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진보의 미래, 분명히 있다
- 주대환 사민주의연대 대표 발제문에 대한 응답

김두수(사회디자인연구소 상임이사)


1. 오랜만에 보는 성공적인(?) 토론회


나는 지난 3월 26일(목),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반도선진화재단’과 ‘좋은정책포럼’이 공동 주최한 <한국의 이념논쟁Ⅱ, 한국의 진보를 말한다>에 청중으로 참석했다. 이 토론회는 작년 11월 27일(목) ‘한반도선진화재단’과 ‘한국미래학회’가 공동주최한 <한국의 이념논쟁Ⅰ, 한국의 보수를 말한다>에 이은 후속편이었다. 이번 토론회는 작년 보수 토론회에 20여명 남짓 참석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엄청난 성황이었다.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이 꽉 차서 일부의 청중들은 서서 들어야 했을 정도로 오래간만에 보는 성공적인 토론회였다. 토론회는 1부와 2부로 진행되었는데, 1부는 한국 진보의 정체성과 가치라는 주제로, 2부는 한국 진보의 분야별 과제와 전략이라는 주제로 분리하여 토론하였다. 1부에서 제1주제로 ‘한국 진보의 비교사적 고찰’을 김윤태(고려대 사회학 교수), 제2주제로 ‘한국 진보, 그들은 누구인가’를 홍성민(동아대 정치학 교수), 제3주제로 ‘한국 진보에 미래는 있는가’를 주대환(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이 했다. 강명세(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정치학), 장덕진(서울대 교수, 사회학), 김일영(성균관대 교수, 정치학) 세 사람이 토론자로 나왔다. 2부에서 제4주제로 ‘한국 진보, 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신정완(성공회대 경제학 교수), 제5주제로 ‘한국 진보, 글로벌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유종일(KDI School 경제학 교수), 제6주제로 ‘한국 진보, 북한과 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김근식(경남대 정치학 교수)이 했다. 이병천(강원대 교수, 경제학), 이 근(서울대 교수, 정치학), 안세영(서강대 교수, 경제학) 세 사람이 토론자로 나왔다.

한국의 토론회는 길게 발제하고, 짧게 토론하는 것이 특징이다. 토론회 당일은 각 발제자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아보는 정도에서 그치고 중요한 쟁점 토론은 다음 토론회를 기약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쟁점에 관한 후속 토론회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거의 보지를 못했다. 또한 발제자와 패널이 토론 쟁점을 주고받으면서 충분히 토론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앞으로는 이러한 토론회를 한국식 토론회라고 불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를 말한다>라는 토론회는 많은 아쉬움을 남긴 토론회였다. 첫째, 짧은 시간 배정, 오후2시부터 6시까지 6개의 주제를 토론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주제에 집중할 수 없는 청중,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청중에게 발언 기회를 주자, 토론주제에 벗어나는 냉전 논리로 무장한 질문과 생경한 주장이 튀어 나왔다. 셋째, 분명한 쟁점 형성의 실패, 토론을 통해 앞으로 계속 논쟁을 진행해야 할 것을 추출해 내는 토론회로 수렴되어야 했는데, 생각의 차이만을 나열하고 말았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6개의 주제 모두에게 흥미를 느꼈고, 각 주제별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주대환 대표가 발제한 ‘한국 진보에 미래는 있는가’라는 주제였다. 주대환 대표의 발언처럼 ‘내부 고발자’의 입장에서 한국 진보를 말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주 대표는 ‘내부 고발자’의 입장에서 하는 발언으로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하겠다고 했다. 나는 주대환 대표를 국민승리21에서 처음 만나서, 민주노동당, 사회민주주의 연구회, 등에서 같이 활동해 왔다. 주 대표하고는 정치적 입장이 비슷하기도 하고, 죽이 잘 맞았지만, 내가 2000년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난 후부터 한동안 교류가 없었다. 지금은 나도 당적이 없는 무소속이고, 주 대표도 당적이 없는 무소속이다. 2000년 전후에 ‘사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하자고 한동안 같이 공부했지만, 나는 사민주의의 한계를 보았고, 주 대표는 사민주의의 효용성을 보았다. 이날의 발표문도 그러한 연장선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그래서 주대환 대표의 ‘한국 진보에 미래는 있는가’에 응답하고 싶었다.


2. 한국 진보는 파산했는가?


