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에 해당되는 글 42

  1. 2009/01/31 강준만의 역설, 그리고 마스터베이션
  2. 2009/01/31 '신문유통원' 국고지원 논란 - 걸배이 근성부터 버려라~
  3. 2009/01/30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들
  4. 2009/01/30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한 짧은 기록 (2) 8
  5. 2009/01/29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한 짧은 기록 (1)
  6. 2009/01/29 새해, 블로거 자유지대- 메타블로그 전성시대 열린다 3
  7. 2009/01/28 언론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돈이다?!
  8. 2009/01/27 내 도메인을 이용한 공짜 구글메일 만들기 16
  9. 2009/01/27 나훈아, 기자 그리고 황색언론
  10. 2009/01/26 새해 복 많이.. 그리고 세뱃돈 받기 2
  11. 2009/01/25 만화가 - 꿈이 고작 그거? 3
  12. 2009/01/25 '정치언론' 넘어 '언론정치(프로파간다)' 꿈꾼다 2
  13. 2009/01/24 우리 시대에 '시민혁명'은 가능한가 1
  14. 2009/01/23 김어준 한겨레 류의 말 되는 기생질 23
  15. 2009/01/22 "조-동아리 닥쳐?!" 2
  16. 2009/01/21 [초딩카툰] 용산 2009. 1. 20
  17. 2009/01/20 정신나간 정권에 미쳐돌아가는 세상 26
  18. 2009/01/19 내가 진짜 미네르바- 인터넷판 신종 영웅놀이? 14
  19. 2009/01/18 고은 화엄경, 소설읽기의 지루함 혹은 즐거움 2
  20. 2009/01/17 이 친구의 이름은 미네르바입니다 24
  21. 2009/01/16 비판보다 '비판자' 비판에 더 열심인 넘? 18
  22. 2009/01/16 진중권, 여러분도 인터넷서 욕 많이 하잖아요 43
  23. 2009/01/16 RSS 사용료 논란, '원소스 멀티유스'의 관점에서 접근하자 2
  24. 2009/01/15 미네르바 구속적부심 기각, 당연한 결과다 56
  25. 2009/01/15 이외수의 궤변, 미네르바의 진실 유포죄? 110
  26. 2009/01/14 언론개혁, '기사'가 아니라 '기자'를 보라! 2
  27. 2009/01/13 트랙백, 세상의 블로거여 소통하라 22
  28. 2009/01/12 배꼽, 한 새가 다른 새에게 물었다 6
  29. 2009/01/11 박찬종, 미네르바(박대성)의 변론요지 4
  30. 2009/01/10 바보들의 천국 - 미네르바 음모론을 말한다 157

강준만은 '역설'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마스터 베이션'도 좋아한다. 껍뻑 하면 역설을 찾고 껍뻑 하면 마스터베이션이다. "신문법의 역설" 이라는 이 칼럼도 예외가 아니다. 바로 어제 옮긴 글에서는 '마스터베이션'이더니 이 칼럼에서는 또 예의 그 지겨운 '역설' 타령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발등을 찍고 있는 동아ㆍ조선의 미욱함을 탓하기에 앞서 그간 한국 신문 산업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호돼 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신문법은 바로 그런 보호주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법이다. 동아ㆍ조선은 신문 산업 전체의 안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우물 안 개구리처럼 신문법이 우물 안 자기 밥그릇에 미칠 영향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업계의 리더라고 보기엔 그 작태가 한심하다. 요즘 유행하는 ‘블루 오션’ 전략도 모르는가?


강준만의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정작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 발등을 찍"으면서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동아 조선이 아니라 강준만 자신이다.

강준만 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강준만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을 일반화한 다음 그것을 자기 주장의 전거로 삼는다는 데 있다. 강준만은 조선 동아를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물안 개구리'로 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동아ㆍ조선은 신문법을 비판한 지난 번 세계신문협회 총회를 흐뭇하게 바라보았을지 모르지만, 자기 처지를 먼저 살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서구 유력지들은 방송에서부터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모든 매체를 섭렵하는 ‘종합 미디어 그룹’에 소속된 일원이다.
반면 동아ㆍ조선은 주력 기업이 신문이며 동시에 주간지ㆍ월간지를 내고 출판사업을 겸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적인 ‘종합 미디어 그룹’의 장단에 놀아나선 안될 처지라는 것이다.
동아ㆍ조선이 청구한 헌법소원의 정신에 충실하자면, 한국도 서구식의 ‘종합 미디어 그룹’을 허용해야 한다. 또 ‘식인 상어’라는 악명을 얻은 루퍼트 머독 같은 세계적인 미디어업계 거물들도 국내에서 마음대로 활개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동아ㆍ조선은 정녕 이런 사태를 원하는가? 자기들보다 덩치가 수십 배에서 수백 배가 큰 공룡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마저 언론 자유의 이름으로 옹호할 뜻이 있는가?



강준만

미지왕?

미지왕도 이런 미지왕이 없다.

강준만의 사회를 보는 시각은 자주 독한 자신의 아집에 갇혀 있다. 전형적인 우물안 개구리의 시각이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한 나르시스트의 시각이다. 그러다보니 때로 엉뚱한 자문자답을 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이른바 '자뻑'이다. 이 칼럼이 그런 경우다.

하나만 물어보자.

강준만은 왜 조선 동아가 '종합 미디어 그룹'과의 한판 승부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여 조선 동아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이에 대한 강준만의 답이 있을 리가 없다. 강준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기껏

"동아ㆍ조선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게 전부다. 그러면서도 "그래서 미욱하다는 것이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거지라고 해야 하는가?  

자주 지적해왔듯이 신문법은 그 취지부터가 잘못되었다. 언론개혁이라는 취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정치적 맥락에서 기동되고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신문이 '종합미디어'로 나아가려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문법이다.

강준만은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2005. 06. 24
 


 

2009/01/31 01:11 2009/01/31 01:11
'신문유통원' 국고지원 논란 [2005-06-15]
[조선일보]
정부가 무료배달 하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등 몇몇 중앙 일간신문이 신문유통원 설립을 위해 2008년까지 1651억원의 투자 ...기사 보기
VS [경향신문]
일부 언론의 사실왜곡

경향신문사 등 6개 신문사가 신문유통원 설립과 관련해 정부에 국고 지원을 요청한 데 대해 수구적 보...기사 보기



‘정부가 무료배달하면 신문은 뭘로 은혜 갚나’라는 조선일보 사설도 웃기지만, 더 웃기는 건 경향신문의 어거지성 변명이다. 사설에서 경향신문은 유통원이 "경품 경쟁으로 일그러진 신문시장을 정상화하기 위해 설립되는 것"이라면서 "그런 의미에서 유통원은 수구신문들이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고 강변한다. 

경향신문의 주장이 얼마나 웃기잡는 건지는 역으로 경향신문에 한가지만 물어보면 끝난다.
주류 유통원은 언제 설립되는가? 

경품 경쟁은 언론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주류 시장도 그런 시장 가운데 하나다. 경향의 논리대로라면 이제 조만간 주류 유통원이 설립되어야 마땅하다. 어디 주류 유통원 뿐이겠는가? 도서 유통원 컴터 유통원 양곡 유통원도 곧 설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시적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 작정이 아닌 다음에야 이게 코미디가 아니고 뭐겠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내가 정작 우려스러운 건 이같은 코미디같은 놀음이 아니다. 독자가 신문을 선택하는 기준을 경품 때문이라 보는 천박스럽기 짝이 없는 그 의식이다.

경품이 갖는 힘과 그것이 신문 시장의 왜곡에 미치는 영향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남을 탓하고 권력의 힘을 빌어 뭔가를 하려 하기 전에, 우선은 독자를 몇 푼의 경품에 놀아난다고밖에 인식하지 못 하는 그 천박한 수준을 먼저 탓하고, 스스로 거기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먼저 하는 것이 순서다. 그렇지 않는 한 어떤 미사여구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설래발을 쳐댄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권력에 빌붙어 먹고 살려는 양아치 의식과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를 경품에 눈이 먼 족속 쯤으로 치부하는 자들이 만드는 신문을 애써 보고싶어하는 독자는, 딱 그 신문의 수준에서 쎄쎄쎄~ 부르며 함께 놀아날 수 있는 멍청한 독자 말고는, 단언컨대, 없다.


2005. 06. 17




2009/01/31 00:32 2009/01/31 00:32
새해 벽두에 보는 기사 하나가 눈에 걸린다. 금연 안지키는 국회…"법 만들땐 어쩌고" 국민들 눈총 이라는 세계일보의 신년기획기사(2006 이것만은 고치자)다. 법을 만드는 넘들이 그 법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게 어디 금연 문제 뿐이겠는가? 하다못해 새해 예산조차도 단 한 차례를 빼고는 회기 내에 처리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저들이다.


국회


이게 우리 사회 이른바 '지도층'이라고 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인식 체계다. 안타까운 것은 이게 특정한 이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이건 마찬가지다. 상대를 향해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다가도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서면 희한한 특권의식으로 똑같은 행태를 보이는.

이것이 우리 사회 일반에 널리 그리고 깊게 뿌리박혀 있는 사회 의식이다. 그 자리에 올라선 누군가가 자기희생으로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혁의 시작과 끝이 바로 이 지점이어야 한다고 내가 주장하는 이유고, 못내 주변과 불화하는 까닭이다.

특권을 갖지 못했을 때는 입이 주디가 되도록 혁파를 부르대다가도 자신이 그 특권의 언저리에라도 이르게 되면 자기희생은 고사하고 오히려는 '우끼지도 않는' 특권의식으로 '완장질'을 하려 드는 넘들에게 나는 웃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슬프게도 나는 완장을 찬 이후 자기희생하는 넘을 단 한 넘도 본 적이 없다. <통신보안>

2006. 01. 02  



p.s.
변절한 자들이 항용 부르대는 소리가 있다. 그러지 말라 이르면 돌아오는 답은 늘 똑같다. '융통성이 없다'거나 '고지식하게 왜 그러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개혁이나 혁명은 원칙의 문제고, 당위의 문제다. 융통성이 허용되는 지점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footnote]이런 말 하면 으레 '레닌의 전략 전술이 어쩌고~' 하면서 설래발 치는 자들이 있다. 정색 하고 덤비는 이 치들을 보고 있노라면 시계 바늘을 몇 십 년은 거꾸로 돌려 세상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는 짓을 보면 이 자들은 마치 어디 굴 속에라도 쳐박혀 지내느라 레닌의 동상이 광장에 거꾸러 넘어진 사실조차도 아직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정신 나간 넘들이다. [/footnote] 그럼에도 저들은 늘 원칙의 문제를 융통성이라는 처세의 문제로 치환하여 그 안으로 기꺼이 숨어들어버린다. 교묘히. 아주 덥게. 


2009/01/30 23:27 2009/01/30 23:27

"반미운동 `보이지 않는 손`은 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한 짧은 기록 (2)


촛불시위

지난 11월 30일에 있었던 교보문고 앞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 모습 ⓒ 하민혁


최근 '여중생 사망사건'은 국민의 최대 관심사가 되어 있다. 연일 촛불 추모행사가 이어지고 있으며, 반미감정 또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는 열흘 앞으로 다가온 대선정국도 한몫을 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 사이에 누가 어디에 서명을 했느니 말았느니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가 하면 언론 또한 이를 거의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고 있다.
 

'살인사건'인가 '과실치사'인가?


그러나 사실 이 모든 일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 사건의 본질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본질을 망각한 이미지 놀음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좋다. 우리는 먼저 이 사건이 '살인사건'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둔다. 이는 미군측의 주장이나 무죄평결 등과는 전혀 별개이다.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정황근거가 있다.

일부 무책임한 인터넷 언론 등을 통해 유포되고 있는 '여중생을 토끼몰이 하듯이 몰아 술김에, 혹은 화가 나서, 혹은 장난삼아 세번 네번 바퀴로 짓이기며 깔아죽였다'는 등의 이야기를 우리는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근거도 불확실할 뿐더러 운전병이 '악의 화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이 대명천지에 발생할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없는 까닭이다(이건 상식이다). 반면에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몇몇 증언, 이를테면 사고 당시 사고 피의자들이 현장에서 갈팡지팡하며 허둥대고 있었다는 등의 증언은 이 사건이 고의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사고사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다.
 

범대위

여중생 사건을 '살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여중생 범대위


그럼에도 현재 모든 여론과 언론은 이 사건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이런 사실에 대한 논구는 뒷전이다. 드러난 현상에만 주목하여 이미지 놀음에 치중하고 있다. 여론을 바르게 전달하기보다는 여론의 장단에 춤을 추면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어느 여고생의 편지'


앞선 글에서 우리는 이 사건이 '특정한 의도를 지닌 세력'에 의해 이용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우리는 그 우려가 지금 현실이 되어 우리앞에 마주 서 있다는 생각이다.

이 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당시 인터넷에는 '어느 여고생의 편지' 하나가 유령처럼 떠돌아 다녔다.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한 '작성자 미상'의 편지였다. 그리고 그 편지는 어느새 '플래시 형식'을 띠고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편지를 접하면서 우리는 그 내용이 무척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그 편지의 주인공을 추적해보기로 했다. [footnote]영웅이 되었어도 수십번은 되었을 법 하지만, 이후에도 저 편지를 쓴 여고생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왜? [/footnote]

그러나 당시는 여중생 사건 말고도 몇 가지 사건이 겹쳐 있었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었고, 월드컵 막바지에는 느닷없는 북한의 '서해도발사태'가 이어졌다. 특히 '서해도발사태'의 경우, 이른바 '연평총각' 사건이 불거지면서 서해도발사태에 대한 북한과 남한의 책임소재를 두고 남남 언론사간 치열한 언언공방이 전개되었다. 도발한 쪽은 가만히 있는데 도발을 당한 쪽에서 '알아서 기는' 형국이었다.

겨우 3명의 상근인원으로 사이트를 꾸려가던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우리는 먼저 연평도로 달려갔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게 우선순위라 여겼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연평총각'을 두고 벌어진 서해도발사태의 원인에 대한 언론사간 책임소재 공방에 대해 나름대로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그러나 그 실마리는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 이유는 다른 글을 통해 전할 날이 있게 될 것이다).
 

'여중생 범대위'는 '쌩양아치 집단'이었다?


촛불시위

지난 6월 30일 여중생 49재 모습

다음 수순은 당연히 여중생 사망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사문에서 밝혔듯이, 이 사건에 대한 취재는 이른바 '여중생 범대위(이하 범대위)'라는 단체에 의해 처음부터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취재 자체가 원천봉쇄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범대위가 우리가 운영하는 인터넷신문에 가한 직접적인 위해는 인터넷신문 운영에 상당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네티즌 회원의 취재에 의존하던 인터넷신문은 그 사건이 공개되면서 네티즌 회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분보장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운영하는 인터넷신문의 이름으로 취재 나가기를 거부했고, 그 바람에 상당 기간 기사를 내지 못하는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우리는 여러차례 '여중생 범대위'측에 전화를 걸어 이 사태에 대한 범대위의 공식적인 사과와 카메라 반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범대위는 그 요구를 번번이 거절했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큰소리를 쳐댔다. '시민단체'라기보다는 영낙없는 '깡패조직'(더 정확히는 뒷골목 양아치들)의 모습 그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범대위'의 수상하기 짝이 없는(무슨 '쌩양아치집단' 비슷한) 정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범대위라는 집단이 어떤 집단이길래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터넷에서 나름대로의 자리를 지켜온 인터넷신문의 취재를 방해하고 게다가 카메라까지 강탈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거기에 대해 일번반구의 사과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사과는 커녕 도리어 우리가 운영하는 인터넷신문을 '프락치' 집단으로 몰아, 게시판을 통한 이른바 '사이버테러'를 지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모든 패악질을 어떻게 시민단체라는 이름을 버젓이 달고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여중생 범대위와 자통협, 그리고 민중의 소리


촛불시위

범대위의 목표는 오직 '미군철수'

이러한 의문은 범대위의 정체에 주목하면서 하나씩 풀려갔다. 범대위는 처음 우리가 생각한 '시민단체'가 아니었다. 여중생 사망에 분노한 시민들이 모여 만든 자발적 단체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지닌 조직에 의해 특정한 목적을 띠고 결성된 하부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공식명칭을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로 내건 범대위는 2002년 6월 26일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이하 자통협)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의되고 자통협 산하조직 형태로 결성된 임의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범대위는 다만 명목상으로 내세운 껍데기일 뿐이고 실제로 범대위를 움직이는 세력은 자통협이었다.

그렇다면 자통협은 어떤 조직인가? 자통협은 "조국통일은 반통일세력과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 때만 가능"하다는 인식하에 '국가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 연방제 통일방안의 합의·확산 등'을 4대 정치적 과제로 내걸고 '그때그때 조성된 정세에 맞게 구체적인 요구와 구호를 내걸고 싸워나가고' 있는 연합체적 성격의 단체이다. 특히 주한미군 철수는 자통협이 일관되게 주창하고 있는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범대위가 "주한미군은 이땅을 떠나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 사건에 뛰어든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범대위는 처음부터 여중생 사망사건을 '살인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일관되게 '양키고홈'을 외쳤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터넷에 터를 닦은, 마찬가지로 자통협 산하 조직 가운데 하나인 '민중의소리'는 범대위와 라인업을 형성하며 범대위의 모든 활동과 주장을 사진과 기사에 담아 전했다.
 

"주한미군은 이땅을 떠나라!!"


민중의 소리

ⓒ 여중생범대위

범대위를 앞세운 자통협은 이 사건을 "대중들을 통일운동의 주체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이용코자 하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거의 연일 미군 규탄대회를 열었고 거기서는 예외없이 미군철수 주장이 터져나왔다. 나이어린 학생들도 어김없이 동원되었다. 사건의 진실규명보다는 오히려 '미군철수'가 최대의 목적이 되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통협의 이러한 미군철수 주장은,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 등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한 채 답보상태를 계속했다.

그러자 범대위는 일방적인 '미군철수' 주장이 대중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는 느낌을 받았던지, 자신들의 핵심 구호를 "주한미군은 이땅을 떠나라!!"에서 "미군장갑차 희생자, 신효순 심미선을 살려내라!!"로 바꾸었다. 집회와 시위 등을 통해 사회적 이슈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도 게으르지 않았으나, 여전히 대중으로부터 잊혀진 시위를 계속하던 중, 범대위의 활동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민중의 소리 취재기자에 대한 미군 폭행사건이었다.

미군규탄 시위 도중 시위대에 의해 절단된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 취재를 벌이던 민중의 소리 기자 두 사람이 미군에 의해 폭행 당한 이 사건은, 나중에 '철사줄로 꽁꽁 묶여'라는 신조어를 남길 정도의 센세이셔널한 기사 바람을 타고 매스컴에 전격 소개되었고 이후 인터넷을 통해 바람처럼 퍼져나갔다(이 기사 중 일부-'철사줄로 꽁꽁 묶여' 어쩌고 등-는 허위 날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지금도 이 기사는 수정되지 않은 채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민중의 소리는 이 사건으로 최근 '민주언론상'을 수상했다. 이 기자식으로 말하자면 전형적인 결과 지상주의인 셈이다).
 

자통협, 마지막 '금도'를 깨다


여중생

참혹한 주검의 무차별 게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대위의 활동은 여전히 대중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시점부터인가 자통협은 그동안 암묵적으로 지켜져 오던 일종의 '금도' 하나를 깨기 시작했다. 궤도차량에 짓이기져 내장이 드러난 두 여중생의 시신을 공개적인 장소에 게시(가 아니라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이의 뇌수가 길바닥에 쏟아져 나온 참혹한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 사진은 어른이 보아도 구토를 일으킬 만큼 혐오적인 것이었다.

뇌수가 쏟아져 나온 두 여중생의 참혹한 주검이 공개장소에 게시되고 있다(오른쪽 사진 설명)

자통협이 공개장소에 전시한 그 끔찍한 사진의 파장은 즉각적이고 폭발적이었다. 그것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일반인과 학생들에게도 두 여중생의 참혹한 시신을 담은 사진은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게 참혹한 시신을 담은 사진을 어떻게 공개장소에 내걸 수 있느냐'고 하는 우려섞인 일각의 목소리가 없지 않았지만, 확실한 반응을 담보하는 결과 앞에서 그런 반대 의견은 이미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처음에는 대학가 등의 한정된 거리에서 전시되던 사진들은 점차 더 넓은 공간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인터넷 여기저기에 내걸리기 시작했다(요즘은 신문과 방송에서조차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 시신 사진이 공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 전체가 흡사 광기에 휩싸여 있는 느낌이다. 집단적으로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사실 미군 피의자에 대한 '무죄평결'이 나오기 전의 에피소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는 반미운동의 확산은 누가 뭐라 해도 미군 피의자에 대한 '무죄평결'이 결정적인 동인이었다. 미군측이 아무리 양국 법체계상의 상이점을 들어 해명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미군 피의자에 대한 무죄평결은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법 감정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평결이었다. 그 이후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반미열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무죄평결'은 예정된 시나리오였다?

 

촛불시위

여중생 추모 촛불행사에서 추모행사자들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 하민혁


지금 우리 사회는 반미 열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그 열기 어디에서도 이 사건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조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사건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본질은 무엇인지,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이 사건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누구이며 그들이 최종적으로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어떤 논구도 없다. 마치 그런 것들은 이미 문제가 아니라는 식이다.

