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에 해당되는 글 43

  1. 2009/04/08 블로고스피어와 G20 정상회담 4
  2. 2009/04/08 노무현의 승부수는 항상 승리했다 29
  3. 2009/04/08 허원제, 중고교에 계도신문 배포하겠다고? 4
  4. 2009/04/07 노무현, 참 쪼잔한 우리의 전 대통령 25
  5. 2009/04/07 장자연리스트, 조선일보는 힘이 쎄다! 16
  6. 2009/04/06 조선일보 사장, 장자연리스트와 관련 없다! 69
  7. 2009/04/05 스땅달의 <적과 흑> 중에서
  8. 2009/04/04 김한길의 <눈뜨면 없어라> 15
  9. 2009/04/03 하민혁을 찾는 사람들 26
  10. 2009/04/03 조중동은 똥개다 진보언론은 똥개만도 못 하다 33
  11. 2009/04/02 고재열, 한국은 '저널리스트의 킬링필드'다? 32
  12. 2009/04/02 이쪽으로 처리해주세요. 문자 주의하세요! 6
  13. 2009/04/01 진보-개혁논쟁, 손석춘 김동민 그리고 노무현 10
블로그에 글을 써내려가다보면 이건 아니다 싶을 때가 있다. 뭔가 할 말이 있기는 한데,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때다. 이런 경우 쓰면서도 그런 거 느낀다. '아, 이거 이 말을 쓰면 틀림없이 한 방 맞지..' 하는. -_

이같은 예감은 거의 한번도 틀리지 않는다. 우려한 부분에서 누군가는 정확히 치고 들어온다.[footnote]나는 이게 집단지성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footnote] 재밌는 건 이때 내가 보이는 반응이다. 당연히, '아이고, 잘못 했습니다. 이거 내가 쓰면서도 살짝 거시기했는데, 딱히 다른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질 않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이렇게 나가는 게 맞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십중팔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월 어찌라고? 그게 뭔 말인지 진짜 모르겠어요?' 뭐 이런 식으로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왜 이럴까? 쪽 팔리서? 아니면.. 여전히 답답해서? 것도 아니면 그거 따지고 드는 게 얄미워서? 그냥 딴죽을 위한 딴죽으로만 보여서? 뭐 모르겠다. 어쨌든 이같은 자세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로 엊그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국정' 어쩌고[footnote]지금처럼 블로거 일반, 혹은 시민 일반이 모두 거대담론에 빠져 있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자신의 전문 분야도 아닌 일에, 그것도 국정을 다루는 모든 일에 블로거 혹은 시민 일반이 나서 일일이 참견을 해야 하는 사회란 도무지 제대로 된 사회, 건전한 사회라 보기 힘든 때문이다.[/footnote] 하는 부분에서다. 여기서 내가 전하고자 했던 말은 '왜 의회 민주주의겠느냐'는 거였다. 한마디로 기나 고동이나 모두 나서 사사건건이 한마디씩 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이겠느냐는 얘기였던 것이다. 당근 연빵으로 이의가 들어왔다. -_  

그런데 이같은 이의는 사실 실제로 내가 얘기하고자 했던 바에 주목한다면, 다시말해 내가 말만 제대로 했다면 굳이 제기될 필요가 없는 터였다. 예컨대, 저기서 내가 하고자 했던 얘기는 이런 것이었다.


세계일보 만평

[워싱턴타임스] "우리가 합의하지 못하는 또 다른 새로운 제안이 있군요.."


G20 정상회담의 무용성 혹은 비효율성을 지적하고 있는 만평이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개최했으나 새로운 제안이 나올 때마다 각국 간 이견차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빈정대고 있는 것이다.

20명만 모여도, 것도 나름대로는 각 나라의 최고 위치에 있는 대표가 모여서 한다는 정상회담에서도 20명 정도의 의견 조율조차 쉽지 않은 게 세상사 이치다. 하물며 4천만이 모두 한마디씩 한다면 거기서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일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없다.

그러니까 나는 '국정' 어쩌고 하는 말을 통해 이 얘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 정권이 맘에 안 든다면 차라리 정권 교체를 위해 노력하는 게 더 바람직한 접근법이지, 모든 일을 사사건건이 트집을 잡는대서야 그걸로 이룰 수 있는 뭐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그렇다면 정권에 대한 견제를 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설레발 치는 사람들 꼭 있다. -_

그런 거 아니다. 내 말은 견제조차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견제를 하더라도 전략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일의 경중을 따져서 정말로 내줄 수 없는 일은 모두의 힘을 거기에 집중하여 확실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만큼 긴급 사안이 아니거나 크게 중요하지 않다 여겨지는 문제는 전략적으로 떨쿠고 갈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블로고스피어를 보면 어떤 때는 진짜 단세포들만 모여 있는 꼭 바보들의 천국 같아서 해보는 얘기다.


 
2009/04/08 20:22 2009/04/08 20:22
"노무현의 승부수는 항상 승리했다." 이 말은 지난 11일(2002.11) 노무현 인터넷선거특별본부 취재팀이 전하고 있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이하 노무현)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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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무현의 이 말이 오늘의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있게 한 원동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추종자들이 끊임없이 확대재생산을 거듭하고 있고 노무현 스스로도 시시때때 금과옥조처럼 되뇌고 있는 '원칙과 상식'이라는 구호보다 '노무현의 승부수는 항상 승리했다'는 저 말이 노무현의 진정성을 보다 잘 드러내고 있다고 믿는 때문이다.

그렇다. 노무현은 '원칙과 상식'이 아니라 항상 '승부수'를 띄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노무현의 승부수는 항상 승리했다.' 그는 상고를 나와 고시 공부라는 승부수를 띄웠고 거기에 성공했다. 먹고 살만해지자 인권 변호사라는 직에 승부수를 던졌고 그 또한 성공했다. 그가 처음 띄운 고시 공부가 순수한 동기에서였다면 인권 변호사로의 승부수는 정치적인 승부수였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그는 거기서 '승리'했고 그 '승리'에 맛을 들였다. 정치쪽으로의 선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치가의 길에 들어선 노무현의 승부수는 더욱 정치해진다. 그는 항상 지지않는 쪽에다 승부수를 던졌다. 그가 김영삼이 아닌 김대중에게 의탁한 것을 두고 '원칙과 상식'을 지켰노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당시의 상황에서 '원칙과 상식'이라는 말을 굳이 붙인다면 그것은 이른바 '꼬마 민주당'에 남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지 노무현에게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는 결과만을 봐도 알 수 있다. 꼬마 민주당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신난한 정치역정을 겪거나 잊혀져 갔지만 노무현만은 승승장구를 거듭하지 않았던가?


노무현은 항상 잃을 게 없는 승부만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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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최악의 경우에도 잃을 것이 전혀 없는 승부수를 던지곤 했다. 그 추종자들은 자주 '원칙과 상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몇 차례의 부산 선거를 들고 있지만 노무현으로서는 이 또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승부수였을 뿐, '원칙과 상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도대체 노무현이 그 일로 잃은 게 뭐가 있었던가? 오히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쑈"를 부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원도 없이 돈을 써봤다'는 그의 말이 그것을 시사하고 있고, "쇼"가 실패할 때마다 한 단계씩 올라간 그의 당내 위상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러나 그 "쑈"가 아니다. 노무현은 이를테면 실패하면 "쑈"가 되지만 성공하면 '신화'가 되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노무현은 실제로도 매번 자신의 당선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것은 노무현 자신이 확인해주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당선이 확실했지만 선거 직전에 불어닥친 몇 가지 변수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다는 말들을 여러 차례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상황 파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민주당 내에서조차 '국민사기극'이었다는 말이 나오는 지난 여름의 국민경선을 노무현은 아직도 실제와 혼동하고 있다. 여차 하면 그 좋았던 시절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현실 감각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건지를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집권당 분열이라는 전무후무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도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질 못한 채 모든 원인을 모조리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이건 대단히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노무현한테서는 반성적 사고란 찾아볼 수가 없다. 바로 "원칙과 상식 혹은 소신"이라는 허무맹랑한 신념, 즉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누구 말대로 '최면'에 걸려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세상을 위태롭게 하는 것 가운데 이보다 더 위험한 게 또 있을까? 그런 점에서 어느 원로 법조인이 그를 두고 '시한폭탄'이라 지적한 것은 꽤나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그가 매사에 즉흥적이라는 점이다. 최근의 단일화 담판을 두고 결단이라느니 언빌리버블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너스레에 지나지 않는다. 노무현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정도의 즉흥성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임기응변 능력이 오늘날의 노무현 후보를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즉흥성에 바탕을 둔 임기응변이 원칙이나 상식과 어울릴 수는 없는 일이다. 노무현의 '원칙과 상식'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노무현의 저 모토 자체가 도무지 원칙과 상식과는 거리가 먼 임기응변식 조어인 것이다.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이 밤낮으로 되뇌고 있는 '원칙과 상식'은 다만 저들 스스로에 의해 세뇌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노무현의 정치 행보 어디에서 원칙과 상식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행보 어디를 봐도 원칙과 상식을 찾을 수는 없다. 하루에 수천 번도 더 넘게 '원칙과 상식'을 들먹이는 추종자들의 글 어디에서도 나는 노무현의 '원칙과 상식'에 대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하물며 '원칙과 상식'에 대한 논리적인 글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저들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믿고싶다는 심정적 의지에 따라 그저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호랑이 없는 굴에서는 여우가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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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정치적인 승부수가 원칙이고 상식이라면, 그래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단 한번도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굽혀본 적이 없는 하민혁은 하늘님이 되고도 남을 인물이다.

