이라면 자식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다 견딜 수 있어도 감방에 갇혀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이는 것은 못할 일이다. 더욱이 그 일로 자식들이 학교나 사회생활에서 외면당하는 일은 차마 견디기 힘든 노릇일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그는 이제 ‘이실직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걸로 끝이다. 그렇게 검찰은 건수 하나를 챙긴다.



사뭇 횡발수발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현재 내게는 차분한 이야기를 전개할 여유가 별로 없다. 이 글을 다듬을 여력도 없다. 그냥 이해해주시라. 부탁컨대,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내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에 주목해 주시라. 나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정이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개를 잡고 한번 물어보라. "걸면 걸리는" 이런 사정에는 그 개새끼도 승복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사정이란다. 참으로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이런 식의 사정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결국 힘없고 빽 없는 억울한 사람만을 양산할 뿐이다. 도대체 사정을 하는 사람도 걸면 걸리는 사정에서 누가 누구를 사정한단 말인가? 이런 사정으로 무슨 정의를 세울 수 있겠으며 어떤 깨끗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겠더란 말인가?


진정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다면!


마무리를 해야겠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언제까지 부패공화국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대안은 있다. 여러 언론에 등장하여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저 머리 좋고 입담 좋은 글 꾼들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이상한 것이 아니라도 대안은 있다. 아주 간단하다. 지금 당장 무슨 부정부패 어쩌고 하는 특위 구성을 당장 중지하는 것이다. 더 이상의 사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쓰레기 같은 일은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사정을 하는 집단의 선명성이 바닥인 마당에, 그 놈도 걸면 걸리는 마당에 도대체 누가 누구를 사정한단 말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깜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라는 짝의 웃기는 짓거리일 뿐이다. 이런 사정에서 누가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걸려든 이들은 다만 재수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가슴 속에 증오심만을 하나 가득 담게 될 뿐이다.

최근 이곳저곳의 언론매체에서는 신창원이나 임창렬이 잡혀 들어가며 지은 얄궂은 미소를 두고 연일 입방아 질이다. 그러나 그런 입방아 질을 해대는 사람들은 정녕 그 이유를 몰라서 그러는가? 아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왜 신창원이나 임창렬이 그런 미소를 짓는지를 모를 리가 없는 그들이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다. "걸면 걸리는" 우리를 보고 말이다. 그런데도 왜 그런 쓸데없는 입방아 질인가? 나는 도대체 그들의 그런 교활함이 싫기만 하다. 자신의 비리를 뒤에 감추고 벌이는 쇼인 걸로만 보인다.

어쨌거나, 이제 더 이상은 그런 얄궂은 미소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자. 죄를 지었다면 당연히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이 어쭙잖은 사정 놀음을 중지해야 한다. 걸면 4천만 모두가 범죄자로 걸릴 수 있는 이 웃기는 쇼를 그만두어야 한다. 지금까지 자행되어온 모든 부정과 부패와 비리에 대한 일체의 책임은 더 이상 묻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음,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사천만 모두 '걸면 걸리는' 나라 -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억울하도록 하자


새로운 법안을 만든다고 난리 피울 것도 없다. 법이 미비한 때문에 4천만이 ‘걸면 걸리는’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은 아니질 않는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기왕의 법으로도 얼마든지 깨끗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행하는 방법론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라도 걸면 걸리는 이런 방식으로는 수 억년이 걸려도 사정에 성공할 수 없다.

진정으로 깨끗한 사회를 원한다면 이전의 모든 부정과 부패와 비리에 대해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아야 한다. 사정(司正)은 그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이후로는 한 치의 사정(私情)이나 사정(事情)이 들어설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사소한 잘못이라도 그 책임을 엄정히 물어야 한다. 그때라야만 비로소 사정은 사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 이외의 다른 길이란 없다.

혹자는 말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결국 부도덕을 더 확산시키는 일은 아니겠느냐고. 이전의 부패 비리형 인간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고. 그러나 지금까지도 우리는 많이 억울했다.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억울하도록 하자. 그것이 결국은 우리의 억울함을 우리의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덧붙이는글> 위에 옮기는 글은 지난 20세기 말, 사정 정국의 칼날이 전국을 휘몰아치던 시기에 모종의 일을 겪으면서 그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 글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당시의 상황에 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으나, 최근 일련의 사태에서 검경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와 관련하여 한번쯤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다시 옮겨 적는다.

'걸면 걸린다'는 저 표현은 당시 엄청 화제가 되었던 어느 휴대폰 광고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저 표현이 발전해온 그대로라면, 다시말해 '걸면 걸린다'가 각광받는 광고 문구로 등장할 정도의 '잘 아니 걸리는' 사회에서 '안 걸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사회로 발전을 해온 것이라면 검경의 '거는 기술' 또한 그만큼은 정교하게 발전했을 법 한데, 드러난 바로는 저 당시에 비해 나아진 건 도대체 없어보인다.    



 

2009/02/06 20:46 2009/02/06 20:46

시간을 두고 명품 글 하나 쓰려 했더니 그게 안 되네.
입 달린 아해들은 다 나서 한마디씩 하고 있어서 말이지.
근데 홀애비 심정 과부가 안다더라고
아저씨도 조급증에서는 어떤 이들 못지가 않아.
조급해 하는 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라는 얘기지.
이 글은 그래서 쓰는 글이야.
조급한 이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남기는 초벌구이 글이라 생각하면 될 거야.
잘 듣보시도록.


MBC PD수첩, 너희는 아니다

우리시대의 정직한 목격자? MBC PD수첩, 니들은 아니라니까



"용산 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

MBC PD수첩이 이번에 올린 타이틀이야.
이런저런 된소리 다 빼고
그렇다면 이같은 타이틀에서 우리가 뭐를 기대하겠어?
어떤 내용이 다루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겠느냐 이거지.
그렇지. 바로 그런 거야.
아저씨가 니들 얘기하는 거 대충 정리를 하자면 이래.



어떤 이가 망루에 올랐어.
그냥 오른 게 아니야.
신나 등으로 무장을 하고 올랐지.
죽을 각오로 올랐다는 얘기야.
결국 불에 타 죽었지.
억울해.
억울하지.
어느 죽음이라고 억울하지 않겠어?
하물며 생떼같은 죽음이었는데.

(철거민 쪽에 대고)

왜 망루에 올랐던 거야?
강제철거를 당했거든.
왜 강제철거를 당했지?
보상금에 합의할 수 없어서야.
왜 합의를 할 수 없엇는데?
보상금이 적었기 때문이지.
보상금이 얼마였는데?
이러저러했어.
얼마를 요구한 건데?
저러이러했지.
그럼 서로 보상금액을 다르게 생각한 거네
그렇지.
합의에 이를 길은 없었던 거야?
없었어.
왜?
철거하는 쪽이 막무가내였거든.

(철거하는 쪽에 대고)

왜 막무가내로 밀어붙였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해서지.
왜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요러저러해서지.

(철거민 쪽에 대고)

요러저러한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데?
그걸로는 안 되지?
이유는?
들어간 비용이 얼마이기 때문이야.



"용산 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

그러니까 저 타이틀로 우리가 MBC PD수첩에 기대함직한 내용은 대강 저 정도야.
방송 내용이 단순히 저기서 끝나는 거냐고?
당연히 아니지.
저기에 이제 PD수첩이 자신들의 취재를 덧붙여야지.
양쪽 주장이 첨예하게 갈려 있으니 이제 그걸 자신들이 취재한 내용으로 함 따져봐야 하는 거야.
그게 PD수첩이 해야 할 일이지.