외곽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없지 않은 건 아니지만, 거대한 반미열기 속에서 그것은 허랑한 소리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설사 중앙으로까지 나온다고 해도 그런 주장은 '친미주의자' '사대주의자'라는 딱지만 붙이면 거기서 이야기 끝이다. 그 딱지가 붙는 순간 무차별 난도질로 절단이 나고 만다.

이 사건은 우선 그 성격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적어도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한에서, 이 사건의 기본적인 성격은 '과실치사'이지 범대위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살인사건'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과실치사에는 미군 일반이 지닌 문제점과 부주의까지가 당연히 포함된다.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그럼에도 범대위는 여전히 이 사건의 성격을 '살인사건'이라 규정하고 있고, 일부 언론 또한 범대위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다.

메인기사 전부를 여중생 관련기사로 채운 오마이뉴스(사진설명)

사건의 성격이 왜곡되고 있다는 이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그것은 대중이 사건의 본질적 측면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거나 사건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대중이 누군가의 의도적인 이미지 조작에 놀아날 수 있다는 의미인 때문이다.
 

자주통일 - 당위론과 반미운동 사이


사람들은 종종 대세론을 말하곤 한다(여기서의 대세론은 '당위론'이라는 말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대세론은 종종 다른 의견의 개입을 차단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현재의 반미열기 또한 상당부분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가 운영하는 인터넷신문 이름을 들먹이며) 너희들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반미는 이미 대세이다. 그 대세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시대에 역행하는 반역사적인 행위일 뿐"이라는 식의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주장은 꽤나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같은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같은 인식은 역사를, 역사의 진보를 일면적으로만 보려드는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이 다 역사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사건 하나가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이루면서 역사의 중심에 선 예는 많다. 이른바 대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대세가 반드시 역사의 진보에 기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장차 완전한 자주통일국가를 이룩하고자 하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대세론을 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고싶지 않다. 변화는 어느 시기에나 있었고 지금이 변화해야 할 '바로 그 시기'라는 점에도 우리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이 사건의 본질적 성격이 오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진흙탕에 밀어넣어 역사를 정체시키는 일이다.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과 북한의 서해도발사태


여중생 사건이 난 얼마 후에 우리는 북한에 의한 서해도발사태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꽃다운 우리의 젊은 장병들이 북한군의 총탄에 맞아 스러져 갔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 일을 밝혀 전하는 것은 대세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이상한 인식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도 잘못된 미신이다.

현재 매스컴은 반미운동의 최선봉에 서 있다. 서로가 향도 역할을 자처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그래서일까? 매스컴에는 연일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의 반미운동이 오르내리고 있다. 방송에 얼굴을 디밀고 소리높여 반미를 외치는 그들에게 묻고싶다.

당신들은 도대체 소파협정이 뭔지는 아느냐고? 미군이 왜 한국에 주둔하게 되었는지는 아느냐고? 여중생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북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장병들의 이름은 알고 있느냐고? 당신들을 지금 여기까지 끌고온 자통협이 뭐하는 곳인지는 아느냐고? 그들의 노선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항변을 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미군측의 오만한 태도에 있고 우리는 지금 미국과 미군의 그런 태도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다면 미군을 우리나라에 불러들인 게 누구이고 누가 미군을 그렇게 오만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반성 또한 병행되어야 마땅하다. 사고가 난 도로의 운영과 관리를 맡고 있는 우리 정부의 문제는 없는지를 살펴보고 그 책임 또한 따져물어야 한다.
 

매스컴은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짚고 있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 화면을 여중생 사망사건 관련기사로 센세이셔널하게 장식한 언론사 메일링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런 움직임이 있기나 한 것인가? 단언하건대, 현재의 반미 열기 어디서도 그런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누군가에 의해 이 사건이 '미군 철수'라는 한 방향으로만 이끌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건을 처음부터 주도해온 미군철수를 통한 반외세 자주통일론자들이 그들이다.

통일에 이르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어느 길이 최선이라는 답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실천적 통일 논의에서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국민적 합의 내지는 동의여야 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제시한 통일방안이 절대하다는 식의 주장을 할 수는 없다. 특정 통일 방안은 그 특정 세력에게는 득이 될지 몰라도 그것이 국민 다수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통일 노선의 차이를 간과하고 자신만의 통일 방안을 실행에 옮긴 결과를 우리는 해방 직후에서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불과 반세기 전의 역사를 통해 직접 온몸으로 확인한 바 있다.

통일을 위한 모든 노력은 존중되어 마땅하지만 그러나 국민적 합의에 의하지 않은, 일부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통일논의는 경계하여 마땅하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의 반미열기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우려는 이미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우리 정부의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시민단체의 시위가 필요하다는 일각(특히 자통협)의 반복되는 주장은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 기자의 시각에 동의를 표한 바 있다.

촛불시위

촛불 추모제의 아이들

"여중생 사망사건의 미군 피의자에 대한 '무죄평결'은 어떻게 보면 시민사회단체가 미군과 미국 사회 일반의 감정을 최대한 자극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 결과이다. 즉 '불순한' 시민단체가 주동이 되어 지속적으로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미군측의 배심원 제도가 갖는 맹점을 이용한 결과가 미군 피의자의 '무죄평결'을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자의 이같은 시각이 충분히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시민단체와 언론이 이 사건의 여론화를 위해 노력한 바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 공헌을 폄하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단체의 무분별한 압력, 즉 이 사건을 '살인사건'으로 규정하여 가한 온갖 압력이 결과적으로는 배심원의 무죄평결을 유도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이라는 이유만으로 '살인자'로 몰 수는 없다


사실 미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자신이 오직 미군이라는 이유 하나로 부당하게 '살인자'로 매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번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도 이는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자통협은 미국의 재판 제도가 배심원에 의한 평결을 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재판이 열리는 날까지 재판정 앞에서 "퍼킹유"를 외쳐댔다. 그런 마당에 어떤 배심원이 유죄평결 내리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미군이 무슨 성인군자이기를 바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들 또한 감정을 가진 인간일 뿐이다. 무분별한 감성적 접근은 역시 그만큼의 감정을 상대에게 안겨줄 수 있다. 이건 미국인이냐 한국인이냐를 떠나 인간의 성정 일반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자통협은 자신들이 보여준 행동이 배심원의 평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질 못했던가? 아니면 혹여 무죄평결을 유도하기 위해 의도적인 행동을 한 것인가?

우리는 자통협이 의도적인 전략에 의해 무죄평결을 유도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며, 그것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우리의 관심은 이제 와서 자통협이 그것을 유도했는가 유도하지 않았는가 따위를 따지는 일에 있지 않다. 다만, 압박 일변도가 아닌 다른 접근 방식 또한 얼마든지 열려 있었음에도 자통협이 왜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책만을 고수했는가 하는 점만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나라 정부의 대미협상력을 높여주기 위해 반미운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소유한 자통협이라면, 반미운동 확산을 위해 그 정도의 전략은 얼마든지 수행할 개연성이 있다고 보는 때문이다.
 

자통협은 범대위의 가면을 벗어라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정말로 관심을 갖는 부분은 지금 일고 있는 반미열기가 자통협의 그것과 동일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무죄평결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이성적 접근이 아닌 감정을 앞세운 반미운동은 국민 일반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은 무분별한 반미운동에 치중하는 경우 우리는 필연적으로 반한감정과 마주 할 수 밖에 없다. 자통협의 주장대로 그것이 일면 우리 정부의 대미협상력을 높이는 성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마이뉴스

반미가 대통령 만든다?

이것은 미국에 의한 반한감정을 두려워 하거나 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 길 외에는 길이 없는지를 감성적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접근하여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게 문명사회에서, 그리고 지구촌 사회에서 독불장군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식이고 우리가 취해야 할 보다 바람직한 방향이다. 지금 우리가 어디 배울 게 없어서 북한식 떼거지 정치를 본 받고 민족주의라는 이름을 팔아 국수주의에 빠질 일이던가.

반미운동을 대선전으로 확대 이용하는 오마이뉴스(오른쪽 그림 설명)

여중생 사건을 보는 논리가 얼마나 감성적이고 무분별한 지경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단적인 사례는 이번 여중생 사건을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여중생 성추행 사건과 단순 비교하는 경우이다. 지난 2000년 7월 오키나와 주둔 미군 병사가 여중생을 성추행한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내에 반미 분위기가 비등해지자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사건 발생 19일만에 당시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에게 이 시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 바 있다.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과 일본의 미군여중생 성추행 사건


이를 두고 반미운동을 주도하는 진영에서는 일본의 경우 성추행 사건에서도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는데, 사람이 둘씩이나 죽은 여중생 사망 사건에 대해 사과를 받아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주장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여고생의 편지글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여중생 사망사건 관련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이다. 엊그제 TV토론에서는 명색이 역사학자라는 자(한홍구)까지 이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의 대응이 오히려 미미하다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둔 미군 병사의 성추행 사례는 두 여중생 사망 사건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하나는 고의에 의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과실에 의한 사고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는 공무중 사건이 아니었고 다른 하나는 공무중에 발생한 사건이다. 여중생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도대체 공통적인 사항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소위 역사학자라는 자부터가 TV토론에 나와서 버젓이 그런 논리를 갖다 붙이면서 어거지를 부리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어거지는 사태해결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이런 접근은 서로간에 감정의 골만을 깊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 무지로 인해 상대의 경멸을 초래할 뿐이다.

하여튼, 억지이건 말았건, 범대위라는 껍데기를 둘러쓴 자통협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결과적으로 범대위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범국민적인 반미 열기는 이제 제대로 불이 붙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번쯤은 머물러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 길이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인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라는 점을 유념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거기에 이르는 과정의 수단과 방법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그 일에 기꺼운 동의를 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자신만의 잣대로 상대를 임의재단한 다음, 깡패조직에서나 가능할 법한 집단린치를 행하고 타인의 재물을 강탈하는 짓까지 서슴치 않는 집단이라면, 그들이 아무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도 그 목적에 한번쯤 토를 달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그러므로 범대위, 아니 자통협에 묻는다. 그대들은 이 운동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가? 사건의 진실인가? 미군철수인가? 반외세 자주통일인가? 아니면, 진보 팔아 장사하는 양아치들 세상인가?

그것도 아니면, 무엇인가?


(계속)
/ 2002-12-31 오후 9:34:44  




-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 몇몇 사람을 계속해서 속일 수도 있다.
- 그러나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 - A. 링컨.


 

2009/01/30 00:13 2009/01/30 00:13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여중생 압사사건'과 '범국민 대책위'

-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한 짧은 기록 (1)


촛불시위

'촛불시위' 하는 어린이들

이 기자의 "정치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라는 11월 26일자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항의 메일이 편집국으로 계속 날아들었다.

항의성 메일은 대개 기사의 논조 전반에 대한 것인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 날아든 메일의 경우는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특정 후보 지지자들의 항의성 메일 외에, 그동안 우리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여준 다수의 네티즌 회원들까지 메일을 보내 기사에 대한 항의를 표시한 경우가 많았다.

이 기자의 기사 중에 나오는 '여중생 사망사건' 관련 발언 때문이었다.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미친 파장과 그로 인한 '반미 감정'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 해명 기사를 써야겠다고 결정한 배경이다.

이 기자는, 네티즌들이 문제 삼고 있는 "정치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라는 칼럼성 기사를 통해, 우리 사회는 지금 '결과적으로 승리만 얻을 수 있다면 과정은 어떤 방식이어도 좋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고 지적하면서, 시민단체나 네티즌들 또한 여기서는 예외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어름에서 이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건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바른 모습이 아니다. 건전한 사회 의식을 좀먹는 또하나의 사회 병리현상일 뿐이다. 미군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최근 우리 사회 전반에 일고 있는 '반미'감정은 시민사회단체가 저런 정치논리를 적용하여 승리한 좋은 사례이다.

여중생 사망사건의 미군 피의자에 대한 '무죄평결'은 어떻게 보면 시민사회단체가 미군과 미국 사회 일반의 감정을 최대한 자극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 결과이다. 즉 '불순한' 시민단체가 주동이 되어 지속적으로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미군측의 배심원 제도가 갖는 맹점을 이용한 결과가 미군 피의자의 '무죄평결'을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항의 메일을 보내주신 다수의 네티즌 회원들과 달리, 우리는 이 기자의 이와같은 시각에 공감한다. 우리는 왜 이 기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가?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이에 대한 해명을 담아 전하고자 한다. 이 기사는 결국 항의 메일을 보내주신 네티즌과 회원분들께 드리는 우리의 공식적인 답변인 셈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촛불시위

지난 7월 31일에 열린 '49재 추모제'와 규탄 대회 모습 (c) 하민혁


먼저,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인터넷에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늘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중생 사망 사건이 터진 직후에 우리는 이 사건이 갖는 중요성에 주목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현장 취재를 기획했다. 하지만 우리는 원거리 취재 인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우리는 설립 3년째를 맞고 있기는 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기자제가 아닌 네티즌 회원제를 고집(우리가 왜 굳이 '회원제'를 고수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장을 통해 전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하고 있었고, 따라서 서울이 아닌 의정부 현장까지 나갈 취재 인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당시 약 2주 전에 '회원'에 가입한 이*훈님이 인사차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날이 7월 13일 토요일이었다. 우리는 이*훈 회원께 다음 날 있는 시위 현장의 취재를 부탁했고, 7월 14일(일) 의정부 미2사단 정문 앞에서 열리는 ‘미군장갑차 여중생 살인만행 규탄 제4차 범국민대회(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이하 '범대위') 주관)' 현장에 그를 보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취재 현장에서 이*훈 회원은 시위를 주관한 이른바 '범대위'에 의해 가공할 집단 린치를 당했다. 범대위 관계자들은 이*훈 회원이 소지하고 있던 회사 소유의 카메라까지 강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미군규탄 시위대, 취재중이던 본사 회원 집단 린치하고 취재용 카메라까지 빼앗아" 기사 참조 - 편집자주)

우리를 더욱 아연하게 했던 것은 이후에 보여준 범대위의 태도였다. 범대위는 명백히도 잘못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사과는 커녕, 사건 직후 우리를 오히려 '프락치'로 몰아가는 작태를 벌였다. 우리 사이트와 게시판에 대한 '폭파'까지를 선동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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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위가 말하는 '프락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프락치'에 의해 범대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화를 입었는지는 범대위가 그 사례를 적시해준 바 없기에 알 수 없는 일이나, 우리는 그런 사항들이 네티즌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임을 밝히고 '범대위' 측에 이 사건에 대한 사과와 카메라의 반환을 요구했다.

범대위 또한 우리가 그들이 말하는 '프락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시인한 바 있다. 그러나 범대위는 자신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패악에 대해 지금까지 공식 비공식적인 어떤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사건 당시 강탈해간 카메라 또한 돌려주지 않고 있다. 후안무치하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이같은 범대위의 태도는 대체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이 범대위의 골수에 박힌 '사이비 진보' 의식(양아치 근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범대위의 비이성적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와 행동논리가 절대 틀리지 않다는 '무오류의 환상'이다. '한갓된 역사주의'와 '천박한 선민의식'이 어우러져 빚어낸 일종의 사이비 진보 혹은 편집광적 맹신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뒤로 가는 '퇴행적 진보'일 뿐, 엄밀한 의미의 진보가 아니다(방향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보자면 '퇴행적 진보' 또한 '진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른바 '범국민 대책위'의 정체성을 묻는다

지금 우리 사회 최대의 관심사는 단연 연말의 대통령 선거와 여중생 사망사건이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야 5년마다 으레 치르게 되어 있는 연례행사이고 보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중생 사망사건이라고 봐야 한다. 사건의 전개 양상이 사회적으로 그만큼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특정한 의도를 지닌 불순 세력의 여론몰이나 일반 시민의 순간적인 감정 논리에 휘둘리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 일반 네티즌의 접근 방식과 다르다면 다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계속, 기사 이어집니다)


/ 2002-12-01 오후 2:58:11


 
 
2009/01/29 19:44 2009/01/29 19:44
뉴스로그, 2008년 1월 7일 메타블로그 서비스 오픈
- 새해 블로거 자유지대 - 메타블로그 전성시대 열린다

2008년 새해에 또 하나의 메타블로그 사이트가 오픈한다. 세계 최초로 기자정보 오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뉴스로그는 2008년 1월 7일(월요일) 메타블로그 '뉴스로그-시즌3'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오픈을 전후해서는 '버그를 찾아라' '이 블로거에 대해 알려주세요' 등의 다양한 이벤트도 함께 열린다.

메타블로그는 RSS 를 통해 독립적인 개별 블로그 및 포스트를 연결-중계하는 일종의 허브(Hub) 사이트다. 올블로그, 이올린, 블로그코리아 등의 메타블로그 전용 사이트와 언론사에서 운영하는 블로그플러스, 이버즈 등이 있다(메타블로그 사이트 모음은 첨부자료 참조).

2007년 한 해 정보기술(IT) 분야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은 것은 블로그였다. 우선 양적으로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주었으며, 질적으로도 전문 기자들 못지않은 질높은 포스트를 선보이면서 의제 설정 및 이슈 메이커로 분명하게 자리잡았다.

블로그의 이같은 성장 이면에는 메타블로그가 있었다. 특히 이른바 파워블로거를 중심으로 포털 종속적인 서비스형 블로그를 벗어나 설치형 블로그 사용자가 증가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포스트를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독립적인 블로그를 연결하는 메타블로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메타블로그의 한계 또한 일정부분 드러났다. 메타블로그의 서비스 방식이 비슷하여 각 서비스간 차이점이 눈에 띠지 않는다는 지적과 메타블로그를 통해 유통되는 컨텐츠 대부분이 IT 부문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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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로그-시즌3는 메타블로그에 대한 이같은 평가에 하나의 의미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서비스를 기획한 정용수 팀장은 "뉴스로그의 메타블로그 서비스는 몇 가지 점에서 기존의 메타블로그와 그 성격을 달리 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차별화된 서비스다. 기존의 메타블로그가 카테고리 중심의 서비스를 통해 단순한 링커(연결자) 역할에 그쳤다면, 뉴스로그-시즌3는 서비스의 모든 중심 축을 블로거에 두고 철저하게 개별 블로거의 브랜드를 제고하는 방향에서 접근한다.

두번째는 평판 시스템의 도입이다. 뉴스로그-시즌3는 기자가 생산한 기사와 블로거가 작성한 포스트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 평가하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기자평판 서비스 운영을 통해 얻은 노하우가 메타블로그 서비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번째는 시딩(Seeding) 방식을 통한 메타블로그 서비스 영역의 확대다. 뉴스로그-시즌3는 단순히 RSS 만을 중계하지 않는다. 디그닷컴(digg.com)과 같은 시딩 시스템을 도입하여 RSS가 지원되지 않는 형식의 포스트도 얼마든지 링크가 가능하다.

네번째는 커뮤니티 기능의 강화다. 뉴스로그-시즌3에 연결된 모든 글에는 기본적으로 댓글과 트랙백 기능이 제공되며, 여기에 별도의 커뮤니티 기능이 추가된다. 이를 통해 개별 블로거에 의해 서로 독립적으로 제기된 이슈나 문제의식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뉴스로그-시즌3는 이밖에도 '지금 관심이 필요한 포스트' '어제 관심을 받지 못한 글' 등 이른바 마이너 블로거를 위한 여러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뉴스로그-시즌3가 과연 ‘메타블로그의 전성시대’를 새롭게 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되는 까닭이다.

/ 2007. 12. 27


<못다한 이야기> 지금까지 블로거는 전문 기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문화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형식상으로 본다면 이같은 평가는 타당하다. 전문적인 훈련 과정을 거친 기자의 기사는 확실히 블로거가 생산한 포스트에 비해 비교우위를 갖는다.
그러나 블로그 또한 기사가 갖지 않는 장점이 있다. 바로 롱테일 이론으로 대표되는 집단지성의 힘이다. 블로그의 글은 트랙백과 댓글을 통한 치열한 검증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다듬어진다. 활자화하는 순간 그 생명을 다 하는 기사와 달리 블로그의 글은 지속적으로 생성 발전해가는 특성을 갖는다. 기자의 글이 대개 완결된 구조를 띠는 것에 비해 블로그의 글이 느슨하게 열려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뉴스로그-시즌3의 목표는 블로거를 기자의 영역으로 애써 끌어가려는 대신, 기자를 블로거의 영역으로 불러들여 공정한 평가와 건전한 경쟁의 장을 마련해보자는 데 있다. 이를 통해 블로그는 무엇이며, 미디어란 또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고민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그 무엇을 찾아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09/01/29 19:25 2009/01/29 19:25
하민혁의 민주통신

하민혁의 민주통신

"언론개혁은 말이나 구호가 아니다. 실천이다."

지난 세기 말(^^), 참여형 인터넷신문을 창간하면서 던진 말이다. 시민 일반의 참여를 통해 언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이겠다는 각오를 담아서였다.

그때로부터 9년. 과연 새로운 언론의 지평은 열렸다. 시민 일반의 참여는 활발해졌고, 언론 지형은 확실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언론개혁의 꿈은 이루어졌는가?
언론은 더 좋아졌고 언론은 더 신뢰할만해졌는가?

유감스럽게도 그 답은 '아니오'이다. 언론은 더 나빠졌고 언론에 대한 불신은 더 커졌다. 언론개혁 또한 여전히 답보상태다.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는 감마저 들고, 그리하여 언론개혁의 길은 더 지난하고 더 요원한 걸로만 보인다.

