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에 해당되는 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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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3/09 차분하면 진보, 화 잘 내면 보수 48
  3. 2009/03/09 박찬종, 이용훈 대법원장은 용퇴하고, 신영철 대법관은 사임하라
  4. 2009/03/08 MBC 노조, 동영상 자삭한 진짜 이유 43
  5. 2009/03/07 노무현, 우리 기자들 참 큰일이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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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3/02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 중에서 6
  11. 2009/03/01 MBC 노조의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기생질 106

김신의 쫄병시대

김신의 <쫄병시대>

김신의 <쫄병시대> -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저 '솔직한 이야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인공 표현일을 통해 작가가 발가벗겨놓고 있는 저 쫄병들의 행태는, '그가 사회에서 어느집 자식이었든지 얼마나 교육을 받았건 간에 턱없이 졸렬해지고 유치해지고 야비해지기까지 하는', 그리고 비굴해지기까지 하는 저 행태는 바로 <쫄병시대>를 경험한 우리 모두의 비애로써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한다.

굳이 작가가 변명하지 않더라도 그가 신병시절 이한길 소령의 뒤를 쫓아가 용무없는 용무로 다짐했던 충성을, 그리고 신병교육대 교관이었으며 사단장 전속부관인 장교 조일훈 중위에 대한 까닭모를 비하를, 그리고 사회깡패 모춘배와 배건수, 한경열에 대한 저 단순무쌍한 성원을, 여섯 살 소영이에 대한 저 애틋한 감정을 우리는 이해한다.

분명 일탈된 것에 다름아닌 저 표현일의 행위들을 우리는 이해한다. 저 충성이 다름아닌 아부의 한 표상이었으며, 장교에 대한 저 턱없는 비웃음이 자신의 치열한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저 성원이 또다른 형태의 비굴에 다름아니었으며 저 애틋한 사랑(?)의 감정 역시 인정받고 싶어하는 쫄병들의 굴절된 감정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아직은 채 깨어나지 못했고('나는 충분히 깨어 있었다' 말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이하는 고교를 갓 졸업하고 군대에 가야 했던 '우리'로 읽어주시길) 그러기에 지금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쓰디 쓴 자조의 웃음을 짓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해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우리가 있노라고,

우리는 그같은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 비로소 성찰의 한 계기를, 다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절절한 체험으로 인해 가지게 되었노라고 우리는 자위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의 훌륭한 설교보다도, 어떤 책의 가르침보다도 더한 절실함으로 가슴에 담겨 있는 것이다.

문득, 어느날 문득, 젊은 날의 그 부끄러운 기억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멋있는 병영생활을 했는지를 더한 소리로 읊으면서 우리는 기실 우리의 저러한 과거를 애써 잊으려 하거니와 바로 이 소설은 그러한 허장성세를 그대로 담고 있고 거기에 바로 이 소설의 강점이 있겠더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설의 뒤에 붙어있는 김태현의 말은 무시해도 좋았다.

'분단조국의 실상에 대한 좀더 깊은 안목'을 이 소설이 보여 주지 않아도 좋고,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저 악독한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라는 것까지를 생각해서 '그런 현실에 대한 이렇다 할 언급이나 암시를 하지 않는 것'이 김태현과 같이 그렇게도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좋았으며, 하기에 '안보를 정권 유지에 악용하는 못된 버릇에 빠져 있는 일부 이기적인 군인들이 병영을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권력기반으로 생각하고 병영을 철저하게 타락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여 굳이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고 안타까워 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병영생활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비역 병장 표현일이가 아직도 저 막사 안에서의 짓거리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데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아직도 남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데에 화가 난다. 아직도 저 비굴을 청산하고 있지 못한 데에 가슴이 아프다.

그는 사족을 달아서 말한다.

이 작품이 등단을 위해서 쓰여졌던 탓이라서 내용에 많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구체제의 폭압과 역사적 안목에 대한 통찰의 결여가 그것'이라고. '다시 쓰겠다'고.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고문관 하민혁

'고문관' 하민혁의 쫄병시대


그는 지금 우리를 놀리고 있는 것인가? 저 혼자서 빠져 나가겠다는 말인가? 자신은 저 비굴한 쫄병의 늪에서도 홀로 고고한 연꽃 한 송이를 피우고 있었노라고, 가열찬 투쟁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이제 모든 쫄병을 배신하고 저 저널리즘의 힘에 아부를 하려 하는가.

그러나 쫄병을 버리고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도대체 학사 출신 쫄병의 전형인 저 표현일이를 그는 또 얼마나 더한 거짓말장이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이 점에서 작가와 표현일은 닮았다.

그리고 우리의 우려하는 바 다른 한 가지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표현일이는 철저한 쫄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젊었으며 그것은 그가 성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값비싼 하나의 통과의례라 여길 수도 있을 터이므로.

그러나 작가는 그렇지 않다. 예비역 병장 작가 김신은 이제 더 이상 쫄병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당당해야 한다. 아직도 비굴함과 아부 근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저 쫄병의 멍에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러한 징후는 이미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안타깝다.

이 소설을 상재하며 내뱉고 있는 그의 변명을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 그의 가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등단을 위해' 이 작품이 쓰여졌기 때문에 많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이 작가를 우리는 믿을 수가 없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당시에도 그러한 제약을 뛰어 넘으려는 작가들의 노력은 가열차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변명이라니? 이것은 제도권에 빌붙으려는 작가의 저열한 의식과 행태를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는 가열차게 싸웠던 이들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병영 안에서도 병영 밖 사회에서도 작가는 시대의 폭압과 싸우지 못한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비굴하지 않은 사람이면 병영에서도 비굴하지 않을 수 있다. 십분 양보해서 그때는 아직 사회 의식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았고, 그 시기를 거침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다시말해 자신의 행태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 그 시기의 전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작가는 이제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쫄병시대>를 그 부끄러운 시기의 한 참회록으로 상재해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쫄병시대>를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변명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아직도 그가 쫄병의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걸로 보이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쓰겠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화가 난다.

우리는 병장 표현일이를 따라 무덤을 묻으며, 우리의 부끄러웠던 한 시기도 이제 묻어 버리고 싶어 한다. 헌데 그 시점에서 그는 돌연 다시 쓰겠다고 말한다. 쫄병들을 향해 '니네들은 형편없는 넘들이'라며, '시대에 대한 아무런 의식도 없는 식충이들'이라 말하면서,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시대를 아파하고 있었다'면서 '다시 쓰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배신자이다.

이런 배신자 같으니!

표현일, 너는 마, 사실 쫄병을 거론할 자격도 없어. 그래도 우린 너같이 덥게 붙어먹지는 않았어 색햐. 소설 쓰지 맘 마!  같은 쫄병이었던 탓에 너의 소설 쓰고 앉았는 꼴을 눈감아주고 있던 우리가 바보다 색햐.

이 소설은 자신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솔직한 고백을 소설을 낳은 작가 자신이 부끄러워함으로써 그 고백이 지닌 진정성에 회의를 갖게 만들며, 그리하여 이 소설에 대한 우리의 신뢰성을 제로화시켜버린다. 그리하여 소설을, 기껏 재담으로 버티고 있는 말놀음으로 격하시켜버린다. 

작가는 작가 자신의 가장 큰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통찰하여 흔들림없이 그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길이 시대와 역사에 대한 통찰보다 더한 신고의 길일른지도 모른다.
 
번뜩이는 재담. 그것을 추구하여 순간적인 재미가 아닌 촌철살인의 무기로 만드는 것, 그것을 온전히 다듬는 길이 이 작가가 작가로 남는 길이 아닐까 싶다. 건투를 빈다.