아무리 좋은 '원칙'이라도 일단은 살아남아야 지켜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주위의 온갖 고언과 회유에도 "호랑이는 굶어 죽을지언정 풀을 뜯지는 않는다"는 한 마디로 한 길을 가는 아무개씨의 자세 - 이런 게 '원칙과 상식'의 자세다.

하지만 다 좋다. 모든 걸 다 상황논리에 양보한다고 치자. 그러나 노무현이 정녕 '원칙과 상식'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최소한 이번 한번만이라도 그것을 직접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적어도 원칙과 상식을 내걸고 대통령 후보에 출마한 사람이라면 후보단일화라는 더티한 야합으로 꽁수를 부리기보다는 차라리 장렬하게 산화하는 쪽을 택해야 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노무현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저 '원칙과 상식'조차도 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은 여전히 '원칙과 상식'을 줄기차게 읊어대고 있다.

정녕 원칙과 상식을 말하고자 한다면 노무현은 민주당에 연연하지 말아야 했다. 꼼수 부리지 않고 정말 당당하게 원칙과 상식으로 바로 서고자 한다면 민주당에 안주하는 일에서 벗어나야 했을 거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서려 하기보다는 민주당이라는 틀 안에서 안주하는 길을 택했다. 영락없는 호가호위(狐假虎威)고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인 짝이다. 원칙과 상식은 그 작은 권력 앞에서 이미 내팽개쳐진 것이다.

언젠가 유시민은 이같은 노무현의 행보와 관련, "작금의 상황에서 민주당에 남아서 노무현씨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민주당 내부에 노 후보와 손잡고 현재의 위기를 깨치고 나갈 수 있는 개혁 의원들이 없다. 무슨 미련이 있어 노 후보가 실정의 책임을 떠 안고 부담을 갖고 가려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좋게 말하면 유시민이 순수하다는 의미고 다른 말로 하면 유시민이 아직 권력 맛과 돈 맛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이번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합의를 두고 누구처럼 노무현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게 얼마든지 가능한 정치적 행위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노무현와 그 추종자들에게 화가 나는 것은, 명백히도 원칙과 상식을 저버린 그 행위를 두고도 저들이 아직도 '원칙과 상식'을 들먹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원칙과 상식은 그렇게 아무 데나 자기 편한 대로 갖다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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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이번 단일화 합의에 대해 어떤 '셈법'도 없이 원칙과 상식에 의해 내린 결단이었노라고 말한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그러나 노무현의 이 말은 거짓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는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인 '산법'에 의해 움직였을 뿐이다. 최근의 지지추세로 보아, 여론조사로 가더라도 승리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것이 내가 노무현를 그 근본에서부터 믿지 못하는 까닭이다. 실제로는 철저하게 '승리'하는 쪽으로만 승부수를 던지면서도 입으로는 열심히 '원칙과 상식'을 외치는 그의 이중성이 미덥지 않은 것이다.


노무현의 '원칙과 상식'은 허구다


그러나 내가 정작 노무현에게서 느끼는 문제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사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용인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노무현이 자신의 이러한 이중성에 대한 인식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의 인식 일반이 극히 불안정하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 모순된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오히려 자신의 그 행위가 '원칙과 상식'에 입각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스스로가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고 신념이다. 그것은 잘못에 대한 시정 장치 자체를 결여하고 있는 때문이다.

노무현의 이러한 신념 체계가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비판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특정언론과 '전쟁'을 선언한다거나, 민심의 표출이라 할 수 있는 선거에서 판판이 지고 있으면서도 그 민심을 읽을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고, 실제로 조작에 지나지 않는 '국민'이라는 허상에 빠져 국민 일반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믿는 것 등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 없어 주위의 몇몇 추종자들의 주장에 휘둘리고 있으면서도 여론 일반을 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에 대한 인식보다는 그것을 도리어 자신이 위대한 '진보'여서 사람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결과라는 식으로 믿고 설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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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말대로 천하의 불한당 그룹에 지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해마지 않는 한나라당에조차 번번이 참패하고 있다면,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있는 사람인 경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에 대한 반성적 사고이다.

그러나 노무현한테서 그것은 나뭇가지 아래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에 지나지 않는다. 노무현과 그 추종자들은 도리어 그 민심조차도 남탓으로 돌리고 만다. 조폭언론 때문이라거나 우매한 대중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노무현과 그 추종세력이 알아야 하는 것은, 설사 그들 자신은 몇몇 언론에 생각을 좌지우지 당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중 일반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길지 않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통해 이미 드러난 일이고 또한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직전 선거의 정권교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계몽되어야 할 사람이 도리어 계몽 운동한다고 설치는 걸 보는 일이란 언제나 역겹다. 막말로 말해서, 노무현의 개인 홍보지에 다름없는 오마이뉴스 한겨레신문 따위 선전 찌라시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대통령 후보 노무현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강준만류의 선동꾼과 정권 홍위병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노무현이 존재하기나 했을까? 아니다. 단언컨대, 오마이뉴스나 한겨레가 없었다면, 강준만류의 선동꾼과 정권의 홍위병들이 없었다면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을 한겨레와 오마이뉴스의 꼭두각시라고 보는 일각의 지적은 타당하다.


노무현은 꼭두각시 놀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문제의 본질은 노무현이 꼭두각시냐 아니냐에 있는 게 아니라 노무현이 그마저의 반성적인 인식조차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맹신도들의 맹한 소리에 파묻혀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여기는 허수아비라고나 할까? 자신의 정체성 마저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형국에 있으면서도, '원칙과 상식'이라는 허무맹랑한 이데올로기에 스스로가 사로잡혀 대중을 계몽하겠다고 설래발을 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노무현의 모습이다.

물론 꼭두각시라고 해서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다면 나는 그가 최소한 부패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가 사회의 부패 구조를 일소하기 위해 절치부심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노무현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나갈 사회에서 떠오르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거기서 보게 되는 것은 홍위병들에 의한 중국 문화혁명기의 광기이고 인민재판으로 선악을 가름하던 50년 전 동족상잔의 광기일 뿐이다. 이는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노무현과 그 추종세력들이 보이고 있는 패악질을 약간만 확장해도 이내 나오는 그림이다.

나는 노무현과 그 추종세력들이 '이상한 국민'을 들어 대중일반을 계몽하려는 우를 범하기에 앞서 먼저는 2,500년 인류의 정신사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래마지 않는다. 인류사에 노무현만한 인물이 없어서 이 세상에 전쟁이 있고 사회가 부패로 얼룩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노무현이 하고 있는 천방지축인 말과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에 하나 노무현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노무현에게 해주고싶은 말은 하나다. 세상에 전쟁이 그치질 않는 것은 바로 노무현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파쇼와 전쟁은 바로 거기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노무현이 이 말의 의미조차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싶기만 하다.
/ 2002-11-29 오후 4:52:09 



 
<덧붙이는글> 오래 전의 글 하나를 끄집어내어 옮긴다. 지난 2002년 대선을 20여일 앞둔 시점에 쓴 글이다. 이 글을 옮기는 이유는 그때의 내 생각이 어쩌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다면 나는 그가 최소한 부패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가 사회의 부패 구조를 일소하기 위해 절치부심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일정 금액을 받아썼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대해 '그깟 정도의 돈을 좀 썼기로 뭐가 문제냐'고 해버리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노통 자신이 '시골의 촌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노건평씨가 보여준 파렴치한 행적을 배경에 깔고 보면 이게 그렇게 간단히 접고 넘어갈 사안은 아닌 걸로 보인다. 부정한 돈을 만지는 이가 있다면 '패가망신'을 시키겠다는 그의 말 자체에 신뢰가 사라질 수 있는 때문이다.

어느 분의 표현대로 노건평의 '넌센스한' 플레이에 이어 노무현 자신이 박연차의 돈을 받아 썼다는 사실은 그 무게감이 적지 않다. 그래서다. 딴에는 꽤 안다고 여긴 노무현에 대한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 있고, 저 판단 또한 틀렸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 글을 굳이 옮겨 적는 까닭이다. 

<덧2>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번에 던진 '승부수'의 결과가 주목된다. 모르긴 몰라도 '성공'에 이르기는 힘들지 않을까싶다. 노무현의 승부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그가 내내 잃을 것이 없는 승부만을 해왔기 때문인데, 이제는 잃을 것이 없지 않은 때문이다.
 