왜인가? 역사는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믿음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우리의 언론 지형에는 분명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시민 일반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서 상당한 성과를 얻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언론은 여전히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우리는 뉴스로그를 통해 다시 이에 대한 답을 구해보려 한다. 실천적으로. ^^


<덧붙이는글>

'언론개혁은 말이나 구호가 아니다'는 명제는 참이다. '언론개혁은 실천이다'는 명제 또한 여전히 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가지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바로 권력이다. 구호나 실천이 권력과 만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의 그 구호나 실천일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사실을 간과했다.

권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곧 정권과 돈이다. 정권에 붙고 돈에 기생하여 주창되고 실행되는 언론개혁은 더 이상 '언론' 개혁일 수가 없다. 기껏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의 방편이거나 특정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언론이 권력에 종속, 함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것은 일반적인 권력투쟁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드높은 이상을 앞세운 뒤에서는 추잡한 플레이가 판을 친다.

누가 언론개혁을 더 크게 외쳤는지에 따라 감투가 주어지고, 누가 더 강한 권력에의 의지를 보였는지에 따라 지분이 정해진다. 순결하고 치열하던 언론개혁의 의지는 간 데 없고, 언론권력을 붙잡기 위한 악다구니와 몸부림만이 기승을 부린다. 그렇게 한바탕 굿판을 벌인 덕에 누군 사장으로 누군 위원으로 한 자리씩 감투를 얻어 떠나고, 어떤 곳은 이런 명목으로 다른 곳은 또 저런 명목으로 지분을 받아 챙긴다.

지난 몇년 사이 언론개혁 운동이 전개되는 양상은 대개 저러했다.

문제는 실천이 아니었다. 언론개혁이 제자리서 뺑뺑이를 돌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구호나 실천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구호와 실천은 실로 가열찼으되, 그 목표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자리와 돈이었다.

그랬다. 문제는 그 기저에 흐르는 저열한 기생의식에 있었다.  

/ 200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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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 20:49 2009/01/28 20:49

내가 가진 도메인을 이용하여 독립적인 이 메일주소를 만들어 보자.

포털에 등록하여 사용하는 개성없고 똑같은 이메일 주소보다 내 개성이 물씬 풍기는 partner@, my@, ceo@ 등과 같은 메일주소는 좀더 '있어' 보이지 않는가? -_-

사실 자기 도메인으로 만들어진 고유한 이메일 주소를 갖는 건 모든 네티즌의 꿈이다. 물론 간단히 가질 수도 있다. 유료 이메일 서비스를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 들이지 않고 이용하는 것이다.

이제 돈 걱정 하지 않고도 자신만의 독특한 이메일 주소를 공짜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구글이 제공하는 어플리케이션 중에서 이메일 기능을 이용하면, 무료이면서도 웬만한 유료 웹메일보다 더 강력한 이메일 서비스를 구축할 수 있다. (다른 기능도 공짜인 게 많다. 알아서 사용하시길.. ^^)

다음은 구글 어플리케이션의 메일 기능이 갖는 장점이다.
 

- 완전 무료다.
- 웹메일이라 사용이 쉽다.
- 메일 footer에 쓸데없는 꼬리표가 붙지 않는다.
   공짜 메일에 덕지덕지 붙는 꼬리표 없이 깨끗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다.
- 구글이 제공하는 gmail 과 동일한 기능과 성능을 보여준다.


이제 이 공짜 이메일을 사용해보도록 하자. 

참고로, 이 글은 '완전초보'를 위한 설명임을 밝혀둔다. '파워유저' 분들은 패스~해주시길. ^^
이 글에서는 편의상 exmydo.com 이라는 도메인을 사용하여 설명을 하겠다.


1. 구글 어플리케이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가입절차를 진행한다

1-1. 접속주소 : https://www.google.com/a/
1-2. 오른쪽 상단에 있는 [버전 비교 및 가입] 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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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무료로 사용할 것이므로 표준형 [가입하기]를 클릭한다.

1-4. 도메인 이름 선택 (3단계 중 1단계)

사용할 도메인을 입력하고 [내 도메인 사용]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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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소유 도메인이면 다음 단계로 진행되지만, 미등록 도메인이면 도메인 등록가능 페이지를 보여주고, 이미 신청된 다른 사람 소유의 도메인이라면 에러 메세지를 보여준다.

1-5. Google 표준형 애플리케이션에 가입하십시오. (3단계 중 2단계)

정보란에 적당한 내용들을 입력한다

이메일 주소는 현재 정상적으로 사용하는 메일주소를 적는다.
혹시 계정을 분실하거나 했을 때 확인 가능한 비상용이라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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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설정 - 첫 관리자 계정을 만드십시오. (3단계 중 3단계)

접속시 관리자로 설정할 메일주소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my@exmydo.com 을 exmydo.com 의 관리 계정으로 사용한다면 my 라고 입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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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동의 버튼을 누른다.

1-7. 가입 마무리




자동 접속되면서 해당 도메인의 소유권 검증과 각 서비스 설정 화면이 나타난다.
메일 뿐만 아니라 웹페이지, 캘린더, 오피스 등 여러가지 무료 서비스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

도메인의 소유권증명 절차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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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메인 소유권 증명 및 네임서버 변경

2-1. 도메인의 소유권 증명

위의 1-7. 에서 계속 진행한다. 혹시 창을 모두 닫아 버렸다면 다시 접속한다.

https://www.google.com/a/cpanel/exmydo.com/Dashboard 

혹시 접속이 안되는 경우  
https://www.google.com/a/exmydo.com/ 으로 접속하면 로그인 페이지가 나온다. 

앞서 관리자로 가입했던 계정으로 접속

해당 도메인의 관리 페이지가 나타난다. 

네임서버를 직접 관리하거나 관리자가 있거나 하는 경우 아래의 방법을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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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인 소유권을 확인하십시오 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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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도메인이 실제 본인의 소유(또는 본인이 도메인의 정보 수정 권한이 있다)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확인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2-1-1. HTML 파일 업로드로 소유권 증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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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보이는 파일명으로 파일을 만들어서 그 아래 지정된 텍스트를 이 문서의 가장 위에 입력한 다음, 이파일을 해당 도메인의 디렉토리에 업로드한다. (파일명, 텍스트 등은 위의 예와 다를수 있다.)

위의 방법은 웹사이트을 운영하고 있는 경우 편리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정리하면,

- 파일을 생성한다. googlehostedservice.html
- 파일을 메모장 등으로 열어 제일 위에 한줄 추가 google8ffca4c5464de85f
- 저장한 다음 이 파일을 exmydo.com 의 사이트 첫페이지가 열리는 곳(index 문서가 존재하는곳)에 업로드
- [확인] 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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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텍스트로만 된 문서를 만들어서 업로드 한다.


2-1-2. CNAME 레코드 변경을 통한 확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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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법은 화면에 나타나는 고유문자로 된 접속 레코드를 zone 파일 설정에 추가 하는 방식이다.

- 해당 도메인의 DNS 설정하는 zone파일에 아래의 내용을 추가 합니다.
   google8ffca4c5464de85f . exmydo.com
   예를 들면
   google8ffca4c5464de85f.exmydo.com. IN CNAME google.com.

- 편리한 접속을 위해 아래의 내용도 추가해 준다.
   (mail.exmydo.com 으로 접속가능하게 된다)
   mail  IN  CNAME  ghs.google.com.
- 네임서버를 재시작 한다.
- [확인]을 누른다.

위의 둘 중 하나를 지정한 후 아래의 [확인]을 누르면 구글에서 자동으로 확인을 하며,
즉시 확인 되지 않는 경우에는 48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메세지가 나타난다.


2-2. 무료 DNS 관리 서비스를 이용한 손쉬운 네임서버 변경 및 수정, 소유권 증명하기

이 방법은 네임서버를 보유하고 있거나 시스템에 대해서 잘 알거나 관리자가 있거나 하는 경우에 사용한다. 만일 이같은 조건에 부합하지 않다면, 무료로 DNS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을 이용하여 몇가지 조치를 해주어도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웹호스팅을 받고 있는 경우라면, 해당 호스팅 회사에 dns 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호스팅업체에 특별히 미움을 받거나 한 경우가 아니라면 필요한 부분을 수정해줄 것이다. ^^

2-2-1. [참고] 무료 DNS 서비스 가입하기

아래 사이트에 가입하면 무료 DNS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당연히 나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이트다).  
http://kr.dnsever.com/ 

이곳 말고도 무료 DNS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더 있다. 꼭 이곳이 아니어도 된다.
이곳의 사용법은 해당 사이트에서 살펴 보시고 여기서는 필요한 부분만 간단히 설명한다.

- 가입하신후 도메인을 추가 한다. exmydo.com 을 추가
- 도메인의 네임서버를 dnsever 에서 요구하는 것으로 먼저 변경
- 메일서버(MX) 관리 메뉴에서 메일서버를 추가
- 고급기능 메뉴에서 도메인별명(CNAME) 관리에서 위의 CNAME 레코드 변경 등의
   수정이 가능하다.
   (자세한 내용은 2-3-3 참조)



2-3. 메일서버 지정

도메인소유권 증명이 끝나면 메일을 정상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메일서버를 설정해야 한다.
위의 작업들과 중복되는 게 있으므로, 네임서버 수정 등을 할 때 아래 작업까지 한꺼번에 처리하면 편리할 것이다. 메일서버 설정 작업은 도메인소유권 증명이 완료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미리 처리해 두는 것이 좋다.

- 다시 서비스 설정메뉴로 접속 (위의 2-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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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메일 항목에서 [이메일 활성화]를 누른다.

메일서버를 어떻게 지정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타난다.
이미 서버관리자 또는 이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경우에는 이때 나오는 설명을 참고하여 처리하면 된다.
아래는 이에 대한 필요한 부분만을 단순히 정리하여 열거한 것이다.

2-3-1. zone 파일을 직접 수정할수 있다면 아래 처럼 수정한다.
(위에서 가입한 dnsever.com 을 이용하려면 아래 2-3-2 를 참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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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zone 파일에 아래와 같이 내용을 추가한다.

exmydo.com. IN MX 1 ASPMX.L.GOOGLE.COM.
exmydo.com. IN MX 5 ALT1.ASPMX.L.GOOGLE.COM.
exmydo.com. IN MX 5 ALT2.ASPMX.L.GOOGLE.COM.
exmydo.com. IN MX 10 ASPMX2.GOOGLEMAIL.COM.
exmydo.com. IN MX 10 ASPMX3.GOOGLEMAIL.COM.
exmydo.com. IN MX 10 ASPMX4.GOOGLEMAIL.COM.
exmydo.com. IN MX 10 ASPMX5.GOOGLE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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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위에서 소개한 dnsever.com 을 이용하는 경우 아래와 같이 조치하면 된다.

- dnsever.com 에 접속한다.
- 해당 도메인을 선택한다(아직 추가하지 않았다면 사용할 도메인을 추가한다).
- 메일서버(MX)관리 메뉴에 접속
- [도메인(또는 호스트이름)] 항목은 그대로 두고 [메일서버] 와 [우선순위]에 아래와
같이 차례로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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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래와 같은 방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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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마치면 보통 늦어도 하루 정도가 지나면 정상적으로 적용된다.

2-3-3. dnsever 에서 CNAME 레코드 추가

- dnsever.com 에 접속한다.
- 해당 도메인을 선택한다.(아직 추가 안했다면 사용할 도메인을 추가한다)
- 고급기능 메뉴에서 도메인별명(CNAME)관리 선택
- 도메인 소유권 확인을 위해
   [도메인별명]에 google8ffca4c5464de85f 입력후
   실제도메인은 [직접입력] 선택.
   별명(CNAME)추가.
   도메인은 google.com 입력
- 메일서버 편리한 접속을 위해
   [도메인별명]에 mail 입력후 
   실제도메인은 [직접입력] 선택.
   별명(CNAME)추가.
   도메인은 ghs.google.com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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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설정이 마무리 되었다.
여기까지 정상적으로 진행했다면 이제 멋지게 이메일을 사용하는 일만 남았다.


3. 구글 메일 사용하기

이상과 같이 지정된 경우 mail.exmydo.com 으로 접속 가능하다.
아니면 www.google.com/a/exmydo.com 으로 접속 한다.

관리계정을 입력하고 접속 한다. 처음 만든 계정이 관리 계정으로 설정되어 있다.
메일은 계정 생성 후 즉시 발송이 가능하다.
수신은 메일 계정이 활성화된 후(zone 파일 수정이 적용된 후) 가능하다.
* 수신과 발송 기능을 반드시 테스트해 보시기 바란다.

모든 서비스가 정상이 되면 [운영중] 이라는 메세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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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화면이 나타났는가? 그렇다면 성공한 것이다.

인터넷 즐겁게 사용하시고,
가.끔.씩.(빵상 아줌마 버전으로 읽어주세요~ ^^) 하민혁의 민주통신에도 들러주시길.. ^^  



P.S. 이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유저라면
캘린더, 오피스를 비롯한 구글의 다른 어플리케이션들도 한번씩 관심을 가져봄직하겠다.


/ 2008. 01. 30



2009/01/27 18:19 2009/01/27 18:19

오늘 가수 나훈아씨가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폭행설' '와병설' '염문설' 등 여러 소문에 휩싸여 있던 그는 아주 작심을 하고 나온 듯 했습니다. 회견을 하는 40분 내내 "기자가 펜으로 나를 죽였다"며 격정적인 어조로  언론과 기자를 맹 질타했습니다.

나씨는 "내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았았다, 가정을 파괴했다"고 흘리고 있으나 "내게 눈꼽만큼이라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나는 여러분 집에 있는 개XX다. 만약 여러분 집에 개가 없다면 옆집의 개XX"라고까지 말합니다. 급기야는 바지의 혁대를 푸는 해프닝까지 벌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언론과 나훈아씨의 주장 가운데 어느 게 더 사실인지를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언론이 뚜렷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양산한 괴 루머가 한 사람을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지경으로 몰아갈 수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훈아씨는 "쓸데없이 인신공격하는 네티즌은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기자들에게 되묻습니다. "그걸 부추기는 사람이 누구냐"고 말이지요. "성질 급한 사람은 제목만 보기 마련"인데 기자가 제목을 교묘히 달아 네티즌을 부추기고 있다는 게 나씨의 주장입니다. 정작 기사 본문을 보면 별 내용도 없는 얘기가 낚시질에 가까운 제목을 달아 문제를 키워가고 있다는 거지요.

인터넷 시대를 맞아 무수히 많은 미디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미디어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저널리즘 문화는 채 정립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로지 '낚시성 기사' 공급을 위한 매체까지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여 '누가 누가 낚시를 더 잘하나'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같은 현상은 새로운 미디어로 부상하고 있는 블로고스피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일부 블로그의 경우는 여느 황색언론보다 더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기동하는 게 현실입니다.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메타블로그 서비스를 오픈하면서 우리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과 블로그 저널리즘'이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기획한 것도 이같은 현상에 대한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였습니다.

짧게 한마디 한다는 게 앞뒤없이 얘기가 길어졌는데요. 다양한 목소리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고, 그 각각이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그 방향성에 대한 논의는 한번쯤 반성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뉴스로그가 그 논의의 한 장을 여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2008.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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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7 17:07 2009/01/27 17:07

고향에 한번 다녀오마고 벼른 게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추석 연휴에도 기필코 다녀오겠노라 다짐했지만 결국 다녀오질 못 했습니다 아흔이 가까운 노모께 차마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불효한 아들입니다

이번 설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찍 찾아뵙겠노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도록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위안이라면 그나마 내일(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이제 오늘)은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새벽 5시 열차 편으로입니다 그래서 잠시 여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가는 고향인 터라 아이들의 꿈은 야무지기만 합니다 바로 세뱃돈 받을 꿈입니다 ^^



세뱃돈 받기

세뱃돈 받기 1 - 확인



세뱃돈 받기

세뱃돈 받기 2 - 그래도 머리는 숙여야.. -_-;





세뱃돈 받기

그 애비에 그 아들.. 이런 넘, 버르장머리 하고는.. -_-;;






그래도 세뱃돈을 안 주면? 살짝 열어보기 ..





세뱃돈 받기

과연, 저 야무진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님들, 기축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아침 하 민 혁
 



2009/01/26 00:43 2009/01/26 00:43
우리 집에는 재밌는 친구가 하나 있다 이 블로그에 가끔씩 등장하는 카툰을 그려주는 친구다 얼마 전에 함 언급한 친구기도 하고 (헬렌 켈러 이야기 - The Miracle Worker, 2000)

웹서핑을 하다 재밌는 만화를 보고는 이 친구가 생각나서 함 보라고 했다 (만화만 그려서 먹고살기 - 블로거로서 먹고살기 (1)) 보더니 아주 재밌다면서 깔깔~거리며 뒹군다(솔직히 나는 그게 그렇게 재밌는 거라는 생각까지는 안 들었다 그냥 니 비슷한 친구 하나 보라는 의미로 보여준 터였다 암튼)

한참 재밌다면서 링크까지 타고 가서 몇 개를 더 본다 그러더니 갑자기 슥슥삭삭~ 뭔가를 그린 다음 함 보라고 내민다 바로 아래 올리는 그림이다 며칠 전에도 말했듯이 얘네 엄마는 그림 그리는 것만 보면 뒤로 넘어가신다 그래서 엄마가 잠시 전화로 수다 떠는 동안 몰래 그린 그림이다(맞다 이 친구가 지금 몇 분만에 슥삭~ 한 게 이 정도라고 자랑하는 거다 ^^)

암튼 함 보시라 제목은 <만화가 - 꿈이 고작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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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글1> 그림의 너비를 500 으로 맞추다 보니 그림이 너무 작아져버렸다 그래서인지 A4 용지에서 보는 맛이 안 난다 아~ 그리고 저 만화의 부제로 달려 있는 "꿈이 고작 그거야?" 하는 멘트는 이 친구 엄마의 18번이시다  

<덧붙이는글2>
참! 이 카툰은 철저하게
만화만 그려서 먹고살기 - 블로거로서 먹고살기 (1) 이 포스팅을 보고 따라해본 것이지 자기가 창작한 게 아니라는군요(이 친구가 창작한 만화가 무려 70여 편이다 책꽂이 하나를 다 차지합니다 그러니 맨날 자기 엄마한테 야단을 맞는 거겠지만 ^^ 암튼) 그러므로 원작자가 내려달라고 하면 즉시 내리겠다는 말을 덧붙여두어야 한답니다(학교에서 저작권에 대해 엄청 빡씨게 가르치는 모양입니다 이 친구 조금이라도 남의 꺼를 원용했다 싶으면  자기 블로그에도 절대 안 올리려드니 말입니다)  
2009/01/25 23:52 2009/01/25 23:52

정치개혁을 바라는 시민과 네티즌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남북관계, 전쟁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세계정세, 악화되고 있는 경제상황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불안 등. 정치권이 앞에 나서 해소해가야 할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예전이고 지금이고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산적한 현안은 뒷전인 채 여전히 구태의연한 저질 폭로공방으로 날을 지새고 있습니다.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정치권만이 아닙니다. 정치권보다 오히려 더 문제인 곳은 언론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정치권을 탓하고 있지만 언론 자신은 정치권보다 더 정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최근 정치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거의 대부분은 언론의 정치적 기동에 의해 부추겨지고 부풀려진 것들입니다. 바야흐로 정치언론, 언론정치의 전성시대이자 '언언(言言)전쟁'의 시기입니다.


언론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선다


하민혁의 민주통신

하민혁의 민주통신



언론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게 아닙니다. 언론이 지닌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지난 해 있었던 언론개혁 움직임 또한 그 연장선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개혁은 뜻과 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언론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언론개혁을 부르짖는 한편으로 스스로가 개혁의 대상이 되는 행태를 일삼는 곳에서 언론개혁이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난 해 마치 요원의 불길과도 같이 타올랐던 언론개혁의 그 열기는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치열했던 언론개혁의 결과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언론개혁은 과연 이루어졌습니까? 이루어질 기미만이라도 보이고 있습니까?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난 해 일었던 언론개혁 열풍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언론개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일종의 권력 쟁탈전이었을 뿐입니다. '전쟁'을 외치면서 '사생결단'으로 매달렸던 그 언론개혁의 결과가 각 언론의 정치적 기동에 정당성만을 부여해주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언언(言言)전쟁'의 시대
- '정치언론'을 넘어 '언론정치(프로파간다)'를 꿈꾼다



지금 이 나라 언론은 과거 어떤 때보다 더 극한 편가르기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폐해 또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짐짓 '창조를 위한 혼돈'이라며 눙을 치는가 하면, 또다른 어떤 이는 언론이 어떻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일 수 있느냐고 딴청을 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언론을 말하고 개혁을 논하는 한 언론개혁의 길은 하세월일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개혁을 운위하고 있지만 기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언론이 아닌 정치적인 기동입니다. 그들이 반대하는 것이 '정치언론'이라면 그들이 꿈꾸는 것은 '언론정치(프로파간다)'일 뿐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지금 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정치권이 아닙니다. 사회적 혼란의 대부분은 언론이 극한 정치성을 띠고 있고 이를 틈타 정치가 언론에 간섭하는 과정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언론이 그 본령을 잊고 본연의 임무에서 멀어진 탓입니다. 누군가가 나서 이 잘못된 구조를 바로 잡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터넷과 함께 한 지난 4년 - 민주통신의 역사는 그대로 이 나라 인터넷언론의 역사였습니다.

