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지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하나가 떠돌고 있다. 이름하여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 유령이다. 이것을 유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라는 그 개념 자체가 도무지 뿌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직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희한한 진보이고 보수인 때문이다.


'진보-보수' 유령놀이- 2003 대한민국 언론의 지형도 (1)


지금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것은 대통령도 아니고 국회도 아니고 검찰도 아니다. 국민은 더더구나 아니다.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움직여가고 있는 것은 바로 '진보와 보수'라는 이 유령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유령이 만들어 전파하는 사이비 여론이다. 유령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대 재생산되는 이런 사이비 여론이 판을 치는 사회 - 그것이 바로 2003년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또한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다.

이 유령은 정치적 당파성을 띠지 않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고, 편파적이지 않은 언론은 언론이 아니고, 선동적이 아닌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고 말한다.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진보냐, 보수냐' '적이냐, 아군이냐'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갈라놓는다. 자신의 편가르기가 여의치 않을 때는 윽박지르기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면서 이것을 시대정신이라 말하고 여론이라 선전한다. 그러나 이건 시대정신도 아니고 여론도 아니다. 사이비일 뿐이다.

당파성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본래 모든 주의주장이란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자신의 주의주장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언론 또한 자신의 당파성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특정 언론이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됐다고 잘라 말해서는 안 된다. 언론의 역사 자체가 언론의 출발이 당파성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있기도 하다.


당파성을 띠지 않은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언론이 당파적이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 또한 언론의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사실이다. 언론은 당파적 선전을 위한 도구에서 출발하였으되, 또한 바로 그 지점에서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언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초기 언론의 당파지를 일컫는 게 아니라, 당파지의 한계선상에서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노력해온 역사의 산물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는 당파지를 폄훼하거나 당파지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오늘날에도 특정 이념에 충실한 당파지는 필요하다. 그러나 당파지는 어디까지나 당파지일 뿐이다. 당파지는 본질적으로 특정 이념을 대변 선전 선동하면서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당파지만 존재하거나 당파지가 득세하는 사회에서는 언론의 사명 가운데 하나인 (당파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진실을 접할 수 있는 여지는 그만큼 좁아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언론의 통합과 조정 기능은 빛을 잃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유일한 기능이 되고 존재 가치가 되고 만다.

현대 사회는 당파지가 처음 출현할 당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다양한 계층과 집단이 복잡다변하는 이해관계에 따라 얽히고 설켜 있다. 자신의 당파성을 대변하고 선전하는 일이 유일 목적인 당파지에서 모든 계층과 집단의 주장과 이해관계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기란 불가능하다. 당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개관하고 전하는 언론이 과거보다 더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 언론의 현실은 과거의 당파지보다 더한 당파성을 띠고 자신의 주의주장만이 절대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신문이나 방송을 듣보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실을 진실로 알고 지낼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지금 우리는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완전히 상반되는 방식으로 전해지는 '팩트'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의 신문만 보거나 방송만 듣고서 그게 진정한 팩트이거니 믿었다가는 낭패를 넘어 망신을 당하기 십상인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팩트'에 대하여

팩트, 그리고 그 해석 혹은 관점에 대하여



민주통신의 정체성 - 색깔이 뭐냐(?)


민주통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민주통신의 색깔이 뭐냐는 것이다.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질문의 취지를 확인하고 나면 이내 맥이 빠지고 만다. 질문한 의도가 실망스럽기 일쑤여서다. 민주통신의 정체성을 묻는 이유는 하나같이 똑같다. 민주통신은 '진보인가 보수인가'를 알고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통신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질문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다. 질문이 정확해야 답변 또한 정확할 수 있다. 구분 자체가 모호한 제멋대로의 질문을 던져놓고 거기서 바른 답이 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기사 우문현답이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도사연한 선문답이나 하고 있을만큼 한가한 처지도 못 된다.

민주통신은 언론이다. 언론의 사명은 일차적으로 독자에게 사실을 바르고 빠르게 전하는 데 있다. 나아가 사회적 현안을 분석 검토하고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여 사회 여론을 리드하는 데 있다. 그리고 여기서 금과옥조로 삼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편부당의 정신이다.