2009/04/08 07:37 2009/04/08 07:37

한나라당 허원제 의원이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전국 중·고등학교 학급 11만 5322개에 1학급 당 4종의 신문을 무료로 제공 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년간 들어갈 예산이 총 1280억 원이며 정부가 부담예정인 예산은 약840억 원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

허 의원은 또”OECD 회원국 인구 1000명 당 신문구독부수를 보면 일본이 633.7부(1위)로 가장 많고, 노르웨이 626.3부(2위), 핀란드 518.4부(3위) 등이며 한국은 약 200부로 13위에 그쳐 정부의 적극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디어오늘보도)


정부예산으로 학교에 계도지를 나누어 준다고?



한나라당 허원제 의원

한나라당 허원제 의원


지천명의 중턱을 지나도록 국가정책의 시혜를 본 적이 없는 필자는 이쯤에서 허의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국가가 세금을 동원하여 신문을 보급해 주어야 할 만큼 oecd국가 내에서의 신문구독률13위가 정녕 부끄럽다고 생각하는가? 세금으로 청소년들에게 신문을 강제 구독시켜야 할 만큼 우리의 문화현실이 척박하다고 보는가?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31위 이고 창업 환경점수는 전 세계 126위이다. 신문 구독률이 못사는 나라가 없는 oecd국가 중에서 13위라고 하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지 고래심줄 같은 국민세금을 퍼내서 구독을 강제해야 할 위난형국은 아니지 않는가. 국가의 세금은 먼저 본 선량(국회의원)이 인심 쓰라고 거둔 돈이 아니다.

신문쟁이들의 말에 “야마를 설정해 놓고 팩트를 몰아간다”는 말이 있다. 미리 논조의 방향을 설정해 놓고 기자들이 취재한 자료들을 끼워 맞춘다는 말이다. 나만의 환상일까?.

"사르코지 대통령은 만 18세가 되면 1년 간 무료신문 구독 권을 주는 지원책을 제시했고, 일본은 '문자·활자문화진흥법' 제정과 '신문열독 정비5개년 계획'을 통해 학교에 5∼6가지 신문을 비치 하도록 하는 다양한 지원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생뚱스런 예시를 둘러대는 허의원에게서, 정권 또는 사주의 눈치를 보며 이 나라의 담론방향(agenda setting)을 농단하는 기름진 중견언론인(gate keeper) 들의 야마 몰아가는 모습이 겹쳐 보인다.

여느 부패한 언론인들의 습관처럼 전세계 191개의 국가 중에서 2나라를 제외한 189 개국이 왜 국민을 상대로 한 계도지를 발송하지 않고 있는지 허의원 역시 설명하지 않았다. 배척해야 할 교언영색이요 언론마술이다. 부패 언론인들의 생게망게한 장난 수법을 선택받은 선량께서 따라 해서야 되겠는가.

2008년 12월, 대전시내 5개 자치구 의회의 예산안 심의에 즈음하여 대전충남민언련은 국민세금낭비의 대표적 전형인 계도지예산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민언련자료) 중도일보와 충청투데이가 즉각 화답하였고 해당 자치단체는 상당한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의 중.고교 학생들은 정부가 나서서 신문을 읽히고 계도해야 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군사정권하에서의 치사한 권언유착 거래였던 계도지 제도를 국가예산으로 아예 대놓고 집행하겠다는 집권 여당의 발상이 아찔하기만 하다.


한나라당 허원제 의원

한나라당 허원제 의원


본사의 확장강요에 허리가 휘는 지국실정을 고려해 정권을 상대로 힘있는 기자들이 확장을 해 준 것이라면 지국장들이 단호하게 거절해야한다. 지국장들은 본질적 판매구조의 모순을 해결하기를 바란다. 하루의 삶을 더 연장하라며 던져주는 마약이라면 단연코 거부한다.

신문구독은 선택하는 것이지 강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제껏 본사의 불법확장강요에 의해서 지국장들의 자존과 체면이 얼마나 더러운 개골창에서 나뒹굴었는가. 지국이 신문을 배달 보급하는 곳이지 경품으로 독자를 낚는 삐끼사무실은 아니다.

오프라인 미디어산업의 위기를 맞아 영세한 신문사를 지원하기 위한 고민은 사실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참여정부시절 힘 있는 여당의원의 한 사람이었던 민주당 최문순의원도 허의원과 비슷한 입법 발의를 시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회의원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권력과 가까운 여당의원이 낮 도깨비 같은 입법제의를 하는 양상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것 같다.

보수일색으로 치우친 우리의 담론문화를 건강하게 바꾸기 위해 군소신문보호법을 발의하려는 의도로 아는지 어느 마이너신문에서도 허 의원의 생뚱스런 법안발의를 지적하는 곳이 없다. 작은 신문사들은 참여정부 때에 설립된 국영회사 신문유통원을 통해 배달보급을 하고 있으니만큼 혹시라도 공짜확장과 같은 계도지 떡 고물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김치찌개는 언론이라고 하는 아고라냄비에서 김치와 갖은 양념이 보글거려야 제 맛을 낼 수가 있다. 다양한 언론이 존재해야 여러 계층의 정서를 두루 반영할 수 있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된장이나 김치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 민주주의라는 맛있는 요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용성 한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매체전문지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법안으로 신문지원 제도를 활성화한다는 취지는 의미가 있다. 문제는 독자 선택권을 어떻게 하느냐이다. 신문 선택권을 학교에 줄 것인지, 학생들에게 줄 것인지 등이 고려 돼야 한다"면서 "신문 선택문제와 관련해 어느 정도 모델을 갖고 법안을 제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오늘)

지금은 맛과 색깔이 같은 조중동이 대한민국 신문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형국이다.
김치찌개에 온통 된장 뿐인 셈이다.

신문유통원을 통한 영세신문만의 제한적 계도지배포에는 반대한다는 조중동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신문 판매업계에 흘려지고 있다. 누구를 위한 입법발의인지 안 봐도 뻔한 노릇이다. 함구하고 있는 마이너신문에서 아직도 삼삼한 꿈속을 헤매고 있다면 이제라도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고 싶다.

남들의 위선에는 인내할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끔찍한 위선도 마다하지 않는 언론이 오랜 역사를 가진 메이저 언론사들의 본래 모습이다. 상생이나 호혜의 정신 따위는 그들에게는 다른 나라 말이다. 엄한 놈 다리 긁지 말고 신문판매 매커니즘의 본질적 문제가 무엇인지 돌아보라.

나치의 프로파간다수법을 모방하는 현 정부의 언론개입정책에 대하여 정의를 부르짖던 마이너 신문마저 계속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이나라 언론의 희망은 어디에서 찾겠는가.

이 정권이 계도대상으로 삼으려 했던 우리의 중 고교 청소년들이 이 사회의 주인이 되었을 때 신문은 정보의 오류와 판단의 장애를 부르니 만큼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계도정책을 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http://www.dalmasa.or.kr/people/servic ··· ex%3D189 (새 창으로 열기)
 

2009 년  4 월  7 일
조지기 통신   조의식





 

<덧붙이는글> 위에 옮기는 글은 "전국신문지국장연합 - 달배마을사람들" 조의식님의 글입니다.
 
2009/04/08 02:09 2009/04/08 02:09

노무현 전 대통령이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현재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수억원을 건네받은 혐의와 관련하여 그 돈이 실은 권양숙 여사가 부탁하여 자기가 받아 쓴 돈이라고 밝혔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노통은 아무리 봐도 참 쪼잔한 대통령이십니다.
두 가지 점에서입니다.
 

노무현의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의 "사과드립니다"


"나안~, 티코로 해먹었을 뿐이고.."

하나는, 이건 뭐 예전부터 자기 입으로 부르대온 거니만큼 새로울 것도 없는 거긴 하지만, "쟤들은 그랜저로 해먹었지만, 나는 겨우 티코로 해먹었어요. 징징징~"에 나타나는 그의 쪼잔함입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싸나이가 말이지.. -_

받아먹으려면 앗쌀~하게 그랜저나 비행기로 아예 받아먹고 말지 쪼잔하게 티코가 뭐란 말입니까, 티코가.. 에효~ -_-;;  게다가 허구헌날 징징거리기는 뭘 또 그렇게 맨날 징징거리는지 원.. 쯧~

다른 하나는, 노통은 끝까지 구질구질하다는 겁니다. 기왕 사과하기로 밝힌 이상은 최소한 "지금 이 사람 통장에 29만원밖에 없어요~" 이런 정도로 화통하게 밝힐 것이지, "자세한 건 검찰의 수사에 응하여 밝히겠다"니.. 구질구질하게 지금 이게 뭐 하자는 퐝당 시추에이션이라는 말인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화통하게 함 까고 갈 생각은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노무현 대통령의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노통의 '사과드립니다'라는 글 전문입니다.
다시 봐도, 참 구질구질하다는. -_


사과드립니다.

저와 제 주변의 돈 문제로 국민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껏 저를 신뢰하고 지지를 표해주신 분들께는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미리 사실을 밝힙니다. 지금 정상문 전 비서관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정 비서관이 자신이 한 일로 진술하지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그 혐의는 정 비서관의 것이 아니고 저희들의 것입니다. 저의 집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입니다. 미처 갚지 못한 빚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상세한 이야기는 검찰의 조사에 응하여 진술할 것입니다. 그리고 응분의 법적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거듭 사과드립니다.