그동안 주요 이슈가 있을 때마다 민주통신은 올곧은 목소리로 인터넷의 한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습니다. 언론의 길에 충실하고자 노력했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바르게 걸어왔기에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 또한 결코 흔들림 없이 바를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민주통신이 가고자 하는 길과 이루고자 하는 일은, 그러나 어느 누구 혼자 갈 수 있는 길도 아니고 혼자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뜻과 힘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나아갈 수 있는 길이고 이루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민주통신에서 이 나라 언론의 바른 길을 함께 열어갈 인터넷기자를 모집합니다. 뜻 있는 많은 분들의 동참을 희망합니다. 민주통신은 어떤 경우에도 동참하신 분들의 그 뜻을 소중히 받들어 지켜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2002년 10월 21일  




 

2009/01/25 18:07 2009/01/25 18:07
한 사회가 정체되는 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그 요인 가운데 하나가 '근친교배 문화'다. '끼리끼리의 문화'라고 부름직한 '패거리주의'는 하나의 사회가 태동하여 변혁을 거치는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패거리의 도움이 없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입증한다.

인류는 수많은 변혁기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변혁기마다 거쳐야 했던 헤게모니 싸움이란 실은 누가 더 충실하고 많은 패거리를 만드는가 하는 싸움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느 패거리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회색분자일 뿐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려난 인간군에게 두 가지의 특정한 행동양식을 강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패거리에 동화되는 행동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헤게모니의 행방에 따라 스스로의 모든 것을 맞추는 기생적 행동양식이다. 이는 우리의 짧은 현대사만을 보더라도 익히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 전쟁 당시 태극기와 인공기를 번갈아 흔드는 행동양식이며, 몇 번의 공화국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행동양식이다.

역사와 패거리주의, 그리고 패거리주의의 한계

영화 <로베레장군>의 한 장면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를 처형하는 장면에서 자신이 레지스탕스가 아님을 주장하며 억울해 하는 한 시민에게 레지스탕스가 던지는 이 말은 변혁기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양식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이같은 패거리주의를 통해 도도히 흘러왔다. 그 흐름을 방해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역사는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의 역사가 이러 했으므로, 미래의 역사는 이러할 것이다는 식의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는 이를 가리켜 흔히 '한갓된 역사주의'에 매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민혁의 민주통신

http://blog.mintong.org



역사는 늘 스스로를 새롭게 변혁해 왔다. 토마스 쿤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화'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패거리주의의 한계다. '끼리끼리의 연대'는 변혁의 과정에서 절대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일단 변화를 넘어 안정기에 들어가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패거리주의는 이제 스스로의 한계가 되고 만다. 역사는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려왔다.

패거리주의의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근친교배'다. 근친교배가 갖는 단점은 열성인자가 유전된다는 점이다. 식물의 경우에도 근친교배를 막기 위한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암수가 같은 줄기에 있는 나무의 경우 대개는 수술이 아래 있는 방식이다. 암술이 아래쪽에 있는 경우 근친교배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붕당 놀음에 머무를 것인가 변혁의 역사를 만들어갈 것인가

한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변혁기를 넘어 안정기에 접어든 경우에도 사람들은 예의 저 패거리주의라는 갑옷을 쉬이 벗으려 하지 않는다. 이는 논공행상이나 우월감의 표시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오히려 편의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고 봐야 한다.

이를테면, 특정한 사안에 대한 방송 멘트를 따거나 기사 인용이 필요한 경우 대개는 주위에서 쉽게 접근 가능한 사람을 찾아 묻게 마련이다. 결국 특정한 곳에 자리를 잡는 사람은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과는 별개로 끊임없이 그 주변을 맴돌거나 기웃거리는 사람인 경우이기가 십상이다.

오늘날 언론이 보이고 있는 난맥상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같은 '패거리주의'에 있다. 몇 개의 언론사가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사에 유리하다싶은 언론은 상호 띄워주기를 통해 과대포장을 해가면서까지 치켜올리고 자사의 이익에 배치된다싶은 언론은 철저히 까거나 무시하기로 일관하고 있는 게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

또한 오늘날의 언론은 "개가 사람을 물면 기사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가 물면 기사가 된다"고 믿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언론플레이'를 통해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같은 인식은 '이제 박물관에나 모셔져야 할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민주통신>을 통해 이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시민 각자가 패거리가 아닌 자신의 두 발로 우뚝 서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혁명이란 다른 누구로부터의 해방(혹은 혁명)이 아니라 시민 각자로부터 비롯되는 혁명이어야 한다고 믿는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2005/01/18 22:10  통신보안>



  
2009/01/24 13:14 2009/01/24 13:14
몸도 허하고 맘도 허하다 최근 이런저런 일로 맘이 많이 상했다 맘이 이 모양이니 몸 또한 성할 리 없다 오늘같이 장시간 외근에 시달리고 돌아온 날이면 기력이 다 빠지고 말 그대로 파김치가 되어버린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밀린 일들 몇 가지 처리하고 나니 벌써 새벽이다 수북히 쌓여 있는 메일들 가운데 한겨레와 한겨레21에서 날아온 메일링의 타이틀이 유독 시선을 끈다
 

한겨레 필통레터


한겨레 필통레터는 히틀러를 탑으로 찍고 있다(히틀러를 비판하며 크는 아이들) 뭔가싶어 들어가봤더니 어느 덜 떨어진 분의 어거지가 글읽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뭔가 있어는 뵈야겠는데 안에 든 건 도무지 꽝~인 듯해보이는 글이다 문득 지난 촛불 시위 때의 '유모차 부대' 여인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한심한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이 나라 역사를 어떻게 히틀러에다 비교하는지 모르겠다 2년여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 상황을 거의 한 세대가 넘는 동안의 일제 식민지 치하 한국 상황과 마구잡이로 비교하는 치들의 아둔함과나 겨룸직한 인식틀이다 만세다


한겨레21 뉴스레터


제목부터가 '공갈쇼' 냄새가 확 풍기는 한겨레21의 “미네르바 구속은 자해공갈쇼”… 김어준-정봉주 쾌도난담을 읽는다 '쾌도'는 없고 헛소리만 가득하다 김어준은 페지일언하고 "말이 안 된다"고 설래발이다 "미네르바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하지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김어준(이하 김) 미네르바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하지만, 말이 안 된다. 정부가 금융권에 달러 매수 금지 요청 공문을 보냈다는 건데, 실제로 3일 전에 7개 금융기관을 모아놓고 달러 매입 자제를 요청했다고 한다. 말로 했냐, 공문으로 했냐인데 형식이 조금 다를 뿐 내용과 효과는 같다. 이게 허위 사실이냐 이거지.


땁~다압~해진다 어디서 많이 듣보던 소리다 이 블로그에서도 그렇고 박찬종 변호사도 그렇고 미네르바 박을 옹호하는 이들이 즐겨 하던 그 헷소리다(박 변호사가 예의 저 웃기잡는 논리에서 벗어나 제대로 가닥을 잡아가는 듯싶어 다행이다)  

긴 말 하면 입 아프고 함 보자 김어준은 미네르바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면서 그 근거로 정부가 금융기관에 달러 매입 자제를 요청한 사실을 들고 있다 '정부의 달러 매입 자제 요청'이 사실이므로 '정부가 금융권에 달러 매수 금지 요청 공문을 보냈다'고 말한 건 허위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다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허위 사실 유포는 아니다?"
 

김어준 - 정봉주

김어준 딴지일보 종신총수-정봉주 전 국회의원 (오른쪽부터)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김어준의 이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쾌'하지 못하다 첫째는 정부의 역할에 대한 무지 혹은 무시다 경제 위기가 점쳐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금융기관과 의견을 조율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정부는 이런 일 하라고 있는 것이다

김어준도 이같은 사실을 온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자제 요청'과 '금지 요청'을 구분해 적고 있는 점에서다 '자제'와 '금지'의 구분조차 못하고 설래발인 벽창호들에 비한다면 확실히 진일보한 접근방식이다 그런데 그 차이까지 적시한 김어준이 내린 결론은 전혀 엉뚱하다 마치 정부가 무슨 못 할 짓이라도 하다 들켰다는 식으로 헷소리를 하고 있다  

둘째는 '미네르바의 공문'에 대한 의미 왜곡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네르바가 말한 공문은 존재하지 않는 문서다 이건 김어준도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네르바는 존재하지 않는 그 공문을 정부가 긴급 발송했다는 거짓 사실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게 허위 사실 유포가 아니다? '정신병적 증상'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게다가 미네르바가 누구인가? 언필칭 '인터넷 경제 대통령'이다 말만 그런 게 아니다 눈치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언론이나 출판사도 그를 명시적으로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활자화시켜두고 있다 공영방송의 메인 앵커까지 나서 정부가 미네르바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조언할 정도다 이런 이가 '긴급 공문 발송'이라는 타이틀로 인터넷에 '공문'을 띄운 것이다 그런데도 이게 문제될 게 없는 일이다? 이걸 문제 삼는 게 오히려 '정신병적 증상'이다?


문제의 핵심은 미네르바가 봤다는 '공문(비슷한 것)'의 존재다


무엇보다 미네르바 자신은 문제의 '공문(비슷한 것)'을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 사태의 핵심이 공문의 존재 유무에 있는 것이지 정부의 협조 요청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미네르바를 변호하려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미네르바가 봤다는 그 공문(비슷한 것)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우선이다 그게 아니라면 미네르바의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한 책임은(그게 법적인 처벌을 포함하는 책임이든 도의적인 책임이든지를 떠나서)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네르바 자신이 밝히고 있는 이같은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로 했냐 공문으로 했냐, 형식이 조금 다를 뿐 내용과 효과는 같다"면서 "이게 허위 사실이냐 이거지" 하는 너스레를 떨고 있다 딴짓이란 게 아무리 정도가 없다 하지만 이 정도 딴짓이면 딴짓이라기보다는 어디 살짝 맛이 간 짓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만일 맛이 간 게 아니라면 이건 영낙없는 기생질이다 사건에는 으레 기생층들이 달라붙는다 이같은 기생층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법정 주변이다 법정 주변에 서식하는 이 기생층들은 피해자의 변호 같은 데는 애시당초 관심이 없다 어떻게든 피해자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게 이들의 유일한 목적이다 먹잇감을 찾는 이들의 후각은 탁월하다 만만한 피해자다 싶으면 이내 개떼처럼 달려든다

이번 미네르바 사건 주변에도 이같은 기생층들이 널리고 널렸다 이 기생층들의 관심사는 미네르바가 아니다 미네르바의 변호는 더욱 아니다 미네르바를 변호하는 척 하지만 그래서 인권이 어떻고 민주주의가 어쩌고 나발을 불어대고 있지만 속내는 미네르바를 이용해먹겠다는 것이다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상징 조작된 미네르바에 묻어가려는 기생질인 것이다


김어준 한겨레 류의 '말 되는' 기생질


앞서 나찌와 한국의 경우를 등가적으로 비교하는 이의 단순함을 얘기했다 한겨레와 김어준 류 또한 마찬가지다 그 근저에 흐르는 '기생 의식'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계속하기로 한다 밝아오는 날을 위해 두어 시간이라도 눈을 붙여야 해서다)




  
2009/01/23 06:56 2009/01/23 06:56
조-동아리 닥쳐?!
"조-동아리 닥쳐?!"


청와대 '조선-동아와 대전쟁' 노림수

일요신문 커버스토리다. 타이틀만 메가톤급인 뻥튀기성 기사다. 조선 동아에 대한 청와대의 잇단 강공이 DJ 정부 시절의 '언론개혁 출정가'를 연상케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언제부터 수구였을까?

동아일보는 암울했던 시절 민주세력의 대변지였고 그나마 반항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랬던 게 지금은 타도되어야 할 수구의 개가 되어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 그보다는 왜 동아일보인가? 바로 진보수 놀음 때문이다.

진보수 놀음이란 21세기 벽두에 대한민국에 불어닥친 일종의 희생양 찾기 게임이다.
이 게임은 누군가를 끝없이 희생양으로 만들어야 승리하는 게임이다. 룰은 간단하다.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극에 서는 것. 그러면 희생양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어중간하게 스탠스를 잡는 모든 것이 희생양이다.

이 게임에서 주의할 건 하나다. '절대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잠시라도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어~ 그건 아니잖어.." 하면 그 순간 게임은 끝난다. 민주당이 그랬다. 극단에 서야 하는데 스탠스를 어설프게 잡았다. 그 결과 민주당은 하루아침에 개혁의 걸림돌로 희생양이 되었다. 이보다는 좀더 정치한 설명이 필요한 케이스지만 동아일보도 결국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게임의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
일반 대중일까?

일부에서는 그렇다고 말한다. 대중은 희생양이라는 타겟에 걸리지 않겠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한 일반 대중 또한 희생양이라는 타겟을 벗어나지 못 한다. 아니다,

어쩌면 대중이야말로 이 게임의 궁극적인 타겟인지도 모른다. 제거되어야 할, 우매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는 까닭이다.
- 2004. 07. 22   01:26


 

<덧붙이는글> 하루 하나씩 포스팅을 한다는 약속은 해둔 터인데, 예상치 않은 복병을 만나서 고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당분간 이전에 다른 블로그에 써둔 글을 옮기기로 합니다 위에 옮긴 글은 주간지에 실린 선정적인 타이틀을 보고 2004. 07. 22 (01:26) 에 쓴 글입니다

2009/01/22 00:26 2009/01/22 00:26

[초딩카툰] 용산 2009. 1. 20

"철거민, 우리는 썩은 세상에 우리의 분노를 던진다!"


참여연대, 용산 철거민·서민 참사에 대해 인권위에 긴급 진정

1월 20일 새벽, 용산 강제철거현장에서의 대 참사로 한국의 경찰의 인권침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다시 한번 온 국민은 알게 됐다. 이 극단적인 경제위기 국면에서 살아보겠다고 절규하는 영세상인-철거민-서민들을, 한 겨울에, 경찰특공대까지 동원하여 사망과 부상을 야기하고야 만 것이다. 통탄하고도 통탄할 일이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한 겨울에, 깜깜한 밤과 새벽에, 강제철거와 강제진압을 시도하는 것 자체와, 결국 사망과 부상을 불러일으킨 과정과 결과, 그 모두가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임이 분명하다.

이에 참여연대는 1월 20일 오후 3시 반께 긴급하게 국가인권위에,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에서의 경찰의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긴급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 엄청난 인권침해행위를 인권위가 철저히,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검-경의 조사 결과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인권위가 조사에 즉시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이다.

국가 인권위는 즉시, 철저하게, 제대로 현장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긴급진정서 진정취지 전문

2009년 1월 20일 새벽, 재개발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며 용산 4구역 건물 옥상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던 철거민에 대한 경찰의 무리한 과잉진압으로, 최소 철거민 5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이상이 부상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너무나 참혹하고 절대로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며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서민들에게 경찰특공대를 투입하고 물대포를 이용해 강제진압을 강행함으로서 빚어진 이번 참사는 예고된 참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권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경찰은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떼쓰는 자들에게는 본때를 보이겠다는 식’으로 공권력을 남용해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이명박 대통령, 원세훈 행자부장관과 김석기 서울경찰청장, 그리고 현장 특공대장 등은 명백하게 과도한 무력을 사용함으로서 선의의 국민들을 사망과 부상에 이르게 한 중대한 인권침해를 저질렀다. 현재 사망자 숫자, 부상자 숫자와 그 경위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황으로 인권위가 어서 현장을 급히 직권 조사, 피진정인의 범죄행위, 인권침해행위에 대해 철저 조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검-경의 조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 객관적인 인권위가 즉시 조사에 나서야할 또 하나의 이유이다.

건설업체는 고분양으로 배불려 vs 원주민에게는 낮은 보상으로 생존 위기 불러. 40층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 6개동을 짓는 용산4구역은 용산의 핵심지역 가운데 하나로, 시공사도 삼성물산, 대림, 포스코 등 모두 재벌건설 사업자로 구성돼 있다. 이 지역은 분양가상한제 미적용으로, 예상분양가는 3.3㎡당 3500만원대의 소위 노른자 지역으로 막대한 수익이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세입자들에게는 낮은 보상으로 생존 위기를 불러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보수 언론과 경찰에서는 철거민들의 폭력성만을 부각했지만, 이들의 요구사항은 “생계대책 마련”과 “용산구청과 시행사, 용산경찰서가 함께하는 협상 테이블을 마련” 등 먹고 살기위한 최소한의 요구들이었다. 이를 무참하게 무시하고 농성 1일 만에 경찰특공대를 투입한 것은 전두환-노태우 독재정권시절에 보기 어려웠다.

무리한 재정비가 대규모 참사 불러. 용산4구역은 2006년 4월 도시정비구역으로 지정된 뒤 2007년 2월 조합이 설립되고 2007년 4월 재개발사업시행인가 신청과 인가가 이뤄졌다. 그해 10월 조합 총회를 통해 이주 및 주거이전비 지급안과 철거업체 선정 등이 확정됐다. 사업시행 인가는 조합설립 후 2개월도 안 됐고 보상 절차도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통상 사업인가 기간이 3~4년도 걸리는 점에 비춰보면 용산4구역의 사업 진척 속도는 매우 빠른 것이다. 이렇게 무리한 재정비와 급속 막개발은 다른 철거지역에서도 보았듯 항상 폭력사태를 낳았다. 현재 뉴타운 사업 대상지 26개 지구(219개 구역)를 비롯해 서울 곳곳에서는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뉴타운의 경우 철거작업이 시작돼 이주 수요가 발생하는 등 사업이 본격화되는 `관리처분인가' 지역이 올해 19개, 내년 48개, 2011년 73개 구역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빚을 수 있는 강제철거작업이 앞으로도 계속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인권위는 사망과 부상에 대한 인권침해뿐만 아니라, 무리한 막개발-급개발이 불러일으키는 주거기본권 박탈 등의 사회권 침해와 세입자 차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진상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그리도 급해 오골 곳 없는 영세상인들과 주거세입자들을 엄동설한 한 겨울에 쫓아내려고 했던 말인가. 한 겨울에 세입들을 몰아내는 행태는 그 자체로 인권 침해 행위인 것이다. 인권위에서도 수차례 한 겨울의 철거의 문제점, 철거현장에서의 경찰과 용역 직원들의 과도한 무력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해오지 않았던가.

MB식 무리한 과잉진압이 참사 불러!

이번 참사의 일차적 책임은 경찰특공대로 하여금 무리하게 진압작전을 펴 철거민들을 사망하게 한 경찰 지휘부에 있다. 특히 이번 사건에 투입된 부대는 서울경찰청 직속 경찰특공대로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의 지휘를 받는 대테러부대이다. 또한 김 청장이 직접 이 사건을 지휘했다고 한다. 김 청장은 촛불집회에서 강경진압으로, 현상금을 내건 인간 사냥 전술로 이명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얼마 전 경찰청장으로 내정된 인물이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농성중인 50여명의 철거민들에게 대화와 타협이 아닌 무자비한 진압을 기획하고, 살수차 2대와 경찰병력 1,400여명, 경찰특공대까지 동원하여 강제 진압을 명령한 김석기 서울청장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사퇴는 기본이고, 엄중한 형사처벌이 가해져야 할 것이다. 이를 먼저 인권위에서 철저히 밝혀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애통한 심정...

