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역감정’을 말하는가 (3) | ||
- DJ정권 그리고 강준만의 희한한 ‘노선’과 ‘행태’ | ||
| ||
![]() 그는 여기서 김대중 정권을 비판한다. 김 정권이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선이 빚는 딜레마’에 빠져 악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거기서 비판의 대상은 김대중 정권이 아니다. 강준만이 비판의 타깃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반 독자들이고 일반 국민들이다.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란의 딜레마에 빠져 잘못된 비판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의 ‘노선’과 ‘행태’ 그러나 강준만의 이 주장은 그렇게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강준만 자신도 자기가 하는 말에 그렇게 썩 만족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김대중 정권이 코너에 몰리고 있고 그래서 과거에 자신이 주장한 사항들이 대거 빗나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김대중 정권과 자신의 비호를 위해 뭔가 새로운 논리를 하나 만들어내기는 해야겠는데 아직은 마땅한 논리가 생각나지 않아 대강 얼버무리고 있다는 인상이다. 강준만은 '자기 개혁에 소홀한 현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마저 왜 수구 언론의 준동으로 매도되어야 하는 건지'를 묻고 있는 어느 독자의 글에 대한 답변 형식을 빌어(강준만은 이 글을 통해 독자에게 3번이나 답을 한 셈이 된다. 그가 이 질문에 대해 얼마나 곤혹스러워 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싶다. 그의 답변이 몹시 궁색해 보이는 건 아마 이런 때문이리라), 김대중 정권의 속성을 ‘노선’과 ‘행태’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 다음 질문을 던진 독자가 실은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란의 딜레마에 빠져 잘못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고 말한다(무식한 탓이겠지만, 사실 나는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란의 딜레마”라는 이 수사가 도무지 수상하기만 하다. 이게 문법에 충실한 구문이기나 한 것인지 몇 번을 읽어봐도 참 아리송한 문장이다). 좀 길더라도 맥락이 닿는 데까지 옮겨보기로 하겠다. 주장하는 바가 얼른 잡히지 않을 뿐더러 강준만 자신조차도 이 글의 앞뒤에서 다소간은 중언부언하는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선’과 ‘행태’를 구분하여 전하고자 하는 강준만의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현 정권은 ‘노선’에서 보자면 개혁 노선이다. 그러나 그 ‘행태’는 아직도 수구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김대중 정권을 비판할 때는 으레 ‘노선’이 아닌 ‘행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김대중 정권의 노선은 ‘개혁정권’이고 그러므로 ‘노선’이 아닌 ‘행태’를 두고 비판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비판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독자에게 “김 정권의 문제는 ‘행태’이지 ‘노선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수구 기득권 세력의 ’행태‘에 대해선 더할 나위 없이 관대한 사람들이 왜 김 정권에게선 오직 그 문제만을 발견하는 건지 그 점도 의심해보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하고 있다. ‘노선’과 ‘행태’는 별개인가?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강준만의 주장에 따르면 현 정권은 개혁을 하자고 하면서도 그 실천에 있어서는 역대 정권들과 바를 바가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잘못된 ‘행태’를 그냥 두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잘못이라 지적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강준만이 말하는 ‘노선’과 ‘행태’의 구분이라는 게 과연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그건 다만 말장난에 불과하다. ‘딜레마’에 빠져서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준만 자신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지 않은가? ‘개혁’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행태’를 합리화 하겠다는 그 야무진 생각만 놓아버린다면 이런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한 집단의 ‘노선’은 그 집단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지 ‘노선’ 따로 ‘행태’ 따로 놀 수 있는 건 아니다. 강준만의 말처럼 ‘노선’은 단지 그것을 ‘천명’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고 ‘행태’와 별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개혁’에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개혁에 성공하지 못할 정권이 어디 있겠는가? 개혁을 부르짖는 모든 사람은 이미 개혁에 성공하지 않았겠는가? 역대 정권 가운데 개혁을 주창하지 않는 정권은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 ‘수구 기득권 세력’ 혹은 ‘수구 집단’임을 표방한 정권은 없었다. 예를 들어, 강준만이 독재정권이라 부르는 전두환의 5공 정권도 개혁을 주창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당명마저도 ‘민주정의당’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건 강준만식으로 말하자면 ‘민주정의’를 노선으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러나 민주정의당이 과연 말 그대로의 ‘민주정의’를 실현하였는가? 그들이 말한 개혁을 이뤘는가? 나아가서 우리가 과연 5공 정권에 ‘개혁’ 정당이라는 이름을 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아마 모두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인가? 개혁 혹은 혁신을 부르짖은 그들에게 왜 ‘개혁’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할 수 없는가? 이유는 하나다. 이념상으로는 개혁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들이 주창한 이념은 결코 개혁에 값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이 주창한 이념은 왜 개혁에 값하지 않는 것인가? 그들의 개혁을 개혁이라 보지 않는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이 또한 답은 한 가지다. ‘개혁’이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닌 때문이다. 말로는 누구라도 개혁을 외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몸소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행태’와 분리된 ‘노선’의 천명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누구라도 개혁을 외칠 수는 있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은 쉽지만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대 모든 정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부르짖어 왔지만 그 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강준만은 대체 왜 지금 갑작스럽게 ‘노선’과 ‘행태‘ 타령인 것인가? 왜 새삼스레 ‘노선’과 ‘행태’에 대한 혼선이 빚는 딜레마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가? 문제는 ‘노선’이 아니라 ‘행태’다 그렇다. 강준만이 느닷없이 ‘노선’과 ‘행태’를 구분하고 나온 것은 새삼스런 일이다. 김대중 정권의 ‘노선’이 개혁적임은 집권 시에 이미 천명한 바 있다(사실 이전의 정권들 역시도 집권 초기엔 모두 자신들이 ‘개혁적’임을 천명했다고 봐도 좋다). 그러므로 관건은 그렇게 천명한 그 ‘노선’을 김대중 정권이 얼마나 명실상부하게 추진해 나가느냐 하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김대중 정권의 성패 여부가 ‘노선’이 아니라 ‘행태’에 모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강준만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에게 본은 노선에 있으므로 노선이 아닌 행태를 들어 김 정권을 공격하는 것은 본말을 전도한 비판이므로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행태’가 아닌 ‘노선’을 비판해야 하는 경우란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강준만은 이에 대해 분명한 답변은 하지 않고 있다. 강준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농민 정책을 ‘노선’으로 하는 ‘농민당’이 있다고 할 때 그 ‘노선’을 비판하는 경우란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 물론 ‘농민’ 정책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일도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농민당’을 ‘농민당’이게 하는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민당’을 비판하는 경우란 오히려 ‘농민당’이 그 ‘노선’에 걸맞은 ‘행태’를 취하지 못하는 때일 것이다. 비판이란 결국 ‘노선’이라기보다는 ‘행태’에 모아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강준만의 ‘노선’과 ‘행태’에 대한 구분은 김 대중 정권을 위해 억지 춘향식으로 갖다 붙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굳이 이런 구분이 없이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란 결국 수구 기득권 세력은 나쁜 놈들이고 현 정권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그놈들보다는 나으니까 비판은 당연히 그놈들한테 먼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쉬운 이야기를 강준만은 대체 왜 저렇게 어렵게 하고 있는가? <2002-11-26 오전 11:04:23> |
- '노선'이 '행태'를 합리화하는 이 아동티한 멘탈리티를 청산할 날은 언제인가? <2004/07/05>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