여기 어디에 '진보냐 보수냐' 하는 게 들어갈 여지가 있단 말인가? 더욱이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 자체가 최소한의 정의도 담보 받지 못한, 오직 진영 멘탈리티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해 있는 지금 그것이 어떻게 바른 언론이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혹자는 말한다. 민주통신의 논리는 다만 이상에 지나지 않는 회색논리일 뿐이라고. 그러면서 지금은 '전쟁'을 해야 할 시기라고 말한다. 기성언론의 폐해를 강조하면서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성언론이 통합과 조정보다는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온 점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아니 그것이 사실이고 그 폐해를 익히 알고 있고 그래서 그런 언론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더욱, 새롭게 시작하는 언론은 동일한 방식의 우를 범해서는 안될 일이다.


'진보-보수'의 패거리 유령 놀음을 거부한다


민주통신은 기성언론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에 기꺼이 동의한다. 민주통신이 대(對)언론 웹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민주통신을 폄훼하는 무리들의 가타부타를 떠나 이에 대한 하나의 명징한 증거다. 민주통신 또한 언론개혁이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 가운데 하나임에 인식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론에서는 언론개혁을 주장하는 일부 매체와는 길을 달리 한다.

민주통신은, 일부 매체가 주장하듯이 언론개혁이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언론개혁은 전쟁이 아닌 전례(바른언론의 사례 제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이 기성언론의 폐해를 극복하고 언론을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언론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바른 언론개혁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언론개혁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추의 논리'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추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힘껏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들이 흔히 취하고 있는 효과적인 언론개혁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추의 운동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추를 다른 한쪽에서 힘껏 당기면 일시적으로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추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또다른 반작용을 낳게 되고 결국은 팽팽한 세 대결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거나 죽이거나의 전쟁 상황이고, 이 나라의 언론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팽팽한 세 대결 양상이 뭐가 나쁘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현재의 언론 상황을 창조적인 혼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나 언론과의 전쟁을 선언한 노무현 대통령의 '건전한 긴장관계' 운운하는 논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건전한 긴장관계라는 것 자체가 실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언론 본연의 기능 가운데 하나임을 주목한다면, 그리고 현재의 세 대결이 언론 개혁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 기동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언론이 경계해마지 않아야 하는 정치적 도구가 되어 힘을 낭비하고 있는 양상이라는 데 주목한다면, 이런 주장이란 사실 언어적 수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편가르기 혹은 추의 논리, 그 작용과 반작용


지금 이 나라의 언론은 극한 편가르기의 양상을 띠고 있다. '언언전쟁'으로 불리는 이 상황은 예의 저 '유령'이 갈라놓은 희한한 편가르기에 따라 전개된다. 이 편가르기에서는 누가 더 정론을 펼치는가 하는 것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누가 더 초지일관하게 자기만의 억지를 부릴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고 또한 누가 더 물어뜯기를 잘 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만이 죽거나 죽이거나의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때문이다.

특정언론 죽이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죽이기의 대상이 살아남는 길이란 한 가지밖에 없다. 상황을 더한 극한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것은 분명 자해행위다. 그러나 현실은 이게 먹히고 있다. 예의 저 '추의 논리'가 보여주는 반작용 때문이다. 그리고 죽이겠다면서 칼을 들고 설치는 쪽의 논리가 그 대상에 비해 하나도 나을 게 없다는 점에서 그 반작용이 더한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무용한 힘의 낭비일 뿐이다.

얼마 전에 조선일보는 르몽드지의 외신을 자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임의 왜곡한 기사를 냈다가 사과까지 해야 했다. 당시 문제의 기사를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후안무치할 수 있는가 싶었는데, 오마이뉴스가 그 문제를 바로 지적하고 나섰다. 확실히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적절하고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외신을 임의 왜곡한 것은 조선일보만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일보 기사의 왜곡을 비판한 오마이뉴스 또한 조선일보에 앞서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중동, 대통령과 전쟁하는 족벌"