주대환 대표는 김서진 창조한국당 최고위원의 말을 빌려서 “진보는 파산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지식인 사회가 한국의 진보는 침체하고 있다고 대체적으로 공감한다고 했다. 그 첫 번째 현상으로 민주당의 대통령선거의 참패와 총선의 거듭된 참패, 그리고 이명박에 대한 지지도가 낮은 상태에서도 민주당은 10%대의 지지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 두 번째 정치현실에서 김대중 직계세력과 노무현 직계세력의 분리, 세 번째 현상으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분열, 네 번째 현상으로 문국현의 창조한국당의 절반의 성공, 또는 총체적 실패로 보고 있다. 단순히 위기만이 아니라, 어쩌면 진보가 해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진단한다. 주 대표의 이러한 지적에 다들 비슷하게 공감할 것이다. 주 대표의 말대로 김대중 직계, 노무현 직계, NL, PD라는 진보의 4대 세력과 창조한국당 세력까지 포함한 지금까지의 진보가 망했기에, 지금까지의 진보는 미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 진보의 파산이라는 현상이 아니라, 파산의 이유일 것이다. 진보의 실패, 진보의 해체, 진보의 파산으로 표현되는 현상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그 파산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지금 정치권은 진보가 파산한 원인을 정확하게 모른다. 쉽게 노무현의 실패에 모든 잘못을 돌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치권만 아니라, 자신을 진보로 생각하는 학자 그룹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노무현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고 넘어가서 국민에게 다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생존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 하나 살리자고, 진보 모두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도 무책임하지만, 진보를 살리자고, 노무현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는 것은 더욱 비겁한 짓이다. 진보의 파산에는 노무현의 정치적 정책적 실패를 넘어서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내장되어 있다. 이 점을 우리 사회디자인연구소는 시대정신의 대전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민주화 시대의 마감이자 한국 근대화 60년이 마감하는 시기가 노무현 집권기간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가 파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민주화의 성취를 통해 시대적 과제가 해소되자 비로소 애매모호하게 결합되어있던 진보가 드디어 분화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상은 파산이지만, 정확하게는 분화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민주진보’ 또는 ‘진보개혁’세력이라고 뭉텅 거려서 불려왔던 단일전선체가 분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부정적 측면이 두드려져 보이지만, 성찰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진보노선이 정립될 때는 긍정적으로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3. 한국 진보는 무엇을 넘어야 하는가?


주 대표는 2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친북좌파’라는 오해 혹은 덫, 또 다른 하나로 ‘민주노총’이라는 괴물 또는 계륵이라고 말한다. 자칭 진보세력들은 지금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진보정부인지, 아니면 신자유주의 정부인지 헷갈린다는 것이다. ‘좌파’라는 용어를 가지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평가해 보면, 전문가마다 생각이 다르고, 오히려 진보진영의 학자들은 ‘신자유주의’정부라고 규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노무현 정부를 좌파냐? 우파냐? 하는 관점으로 평가하는 틀을 가지고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글에서도 밝혔듯이 좌-우의 개념은 서구 역사에서 탄생한 역사적 개념이기에 한국에 적용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국가와 시장의 문제로 좌-우를 구분할 수밖에 없는데, 한국사회의 발전에 따른 시대적 차이 때문에 전통적인 좌-우 개념으로 해명하기가 무척 곤란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는 필요하다면, 좌파적 정책도 썼고, 우파적 정책도 동시에 쓰기도 했다. 노무현의 관점에서 보면, 좌파적, 우파적 정책이 아니라 ‘진보적 정책’이었을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연한 진보적 정책’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책들을 보면서 소위 ‘진보학자’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틀에 맞추어서 재단하기 때문에 노무현을 좌파정부라고 하거나 신자유주의정부라고 하면, 절반은 정답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오답이 될 뿐이고,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오류가 되어 버린다.

주 대표가 ‘좌파’와 짝을 이루는 합성어인 ‘친북’이라는 용어를 청산하자고 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주 대표가 말하듯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정책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친북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대표적인 개성공단의 경우에도, 어쩌면 한국 산업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중소기업정책으로 보기도 한다. 북한의 지원 액수에 대한 ‘퍼주기’ 논쟁이 얼마나 허구이며, 정치적 마타도어인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다만 극우 신문들의 선동이 일정하게 국민들에게 먹힌 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는 ‘친북’의 문제에서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친북’의 문제는 주 대표가 이야기하듯이 남한 내부의 NL운동세력 때문이다. 소위 ‘민족민주운동’을 표방하고 있는 세력 내부에서 아직도 북한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북한체제에 우호적이고, 북한의 대남정책을 동조하는 경향 때문에 발생한다. 이들은 진보진영 전체에서 극소수에 불과하고, 떳떳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공개하지도 못하지만, 광범한 민족주의 세력에 결합하여 보호색을 띤 채로 활동하고 있다. 진보진영 내부의 극소수를 가지고 극우세력들이 선동의 호재로 난리부르스를 치고, 극우신문이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친북좌빨’이라는 용어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친북좌빨’이라는 용어를 쓰면 쓸수록 극우의 밑바닥이 들어나는 것이다.