 

<덧붙이는글> 이 글은 십 수년 전에 쓰여 피씨통신에 올린 글입니다. 당시 거의 한 달음에 쳐내려간 글이어서 날 것 그대로입니다. 혹여 김신님이 이 글을 보시더라도 이 점 널리 양해바랍니다. ^^
 
2009/03/10 21:22 2009/03/10 21:22
얼마 전에 '차분한 사람은 진보적이고 흥분을 잘하는 사람은 보수적이다'는 내용의 외신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일리 있는 분석입니다. 이 분석은 주목만한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터넷서 자칭 진보연하는 아해들이 실은 지극히 보수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가 그 실제적 동력을 공급받는 곳이 보수라는 사실입니다.  아이러니하달 수도 있는 이같은 사실은 주위의 이른바 보수적인 혹은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을 일견해보는 것만으로도 쉬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좌파 우파

왼쪽에 있는 사람, 오른쪽에 있는 사람



보수적인 사람들은 확실히 유연하지 못합니다. 사고의 폭이나 행동 모두에서 애오라지 똥고집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섰다면 이들에겐 다른 이의 생각 따위는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특정 지역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숨이 꽉 막힐 정도의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건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진보적인 이들은 그 말과 행동이 우선 유연합니다. 유연함을 넘어 유들유들하다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사고의 폭도 훨씬 더 넓습니다. 홍세화가 말하는 이른바 '똘레랑스'론과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무튼, 그래서 말인데 어떤 보수적인 꼴통보다 더 꼴통스런 짓을 하면서도 스스로 진보연하며 방방 뛰는 이들은 저 분석에 한번쯤 자신을 비춰보는 것도 좋은 일이겠습니다. 스스로를 함 돌아보았으면 한다는 얘기입니다.  





<덧붙이는글> '진보의 동력원이 실제로는 보수'라는 얘기에 대해서는 일단 패스합니다.
 
2009/03/09 17:16 2009/03/09 17:16

촛불집회 사건 재판 개입 논란이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같습니다. 이른바 '몰아주기 배당' 논란에서 가볍게 시작되는가싶던 논란이 신영철 대법관이 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공개되고 전화를 한 일이 드러나면서 이제는 다른 시국사건 재판에서도 비슷한 압력 행사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으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러다가 대법관 사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옵니다. 여기에는 사안을 허투로 보고 안이하게 대처한 이용훈 대법원장의 책임도 없지 않아 보이는데요, 그래서인지 이 대법원장의 용퇴론도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신영철 대법관의 경우는 급기야 현직 판사가 나서 그의 사퇴를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러 있구요.
 

이용훈 대법원장(왼쪽 사진)과 신영철 대법관이 6일 저녁 대법원에서 각각 퇴근하면서 ‘촛불재판’ 개입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기남기자> / 경향신문


이래저래 사법부의 위상이 그야말로 말이 아닌 지경입니다. 이와 관련해 포스팅을 하나 할까 하다가, 마침 올바른사람들 박찬종 대표의 "2000 법관들의 양심을 어떻게 지켜 줄 것인가 - 이용훈 대법원장은 용퇴하고, 신영철 대법관은 사임하라"는 글이 메일링으로 날아왔기에 이를 전재하는 것으로 포스팅을 대신합니다.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자로 쓴 이 글에서 박 대표는 ①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이 ‘이메일’파동에 즈음하여 스스로 변명할 처지에 빠진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하며 물러서야 하고, ② 신대법관이 법관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것은 명백한 재판간섭이고 압력이므로 사임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 ③ 사법제도개혁을 위한 범국민적 기구 구성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박 대표의 글 전문입니다.
  


2000 법관들의 양심을 어떻게 지켜 줄 것인가

- 이용훈 대법원장은 용퇴하고, 신영철 대법관은 사임하라 -


1. 이용훈 대법원장은 용퇴해야 한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임명당시부터 사법부 수장이 되기에는 부적절한 처신들이 문제되었다.
이 대법원장은 대법관을 지낸 후 5년간의 변호사시절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관련 300억 원대 사건을 착수금 2억 원, 사례금 17억 원, 소장 작성비 5천만 원에 수임하였다.

대법원장이 된 후 그 론스타 한국책임자 유모씨에 대한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법원에 의하여 4차례 기각되면서 대법원장의 영향력 행사 여부가 말썽이 되었다.

5년간의 변호사 시절 철저한 상업주의적 활동으로 일관하면서 삼성에버랜드사건을 수임하는 등(그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400여건의 돈 되는 굵은 사건을 수임 최소 60억 원의 소득을 올리면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법률구조활동을 한 일이 전혀 없고, 오히려 골드만삭스 측의 소송대리인으로서 2억 5천만 원의 수임료 및 성공보수를 받고도 5천만 원의 세금을 탈루한 일까지 드러났다.

한마디로 사법부수장으로서 결정적 흠결들이 있음에도 이를 깔아뭉개고 대법원장의 자리에 올랐다.

이런 대법원장이 이번에는 이메일 파동에 빠졌다. 파동의 정점에 이 대법원장이 있는 것이 명백하다. 스스로 변명에 급급한 모습은 사법부 수장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라.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지만, 법관, 그중에서도 대법원장만은 그림자도 밟히지 않는 사람이 맡아야 마땅하다. 변호사로서 큰 돈벌이가 되는 굵은 사건만 맡아서 임명당시에 말썽이 되었고, 이번에는 법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이메일파동에 관여한 것이 드러났다.

대법원장은 2000법관의 어른으로서 곧은 소나무와 청정공기로 둘러싸인 산과 같은 신성성과 무게를 가져야 한다. 아무라도 함부로 대법원장을 꿈꿀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척박한 시대, 선비정신의 표상이어야 한다. 이용훈 대법원장에게서 이런 표상을 더 이상 바랄 수 없다. 머뭇거리지 말고 용퇴해야 한다.

2. 신영철 대법관은 사임함이 마땅하다.
 
신 대법관은 서울중앙지법원장 재임 시 이른바 촛불시위사건의 불공정 배당과 이번의 이메일 사태에서 개별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한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재판사건의 배당은 일종의 재판권이다.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법원장이 사건배당을 임의로 한다는 것은 재판권 침해이다.

이메일로 촛불시위사건을 맡은 법관들에게 대법원장의 뜻임을 암시하면서 헌법재판소의 집시법에 대한 위헌여부 결정과 관계없이 신속한 재판을 요구하고 보석결정 자제도 요구한 것은 명백한 재판간섭이고 압력이다.

구차한 변명으로 대응하는 모습은 이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참담함을 느끼게 한다. 30년 가까운 법관생활을 하고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금도(襟度)가 이정도인가.

2000명의 후배법관들의 모습을 떠 올리고 사임하라.

3. 국민적 사법개혁기구를 구성하고 근원적 개혁안을 마련할 때이다.

지금과 같은 법관의 계층적인 서열구조와 승진제도하에서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한다’는 법관의 사법권독립을 지켜낼 수 없다.

법관이 부장판사 - 수석부장판사 - 지법원장 - 고등법원장 - 대법관으로 이어지는 서열구조아래서 승진, 고과권한을 대법원장과 상급법관들이 틀어쥐고 있는 한 개별법관의 독립성이 보장될 수 없다. 이번의 이메일파동이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

법관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평생 법관으로서의 독립성과 신분이 보장 돼야 한다. 현재와 같은 부장, 법원장 등과 같은 서열구조는 없애야 한다.

대법관이나 대법원장도 현재처럼 서열구조에서 승진해서 오르는 자리가 아니고, 모든 법관이 언제든지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혁해야한다.

그리고 전관예우의 퇴폐적 풍토도 개혁해야 한다.

이런 근원적 개혁을 위해서 중립적인 사법제도 개혁위원회를 창설하고 국민적 여망을 수렴하여 개혁안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2009. 3. 9
올바른사람들 공동대표 박찬종




 
<덧붙이는글> 느닷없이 웬 박찬종씨 글이냐는 분이 없지 않을 것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며칠 전에 쓴 짧은 댓글로 우선 그 답을 대신합니다. http://blog.mintong.org/482#comment4275 (새 창으로 열기) 
<덧2> 저 댓글 내용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어쨌거나 현재 박찬종씨가 특정한 패거리에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도 그의 글을 부담없이 전재하는 한 이유라 하겠습니다.
 