조카사위 연철호가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받은 돈에 관하여도 해명을 드립니다. 역시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퇴임 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조치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호의적인 동기가 개입한 것으로 보였습니다만, 성격상 투자이고, 저의 직무가 끝난 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설명하고 투자를 받았고, 실제로 사업에 투자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과정에서 사실대로 밝혀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2009년 4월 7일

노 무 현

 

<덧붙이는글> 지금 이 시각, 조중동이 노통의 저 발언으로 도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무현 잔치'를 벌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고 하는군요. 내가 조중동의 편집진이라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싶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입니다.

하나는, 깨끗한 이미지로 집권한 참여정부의 수반이 '검은 돈'을 받아드신 사실이라는 그 팩트의 무게 때문입니다. 당근 도배가 아니라 오도배라도 하고 남음이 있는 일일 터입니다. 또 하나는, 장자연 리스트로 코너에 몰려 있는 조선일보의 경우 물타기로는 이보다 더 좋은 호재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이 역시 마음 같아서는 온 나라를 이걸로 도배하고싶은 심정이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생각해봐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노통이 왜 하필 지금 이 시기에 저거를 터뜨렸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노통도 은근히 물타기를 계산하고 터뜨린 거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장자연 리스트 상황을 역으로 이용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아무 생각없이 터뜨린 걸로 보는 것입니다. 박연차 리스트가 점차 자신을 조준해서 오는 것같으니까, 애초에 전체적인 판세 뭐 이런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노통이 이번애도 역시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사고 하나 제대로 친 거라고 보는 거지요.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함 들어보고싶습니다. -_  
 
2009/04/07 18:15 2009/04/07 18:15
조선일보, 역시 일등신문입니다. 당근 힘도 쌥니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 사건에서 조선일보가 보여주고 있는 막강한 힘은 전 세계 언론사에서도 아마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정도가 아닐까싶습니다.

어제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하여 조선일보 방 사장을 직격했습니다. 그동안 모든 언론이 쉬쉬하고 있던 장자연 문건의 내용 중 일부("조선일보 방 사장을 모셨고, 스포츠조선 방 사장이 방문했다")를 까발리면서입니다.

그런데 이를 보도한 언론 가운데 어느 곳에도 '조선일보'는 등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모든 언론을 볼만한 여유가 없는 터라 이를 보도한 <프레시안>의 기사를 잠시 인용합니다.


역시 <조선일보>는 강했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6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등장하는 유력 언론사주의 이름을 공개했고, 이에 조선일보사가 공문을 내어 강력 반발했음에도 7일 <경향신문>, <한겨레>를 포함한 전 언론은 <조선일보>를 거론하지 않았다.
<조선일보>, <중앙일보>는 이종걸 의원의 발언 자체를 보도하지 않았고 <한겨레>,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은 '해당 언론사' 등으로 익명 처리했다.
- '장자연 리스트' 실명 공개 후…"조선일보"는 없었다 기사 중에서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걸 두고 우리나라 언론이 하루 아침에 개과천선하여 '인권 언론'의 정도를 보여주기로 작정이라도 한 걸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내 밑으로 다 모엿!"하는 어느 개그 프로에서 보는 것처럼, "내 밑으로 다 기엇!" 하는 조선일보의 한마디에 전 언론이 납짝 하니 엎드려버린 결과로 봐야 할까요?

아무래도 후자인 성부르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다음은 이 시각 현재 구글에서 '장자연리스트 조선일보'로 검색한 뉴스의 결과입니다.


장자연리스트 조선일보

구글에서 '장자연리스트 조선일보'로 검색한 결과


프레시안 기사는 위에서 잠깐 인용한 기사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에 있는 두 개의 기사입니다. 중도일보와 서울신문의 저 두 개의 기사를 링크로 타고 들어가면 기사가 안 보입니다. 대신 다음과 같은 에러 화면이 나타납니다.


중도일보

서울신문


- http://www.joongdoilbo.co.kr/jsp/artic ··· 04060209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 ··· 06500014

에러 메세지의 내용은 모두 해당 기사가 삭제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_  그리고 언론이 기사를 디비에서 자삭하는 이같은 결과는 언론이 납짝 엎드린 결과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힘들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이용한 네이버, 다음 등의 국내 검색 사이트에서 뿌려준 검색 결과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없지 않았던 것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함 살펴보면 꽤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지 싶은데요.[footnote]지금 보니, 메타블로그에서도 '조선일보' '장자연리스트' 등의 키워드는 모두 사라진 거같군요.[/footnote] 일 때문에 저는 여기까지만. -_-

무튼, 이같은 사실만으로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성부릅니다.


"일등신문 조선일보는 역시 힘이 쎄다!"


일등신문 조선일보

일등신문 조선일보, 내 밑에 있는 마이너들 다 기엇!



 


<덧붙이는글> 기타 언론 여러분!  니네.. 뭐냐~?  -_
  
2009/04/07 12:26 2009/04/07 12:26

조선일보사가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 사건과 관련하여 분명하게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조선일보 사장 방모씨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속이 다 시원합니다. 아무려면 일등신문 조선일보 사장이 "조선일보 방 사장을 모셨고, 스포츠조선 방 사장이 방문했다"는 문건의 주인공일 리가 만무한 일이겠습니다.


조선일보는 역시 일등신문입니다.


일등신문

일등신문 조선일보


자, 그러니 그동안 '장자연 리스트' 가지고 조선일보 방사장을 씹어댔던 이들은 이제 반성해야 합니다. 어쩌면 반성하는 수준을 넘어 경우에 따라서는 명예훼손의 벌까지 받아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조선일보 사장이 저따위 문건의 당사자일 리가 없다고 내심 믿어온 저로서는, 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조선일보의 의연한 대처에 깊은 찬사를 보냅니다. 조선일보, 감사합니다.




 

2009/04/06 23:55 2009/04/06 23:55

- 아름다움이란, 그것이 그 사람의 개성과 일치하고 그 스스로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드러난다.

- 돌멩이가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무겁기 때문이며,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그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 일찍부터 사랑을 배운 바람둥이 아가씨는 사랑의 괴로움에도 이내 익숙하게 되며, 참다운 정열을 알만한 무렵의 나이에 이르면 새로운 것에 대한 매력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게 되고 만다. 그러나 연애 소설조차 한번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경우에 맞게 되는 모든 게 새롭게만 보인다.

- 여자의 마음이란 쉬이 변한다. 이를 믿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 젊음을 오래 유지하는 비결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모든 미움의 감정을 버리는 데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우선 그 표정부터 늙어버리고 만다.

- 결혼 후에 연애에 빠지지 않는 여자란 오직 메마른 감정을 지닌 여자뿐이다.

- 아랫사람의 경우, 훌륭한 추론은 죄가 되기 쉽다. 뛰어난 추론은 늘 상대의 비위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 그대의 눈에 누군가가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거든 그의 모든 계획과 욕망 앞에 장애물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만일 정말 재능이 있는 이라면 그는 그 장애물을 쉽게 극복하거나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 연약한 인간이라면 도태될 것이고, 용감한 인간이라면 혼자서도 곤란을 극복해 갈 것이다.


 

스땅달의 적과 흑

스땅달의 <적과 흑>


- 모든 참다운 정열이란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
겉으로는 그렇게 공손할 수 없는 말과 태도이나 그것이 바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르고 넘어가고, 출세하고 싶은(처세에 능한) 사람은 알고서도 넘어가주는 그런.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이 새로운 동안에만 아름답다.

- 위대한 일 가운데 그것을 시도하려 할 때 극단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 있었던가? 위대한 모든 행위는 그것이 일단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범인의 눈에도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법이다.

- 기병대의 선두에서라면 시퍼런 칼날의 번득이는 위험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혼자서 겪어야 하는 위험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 머리에서 비롯된 사랑은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랑보다 확실히 아기자기한 맛은 더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흥분에 지나지 않는다.

- 천재가 지닌 자질 중의 하나는 평범한 인간들이 걸어간 길을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 소설이란, 큰 길을 가면서 주위의 풍경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독자는 그 거울을 통해 푸른 하늘을 볼 수도 있고 진흙탕을 볼 수도 있다. 그런 거울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독자들에게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의 거울은 진흙탕을 비춘다. 그래서 독자는 거울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차라리 진흙탕이 된 한길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진흙탕 그대로 내버려 둔 도로 감독을 비난하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 불행은 사람의 마음을 무디게 만든다.

- 자존심이 강하고 팔팔한 사람의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다른 사람에 대한 격분 사이에는 대개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경우 미친 듯이 화를 낸다는 것은 강렬한 쾌감이기도 하다.

