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지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 하나가 떠돌고 있다. 이름하여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 유령이다. 이것을 유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라는 그 개념 자체가 도무지 뿌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직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희한한 진보이고 보수인 때문이다.


'진보-보수' 유령놀이- 2003 대한민국 언론의 지형도 (1)


지금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것은 대통령도 아니고 국회도 아니고 검찰도 아니다. 국민은 더더구나 아니다.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움직여가고 있는 것은 바로 '진보와 보수'라는 이 유령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유령이 만들어 전파하는 사이비 여론이다. 유령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대 재생산되는 이런 사이비 여론이 판을 치는 사회 - 그것이 바로 2003년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또한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다.

이 유령은 정치적 당파성을 띠지 않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고, 편파적이지 않은 언론은 언론이 아니고, 선동적이 아닌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고 말한다.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진보냐, 보수냐' '적이냐, 아군이냐'고 사람들을 부추기고 갈라놓는다. 자신의 편가르기가 여의치 않을 때는 윽박지르기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면서 이것을 시대정신이라 말하고 여론이라 선전한다. 그러나 이건 시대정신도 아니고 여론도 아니다. 사이비일 뿐이다.

당파성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본래 모든 주의주장이란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자신의 주의주장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언론 또한 자신의 당파성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특정 언론이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됐다고 잘라 말해서는 안 된다. 언론의 역사 자체가 언론의 출발이 당파성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있기도 하다.


당파성을 띠지 않은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언론이 당파적이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 또한 언론의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사실이다. 언론은 당파적 선전을 위한 도구에서 출발하였으되, 또한 바로 그 지점에서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언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초기 언론의 당파지를 일컫는 게 아니라, 당파지의 한계선상에서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노력해온 역사의 산물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는 당파지를 폄훼하거나 당파지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오늘날에도 특정 이념에 충실한 당파지는 필요하다. 그러나 당파지는 어디까지나 당파지일 뿐이다. 당파지는 본질적으로 특정 이념을 대변 선전 선동하면서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당파지만 존재하거나 당파지가 득세하는 사회에서는 언론의 사명 가운데 하나인 (당파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진실을 접할 수 있는 여지는 그만큼 좁아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언론의 통합과 조정 기능은 빛을 잃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유일한 기능이 되고 존재 가치가 되고 만다.

현대 사회는 당파지가 처음 출현할 당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다양한 계층과 집단이 복잡다변하는 이해관계에 따라 얽히고 설켜 있다. 자신의 당파성을 대변하고 선전하는 일이 유일 목적인 당파지에서 모든 계층과 집단의 주장과 이해관계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기란 불가능하다. 당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개관하고 전하는 언론이 과거보다 더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 언론의 현실은 과거의 당파지보다 더한 당파성을 띠고 자신의 주의주장만이 절대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신문이나 방송을 듣보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실을 진실로 알고 지낼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지금 우리는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완전히 상반되는 방식으로 전해지는 '팩트' 속에서 살고 있다. 하나의 신문만 보거나 방송만 듣고서 그게 진정한 팩트이거니 믿었다가는 낭패를 넘어 망신을 당하기 십상인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팩트'에 대하여

팩트, 그리고 그 해석 혹은 관점에 대하여



민주통신의 정체성 - 색깔이 뭐냐(?)


민주통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민주통신의 색깔이 뭐냐는 것이다.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질문의 취지를 확인하고 나면 이내 맥이 빠지고 만다. 질문한 의도가 실망스럽기 일쑤여서다. 민주통신의 정체성을 묻는 이유는 하나같이 똑같다. 민주통신은 '진보인가 보수인가'를 알고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통신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질문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른 답을 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다. 질문이 정확해야 답변 또한 정확할 수 있다. 구분 자체가 모호한 제멋대로의 질문을 던져놓고 거기서 바른 답이 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기사 우문현답이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도사연한 선문답이나 하고 있을만큼 한가한 처지도 못 된다.