뭐 내가 PD수첩 PD는 아니니까 다른 이들 고유 영역에 대고 뭐라 할 수는 없어.
하지만 MBC가 어떤 곳이야?
명색이 공영방송임을 부르대고 있는 곳 아니겠어?  
그렇다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정도는 건드려야 한다는 것쯤 말한대도 무방할 거야.

예컨대, 이런 거지.

1. 문제가 발생한 용산 재개발 사업의 개요
1.1.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2. 문제가 된 보상금의 개요
2.1.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용산4구역


이같은 사항은 비단 PD수첩같은 심층 보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사안에 접근하는 데 있어 미리 살펴야 할 사항 기본 중에 기본이야

그렇지만 MBC PD수첩에서 저런 내용 나왔어?
내가 보기엔 근처도 가지 않았어.

잠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 닉 하나 쓸 줄 모르는 키워리어들한테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겠어.
그런 이들을 위해 풀어서 한번 더 설명을 하지.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철거민을 강제로 내몬 재개발 사업이야.
그리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보상금인 거고.
죽음을 각오하고 신나병 품에 안고 망루에 오른 것도 결국은 저 보상금 때문이었어.

그렇다면 "용산 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
와 같은 타이틀로 방송을 하는 경우 이에 대한 브리핑은 필수적인 거야. 곧,

재개발 사업에 대한 얘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언제 조합설립인가가 났는지
그 과정은 어떠했는지
보상금에 대한 규정은 어떤 근거로 만들어졌으며
조합원 일반의 의견은 어떠했는지
나아가 세입자에 대한 대책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에 대한 세입자 일반의 의견은 어떠했는지

등의 설명이 우선이라는 얘기지.
이건 상식이야.

우리가 위에서 "용산 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라는 타이틀로 방송에서 다루어지리라 기대한 내용들은 모두 이같은 상식에 근거를 두고 있어.
때문에 PD수첩이 정상적인 상식에 의한 방송이었다면 그것은 저 위에서 우리가 기대한 사항들을 자신들이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해줘야 하는 것이었어.
다시말해,


(철거하는 쪽에 대고)
왜 막무가내로 밀어붙였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해서지.
왜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요러저러해서지.

(철거민 쪽에 대고)
요러저러한 이유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데?
그걸로는 안 되지?
이유는?
들어간 비용이 얼마이기 때문이야.



여기서 '요러저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가능하다면 객관적으로) 전해줘야 했을 거라는 얘기야.

내가 알기로(나도 2000년 초에 용산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어)
용산 재개발 사업 얘기는 2000년 초부터 나왔어.
이는 2006년에 조합 설립인가가 나온 것만 봐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얘기야.
일반적으로 사업 얘기 나와서 조합 설립인가 나오기 전까지 대강 저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거든. 
내같으면 그런 구역에 몇 억씩 시설비 투자하고 몇 천만원씩 권리금 주고 들어가지는 않아.
아마 누구라도 그럴 거야.

그런데 그들은 들어갔어.
그렇다면 방송은 그들이 왜 그런 무모한 투자를 했는지도 살펴야 하는 거야.
하다못해 그들이 재개발 얘기를 전혀 듣지를 못 했다거나
아니면 그렇게 빨리 사업이 진행되리라는 생각을 못 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정도 기간이면 충분히 본전은 뽑고 남으리라는 계산을 했다거나
또 그것도 아니라면 대한민국에서는 원래 보상이 시설비와 권리금까지를 다 보전해주고 더 해서 전년 수익 대비 향후 1년치 정도의 보상은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거나
뭐 이런 얘기들을 전해줬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래야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내몬, 저 첨예한 문제의 근본원인에 대해 사람들이 나름대로 판단해볼 수 있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PD수첩에서 저 '요러저러한' 내용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건들었어?
내가 잘못 봤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는 그런 내용 없었어.
저런 내용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

PD수첩은 그냥 죽은 사람들 억울하다는 얘기만 내보내고 있었어.
아니, 어느날 갑자기 생떼같이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거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어?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어딨겠냐는 말이야.
세수를 다 하고 죽었다고 해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죽음은 억울한 거야.
하물며 갑작스런 죽음임에랴.
이건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거야.

그런데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억울하다는 얘기를 왜 하고 있는 거야?
아니, 할 수도 있어.
PD수첩이 사천만의 눈물샘 자극해서 눈물 찍어내는 무슨 휴먼다큐 프로그램이라면 또 모르겠어.
그렇다면 뭐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하지만 PD수첩이 지금 휴먼다큐 찍는 프로그램이야?
아니잖어?
명색이 그래도 시사다큐 프로그램이잖어? 그것도 심층보도를 한다는 프로그램이야. 
그런데 왜 정작 알려야 할 내용에는 눈을 감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뻔한 스토리에 매달리고 있어?

내가 PD수첩을 보면서 '답답했다'고 한 건 이 때문이야.
니들은 이거 답답하지 않어?
그렇다면 니들은 도대체 저 죽음의 원인에는 관심도 없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어.
누구 말대로(누구지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데) '시체놀이' 하는 것 밖에는 안 되는 거야.
설사 니들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얘기지.

내가 PD수첩을 비난하고 있는 것도 이 지점이야.
앞선 글에서도 밝혔지만 나 이런 프로그램 별로여 하는 사람이야.
늘 이렇거든.
내가 보기에 얘들은 문제의 본질같은 것에는 애초부터 관심도 없어 보인다는 말이지.

그냥 지들 보기에 아니다싶으면 딱 지들 수준에서 문제를 재단해버려.
그리고는 자신들의 임의재단에 따라 필요한 자료들을 구하고 그것을 짜깁기해서 늘어놓지.

아, 이런 더리한 짓 보다못해 언젠가 한번 디따 다툰 적 있었지.
물론 내가 패했지.
왜냐고?
PD가 숨어버렸어. 방송 뒤에 꼭꼭 숨어서는 아무리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오는 거야.
안 나오는 넘을 무슨 수로 이겨?  
당시는 그게 통했어.
요즘이라면 아마 달랐을 거야. 한번쯤 붙어볼 만 했을 거라는 얘기지.
그때 그 PD 어디 가셨나 모르겠어. 지금도 궁금한 게 많은 데 말이지.
그 사건 이후로는 통 뵈지를 않더라고.

에니웨이, 다시 이 문제로 돌아가지.

아까 이 글 쓰기 전에 잠깐 보니
경향신문의 이대근이라는 친구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쓴 "용산 테러리스트"라는 칼럼에서
"국가와 시민의 사회계약은 거의 깨졌다"며 설래발을 치고 있더군.

이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지?
이명박 정부, 니네 이제 대표성 없다는 얘기야.
물러나라는 얘기고, 국민들은 불복종해도 된다는 얘기인 거지.

몇 번 언급한 적 있지만 경향신문은 기사를 쓰는 기자는 정말 그 역량들이 뛰어난데
칼럼진은 내부건 외부건을 떠나서 왜 하나같이 저렇게 찌질이같은 종자들만 있는 건지 모르겠어.