이 정권 들어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전면 후퇴하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참상 중의 참상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이 정권 들어서 막개발, 재벌 편들기, 부동산투기 조장 등을 강행하고 노골적인 강부자 정책을 펼쳐나가면서 서민들만 더 살기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또 서민들만 죽어나는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서민, 민주주의, 인권 중심으로 정책을 전환하지 않는다면 이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훨씬 더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애통한 심정이다. 살아보겠다고 몸부림 친 서민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고야 마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다시 한번 이번 참사의 희생자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 인권위는 참혹한 국민들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즉시, 제대로 된 진상 조사 결과를 내놓고, 특단의 인권옹호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2009/01/21 02:50 2009/01/21 02:50
오늘 아침 용산 재개발 현장에서 수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경찰이 농성 중인 철거민를 강제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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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많습니다 경찰의 무리한 과잉진압이다 철거민의 요구가 지나쳤다 용역 깡패가 상주하며 철거민을 괴롭혔다 철거민이 아니라 빈철연 등의 데모꾼들이다

그러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작동원리입니다

데모는 말 그대로 자신의 주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시위 행위입니다 민주주의는 이같은 데모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힘이 없는 이들이 혹은 달리 호소할 길이 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택하는 최후의 수단이 데모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가진 쪽이 시위 행위를 짓밟으려 할 때는 필요하고도 충분하게 모든 사정을 고려해야 합니다 막강한 공권력이 마지막 수단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 또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노무 정권에서는 이같은 인식 자체가 전무해보입니다 이노무 정권이 하는 양을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원칙조차도 작동하지 않는 듯해서입니다 오늘 아침 용산 철거민 강제 진압 현장이 보여준 것은 바로 이 정권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입니다 이 정권의 한계입니다

이노무 정권이 정신이 나갔습니다 정권이 이렇듯 정신 줄을 놓아버렸으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공권력이 중심을 잃고 제멋대로 춤을 추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를 지켜봐야 하는 국민 또한 미칠 노릇입니다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있습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2009/01/20 23:02 2009/01/20 23:02
8인의 미네르바

8인의 미네르바 - 인터넷판 신종 영웅놀이? (그림을 누질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구속된 미네르바 박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박찬종 변호사는 "미네르바는 박씨가 확실하다"고 거듭 밝혔다. 박 변호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씨는 신동아가 자신을 마치 가짜인 것처럼 보도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감정이 상해있다"고 전하며 "구속되어 심리적으로 열악한 상태에서, 인권이 침해되는 등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을 두고 '너는 가짜다' '7명 중 하나가 행방불명인데 그 사람의 글을 네가 대신 썼을지도 모른다' 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나고 사리에도 어긋난다"며 신동아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신동아는 인터뷰한 당사자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동감입니다





<덧붙이는글1> 블로그 주소가 변경되었습니다 앞으로는 http://blog.mintong.org 으로 접속해주세요 블로그 주소 변경과 함께 블로그명도 이전의 '하민혁의 통신보안'을 '하민혁의 민주통신'으로 새롭게 변경합니다 고맙습니다

<덧붙이는글2> 이번 신동아 보도와 관련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황당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입니다 "신동아의 미네르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나 했으면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 주변상황이 살짝 '아헿헿' 합니다 도저히 포스팅을 할 상왕이 아닙니다 언능 추스린 다음 관련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2009/01/19 19:51 2009/01/19 19:51
어린아이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는 달리 거짓이 없다. (....)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그것과 말할 수 있으며 넋의 교제가 가능하며 그것들과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동화의 깊은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것 없이는 얼마나 현실이 궁핍한가를 현실은 모르고 있다. 많은 고대의 현자들이 말해 준 신화는 실지로 그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목격한 아주 커다란 태초의 현실이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호오(好惡)의 감정이 약간씩은 있기 마련이다. 나와 고은 사이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고은이라는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런 거냐고 정색하고 물어오면 그 답이 궁하긴 하지만 암튼 그렇다  

세상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어디 그렇게 한 두 마디로 똑 부러지게 설명이 되는 일이던가. 굳이 밝혀야 하는 자리라면 한 두 가지 챙겨서 말하지 못할 바는 아니겠지만 여기서 굳이 그런 무리까지 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나의 서가에는 고은의 책이 별로 없다. 3권이 있을 뿐이니, 그가 100 여 권이 넘는 책을 낸 것에 비한다면, 그리고 나의 상당한 책 수집벽에 비추어본다면 이건 사실 여간한 감정이 아니다. 지금껏 고은의 소설 [화엄경]을 읽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바도 아닌 것이다.  

특히 화엄경의 경우, 기왕의 싫은 감정에다 작가가 환속한 사람이고 이 소설이 그런 이에 의해 쓰인 '불가 소설'이라는 점에서 저 거부감의 다른 일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읽은 그의 [절을 찾아서]라는 책이 준 실망감 내지는 반감도 또다른 일조를 했고.

소설 [화엄경]의 광고 공세는 대단했다. 안 사보고는 못 보길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야 비로소 이 소설을 읽었다 바로 위에서 밝힌 몇 가지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것도 처음부터 책을 사서 읽은 것은 아니다. 그저 잠깐 읽고 치울 생각으로 책을 빌렸다. "'91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을 한 작품인데다, 일전에 읽은 [만인보]가 인상적이었다는 점도 일정 부분 작용했지만 직접적인 영향은 책의 뒷표지에 씌어 있는 이문열의 글 때문이었다.

이문열은 여기서 소설 [화엄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기독교 문학으로는 [천로역정]이 있고, 시적으로는 단테의 [신곡]이 있지만 솔직이 소설 [화엄경]이 주는 감동은 그 두 작품을 뛰어넘는다. 소설 [화엄경]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참됨의 아름다움, 거룩함의 아름다움에다 추구와 탐색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말의 아름다움, 사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비어 있음의 아름다움과 잃어버림의 아름다움이 있고, 낯섬의 아름다움, 뒤틀림의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서는 자칫 잡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관능의 세계도 아름다움이고, 심지어는 집요함과 치우침도 아름다움이다.


참 엄청시런 찬사다. 암튼, 이 소설을 완독했다(이런 책을 완독하다니..대단하다!) 근데 할 말이 없다. 뭐라고 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서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가? 암튼 그 비슷한 기분이다
 

나는 저 남섬부주 사바세계에서 이곳으로 오는 손님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어요. 나는 많은 손님을 인도했어요. 그런데 그대처럼 이렇게 힘든 승천의 여행을 힘겨워하지도 않고 잘도 따라오는 손님은 처음이었어요. (....) 그대는 33천 에 닿을 만치 많은 공부를 했어요.
높이 높이 오를 수록 사바세계 사람들의 힘은 다하지요. 그래서 아무나 이곳으로 데려올 수 없어요. 데려오다가는 숨 막혀 죽거나 그가 살던 땅으로 추락하거나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마음대로 못하지요. 모든 일의 궁극은 자신에게만 있으니까요. 의존이란, 그리고 남의 힘이란 이 세계 어디에서도 지극히 허망한 것이지요.


소설에서 마야부인을 만나고 난 선재를 33천으로 안내하면서 그 안내를 맡은 하늘 여자가 선재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 어쩌면 내겐 이 소설을 얘기할만한 힘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늘나라로 오르다 숨이 막혀 죽는 저 여행자처럼 말이다.

소설 한 권을 다 읽었으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사람을 살짝 허탈하게 만든다.
 

이유를 함 찾아보고싶은 이가 있다면, 클릭!

소설 [화엄경]은 한 번 읽고 버려둘 수 없는 책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불교 경전의 하나인 화엄경 입법계품을 전거로 하여 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화엄경은 부처님의 설법 초기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개의 경전으로 독립되었다가 하나로 편찬된 것은 오히려 법화경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
그 중에서 입법계품은 가장 오래된 경전 성립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략)
이 화엄경 입법계품이 바로 선재의 구도이기도 하다. 그는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행을 구족하기 위하여 남인도 여행에 나서서 53인의 스승을 찾아다닌다. 그리하여 처음의 문수 보살과 마지막 보현 보살의 가르침으로 대단원을 이루어 그가 찾는 바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의 스승은 어느때는 불법과는 상관없는 바라문, 노예, 장사꾼, 뱃사공, 소녀와 창녀, 신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진리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는 드넓은 확신이 여기에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입법계품-- 뿐만 아니라 화엄경 --의 세계는 인도 전체와 서역 일대 그리고 중국까지 아우르고 있다(이 문장은 요약된것임). 말하자면 이런 커다란 세계를 현실적인 무대로 해서 어린 선재의 순례를 그렇게 큰 무대의 제공으로 달성시킨 것이다.
진리는 무한하다는 암시와 함께 화엄경 입법계품의 세계는 실로 우렁찬 바 있다.
대교향악! 바로 그것이다.


고은의 소설 [화엄경]은 바로 이 선재 동자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어디까지가 원전에 근거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고은의 창작에 의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좀 더 나은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건 비유컨대 이 소설 읽기에 순례지의 지도가 꼭 필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선재의 여정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여행의 경로를 알려주는 지도가 일면 유용하달 수 있겠지만 그러나 소설을 읽는 데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건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도리어 우리의 (상상) 여행을 방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예컨대 강 위나 숲속이나 산정, 혹은 꿈속이나 하늘 나라를 여행하는데 그런 지도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필요하고도 중요한 건 소설 [화엄경]이 원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공간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footnote]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화엄경 입법계품의 원전을 대강 뒤적거려봤다.[/footnote], 오히려 소설 [화엄경]이 소설로서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 [footnote]이에 대해서는 단조로운 구성과 읽기의 지루함을 들어 내 생각의 일단을 이미 밝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행여 저런 사설로 말미암아 이 소설의 성공 여부에 대한 나의 평가가 자칫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평가는 오히려 매우 긍정적이다.[/footnote]

소설 [화엄경]은 성공적인 소설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내가 꼽는 가장 두드러진 요인은 단연 작가의 화려 무쌍한 문장력이다. 가히 천의무봉이랄수 있는 문체와 그 대단한 울림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 읽기는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어서다.

하나의 문장 안에서도 전혀 자유로운 주술 관계나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한 제멋대로의 시제 표현들이 그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다른 소설에서라면 금방 눈에 띄고 당장 글의 흐름을 방해하게 될 그런 불일치의 문장이 여기에서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의 격식을 갖춘 문장보다도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거침없이 전개되는 작가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의 울림으로 글 읽는 즐거움을 실컷 맛보게 하고 있다.

여기서는 격식을 갖춘 문장을 되려 답답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그런 류의 문장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그런 활달함과 장쾌함이 있다.[footnote]아쉬운 점이라면 이같은 활달하고 장쾌한 맛이 뒤로 갈수록 엷어지게 된다는 것이다.[/footnote]  문체상의 아름다움을 떠나서도 이 소설은 읽을 만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밑줄 그어가며 읽어야 할 아름다운 이야기가 정말 많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끝없는 진리행의 길을 나선 어린 나그네 선재의 까마득한 역정을 그리고 있다. 잠시 그 여정을 따라가보기로 하자.
 


고은의 소설 화엄경

고은의 소설 화엄경



소아강의 새벽에 문수 보살을 만나 시작되는 어린 나그네 선재의 길은 강나루를 지나고 산을 넘어 바다와 호수와 안개와 저자거리와 승원으로 이어진다. 광야와 사막을 건너고 골짜기와 들녘을 지난다. 그리하여 다시 강으로 산으로 하늘로 이어져간다
 
진리는 아무데도 없어. 그러나 진리를 찾아다니는 일이야말로 진리와 함께 있어. 진리는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찾아다니는 흐르는 물이나 그대와 같은 길손의 마음에 들어 있어.


이 길에는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이 마치 부서지는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움으로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이문열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됨의 아름다움에다 거룩함의 아름다움 추구와 탐색의 아름다움 말의 아름다움 사유의 아름다움 비어있음의 아름다움 잃어버림의 아름다움 낯섬의 아름다움 틀림의 아름다움 관능 세계의 아름다움, 심지어는 집요함과 치우침의 아름다움까지가 이 길에는 있다
 

어린 선재는 길에서 살고 길만이 그의 참다운 집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행복에도 머무르지 않고 진리를 찾아서 끝없이 걸어가는 자의 길에만 익숙하고 있었다.

지나가거라 나그네여, 나그네여. 지나가거라, 나그네여.
모든 길은 지나가기 위하여 이루어졌구나.
모든 길은 지나가며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벋어 있구나.


이 길에는 삶과 죽음이 있고 사랑과 우정이 있고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눈물이 있다.
꿈과 현실이 윤회와 환생이 허무와 희망이 슬픔과 행복이 또한 외로움이 그리움이 괴로움이 고독이 고통이 법열이 있다. 황홀함과 무상함이 있고 장엄함과 고요함과 안락함이 있다. 한 알의 모래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있고 나그네의 여수가 있다
 

멀기 때문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먼 곳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깨워서 모든 사람의 고독과 고민으로부터 건져지게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 먼 곳이 없다면 얼마나 암담할 것인가. 저 먼 곳에 해탈한 존자가 있다. 어린 나그네는 먼 곳을 위해서 한 군데의 사랑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다.

아까웁도다. 도련님이여
그 사랑을 등지고
머나먼 남쪽으로
구름 밑을 걸어가는도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는 것만이 진리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아무런 자아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 있던 선재 자신은 이제 없는 것이다. 그는 세계를 세계 자체로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한 곳에서 선재는 멀어져서 마침내 한 점이 된다. 그리고 그 점이 없어진다.

이 세계에서 만나는 일은
아무리 이름없는 일일지라도
어느 날 헤어지는 일 없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아무리 이름없는 헤어짐일지라도
어느 날 어느 달밤 만났으므로 헤어지나니
바야흐로 헤어진 이들은 만났으며
아아, 바람과 때는 흐르나니
어느 만남이나 다시 헤어지나니 ....


이 길에는 아리따운 소녀와 지혜로운 소년과 행상 나그네와 늙은 사냥꾼과 동굴 속 은자와 강나루의 사공과 고기잡이 어부와 산속의 농부와 재물이 많은 부자와 자애로운 의사와 술 취한 방랑자와 승원의 수행자와 악한 성주와 춤추는 무희와 미친 노인과 몸을 파는 창녀와 눈썹이 빠진 문둥이와 사랑스러운 부인이 있다.
이 길에는 또한 첫사랑 소녀와의 안타까운 이별이 있고 늙은 장님의 슬픈 노래와 그녀가 본 마지막 만월이 있다.
 

빈 하늘 빈 길을 누가 비었다고 하랴.
빈 것은 비지 않고 가득하므로
가득한 소마주 술잔에 넘치는 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가득하므로
저문 날 먼 곳의 숲도 하늘도 빈 어둠으로 가득하여라.


이 길에는 안개가 있고 흐르는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새벽강의 모래톱이 하릴없는 나룻배가 시끄러운 저자 거리가 그리고 떠가는 흰 구름이 있다.
불모의 광야와 열사의 사막과 하얀 눈의 고원과 바람부는 산정과 불의 골짜기와 지하의 호수와 푸른 초원과 저문 들녘과 천상의 하늘이 있다.
 

오랜 남녘땅 나그네 길이 이제
북녘땅을 향하는구나
배고플 때 바라보던 남십자성
환한 별빛을 등지고
억만겁 무량겁 과거를 등지고
가노니 보살의 길
억만겁 무량겁의 내일에 이어졌구나
문수의 지혜 만난 이래
온갖 스승 찾아 떠돌았건만
아직도 찾을 스승의 얼굴이여
풀 끝의 이슬이여
풀 끝의 이슬이여
흐린 날 구름 사이의 조각조각
푸른 하늘이여

버리기 어려운 것 버린 일 없이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찾을 수 없음이여, 법이여
빈 물에 뜬 물결이여
집을 짓는 자 물결에 지어라
나라 세우는 자 물결에 세워라
그때 비로소 8만 4천의 괴로움 사라지리라


허두에서 적었듯이 이 소설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다.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은데도 그 뭔가의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데서 오는 부담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릴없는 이야기만을 더하게 하고 있다. 내 중언부언의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안타까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60개의 각기 다른 에피소드가 다루는 내용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쉰세 분의 스승의 행복이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장을 찾아다닌 행복이여
이제 그 행복 다하여
나 스스로 가야 할 길의 행복이여


저 도저한 구도의 길에 온전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일 수 있겠지만 보다는 저 많은 이야기들을, 거기에 담겨 있는 그 치열한 아름다움과 행복한 깨달음을 하나하나 풀어서 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더 근본적인 이유일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 소설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독자에게 직접 읽어보랄 수 밖에는 없는 일일 터다.

모쪼록 이 글이 누군가에게 한 가닥의 그리움으로 남아 언젠가 이 소설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믿음과 서원으로 다아가 책읽기의 지겨움을 견뎌갈 수 있게 하기를 기대해본다.
 

그리움 없이
어찌 이 세계에
한 송이 꽃을 피겠는가
그리움 없이
어찌 이 세계에
한 송이 꽃 피고 지겠는가

그리움 없이
그리움 없이
어찌 나에게
찾아갈 곳 있겠는가


만약 그대 깊은 서원과 믿음이 없었던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 그 멀고 먼 역정의 시련을 감당하여 여러 남쪽나라 스승을
찾아다닐 수 있었겠는가. 자못 고달픔에 겨워 어디선가 홱
돌아서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도다.
아니 몇 번 찾아 다닌 것으로 작은 열매를 딴 것으로 만족하여
더 큰 열매들이 있는 산을 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도다.


위쪽에 있는 시는 선재 동자가 보현 보살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고 아래쪽 글은 문수 보살이 어렵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선재 동자에게 보내고 있는 찬가의 일부다.
소설 [화엄경]을 읽는 일은 어쩌면 선재 동자의 여행에 못지 않게 힘겨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선재 동자의 그리움과 서원과 믿음이 있다면 그 일은 틀림없이 기꺼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때로는 이야기의 단조로움이, 또 때로는 이야기의 진부함이 독자를 한없는 지루함과 무감각에로 이끌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감정들은 작가의 쾌한 문장과 깊이있는 성찰들이 이내 씻어줄 것이고 그리하여 아린 사랑의 이야기와 진리를 찾는 즐거움으로 독자를 안내해갈 것이다. 그러므로

선재 동자의 그리움과 믿음과 서원을 가슴에 안고서, 이제 가라 소설 [화엄경]에의 길을. 진리에의 길을.
 

가라. 한 나뭇가지가 길을 가리키지 않느냐.
나무는 지난 날을 알고 바람에 흔들리며
또한 한 사람이 갈 길을 알고 가지를 뻗는구나.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단호한 이별이어야 한다'.
광야를 알고 세계를 알고 싶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 가야 한다.
'끝없는 길에 끝이 나타날 때까지'.
그러니 가라. 선재 동자의 길을 좇아서. 그 길을 넘어서. 삼매의 노래를 들으며.
 

내 삶이 길 위에 있을진대
내가 어느 스승을 찾으랴
길이 내 어버이, 길이 내 스승이매
이 길 위에서 나고 죽어서
길이여 길이여 내 길이여




  
2009/01/18 18:47 2009/01/18 18:47
나이 30에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백수 논객 -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까싶은데요 바로 우리들의 친구 미네르바 박 얘기입니다

오늘도 인터넷에서는 미네르바 박의 얘기가 한창입니다 미네르바 박의 구속에 대한 찬반 논쟁은 아직도 뜨겁고 경제예측의 신빙성 여부에 대한 논란도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무엇보다 미네르바 박의 진위 논쟁도 가라앉을 줄을 모릅니다 오히려 더 커져만 가는 양상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신문 방송에서도 미네르바 박에 대한 특집 기사와 방송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서점에는 "인터넷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가 추천한 화제의 책" 코너까지 마련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나는 지금도 이 모든 일이 기괴하기만 합니다 미네르바의 명성을 뒤늦게 들은 탓이 크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사태가 이만큼이나 센세이션을 일으켜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미네르바에 관한 몇 개의 글을 다소 도발적으로 포스팅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얼마 전 미네르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적이 있습니다
 

미네르바

열공 미네르바



여기 할 일 없는 서른 살의 백수 하나가 있습니다 학창시절이나 직장생활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거나 한 일이 없는 친구입니다 그러다 적성에 딱 맞는 일을 찾았습니다 경제입니다 출구를 찾지 못해 잠을 자던 재능이 빛을 발합니다 열공 - 무섭게 집중하고 어느 순간 해당 분야에서 상당한 일가를 이룹니다 그리고 자신이 익힌 것들로 썰을 풀기 시작합니다 책임에서 자유로우므로 하지 못할 말이 없습니다 (게다가 논객의 제일요건인 글빨을 갖췄습니다 경제위기로 헤매는 삽질 정부와 'MB 까자'면 자다가도 인나서 키보드 두드려주는 키워들까지 좌우로 거느렸습니다 이에) 시쳇말로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립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미네르바입니다


어느 분의 댓글에 단 답글이었는데요 미네르바에 대해 나는 지금도 저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합니다 전문대 출신의 서른 살 백수에게 저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묻는다 해도 나는 똑같은 답하겠습니다 저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또다른 댓글에서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선 30살이면 사람의 지적 능력이 가장 왕성할 때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고전에 속하는 저작들들은 거의 30세를 전후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늘 느끼는 거고 또 자주 불만스레 토로하는 거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 서른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같습니다 17-8세만 되어도 고도의 사고를 요하는 작업에 필요한 인식틀은 충분히 갖추게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또 하나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미네르바는 백수입니다 공부에 적합한 조건을 두루 갖춘 셈입니다 이른바 사상가로 불리는 거의 모든 이들은 바로 저 조건에서 나왔습니다 고대의 소크라테스니 공자니서부터 시작하여 우리네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수였기에 걸작들을 쏟아낼 수 있었습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쓴 것도 그 어름이었습니다 그들이 오늘날처럼 직장에 내몰렸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정리하자면, 기본적인 역량을 가진 30세 백수는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백수가 가장 왕성한 지적 활동을 벌인 결과가 미네르바 현상이며 이것이 결코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특히 미네르바처럼 그 분야에 대한 자발적인 재미와 사회적 요청이 어우러질 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상당한 노력은 필수이겠습니다


작은 댓글 창에서 적은 글이어서 거칠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내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을 전하는 데 큰 무리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댓글이 덧붙여집니다


이른바 경제예측을 하는 글들이란 모두 기본적인 틀을 갖고 있습니다 특정 포맷이 있고 거기에 상황에 따른 변화 즉 정치사회적 이슈나 경제동향 그리고 경제지표 등을 넣고 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날씨예보 하는 것이나 그 형식면에서 크게 바를 바가 없습니다 맘 먹고 달려들면 누구라도 엇비슷한 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내용인 거니까요 포맷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거기에 시의적절한 데이터가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아주 약간만 노력을 더한다면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자료는 이미 차고도 넘칠 정도로 널려 있으니까요 정보의 보고인 인터넷을 이용한다면 구하지 못할 자료는 없습니다
 

미네르바 박이 경제대통령이 되기 위한 일종의 조건 혹은 환경에 대한 얘기입니다 미네르바 박은 이같은 조건에서 등장했다는 의미지요 물론 달리 분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거의 넘쳐난다고 할 정도입니다 시대의 산물이라느니 민주주의의 아이콘이라느니 인터넷 영웅이라느니 서민의 대변자라느니 하는 분석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떼다붙일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갖다 붙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는 미네르바 박은 저들이 말하는 미네르바 박과는 다릅니다 내가 보는 미네르바 박은 그냥 저 위에서 옮기고 있는 미네르바 박일 뿐입니다 여기서는 학벌이고 뭐고를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꽃피울 계기만 제대로 만난다면 누구라도 미네르바 박과 같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footnote]이상의 정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비판적 의견을 전한 laputian 님의 블로그에서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습니다 고맙습니다[/footnote]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이 서른에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백수 논객은 축복입니다





<덧붙이는글> 썼다가 지웠습니다 다음에 쓸 기회가 되면 내용을 복원하겠습니다

<덧2> 참 이상하다 그냥 글은 글로 섞으면 된다 같은 생각이면 같은 생각대로 다른 생각이면 다른 생각대로 그리고 할 얘기 있으면 걍 공개적으로 하면 된다 음습한 곳에서 쑥덕질하는 것보다 그게 백배 천배 건강한 일이다 이래저래 글과 인격을 구분하지 못하고 헤매는 웃기잡는 청춘들 참 많다 공과 사를 섞고 주장에 대한 찬반과 사람에 대한 호오를 마구잡이로 섞어 놓고 주제 파악도 안 되는 주제에 아예 사람을 가르치려든다 보면 정말 같잖지도 않은 이들이 모여 꼭 저런 주접질이다 뭐나 되는 듯이 한심한 나 니들 모른다 관심도 없고 쯧~  
2009/01/17 02:20 2009/01/17 02:20
하민혁은 얼굴이 두껍다 웬만한 말 들어서는 끄떡도 않는다 무슨 피학적 성향이 있다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다 막말이 난무하는 인터넷에 하도 오랜 시간 노출되어 지내다보니 엔간한 막말이나 욕설에는 거의 동화 내지는 면역이 된 탓이다

진중권

"내 머릿속에 쐬꼬챙이 하나 있다!"