- 어리석은 짓을 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반드시 악의에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 정치라는 것은 문학의 목에 달아맨 돌멩이 같은 것이다. 반 년도 못 가서 문학을 물 속에 가라앉힐 것이다. 상상력의 흥미에 정치가 뒤섞인다는 것은 음악회에서 총소리를 듣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권총 소리는 결국 아무 힘도 없을 뿐더러 매우 시끄럽기만 하다. 이 소리는 어떤 음악과도 조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정치라는 것에 독자의 반 수즘은 분노할 것이고 조간 신문에 실린 정치기사라면 특별한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도 이 소설 속에서 읽게 되면 그저 싫증이 날 뿐이다.

- 말수를 줄이고 행동을 삼가라. 이것이 연애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다.

-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재산이나 신분을 타고난 여자는 항상 자기 자신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그들은 상대방을 바라보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출세한다.

- 여론의 지배가 자유를 보증해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불합리한 점이 없지 않다. 그것은 때로 불필요한 일에까지 간섭한다. 이를테면 개인의 사생활에까지 간섭하는 것이다.

- 호랑이와 매우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어느 영국 여행가의 경험담이 있다. 그는 호랑이를 기르며 호랑이와 같이 놀기도 했는데, 그는 책상 위에 늘 장전한 권총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 사냥꾼이 숲속에서 총을 쏜다. 목표물이 쓰러진다. 포수가 그것을 잡기 위해 내닫는다. 급히 달리는 포수의 발길에 채어 개미집이 부서지고, 개미떼와 그 알들이 산산히 흩어진다. 그러나 순식간에 일어난 이 상황을 개미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최고의 지성을 지닌 철학자 개미도 방금 자신들에게 닥친 그 시커멓고 거대하고 끔찍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사냥꾼의 장화였다. 갑자기 불꽃이 튀고 벼락같은 소리가 난 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장화가 그들의 거처를 짓밟아 버린 것이다.

죽음이나 삶이나 영원이라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큰 조직을 지닌 존재에게는 그 모든 것은 아주 간단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살이는 한여름 아침 아홉 시에 태어나 저녁 다섯 시면 그 생을 마감한다. 그런 하루살이가 어찌 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다섯 시간만 더 살 수 있더라도 하루살이는 밤을 이해할 수 있으련만.

 

- 사람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도 아직 위선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 사람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나대로의 죽음을 택하고 싶다.

- 너의 많은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 너는 전생에 많은 사랑을 했으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지 알 수 있는 존재이다."
- 스땅달의 "에고티즘의 회상" 중에서

"이 여성들의 대부분이 나의 사랑에 응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여자들은 나의 생애를 지배했다."
- 1835년 9월, 그의 나이52세 때 스땅달이 알바노 호수가를 거닐면서 모래 위에 12명의 여인 이름의 첫글자를 쓴 다음 했다는 말이다. (어느 기사 중에서)

"앙리 베일. 밀라노 사람. 쓰고 사랑하고 살았다."  - 스땅달의 묘비명


2009/04/05 23:28 2009/04/05 23:28

언제부터인가 김한길을 보면 '서울 깍쟁이'란 말이 먼저 떠오른다. 김한길의 일기를 처음으로 접한 건 10여년 전이었다. 문학사상[footnote]'이었는지 한국문학이었는지 확실치는 않다'고 적었는데, 김한길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결과 문학사상이다. - http://hangillo.net/05edition/images/m ··· b1-1.swf (새 창으로 열기)[/footnote]에 연재되고 있던 그의 <병정일기>[footnote]'눈뜨면 없어라'라는 이 책의 제목은 책으로 펴내면서 붙인 이름이다.고 글을 올리면서 주석을 달았으나. 잘못 적은 것이다. 이정환님이 <눈뜨면 없어라>는 <미국일기>를 펴내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일러주셨기에 바로잡는다. 고맙습니다. (_ _)[/footnote]를 통해서였다.[footnote]근데, 하도 오래 전의 일인 터라 이 부분에서 몇 가지가 막 헷갈린다. 특히 <병정일기>와 <미국일기>를 읽은 시점 등에서 그렇다.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엄밀한 책 소개를 하는 글이 아니고, 책을 빌어 하고싶은 얘기란 다른 데 있으니까. 하면셔.. 담 넘어가듯. -_-
<덧> 지금 보면 이 부분은 그냥 주석으로 처리되었어야 할 내용이다. 하지만 감정이 먼저 나서 건들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_- [/footnote]

<눈뜨면 없어라>를 읽으면서 '서울 깍쟁이'라는 저 말을 떠올렸다. 어느 부분에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일기에는 당시 내가 반감을 갖고 있던 먹물들의 제조건이 여러번 내비치고 있었다. 가식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하여튼 그런.

에니웨이, 당시 그는(혹은 그의 일기에 드러난 그는) 내가 싫어하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그의 저 깍쟁이 기질이었다. 세상의 모든 잇속에는 다 관심없는 듯, 초탈해 있는 듯 하지만 가만 보면 실제로 제 잇속은 다 챙기는, 그런 서울 사람 기질이 그에게는(혹은 그의 일기에는) 다분히 함께 하고 있었다.
 

김한길의 눈뜨면 없어라

김한길의 <눈뜨면 없어라>


김한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가 대단히 선량한 사람으로 여긴다. [footnote]이는 책의 제목으로 살짝만 검색해봐도 이내 알 수 있다. 다음은 출판사의 소개글이다.
김한길이 1981년 6월 미국에 건너간 뒤 첫 한 해 동안의 기록인「미국일기」는 ≪문학사상≫에 2년 간 연재된 뒤 1983년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발간됐다. 이후 1993년에는 『눈뜨면 없어라』라는 제목으로 다시 발간돼 지금까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한길은『눈뜨면 없어라』의 서문에서
「내 젊은 날 가장 힘들고 막막했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밝히면서,「이 일기를 쓰던 동안에는 내가 선택한 삶에 내가 자신이 없었다. 미국 땅에서 쓸데없는 세월을 보내며 망가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괴롭고 불안하였다」고 쓰고 있다.
루머처럼 전설처럼 아직도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이야기들,
수많은 가슴에 감동을 뿌렸던 김한길의 낮은 목소리
「눈뜨면 없어라」는 인생의 거창한 진리나 도덕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김한길은 애초부터 무겁고 거창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김한길은 우리에게 들려주는 애기는 두통과 불면증, 변소, 열쇠, 발톱 없는 고양이, 글씨를 못 쓴다고 핀잔했던 아내의 옛 스승, 콘택트렌즈를 새로 낀 아내가 바라본 세상, 식욕과 졸음, 우울한 이유들, 때로는 비아프라의 기아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느 시인이 "통속 잡지의 표지 같다."라고 비유한 우리들 인생의 저변에 깔려있는 작고 사소한 것들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들의 의미가 작고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그는 작고 사소한 것들의 갈피 속에 깃들인 결코 작거나 사소하지 않은 의미의 발견자이기 때문이다. / 해냄출판사[/footnote]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그는 언제나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는다. 제법 심각한 얘기라도 해야 할 때가 오면 얘기를 돌리거나 가볍게 터치하고 넘어가버린다. 일기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속내는 그렇게 감추고 있다. 정작 중요한 얘기들은 모두 그렇게 호도해버린다.

자신이 나갈 구멍은 다 챙겨놓고 하는 얘기에서 신실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런 얘기들이란 도대체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특유의 가벼운 터치로 세상을 스케치하며 어떤 반론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김한길의 글쓰기가 바로 그런 유형에 속한다.

이른바 잘 나간다는 이들의 행태를 가만히 살펴보면 저들 모두에겐 엇비슷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가벼운 터치로 그리기, 혹은 코믹하게 그리기, 혹은 초연한 척 그리기.. 그런 것들이다. 처세술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즈음 박광수인가 하는 이의 그림이 상당한 인기라고들 한다. 난 동아일보를 보는 터라 조선일보에 연재되는(맞나?) 그의 만화를 볼 일이 거의 전무하다. 하지만 그래도 우짜다 접하게 되는 그의 그림 이야기를 보면  그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쩌면 그렇게 세상 만사에 모두 능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나이에 말이다.

그의 몇 컷짜리 그림 이야기 속 세상은 그렇게 단정하고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다. 순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것인지.. 자주 엄청 헷갈리는 대목이다. 무튼,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요즘은 동아일보에도 그 비슷한 그림이 연재되고 있다. 듣기로는 그것도 상당히 뜨고 있는 모양이고.

암튼, 이런 얘기들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란 뭐냐면..
이것 역시 예를 하나 들어 말하는 게 나을 성싶은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오늘자 신문에, 어느 국어 강사가 하이텔에서 폭력교실이라는 테마로 글을 쓰는데 하여튼 인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기사가 하나 실렸다.  그 인터뷰 기사에서 그 강사는 그런 말을 했다. 심각하게 혹은 진지하게 접근하는 법 대신에 가능한 한 과장되고 코믹하게 그리려 했다고. 이유는 정공법으로 접근하면 즉각적인 반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내 얘기는 그러니까.. 그런 글은 도무지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글은 누군가가 시비를 걸올라치면 그냥 한 마디만 해버리면 된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조크 한 번 해본 거라니까. 에이~ 이 냥반은 유머 감각이 없으시네. 걸 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구랴. 촌시럽게.
 