르몽드지 기사 원문의 어디에도 '족벌'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조중동, 대통령과 전쟁하는 족벌" - 문제의 외신 기사를 전하면서 오마이뉴스가 뽑은 타이틀이다. 그러나 르몽드지 기사 원문의 어디에도 '족벌'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마이뉴스는 서브타이틀에서까지 다시 명백히 자신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족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기사 본문을 포함하면 오마이뉴스는 이 기사 하나에서 이 '족벌'이라는 표현을 무려 6번이나 쓰고 있다.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또한 이 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이는 조선일보 기사의 왜곡 문제를 다룬 후속기사에서 오마이뉴스가 이 '족벌'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나 있다. 타이틀로도 모자라서 서브타이틀에까지 얹어 강조했던 표현을 오마이뉴스가 굳이 빼야 했던 것은 자의적인 해석을 인정한 결과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나면 오마이뉴스가 아니다. 후속 기사를 내보내면서 김정란 교수는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원문은 분명히 "des empires editoriaux et familiaux"로 되어 있다. 직역하면, "언론의, 그리고 가족의 왕국"이라는 뜻이다...이 표현은 "족벌 언론의 왕국"으로 옮길 수 있다. "족벌"이라는 말이 가지는 부정적 함의는 프랑스어로 번역이 불가능하다. 기자는 한국에서의 취재 과정에서 "족벌"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familial" 이상의 프랑스어는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족벌'을 타이틀로 걸었다는 사실이 내심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이는 김 교수의 이 해명은 그러나 설득력이 별로 없다. 차라리 해명을 하지 않음만 못하다고 할 정도로 구차하기까지 하다. 르몽드지의 기자가 한국의 취재 과정에서 '족벌'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 표현을 프랑스어에서 찾을 수가 없었기에 'familial'이라고 썼을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듣고 있자면 듣는 이가 오히려 민망해질 지경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프랑스 기자의 기사 하나를 읽으면서 그 심중까지를 헤아려야 했더란 말인가?


'제멋대로 해석하기' - 죽거나 죽이거나


불어에는 아는 바가 없지만, 르몽드지의 원문에 나온 패밀리는 그냥 패밀리로 읽어서 큰 무리가 없는 표현이다. 원문의 패밀리가 갖는 함의를 모르는 한국민이 누가 있을까? 게다가 김 교수의 이 해명은 기사쓰기의 에이비씨도 무시하고 있다. 어쩌면 프몽드지의 기자를 모욕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표현의 적절한 대응어를 찾지 못하는 경우 기자는 그것을 풀어서 설명하거나 원래의 표현 그대로를 병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실제로 르몽드지의 원문기사에서는 '조동중' 등 특별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모두 설명을 병기하고 있다.

그런 기자가 유독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족벌'만은 예외로 했다는 것은, 설사 기자가 그런 의도로 기사를 작성했다고 할지라도 역자가 나서 변명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김 교수가 앞서의 번역에서 '족벌'로 옮긴 표현이 비단 패밀리에만 한정된 게 아니었고 보면 김 교수의 이 해명이란 구차한 변명 이상이 아니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마이뉴스가 행한 정도의 자의적인 해석은 조선일보의 빼고 끼워넣는 임의 왜곡에 비한다면 어느 정도는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다. 실제로도 조선일보의 왜곡에 대한 적절한 지적을 한 사실만으로도 오마이뉴스는 자신의 우를 충분히 상쇄했다고 본다. 그러나 동일한 외신을 전한 대자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르몽드지의 이 외신 기사는 같은 날 연합뉴스에도 그 요지가 번역되어 실렸다. 그런데 연합뉴스에서 번역한 그 요지를 다시 따서 실은 인터넷 매체 대자보의 기사가 재미있다. 대자보는 인터넷판 미디어비평이라고 할 정도로 거의 매일같이 기성언론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비판에 열을 올리는 인터넷매체다. 그런 곳에서 조선일보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엽기성으로 연합뉴스의 기사를 임의 왜곡하고 있다. 대자보의 독법을 한번 보자. 다음 인용문에서 위쪽은 연합뉴스의 기사이고 아래쪽은 이것을 따서 전하고 있는 대자보의 기사다.
 

르몽드는 "한국의 언론은 때로 명예훼손을 초래할 정도의, 부러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며 각각 200만부 이상의 신문을 발행하는 조선, 중앙, 동아 등 3개 인쇄 매체의 시장 과점과 정부의 KBS, MBC 지배를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조중동이 매일 각각 200만부 이상의 신문을 발행하면서 인쇄 매체의 시장 과점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 대목에서 르몽드는 "한국의 언론은 때로 명예훼손을 초래할 정도의, 부러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 정부가 신언론장악음모를 하려고 한다는 조중동의 주장에 이견을 보였다.