같은 과에 속하는 이로는 진중권 같은 이가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이 친구의 경우 인터넷에 등장할 때부터 그랬다는 것이다 보다는 그 이전에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책에서부터 그랬다

이 밖에도 비슷하게 얼굴 두꺼운 친구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진중권만큼 얼굴이 팔린 이들은 아니니 굳이 이름까지 적시할 필요는 없는 일이겠다

그러므로 진중권이 티비 토론 등에서 뭘 그깟 욕설 좀 들었다고 난리냐 대한민국서 젤로 많은 욕을 먹고 있는 게 나 진중권이다 그래도 나는 모욕감 안 느낀다 는 식의 말을 하는 건 지나친 일반화다 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제 백분토론에 나온 어느 경제학자 같은 경우는 그런 말 들으면 아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공중파 방송에 대고 자기 입으로 '또라이' 운운하는 소리까지를 했겠는가[footnote]이때 나온 손석희의 멘트 진짜 죽여줬다 미네가 내 글에 대고 '또라이'라고 했는데..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하는 지점에서 손석희 왈,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ㅎㅎ[/footnote] 

무튼 나는 상대가 뭐라 하건 거기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살짝 웃음이 나올 때가 더 많다 이를테면 내 블로그에서도 나는 자주 개쉐이 소쉐이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이거 들으면 화가 나기는 커녕 입가에 잔주름부터 진다 어~ 저 넘 참 이상한 넘일세.. 하면서

이것도 내가 무슨 별종이거가 해서는 아니고 사실이 그래서다 하민혁은 사람인데 거기다 대고 개쉬이 소쉐이라고 하니 그런 말 하는 이가 살짝 정신이 나갔거나 오감 기관에 이상이 있는 걸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쉐이 소쉐이 한다고 해서 내가 개쉐이 소쉐이 되는 것도 아니니 그런 말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살짝 웃음이 날 밖에는

사설이 길었다
이렇게 웬만한 펀치에는 끄떡 않는다고 자부해온 내가 오늘 어떤 이에게 된통 한방 얻어 맞았다

블로그에 들와보신 분은 알겠지만 처음에 말을 건넬 때 나는 약간 삐딱하게 건네는 편이다 대개는 첫 마디를 아주 까칠하게 건넨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런 다음 나타나는 상대의 반응을 보는 일이 사뭇 재밌어서다 퍽~! ★⊙

일반적으로 상대가 까칠하게 나오면 그 상대 또한 까칠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대응 방식이다 까칠하게 한마디 던졌다가 이런 반응 나오면 그냥 패스하고 언능 일반적인 응대 모드로 전환해버린다 더 해봤자 재미가 없어서다 재밌는 건 이같은 말 걸기를 아주 못 견뎌 하는 경우다 바르르~ 떨면서 살짝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 들 중에도 미세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기분 나빠 하면서 불쾌함을 토로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불쾌하다는 반응을 넘어 그것을 결코 못 견뎌 하는 그래서 거의 발광의 수준까지 보여주는 이가 있다

흔히 온실 가정이라 부르는 아름다운(?)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대개 전자의 경우에 속한다 후자의 경우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처럼 공격적이 되는 건지 암튼 약간의 충격만 가해져도 엄청난 공격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큰 차이이긴 하지만 이 차이가 워낙 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터라 바로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는 놀이가 성질 부추기기다 본격적인 놀이도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방법은 간단하다 광분해 있는 이에게 다가가서 잠재되어 있음직한 그의 공격 성향을 살살 건들어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아주 못돼먹은 짓이다 (자주 반성은 하지만 아직도 못 고치고 있는 게 이 짓이다 어떤 이 말로는 내가 일종의 애정결핍 증세가 있어서라는데 직접 확인을 해보지는 않았다 진짜 그렇다고 나오면 좀 허탈해질 것같아서다 이런 재미를 놔두고 산다면 건 너무 삭막할 것같더라는 얘기다)

에니웨이, 이같은 성질 건드리기를 해보면 그 사람 성향이 대충 드러난다 온실서 자란 과인지 아니면 온실서 자란 척 하는 과인지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먼저 온실서 자란 과인 경우는 자기 분을 못 이겨 하긴 해도 일정 정도 선을 넘지는 못 한다 그냥 제풀에 지쳐서 나가 떨어진다 안 보면 되지 하고 발길을 끊어버린다 반면에 이와는 달리 반응하는 과가 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이들이다 이들은 하다하다 안 되면 37대조 할아버지까지 겨올라가서라도 기어이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끝장을 봐야 성이 풀려 한다

성공신화 어쩌고 하는 데 나오는 친구들이 거의 이 과에 속한다 한마디로 대단한 과다 하지만 다른 한편 살짝 거시기한 구석이 없지 않은 게 또 이 과다 이과에는 병맛이라는 특성이 있다 성공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들은 스스로의 한계라고나 할까 자주 병맛인 행동을 보인다 한번 물면 죽을 때까지 안 놓는 도사견의 행동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와 함께 한다는 건 상당한 고역이다 상대를 화나게 하는 건 확실히 재밌는 일이지만 상대의 한계까지를 보는 일은 여간 씁쓸한 게 아니어서다 게다가 어쩌다 글이라도 엮이게 되는 경우는 씁쓸함을 넘어 곤혹을 치르기 십상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아예 진흙탕에서 나뒹군다 대책이 무대책이다  

낯짝 두꺼운 내가 오늘 한방 얻어맞았다는 얘기가 어째 삼천포로 빠졌다 늘 그렇듯이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다보면 이게 지금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 모를 때가 더러 있다 지금이 딱 그렇다 정리하자

오늘 어느 블로그에 들렀다가(쪽 팔리서 링크 안 건다) 댓글 하나를 남겼다 배배 꽈서 말을 건넸으리라는 건 뭐 굳이 안 봐도 비디오겠다 근데 이 친구 답이 장난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갖고 놀고 있다 능글능글한 웃음(보이진 않지만 그렇게 보인다)까지 지어보이면서다 그리고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툭 던진다 아주 점잖게 하민혁이 니는

"비판보다는 '비판자' 비판에 더 열심이신 넘!"

이라고
할말이 없다 이런 거 한방 맞고 나면 솔직히 한동안 벙~ 찐다 이건 아닌데 말이다 생각 좀 해봐야겠다




 
<덧붙이는글> 사실 이거 새해 들어 벌써 두번째 당하는(?) 일이다 며칠 전에도 뭐라뭐라 날뛰다가 한방 맞았다 쎄게 맞은 건 아니지만 그 데미지가 이번 거에 더해진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이래 가지고 약속한 1년 글쓰기를 채울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통신보안>

2009/01/16 21:36 2009/01/16 21:36
어제 MBC에서 미네르바 건으로 백분토론을 했습니다 일을 못 끝내서 TV 앞에는 못 가고 모니터 옆에서 휴대폰 DMB를 켜두고 봤는데요 늘 그렇듯이 토론의 전반적인 양상은 귀는 닫히고 입만 열려 있는 이들의 말하기 경연장 모습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내용 면에서도 수많은 블로거가 이미 말한 것이고 이 블로그에서만도 지겹게 계속되고 있는 얘기의 재탕 수준에 그쳤습니다 굳이 포스팅을 할만한 꺼리도 없는 평이한 토론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들으면서 재밌다고 여긴 부분이 있어 소개합니다


미네르바 구속파운

미네르바 구속파문 - 암튼 언론은 '파문' 엄청 좋아합니다 ^^



전원책 : 미네르바의 행위는 공익을 해할 목적에서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이다
진중권 : 공익을 해할 목적과 공익을 위한 목적은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 입증이 안 된다

전원책 : 공익적 목적이 있다고 해서 허위 사실을 유포해도 되는가
진중권 : 공익적 목적으로 거짓말 하면 윤리적으로는 비난할 수 있지만 법적 처벌을 할 수는 없다

시민논객 : 미네르바 2기에서 미네르바는 경제 대통령이었다 영향력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같은 상황에서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문을 허위로 만들어 공공연히 인터넷에 게재했다면 공익을 해한 걸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진중권 : 아니, 인터넷에서 욕 좀 한 걸 가지고 공익을 해한 것이라 할 수 있나? 여러분도 인터넷에서 욕 많이 하잖아요?


<덧붙이는글> 아래 댓글로 아무개님이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앞부분의 공문을 허위로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공익을 해하는것이 아니냐는 말에 대해서는 질문 전에 프로그램 내에서 충분히 토론 되었던 사안으로, 시민논객의 질문은 이 부분보다는 오히려 '미네가 원색적인 비난과 정부에 대한 부정을 했는데 이게 공익의 훼손이 아니냐' 는 뉘앙스였다"게 이의의 대강입니다.

하지만 제가 본 바는 다릅니다 다시 봐도 지금 아무개씨가 말하는 부분이야말로 곁가지였고(미네는 정부 비판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허위 공문 조작도 그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미네가 허위공문을 사실인 것처럼 인터넷에 게재한 건 공익을 해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질문의 요지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진중권은 곁가지에 대한 얘기로 답변을 했구요

그때 진중권이 지쳐 있어서 답변을 제대로 못 했을 수는 있습니다 시민논객의 질문도 그리 깔끔한 건 아니었구요(살짝 버벅댔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핵심을 놓친 채 곁가지에 대고 엉뚱한 답변을 한 사실 자체가 커버되는 건 아닙니다 진중권은 저 부분에서 삽질 한 게 맞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들으면서 재밌다고 생각한 부분입니다 들으면서 진중권이 삽질을 다 하는구나 싶었거든요 실은 재밌는 곳이 몇 군데 더 있기는 한데 정리를 하다가 그냥 다 지워버리고 위의 내용만 남깁니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이지요 ^^


진중권

힘내라 진중권 ^^

무튼 진중권이 어제 좀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아마도 똑같은 얘기를 벌써 몇 번째 앵무새처럼 읊어대야 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무력감이었을 겁니다 똑같은 얘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거 사실 그만큼 진 빠지는 일도 없는 거거든요

이 블로그에서도 그런 일 흔합니다 금세 답변을 했는데도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또 묻거나 시비를 겁니다 한두번이라면 모르지만 이게 몇 차례 반복되면 나중에는 진이 빠져 버립니다 대답할 기력이 남아나질 않지요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답은 해줘야 합니다 진이 빠졌다고 아무렇게나 답을 남기다 보면 그런 댓글이 꼭 나중에 또 문제가 되곤 하니요

진중권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저 친구 어제 방송에서 한 얘기들 그 전에도 이미 질리도록 한 얘기들입니다 여기저기 인터뷰나 기고한 글 보면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지요 진이 빠지고도 남을 일입니다(오늘 오후에도 또 같은 주제로 토론을 한다지요? 헐~)

얘기가 살짝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다시 원위치 합니다

위에서 옮긴 대화록은 집중해서 모니터링한 결과가 아니고 다른 일을 하면서 들은 걸 복기한 터라 정확히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정확하지 않을 개연성이 더 클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나치다 혹 이 글 보시는 분들 가운데 어제 토론 보신 분 있다면 저 대화록을 함 살펴봐주었으면 합니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주신 분께는 필히 후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09/01/16 12:58 2009/01/16 12:58
개인적인 일로 며칠 지방에 다녀온 사이, 언론사의 RSS FEED 이용 문제를 두고 블로고스피어에서 한차례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최초의 관련 포스팅 "RSS에 사용료를 요구하는 인터넷한겨레")  

몇 시간에 걸쳐 열심히 링크를 좇다보니, 많은 블로거가 정말 칼같은 의견들을 개진하고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해결방안 또한 자연스럽게 도출되면서 이제는 모종의 접점을 찾아가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런 게 블로고스피어의 힘이고 집단지성으로 대표되는 웹2.0 정신의 발현이 아닌가싶다. 대한민국 블로거 화이팅~이다! : )

암튼, 플랫폼의 일부를 언론사의 RSS FEED에 기반하고 있는 서비스의 운영 당사자로서 그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실로 유감이다. 너무 늦은 뒷북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을 더해본다.

뉴스로그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지난 해 8월, '뉴스로그-시즌2'를 선보일 당시 언론사의 RSS FEED 이용과 관련하여 모 언론유관단체와 공문을 주고받는 등의 입씨름을 한 적이 있다. 공문에서 우리가 내세운 논리는 간단했다. 이곳 뉴스로그 블로그에서 몇 번이나 피력한 바 있는 것으로,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보자"는 것이었다.

웹2.0 시대의 가장 큰 특성 가운데 하나는 정보가 생산, 유통되는 양상이 이전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는 데 있다. 개방과 공유, 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웹2.0 환경은 생산자와 소비자간 구분을 점점 더 모호하게 하고 있다. 생산과 유통, 소비의 주체와 방식이 모두 다종 다양 다기해졌고 다변화 다각화되었으며, 여기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전달자의 영역과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각자가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이자 전달자이기도 한 이른바 프로슈머의 시대인 셈이다.

이번에 논란이 된 RSS FEED 문제의 본질적인 성격도 여기에 있다. 인터넷 환경이 복잡 다기해지는 과정에서 기존의 방식으로 규정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 필연적으로 노정될 수밖에 없는데, 이 논란도 결국은 이같은 상황에서 새롭게 드러난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기자와 블로거의 경계인으로 오랜동안 이 문제에 천착해온 명승은님이 '누구를 위한 RSS 뉴스 전송권인가'라는 칼럼 허두에서 이 문제를 "오랫동안 잠복해 있던 문제"였음을 지적하는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 아닌가싶다. 그렇다면 이제 논의는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해소해갈 것인가 하는 데로 모아져야 한다.

사실 이미 많은 분들이 나름의 접근 방식과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경우에도, 새로운 규정이 필요하다는 데는 거의 대부분이 공감 내지는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사나 플랫폼 서비스 제공자 모두가 흔쾌히 의견의 일치를 보일 수 있는 지점이 아직은 명확해보이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적 측면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원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의 정신에 대한 이해와 그 차용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원소스 멀티유스는 '하나의 소재를 서로 다른 장르에 적용하여 파급효과를 노리는 마케팅 전략'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원소스 멀티유스의 전략이 아니라 그 전략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정신에 있다.

원소스 멀티유스가 바탕을 두고 있는 기본적인 정신은 집단지성과 닮아 있고, 롱테일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나 그 이상의 다수의 참여가 더 낳은 결과물을 낳는다는 정신이다. 이 정신은 완결된 진리 혹은 진실이란 없으며, 진리 혹은 진실은 일방적이거나 일면적으로 조망될 수 없다는 열린 자세를 견지한다.

여기서 '소스'는 말 그대로 '소스'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유스'의 방향을 강제하거나 그 변주에 뛰어들어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 소스 자체로도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소스의 다양한 변화와 발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건은 있다. 소스가 어떤 방식으로 변화 발전해가든, 모든 피드백은 반드시 원천 소스로 수렴, 조회, 비교, 분석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한 적절한 장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이차적 생산물에 대한 원천 소스의 가치를 인정하는 조치인 한편으로 원천소스가 반드시 원 저작자의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원소스 멀티유스의 정신에 입각한 대표적인 사례가 오픈 소스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리눅스'의 경우다. 리눅스 창시자인 리누스 토발즈는 원천 소스를 공개하고 수정 변경 후 재배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오늘날의 리눅스라는 브랜드를 낳게 했다. 현재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API 공개와 이를 통한 다양한 매시업 서비스 런칭 사례도 넓게는 같은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얘기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 문제가 된 언론사 RSS FEED 이용의 경우를 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언론사가 RSS FEED 이용을 문제 삼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는 일전에도 밝힌 적이 있듯이 시대에 역행하는 조치일 뿐더러, RSS FEED 기능이 갖는 본래적 의미까지도 저버리는 행위다. 무엇보다도 한겨레신문이 문제로 삼은 위자드 닷컴의 경우 해당 서비스가 한겨레신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답은 더 분명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겨레신문이 이 서비스로 인해 받은 피해를 가늠해보기가 쉽지 않은 때문이다. 막말로 위자드닷컴이 포털처럼 기사를 통째로 가져다 서비스하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는가?

모든 영화에는 예고편이 있다. 예고편의 목적은 하나다. 이런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서 관객을 더 많이 그 영화가 상영되는 영화관 앞으로 오게 하는 것이다. 현재 위자드닷컴이 언론사의 RSS FEED 를 이용하여 제공하는 위젯 서비스는 영화로 따지자면 일종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기사를 보기 위해 한겨레신문 홈페이지로 가거나 길거리에서 한겨레신문을 사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약간만 바꾸어도 언론사에서 오히려 감사해야 할 서비스가 위자드닷컴의 위젯 서비스라는 얘기다.

언론이 RSS FEED 기반의 플랫폼 서비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면, 정작 그 부분은 따로 있다. 작동 알고리즘에 대한 문제 제기다. 해당 서비스의 알고리즘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정확한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관리되고 있는가 등을 따지고 든다면 그것은 서비스의 질적 제고라는 측면에서 얼마든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공개된 RSS FEED 값을 읽어 기사의 타이틀을 제공한다고 거기에 비용을 물리겠다는 발상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블로거 가운데 어떤 이는 온신협에서 마련한 RSS FEED 이용규칙을 들어, 위자드닷컴 류의 서비스는 RSS FEED 이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논리적으로는 그 주장이 맞다. 그러나 이 논란의 핵심은 그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 자체, 즉 저 RSS FEED 이용규칙을 만든 인식틀에 문제가 있다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RSS FEED의 일차적인 의의는, 특히 부분 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언론사 RSS FEED 의 가장 큰 의의는 원천 소스의 존재를 알려서 더 많은 이용자들이 원천 소스에 접근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저 이용규칙은 RSS FEED 를 제공하면서도 스스로가 그 의의에 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용규칙이 RSS FEED의 존재 이유를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칼럼에서 명승은님은 언론사와 플랫폼 사업자가 새로운 접근을 통한 상생의 길을 모색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동의한다. 다만, 나로서는 이 문제가 뭔가를 주고받는 힘겨루기 차원의 소모적인 논쟁에 머물기보다는 '원소스 멀티유스'의 관점에서 어떤 길이 컨텐츠를 더 풍부하고 발전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길인지를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2008/01/1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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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글> 위에 옮긴 글은 기자평판시스템이라는 타이틀로 서비스를 시작한 <뉴스로그> 서비스의 팀블로그에 쓴 글(2008/01/18 17:23)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두번째인데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그곳에 개인적으로 남긴 글을 운영진의 양해를 얻어 이곳에 전재할 예정입니다. 전재를 허락해준 <뉴스로그> 관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2009/01/16 02:52 2009/01/16 02:52

미네르바의 구속적부심이 기각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법원은 우선 "박씨의 글 내용을 볼 때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허위 글을 올린 사실이 인정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같은 바탕 위에서 "사안의 중대성과 박씨가 객관적인 통신사실 외에 다른 범죄구성요건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증거인멸 및 도망의 염려가 있다"고 판단을 한 거구요

이같은 판단을 한 데는 변호인단의 헛발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합니다

법원은 "변호인단이 사정변경으로 주장하는 내용들은 구속영장 발부 당시 이미 밝혀진 내용이거나 구속의 적정성 여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박씨에 대한 심문 결과와 수사 관계 서류에 나타난 제반사정에 비춰볼 때 구속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변호인단이 '영양가 하나 없는 어거지로 구속적부심을 신청했다'는 얘기입니다


미네르바 박

미네르바 박 구속적부심 기각, 다시 유치장으로


창피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구속적부심 변론요지를 보면 이건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번에 변호인단의 구속적부심이 받아들여졌다면 그거야말로 더 이상한 노릇이었을 겁니다 변호인단의 논리가 그만큼 허접했습니다

변호인단은 "지난해 기획재정부가 9개 금융기관 외환 책임자를 불러 사재기하지 말라고 요청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등 구속영장 기재 사유에 변경을 가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왔다"며 이외수나 이석현 등의 삼류 잡배들이 하는 얼척없는 어거지를 그대로 원용하고 있습니다 소가 웃을 일입니다

그런 건 이외수가 언중유쾌하다며 제멋대로 내뱉는 헷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걸 증거라면서 제출하고 있다니 어거지도 이런 어거지가 없지요 개인적으로 박찬종을 좋아하는 편인데 왜 이런 패착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중의 여론 재판에 너무 기댄 결과가 아닌가싶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이번에 법원이 저런 허접한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그건 법원마저 대중 여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의미거나 이 정부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법이 여론에 이끌려다니는 순간 그 사회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봐야 하니까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미네르바 구속적부심 기각은 천만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변호인단은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는 부디 몇몇 허접한 아해들에게 끌려다니는 일이 없기를 기대해봅니다 논리로 풀어야 할 일에 집단 발광으로 맞서는 건 혹세무민을 업으로 하는 일부 기생층들로 충분합니다 변호인단이 할 일은 아닙니다
 

다음은 박찬종 변호사의 미네르바(박대성) 구속적부심 변론요지입니다
다시 읽어봐도 한심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구속적부심 변론요지 열기..