<덧> 메타블로그를 맨날 이용하면서도 배너 하나 걸어두지 않았더니 어째 영 미안한 터라 사이드에 배너를 몇 개 걸었습니다. 헌데 블로그가 심플한 맛을 잃고는 통 폼이 안 나 보이는군요. ^^
 
2009/03/09 02:53 2009/03/09 02:53

MBC 노동조합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당당하게 메이킹 필름까지 공개하며 뿌려댄 세계인에게 보내는 영상 메세지가 이상하게 작동이 안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MBC 노조에서 자진삭제한 때문이라는군요. (‘MBC 노조 동영상’ 왜 사라졌나 알아봤더니…)


MBC 노동조합

MBC 노동조합, 허튼 짓 하지 마라


링크한 글에서 허재현님이 전하는, MBC 노조가 동영상을 자삭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너무 조회수가 높았다.
2. 조선일보가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주셨다.
3. 파업중에는 이용할 수 없는 방송 시설을 이용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보기에는 말 안 됩니다. 참으로 구차한 변명입니다. -_-

"조회수가 너무 높아서" 애써 올린 동영상을 삭제했다니요? 게다가 내노라 하는 아나운서가 다섯 명씩이나 출연하여 만든 '세계인에게 보내는 메세지'씩이나 되는 영상물을요? 살다보니 참말로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 싶습니다. 아마 방송 역사상으로도 세세년년 길이 남을 맹언이 아닐까싶어요.

게다가 "조선일보가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삭제를 했답니다. 아니, 그거 쪽 팔리게 뭐 하는 짓이냐고 했더니, 국내의 관심을 끌기 위한 거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관심이 너무 많아서 삭제를 했다구요? 그것도 조선일보가 관심을 가져준 게 부담이어서요?


MBC, 정말 부끄러운 건 당신들의 거짓말이다


몇 번을 읽어봐도 도대체 이게 뭔 소린지를 모르겠습니다. MBC 노조는 영상을 만들어 뿌린 이유가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널리널리 퍼뜨려달라고 여기저기 엄청 광고까지 했습니다. 메이킹 필름까지도 공개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일보까지 나서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데, 이런 판국에 이제 와서 조선일보 때문에 그 영상을 삭제했다?

이건 뭐, 시청자를 흑싸리 껍데기로 아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가이소리 헛소리인가싶습니다.  
내가 보기에 저거 몽땅 거짓말입니다. 얼척없는. 새빨간!


MBC 노동조합

다시 한 번 말합니다. MBC 노동조합,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MBC 노동조합이 하고 있는 저 말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정말로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건 우리집 강아지도 아는 일입니다.  

MBC 노동조합이 저 세계인에게 보내는 영상 메세지를 삭제한 이유는 단 하나, '부끄러워서'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쪽 팔려서 삭제한 것입니다. 아닌가요?

그렇다면 당신들은 비겁합니다. 내가 이 글을 굳이 쓰는 이유입니다.


MBC, 당신들은 끝까지 비겁했다


내가 이 건과 관련해 처음 쓴 글의 타이틀이 'MBC 노조, 부끄럽지 않은가?'였습니다. 패거리주의에 빠져 이성적인 판단 기능이 정지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의 부끄러운 영상이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영상 배포를 중지하고 폐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구요.

그러나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건 개그라는 둥, 국내용이라는 둥, 이게 뭐가 문제냐는 둥, 이것도 이해 못 하냐는 둥.. 온갖 설래발을 쳐대면서 널리 퍼뜨려달라고 부르대었습니다. 나중에는 메이킹 필름까지 공개하며 언론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한다고 했습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한 일 그 자체는 문제될 게 없습니다. 스스로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제 더 이상 허물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는 반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이같은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MBC 노동조합은 '자삭'이라는 황당한 결과를 앞에 두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남탓으로 돌리기에 바쁩니다. 이같은 후안무치는, 언제나 그렇듯이 바로 이들이 믿고 의지하는 최후의 보루 일등신문 조선일보 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조선일보는 빛이요 생명이다


조선일보, 나를 믿어라~

일등신문 조선일보, 나아를 믿어라~ (장기하 버전으로 읽어주세요)


조선일보는 이들에게 최악의 순간을 넘길 수 있는 비상 상비약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투여 즉시 효과 제대로인 만병 통치약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존재입니다.

조선일보는 어쩌면 이들에게 요술방망이와도 같습니다. 언제 어느 때 무슨 어려운 일이 닥쳐도 이 방망이 한 방이면 만사형통이니까요. 가히 빛이요 생명인 존재인 셈입니다.

나는 이 친구들이 조선일보에게 왜 아직까지도 감사패나 공로상을 주지 않는 건지 그게 늘 신기합니다. 이 정도 역할이면 그깟 감사패나 공로상 정도로도 부족하고, 아예 봉급을 통째로 조선일보에 갖다바쳐야 하는 게 아닌가싶어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 변명 글에 '부끄럽다'는 한 마디만 있었대도 이 포스팅 안 했습니다.

그런데, MBC 노동조합은 이제 희번득한 거짓말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짓이자, 부끄러움을 넘어선 나쁜 짓입니다. 그래서 그대들이 한 말 그대로를 그대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2009/03/08 00:04 2009/03/08 00:04
슬프다. 노무현 전 대통령 얘기다.

노 전 대통령이 '우리 기자들 참 큰일이다'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홈페이지에 글 하나만 올려도 '정치 재개한다'는 등의 말을 기자들이 자꾸 만들어내는 모양이다. 우리 기자들 참 큰 일이다는 저 짧은 말 속에 담긴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읽힌다. 공감한다. 내가 봐도 '우리 기자님들 참 큰일이다.' 문제 많다.

안타깝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참 힘들다'고 말한다. '감옥이 따로 없다'고 말한다. 이건 '푸념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래서다. 그 진심이 그대로 읽혀서 안타깝다. 대통령이 되지 않았어야 할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노무현

노무현의 사람사는 세상


웬 노무현이야?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통)의 홈페이지를 열어두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때 그걸 본 아이 엄마(이 방에는 거의 잘 안 들오신다)가 하는 말이다. 대통령 할 때는 가만히 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노통 홈페이지는 왜 또 드다보고 자빠졌느냐는 의미일 터다.

그럴만도 하다. 노통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나는 노무현이 대통령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다. 단순히 하나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보기에 노무현은 대통령 '깜'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_-;;

하지만 노무현은 보기좋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축하 인사를 남긴 다음, 이후 노 대통령에 대한 일체의 글쓰기를 접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라 여겼다. 그러니까 앞서 아이 엄마가 웬 노무현이야? 했던 건 이 지점과 관련해 나온 말이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이후 몇몇 곳에서 같이 일을 하자는 얘기가 있었다. 나는 가지 않았고, 아이 엄마는 이때부터 노무현의 '노' 자만 나와도 경끼(이거 오늘 어느 분이 블로그 댓글서 쓴 건데 금세 써먹는다)를 일으켰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는 말이 한창 유행할 때도 내가 들어야 했던 건 '이게 다 당신 때문이다'는 말이었다.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사연.. 있다.)

무튼, 이후 오랜 동안을 헤맸다.

'노무현은 아니다'는 내 판단이 틀렸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전에도 다른 블로그서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 찾아보니 이 블로그의 댓글 가운데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옮긴다. 옮기는 글은 왜 노무현 정권을 까느냐는 어떤 이의 지적에 답하고 있는 글이다.

현 정권에 대해 해부하고 지적하거나 한 적은 없는데요? 

현 정권이 들어서기 전,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였던 시절에 몇 가지 해부와 지적을 한 적은 있었습니다(아마 그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된 이후 적어도 2년 반 동안은 쥐죽은 듯이 지냈지요.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어쨌거나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이 되었고, 그렇다면 내 분석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게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 뭔가를 보여주겠다며 일을 추진하는 마당에 그걸 일일이 해부하면서 딴지 거는 짓이 천성적으로 맞지를 않아서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노 대통령에 대한 지적을 하려고 보따리 풀고 나선다면 누구못지않게 많은 이야기를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가는 방향만큼은 맞았다 싶기에(사실 그것도 노 대통령의 업적이라 보기는 힘들긴 하지만 - 근데 이 분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게 마치 자신의 업적이나 되는 듯이 하고 있지요. 암튼) 죽어(?!) 지내는 겁니다.

- http://blog.mintong.org/126#comment272


에니웨이, 오늘 노통의 글을 읽고 있자니, 예의 저 판단이 틀리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지금 봐도 '깜냥'은 아니었지 않느냐는 얘기다. 노통의 글을 함 보자.

다음은 노통이 당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연속극 끝났는데.." 라는 글의 전문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가 말을 건다.

“당신 조금 전에 뉴스에 나왔어요. ‘정치 하지마라.’ 이런 글 올린 모양이지요? 정치 재개하나? 이런 말도 나오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도 나오던데요?”