주 대표가 ‘민주노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주 대표는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의 분당사태에서 노동자 대중의 힘으로 정파를 제압하는 힘도 발휘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이제는 ‘계륵(鷄肋)’이라고 한다. 민주노총의 주요한 문제가 민주노총 내부의 정파적 충돌, 그 배후에 존재하는 지식인 활동가, 그들이 주도한 ‘전투적 조합주의’ 등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대체로 동의가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노총 조합원의 구성, 물질적 토대를 주목해야 한다. 우리 사회디자인연구소 김대호 소장이 열변을 토하는 점은 민주노총은 조직노동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것이고, 조직노동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이다. 1500만 근로자 중에서 200만 명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노동운동이 진보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 대표와 우리 디자인연구소의 생각이 민주노총에 대한 결론에서는 일치한다. 진보운동이 민주노총과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민주노총에 의지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진보의 재구성에 노동운동도 동참해야 하지만, 지금의 관성적인 노동운동노선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무엇이 ‘새로운 진보’인가?


주 대표는 “먹고 사는 문제에 무관심한 혹은 무능한 진보”라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이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후진국형 진보 ‘민족민주운동’ 시절을 탈피하지 못한 탓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주 대표가 이야기하는 ‘민족민주운동’식 진보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대적 과제가 대전환하고 있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것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거론하면서 이제는 실질적인 민주주의, 경제적 민주주의(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들고 나가자고 하는 주장, 역시 시대적 전환을 보지 못하고, 관성적 운동에 빠져있다는 생각이다.

주 대표는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경제적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실천을 민족민주운동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운동으로 업데이트하자고 한다. 선진국에서는 3세대가 경험했던 변화를 한국은 한세대가 경험하고 있는데, 1920년대 코민테른 시절의 진보, 1950년대의 사회주의인터내셔널 시대의 진보, 1980년대 녹색당 시절의 신좌파로 분류한다. 주 대표의 분류법에 따르면 사민주의 운동을 해야 마땅하다. 녹색당은 주류정당이 아니기에 사회적 주류, 즉 집권을 하려고 하면, 사민주의 말고 달리 선택할 길이 없다. 하지만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한국사회가 급격하게 압축성장하고, 글로벌화 되어 있는 초복합사회에서 1950년대 사민주의가 설득력이 있을까? 국민들의 복지국가에 대한 요구가 사민주의로 곧바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사민주의자들은 대체로 북구형 사민주의를 이상형으로 주장하고 있다. 높은 사회적 보장과 평등한 삶을 특징으로 하는 북구형 사민주의 국가가 좋아보지만, 높은 세금과 일률적인 임금체계(연대임금체제)에 동의하는 국민은 없다. 한국에서 북구형 사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은 복지사회에 대한 허구의식에 기초한 일종의 거품이다. 한국사회의 운영원리와 경제체제, 관습은 북구형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단적인 예로 북구의 사민주의는 노동조합의 조직화에 근거하고 있다. 아직도 40%이상의 조직률에 기초하고 있지만, 한국은 10% 조직률에 불과하다.

주 대표는 사회민주주의를 선진문물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한국 국민에서 대중정치이념으로 잘 받아들일 것이라고 하지만, 지식인에게 선진사회가 ‘유럽’이라고 할 지 모르지만, 국민 일반에게 친숙한 선진문물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오고 있다. 한국 사회 60년은 한미동맹의 60년임을 간과한 것 같다. 한국의 헌법, 정치적 시스템은 점점 미국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선거시스템도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로 불리는 미국식에 가깝다. 그 모든 점에서 ‘사민주의’가 선진문물이라는 이유로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는 것은 너무 낙관적 해석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국민들은 ‘사민주의’의 정치적 실체로 이미, 민주노동당이나 노회찬, 심상정 등의 불리는 ‘진보신당’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회찬 노선이 정확하게 사민주의 노선인지는 모르지만, 신문과 방송에서 자신의 지향을 북구 사민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이 모두 통합이나 연합의 형태로 단일한 정당체제에 결합한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이들은 엄연한 정치적 실체다. 물론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조사를 실시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런 점에서 ‘사민주의’가 새로운 진보 이념이고, 사민주의 깃발 아래 모두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일부의 진보세력들 중에서. 지금의 세계적 경제위기를 보면서,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이명박의 권위적인 통치를 보면서, 복고적 대안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시장자유주의가 실패했으니 정부개입주의가 지배할 것이라든가, 국내적으로 권위주의체제를 기반으로 강압통치를 실시하기 때문에 여전히 민주주의 깃발이 유효하다는 생각은 단순하고 기계적인 결론에 빠지는 오류다. 지금은 미래를 향한 융합의 시대다. 새로운 정치이념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새로운 사회운영의 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측면에서 훨씬 고차원적인 해법이 나와야 한다.