민주통신은 언론이다. 언론의 사명은 일차적으로 독자에게 사실을 바르고 빠르게 전하는 데 있다. 나아가 사회적 현안을 분석 검토하고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여 사회 여론을 리드하는 데 있다. 그리고 여기서 금과옥조로 삼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편부당의 정신이다.

여기 어디에 '진보냐 보수냐' 하는 게 들어갈 여지가 있단 말인가? 더욱이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 자체가 최소한의 정의도 담보 받지 못한, 오직 진영 멘탈리티를 선전하는 도구로 전락해 있는 지금 그것이 어떻게 바른 언론이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혹자는 말한다. 민주통신의 논리는 다만 이상에 지나지 않는 회색논리일 뿐이라고. 그러면서 지금은 '전쟁'을 해야 할 시기라고 말한다. 기성언론의 폐해를 강조하면서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성언론이 통합과 조정보다는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온 점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아니 그것이 사실이고 그 폐해를 익히 알고 있고 그래서 그런 언론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더욱, 새롭게 시작하는 언론은 동일한 방식의 우를 범해서는 안될 일이다.


'진보-보수'의 패거리 유령 놀음을 거부한다


민주통신은 기성언론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에 기꺼이 동의한다. 민주통신이 대(對)언론 웹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민주통신을 폄훼하는 무리들의 가타부타를 떠나 이에 대한 하나의 명징한 증거다. 민주통신 또한 언론개혁이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 가운데 하나임에 인식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론에서는 언론개혁을 주장하는 일부 매체와는 길을 달리 한다.

민주통신은, 일부 매체가 주장하듯이 언론개혁이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언론개혁은 전쟁이 아닌 전례(바른언론의 사례 제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것이 기성언론의 폐해를 극복하고 언론을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언론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바른 언론개혁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언론개혁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추의 논리'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추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힘껏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들이 흔히 취하고 있는 효과적인 언론개혁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추의 운동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추를 다른 한쪽에서 힘껏 당기면 일시적으로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추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또다른 반작용을 낳게 되고 결국은 팽팽한 세 대결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거나 죽이거나의 전쟁 상황이고, 이 나라의 언론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팽팽한 세 대결 양상이 뭐가 나쁘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현재의 언론 상황을 창조적인 혼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나 언론과의 전쟁을 선언한 노무현 대통령의 '건전한 긴장관계' 운운하는 논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건전한 긴장관계라는 것 자체가 실은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언론 본연의 기능 가운데 하나임을 주목한다면, 그리고 현재의 세 대결이 언론 개혁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 기동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언론이 경계해마지 않아야 하는 정치적 도구가 되어 힘을 낭비하고 있는 양상이라는 데 주목한다면, 이런 주장이란 사실 언어적 수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편가르기 혹은 추의 논리, 그 작용과 반작용


지금 이 나라의 언론은 극한 편가르기의 양상을 띠고 있다. '언언전쟁'으로 불리는 이 상황은 예의 저 '유령'이 갈라놓은 희한한 편가르기에 따라 전개된다. 이 편가르기에서는 누가 더 정론을 펼치는가 하는 것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누가 더 초지일관하게 자기만의 억지를 부릴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고 또한 누가 더 물어뜯기를 잘 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만이 죽거나 죽이거나의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때문이다.

특정언론 죽이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죽이기의 대상이 살아남는 길이란 한 가지밖에 없다. 상황을 더한 극한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것은 분명 자해행위다. 그러나 현실은 이게 먹히고 있다. 예의 저 '추의 논리'가 보여주는 반작용 때문이다. 그리고 죽이겠다면서 칼을 들고 설치는 쪽의 논리가 그 대상에 비해 하나도 나을 게 없다는 점에서 그 반작용이 더한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무용한 힘의 낭비일 뿐이다.