“현실정치 이야기 한마디도 안했는데? 정치는 무슨 정치요? 공연히 시비들이야.”

그랬더니 아내가 다시 받는다. “연속극하나 끝나고 새 연속극 하고 있는데, 자꾸 지난 연속극 주인공이 나오니 사람들이 짜증내는 거 아니겠어요?”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생각해 보니 나는 연속극에 나간 일이 없다.

“아니, 연속극에 나가기는 누가 나가요? 언론이 자꾸 나왔다고 쓰니까 사람들이 헷갈리는 거지.”

사실 그동안에도 글을 여러 개 올렸으나 현실 정치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하지 말란 법도 없지만 정치한다는 소리가 욕처럼 들려서 그랬다. 그런데도 내용에 불구하고 글만 올리면 정치 재개란다. 앞으로 문밖에 나가면 그것도 정치재개라 할 건가?

글을 안 쓰면 될 일이다. 그런데 홈페이지를 닫지 않는 한 회원들에게 인사도 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참 힘들다. 감옥이 따로 없다. 푸념이 아니다. 우리 기자들 참 큰일이다.


딱 어느 시골 촌부의 저녁상 물린 풍경이다. 정겨운.

노통은 확실히 이 시대 민중(서민대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그 점에선 충분히 점수를 받아 마땅한 분이다. 이 나라의 이른바 좌파 진보 세력이 그토록 갈망하는, 그러나 결국 이루지 못한, 민중과의 소통을 이루어낸 분이기에 그렇다.

이를 반영하듯 노통의 저 글에는 '노짱님'을 외치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다.

하나같이 노무현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에 감동과 찬사를 보내는 글들이다. 노통한테서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노통의 저 소탈함은 나 역시도 높은 점수를 주는 점이다. 아니다, 나 또한 반할 지경이다. 지지자들의 경우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대통령의 직이 과연 이같은 감성과 거기에 기반한 호오만으로 수행함직한 직일까?

여기에 이르면 내 판단은 달라진다. '아니오'가 커지는 지점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막 가자는 거지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등으로 대변되는 그의 감성적인 언어 퍼레이드다. 그리고 그 어름에서 나오는 것은 '노통은 대통령이 안 되는 게 더 나았다'는 판단이다.

이런 얘기 하면 으레 감히 우리 노통을 무시하냐는 등의 말이 나올 듯싶어 미리 말해두자면, 내 얘기는 그런 차원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노통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참 많은 일을 할 가능성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내가 보는 노통은 전투에서 눈앞의 적을 향해 달려드는 전사였다. 각 전투의 판세를 읽고 지휘하는 장군이나, 전쟁의 의미를 생각하는 통수권자가 아니었다.

노통은 퇴임 이후 기왕의 역대 대통령들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노통은 지금 그곳이 감옥과 같다고 토로하고 있다.


노무현

노무현의 사람사는 세상


왜 아니겠는가? 나는 노통의 저 심정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얼마나 답답하겠나싶다. 그래서 슬프다. 물어뜯고 싸우기로 날을 지새야 할 싸움닭(투계)이 싸워야 할 곳을 잃고 한갓 농사꾼의 집 마당에서 모이나 쪼고 있는 신세가 되어 있는 짝으로 보여서다.

그러니까 한낱 기자의 기사 하나에 '참 힘들다'를 되뇌고 있는 노통의 발언에서 보게 되는 것은 저 싸움닭 기질의 확인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에서 기대함직한 여유나 진중함, 그리고 포용력 따위가 아니고.

노통은 말한다. '회원들에게 인사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참 유치한 투정이다. 인사 하고 싶다면 그냥 인사 하면 된다. 그거 말리는 사람 아무도 없다. 기자가 뭐라고 한다고? 아니,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대통령을 했다는 이가 그따위 기자 하나를 품지 못한다는 말인가?

매사가 이런 식이다. 굳이 토로하지 않아도 될 자기 감정을 노통은 아무때나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하지만 세상에 자기 감정을 다 드러내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지위가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자기 감정을 다스리는 일에 엄격해져가게 된다. 자기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게 자기 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때문이다.

그러길래 이같은 감정의 토로는 한 집안의 가장조차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짜증이 날 때마다 그것을 드러내고, 작은 불만에도 그것을 못 견뎌하는 하는 가장이 있는 집안이 평화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회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직상의 상사나 오너가 사소한 일 하나에도 일희일비한다면 직원들이 좌불안석일 것임은 불문가지다. 하물며 한 나라의 통치자인 경우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나는 노통이 자기 할 말 하는 노통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 만큼은 이제 좀 그만 두었으면 한다. 내가 보기에 노통이 하는 불평불만의 90%는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노통의 '연속극' 얘기로 돌아가보자.

노통은 뭐라뭐라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고 있지만, 그러면서 '우리 기자님들 참 문제 많다'고 말하지만, 그렇기로 따지면 이 지점에서 노통은 문제가 더 많은 사람이다. 기자보다는, 그 문제 많은 기자 하나를 어찌 하지 못하고, 그 기자가 하는 기사 하나 가슴에 담지 못 하고 기어이 그걸 배설해야 직성이 풀려 하는, 기자 하나와 다툼을 벌이는 노통의 그 협량한 의식이 더 문제인 것이다.

기자가 뭐라 하건, 자신이 정치 안 하면 그만이다. 아무것도 아닌 문제다. 개새끼라는 욕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개새끼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데 있는 게 아니고, 내가 개새끼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대체 투덜이 스머프마냥 투덜거릴 이유도 비분강개할 까닭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
이런 사람이 한 나라를 책임지는 직의 대통령이었거니 싶어서다.  





<덧붙이는글> 올블에 글이 수집된 후에 실시간글, 라이브글, 전체글 등에서 위의 글이 사라져버렸는데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시스템의 문제인가싶기도 하고. 혹시 올블 관계자 분 가운데 이 글 보시는 분 있다면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려봅니다.  
<덧2> 지금은 정상화되었네요. 왜 그런 현상이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갑자기 휙~ 사라져서요.
 
2009/03/07 10:32 2009/03/07 10:32

박찬종

박찬종 올바른사람들 공동대표

나 박찬종은 선배변호사로서 나의원에게 말하고자 한다.
나의원이 발의한 사이버모욕죄를 신설한 정보통신보호법개정안을 스스로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형법 311조의 모욕죄는 법정형이 징역 1년 이하이고, 반드시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이다. 신설할 사이버모욕죄는 법정형이 징역 2년 이하이고 당사자의 고소 없이도 입건, 수사, 기소, 처벌이 가능하도록 비친고죄로 규정하고 있다. 형법상의 모욕죄와 사이버모욕죄는 보호해야할 법률상의 이익 즉, 모욕당한 사람을 보호한다는 점은 똑같다.

사이버모욕죄 신설의 명분은 모욕의 글은 대부분 익명이라서 피고소인(가해자)을 특정하기가 어려워 비친고죄로 규정하여 처벌하려는 것이다. 이는 허황된 논리다. 가해자가 분명하지 않아도 범죄사실 즉, 모욕당한 사실만 특정하여 형법상의 모욕죄로 고소하면 수사기관이 이를 밝히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욕행위를 처벌하려는 의사가 있으면 형법상의 모욕죄를 적용하여 고소절차를 밟으면 된다.

2. 비친고죄인 사이버모욕죄를 신설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라.
모욕죄의 정형(定型)은 단순한 모욕의 글. 예컨대 사실을 적시하지 않은 ‘나쁜x, 개xx’와 같은 욕설이다. 그러나 사이버모욕죄가 시행되면 수사기관은 당사자의 고소 없이도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 정부여당소속인사들에 대한 단순한 모욕의 글 외에도 대안을 담은 비판의 글마저 입건, 수사, 기소가 가능해진다.

비판의 글도 비판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 최고의 모욕행위는 ‘비판’이다. 정부여당 통제아래의 검찰, 경찰이 사이버상의 비판의 글을 마구잡이로 처벌하려고 하는 분위기를 상상해보라. 이게 법치라고 할 수 있겠는가?