 

2009/01/15 19:31 2009/01/15 19:31
미네르바 사태에 대해 소설가 이외수가 독설을 날렸다고 합니다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칼럼을 통해 "미네르바의 죄목은 허위 사실 유포죄가 아니라 진실 유포죄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니냐"고 했다는 건데요 이를 두고 일부 기자와 네티즌이 '촌철살인'이라며 아주 환호해마지 않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해괴한 일입니다
 

 "허위 사실 유포 자체가 죄라면 인터넷에 글 쓰는 사람 가운데 잡혀갈 사람 수두룩하다. 63빌딩에서 마징가제트가 나오고 국회 의사당 지붕에서 로보트 태권브이가 출동한다는 글 쓴 사람 잡아 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과 정보들이 처벌받지 않는 건 맞지 않는 얘기라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네르바는 그 반대다. 말이 되는 주장을 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그 덕분에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결국 미네르바의 죄목은 허위 사실 유포죄가 아니라, 진실 유포죄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니냐"


이것이 기사가 전하는 이 친구의 얘기인데요

내가 해괴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로 보여서입니다 이 친구의 주장이 말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미네르바 박이 조사를 받는 이유가 "63빌딩에서 마징가제트가 나오고 국회 의사당 지붕에서 로보트 태권브이가 출동한다"는 글을 썼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이 그러한가요 전혀 아닙니다

검찰이 미네르바 박을 체포한 이유는 <대정부 긴급공문발송-1보>라는 제목으로 "정부가 주요 7대 금융기관과 수출입 관련 주요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할 것을 긴급 공문 전송했다"는 내용의 글을 게재한 때문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공문을 발송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것이 정부 신인도와 금융시장에 영향을 줬다고 보는 거지요

이외수가 풀고 있는 썰과는 어떤 유비관계에도 있지 않은 전혀 다른 맥락의 얘기인 겁니다 이건 보라돌이 데려다가 물어봐도 서로 다른 얘기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거를 머리통 이미 클만큼은 다 큰 친구가 왜 저런 괴상한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이 친구가 아무리 기이한 행동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소설가라 할지라도 초딩도 아닌 터에 공중파 방송에서 저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하긴 세상을 원고지로 하여 지금 새로운 소설을 하나 쓰고 있는 거라면 딱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겠습니다 이외수 신작 장편소설 - 제목은 '올빼미 미네르바 박'


올빼미 미네르바 박

이외수 신작 장편 "올빼미 미네르바 박" ?



무튼 이 친구는 이같은 엉뚱한 유비를 통해 "결국 미네르바의 죄목은 허위 사실 유포죄가 아니라, 진실 유포죄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니냐"는 제멋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습니다

게다가 얼빠지게도 웃기잡는 해외 네티즌들 얘기까지를 끌어들이고 있다는군요 그런데도 일부 기자와 네티즌은 또 이걸 받아서 환호작약들을 하고 자빠졌구요 완존 보라돌이들 놀이터가 따로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렇게 보라돌이 놀음에 개망신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한심한 노릇인데 물이 오른 궤변은 예서 그치질 않습니다  

"미네르바의 구속으로 이제 혼자 공부해서 지식을 쌓은 자는 입을 닫아야 하고 글도 쓰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것이 바로 미네르바 구속으로 높은 사람들이 얻는 일석이조 효과다. 가방 끈 짧은 주제에 아는 것이 너무 많은 죄, 이것이 미네르바에게 씌워진 또 하나의 죄는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는군요 

한마디로 주접을 떨고 있습니다

"미네르바의 구속으로 이제 혼자 공부해서 지식을 쌓은 자는 입을 닫아야 하고 글도 쓰지 말아야 한다"며 삐약~삐약거리는 소리는 하~ 얼척이 없으니 그냥 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 잡수세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지가 그렇게 생각하겠다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어요(근데 이 친구 지금 입 닫고 있나요? 내가 보기에는 이 만만한 정부 있는 한 앞으로도 절대 입 닫는 일은 없을 거같어요 도리어 살판 났다며 삐약~하는 뜀박질 정도가 아니고 아예 고래고래 잡겠다고 설래발 칠 거같어요-_-) 암튼, 건 그렇고

아니 도대체 미네르바 박 조사하는 것 하고 가방끈 짧은 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이 친구 말이 그나마 말이 되려면 미네르바 박을 조사하는 애들이 미네르바 박이 가방끈 짧다는 것까지를 이미 다 알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바로 미네르바 구속으로 높은 사람들이 얻는 일석이조 효과"라는 이 친구 말이 의미가 있게 되고 "가방 끈 짧은 주제에 아는 것이 너무 많은 죄, 이것이 미네르바에게 씌워진 또 하나의 죄"라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결과나 이외수 자신의 말을 듣보건대는 이에 대한 근거, 곧 검찰이 미네르바 박의 정체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오히려 50대 증권맨이니 하는 얘기가 나올 리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이 친구는 무슨 전지적 작가 시점에라도 있는 게 아닌가싶습니다 신끼가 있거나요(이게 전혀 허황된 얘기가 아닌 것이 전에 어떤 기사를 보니까 달나라에 있는 외계인과 매일 소통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외계인한테서 신통력을 받았다면 얼추 가능은 한 일이겠습니다) 아님 검찰 조직의 일부거나요 그게 아니라면 저런 사실까지를 좌악 꿰고 있을 리가 만무할테니요

영양가 하나 없는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무튼 이 친구의 궤변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이제 초딩들한테까지 만만해져버린 대한민국을 상대로 쓰는 이 친구의 기이한 소설이 어디메쯤에서 끝이 날지, 그것을 함 지켜보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겠습니다




<덧붙이는글> 어딘가에서 보니 이 친구가 무슨 '독재공포 다시 일어요' 하면서 나발 부는 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참 한심한 작자입니다 지금 이 친구 눈에는 저 허접한 정부가 그러니까 독재공포를 안겨줄 엄청시런 정부로 보이는가 봅니다 초딩들한테까지도 놀림을 받는 저 정부가 말이지요 소가 웃을 일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정부가 아무리 봐도 물로 보이고 그래서 독재공포 일으킬 것같아뵈지 않으니 다시말해 죽었다 깨나도 잡혀갈 일 없다싶으니까 님아 혹 그래서 해보는 헷소리는 아닌가요?  -  이외수, 그대는 '좌빨' 아니다 

 
2009/01/15 06:16 2009/01/15 06:16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자주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한번 더 곱씹어보면 그 안에 '초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뉴스로그는 과연 초심을 잃지 않고 있는가? 처음 기획한 그대로 가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 답은 '아니다'입니다.

뉴스로그는 기자평판서비스를 들고 나왔습니다. 실천적 미디어저널리즘의 기치를 들고서였습니다. 미디어의 구성원인 기자(와 블로거) 각 개인에 대한 평판시스템을 통해 미디어 일반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지향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가능하리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공유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없습니다. 공유된 믿음은 함께 이루어야 할 꿈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각개인의 믿음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한갓된 공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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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현상적으로는 분명 맞는 얘기지만 그러나 본질은 놓치고 있는 말입니다.

분열 없는 곳에 변화는 없습니다. 변화 없이 진보를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 게 아니라, 분열을 통해서만 진보일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진보를 진보이게 하는 힘은 분열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풀자면, 자유 자존에 입각한 다양성이 바로 진보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원유로 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 또한 그 원천인 분열 혹은 다양성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연대와 참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연대와 참여가 배제된 분열이란 기껏 집단적 이기 혹은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인터넷으로 비롯된 정보혁명의 가장 큰 특성 가운데 하나는 개방과 공유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중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인 집단지성의 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뉴스로그는 이 집단지성의 힘을 미디어에 적용한 서비스입니다.


"뉴스로그의 성패는 네티즌 일반의 참여를 어떻게 추동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출발하고, 집단지성의 힘을 주장해도 일반 유저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심과 재미다."



뉴스로그-시즌2를 시작하면서 하고 있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유저 일반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대목에서입니다.

그러나 뉴스로그-시즌2는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유저 일반의 관심도 재미도 이끌어내지를 못했습니다. 유저 일반의 니즈를 읽지 못한 때문이고, 유저 일반의 관심보다 뉴스로그의 지향점이 너무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의도가 지나쳐 불러일으킨 거부 반응이자 패착이었습니다. 들판을 제대로 태우기 위해서는 마른 들에 불을 놓아야 하는데, 무모하게도 들판을 말리겠다고 덤빈 짝이었습니다. 유저 입장에서는 실로 가소롭고, 그래서 코웃음을 칠 일이었을 터입니다. 뉴스로그가 시즌-3로 이행하면서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한 까닭입니다.


"아직도 '기사' 를 보는가? 이제부터는 '기자' 를 보라!"
- '뉴스로그-시즌2'는 ‘실천적 언론개혁’을 지향한다



설왕설래는 있었습니다. 특히 메인 탑에 위치한 '이슈' 항목의 신설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이슈' 항목의 신설은 유저의 이슈 종속성을 심화하여 필연적으로 다중을 우중으로 만들어갈 여지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즌2의 참담한 실패는 이같은 이의를 간단히 무력화하고도 남았습니다. 유저 일반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 시즌2의 결과 앞에서 좋은 목표와 알찬 내실을 갖추고 있다는 등의 이설들이란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심플했던 디자인이 다소 복잡한 형태로 대폭 수정 변경된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스로그는 여전히 이념 과잉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메인 화면의 이슈 항목에 붙박이로 '언론비평'이 박혀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슈 항목의 신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운영진이 택한 마지막 선택지였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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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로그에는 오늘 현재 127 개의 언론매체와 6,278 명의 기자정보가 게재되어 있으며, 이 정보는 이들이 생산한 수 백만 건의 기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자료는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자료가 갖는 의미와 이 자료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저 일반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반성합니다. 뉴스로그-시즌2에서 언듯 내비친 우리의 설익은 치기를 반성합니다. 일정 부분 공명심이 작용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을 피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마음 속에 소중히 키워가고 있는 불씨가 타오를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제공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역임을 다시금 절감합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유저 일반의 목소리보다 어설픈 자기주장이 앞서 있던 뉴스로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해주신 회원과 블로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비록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비록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진정한 변화란 각자가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연대와 참여'를 통해서만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뉴스로그는 유저 일반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초심에서 멀어지고 기획한 길에서 다소 에둘러가는 한이 있어도 유저의 얘기를 듣는 일을 우선으로 하겠습니다. 그 길이 뜻한 바 목표를 함께 이루어갈 수 있는 더 빠른 길일 터입니다.  


고맙습니다.
공개대외비 (2008/02/27 13:33)

같이 읽어야 하는 글
http://blog.mintong.org/439 (새 창으로 열기)
http://blog.mintong.org/391 (새 창으로 열기)
http://blog.mintong.org/326 (새 창으로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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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붙여 신문사

"자, 일곱 글자로 말해 봐" - 밀어붙여 신문사 (c) www.lllll.co.kr




<덧붙이는글> 위에 옮긴 글은 기자평판시스템이라는 타이틀로 서비스를 시작한 <뉴스로그> 서비스의 팀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안팎의 몇 가지 사정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때 쓰인 글이어서인지 사뭇 비장함이 어려있기도 한데요. ^^.  올 한 해 이곳 블로그에서 하고자 하는 일과 그 방향성을 같이 하고 있는 터여서 <뉴스로그> 운영진의 양해를 얻어 이곳에 전재합니다. 전재를 허락해준 <뉴스로그> 관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2009/01/14 22:34 2009/01/14 22:34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죠."

오늘 Zerald .J 님이 이곳에 남긴 댓글입니다 트랙백을 좇아 오긴 왔는데 의견을 달리 하는 글이어서 살짝 거시기했던 모양입니다(아니라면 미안합니다 그냥 그런 기미가 읽혀서요) 몇 마디 한 다음 마지막에 걸어두고 있는 게 저 말입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고맙습니다 아쉬움이라면 트랙백을 아니 남겨주셨다는 건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지만 어느 블로거 말대로 "질 떨어지는 블로그와 엮이고싶지는 않아서" 였을테니까요 언젠가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비슷한 단서를 붙이긴 했어도 그 블로그는 그래도 트랙백을 걸었다는 것

다음은 그때 기꺼움을 표하면서 남긴 글 가운데 일부입니다
 

나는 블로그의 순기능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블로그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블로그다.

블로그는 그러나 아직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블로거 대부분이 생각이 비슷한 사람과만 소통하려 할 뿐,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글 엮기에는 몸을 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몸 사리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은 자신의 생각을 정초하는 일이 쉽지않아서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은 상당한 수고를 요한다. 웬만한 치열함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과 글이 섞이는 경우, 이를 피해갈 수 없다. 어떻게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하고, 당연히 상당한 압박감과 피곤함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블로거는 생각이 다른 사람과 글을 섞으며 논쟁하기보다는 차라리 비슷한 생각을 지닌 패거리들 속에서 적당히 안주하는 길을 택하고 만다.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때로는 비겁하기까지 한 일이다. 변명은 가능하다.

모든 블로거가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글쓰기에 능한 것은 아니며, 설사 글쓰기에 능하다 할지라도 바쁜 일상을 살아가기도 버거운 판에 블로그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란 없기 때문이다.


오래 전의 저 글을 옮긴 이유는 블로깅과 글섞기에 대한 저 생각이 지금도 여전히 같아서이고 글섞기의 일차적 도구인 트랙백에 대해 한마디 하고싶어서입니다

다음에 있는 아고라를 두고 네티즌의 민주 성지라고들 한다는데요 내 생각에는 그게 합당한 표현인가싶습니다 민주성지라면 오히려 블로그가 더 민주성지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라는 게 뭡니까 국민 각자가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고라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기본적으로 나는 아고라와 같은 형식의 토론방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며칠 전 글에서도 그런 생각을 살짝 피렸했습니다 '아고라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른다'면서요 물론 과장된 표현입니다 그래도 인터넷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데 설마 아고라가 어디 붙어 있는지를 모르지는 않겠지요 다만 들어가서 노닥거려본 적이 없을 따름입니다

아고라는 닫힌 구조입니다 우물안에 개구리들 모아놓고 노는 구조이지요 이같은 우물안 구조에서는 목소리 큰 넘이 장땡입니다 거기에 패거리 부추기는 능력까지를 겸비한다면 아주 '왔다' 입니다 개구리 왕국의 잘 나가는 개구리 대왕 되는 건 따놓은 당상에 시간 문제일 뿐이지요

열린 공간의 일차적 조건은 다양성입니다 하지만 아고라에서 다양성을 기대한다는 건 나무 아래서 물고기를 찾는 것만큼이나 난망한 일입니다 누가 혹은 무엇이 잘못이어서가 아니고 우물안 개구리들이 처한 구조적 한계여서입니다 대세라고나 할까요 이같은 구조에서는 하나의 흐름이 정해지면 그것은 이내 거스를 수 없는 일정한 방향성만을 갖게 됩니다 공감과 동의가 아닌 증오와 배척이 주가 되는 패거리 성향입니다 다양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지요


아고라, 닫힌 공간 그리고 미네르바 신드롬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미네르바 신드롬도 이같은 구조가 만들어낸 해프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제 일반에 대해 탁월하게 썰을 푸는 재주를 가진 친구가 경제가 위태한 줄타기를 하고 있고 정부가 계속 헛발질을 하는 상황에서 독한 증오와 배척의 '반이명박' 진영을 한 패거리로 엮은 것이 일정한 방향성으로 나타난 결과가 미네르바 신드롬이었겠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이명박 까자"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인나 벌개진 눈으로 키보드 두드리는 인터넷 키워들이 좀 많아야지요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습니다 '이명박'이라는 먹이만 보이면 앞뒤 재볼 것도 없이 침 흘리며 덤비는 양이 영낙없이 파블로프의 개이니 말이지요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이전인 PC통신 시절의 토론방 모습이 딱 저러했습니다 우물안 개구리들이 모여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아웅다웅 다툼을 벌이는 곳 그 이상이 아니었지요 논쟁의 장이 인터넷으로 옮겨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그런 점에서 아직도 저 닫힌 공간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기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우물안 개구리들

우물안 개구리들



무튼 이같은 아고라식 토론방에 비한다면 블로그는 확실히 열린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대세라는 데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얘기를 해나갈 수 있는 곳이니까요 주체적으로 설 수 있는 여지 또한 그만큼 더 큽니다 

무엇보다 책임성이라는 점에서 아고라식 토론방과 블로그는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있는 블로그는 일종의 개인 연대기입니다 자신의 연대기에 무책임한 뻥이나 썰을 남기는 사람은 없지요 물론 전혀 없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무시해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오래 못 갈 블로그니까요 그런 블로그는 자연적으로 도태되고 맙니다

블로그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한계입니다 아고라식 토론방은 우물안 개구리 놀음이거나 말거나 일단은 한데 모여 있습니다 바글바글 모여 있기에 즉각적인 피드백이 일어납니다 끼리끼리만 논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어쨌거나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가능한 구조입니다 개구리 왕국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블로그는 다릅니다


블로고스피어, 열린 공간 그리고 블로그는 어떻게 소통하는가


블로그는 모두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다른 블로그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블로그는 그 각각이 하나의 고립된 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트랙백은 이같은 각각의 블로그를 이어주는 창구입니다 더 엄밀하게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각기 다른 생각들을 연결해주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자 도구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각각의 블로그를 서로 독립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 트랙백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블로그는 트랙백이라는 창구를 통해서 비로소 소통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트랙백을 죽어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저 아고라의 우물 속을 그리워하는 이들입니다 하루종일 똑같은 소리만 앵무새처럼 하고 있어도 서로 이뻐서 죽겠다며 빨아주고 핥아주는 패거리주의에 빠져 사는 친구들입니다 달콤한 말에 취해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죽어도 못 듣겠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인 이상 듣기좋은 소리 들으며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터입니다 다만 기가 막히는 것은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싶어 하는 이 친구들이 입만 열면 쏟아내는 말들이 차마 귀 열고 들어주기 힘든 악다구니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해하려 들자면 뭐 꼭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닙니다 사람이니까요


트랙백, 다른 의견을 보는 즐거움을 넘어서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친구들은 그야말로 눈만 벌어지면 그리고 입만 열면 다양성을 말하고 차이를 말하고 관용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하루에 딱 37번씩은 소통을 강조해 부르댑니다 어떤 때는 소통을 부르대다 제 흥에 겨워 껍뻑 나자빠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통의 전령들께서 소통의 유일한 창구인 트랙백에는 한사코 인색하기만 합니다 인색한 정도가 아니고 아예 차단도 밥 먹듯이 합니다 당근 그럴싸한 이유를 덧붙여서입니다(말로 이 친구들 따라갈 자 세상에 없습니다) "너같이 질 떨어지는 블로그랑은 엮이고싶지 않어요~"

거짓말입니다 헷소리구요 비겁한 자들이 항용 들이대는 핑계입니다 더 계속하면 점잖은 이 사람도 거의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염려가 있기에 그냥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다만 택도 아닌 거짓말 싸지르며 우물 안에서 놀고 있는 개구리 왕국의 친구들에게 한마디는 해드리고 싶습니다  


"대한의 블로거들이여, 소통하자 - 트랙백으로!"




 

2009/01/13 05:40 2009/01/13 05:40

'영자의 전성시대'는 갔다. 그리고 ... 지금은 '농담의 전성시대'다.

진지한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 진지한 이야기가 하나의 농담이나 코메디가 되어버린 시대, 그리하여 진지함이 무력화된 시대. 그렇게 진지한 이야기는 괄호밖으로 밀려나고 코메디언만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같은 시대상을 웅변으로 보여주었던 베스트셀러가 하나 있다.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이라는 책이다.