암튼, 이 칼럼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


"철거민, 그들은 누군가. 30년 넘게 장사한 거리에서 쫓겨나 다 잃고, 결국 그 자리에서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칠순의 노인이었다. 외환위기로 일식집 문을 닫은 뒤 다시 살아보자고 복어집을 낸 지 3년 만에 그 꿈은 거품처럼 꺼지고, 살아갈 기운을 잃은 쉰여섯의 가장이었다. 이 거리를 떠나야 했기에 물과 전기 없는 천막집을 짓고 노점상, 막노동을 하며 철거된 인생을 살다 뜨거운 불속에 사라져야 했던 쉰 살의 가난한 아저씨였다. 땀 흘려 일군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고, 살아갈 희망을 잃었다."



이거 어디서 듣본 거 같지 않아?
맞아. PD수첩. 딱 그 수준이야.
내용은 없고 눈물겨운 자기 감상뿐이지.
이 친구 저 글 쓰면서 눈물이나 쏟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암튼, 이 나라의 언론 판이 지금 딱 이 수준이야.

명색이 정치·국제 에디터라는 자가
"30년 넘게 장사한 거리에서 쫓겨나 다 잃고, 결국 그 자리에서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칠순의 노인"이라는 둥
"외환위기로 일식집 문을 닫은 뒤 다시 살아보자고 복어집을 낸 지 3년 만에 그 꿈은 거품처럼 꺼지고, 살아갈 기운을 잃은 쉰여섯의 가장"이라는 둥
"이 거리를 떠나야 했기에 물과 전기 없는 천막집을 짓고 노점상, 막노동을 하며 철거된 인생을 살다 뜨거운 불속에 사라져야 했던 쉰 살의 가난한 아저씨"였다는 둥
"땀 흘려 일군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고, 살아갈 희망을 잃었다"는 둥의 자기 감상에나 빠져 있는 판이 지금 이 나라의 언론 판인 거지.

눈물어린 감상 들이대면서
"이렇게 다 빼앗긴 이들이 자비를 베풀기를 기대했는가. 권력과 재벌과 건물주의 욕망을 위해 온순한 양처럼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았는가"

설래발치며 종주먹 들이밀고 있는 게 이 나라 언론인의 현주소고. 
이런 주제에 "국가와 시민의 사회계약은 거의 깨졌다"며 선동질을 하고 있는 게 에디터라는 자의 수준인 거야.

내가 PD 수첩에서 본 게 딱 저 수준이고 저 선동질이었어.
방송이 끝난 다음
"저래서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그렇게 기를 쓰고 방송을 잡으려고 뎀비는 거겠구나!"
생각했던 까닭이고.

자, 그래서 말인데
PD수첩 열심히 봤다는 니들 가운데 누가 대표로 나서서 대답 함 해봐봐

그래 니들이 죽고 못 사는 저 PD수첩에 따르면,  
그러니까  


"도대체,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다는 거니?"




 

<덧붙이는글> 질문 받습니다.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으면 질문하세요. 언제나 그렇듯이 답은 칼같이 달아드립니다.



  

2009/02/05 20:32 2009/02/05 20:32

MBC PD수첩을 잘 보지 않는 편입니다. 아니, 거의 보지 않습니다. '우리시대의 정직한 목격자'를 자임하는 그들이 별로 정직해뵈지도 않고 그래서 미덥지가 않아서입니다. 기껏 자신들의 의도에 부합하는 '사실'을 '편집'해 보여주는 주제에 스스로를 '정직한 사람들'이라 칭하는 것부터가 미더워뵈지 않습니다.
 

MBC PD수첩

우리시대의 정직한 목격자? MBC PD수첩, 너희는 아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시사고발 프로그램 일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보다는 그걸 만드는 이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건 언론 일반에 대한 불신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경우 특정 의도와 목적에 꿰어맞춘 그 '짜깁기 신공'이 특히 빛을 발하는 부문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편집된 사실'은 곧 '정연한 거짓'과 통하더라는 경험칙도 한몫을 하고 있구요.

어떤 극작가도 자신이 쓴 대본을 일러 '정직하다'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짜깁기한 사실'을 보여주면서 스스로를 '정직하다' 말하고 있습니다(이것부터도 정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정직한가의 여부는 프로그램의 내용이 결정하는 것이지 자기들 스스로가 갖다 붙인다고 해서 정직해지는 건 아닙니다. '민주정의당'이라는 당명이 '민주'와 '정의'를 담보해주지 않는 것처럼이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에니웨이, 오늘 MBC PD수첩을 봤습니다.
"용산 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

방송을 보면서 내내 '답답'했습니다.
방송이 끝난 다음에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저래서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그렇게 기를 쓰고 방송을 잡으려고 뎀비는 거겠구나!"

자신이 듣고싶은 것만 듣고 보여주고싶은 것만 보여준
한마디로, '제멋대로 짜깁기'의 진수를 보여준 방송 내용이었습니다.







<덧붙이는글> 블로고스피어의 PD수첩 강상평들과 이곳 댓글들을 보고 있으려니
"아~ 이래서 히틀러의 나찌즘이 가능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재밌어요. -_ 
<덧붙이는글2> 아래 쌀국수님 댓글에 답하면서 관련 글을 하나 포스팅한다고 했고, 원래 어제 저녁에 할 요량이었습니다. 헌데 짐을 정리하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그만 곯아떨어져버렸습니다. 아마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인 듯싶습니다. 낮 시간에는 아무래도 힘들고, 관련 글은 오늘 저녁에 전하겠습니다. 댓글들에 대한 답(은 한다는 주의입니다)도 그때 전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2009/02/04 02:13 2009/02/04 02:13

1.
아니다. 이건 과거에 내가 미국으로 떠나지 못한 데 대한 후회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 꿈속에서만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에 대한 막연한 향수일 뿐이다.

막상 실현되어 우리의 손 안에 들어오면 그것은 우리가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닫게 되는 그런 것일 따름이다.

내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미국이 아닌지도 모른다. 미국은 내 불안의 한 구실에 불과한 것일른지도 모르며, 우리의 동경이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고 나서 실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고 있는 편이 나은 일일른지도 모르겠다.


1.
25시. 인류의 모든 구제가 끝난 시간이라는 뜻이다.
설사 메시아가 다시 온다 하더라도 아무런 구제도 할 수 없는 시간, 이것은 최후의 시간이 아니다. 최후의 시간에서도 한 시간이나 더 지나버린 시간인 것이다. 이것이 서구 사회의 정확한 현재 시간이다.


1.
도대체 신에 대한 모독에서 비롯되지 않는 인간의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인간의 모든 기쁨이란 실로 신을 향한 모독에 지나지 않는 것을.


1.
수천 시간을 해저에서 지내야 하는 잠수함에는 대개 환기 시간을 알려주는 특별한 기계 장치가 있다. 하지만 그런 장비가 없었던 예전에는 잠수함에 흰토끼를 싣고 다녔다. 함내에 산소가 부족하면 토끼들이 먼저 죽기 때문인데, 흰토끼가 죽고나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시간은 대여섯 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토끼가 죽게 되면 그들은 필사적인 해면으로의 부상을 시도하든가 아니면 권총으로 서로를 쏘아서 옥쇄하는 길을 택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길만이 주어진다.

현대사회는 지금 호흡 곤란증에 빠져 있다.
관료주의 군대 정부 국가조직 행정부 등 모든 것이 기계화되어 사람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질식할 운명에 놓여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마치 잠수함의 흰토끼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이를 모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아직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흰토끼가 죽고 나면 그들이 살 수 있는 시간은 고작 6시간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끔찍한 괴로움을 겪으며 죽어가는 인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단 흰토끼가 죽고 나면 해피엔딩이란 있을 수 없다.