얼마 전에 조선일보는 르몽드지의 외신을 자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임의 왜곡한 기사를 냈다가 사과까지 해야 했다. 당시 문제의 기사를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후안무치할 수 있는가 싶었는데, 오마이뉴스가 그 문제를 바로 지적하고 나섰다. 확실히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적절하고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외신을 임의 왜곡한 것은 조선일보만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선일보 기사의 왜곡을 비판한 오마이뉴스 또한 조선일보에 앞서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중동, 대통령과 전쟁하는 족벌"

르몽드지 기사 원문의 어디에도 '족벌'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조중동, 대통령과 전쟁하는 족벌" - 문제의 외신 기사를 전하면서 오마이뉴스가 뽑은 타이틀이다. 그러나 르몽드지 기사 원문의 어디에도 '족벌'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마이뉴스는 서브타이틀에서까지 다시 명백히 자신의 '가치판단'이 개입된 '족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기사 본문을 포함하면 오마이뉴스는 이 기사 하나에서 이 '족벌'이라는 표현을 무려 6번이나 쓰고 있다.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또한 이 점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이는 조선일보 기사의 왜곡 문제를 다룬 후속기사에서 오마이뉴스가 이 '족벌'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나 있다. 타이틀로도 모자라서 서브타이틀에까지 얹어 강조했던 표현을 오마이뉴스가 굳이 빼야 했던 것은 자의적인 해석을 인정한 결과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나면 오마이뉴스가 아니다. 후속 기사를 내보내면서 김정란 교수는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원문은 분명히 "des empires editoriaux et familiaux"로 되어 있다. 직역하면, "언론의, 그리고 가족의 왕국"이라는 뜻이다...이 표현은 "족벌 언론의 왕국"으로 옮길 수 있다. "족벌"이라는 말이 가지는 부정적 함의는 프랑스어로 번역이 불가능하다. 기자는 한국에서의 취재 과정에서 "족벌"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familial" 이상의 프랑스어는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족벌'을 타이틀로 걸었다는 사실이 내심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이는 김 교수의 이 해명은 그러나 설득력이 별로 없다. 차라리 해명을 하지 않음만 못하다고 할 정도로 구차하기까지 하다. 르몽드지의 기자가 한국의 취재 과정에서 '족벌'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 표현을 프랑스어에서 찾을 수가 없었기에 'familial'이라고 썼을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을 듣고 있자면 듣는 이가 오히려 민망해질 지경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프랑스 기자의 기사 하나를 읽으면서 그 심중까지를 헤아려야 했더란 말인가?


'제멋대로 해석하기' - 죽거나 죽이거나


불어에는 아는 바가 없지만, 르몽드지의 원문에 나온 패밀리는 그냥 패밀리로 읽어서 큰 무리가 없는 표현이다. 원문의 패밀리가 갖는 함의를 모르는 한국민이 누가 있을까? 게다가 김 교수의 이 해명은 기사쓰기의 에이비씨도 무시하고 있다. 어쩌면 프몽드지의 기자를 모욕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표현의 적절한 대응어를 찾지 못하는 경우 기자는 그것을 풀어서 설명하거나 원래의 표현 그대로를 병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실제로 르몽드지의 원문기사에서는 '조동중' 등 특별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모두 설명을 병기하고 있다.