3. 나아가 오프라인에서의 비판의 글도 사이버상에 옮겨 실으면 곧바로 처벌의 대상이 될 것이다. 결국 모든 비판의 글은 원천봉쇄 될 수밖에 없고 여기에 저항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은 전과자의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인터넷의 비판공간은 블라인드 처리 되거나 폐쇄하게 되고 오프라인에서의 비판자의 입과 붓을 틀어막고 꺾게 될 것이다.

4. 사이버모욕죄가 있는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 한국이 두 번째 국가의 영예(?)를 안으려 하는가?

나의원은 야당 할 날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여당만 계속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나의원이 사이버모욕죄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서 철퇴를 맞을 날이 올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나의원은 스스로 법률가의 양심으로 돌아가서 철회를 결단하라.

법률가의 양심은 하나이지 두 개일 수는 없다.

2009. 3.5
올바른사람들 공동대표 박찬종
 
 

<덧붙이는글>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2009/03/06 13:09 2009/03/06 13:09

어제 몇몇 블로거가 조선일보의 사설을 문제 삼았다. 'MBC 귀족 노조 '대한민국은 독재국가'라고 세계에 외치다' 라는 사설인데, 비판의 요지는 저 사설이 너무 편향적이고, 유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블로거가 링크해준 조선일보의 저 '유치하다'는 사설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나는 조선일보가 왜 일등신문일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한번 절감했다.


조선일보가 일등신문인 이유

일등신문 조선일보

일등신문 조선일보



조선일보의 저 사설은 분명하다. 하고싶은 말을 우회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전하고 있다. 무엇을 더 바랄까? 이건 유치한 게 아니다.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현학질을 하지 않는다는 말과 통한다.

이른바 진보매체라고 불리는 신문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이 현학질이다. 군더더기 없이 곧장 치고 들어가야 할 지점에서도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내보이려 먼저 안달이다. 그래서 기어이 한두마디를 더한 다음에야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를 내보이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부박한 수준이다. 조선일보 기자가 저들보다 배운 게 떨어지고 든 게 없어서 아는 체 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한겨레 계열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케이스가 <씨네21>이다. 얼마 전에 덜 떨어진 어떤 친구가 학창 시절에 그거 한 권쯤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 않으면 의식있는 대학생 축에 끼지 못했다고 말한 바로 그 잡지다(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서 링크는 생략한다).

'지적 허영' - <씨네21>이 판 상품이다. 이 잡지는 온갖 현학질로 가득하다. 이들은 영화 하나에서 인류의 2500년 정신사를 녹이고, 공연 하나에 세상의 모든 이데올로기를 담아 내놓는다. 이들에게는 포스트모던이 일상이고 라깡과 들뢰즈가 친구이자 간식꺼리다. 마치 누가 누가 잘 났나를 겨루는 듯 지적 허영이 현란하게 춤을 춘다.

이들의 글은 온갖 기교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이 정도로 글을 갖고 놀아~' 하는 투다. 그러나 글에 정작 담겨 있어야 하는 독자에의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딱 학부 2학년 수준의 지적 허영만이 넘쳐날 뿐이다.

어딘가에서 보니 한겨레신문이 어렵다고 한다. 경향신문은 봉급이 반토막이 났다고 한다. 오마이뉴스는 오늘 내일 하고, 프레시안은 이미 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넜다고도 한다.

내가 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어렵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자주 하는 말이지만, 바로 위에 나열한 저 신문들을 보고 있자면 때로 숨이 막히곤 한다. 특히 사설이나 칼럼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초등학생에게 지면을 맡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온다.

왜 이럴까 싶어서다. 논리는 없고 주장만이 넘쳐나는 때문이다. 주장만 넘쳐난다면 모를까 듣보기에 역겨운 자기자랑까지가 있는 지경이면 두 번 보기가 역겨워진다. 정신 제대로 박힌 이 가운데 누가 이런 신문을 제돈 주고 사서 보랴 싶다.

이런 얘기 하면 으레 하는 말이 돈 타령이고 경품 타령이다. 돈이 없어 부자 신문들처럼 경품을 뿌리지 못하는 때문이라는 변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본질을 짚고 있는 말은 아니다.

본질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봐도 부족한 그 본질을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못난이들이 항용 그렇듯이 이들 역시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말도 안 되는 어거지를 부리면서도 그것이 맞다고 우기는 양이 딱 저 못난이들의 모습이다. 

세상에 천지 삐까리로 널린 게 잘 난 사람들이다. 당장 조선일보만 봐도 그렇다. 얼마나 잘난 사람들인가? 이 말 하면 또 헷소리 삘삘 해대는 사람들 있겠지만, 어떤 걸로 비교해봐도 그들은 잘난 사람들인 거 맞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 다음이다. 한번 잘 생각해보라. 그런 잘 난 조선일보가 사설이나 칼럼, 기사들에서 자기 잘 난 척을 하고 있던가?

뭐라고 답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른바 진보 매체들에서 하듯이 그렇게 밥 먹듯이, 밥맛으로 잘난 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독자의 수준에 눈높이를 낮추는 모습이다. 허두에 놓인 저 사설만 해도 그렇다. 어깨에 힘 빼고 확실하게 독자의 수준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군더더기 하나 없이 확실하게 전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설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사설은 자기 주장을 펼치라고 있는 지면이다. 유치하거나 말거나를 따지는 자리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이건 유치한 게 아니다. 여기서 유치함은 목표를 위해 차용한 하나의 수단인 때문이다.

진보매체들은 정확히 이 반대다. 목표와 수단이 도치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은 죽었다 깨나도 유치할 수 없다. 고결해야 한다. 여기서는 자신의 고결함이 목표가 되고 정작 목표여야 할 독자에의 설득은 다만 자신을 드높이는 한갓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유치해도 되는 데서는 한사코 고결함을 챙기는 대신, 유치하지 않아야 하는 지점에서는 한없이 유치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만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같은 웃기잡는 짓을 하는 데는 독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이들 독자들은 자기들만 만족시켜주기를 원한다. 자기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들이 저 신문과 자기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못 견뎌 한다. 이들에게는 다름은 곧 악인 때문이다(저 신문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 저 신문으로서는 지금 이대로 충분히 족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독자가 아니고 이미 독자인 이들의 지지다. 왜냐면 그들이 없다면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지위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언감생심, 새로운 독자에의 배려는 감히 꿈도 꾸지 못 할 일이다. 이른바 악순환의 연속인 셈이다.

그러나 이래서는 답이 안 나온다. 시쳇말로 사람이 못 났으면 솔직하기라도 해야 한다. 지금 이른바 진보 매체에 필요한 것은 이 솔직함이다.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자세다. 수준이 바닥인 게 뻔히 보이는 마당에 나 잘 났다고 백 날 떠들어봐야 속 보이는 짓일 뿐이다. 딱 그 수준에 있는 어리석은 몇몇 중생들 빼고 나면 그런 흰소리에 넘어갈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잘 났다고 헷소리 늘어놓을 지면과 시간 있다면, 그 시간에 단 한 사람이라도 붙들고 그 앞에 몸을 굽히고 함께 가자 해야 하고, 그 지면에서 독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어줍잖게 누굴 가르치려 들지 말고 배우려 해야 한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세살 먹은 아이한테서도 배울 건 있는 법이다.

조선일보를 이기고싶은가? 그렇다면 일등신문 조선일보한테서 배울 일이다. 일등, 그거 돈만으로 되는 거 아니다.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내어 일등 잘못하는 것 찾아 헤매지 말고(남의 잘못 지적하는 것쯤은 2살만 먹어도 할 줄 아는 일이다), 배워야 할 게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걸 챙겨야 한다. 잘못한 거 찾는다고 해서 내한테 보탬 될 거 하나도 없다. 비판하다 닮는다는 말이 있다. 오히려 그 짝만 날 뿐이다.  

틀린 걸 맞았다고 우기지 말고, 다른 걸 악으로 치부하지 말고, 틀린 건 틀렸다고 하고 다른 건 다른 걸로 봐야 한다. 잠시 잠깐은 그게 힘들다 여겨지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게 이기는 길이다.