1.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명예와 자존심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런 인간의 삶이란 노예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긍지를 가지고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오늘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현대사회는 개인의 명예와 의지, 다시말해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있다. 가능한 것은 다만 노예로서의 생활뿐이지만 그나마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노예인 사회는 결국 멸망하기 마련이다.


1.
서구 문명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미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 사람들이 세워둔 전통이다. 둘째는 법 질서에 대한 존중이고, 이건 로마 사람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셋째는 인간 존중에 관한 사상이다. 이건 기독교인이 확립해 놓은 특성이다.

미와 법과 인간에 대한 존중, 서구 문명은 바로 이 세 가지의 특성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어 왔다. 그런데 이제 유감스럽게도 서구 문명은 이 세 가지 유산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없는 한 서구 문명은 존속할 수가 없다.
 
지금 서구 문명이 처해 있는 시간이 바로 "25시"이다.


1.
인간이란 결국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어떤 사람은 좀더 착하고 어떤 사람은 좀더 고약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양면을 많건 적건 동시에 지니고 있기 마련인 것이다.


1.
인간의 공포에는 한계가 있고 모든 슬픔에는 종말이 있다. 오래 슬퍼할 시간이 어디에 있으랴.
- 엘리엇 {25시}에서 재인용


1.
모든 사람이 그를 짓밟으려 한다. 온 세상이 그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 마치 그가 살아 있으면 세계가 멸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면 온 세상이 퇴보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그를 죽이지 못해 기를 쓰고 있다.

그는 지상의 모든 악에 책임이 있다.
지금 지상의 모든 죄는 요한 모리츠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그를 죽이려 한다.


1.
앞으로 나는 구경꾼으로 살아가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나 구경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증인으로서만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서구의 기술사회는 인간에게 관중석밖에는 내주지 않는다.


1.
트라이언은 첫번째 총성을 들었다. 이어 두번째 총성이 울렸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온 몸이 나른해졌다. 마치 한 겨울에 독한 술을 마시고 후끈한 방에 앉았을 때처럼 옴몸이 노곤해졌다. 따듯한 액체가 손등을 흘러내렸다. 그러자 그의 몸은 철조망 아래의 찌는 듯한 대지 위에 무너져 내렸다. 옷걸이에서 미끄러져 내려앉은 외투와 같은 모습이었다.

트라이언은 맥없이 땅위에 쓰러진 자신의 육체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이 육체야말로 자기의 절친한 벗이 아니었던가? 이제야 자기가 그것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다음에는 그 육체에 견줄 만큼 아끼고 사랑했던 아내와 아버지를 생각했다. 노라와 어머니, 요한 모리츠와 다미안 검사의 얼굴이 눈앞에 잠시 떠올랐다가, 박혀 있던 못을 뽑으면 그만 싱겁게 떨어져 버리는 액자처럼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함께 트라이언의 육체도 겹겹이 포개져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의식은 그 영상을 간직할 힘이 없었다. 기운이 모두 빠져버렸다. 잠시동안이나마 곧추세울 수 있었던 마지막 부분은 머리였다. 이마는 아직 지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몇 분 후에는 머리마저 가눌 기운이 없어졌다.
 



  

2009/02/03 22:04 2009/02/03 22:04

대한민국에는 지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하나가 떠돌고 있다. 이름하여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 유령이다. 이것을 유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라는 그 개념 자체가 도무지 뿌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직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희한한 진보이고 보수인 때문이다.


'진보-보수' 유령놀이- 2003 대한민국 언론의 지형도 (1)


지금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것은 대통령도 아니고 국회도 아니고 검찰도 아니다. 국민은 더더구나 아니다.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움직여가고 있는 것은 바로 '진보와 보수'라는 이 유령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유령이 만들어 전파하는 사이비 여론이다. 유령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대 재생산되는 이런 사이비 여론이 판을 치는 사회 - 그것이 바로 2003년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또한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다.

이 유령은 정치적 당파성을 띠지 않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고, 편파적이지 않은 언론은 언론이 아니고, 선동적이 아닌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고 말한다.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진보냐, 보수냐' '적이냐, 아군이냐'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갈라놓는다. 자신의 편가르기가 여의치 않을 때는 윽박지르기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면서 이것을 시대정신이라 말하고 여론이라 선전한다. 그러나 이건 시대정신도 아니고 여론도 아니다. 사이비일 뿐이다.

당파성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본래 모든 주의주장이란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자신의 주의주장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언론 또한 자신의 당파성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특정 언론이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됐다고 잘라 말해서는 안 된다. 언론의 역사 자체가 언론의 출발이 당파성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있기도 하다.


당파성을 띠지 않은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언론이 당파적이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 또한 언론의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사실이다. 언론은 당파적 선전을 위한 도구에서 출발하였으되, 또한 바로 그 지점에서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언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초기 언론의 당파지를 일컫는 게 아니라, 당파지의 한계선상에서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노력해온 역사의 산물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는 당파지를 폄훼하거나 당파지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오늘날에도 특정 이념에 충실한 당파지는 필요하다. 그러나 당파지는 어디까지나 당파지일 뿐이다. 당파지는 본질적으로 특정 이념을 대변 선전 선동하면서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당파지만 존재하거나 당파지가 득세하는 사회에서는 언론의 사명 가운데 하나인 (당파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진실을 접할 수 있는 여지는 그만큼 좁아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언론의 통합과 조정 기능은 빛을 잃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유일한 기능이 되고 존재 가치가 되고 만다.

현대 사회는 당파지가 처음 출현할 당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다양한 계층과 집단이 복잡다변하는 이해관계에 따라 얽히고 설켜 있다. 자신의 당파성을 대변하고 선전하는 일이 유일 목적인 당파지에서 모든 계층과 집단의 주장과 이해관계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기란 불가능하다. 당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개관하고 전하는 언론이 과거보다 더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 언론의 현실은 과거의 당파지보다 더한 당파성을 띠고 자신의 주의주장만이 절대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신문이나 방송을 듣보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실을 진실로 알고 지낼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지금 우리는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완전히 상반되는 방식으로 전해지는 '팩트'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의 신문만 보거나 방송만 듣고서 그게 진정한 팩트이거니 믿었다가는 낭패를 넘어 망신을 당하기 십상인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팩트'에 대하여

팩트, 그리고 그 해석 혹은 관점에 대하여



민주통신의 정체성 - 색깔이 뭐냐(?)


민주통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민주통신의 색깔이 뭐냐는 것이다.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질문의 취지를 확인하고 나면 이내 맥이 빠지고 만다. 질문한 의도가 실망스럽기 일쑤여서다. 민주통신의 정체성을 묻는 이유는 하나같이 똑같다. 민주통신은 '진보인가 보수인가'를 알고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통신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질문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다. 질문이 정확해야 답변 또한 정확할 수 있다. 구분 자체가 모호한 제멋대로의 질문을 던져놓고 거기서 바른 답이 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기사 우문현답이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도사연한 선문답이나 하고 있을만큼 한가한 처지도 못 된다.

민주통신은 언론이다. 언론의 사명은 일차적으로 독자에게 사실을 바르고 빠르게 전하는 데 있다. 나아가 사회적 현안을 분석 검토하고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여 사회 여론을 리드하는 데 있다. 그리고 여기서 금과옥조로 삼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편부당의 정신이다.