저들에겐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한없이 열린 담론의 장에 저들은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다시 에니웨이,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는 이 사람의 글에 나타나는 저 가벼운 기교가 싫다. 거기서 자꾸 어떤 '위선'이 읽혀서다. 혹여 김한길의 저런 가벼움에 속는 이가 없기를. 배부른 자의 허영을 좇다가 그 골의 깊음에 절망하게되는 독자가 없기를. 세상을 가볍게 대하고 결정을 내리는 바보가 있다면 그는 필경 가슴에 대단한 피멍 하나를 간직해야 할 것이다. 나와 같이 단순한, 말하는 모든 거를 액면 그대로 믿는 바보는 말이다.
 
서울 깍쟁이들에게 배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저 얄팍한 자기 변명 외에는.
도대체가 어떤 사태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 없다. 그들의 혹은 그의 시각에는.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글로 썼다면 거기에 대한 비판은 없을 수가 없다. 왜냐면 씌어진 글은 그것이 언제나 닫혀 있음을 전제로 하는 때문이다. 그것은 그 한계로 인해 항상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영리한 이들은 이같은 비판의 칼날에서 늘 한켠으로 비켜나 있다. 처음부터 비판 받을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때문이다. 전형적인 서울 깍쟁이들의 글쓰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론을 원천적으로 무력화시켜버리는, 바운다리를 두지 않고, 한없이 열어두고 하는 글쓰기.

이 책과 같은 공개 일기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글에 얼만큼의 자기 진실이 담길 수 있을까?

"이군, 친구들이 소탈한 체하고 털어놓는 연애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게. 정말 소중한 얘기는 그렇게 아무한테나 쏟아놓지 않는 법이야. 설사 하더라도 에누리를 두는 법이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서울내기 정선생이 주인공 이명준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하물며 이 글의 필자는 그보다 더한 서울 깍쟁이다. 서울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체 검열에 의한 중략)

하지만 그는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 고백을 한다는 건, 저쪽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그의 함부로 쏟아놓은 젊은 날의 허드렛말을 너무 요란한 치장으로 내놓는 일에는 좀더 신중해야 했다는 생각이다. 하긴 <광장>의 얘기를 한번 더 인용하여 말해 본다면, 이즈음의 사람들은 도무지 '사무치는 이야기 같은 것에는 밥맛없어 하는 사람들'이니 그저 적당히 속내를 감추며 얘깃거리 만들어 가는 재치가 꽤나 흥겨운 것일 수도 있는 것이긴 할 터다.

 

김한길


김 한 길
이렇게/웃기는/슬픈/아름다운/고백은 없었다.

번쩍이는 금박 위에 박혀있는 이 문구는 분명 장사치의 과장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안쓰러움을, 고독을 이해할 수 있을 듯도 싶다. 김한길의 일기에서 그렇게 신실하지 못한 사람의 기교만을 보게 됐다면 그러나 그건 너무 비약되고 악의에 찬 악다구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1997>

[서비스] 눈뜨면 없어라 "에필로그" 보기



덧붙이는 글, 열어보기..

<덧2> 특별히 책 내용에 대한 얘기도 없고 한 터라, 댓글에서 어느 분이 인상깊게 읽었다는 이 책의 '에필로그'를 서비스로 추가했습니다. <내용 퍼온곳> http://blog.timelife.co.kr/ceo/50 (새 창으로 열기)
<덧3> 아래 이정환님이 언급하고 있는 '집시부부 이야기'는 아래 주소에서 듣보실 수 있습니다.
-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 ··· nnew%3D2 (새 창으로 열기)

<덧4> 김한길은 여러 면에서 이문열을 생각하게 하는 이다. 같고 다름 모두에서 그렇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한 사람은 북한에서, 한 사람은 남한에서 자기 길을 갔다는 점에서 살짝 다를 뿐이다. 두 사람은 아버지를 기억하고 벗어나는 과정에서 또한 서로 같고 다르다. 특히 아버지를 벗어나는 과정과 거기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태도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아도 충분할 정도로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덧5> 김한길이 2001년 구로을 재선거에 나섰을 당시 선거 기획안을 하나 넣은 적이 있다. 지역구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잘못되었다는 분석을 담아서였다. 그거 받아들였으면 국회에 입성했을 터다. ^^  

2009/04/04 23:56 2009/04/04 23:56
내 엠에센 메신저에는 참 많은 이들이 등록되어 있다. 십 수년을 이 바닥서 먹고살다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일에 휘둘리는 통에 다른 기록들, 예컨대 명함첩이나 노트 등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이 크다. 메신저에 등록된 이들 가운데 지워야 하고 남겨둬야 할 이들을 구분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두고 있어서라는 얘기다.

최근 들어 그런 웹프렌즈 가운데 몇 몇이 띄엄띄엄 말을 걸어오고 있다. 지나가다 들른 블로그에서 내 프로필을 보고서다. 정확히는 거기 있는 내 이메일 주소를 확인하고서다. 그래서 살짝 걱정도 되고 한 터라 하민혁의 민주통신을 찾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함 들여다봤다. 유입 경로를 확인해본 거다. 예상외로 '하민혁'을 치고 들온 이가 적지않다. 몰랐다.

무튼, 유입 경로를 공개하기는 좀 그렇고 해서 하루에 방문하는 이들 숫자만 살짝 공개해본다. 사실 자료를 보면서 좀 놀랐다. 하루에 들오는 숫자가 거의 일정해서다. 방문자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대목이다.


하민혁의 민주통신

하민혁의 민주통신을 찾는 사람들


오늘 오후에 그동안 잊고 지내던 오랜 웹프렌드 하나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하민혁의 민주통신' 블로그 주소를 링크로 띡~ 하나 날리더니, 다짜고짜 '이게 니 블로그 맞냐'면서다.

어제는 밤을 꼴딱 샜다. 그래서 비몽사몽 간을 헤매고 있던 참이었다. 평소에도 뭐 그렇게 싹싹한 성격은 못 되는 데다, 요즘 여기저기서 뒤퉁스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듣고 있던 참이라서 내 답이 살짝 퉁명스럽게 나갔다. 이 친구 역시 한때는 꽤 상당한 쌈꾼 이력을 지닌 친구다. 벌써 감 잡고 전투태세로 돌입한다.

그 전투일지 가운데 일부를 공개한다. 넘 짦은 글에 대한 독자 서비스 차원에서다. ^^[footnote]사적인 대화 창구인 메신저 창에서 이루어진 애기여서 제삼자가 듣보기에 거친 표현들이 더러 있기에 그런 부분은 완화된 표현으로 바꿨습니다. 그밖에는 거의 날 것 그대로의 생중계입니다.[/footnote]

more..


하민혁
<덧붙이는글> 나중에 안 사실인데,
왜 변희재 얘기를 꺼냈나 했더니 저 친구도 변희재 까대는(죄송~) 글을 하나 썼더라구요. ^^
 
2009/04/03 21:37 2009/04/03 21:37
나에게 영감을 주는 블로그는 없지만 퍽~! -_-;; 그래도 가끔씩 들르는 블로그는 몇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언론史 세로쓰기라는 재밌는[footnote]미안합니다. '의미심장한'으로 썼다가 아무래도 이게 더 맞다싶으서.. -_- [/footnote]  타이틀을 가진 방짜님의 블로그다.[footnote]내가 소개한 블로그 치고 내랑 다투지 않은 블로그가 없는데.. 큰 일이다. 방짜님과는 별로 다투고싶지 않은데 말이다. -_- [/footnote]

어제 방짜님 블로그에 역시 '재밌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조선과 동아, 서로 '똥개'라고 헐뜯다는 글이다. 제목부터가 섹시하다. ^^ 언론史를 조사하다 구한 자료라는데 내 경우야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라 새롭지는 않았지만, 방짜님의 간지 나는 해석에 아주 재밌게 읽었다.

당근 댓글을 달았다. (좋은 글 읽고도 댓글 안 달고 가는 님들 블로그 할 자격 박탈해야 한다. ^^)


그런데.. 이런 글을 듣볼 때마다 답답해지곤 합니다.
왜 아직도 이런 말 밖에는 못 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조선 동아를 능가하는 신문 하나 번듯하게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이 무슨 일제 시대도 아니고 군부 독재 시대도 아닌데 말이지요.
왜일까요?


방짜님도 당근 답글을 다셨다. (방짜님의 답글 이전에 오디오님도 답글을 주셨다. 같이 옮긴다.)


오디오 2009/04/01 21:53  
그릇됀 인식을 하고있으신 분들이 많기때문이죠..
물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그렇개 매도하긴 싫지만
아직도 저런신문의 농간에 놀아나시는 분들이 많기때문에..그런분들이 우리나라에 아직도 많으시기때문에.. 뭔가 잘못됏다는걸 알아채신 분들이 힘을쓸수가 없는거죠..