그런 기자가 유독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족벌'만은 예외로 했다는 것은, 설사 기자가 그런 의도로 기사를 작성했다고 할지라도 역자가 나서 변명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김 교수가 앞서의 번역에서 '족벌'로 옮긴 표현이 비단 패밀리에만 한정된 게 아니었고 보면 김 교수의 이 해명이란 구차한 변명 이상이 아니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마이뉴스가 행한 정도의 자의적인 해석은 조선일보의 빼고 끼워넣는 임의 왜곡에 비한다면 어느 정도는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다. 실제로도 조선일보의 왜곡에 대한 적절한 지적을 한 사실만으로도 오마이뉴스는 자신의 우를 충분히 상쇄했다고 본다. 그러나 동일한 외신을 전한 대자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르몽드지의 이 외신 기사는 같은 날 연합뉴스에도 그 요지가 번역되어 실렸다. 그런데 연합뉴스에서 번역한 그 요지를 다시 따서 실은 인터넷 매체 대자보의 기사가 재미있다. 대자보는 인터넷판 미디어비평이라고 할 정도로 거의 매일같이 기성언론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비판에 열을 올리는 인터넷매체다. 그런 곳에서 조선일보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엽기성으로 연합뉴스의 기사를 임의 왜곡하고 있다. 대자보의 독법을 한번 보자. 다음 인용문에서 위쪽은 연합뉴스의 기사이고 아래쪽은 이것을 따서 전하고 있는 대자보의 기사다.
 

르몽드는 "한국의 언론은 때로 명예훼손을 초래할 정도의, 부러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며 각각 200만부 이상의 신문을 발행하는 조선, 중앙, 동아 등 3개 인쇄 매체의 시장 과점과 정부의 KBS, MBC 지배를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조중동이 매일 각각 200만부 이상의 신문을 발행하면서 인쇄 매체의 시장 과점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 대목에서 르몽드는 "한국의 언론은 때로 명예훼손을 초래할 정도의, 부러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 정부가 신언론장악음모를 하려고 한다는 조중동의 주장에 이견을 보였다.

 
연합뉴스 기사의 요지는 '한국의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조중동 3사의 과점과 정부의 방송사 지배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외신도 아닌 한국어로 쓰인 기사를 전하면서 대자보는 자신만의 기상천외한 해석을 내놓는다. 연합뉴스 기사의 어디에도 없는 '심화되고 있다'는 해석은 접어두고라도, '"한국 언론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고 말해, 정부가 신언론장악음모를 하려고 한다는 조중동의 주장에 이견을 보였다'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더하고 있다.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담풍' 해라


르몽드지의 원문기사도 그렇지만, 한국어로 된 연합뉴스 기사도 '한국언론의 문제'로 들고 있는 것은 '조중동의 과점 현상과 정부의 방송 지배'다. 그런데도 대자보는 원문과는 동떨어진 '정부의 신언론장악음모는 조중동의 잘못'이라는 이라는 식의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하나만 더 보자.
 

르몽드는 김대중 전대통령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노대통령과 이 일간지 3사의 반목 등을 전하며 한국에는 독립 언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르몽드는 김대중 전대통령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과의 갈등을 통해 한국에는 독립 언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의 기사는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노대통령과 3사의 반목 등을 '전하며' 독립언론에 대한 요구가 일고 있다고 대등연결을 하고 있는데 반해, 대자보는 '통해' 라는 인과적 연결로 기사의 맥락을 비틀고 있다. 그 결과 연합뉴스의 본래 의미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왜곡의 문제를 넘어 자질의 문제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접어두고라도 이렇게 전해진 기사가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고 있을 리가 없다. 전체적인 맥락 또한 원문의 분위기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사실 이것은 오마이뉴스도 마찬가지다). 르몽드지 원문 기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국의 언론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이는 언론과 정부의 '전쟁'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여기에는 한국 언론의 몇 가지 문제가 노정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친재벌 성향의 조중동이 신문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점이고 또다른 문제는 정부의 방송 지배와 이를 통한 언론 장악에의 유혹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에 독립언론에 대한 요구가 높으며 인터넷매체의 확산으로 과거의 언론 독점 시장에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한국 언론 일반에 대한 일종의 비하 내지는 비아냥이 행간에 섞여 있는 기사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반성을 하기는 커녕 서로가 아전인수식 해석을 해가면서 이를 메인 탑으로 걸기에 바쁜 형국이니 이게 어찌 정상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르몽드지 기자의 지적을 다시한번 그대로 보여주는 추태에 다름아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나라 언론은 자칭 진보고 보수고를 떠나서 도무지 반성적 사고를 결여하고 있다. 여기에는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위에서 예로 든 외신 기사 사례 하나만을 두고 보더라도 그렇다. 자신부터가 왜곡을 밥먹듯이 하는 주제에 누구를 개혁하고 무엇을 바꾸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입장을 한번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더라고 비판하는 자조차가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때로는 더하게 비판 받을 일을 서슴치 않는 마당에 어느 누가 그 비판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겠는가? 더구나 비판자의 자질마저가 의심스러운 경우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족벌'과 '어용' 사이 -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다