여기 어디에 '진보냐 보수냐' 하는 게 들어갈 여지가 있단 말인가? 더욱이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 자체가 최소한의 정의도 담보 받지 못한, 오직 진영 멘탈리티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해 있는 지금 그것이 어떻게 바른 언론이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혹자는 말한다. 민주통신의 논리는 다만 이상에 지나지 않는 회색논리일 뿐이라고. 그러면서 지금은 '전쟁'을 해야 할 시기라고 말한다. 기성언론의 폐해를 강조하면서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성언론이 통합과 조정보다는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온 점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아니 그것이 사실이고 그 폐해를 익히 알고 있고 그래서 그런 언론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더욱, 새롭게 시작하는 언론은 동일한 방식의 우를 범해서는 안될 일이다.


'진보-보수'의 패거리 유령 놀음을 거부한다


민주통신은 기성언론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에 기꺼이 동의한다. 민주통신이 대(對)언론 웹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민주통신을 폄훼하는 무리들의 가타부타를 떠나 이에 대한 하나의 명징한 증거다. 민주통신 또한 언론개혁이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 가운데 하나임에 인식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론에서는 언론개혁을 주장하는 일부 매체와는 길을 달리 한다.

민주통신은, 일부 매체가 주장하듯이 언론개혁이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언론개혁은 전쟁이 아닌 전례(바른언론의 사례 제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이 기성언론의 폐해를 극복하고 언론을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언론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바른 언론개혁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언론개혁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추의 논리'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추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힘껏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들이 흔히 취하고 있는 효과적인 언론개혁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추의 운동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추를 다른 한쪽에서 힘껏 당기면 일시적으로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추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또다른 반작용을 낳게 되고 결국은 팽팽한 세 대결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거나 죽이거나의 전쟁 상황이고, 이 나라의 언론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팽팽한 세 대결 양상이 뭐가 나쁘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현재의 언론 상황을 창조적인 혼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나 언론과의 전쟁을 선언한 노무현 대통령의 '건전한 긴장관계' 운운하는 논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건전한 긴장관계라는 것 자체가 실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언론 본연의 기능 가운데 하나임을 주목한다면, 그리고 현재의 세 대결이 언론 개혁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 기동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언론이 경계해마지 않아야 하는 정치적 도구가 되어 힘을 낭비하고 있는 양상이라는 데 주목한다면, 이런 주장이란 사실 언어적 수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편가르기 혹은 추의 논리, 그 작용과 반작용


지금 이 나라의 언론은 극한 편가르기의 양상을 띠고 있다. '언언전쟁'으로 불리는 이 상황은 예의 저 '유령'이 갈라놓은 희한한 편가르기에 따라 전개된다. 이 편가르기에서는 누가 더 정론을 펼치는가 하는 것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누가 더 초지일관하게 자기만의 억지를 부릴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고 또한 누가 더 물어뜯기를 잘 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만이 죽거나 죽이거나의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때문이다.

특정언론 죽이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죽이기의 대상이 살아남는 길이란 한 가지밖에 없다. 상황을 더한 극한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것은 분명 자해행위다. 그러나 현실은 이게 먹히고 있다. 예의 저 '추의 논리'가 보여주는 반작용 때문이다. 그리고 죽이겠다면서 칼을 들고 설치는 쪽의 논리가 그 대상에 비해 하나도 나을 게 없다는 점에서 그 반작용이 더한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무용한 힘의 낭비일 뿐이다.

얼마 전에 조선일보는 르몽드지의 외신을 자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임의 왜곡한 기사를 냈다가 사과까지 해야 했다. 당시 문제의 기사를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후안무치할 수 있는가 싶었는데, 오마이뉴스가 그 문제를 바로 지적하고 나섰다. 확실히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적절하고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외신을 임의 왜곡한 것은 조선일보만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일보 기사의 왜곡을 비판한 오마이뉴스 또한 조선일보에 앞서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중동, 대통령과 전쟁하는 족벌"

르몽드지 기사 원문의 어디에도 '족벌'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조중동, 대통령과 전쟁하는 족벌" - 문제의 외신 기사를 전하면서 오마이뉴스가 뽑은 타이틀이다. 그러나 르몽드지 기사 원문의 어디에도 '족벌'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마이뉴스는 서브타이틀에서까지 다시 명백히 자신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족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기사 본문을 포함하면 오마이뉴스는 이 기사 하나에서 이 '족벌'이라는 표현을 무려 6번이나 쓰고 있다.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또한 이 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이는 조선일보 기사의 왜곡 문제를 다룬 후속기사에서 오마이뉴스가 이 '족벌'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나 있다. 타이틀로도 모자라서 서브타이틀에까지 얹어 강조했던 표현을 오마이뉴스가 굳이 빼야 했던 것은 자의적인 해석을 인정한 결과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나면 오마이뉴스가 아니다. 후속 기사를 내보내면서 김정란 교수는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원문은 분명히 "des empires editoriaux et familiaux"로 되어 있다. 직역하면, "언론의, 그리고 가족의 왕국"이라는 뜻이다...이 표현은 "족벌 언론의 왕국"으로 옮길 수 있다. "족벌"이라는 말이 가지는 부정적 함의는 프랑스어로 번역이 불가능하다. 기자는 한국에서의 취재 과정에서 "족벌"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familial" 이상의 프랑스어는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족벌'을 타이틀로 걸었다는 사실이 내심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이는 김 교수의 이 해명은 그러나 설득력이 별로 없다. 차라리 해명을 하지 않음만 못하다고 할 정도로 구차하기까지 하다. 르몽드지의 기자가 한국의 취재 과정에서 '족벌'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 표현을 프랑스어에서 찾을 수가 없었기에 'familial'이라고 썼을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듣고 있자면 듣는 이가 오히려 민망해질 지경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프랑스 기자의 기사 하나를 읽으면서 그 심중까지를 헤아려야 했더란 말인가?


'제멋대로 해석하기' - 죽거나 죽이거나


불어에는 아는 바가 없지만, 르몽드지의 원문에 나온 패밀리는 그냥 패밀리로 읽어서 큰 무리가 없는 표현이다. 원문의 패밀리가 갖는 함의를 모르는 한국민이 누가 있을까? 게다가 김 교수의 이 해명은 기사쓰기의 에이비씨도 무시하고 있다. 어쩌면 프몽드지의 기자를 모욕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표현의 적절한 대응어를 찾지 못하는 경우 기자는 그것을 풀어서 설명하거나 원래의 표현 그대로를 병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실제로 르몽드지의 원문기사에서는 '조동중' 등 특별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모두 설명을 병기하고 있다.

그런 기자가 유독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족벌'만은 예외로 했다는 것은, 설사 기자가 그런 의도로 기사를 작성했다고 할지라도 역자가 나서 변명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김 교수가 앞서의 번역에서 '족벌'로 옮긴 표현이 비단 패밀리에만 한정된 게 아니었고 보면 김 교수의 이 해명이란 구차한 변명 이상이 아니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마이뉴스가 행한 정도의 자의적인 해석은 조선일보의 빼고 끼워넣는 임의 왜곡에 비한다면 어느 정도는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다. 실제로도 조선일보의 왜곡에 대한 적절한 지적을 한 사실만으로도 오마이뉴스는 자신의 우를 충분히 상쇄했다고 본다. 그러나 동일한 외신을 전한 대자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르몽드지의 이 외신 기사는 같은 날 연합뉴스에도 그 요지가 번역되어 실렸다. 그런데 연합뉴스에서 번역한 그 요지를 다시 따서 실은 인터넷 매체 대자보의 기사가 재미있다. 대자보는 인터넷판 미디어비평이라고 할 정도로 거의 매일같이 기성언론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비판에 열을 올리는 인터넷매체다. 그런 곳에서 조선일보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엽기성으로 연합뉴스의 기사를 임의 왜곡하고 있다. 대자보의 독법을 한번 보자. 다음 인용문에서 위쪽은 연합뉴스의 기사이고 아래쪽은 이것을 따서 전하고 있는 대자보의 기사다.
 