방짜 2009/04/02 00:29  
오디오님 감사합니다. 제 의견을 추가한다면,

그들이 몇 십년 동안, 여러 '말'을 갈아타면서,
구축한 '권력'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인 듯도 합니다.
그들이 불의와 타협해서 쥐게 된 권력.
그 권력의 힘에 몰리게 마련인 '파이'.
이런 상황에서는...
그들을 능가하는 번듯한 신문 하나 만든다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인 듯 합니다.
그래서 더욱 답답한 일입니다만...

이런 기형적인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과 함께,
새로운 '파이'를 창출하려는 '이쪽'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새로운 '파이'를 만들어낸다는 것 또한,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만...


우선 오디오님 답글에 공감한다. 아마 거의 모든 이들의 표준적인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게 아닌가싶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기꺼운 동의을 표하기가 쉽지 않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아직도 저런신문의 농간에 놀아나시는 분들이 많기때문에.. 뭔가 잘못됏다는걸 알아채신 분들이 힘을쓸수가 없다"는 지적에 심정적으로는 공감을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고 여기는 때문이다. 오히려 무능과 실천력의 부족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방짜님은 오디오님의 주장에 몇 가지 살을 덧붙인다. "그들이 몇 십년 동안, 여러 '말'을 갈아타면서, 구축한 '권력'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인 듯도" 하고, "그들이 불의와 타협해서 쥐게 된 권력. 그 권력의 힘에 몰리게 마련인 '파이'"가 너무 크고 공고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역시 공감한다. 그러나 이 또한 공감 그 이상은 아니다.


하민혁의 진보가 뭐냐고?


이쯤 되면 "그렇다면, 하민혁이 니 생각은 대체 뭐냐" 혹은 "조중동 능가하는 방법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는 등의 얘기가 나올 법 하다. 당근이다. 생각 있고, 방법도 있다. 나아가 실례까지도 있다. 이건 거꾸로 말하는 게 얘기를 풀어가기도 쉽고 듣보는 이가 이해하기도 편하다. 실례부터 들겠다.
 
네이버 뉴스를 보자. 이거 조중동보다 분명히 후발주자다. 하지만 열독율과 신뢰도, 그리고 영향력 면에서 조중동보다 결코 못 하지 않다. 오프신문의 특성만 배제한다면[footnote]네이버가 오프신문을 창간하는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큰 차이는 없을 거라고 본다.[/footnote] 모든 면에서 조중동을 능가한다. 왜 안 된다는 말인가?

가능하다는 게 하민혁이 생각이다. 그리고 그 일에 직접 뛰어들어서 실행도 해봤다. 지금도 나는 이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하민혁이 니는 왜 실패했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쓸데없이 딴죽을 거는 넘들이 하 많았기 때문이다. 눈에 불을 켜고 하민혁이 죽이겠다고 달려든 넘들이 넘 많았다.[footnote]그게 하민혁이의 한계라고 한다면 그건 당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다.[/footnote] 특히 이른바 진보입네를 부르대는 넘들이 가장 크게 지달들을 떨어댔다.[footnote]하민혁이는 경험하지 않은 거는 말하지 않는다. 하민혁이 이른바 입으로 '진보' 부르대는 넘들을 보면 우선 사시 눈으로 쳐다보는 데는 이렇게 다 이유가 있다.[/footnote]

사실 어느 곳에서나 새로운 길을 찾아 애써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방향이 정해지면 묵묵히 그 일을 실천하는 이들이다. 예컨대, 안티조선 운동의 경우를 들어도 그렇다. 지금 안티조선 운동이 어떻네 하고 설레발 치고 다니는 님들 여러 곳서 본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대체 어떤 안티조선 운동을 했다는 건지를 도통 모르겠다. 오히려 안티조선 운동 초기부터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이들 가운데 자신이 안티조선 운동했다고 떠벌이고 다니는 이들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같은 문제 의식은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의 취임사에서도 읽힌다.


진보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보의 위기는 탄압보다도 스스로의 무능과 오판으로부터 기인한 바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낮은 곳에서, 음지에서 자신을 희생해가며 어렵고 힘든 자들의 편에 서서 헌신하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진보의 위기는 이들이 자초한 것이 아니라 진보운동을 주도해온 사람들의 편협한 인식과 부족한 능력과 시대착오적인 낡은 노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정체성 빼고는 다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소리 질렀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진보정당에 대해 가해진 뜨거운 지적과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혁신을 꾀하겠습니다. 서민을 위한다고 선언만 하는 집단이 아니라 서민에게서 진정한 벗으로 인정받는 당으로 거듭 나겠습니다. 민주노총에게만 의존하는 정당이 아니라 민주노총으로부터도 소외된 더 낮은 곳의 노동자와 고용체계에서도 축출된 영세 자영업자들을 대변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노동이 강한 나라여야만 서민들이 잘 살수 있다는 보편적 경험을 이 땅에서도 실현시키기 위해 노동과 정치의 기계적 분업구조를 극복하고 노동과 진보정당이라는 양날개를 동시에 강화시키는 일에 직접 나서겠습니다.


지난 3월 29일 진보신당의 새로운 대표로 선출된 취임사 가운데 일부다. 노회찬 대표는 말한다.


"서민을 위한다고 선언만 하는 집단이 아니라 서민에게서 진정한 벗으로 인정받는 당으로 거듭 나겠습니다. 민주노총에게만 의존하는 정당이 아니라 민주노총으로부터도 소외된 더 낮은 곳의 노동자와 고용체계에서도 축출된 영세 자영업자들을 대변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노동이 강한 나라여야만 서민들이 잘 살수 있다는 보편적 경험을 이 땅에서도 실현시키기 위해 노동과 정치의 기계적 분업구조를 극복하고 노동과 진보정당이라는 양날개를 동시에 강화시키는 일에 직접 나서겠습니다."고.
 

이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 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동안 말로만 진보를 했다는 얘기다.
사실이다. 그 이유를 노 대표는 이렇게 짚고 있다.


"진보의 위기는 탄압보다도 스스로의 무능과 오판으로부터 기인한 바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낮은 곳에서, 음지에서 자신을 희생해가며 어렵고 힘든 자들의 편에 서서 헌신하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진보의 위기는 이들이 자초한 것이 아니라 진보운동을 주도해온 사람들의 편협한 인식과 부족한 능력과 시대착오적인 낡은 노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라고.


바로 내가 이른바 진보 세력에게 10년 전부터 해온 말이다.


하민혁의 진보


나는 이 땅의 진보적 토양은 충분히 마련되었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토양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낮은 곳에서, 음지에서 자신을 희생해가며 어렵고 힘든 자들의 편에 서서 헌신하는' 이들이 만들어온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토양을 편협하고 시대착오적인 인식과 할 줄 아는 건 상대에 대한 비난과 비아냥밖에 없는 무능한 이들이 왼갖 잡초로 망쳐놓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이름들이 몇 있지만, 쓸데없는 인신공격으로 비칠 수 있기에 생략한다. 다만, 자신의 무능을 감추고 호도하기 위해 '모든 게 조중동 탓'이고, '이명박 탓'이며, 나아가 '멍청한 민중 탓'이라고 부르대는 이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싶다. 그런 자들이야말로 민중의 적이며 인민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자들이기 십상인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할 바는 하지 않은 채, 혹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민중들에게 가당찮은 적을 만들어 그들과 싸울 것을 종용하면서 정작 민중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차단해버린다. 눈앞의 암울한 현실만을 민중에게 반복적으로 주입하므로써 민중이 애오라지 거기에 목을 매게 만들어버린다. 그들에게 있어 민중이란 자신들이 세팅한 틀 안에서 충실하게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일 뿐이다.


"하민혁씨는 진보입네 하는 행태가 가관인 치들이 싫은건가요 아니면 현재 보수라고 하는 우리나라 지배계층에 반대하는 사상이나 행위 자체도 다 싫은건가요?"


어제 쓴 글에서 초이님이 묻고 있는 말이다. 이 글로 나는 초이님의 질문에 일정 부분은 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싫은 것은 일부(가 대부분이다) 얼치기 진보들이 만들어 놀고 있는 그 판이다. 그 판이 내가 생각하는 진보와는 전혀 딴 판인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 판에서 놀고 있는 이들은 진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들에게서 읽히는 것은 다만, 적대적 공생관계의 고착화 뿐이다. 그걸로 자신의 입지를 보장받을 수 있는.

얘기가 많이 겉돌았다. 다시 처음의 방짜님 블로그 얘기로 돌아가보자.

방짜님 블로그는 그 타이틀이 말해주듯 분명한 지향점을 갖고 있다. 언론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나는 여기에 진보가 나아갈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이들도 이렇게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블로거 일반, 혹은 시민 일반이 모두 거대담론에 빠져 있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자신의 전문 분야도 아닌 일에, 그것도 국정을 다루는 모든 일에 블로거 혹은 시민 일반이 나서 일일이 참견을 해야 하는 사회란 도무지 제대로 된 사회, 건전한 사회라 보기 힘든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한 방이다. 블로거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시민 일반이 집중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한 방을 위한 준비여야 한다. 자기 이웃과 함께 하는 일이고 그 이웃과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다.[footnote]자신의 하룻밤 경험을 통해 '정명훈'을 '정명박'으로 만드는 한갓된 인식틀로 이룰 수 있는 세상이란 도무지 진보와는 거리가 먼 개같은 세상일 뿐이겠다.[/footnote] 

방짜님 블로그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도 결국은 이 얘기의 다른 표현이다.