 
연합뉴스 기사의 요지는 '한국의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조중동 3사의 과점과 정부의 방송사 지배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외신도 아닌 한국어로 쓰인 기사를 전하면서 대자보는 자신만의 기상천외한 해석을 내놓는다. 연합뉴스 기사의 어디에도 없는 '심화되고 있다'는 해석은 접어두고라도,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 정부가 신언론장악음모를 하려고 한다는 조중동의 주장에 이견을 보였다'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더하고 있다.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담풍' 해라


르몽드지의 원문기사도 그렇지만, 한국어로 된 연합뉴스 기사도 '한국언론의 문제'로 들고 있는 것은 '조중동의 과점 현상과 정부의 방송 지배'다. 그런데도 대자보는 원문과는 동떨어진 '정부의 신언론장악음모는 조중동의 잘못'이라는 이라는 식의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하나만 더 보자.
 

르몽드는 김대중 전대통령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노대통령과 이 일간지 3사의 반목 등을 전하며 한국에는 독립 언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르몽드는 김대중 전대통령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과의 갈등을 통해 한국에는 독립 언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의 기사는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노대통령과 3사의 반목 등을 '전하며' 독립언론에 대한 요구가 일고 있다고 대등연결을 하고 있는데 반해, 대자보는 '통해' 라는 인과적 연결로 기사의 맥락을 비틀고 있다. 그 결과 연합뉴스의 본래 의미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왜곡의 문제를 넘어 자질의 문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접어두고라도 이렇게 전해진 기사가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고 있을 리가 없다. 전체적인 맥락 또한 원문의 분위기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사실 이것은 오마이뉴스도 마찬가지다). 르몽드지 원문 기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국의 언론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이는 언론과 정부의 '전쟁'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여기에는 한국 언론의 몇 가지 문제가 노정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친재벌 성향의 조중동이 신문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점이고 또다른 문제는 정부의 방송 지배와 이를 통한 언론 장악에의 유혹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에 독립언론에 대한 요구가 높으며 인터넷매체의 확산으로 과거의 언론 독점 시장에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한국 언론 일반에 대한 일종의 비하 내지는 비아냥이 행간에 섞여 있는 기사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반성을 하기는 커녕 서로가 아전인수식 해석을 해가면서 이를 메인 탑으로 걸기에 바쁜 형국이니 이게 어찌 정상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르몽드지 기자의 지적을 다시한번 그대로 보여주는 추태에 다름아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나라 언론은 자칭 진보고 보수고를 떠나서 도무지 반성적 사고를 결여하고 있다. 여기에는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위에서 예로 든 외신 기사 사례 하나만을 두고 보더라도 그렇다. 자신부터가 왜곡을 밥먹듯이 하는 주제에 누구를 개혁하고 무엇을 바꾸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입장을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더라고 비판하는 자조차가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때로는 더하게 비판 받을 일을 서슴치 않는 마당에 어느 누가 그 비판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겠는가? 더구나 비판자의 자질마저가 의심스러운 경우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족벌'과 '어용' 사이 -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다


대자보가 어떤 곳인가?[footnote]얼마 전에 대자보가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이 자리를 빌어 대자보의 창간 10주년을 다시한번 축하드린다. [/footnote] '어용'이라고밖에는 달리 부를 수 없는(오마이뉴스식의 해석이 가능하다면 르몽드지에 실린 우리나라의 방송은 '어용'으로 옮기는 게 맞다) 공중파 방송의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여 기성언론의 논조와 임의왜곡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는, 언론 개혁의 당위성을 소리높여 주장하는 자칭 진보적 인터넷 매체 가운데 하나다. 바로 이 나라에서 지금 언론개혁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 딱 그대로다.

그럼에도 이 모자란 이들은 늘 당당하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바로 저 진보와 보수라는 유령 덕분이다. 어느 모로 봐도 '퇴보'에 지나지 않는 행태를 거듭하면서도 그것을 '진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그러려니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뒤에 '진보와 보수'라는 저 별종의 유령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다'는 식의 놀이에 몰두해 있는 이 유치한들이 언론개혁을 운위하는 한, 이 나라에서 언론개혁이란 없다.