르몽드는 "한국의 언론은 때로 명예훼손을 초래할 정도의, 부러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며 각각 200만부 이상의 신문을 발행하는 조선, 중앙, 동아 등 3개 인쇄 매체의 시장 과점과 정부의 KBS, MBC 지배를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조중동이 매일 각각 200만부 이상의 신문을 발행하면서 인쇄 매체의 시장 과점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 대목에서 르몽드는 "한국의 언론은 때로 명예훼손을 초래할 정도의, 부러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 정부가 신언론장악음모를 하려고 한다는 조중동의 주장에 이견을 보였다.

 
연합뉴스 기사의 요지는 '한국의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조중동 3사의 과점과 정부의 방송사 지배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외신도 아닌 한국어로 쓰인 기사를 전하면서 대자보는 자신만의 기상천외한 해석을 내놓는다. 연합뉴스 기사의 어디에도 없는 '심화되고 있다'는 해석은 접어두고라도,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 정부가 신언론장악음모를 하려고 한다는 조중동의 주장에 이견을 보였다'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더하고 있다.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담풍' 해라


르몽드지의 원문기사도 그렇지만, 한국어로 된 연합뉴스 기사도 '한국언론의 문제'로 들고 있는 것은 '조중동의 과점 현상과 정부의 방송 지배'다. 그런데도 대자보는 원문과는 동떨어진 '정부의 신언론장악음모는 조중동의 잘못'이라는 이라는 식의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하나만 더 보자.
 

르몽드는 김대중 전대통령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노대통령과 이 일간지 3사의 반목 등을 전하며 한국에는 독립 언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르몽드는 김대중 전대통령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과의 갈등을 통해 한국에는 독립 언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의 기사는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노대통령과 3사의 반목 등을 '전하며' 독립언론에 대한 요구가 일고 있다고 대등연결을 하고 있는데 반해, 대자보는 '통해' 라는 인과적 연결로 기사의 맥락을 비틀고 있다. 그 결과 연합뉴스의 본래 의미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왜곡의 문제를 넘어 자질의 문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접어두고라도 이렇게 전해진 기사가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고 있을 리가 없다. 전체적인 맥락 또한 원문의 분위기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사실 이것은 오마이뉴스도 마찬가지다). 르몽드지 원문 기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국의 언론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이는 언론과 정부의 '전쟁'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여기에는 한국 언론의 몇 가지 문제가 노정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친재벌 성향의 조중동이 신문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점이고 또다른 문제는 정부의 방송 지배와 이를 통한 언론 장악에의 유혹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에 독립언론에 대한 요구가 높으며 인터넷매체의 확산으로 과거의 언론 독점 시장에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한국 언론 일반에 대한 일종의 비하 내지는 비아냥이 행간에 섞여 있는 기사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반성을 하기는 커녕 서로가 아전인수식 해석을 해가면서 이를 메인 탑으로 걸기에 바쁜 형국이니 이게 어찌 정상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르몽드지 기자의 지적을 다시한번 그대로 보여주는 추태에 다름아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나라 언론은 자칭 진보고 보수고를 떠나서 도무지 반성적 사고를 결여하고 있다. 여기에는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위에서 예로 든 외신 기사 사례 하나만을 두고 보더라도 그렇다. 자신부터가 왜곡을 밥먹듯이 하는 주제에 누구를 개혁하고 무엇을 바꾸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입장을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더라고 비판하는 자조차가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때로는 더하게 비판 받을 일을 서슴치 않는 마당에 어느 누가 그 비판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겠는가? 더구나 비판자의 자질마저가 의심스러운 경우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족벌'과 '어용' 사이 -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다


대자보가 어떤 곳인가?[footnote]얼마 전에 대자보가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이 자리를 빌어 대자보의 창간 10주년을 다시한번 축하드린다. [/footnote] '어용'이라고밖에는 달리 부를 수 없는(오마이뉴스식의 해석이 가능하다면 르몽드지에 실린 우리나라의 방송은 '어용'으로 옮기는 게 맞다) 공중파 방송의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여 기성언론의 논조와 임의왜곡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는, 언론 개혁의 당위성을 소리높여 주장하는 자칭 진보적 인터넷 매체 가운데 하나다. 바로 이 나라에서 지금 언론개혁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 딱 그대로다.

그럼에도 이 모자란 이들은 늘 당당하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바로 저 진보와 보수라는 유령 덕분이다. 어느 모로 봐도 '퇴보'에 지나지 않는 행태를 거듭하면서도 그것을 '진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그러려니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뒤에 '진보와 보수'라는 저 별종의 유령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다'는 식의 놀이에 몰두해 있는 이 유치한들이 언론개혁을 운위하는 한, 이 나라에서 언론개혁이란 없다.


"남에겐 가혹하면서도 자신에겐 준열하지 못한 이 땅의 언론은 민교협의 언론개혁운동이라는 새로운 물결을 불러들이게 됐다. 명색 '언론인'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슬프고 그것이 씁쓸하다. 이 땅의 언론은 얼마나 더 많은 운동을 기다려서만 제머리 깎기의 자정에 나설 것인가. 마침내는 그 끝머리에 엉뚱하게 불거 나올지도 모를 또 다른 '타율' 의 회오리가 없다고만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감시자거나 비판자란 오히려 남에 대해서 보다 자신에게 더욱 준열한 비판정신의 소유자여야 함을 못박아두고 싶다."


MBC 김중배 사장의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갓된 '진보-보수 유령 놀음'에 빠져 진실과는 거리가 먼 당파적 패거리주의 싸움으로 날을 지새는 '정치언론'과 스스로 정치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설치는 '언론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대한민국 사회의 언론이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고 민주통신이 이 자리를 지켜가고 있는 이유다. <2003. 11. 27>
 








<덧붙이는글> 2003년도에 쓴 글이지만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바가 없어 보인다.


 
2009/02/02 04:45 2009/02/02 04:45

19.  글을 쓸 때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은, 맨 처음에 무엇을 놓았어야 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22-23. 내가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 안 된다. 나는 재료의 배치를 새롭게 했다. 같은 말도 그 배치가 달라지면 다른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다. 테니스를 할 때 양쪽이 쓰는 공은 같지만, 한쪽은 그것을 더 잘 치지 않는가.

달리 배치된 말들은 다른 뜻을 만들고, 달리 배치된 뜻은 다른 결과를 나타낸다.

26-27. 말이란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과 같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에 다시 가필을 하는 사람은 초상화가 아닌 상상화를 그리고 있는 셈이고

말을 억지로 꾸며서 대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균형을 잡기 위해 불필요한 붙박이창을 만드는 사람과 같다. 그들의 기준은 정확하게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의 형식을 만드는 데 있다.