어느 위대한 소설가가 애석하게도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회복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병원의 자기 방에서 3개월 동안이나 타자기 앞에 앉아 소설을 쓰고 또 썼다. 마침내 소설이 완성되자 소설가는 환호를 터뜨리며 원고를 들고 원장에게 가지고 갔다.
원장이 그 원고를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장군은 말 위에 올라타 소리를 힘차게 질렀다. '이럇, 이럇-'"
원장은 재빨리 나머지 페이지를 죽 훑어 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5백 페이지 모두 '이럇-'이라는 말밖에 없잖아요?"
"맞아요. 그 말은 아주 고집스런 놈이었으니까요."

'이럇, 이럇, 이럇-.' 내가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고집스런 말(馬). 내 그대에게 무슨 말을 달리 할 수 있으리? 이건 대단히 따분한 일이다.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다는 게 얼마나 따분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나는 계속 반복할 것이다. 그대를 사랑하므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럇, 이럇, 이럇!'이 아니라, '이하동문'하고 가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이 책을 읽는 일은 '대단히 따분한 일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따분한 일이겠는가'. 이 책은 똑같은 이야기를 끝도 없이 반복하고 있다.

라즈니쉬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책 전체를 일관하여 진리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설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이러니하게 그 말할 수 없음을 끝없이 말하고 있다. 이유는 하나다. 고집스런 말(馬)과 같은 우리를 사랑하고 있어서다.

한 사내가 이층버스 안에서 함께 타고 있던 여자 승객을 때렸다는 이유로 고소되었다. 치안판사가 그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하였다.
"글쎄요, 판사님. 그게 이렇게 된 겁니다. 그녀는 아래층 내 옆 좌석에 앉아 있었죠. 그런데 그녀가 핸드백을 열고 지갑을 꺼내더니 다시 핸드백을 닫고 지갑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지갑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더니 지갑을 닫고 다시 핸드백을 열어 그 안에 지갑을 넣고 핸드백을 다시 닫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차장이 윗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핸드백을 열고 지갑을 꺼내더니 핸드백을 닫고 지갑을 열고 그 속에 조금 전에 꺼냈던 동전을 다시 넣고 지갑을 닫고 핸드백을 열고 지갑을 넣고 핸드백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차장이 다시 내려오는 것을 보고 핸드백을 열고 지갑을 꺼내더니 핸드백을 닫고 지갑을 열고 동전을 꺼내고...."
그럴 때 판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만!"
판사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당신, 날 미치게 만들 거요?"
사내가 말했다.
"내가 바로 그랬다니까요."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

배꼽(오쇼 라즈니쉬)

나도 그랬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느낌이 꼭 그러하였다. 이 책의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그 '우주적인 농담'들이 나를 미치게 했다. 아아, 나는 이제 그가 우리를 그만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이하동문'하고 그냥 넘어가 버렸으면 좋겠다.

이 책의 판매부수는 물경 이백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가히 놀라운 인기도라고 할 수 있다. 순전한 농담들, 말장난에 다름아닌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이 책이 저만큼이나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도무지 한갓되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이 책의 어떤 점이 독자들의 저 대단한 열광을 있게 한 것일까.

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독서 인구의 태반이 '시간 보내기'로 책을 읽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책의 저 엄청난 판매부수는 이같은 사정과 크게 무관하지 않을 듯도 싶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이라는 게 모두 시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것들이어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사정 하나로 저 경이로운 판매부수를 다 설명한 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이 책의 판매부수가 너무 많지를 않은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광고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광고는 전 매스컴을 모두 동원한 실로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역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농담의 전성시대


농담의 전성 시대!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 사회의 특성을 그렇게 부르고 싶다. 말장난이나 농담 따먹기가 난무하고 있는 사회, 우리는 지금 농담이 전 사회를 횡행하며 그 성가를 한껏 발휘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고 농담이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그런 시대를.

이런 사회에서는 진지하고 심각한 모든 것은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웃기는 사람이다. 하기에 사람들은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조차도 그것을 전혀 농담인 양 말하고 만다.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오직 코메디언들 뿐이다. 그들만이 심각하게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웃기는 사람들'이므로.

나로서는 이같은 현상이 썩 바람직해뵈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런 현상을 있게 한 일단의 원인이 별로 바람직스럽지 않아 보여서다

농담이 전 사회를 휩쓸고 있는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정의와 권위의 부재 현상이 있다. 농담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곧 정의가 부재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과 권위가 상실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정의도 어떤 권위도 갖고 있지를 못하다. 대체 우리 사회의 어디에서 규범으로 삼을만한 정의와 사표로서 섬길만한 권위를 찾아볼 수가 있던가.


정의와 권위의 부재


사회의 극심한 변혁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정의와 권위를 상실해버렸다. 여기서 그 상실의 역사를 모두 더듬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로 이즈음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현재에도 여전히 경험하고 있다.

'정의 사회 구현'을 국정 지표로 삼았던 그 정의의 시대에 오히려 우리는 정의의 상실을 경험한 바 있으며 권위의 상징이랄 수 있는 스승의 표리부동한 언행에서 우리는 바로 그 권위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제의 불출마에 대한 표명이 오늘의 출마에 대한 변으로 바뀌고 '무엇을 걸고서' 지키겠다던 어제의 발언은 그것을 지키지 못한 오늘 식언이 되고 만다. 우리 사회를 온통 휘감고 있는 저 농담의 징후가 발견되는 지점이다. 일종의 사회적인 병리 현상이다.

[배꼽]이라는 책에 대한 저 이상한 열광은 바로 이같은 사회 현상과 맥이 닿아 있다. 일간 스포츠 신문의 매일을 장식하고 있는 맹구 시리즈나 요지경 시리즈, 그리고 한때 베스트셀러의 수위 다툼을 벌였다는 최불암, YS, DJ 시리즈가 불티나게 읽히고 있는 이상한 시대고 야릇한 사회다. 이같은 사회에서 그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읽으나 마나 한 이야기 살짝 들춰보기..


무튼 이 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성공은 독자들의 독서 열기를 한껏 고조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바야흐로 기백만 부의 책 판매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일단 출판계의 치하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더 이상을 얘기해봐야 기껏 딴지 이상이 되기 힘들다.


한 새가 다른 새에게 물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농담 하나만 더 듣고 그만하기로 한다. 사회적인 병리 현상 말고 독자의 열광을 낳은 다른 또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는 이야기다. 이 농담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함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늘 남의 뒤만 따라다니고 있는거지? 도대체 나는 왜 이 책을 사게 되었던 거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듣기에 그 책이 꽤 재미있는 책이래, 듣기에는 말이야.


한 무리의 새들이 하늘을 날고 있는데, 한 새가 다른 새에게 물었다.
"왜 우리는 늘 이 멍청한 리더의 뒤만 따라다니지?"
그러자 다른 새가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언젠가 듣기에 그만이 지도를 갖고 있대."

지도라.... 사실 그 누구도 지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대는 누구를, 훌륭하고 성스런 누구를 추종하며 그들이 지도를 갖고 있고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글>
위에 옮기는 글은 '배꼽'이라는 책을 읽고 십 수 해 전에 적었던 글입니다. 당시 농담이 전 사회를 횡횡하는 현상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었는데 지금 보니 살짝 거시기합니다. 미네르바 열풍이 뜨겁습니다. 미네르바 열풍을 보면서 문득 저 한 무리의 새 우화가 생각나서 '거시기'함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더 정확히는 매일 한 꼭지씩의 포스팅을 하겠다는 저 '지키지 못할 약속'에 매인 포스팅입니다 -_-)
그런데 이 포스팅으로 또 뚜드러맞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 글을 올렸던 당시에도 배꼽 독자들로부터 살짝 뚜드러맞은 기억이 있는데 말이지요 이번에는 어설프게 미네르바까지 끌어들였으니

2009/01/12 22:29 2009/01/12 22:29
  미네르바(박대성)의 변론요지
- 2009.1.10일 10:30 서울중앙지법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한 변론요지 -


“나는 미네르바의 변호인으로서 영장실질심사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구속영장청구가 부당함을 진술하였으나 끝내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심정이다. 아마도 미네르바도 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본다. 평소에 사법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않은 나의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사법풍토를 되돌아 볼 수밖에 없다.”


검찰의 미네르바에 대한 구속영장청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기각함이 마땅하다


1. 미네르바는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전혀 없다

주소지에 본인명의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고, 전과가 없으며 지금까지 수사기관의 출석요구를 받은 바 없다.
주소지에서 단 1개의 IP만을 사용해왔으며 검찰이 2개의 IP가 있다고 발표한 것은 하나로텔레콤이 SK브로드밴드로 통합된 것을 오인한 것이다.
주소지에서 자기가 게재한 글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각오로 한 개의 IP만을 사용하면서 당당한자세로 임해왔다.
주관이 뚜렷하고 자의식이 강한사람이므로 이번일로 검찰의 수사를 면피하기 위하여 도주할 사람이 아니다.

검찰은 그가 사용하던 컴퓨터를 압수했고, 그동안 인터넷에 게재했던 글들과 그가 비판했던 정부쪽의 자료도 확보함으로서 증거인멸의 우려와 여지는 전혀 없게 되었다.


2. 전기통신법 47조는 위헌이며, 미네르바의 글은 해당하지 않는다

검찰은 미네르바가 2008. 12.29일 재경부가 수출입업자와 금융기관 등에 달러매입금지공문을 보냈다는 글과 7월30일자 달러교환금지을 '아고라‘에 게재한 것을 위 법 47조의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① 미네르바가 12월29일과 7월30일 글을 게재할 무렵에 정부가 고환율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관계기관에 경고, 협조공문을 보냈고, 환율조작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는 뉴스가 신문, 방송,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었는데 이런 정부의 태도를 자연히 미네르바(박대성)가 주목하게 되었다.
② 연말의 고환율은 대부분의 기업과 개인에게 엄청난 영업이익손실과 충격을 줄 수 있으므로 경각심을 가져야 할 상황이었다.
③ 미네르바 본인이 주식, 환투기를 하지 않지만 고환율이 자영업자 등 형편이 어려운 서민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 확실하므로 그 글을 게재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미네르바가 공익을 해칠 목적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볼 수 없다.
④ 위 47조의 ‘공익을 해칠 목적’이란 것이 그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 수사기관의 자의적 해석과 남용의 위험이 커서 헌법이 규정한 죄형법정주의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 현재 헌법재판소가 위헌여부를 심사 중에 있다.
⑤ 미네르바의 7.31일과 12.29일의 글들은 신문, 방송, 인터넷에서 공급되고 있는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토대로 정리하여 쓴 글이며, 결코 허위사실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3. 미네르바의 글은 정부정책의 불확실성, 신뢰상실에서 탄생한 것이다

‘공익을 해칠 목적의 허위사실 유포죄’는 한자의 4자성어 ‘혹세무민(惑世誣民)죄’라고 할 수 있다.
MB정권 출범이후 1년 동안 정부의 경제정책은 일관성, 신뢰성을 상실하고 정책책임자인 재경부장관 등이 지속적으로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고, 그런 과정에서 미국발 금융위기의 쓰마미를 맞고 한국경제가 가라앉고 있다.
작년 7월 이후 미네르바의 예측과 의견은 결정적 계기에서 대부분 적중해왔다.
혹세무민의 죄를 묻는다면 말 바꾸기, 변명하기에 급급한 대통령과 재경부장관에게 오히려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검찰이 찾아낸 미네르바의 글 280개 중 7.31과 12.29에 게재한 2회의 글만을 혹세무민죄로 다스린다면 나머지 278개의 글은 예측이 적중했거나, 정부가 정책에 참고할 내용으로 보아지는데 그렇다면 278개의 긍정적인 글들에 대해서는 정부가 포상해야 하지 않는가?


4. 미네르바를 죽이면 국민의 입은 잠시 닫힐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그 닫힌 입은 분노의 함성을 쏟아 낼 것이다

조선조 세종, 성종, 영조, 정조 등 성군의 칭호를 듣는 왕들은 임금을 능멸하는 표현을 담은 상소도 받아들인 이 들이다. 언로(言路)를 열어두었다.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시대이다. 언론자유는 당연히 보호, 보장되어야 한다. 정부가 경제실정에 대한 겸허한 반성 없이 비판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것은 시대역행적 발상이다.


정부의 이러한 잘못을 사법부가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영장청구는 반드시 기각될 것임을 확신한다.


2009. 1. 11
올바른사람들 공동대표 박찬종




<주> 위에 옮기는 글은 방금 전에 날아온 박찬종 올바른사람들 대표의 메일링이다 어제 서울중앙지법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제시한 미네르바(박대성)의 변론 요지를 담고 있다 공개를 염두에 두고 전달된 글이고, 또한 이 블로그에서 내가 천착하고 있지 않은 이 사태의 또다른 측면을 다루고 있는 글이기에 그대로 전재한다 나는 박찬종 대표의 변론에 동의한다

2009/01/11 15:05 2009/01/11 15:05
언젠가 바보들인 줄 알았더니 니네 미친 거 아니냐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저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저들은 미친 게 아니라 바보들이었던 게 맞습니다 미친 이는 적어도 허튼 음모론에 휘둘리거나 이용은 당하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미네르바 조작 음모론이 나왔습니다 미네르바 체포와 함께 불거져 나온 여러 버전의 음모론이 '검찰의 미네르바는 아고라의 미네르바가 아니다!!!'는 단계까지 발전했습니다 단순히 '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 '명료한 확신'의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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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 도아님 주장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1. 미네르바는 경제지표를 통해 분석하고 그 결과를 예측하는 통찰력이 넘쳐났다 그러나 체포된 미네르바는 전문대 졸업의 30대 백수였다 - 그 간극이 너무 크다
2. 미네르바를 ‘가장 뛰어난 국민의 경제스승’이라고 극찬했던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도 “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쓸 수 없는 글”이라며 “30세 무직인 누리꾼이 그런 글을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한다 - 전 청와대 경제수석조차 아니라고 한다
3. 미네르바를 알고 있다는 readme 는 "나는 알고 있다 미네르바가 아니라는 것을... "이라는 글을 통해 체포된 미네르바가 고문이나 회유를 통해 거짓 자백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 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4. 미네르바가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작성했는 글에는 미네르바 특유의 통찰력이 보이지 않는다 - 글은 마음의 거울이다 (그 거울에 미네르바 안 보인다
5. 상식에 의하건대 미네르바라면 위 4번과 같은 글을 쓰라는 검찰의 요구에 응했을 리가 없다


도아님은 말합니다 이건 '상식'이라고 "상식을 이용하면 검찰의 미네르바는 아고라의 경제논객 미네르바가 아니라는 아주 단순하며 명료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상식까지를 동원하여 펼치고 있는 도아님의 이 주장은 너무 나이브합니다 함량미달이라고나 할까요 음모론으로 봐주기에는 그 주장이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함 보겠습니다

먼저 미네르바가 경제지표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예측하는 통찰력이 넘쳐났다는 부분입니다 두 가지로 나눠 살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인데요 첫째는 미네르바의 글이 과연 그렇게 통찰력이 뛰어난 글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른바 경제예측을 하는 글들이란 모두 기본적인 틀을 갖고 있습니다 특정 포맷이 있고 거기에 상황에 따른 변화 즉 정치사회적 이슈나 경제동향 그리고 경제지표 등을 넣고 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날씨예보 하는 것이나 그 형식면에서 얼추 비슷합니다 맘 먹고 달려들면 누구라도 엇비슷한 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그 내용인 거니까요 포맷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거기에 시의적절한 데이터가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하지만 이 부분도 아주 약간만 노력을 더한다면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자료는 이미 차고도 넘칠 정도로 널려 있으니까요 정보의 보고인 인터넷을 이용한다면 구하지 못할 자료는 없습니다


기본적인 작문력과 상당한 경제지식 그리고 빼어난 정보 검색 능력을 갖춘 백수


한마디로 기본 포맷을 익힌 어떤 이가 사이비 경제 분석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내놓은 일은 식은 죽 먹기라는 뜻입니다 맘만 먹는다면 말이지요 해당 분야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글빨이 있는 백수라면 더욱이요 그런 점에서 이번에 검찰에서 흘린 몇 가지 정보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기본적인 작문력과 상당한 경제지식 그리고 빼어난 정보 검색 능력을 갖춘 30대 백수' -  딱 들어맞는 케이스입니다

남는 것은 미네르바의 글에 '넘쳐났다'고 평가되는 '통찰력'일 텐데요 그러나 이 부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국내외 경제연구소의 자료들은 간단한 메일링 가입 하나로도 원하는만큼 받아볼 수 있고 또한 이곳에서 시시각각 죽기살기로 내놓는 것이 바로 그 분석이고 예측입니다 최소한의 짜깁기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이 자료들을 적절히 배열하여 새로운 분석과 예측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어려운 게 아니지요(인터넷 돌아다니다보면 실제로 이런 글들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그 숱한 연구소들은 왜 미네르바같이 그렇게 멋진 예측을 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이건 좀 복잡하게 따져들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책임성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운 개인이야 주어진 자료에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얼마든지 담아낼 수 있지만, 그래서 맘껏 부풀리거나 극단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사회적 영향력과 그 책임성까지를 고려해야 하는 연구소의 경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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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쓰고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요 그 사이에  Laputian 님이 한 가지 의미있는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이어서 하려던 얘기와도 관련이 있기에 Laputian 이 남겨주신 댓글을 옮기면서 다음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Laputian 2009/01/10 20:51  현재 하민혁 님께서 주장하시는 바로는 미네르바가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도 않고, 구할 길도 없다는 금융권 고위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터넷에도 한계는 있고, 짜깁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Laputian 님이 댓글로 남겨주신 내용입니다 미네르바는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도 않고, 구할 길도 없다는 금융권 고위 정보'를 활용하고 있는데 제가 위에서 말한 걸로는 이에 대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지적은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태동의 주장과 직접적으로 맛닿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김태동은 미네르바를 ‘가장 뛰어난 국민의 경제스승’이라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읽은 미네르바의 글은 현장에서 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쓸 수 없는 글”이라며 “30세 무직인 누리꾼이 그런 글을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도아님이 '검찰의 미네르바는 아고라의 미네르바가 아니다'고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김태동의 스승 미네르바와 신동아의 유령 미네르바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의문이 타당하게 제기되기 위해서는 먼저 저 '고급정보'에 대한 공감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고급정보의 실체 곧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그것이 인터넷을 통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정보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태동의 주장이나 Laputian님의 얘기 어디에도 이를 확인해주는 내용은 없습니다 [footnote]물론 어딘가에는 그 구체적인 데이터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미네르바가 활용한 데이터가 '아무나 볼 수 없는 고급정보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그런 넘이 있다면 그건 정신 나간 넘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아니면 대단히 무책임한 넘이겠거나요 단지 여기서는 그 자료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footnote]

때문에 적어도 현 상태에서 김태동의 '미네르바 극찬'을 근거로 음모론을 말하는 것은 권위에 의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겠다고 여겨집니다 무엇보다 미네르바 본인(인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음모론의 핵심이기는 합니다만)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정보라고 직접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덧붙여 이번 미네르바 사건을 계기로 신동아의 '미네르바 기고문'이 아주 상종가를 치고 있는데요 강만수와 정부 경제부처 외에 이번 사태로 똥물을 뒤집어쓴 이가 있다면 그건 아마 김태동과 신동아가 되지 않을까싶습니다 이에 대한 애기는 조만간 밝히겠다는 신동아의 해명을 듣고나서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아는 미네르바 K" 와 "나는 알고 있다 미네르바가 아니라는 것을.." 사이  


다음은 내가 도아님의 글을 보면서 제일 황당해 했던(그러나 다른 한편 제일 재미있기도 했던) 부분인데요 바로 "나는 알고 있다 미네르바가 아니라는 것을... "이라는 글을 인용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도아님은 여기서 미네르바의 지인인 readme 조차도 "체포된 미네르바가 고문이나 회유를 통해 거짓 자백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면서 검찰이 엉뚱한 인물 'P'를 날조했다는 readme의 주장에 동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의 선언문이 정말 가관입니다

나는 절망한다 고로 나는 투쟁한다.
온 세상이 내 눈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로 시작하는 이 글은 말 그대로 선언문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저는 읽다가 그냥 중간에서 접었습니다 자기 말대로 뭔가에 된통 세뇌를 당했거나 아니면 그냥 살짝 맛이 좀 가신 분 같아서입니다) 제2의 미네르바 출현에 대한 얘기가 종종 들리는데 누군가 제2의 미네르바가 되기 위해 아주 작정을 하고 덤빈다면 이 분처럼 되지 않을까싶습니다

4번과 5번 항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도아님이 말하는 상식이 저랑은 현저히 차이가 있지만 그 정도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도아님의 그 상식을 일반화하는 데는 좀더 신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덧붙이는글> 도아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이 분이 왜 저렇게 투사로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도아님은 PC 부문 TIP 분야에서 가히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분이시고 또 유관 분야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분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쥐박이'를 찾으시더니 흡사 '쥐박이' 못 잡아먹은 귀신이라도 붙은 양으로 이상한 광기(?)까지 보이고 계시다 왜 그럴까?

<덧붙이는글> 지금 보니 한겨레에서도 비슷한 기사를 띄웠군요 (사이버 미네르바와 검찰의 미네르바 사이) 이에 대해 몇 마디 더할 게 있지만 우선은 참고 삼아 링크만 걸어둡니다 (저 동네 트랙백은 폼만 트랙백이군요 내부에서만 가능한 듯싶은 이러니 언론사 홈페이지가 외면을 당하지 포털 탓만 할 일은 아니라는) 
2009/01/10 18:35 2009/01/10 1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