 

2009/03/05 10:48 2009/03/05 10:48

지키지 못할 약속 그 세 번째

새해 들면서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블로그에 하루에 하나씩 포스팅을 하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습니다. 지키지 못 할 것이라 여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업무의 특성상 1년에 몇 번은 지방 출장을 가는 일이 생기는데, 이때 과연 블로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을 살다보면 예상치 않은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 올 한 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연례 행사로 치르는 독한 계절병입니다. 계절이 한번 바뀔 때마다 이상하게 한번씩 독하게 앓곤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때론 거의 기절할 정도로 심합니다. 어제부터 몸이 이상합니다. 지난 며칠 동안 무리를 한 터라 계절병이라 단정하긴 이르지만, 확실히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몸이 아프니 블로그도 아프다

더 하여 오늘은 블로그까지 말썽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태에서 뭔가를 이것저것 만졌고, 그 이후는 어떻게 된 건지를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플러그인까지 사라지고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백업본까지 사라지고 안 보이구요. 문제가 없을 때는 백업도 착실하게 잘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나서 찾아보면 꼭 그때는 백업에도 문제가 있곤 합니다.  

무튼, 어제 날짜로 텍스트큐브 rc2 버전이 발표된 터라 일단 판갈이를 하고, 최대한 원 상태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 작업을 시작하면서 가까스로 마감시한에 맞춰 제목만 작성해둔 이 포스팅을 올립니다. 편법인 셈입니다.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뭐 내 블로그니까. 무엇보다 약속은 약속인 거니까.. 하고 생각하렵니다.  -_-

사나이는 바꾸지 않는다

다음 그림은 이번에 중학교에 들어간 얼라 블로그서 업어온 그림입니다.
이 친구도 뭔가 마음을 먹긴 먹은 모양입니다. 뉘집 아들 아니랄까봐 살짝 불안도 한 모양이구요. ^^



약속

니나 잘 하세요~

 
2009/03/04 23:50 2009/03/04 23:50

박찬종 올바른 사람들 공동대표가 다시 '여의도 폭파'를 주문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의원들께'라는 성명서를 통해서다. 성명서에서 박 대표는 이른바 '미디어법' 파동과 관련해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헌법 46조의 국익우선 양심직무의 의무를 좇아 국회의원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회의원의 자율권은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국회의원이라면 이 '자율권을 짖밟는 자'들에게 당당히 맞서야 한다는 논리다. 박 대표는 이번 미디어법 논란에서 의원 개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패거리주의에 빠진 한나라당 의원들이 우리 안에 갇힌 전사,  똘마니로 전락한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여의도

왜 우리는 여의도를 폭파해야 하는가



박 대표의 이같은 주장은 지난 해 그가 발기한 '올바른 사람들'의 취지문, "왜 여의도를 폭파해야 하는가"의 연장선에 있다. 지난 87년의 6.29. 선언이후 절차적 형식적 민주화는 한 단계 이루어졌으나, 민주화의 내실은 갈수록 퇴행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붕당정치에 빠진 국회의원들이 헌법적 규범을 철저히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국회를 소수기득권자들이 지배하는 부패정당, 반국민적 의원후보공천, 의원의 자율권이 훼손 능멸된 난장판 국회로 만들어 민주화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보아 박 대표의 주장에 틀린 말은 없다. 그러나 성명서를 읽는 기분은 도무지 공허하기만 하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말이다. 그렇다. 박찬종의 말은 틀린 데는 없지만, 넌센스 - 말 그대로 뜬구름 잡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단언컨대, 박 대표의 저 말에 공감하고 움직일 국회의원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박 대표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박 대표는 이른바 '독불장군'으로 실패한 가장 전형적인 정치인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인이 자신의 길을 좇으라 하는데, 실패 확률 100%인 그 길에 따라나설 국회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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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우리 정치의 현실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박 대표 자신이 바로 이 현실의 산 증인이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엄연한 정치 현실을 외면한 곳에서 하는 정치적 주장이란 그야말로 넌센스다. 그렇다면 박 대표는 왜 이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변> 박찬종의 글을 끌어다가 여기까지 쓰고, 몸이 살짝 으슬으슬해오는 터라 일단 접었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인나서 글을 계속할 요량이었는데, 다시 일어난 지금(새벽 2시반이다) 몸이 천근만근이다. 어깨는 또 왜 이렇게 아프지? 요 며칠 좀 무리하게 강행군을 한 게 원인인 듯싶다.  
박찬종의 메일링을 받고 뭔가 할 말이 있어 글을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안 난다. 뭘 쓰려 했는지조차가 의식에 없다. 흐리멍텅.. 생각이 모두어지지 않는다. 의식이 정신을 지배한다는 말 말짱 헛소리다. 몸이 정신의 주인이다. 그리고 이 몸이 아무래도 며칠 고생을 좀 시키지싶다. 일단, 여기까지.

 
다음은 박찬종 '올바른 사람들 공동대표'가 '한나라당 의원들께' 보내는 성명서 전문이다.

성명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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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21:46 2009/03/03 21:4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 세상 사람들은 나를 특별한 행운아라고 말한다. 나 역시 거기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지나온 행로를 불평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고난과 노력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75년 동안의 내 삶을 통해 진정으로 즐거웠던 때는 단 한 달도 없었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나를 지탱하게 했던 것은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서 계속하여 밀어 올리려는 시도였다.  

1. 우수한 사람이면서도 무슨 일이든 즉석에서 적당히 해치우지 못 하고 늘 심사숙고를 거듭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조급한 우리를 자주 답답하게 만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즉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상의 일은 그렇게 침착하게 숙고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성취되는 법이다.  

1. 고대인은 위대한 뜻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 손으로 실현하였다. 반면에 우리 근대인은 큰 뜻은 갖고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자기 생각대로 힘차고 생생하게 창작하는 일은 거의 없다.

1. 큰 결과가 나타나는 곳에는 늘 그 바탕에 큰 원인이 잠재해 있다.

1. 순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자세로 항상 현재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상태, 어느 순간에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영원한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1. 젊은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젊음, 익살과 의존심, 그리고 성격이나 결점, 또는 변덕 등등이지, 그녀의 이성이 아니다.

물론 그녀의 지성이 빛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경할 것이며, 그녀는 우리에게 매우 귀중하게 보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지성은 우리를 붙잡아 두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지성이 우리를 매혹하거나 정열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1. 위대한 작품이란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순수한 창작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위 환경은 이제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현대의 재능 있는 작가들은 모두가 대중 앞의 쟁반 위에 놓여 있는 신세다.

여기저기서 발간되는 비평적 신문 잡지의 수는 하루에도 수 십 종을 헤아린다. 그 결과 대중들 사이의 풍설만이 난무하고, 이로 인해 건전한 작품이 나오지 못한다. 현대 저널리즘은 그 대부분이 부정적이고 사이비 미학적인 중상을 일삼는다. 하지만 여기서도 일종의 미숙한 문화가 대중 사이에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악성의 짙은 안개이자 쏟아지는 독소다. 이것은 창작력이라는 나무의 푸른 잎은 물론이고 깊이 박혀 있는 고갱이와 섬유질까지 파괴해 버린다.

1. 시인은 모든 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해야 한다. 외부에서 오는 것은 모두 시인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이다.

1. 세상 사람들에게 도를 넘지 않도록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권세가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는 못 견뎌 하고, 군중은 점진적인 개혁을 기대하거나 절도 있는 상태에 머무르지 못 한다.

인류가 완전하다면 완전한 사회 상태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재와 같아서는 인류는 영원히 동요를 계속할 뿐이다.  한 편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반해 다른 한 편에서는 안이한 생활에 젖어 있다. 이기주의와 시샘이 악마와 같은 장난을 계속하며 당파간의 분쟁은 끝이 없다.

어떤 경우든 가장 현명한 일은 각자가 타고난 직업과 터득해야 할 일에 힘을 쏟고,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의 직분을 행하는 걸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구두장이는 구두 곁에 머물고, 농군은 쟁기 뒤에 있으며, 지도자는 통치하는 요령을 알고 있어야 한다.

1. 틀에 박힌다는 것은 늘 완성만을 바라는 것이며, 제작하는 과정 그 자체는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진실로 위대한 작가의 최고 기쁨은 제작하는 그 과정에 있다.

1.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예술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작품의 완성으로 얻게 될 이익만을 염두에 두게된다. 그렇지만 그런 세속적인 목적과 성향으로는 어떤 위대한 것도 성취되지 않는다.  