29. 자연스러운 문체를 대하는 경우 사람들은 아주 놀라워하며 마음속으로 대단히 기뻐한다. 한 사람의 작가와 만날 것을 기대하다가 한 인간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좋은 안목을 갖게 되고 책을 읽으면서 한 인간을 발견하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의 작가를 발견하고 매우 놀라는 경우가 있다. "당신은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시인으로서 말했을 뿐이다."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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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사람들이 당신을 좋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

69. 너무 빨리 읽거나 너무 천천히 읽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71. 사람에게 술을 조금도 마시지 못하게 한다면, 그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너무 많이 마시게 해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80.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묻고 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머리가 아프다고 말할 적에는 화를 내지 않으면서, 우리가 잘못 추론하고 있다거나 잘못 선택했다는 말을 하면 화를 내는 것인가?"

82.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낭떠러지 위에 있는 커다란 판자 조각에 앉아 있게 된다면, 그의 이성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설명을 아무리 애써 설명하려 해도 그는 결국 상상력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범인들에 있어서랴...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 몸에 식은땀을 흘리게 될 것이다.

87.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플리니우스)

90. "자주 일어나는 일에는, 설사 그 원인을 모르더라도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일은 기적으로 여긴다." (키케로)

100. 인생은 끝없는 착각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서로 속이고 서로 아첨한다. 아무도 우리 앞에서 우리 이야기를 우리가 없는 데서 하는 것처럼은 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결합이란 이같은 기만 위에 이루어져 있다. 만일 자기가 없는 데서 친구가 자기에 대해 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비록 그 친구가 진실하고 정당하게 말했다 하더라도 우정을 지속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인간이란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위장과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차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도 피한다.  이같은 성향은 생래적인 것이다.

101. 만일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이야기한 바를 안다면, 세상에 친구란 네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는 누군가가 이야기한 것을 때로 지각없이 본인에게 알려 줌으로써 일어나는 싸움만 보아도 익히 알 수 있다.

108.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단지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111-112. 사람은 대개 오르간을 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 된다. 이때 인간은 오르간과 같은 존재가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동요가 심한 불안정한 오르간이다. 그 파이프 오르간은 올바른 음계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보통의 오르간밖에 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오르간으로는 화음을 내지 못한다. 기본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에는 여러가지의 성질이 있고, 영혼에도 갖가지의 성향이 있다. 왜냐하면 영혼에 나타나는 것 가운데 단순한 것은 없으며, 또 영혼은 어떤 대상에도 단일하게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같은 일을 두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

114. 나는 같은 사물이라고 해서 이제까지 그것을 똑같이 판단한 적은 한번도 없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작품을 쓰고 있는 사람 자신이 동시에 그 작품에 대한 비평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할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라.

122-124. 시간이 고통이나 싸움을 치유해 주는 것은 사람이 변하여 전과는 다르게 되는 때문이다. 모욕을 준 사람도 모욕을 받은 사람도 이제는 이전의 그들은 아닌 것이다.

십 년 전에 사랑한 사람을 이제 사랑하지 않는데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녀가 언제나 이전의 그녀와 같을 수 없으며, 그 역시도 이전의 그가 아니어서다. 예전에는 그도 젊었고 그녀도 젊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그때와 같은 여자라면 아마 지금도 역시 그는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볼 뿐만 아니라, 다른 눈으로도 본다. 사물을 똑같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126. 인간이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으되, 자립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만족을 못하는 존재이다.

129. 우리의 본성은 활동에 있다. 완전한 휴식은 죽음이다.

130. 만일 어떤 병사나 노동자가 자기의 고생을 불평한다면, 그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말고 내버려두는 게 좋다.

133-134. 비슷한 얼굴 둘이 하나씩 따로 있으면 조금도 우습지 않지만 두 얼굴이 같이 있게 되면 그 닮은 점 때문에 웃게 된다.

실물은 사람의 눈길을 끌지 않지만 그것을 비슷하게 그려 놓으면 감탄을 자아낸다. 그림이란 이렇듯 허황한 것이다.

136. 사소한 게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사소한 게 우리를 괴롭히는 때문이다.

148. 우리는 자부심이 매우 강해서, 자신이 세계에 알려지고, 자기가 죽은 뒤에 태어날 사람에게까지도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기를 바란다. 또 우리는 너무나 공허해서 주위에 있는 대여섯 사람의 칭찬만으로도 유쾌해지고 만족해한다.

149. 사람은 그가 지나가는 마을서의 평판에는 별로 개의치 않지만, 그러나 그곳에 잠시 체류해야 하는 경우 거기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얼마만큼의 기간이 필요한가? 그것은 우리의 헛되고 보잘 것 없는 삶의 길이에 비례한다.

150. 허영심이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있어, 군인이나 심부름꾼, 요리사, 인부들도 제각기 자랑을 하며 저마다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 철학자까지도 그것을 바란다. 영예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훌륭하게 썼다는 영예는 얻고 싶어하며, 독자도 그것을 읽었다는 영예를 갖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어쩌면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151-153. 칭찬은 사람을 어릴 때부터 망치는 것이다. 참 이야기를 잘하네! 정말 잘 만들었어! 아주 영리하구나! 등등.

오만 - 호기심은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알려고 한다. 그렇지 않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단지 보는 재미만을 즐길 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할 희망이 없다면, 항해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화제에 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친다. 허영, 도박, 사냥, 방문, 연극, 거짓된 명성의 영원한 지속.

162. 인간의 헛됨을 충분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연애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원인은 <내가 모를> 그런 것이지만,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다. 이 <내가 모를>,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 지구 전체와 군주들과 군대와 전세계를 움직여놓는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만일 조금만 더 낮았더라도 지구의 모든 것은 달라졌을 것이다.

164. 인간은 분명히 생각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그것은 인간 존엄성의 총화이고 가치의 총화이다. 인간의 의무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의 순서는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창조주와 자기의 목적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 채, 오히려 춤을 추거나 악기를 켜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쓰거나 놀이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또한 싸움을 하거나 우두머리가 될 생각들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두머리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165. 우리의 상태가 정말로 행복한 것이라면,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166. 죽음은, 죽어 보지도 않고서 그것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168. 인간은 죽음과 비참함과 무지를 고칠 수가 없었기에,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그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170. 만일 인간이 행복하다면, 신이나 성자처럼 오락에 빠지는 일이 적을수록 더욱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오락으로 유쾌해지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닌가? 아니, 그렇지 않다. 오락은 다른 데서, 다시 말해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의존적이다. 그러므로 오락은 피하기 어려운 고뇌를 일으키는 숱한 사건들에 의해 혼란스럽기가 싑다.

171. 오락은 우리의 비참함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비참함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왜냐하면 오락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며,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멸망시키는 때문이다.

오락이 없으면 우리는 권태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이 권태는 우리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락은 우리를 즐겁게 하여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에 이르게 한다.

183. 우리는 낭떠러지가 보이지 않도록 뭔가로 눈을 가리고는 태연하게 낭떠러지로 달려가고 있다.

204. 일 주일의 생애를 헛되이 보낸다면 백 년의 기간도 헛되이 보낼 수 있으며, 일 주일의 생애를 헌신할 수 있다면 백 년의 기간도 헌신할 수 있다. 만약 일 주일을 포기한다면 전 생애를 포기해야 할 것이며, 일 주일을 희생하지 않으면 전 생애를 희생해야 할 것이다.