조중동이 문제가 많다면, 그들을 능가하는 신문을 만들면 되는 일이다.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금이 무슨 일제 시대도 아니고 군부 독재 시대도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그게 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인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 자부터 함 다시 볼 일이다.




<덧붙이는글> 음.. 내가 봐도 넘 길다. -_
  
2009/04/03 01:05 2009/04/03 01:05

"지금 한국은 '저널리스트의 킬링필드'다."

독설닷컴 고재열 기자의 말이다.  국경없는기자회가 목격한 한국의 참담한 언론상황 이라는 글에서다. 국경없는기자회(RSF) 대변인 겸 아시아·태평양 데스크인 뱅상 브로셀 기자가 한국을 다녀갔는데, 그가 떠나기 전에 고 기자가 했다는 말이다.
 

떠나는 그에게 폭탄주를 권하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안내하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일이었다.
영화 <킬링필드>에서 뉴욕타임즈 기자를 안내하는 캄보디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 한국은 '저널리스트의 킬링필드'다.
한국의 언론통제 상황을 잘 알려주기 바란다.
프랑스에서 이런 문제가 생기면 내가 가서 취재해 주겠다"라고.
- http://poisontongue.sisain.co.kr/760


브로셀 기자의 국내 취재에 동행했다는 고재열 기자가 한국의 언론을 보는 시각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지금까지 고 기자가 블로그에 쏟아낸 글들이 어떤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아닌가싶다.

고재열 기자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것은 그의 생각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그게 폭탄주가 돌아가는 술자리서 나온 사적인 얘기라면, 거기에 다소 거친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를 걸고 넘어져 문제를 삼을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 사적인 얘기를 블로그에까지 올리면 문제는 다르다. 그건 공개적인 의견의 피력인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저널리스트의 킬링필드' 상황이라니..
 


아무리 비유라고 해도 이건 지나치다. 감정의 과잉이다. 고재열 기자는 '킬링필드'의 실제가 어떠했는지는 알고 있는 걸까? 고 기자에게 킬링필드'는 혹여 실제가 아닌 관념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게다가 블로그에 연속으로 올라오고 있는 그의 '국경없는기자회(RSF)'에 대한 추종은 거의 맹목적이다. 동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굴욕감을 느낄 정도다. 도대체 '듣보잡'인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뭐길래 한국의 괜찮은 기자 하나가 그를 에스코트하는 딸랑이 '캄보디아인'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말인가? 추하다. [footnote]고재열 기자의 기생의식이 읽혀서다.[/footnote]

고재열 기자가 날이 갈수록 오버를 거듭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독한 인식의 편향성을 보이는 설익은 주의주장이 갈수록 그 도를 더 하고 있다. 왜 이럴까?

'단기간에 파워블로거가 되는 방법'까지 특강했다는 고재열 기자다. 혹여 고 기자는 지금 파워블로거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고 기자는 2009년 한국을 정말로 '킬링필드'의 현장으로 여기고 있는 것인가?

장자연 리스트의 언론사주 안고 논개처럼 자폭하겠다는 그의 발언이 빈말로만 들리지 않는 대목이다.
무섭다. 그의 견고한 인식틀이.. -_



 

2009/04/02 13:45 2009/04/02 13:45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이쪽으로 처리해주세요.
농협 356 0048-0179-33
예금주:강신오
010-4527-8494

이같은 내용의 문자가 계속 오는데, 전화를 하면 전원은 꺼져 있네요. -_ 
이거 문자 피싱입니다. 주의하세요.

다음은, 너무 짧은 글을 커버하기 위해 덧붙이는 서비스 영상입니다. ^^






 

2009/04/02 12:37 2009/04/02 12:37
일상에 묻혀 지내느라 최근 신문을 통 보지 못 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손석춘 기자와 김동민 교수가 '때아닌' 진보-개혁 논쟁을 벌인 모양이다. 어김없이(!) 노무현 대통령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대에서다.

노무현을 사모하는 사람들(이제부터 '노빠'라는 말은 쓰지 않기로 한다)이 들으면 사뭇 언짢아질 수 있는 얘기지만, 노무현 덕분에 진보-개혁 세력이 20년 동안 쌓아온 노력이 한꺼번에 날아갔다는 손석춘의 지적은, 김동민의 헛발질에 관계없이 타당하다.

노무현은 애초에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크게 보아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노무현 자신을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민주-개혁 세력을 위해서이다.

후자부터 말하자면, 이에 대한 명징한 사례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민주-개혁 세력의 다툼과 분열 양상이다. 분열의 원인은 단순하다. 일찌기 시인 신동엽이 토로한 그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가리지않은 맹목적 '이합집산'의 결과다.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강준만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지난 대선 정국에서 이들은 오직 권력만을 탐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왜 권력을 쟁취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이유나 기본적인 원칙조차도 없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이것만을 외쳤다. 그게 한계였다. "아내를 버리라는 말이냐?" "전쟁하자는 말이냐?" 따위의 수사에도 기꺼이 미쳐 환호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왜'에 대한 논리도 부박했고, '그 다음은 어떻게'에 대한 인식은 아예 부재했다. 한마디로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지지세력의 분열 양상이자, 10%대 지지도의 여당이고 대통령이다.

민주-개혁 세력, 나아가 진보-개혁 세력을 위해서는 권력에의 의지 혹은 권력에 대한 탐욕보다는 자신의 이념 혹은 신념의 공고화에 오히려 더 치열했어야 옳았다. 권력욕에 눈이 먼 이들에게는 그러나 이념이나 신념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스스로의 존재 의미와 근거 자체가 사라지는 지점이다.

노무현의 경우는 '착각' 혹은 '착시'에 사로잡힌 경우다. 엄밀하게 말해 노무현은 민주-개혁 세력이 내세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노무현 현상의 주체는 노무현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서는 유시민 조차도 분명하게 짚어준 바 있다. "엉겁결에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 노무현에 대한 유시민의 진단이었다.

노무현도 처음에는 이를 인정(하는 듯?)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등의 수사를 구사하던 인수위 시절이 그러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서는 순간 엄연한 이 팩트를 노무현은 이내 외면 혹은 폐기해버렸다. 그리고는 여느 권력자들과 똑같이 스스로의 '성공 신화'에 빠져버렸다. '특검 수용' '성공 특강' 등을 거리낌없이 행하던 바로 그 어름이다.

손석춘과 김동민 간의 논쟁은 이 두 가지, 즉 원칙없이 이루어진 '껍데기들의 이합집산'과 '노무현의 착각'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러므로 이들의 논쟁은, 그것이 아무리 치열하게 전개된다 해도, 아니 치열하면 할수록 더더욱 '권력 논쟁' 혹은 '감정 싸움'의 수준을 넘어설 수가 없다. 원인은 제쳐두고 결과만으로 벌이는 때아닌 혹은 때늦은 논쟁일 뿐인 때문이다.  

민주-개혁 세력 혹은 진보-개혁 세력이 진정으로 고민하고 토론해야 하는 것은 손-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식의 소모적인 언쟁이 아니다. 원인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내실화 곧 '알맹이'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동의에까지 이른다고 해도(실은 여기까지 이르기도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과연 이들로부터 방향 전환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원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이 긍정적이지 않아서다. 역사는 우리에게 한번 권력에 맛을 들인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버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저들 손-김 간의 논쟁에서 희미하게(먹물들의 특성이다) 읽히는 것은, 진보-개혁-민주-평화라는 그럴싸한 수사 아래 벌어지는 (어리버리) 여당의 분열 사태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저 독한 '권력에의 의지'다. 노무현 정권이, 아니 더 정확히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다.

'중이 고기맛을 알면 절간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권력이 주는 단맛에 취한 이들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더 치열해주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남북 분단 상황과 군사 정권이 지닌 한계와 패착에 빌붙어, 이론적 토대 구축이나 비판적 성찰 없이 애오라지 '민족'과 '타도'를 외치는 것만으로 권력에 맛을 들인 이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 2007-01-06 

 

<뱀발> 이런 이야기 하면 으레 '그럼 이회창이 되었어야 한다는 말이냐'고 따지고 드는 이들 꼭 있다. 제삼의 길은 있었다고 답하는 일도 귀찮고 하니, 이들에게는 여권 2인자(유시민)의 말을 그대로 빌어 미리 답하겠다. "이회창이 대통령 되었어도 나라 안 망한다."
또 있다. "지금 이만큼이나 민주화된 것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이 또한 최고 통수권자의 표현을 그대로 빌어서 미리 답해둔다. "노무현이 아닌 누가 대통령이 되었어도 현재의 민주화는 당연히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덧붙이는글> 위에 옮긴 글은 지금부터 2년 전 다른 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다른 얘기를 하나 하기 위해 우선 이 글을 옮겨둡니다.
 
2009/04/01 12:37 2009/04/01 1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