"남에겐 가혹하면서도 자신에겐 준열하지 못한 이 땅의 언론은 민교협의 언론개혁운동이라는 새로운 물결을 불러들이게 됐다. 명색 '언론인'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슬프고 그것이 씁쓸하다. 이 땅의 언론은 얼마나 더 많은 운동을 기다려서만 제머리 깎기의 자정에 나설 것인가. 마침내는 그 끝머리에 엉뚱하게 불거 나올지도 모를 또 다른 '타율' 의 회오리가 없다고만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감시자거나 비판자란 오히려 남에 대해서 보다 자신에게 더욱 준열한 비판정신의 소유자여야 함을 못박아두고 싶다."


MBC 김중배 사장의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갓된 '진보-보수 유령 놀음'에 빠져 진실과는 거리가 먼 당파적 패거리주의 싸움으로 날을 지새는 '정치언론'과 스스로 정치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설치는 '언론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대한민국 사회의 언론이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고 민주통신이 이 자리를 지켜가고 있는 이유다. <2003. 11. 27>
 








<덧붙이는글> 2003년도에 쓴 글이지만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바가 없어 보인다.


 
2009/02/02 04:45 2009/02/02 04:45

19.  글을 쓸 때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은, 맨 처음에 무엇을 놓았어야 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22-23. 내가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 안 된다. 나는 재료의 배치를 새롭게 했다. 같은 말도 그 배치가 달라지면 다른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다. 테니스를 할 때 양쪽이 쓰는 공은 같지만, 한쪽은 그것을 더 잘 치지 않는가.

달리 배치된 말들은 다른 뜻을 만들고, 달리 배치된 뜻은 다른 결과를 나타낸다.

26-27. 말이란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과 같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에 다시 가필을 하는 사람은 초상화가 아닌 상상화를 그리고 있는 셈이고

말을 억지로 꾸며서 대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균형을 잡기 위해 불필요한 붙박이창을 만드는 사람과 같다. 그들의 기준은 정확하게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의 형식을 만드는 데 있다.

29. 자연스러운 문체를 대하는 경우 사람들은 아주 놀라워하며 마음속으로 대단히 기뻐한다. 한 사람의 작가와 만날 것을 기대하다가 한 인간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좋은 안목을 갖게 되고 책을 읽으면서 한 인간을 발견하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의 작가를 발견하고 매우 놀라는 경우가 있다. "당신은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시인으로서 말했을 뿐이다."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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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사람들이 당신을 좋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

69. 너무 빨리 읽거나 너무 천천히 읽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71. 사람에게 술을 조금도 마시지 못하게 한다면, 그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너무 많이 마시게 해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80.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묻고 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머리가 아프다고 말할 적에는 화를 내지 않으면서, 우리가 잘못 추론하고 있다거나 잘못 선택했다는 말을 하면 화를 내는 것인가?"

82.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낭떠러지 위에 있는 커다란 판자 조각에 앉아 있게 된다면, 그의 이성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설명을 아무리 애써 설명하려 해도 그는 결국 상상력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범인들에 있어서랴...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 몸에 식은땀을 흘리게 될 것이다.

87.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플리니우스)

90. "자주 일어나는 일에는, 설사 그 원인을 모르더라도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일은 기적으로 여긴다." (키케로)

100. 인생은 끝없는 착각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서로 속이고 서로 아첨한다. 아무도 우리 앞에서 우리 이야기를 우리가 없는 데서 하는 것처럼은 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결합이란 이같은 기만 위에 이루어져 있다. 만일 자기가 없는 데서 친구가 자기에 대해 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비록 그 친구가 진실하고 정당하게 말했다 하더라도 우정을 지속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인간이란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위장과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차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도 피한다.  이같은 성향은 생래적인 것이다.

101. 만일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이야기한 바를 안다면, 세상에 친구란 네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는 누군가가 이야기한 것을 때로 지각없이 본인에게 알려 줌으로써 일어나는 싸움만 보아도 익히 알 수 있다.

108.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단지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111-112. 사람은 대개 오르간을 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 된다. 이때 인간은 오르간과 같은 존재가 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동요가 심한 불안정한 오르간이다. 그 파이프 오르간은 올바른 음계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보통의 오르간밖에 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오르간으로는 화음을 내지 못한다. 기본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에는 여러가지의 성질이 있고, 영혼에도 갖가지의 성향이 있다. 왜냐하면 영혼에 나타나는 것 가운데 단순한 것은 없으며, 또 영혼은 어떤 대상에도 단일하게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같은 일을 두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

114. 나는 같은 사물이라고 해서 이제까지 그것을 똑같이 판단한 적은 한번도 없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작품을 쓰고 있는 사람 자신이 동시에 그 작품에 대한 비평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할 것인가? 한번 생각해보라.