대자보가 어떤 곳인가?[footnote]얼마 전에 대자보가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이 자리를 빌어 대자보의 창간 10주년을 다시한번 축하드린다. [/footnote] '어용'이라고밖에는 달리 부를 수 없는(오마이뉴스식의 해석이 가능하다면 르몽드지에 실린 우리나라의 방송은 '어용'으로 옮기는 게 맞다) 공중파 방송의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여 기성언론의 논조와 임의왜곡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는, 언론 개혁의 당위성을 소리높여 주장하는 자칭 진보적 인터넷 매체 가운데 하나다. 바로 이 나라에서 지금 언론개혁을 외치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 딱 그대로다.

그럼에도 이 모자란 이들은 늘 당당하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바로 저 진보와 보수라는 유령 덕분이다. 어느 모로 봐도 '퇴보'에 지나지 않는 행태를 거듭하면서도 그것을 '진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그러려니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뒤에 '진보와 보수'라는 저 별종의 유령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다'는 식의 놀이에 몰두해 있는 이 유치한들이 언론개혁을 운위하는 한, 이 나라에서 언론개혁이란 없다.


"남에겐 가혹하면서도 자신에겐 준열하지 못한 이 땅의 언론은 민교협의 언론개혁운동이라는 새로운 물결을 불러들이게 됐다. 명색 '언론인'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슬프고 그것이 씁쓸하다. 이 땅의 언론은 얼마나 더 많은 운동을 기다려서만 제머리 깎기의 자정에 나설 것인가. 마침내는 그 끝머리에 엉뚱하게 불거 나올지도 모를 또 다른 '타율' 의 회오리가 없다고만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감시자거나 비판자란 오히려 남에 대해서 보다 자신에게 더욱 준열한 비판정신의 소유자여야 함을 못박아두고 싶다."


MBC 김중배 사장의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갓된 '진보-보수 유령 놀음'에 빠져 진실과는 거리가 먼 당파적 패거리주의 싸움으로 날을 지새는 '정치언론'과 스스로 정치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설치는 '언론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대한민국 사회의 언론이 새겨들어야 할 지적이고 민주통신이 이 자리를 지켜가고 있는 이유다. <2003. 11. 27>
 








<덧붙이는글> 2003년도에 쓴 글이지만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바가 없어 보인다.


 
2009/02/02 04:45 2009/02/02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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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바나나 2009/02/02 1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03년 글이라 씁쓸하구만요. 우째 나아지긴 커녕 더 심화된 듯싶어서요.

    => 비판하는 자조차가 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때로는 더하게 비판 받을 일을 서슴치 않는 마당에 어느 누가 그 비판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겠는가? 더구나 비판자의 자질마저가 의심스러운 경우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곳에 오셔서리 욕을 바가지로 하시는 일부 분들은 위에 저 관점에서 글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듯싶구만요.

    • 하민혁 2009/02/03 05: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이 없지 않나싶어요. 이게 누군가 자기희생으로 넘어야 하는 문제인데 어디서도 그게 안 보이거든요. 살짝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오늘 보니 강호순 얼굴 공개를 두고 블로거 대부분이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더라구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건 언론의 문제는 아닙니다. 언론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요구가 있는 경우 각 언론은 당연히 고민하고 나름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 점에서 중앙이나 조선은 나름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소신있게 잘 한 거라고 볼 수 있겠지요. 치고 나가는 것도 소신과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문제 꺼리가 안 되는 얘기인 겁니다.