205. 내 생애의 짧은 기간이 그 이전과 이후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흡수되고, 내가 차지하고 내가 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이 내가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한히 넓은 공간 속으로 잡기고 있음을 생각할 때, 나는 내 자신이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낀다. 왜 나는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으며, 왜 그때에 있지 않고 지금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두었는가? 누구의 명령과 지시로 일 장소와 이 시간이 내게 주어진 것인가? - 단 하루를 머물렀던 나그네의 추억이여!

206.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는 두렵다.

209.  네 주인에게서 사랑과 격려를 받는다고 해서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노예여, 너는 은혜를 받기는 할 것이다. 네 주인이 지금은 너는 칭찬하고 있지만, 머지 않아 너를 때릴 것이니.

211.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사귀면서 마음 놓을 수 있음을 기뻐한다.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참하고 무능한 그들은 결코 우리의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사람은 혼자서 죽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혼자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253. 지나친 것 두 가지. 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이성밖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

257.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신을 발견하여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신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애써 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나머지 하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찾으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도리에 적합하여 행복하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도리에 어긋나므로 어리석고 불행하다. 가운데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도리에는 합당하다.

260. 어떤 일을 때로 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자신을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에 두고서, 무엇이든 자신에 견주어서만 믿어야 한다. 자신을 믿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동의와 자기 이성의 충실한 목소리여야 하며,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이어서는 안된다.

277. 감성은 이성이 모르는 그 자신의 바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수많은 사실을 통해 이를 알고 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이성에 의한 것이겠는가?

280. 신을 안다는 것에서 신을 사랑하는 데까지, 그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가로놓여 있는 것인가!
 


  

<덧붙이는글> 3편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말 그대로 '예정'임다. 12년째 이어지고 있는. -_-)

신의 본질과 노름의 비유

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파스칼이 들고 있는 노름의 비유다. 파스칼에 의하면,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는 믿는 편이 더 낫다고 한다. 그것은 비록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을 믿는 것이, 신이 존재하는데도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는 그 손실이 훨씬 덜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인데... 순전히 확률상으로 보더라도 신을 믿는 편이 보다 더 합리적일 거라는 얘기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만일 신이 존재하는데도 믿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얼마나 큰 신의 저주가 있을 것이던가. 신을 믿는 편이 구원의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증가시켜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정녕 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에 찬성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정이 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인가? 한 영혼을 단지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영원히 저주할 정도라면, 그리고 그런 무시무시한 신이라면 나는 그런 신은 어떤 이유에서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위의 얘기는 어딘가에서 업어온 글인데 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파스칼의 [팡세]라는 책을 구해서 <도박의 필요성>이라는 장을 찾아 읽을 일이다. 한 장 전부를 다 읽을 필요는 없고 그 장 후반부의 '무한(無限).무(無)'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곳에서부터 보아도 충분하다. 번역본은 넘쳐날 정도로 많지만 조잡한 번역이 대부분이므로 선택에는 신중을 기할 일이다.

p.s. 참고로, 정말 아직도 <팡세>라는 책을 말로만 들어 알고 있다면, 이번 기회(?)에 하나 장만해서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다. 우리는 너무 자주 원본 텍스트는 제쳐두고 이차 저작물을 통해 얻게 된 자기식으로의 텍스트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대강 그런 얘기일거야... 하고 넘겨짚으면서. 얘기가 겉돌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1998. 09. 16. 03:12:56


 
2009/02/02 02:05 2009/02/02 02:05

시골 이야기

2009/02/01 15:50
지난 주 월요일 새벽 열차로 시골에 내려왔습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네요. 함께 온 아이들은 지난 목요일에 상경을 했지만 저는 아직도 시골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설날 노모를 뵙기 위해서라는 건 어쩌면 핑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확실히 지쳐 있었습니다. 2009년 벽두부터 모종의 일이 생겼고 급기야 가지고 있던 도메인을 모두 처분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수 백개의 도메인을 넘기면서도 10여년을 애써 지켜온 것들이기에 안타까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내몰린 저간의 상황이었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시골

시골길,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갑작스레 예정에 없던 새벽 열차를 예매하여 십 수년 만의 명절 시골행을 결정한 것은 그러니까 그래서였을 겁니다. 쉬고 싶다는. 그리고 이것은 이제 내가 그만큼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습니다. 일종의 도피를 한 셈이니까요. 젊었을 때라면 아마 정면으로 부닥치는 길을 택했을 터입니다.

저 위에 있는 사진은 아이들과 함께 걸어본 '국민학생' 시절의 학교 가는 길입니다. 버스가 다니는 큰 길이 따로 있었지만 우리는 늘 저 샛길을 이용하여 학교를 가곤 했습니다. 놀기에 그만이었으니까요. 암튼,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처음으로 가본 길이었습니다. 낯익은 만큼이나 낯선.

언덕배기에 있는 당산 나무도 예전의 그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겨울에 봐서인지 아니면 내 맘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잔가지는 모두 부러지고 이파리마저도 도무지 쇠한 것이 울울창창한 기상으로 그 아래 우리를 감싸 안으며 뛰어놀게 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많이 늙어보였습니다. 마치 이룬 것 하나 없이 나이만 먹어버린 나를 보는 듯했습니다.

집도 더 이상은 예의 우리집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내가 쓰던 방부터가 이제는 내 방이 아니었습니다. 시골 생활을 시작한 사촌 동생이 사용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아이들과는 형님 내외(는 올해도 고향을 찾지 못했습니다)가 쓰던 방을 써야 했습니다. 다른 이가 방을 쓰게 되었다는 얘기는 전해 듣고 있었지만 막상 다른 사람의 공간이 되어 있는 방을 보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있던 많은 추억들이 모두 빠져나가버린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사라지는 추억들

사라지는 혹은 돋아나는 기억들, 아름다운



내려온 지 일주일만인 오늘 제 방에 있던 짐을 옮겨둔 문간방으로 가봤습니다. 그동안 필요한 책은 몇 번 전해받았지만 내려온 이후로는 별로 내키지가 않아 가보질 않았댔는데 날씨가 너무 좋아 산책을 나가기도 민망하고 해서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저 모습이 기억납니다. 제대를 하고 집을 찾았을 때의 방 풍경도 지금 저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군에 있을 당시 시골 집에 굉장한 물난리가 났는데 그때 방이 침수되는 바람에 방에 있던 짐을 모두 옮겼고 그래서 제대했을 때는 대강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을 머금은 책들은 거의가 새까맣게 썩어 있거나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그나마 성하다싶은 것들도 새앙쥐들이 갉아먹어 그 가장자리가 온통 너덜해져 있었지요.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방안 풍경을 보고 아름답다 말하는 까닭입니다. 그 기억이 아름답거나 추하거나를 떠나, 때론 아픈 기억마저도 아름답게 만드는 게 추억이 갖는 힘이 아닌가싶어서요. 에니웨이,

연초에 아름답지 않은 일이 생기면 흔히 액땜한 셈 치라고들 합니다. 새삼스럽게 저 말이 무척이나 가슴에 와닿습니다. 그 정도로 어딘가에 기대고싶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다른 한편 그렇게 셈 친다고 해서 딱히 손해날 것도 없지 싶어서입니다. <통신보안>




<덧붙이는글> 시골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글이 아닌가싶군요. 시골 만세입니다. ^^

   
2009/02/01 15:50 2009/02/01 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