122-124. 시간이 고통이나 싸움을 치유해 주는 것은 사람이 변하여 전과는 다르게 되는 때문이다. 모욕을 준 사람도 모욕을 받은 사람도 이제는 이전의 그들은 아닌 것이다.

십 년 전에 사랑한 사람을 이제 사랑하지 않는데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녀가 언제나 이전의 그녀와 같을 수 없으며, 그 역시도 이전의 그가 아니어서다. 예전에는 그도 젊었고 그녀도 젊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그때와 같은 여자라면 아마 지금도 역시 그는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볼 뿐만 아니라, 다른 눈으로도 본다. 사물을 똑같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126. 인간이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으되, 자립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만족을 못하는 존재이다.

129. 우리의 본성은 활동에 있다. 완전한 휴식은 죽음이다.

130. 만일 어떤 병사나 노동자가 자기의 고생을 불평한다면, 그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말고 내버려두는 게 좋다.

133-134. 비슷한 얼굴 둘이 하나씩 따로 있으면 조금도 우습지 않지만 두 얼굴이 같이 있게 되면 그 닮은 점 때문에 웃게 된다.

실물은 사람의 눈길을 끌지 않지만 그것을 비슷하게 그려 놓으면 감탄을 자아낸다. 그림이란 이렇듯 허황한 것이다.

136. 사소한 게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사소한 게 우리를 괴롭히는 때문이다.

148. 우리는 자부심이 매우 강해서, 자신이 세계에 알려지고, 자기가 죽은 뒤에 태어날 사람에게까지도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기를 바란다. 또 우리는 너무나 공허해서 주위에 있는 대여섯 사람의 칭찬만으로도 유쾌해지고 만족해한다.

149. 사람은 그가 지나가는 마을서의 평판에는 별로 개의치 않지만, 그러나 그곳에 잠시 체류해야 하는 경우 거기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얼마만큼의 기간이 필요한가? 그것은 우리의 헛되고 보잘 것 없는 삶의 길이에 비례한다.

150. 허영심이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있어, 군인이나 심부름꾼, 요리사, 인부들도 제각기 자랑을 하며 저마다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 철학자까지도 그것을 바란다. 영예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훌륭하게 썼다는 영예는 얻고 싶어하며, 독자도 그것을 읽었다는 영예를 갖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어쩌면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151-153. 칭찬은 사람을 어릴 때부터 망치는 것이다. 참 이야기를 잘하네! 정말 잘 만들었어! 아주 영리하구나! 등등.

오만 - 호기심은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알려고 한다. 그렇지 않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단지 보는 재미만을 즐길 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할 희망이 없다면, 항해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화제에 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친다. 허영, 도박, 사냥, 방문, 연극, 거짓된 명성의 영원한 지속.

162. 인간의 헛됨을 충분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연애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원인은 <내가 모를> 그런 것이지만,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다. 이 <내가 모를>,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 지구 전체와 군주들과 군대와 전세계를 움직여놓는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만일 조금만 더 낮았더라도 지구의 모든 것은 달라졌을 것이다.

164. 인간은 분명히 생각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그것은 인간 존엄성의 총화이고 가치의 총화이다. 인간의 의무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의 순서는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창조주와 자기의 목적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 채, 오히려 춤을 추거나 악기를 켜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쓰거나 놀이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또한 싸움을 하거나 우두머리가 될 생각들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두머리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165. 우리의 상태가 정말로 행복한 것이라면,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166. 죽음은, 죽어 보지도 않고서 그것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168. 인간은 죽음과 비참함과 무지를 고칠 수가 없었기에,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그것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170. 만일 인간이 행복하다면, 신이나 성자처럼 오락에 빠지는 일이 적을수록 더욱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오락으로 유쾌해지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닌가? 아니, 그렇지 않다. 오락은 다른 데서, 다시 말해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의존적이다. 그러므로 오락은 피하기 어려운 고뇌를 일으키는 숱한 사건들에 의해 혼란스럽기가 싑다.