1. 작가의 문체는 대개 그의 내적 생활을 보여주는 충실한 거울이다. 명료한 문체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마음이 청결해야 하며, 웅장한 문체를 구사하고 싶은 사람은 우선 웅장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1. 뭔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가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

1.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의 수 역시 무수히 많다.
그들을 유형에 따라 분류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괴테와의 대화

괴테와의 대화


첫째는 무지하여 적대자가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나의 삶을 매우 우울하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이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내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획득한 행복과 지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나의 명성을 꼬집고 나를 없애고싶어한다. 내가 불행하고 비참하게 되어야만 직성이 풀릴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까닭에 적이 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는 재능이 풍부한 사람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나로 인해 그 자신이 빛을 보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이를 참지 못한다.

세번째는 이치를 따져서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 역시 한 인간이고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결점과 약점이 없을 수가 없다. 이것은 내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면할 수 없는 결점과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교양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인격의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적대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내가 시정한 결점을 두고 자주 나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은 별로 해로울 게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이미 수십 리를 가고 난 뒤에 대고 활을 쏘아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미 끝낸 작품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거기 머물러 연연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과 다른 뭔가 새로운 걸 생각하는 때문이다.

네번째는 사고 방식과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적들이다.

같은 나무에 달린 이파리들 가운데도 아주 똑같이 닮은 것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신념과 사고 방식이 딱 들어맞게 일치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사정이 이런대도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그렇게 많다는 것보다 오히려 친구와 지지자들이 이만큼이나 많다는 사실이 나는 더 놀랍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나를 반대하는 이들이 뭐라건 거의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관심있어 하고 모든 걸 결부시켜 생각하는 성공 같은 것에도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조용히 나 자신의 길을 나아갈 뿐이다.

1. 75살 쯤 되고 보면 때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는 때도 나는 전혀 불안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때문이다. 정신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계속하여 활동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저 태양과 같다. 우리 눈에는 태양이 서산으로 가라앉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태양은 결코 가라앉는 것이 아니며 계속해서 빛나고 있다.

1. 세상에서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명석한 두뇌를 가져야 하고, 둘째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아야 한다.

1. 학문을 함에 있어 어느 한 종파에 속하게 되면 그 즉시 자유롭고 성실한 해석은 불가능해진다. (중략) 단 하나의 배타적인 경향성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이론가의 세계관은 순수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 대상이 자연스럽고 순수한 모습으로 보일 수가 없다.  

1. 부당한 편견은 관찰에 방해가 될 뿐이지만, 이와 달리 정당한 지식은 오히려 관찰에 도움을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우리는 보고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진리다.

전문적인 음악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면서 모든 악기와 그 개별적인 음향을 식별하여 들을 수 있지만 문외한들은 전체의 집단적인 소리에 파묻히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초록빛 풀밭을 즐기기만 하는 사람은 단지 그 풀밭의 초록색을 평면적으로 볼 따름이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식물학자는 거기서 제각기 다른 수많은 초록의 세밀한 부분을 보게 된다.

1. 사람이란 물 위에 떠 있는 단지들과 같이 서로 부딪치며 지낸다. 사람은 아침에 가장 현명하고 가장 조심스럽다. 조심성은 소극적인 한편으로 현명한 것이기도 하다. 바보는 조심성이라는 것 것 자체를 아예 모른다.

1.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군주에게 그것을 하지 말라고 충고해서는 안 된다.

1. 여기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것이다. 내가 그것을 인생에서 취했거나 아니면 책에서 취했거나 간에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문제는 그것을 어디서 취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 자신이 어떻게 적절히 구사했는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1. 바이런은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열정에 이끌려서 멋대로 나날을 살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도 못했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자신은 온갖 짓을 다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허용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을 파멸시키고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을 뿐이다.

1. 단지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좋은 걸 나쁘다고 말한다면 그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 올바른 영향을 주고자 하는 사람을 결코 비방해서는 안된다. 부당한 일이 있어도 거기에 개의치 말고 오직 선만을 행해야 한다. 파괴하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인류가 순수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뭔가를 건설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 엄격함으로도 많은 효과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사랑으로는 더욱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통찰력과 공정성으로 개인적인 차별을 두지 않는 일이다.

1. 나라의 불행은 사람들이 서로 즐겁게 살려고 하지 않고, 누구나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는 경우에 생긴다. 예술계의 불행은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즐기려 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새로운 걸 만들어 내고자 하는 데 있다. 기존의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진작시키려 하기 보다, 각자는 자기 스스로가 얼른 동일한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려고만 하고 있다.

사회 전체를 위해 투신하려는 진지한 태도도 없고, 사회 전체를 위해서 무엇인가 공헌하고자 하는 의향도 없으며, 다만 자기 자신을 사람들 눈에 띄게 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세상에 선전하려고만 애쓰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잘못된 경향은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사람들은 최근의 대가를 모방하는 듯 하면서도, 대가들이 연주 곡목을 고르는 경우 청중에게 순수한 음악적인 즐거움을 주기 위해 선곡을 하는 반면, 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연주 솜씨를 청중에게 뽐내기 위한 곡을 선택한다.

자신을 화려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인물은 여러 곳에 있으나, 전체를 위하거나 대의를 위해 자신을 억제하려는 성실한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게 이즈음의 현실이다. 이런 사정으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엉터리 창작 활동에 발을 들여 놓는다.  

1. 결국 무슨 일에 종사하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에 자신을 제한하고 고립시키는 일이다.

1. 사람이 세상의 여론에 대해서 쉬이 불리한 입장에 빠지게 된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는 이전에 한번도 민중에 반대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전혀 민중의 벗이 아니다.  물론 나는 혁명을 부르짖는 저 천민의 벗은 결코 아니다.

이 무리는 약탈과 살인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공공의 복지라는 허위적인 간판을 내건다. 그리고 그것을 방패 삼아 비열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눈을 붉히고 있다.

나는 이같은 폭도의 편은 결코 아니다. 루이 15세의 편은 더욱 아니다. 나는 어떤 폭력적 혁명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또한 그에 못지않은 파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혁명을 행하는 사람이나 그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나는 증오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민중의 벗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개혁이라면 나는 그것을 언제나 환영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한 것처럼 그것이 폭력적이거나 돌발적인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그래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1. 사실 나를 정당하게 보았다 싶은 사람은 이름난 사람들 가운데는 거의 없다. <베르테르의 슬픔>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들은 여러가지 비난을 퍼부었다. 만일 내가 그들이 비난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삭제하였다면, 그 책은 단 한 줄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비난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관적인 몇몇 사람들의 비판이란, 설사 그들이 아무리 유명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대중에 의해 정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우수한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며, 그런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한 줄의 글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1. 비평가나 창작가를 막론하고 개성이 없다는 것이 최근의 문학에 나타나는 모든 병폐의 원인이다. 특히 평론에 있어 이러한 결함이 심하게 나타나서 해를 끼치고 있다. 비평가는 진리 대신에 오히려 그릇된 것을 전파하며, 나이브한 진리를 설파한다. 그래서 우리를 정화할 위대한 진리마저 빼앗고 있다.

1.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결과가 있다. 그러나 현명하고 정당한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잘못한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항상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모두 그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서적상과 상담을 하다 실패한 적이 있다. 나는 몹시 고심하였는데, 지금은 사정이 변해 만일 그때 내가 그 상담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더 큰 실수를 하게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이는 일생에 몇 번이고 계속되는 일이다.


책 소개

책 소개 페이지


1. 충고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가장 현명한 일이 실패하기도 하고, 가장 시덥잖은 일이 좋은 결과를 거두는 수도 있다. 이렇듯 조언이란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조언을 바라는 사람은 어리석고, 조언을 하는 사람은 주제넘는다 할 것이다.  

조언은 협력할 의사가 있는 일에 대해서만 하는 것이 좋다. 다른 누군가가 내게 충고를 바란다면, 나로서는 기꺼이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단, 그가 나의 조언에 기대어 행동하지 않겠다는 조건 아래서만 할 것이다.

1. 노래를 배우려 할 때, 자기 목청에 맞는 소리를 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목청과는 다른 소리를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어떤 소리도 자유자재로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세계를 자신의 손에 쥐고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만 무궁무진 늘 새로울 수 있다. 주관적인 감정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이내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이 이내 바닥을 드러내는 때문이다.