5. 진보의 재구성을 위하여


주 대표는 진보의 가장 큰 문제로 “국민을 감히 가르치려 했던 자세”에 있다고 했다. 그런 태도를 갖게 된 뿌리는 ‘도덕적 우월감’이란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심정적 정서적으로 동감이 되긴 한다. 그러나 기본 성찰의 자세를 이야기하면서 정신적 접근을 하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정답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는 진보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을 직시하는 실사구시적 시각이 결여된 이념적 사고체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인생의 전반기에 독재정권과 투쟁하면서 습득한 단편적인 이념과 세계관이 후반기 인생의 정신세계를 여전히 지배하는 낡은 이념이다. 이제는 한국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새로운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으로 새롭게 재정립해야 할 때다. 그래서 진보의 재구성에서 첫 번째 해야할 일이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된다.

주 대표가 제안하는 ‘뉴레프트 운동’은 동의가 어렵다. 한국에서 좌파는 존재기반이 없다. 영국의 노동당은 좌파임이 자랑스럽지만, 미국의 민주당은 우파이고 좌파가 없다. 한국의 좌파운동은 비주류의 길이며, 극소수자의 자기만족을 위한 위안일 뿐이다. 특히 정치의 세계에서 좌파를 표방할 수도 없다. 영어로 ‘뉴레프트’하면 고상하게 들을지 모르지만, ‘좌익 빨갱이’ 한방으로 끝나 버린다. 하물며 <한국의 보수를 말한다>에서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는 “뉴라이트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뉴라이트운동이 죽었는데, 상대적으로 ‘뉴레프트 운동’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운동을 하자는 것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또한 ‘뉴레프트 운동’제안에서 과제로 제안하는 것은 ‘뉴라이트’에서 실천한 운동에 대한 방어적 실천 과제처럼 느껴진다. 도덕적 우월감 없는 운동이라든지,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는 언술이라든지, 10년 전에 극복해야 할 과제를 뒤늦게 참회록을 쓰는 느낌이다. 뒤늦게라도 참회록을 쓰는 것이 마음 편하겠지만, 지금 밀어 닫치고 있는 미래적 과제에 실천으로 해답을 찾기도 벅찬 상황에서 한가하게 과거의 참회가 적시성이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주 대표가 말하는 나비의 우화(羽化)와 환골탈태(換骨奪胎)에 적극 동의를 하면서도 진보의 재구성 방법에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 이유다.

주 대표는 한국의 사민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로 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동의가 어렵다. 계급의식, 계급 문화, 생활방식에서도 노동자계급인 한국사회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에 ‘노동당 노선’이 실패했다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러면서 이러한 조건에서 한국적 ‘사회민주주의’ 가능하며, 정치전략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은 노동계급이 없는 하부구조(?)와 사민주의의 상부구조(?)가 이론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이상한 형식이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의 정치 전략으로는 ‘민주당’노선을 선택하자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국 노동당처럼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경쟁관계를 허물고, 보수당과 노동당이라는 새로운 관계로 재편하기 어렵기 때문에, 민주당 노선을 현실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대안야당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민주당과 차별성이 없고, 콘텐츠가 부실하고, 비전이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은 깊은 새겨야 할 대목이라 생각한다.

진보의 재구성은 길고 지루한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 정치전략으로는 민주당의 보수 세력을 넘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색해 볼 수밖에 없다. 크게는 2가지인데, 하나는 대안야당 건설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야당연합론’이다. 대안야당을 건설하여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사람들은 그래도 용감한 사람들이다. 정치사적으로 보면 힘들고 어려운 선택이다. 야당연합론을 가장하는 ‘트로이의 목마’론은 수혈론의 또 다른 버전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가 ‘트로이 목마’로 포장되지 않을까 염려한다. 이 2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은 진보의 재구성을 통한 가치의 정치를 최우선하지 않고, 정치 전략적 방식으로 접근을 할 때, 발생하는 협량한 구도정치의 함정이다. 주 대표가 제안하듯이 여러 정치세력들의 이합진산이나 주도권 다툼을 초월하여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권력을 추구하기보다는 콘텐츠의 준비에 힘쓰고, 단기적인 승패보다는 장기적인 역사적 비전으로 나아가는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을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끝-




 
2009/05/08 16:36 2009/05/0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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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손석춘, 진보의 진보적 재구성에 동의한다

    Tracked from 하민혁의 민주통신 2009/05/08 16:40  삭제

    새사연의 손석춘이 드뎌 회심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촛불의 뜻 살린 ‘새로운 정당’ 필요하다"면서 '진보의 진보적 재구성'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로써 그동안 주로 이론적 작업에 치중해온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이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실천적 대안 하나를 공개한 셈이다. 어렴풋이나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창조한국당과 민주당 일부로 흩어져있는 진보적 정치세력이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과 더불어 정치적 대안을 만들려면 재구성이 관건이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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