171. 오락은 우리의 비참함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비참함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왜냐하면 오락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며,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멸망시키는 때문이다.

오락이 없으면 우리는 권태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이 권태는 우리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락은 우리를 즐겁게 하여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에 이르게 한다.

183. 우리는 낭떠러지가 보이지 않도록 뭔가로 눈을 가리고는 태연하게 낭떠러지로 달려가고 있다.

204. 일 주일의 생애를 헛되이 보낸다면 백 년의 기간도 헛되이 보낼 수 있으며, 일 주일의 생애를 헌신할 수 있다면 백 년의 기간도 헌신할 수 있다. 만약 일 주일을 포기한다면 전 생애를 포기해야 할 것이며, 일 주일을 희생하지 않으면 전 생애를 희생해야 할 것이다.

205. 내 생애의 짧은 기간이 그 이전과 이후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흡수되고, 내가 차지하고 내가 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이 내가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한히 넓은 공간 속으로 잡기고 있음을 생각할 때, 나는 내 자신이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낀다. 왜 나는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으며, 왜 그때에 있지 않고 지금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두었는가? 누구의 명령과 지시로 일 장소와 이 시간이 내게 주어진 것인가? - 단 하루를 머물렀던 나그네의 추억이여!

206.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는 두렵다.

209.  네 주인에게서 사랑과 격려를 받는다고 해서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노예여, 너는 은혜를 받기는 할 것이다. 네 주인이 지금은 너는 칭찬하고 있지만, 머지 않아 너를 때릴 것이니.

211.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사귀면서 마음 놓을 수 있음을 기뻐한다.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참하고 무능한 그들은 결코 우리의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사람은 혼자서 죽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혼자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253. 지나친 것 두 가지. 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이성밖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

257.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신을 발견하여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신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애써 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나머지 하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찾으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도리에 적합하여 행복하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도리에 어긋나므로 어리석고 불행하다. 가운데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도리에는 합당하다.

260. 어떤 일을 때로 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자신을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에 두고서, 무엇이든 자신에 견주어서만 믿어야 한다. 자신을 믿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동의와 자기 이성의 충실한 목소리여야 하며,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이어서는 안된다.

277. 감성은 이성이 모르는 그 자신의 바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수많은 사실을 통해 이를 알고 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이성에 의한 것이겠는가?

280. 신을 안다는 것에서 신을 사랑하는 데까지, 그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가로놓여 있는 것인가!
 


  

<덧붙이는글> 3편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말 그대로 '예정'임다. 12년째 이어지고 있는. -_-)

신의 본질과 노름의 비유

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파스칼이 들고 있는 노름의 비유다. 파스칼에 의하면,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는 믿는 편이 더 낫다고 한다. 그것은 비록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을 믿는 것이, 신이 존재하는데도 신을 믿지 않는 것보다는 그 손실이 훨씬 덜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인데... 순전히 확률상으로 보더라도 신을 믿는 편이 보다 더 합리적일 거라는 얘기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만일 신이 존재하는데도 믿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얼마나 큰 신의 저주가 있을 것이던가. 신을 믿는 편이 구원의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증가시켜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정녕 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에 찬성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정이 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인가? 한 영혼을 단지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영원히 저주할 정도라면, 그리고 그런 무시무시한 신이라면 나는 그런 신은 어떤 이유에서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위의 얘기는 어딘가에서 업어온 글인데 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파스칼의 [팡세]라는 책을 구해서 <도박의 필요성>이라는 장을 찾아 읽을 일이다. 한 장 전부를 다 읽을 필요는 없고 그 장 후반부의 '무한(無限).무(無)'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곳에서부터 보아도 충분하다. 번역본은 넘쳐날 정도로 많지만 조잡한 번역이 대부분이므로 선택에는 신중을 기할 일이다.

p.s. 참고로, 정말 아직도 <팡세>라는 책을 말로만 들어 알고 있다면, 이번 기회(?)에 하나 장만해서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다. 우리는 너무 자주 원본 텍스트는 제쳐두고 이차 저작물을 통해 얻게 된 자기식으로의 텍스트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대강 그런 얘기일거야... 하고 넘겨짚으면서. 얘기가 겉돌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1998. 09. 16. 03: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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