1. 사람이 고립되어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고립된 상태에서 일하는 건 최악이다. 뭔가를 제대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협력과 자극이 절대 필요하다.

1. 독학으로 공부한 것을 두고 반드시 칭찬만 할 일은 아니다. 거기에는 오히려 나쁜 점이 더 많을 수 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자신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우수한 작품이나 훌륭한 스승을 따라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 육성하도록 해야 한다. 최근 읽은 모짜르트의 편지에 이런 귀절이 있다. 곡을 만들어 보낸 어느 남작에게 보내는 글이다.

"당신과 같이 예술을 애호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두 가지의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독창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것을 베껴내는 게 그 하나고, 독창적인 것이 있는 경우에도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게 그 둘입니다."

얼마나 기발한 말인가.
모짜르트가 음악에 대해 하고 있는 이 말은 다른 모든 예술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다. 

1. 사람은 인생에서 잘못된 경향으로 인해 많은 낭패를 겪는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될 때까지는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1. 재능이 없으면서도 창작에 종사하려는 사람들이나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기술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런 미망에 사로잡히기가 쉽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문화가 대단히 널리 보급되어 있고, 젊은이들은 바로 그 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걸 마치 자신의 소유물로 여긴다. 또한 그것을 자기 것인 양 표현한다. 하지만 그들이 시대로부터 받은 것을 반환하고 나면 그들에게 남는 건 거의 없다. 그들은 마치 분수와 같아서, 끌어온 물을 한참 동안은 내뿜겠지만, 끌어들인 물이 동이 나면 그것은 이내 중단되어버린다.

1. 문학이란 항해와 같은 것이다. 돛이 바람을 가득 안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정도 노를 저어 해안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발단 같은 것에는 아예 마음을 두지 않는다. 3막에 가서야 마침내 거둘 수 있는 효과를 제 1막에서 당장 일어나도록 하고싶어한다.

1. 우리는 각자 하나의 집합체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적다. 우리 모두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나 혹은 동 시대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위대한 천재라고 해도 모든 걸 자기 내부에서만 얻으려 한다면 그에게서 큰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1. 진리는 곧잘 다이아몬드에 비유된다.
다이아몬드는 한 쪽으로만 빛을 내지 않는다. 여러 면을 통해서 빛을 내는 것이다.
 



 
<괴테와의 대화> 소개
독일 루에 강변 소도시 빈젠에서 태어난 에커만은 1823년 독일 동부 지역의 바이마르에 살던 괴테를 찾는다. 그는 괴테 집 근처에 살면서 9년 동안 괴테와 1000번 정도의 대화를 나눴고 이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는 이를 토대로 책으로 정리해 괴테 사후인 1836년 제1부와 제2부를, 1848년 제3부를 출간했다.

<덧붙이는글> 어제 밤샘을 하고 오늘 거의 하루종일 외근은 한 터라, 집에 들어오자 마자 씻지도 못 하고 나가 떨어졌습니다. 인났더니, 자정. 마감시한에 쫓겨 새로운 포스팅을 할 새가 없어 이 글로 대신합니다.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밑줄 긋기한 대목들입니다. 좀더 요약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일이어서 그냥 올립니다.  
 
2009/03/02 23:55 2009/03/02 23:55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일부러 시간을 내어 포스팅해주는 그 정도의 성의면 성의를 다했다고 봐도 좋습니다) 앰비씨(MBC) 노조가 만들어서 뿌린 세계인에게 보내는 메세지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근거가 없다느니, 이건 개그였다느니 하는 딴소리를 계속하는 분들이 없지 않기에 보론 겸 하여 한번 더 지적해둡니다.


민주주의가 위태롭다는 김정근 아나운서의 절규가 뇌리에 박힙니다. 언론노조가 왜 파업을 해야 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다시 한번 귀기울여 봐야 합니다. 널리널리 알려주세요.


이 동영상을 널리 퍼뜨려달라는 어느 블로거의 호소입니다. 절절함이 묻어나고 있는 글이지만, 호소력은 별로입니다. '뇌리에 박힌다'는 저 절규가 도무지 뇌리에 박히지를 않아서입니다. '언론노조가 왜 파업을 해야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귀를 기울이라 말하고 있지만, 기울이는 귀에 들리는 소리는 기껏해야 넌센스 - 곧 헛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새빨간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최현정 아나운서는 말합니다. "이 악법은 온 국민의 분노를 부르고 있고, 대한민국은 언론 자유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고. - 거짓말입니다. '온 국민의 분노' 아닙니다.

방현주 아나운서는 "13억의 중국인들"을 불러 세운 다음, 느닷없이 '고흥길'에게 전화를 하라고 외칩니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 헛소리입니다.

권희진 아나운서는 '조중동과 방송의 결합'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한나라당을 향해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고 말합니다. - 민주주의의 대재앙?

이동희 아나운서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많은 단어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민주주의 상식 소통 언론자유...." 세상에 이런 일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술을 더 뜹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시계도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나아가서는 "역사가 후퇴하고 다시 독재정권이 부활했다"고 외칩니다. 님,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 것 맞지요?

하지은 아나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 타령입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그런데 그게 왜 거짓말인지는 자기도 모르겠답니다. 그래서 '난데없이' 내뱉는 말이 '겐세이'입니다. 하지은 아나운서가 듣고싶은 말은 '스미마센'이었답니다. -_-

마지막으로 어느 블로거의 '뇌리에 박힌다'는 김정근 아나운서의 '절규'입니다. 원판으로 보겠습니다.


-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저희는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 여러분도 동참해 주십시오.
- ‘언론장악 저지투쟁’


'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으로 시작되는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을 들먹였던 까닭입니다. 여기 어디에 "언론노조가 왜 파업을 해야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가 있다는 말인가요? 

다시 말하지만, MBC 노조가 만들어서 동네방네 뿌리고 다니는 저 동영상, 수준 이하입니다. 쓰레기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MBC라는 지위재를 등에 업고 벌인 한 바탕의 공갈 사기극입니다. 한심한.

이 동영상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동영상에서 엿보이는 독한 '기생의식'입니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이 친구들은 늘 어딘가에 빌붙으려 합니다. 이 동영상에도 이같은 인식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신의 문제를 자기 힘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늘 다른 누군가가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 누군가는 항상 국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계인이고 지구인입니다. 영낙없는 기생질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동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엠비시 노조가 만든 영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접근하는 관점 자체가 주체적입니다. 이 동영상은 각국 정상을 자기 식으로 요리합니다. 각국 정상으로 하여금 기획자가 하고싶은 말을 하게 합니다. 

반면에 엠비시 노조가 만든 동영상은 어딘가에 빌붙고 있습니다. 각국에 자신들을 좀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그것도 자기 나라를 언론자유가 말살된 독재국가라고 비하하면서입니다. 최소한의 자존이나 주체성도 찾아볼 수 없는 앵벌이 짓입니다.

왜일까요? 한 개인이 하룻밤을 새워 만든 동영상에도 최소한의 자존과 주체성이 있는 터에 이들은 왜 이같이 어딘가에 빌붙는 동영상밖에는 만들 수 없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은 도대체 뭔가를 자기 힘으로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딘가에 기대어 늘 빌어먹고만 살아온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 물어보고싶습니다.

엠비씨 아나운서님들은 조중동의 독과점을 비난합니다. 그렇다면 왜 엠비씨만은 그런 독점적 지위를 누려야 하는 걸까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의 족속'이 아니라면, 님들이 누리고 있는 그 독점적 지위가 어떤 이유에서 필요한 건지는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듣고싶습니다. 그러니 공중파를 오직 님들만이 계속 독점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세요. 잉어 한 마리씩 들고 서서 하는 그 비린내 나는 '쌩쑈' 말고, 선전전이라는 미명하에 자존마저 내팽개친 채 벌이는 그 징징 짜는 '앵벌이 짓' 말고 님들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들려주세요.




<덧붙이는글> 굳이 애써 새로운 글 작성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게 있다면, 그걸 이 포스팅에 그냥 트랙백으로만 걸어주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덧2> 오늘은 마침 삼일절입니다. 기생질을 했다면 부끄러워해도 좋은 날입니다.
2009/03/01 19:42 2009/03/01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