      굳이 문제를 삼는다면 그것은 이 결정이 독자에 영합한 결과냐 아니면 언론 일반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냐의 비중을 따지는 정도겠지만, 그것도 거기까지입니다. 여기서 어떤 답이 나오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왜냐면 이런 상황에서는 이럴까 저럴까 눈치 보는 게 오히려 독자에 영합하는 짓일 수도 있는 거거든요. 막말로 지금 독자에 영합하는 짓 하는 건 오히려 니네다 해버리면 얘기는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어요.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평행성만을 달릴 뿐이죠.

      게다가 언론은 공기라는 측면 외에 또한 장사를 해야 존재 자체가 영위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독자의 요구를 외면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지요. 더구나 그 요구가 충분히 합당한 근거 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더욱이요.

      이번 건의 경우도 독자의 요구는 지나친 게 아닙니다. 한 두 건도 아니고 이미 몇 건의 사건이 모두 강의 범행으로 드러났어요. 무죄추정의 원칙이네 하는 설래발은 그야말로 형식논리에 빠져 짖어대는 말짱 헷소리일 뿐이라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언론은 얼마든지 자기 결단에 따라 공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걸 갖고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웃기잡는 짓이지요.

      그런데도 지금 막 그러고들 있어요. 더 넌센스인 건 이같은 태도는 언론이 언론이 지고지순한 신적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혹은 그래야 하는 것처럼 보는 관점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인데, 이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평소 주장은 또 정 반대라는 겁니다. 언론 믿을 수 없다 - 이거였으니요.

      한마디로 스스로가 갈팡질팡하고 있는 겁니다. 편가르기가 아니라면 설명이 쉽지 않은 한판의 소극이지요. 판이 이런 판이니 여기서 어떻게 답이 나오길 기대할 수 있겠어요. 답이 안 나올 밖에는요.

      <덧> 지금 읽어보니 댓글이 좀 이상하게 달려 있어서 몇 부분을 바로 잡았습니다. 아마 그때 다른 곳에서 이 사안에 대한 이런저런 리플을 달다 와서 그런 것같습니다. 근데 큰 틀을 그대로 두고 잡다보니 다시 수정을 해도 여전히 언밸런스한 게 약간 이상하긴 합니다. 하지만 기왕 쓴 터라 지우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남깁니다. 혹시 댓글 보고 기분 언짢으셨다면 말씀해주세요.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2. sunlight 2009/02/02 2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년 전과 같은 게 아니라, 더 악화되지 않았나요? 온-오프라인을 불문하고 나라 전체가 양대 진영 속에 들어간 느낌입니다. 사고의 다양성과 자율성, 창조성을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TV의 경우, 정부의 개입으로 억지춘향이 된 KBS를 제외하면 모두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듯 보입니다.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양진영의 기관지 또는 기관방송이 되려는듯요.

    • 하민혁 2009/02/03 0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6년 전인데요 ^^ 뭐.. 6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매한가지겠지만요. ^^

      무튼, 언론이 색깔을 갖는 게 문제인 게 아니고(저는 언론은 분명한 자기 색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색깔을 갖고 있다'는 것과 '진실을 전달한다'는 건 전혀 모순관계에 있지 않는 말이거든요), 자기 색깔 제대로 보여줄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서로 남의 색깔 캇만으로 하고 있느니 그게 문제인 거지요. 겉보기만 언론이지 정치하겠다는 겁니다. 안팎이 다른 짓을 하고 있는 거고 나쁜 짓이지요. 그런데 그 짓들을 눈만 벌어지면 해대고들 있어요.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3. YB 2009/02/02 2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양비론을 비난하지만 흑백론도 분명 문제는 있습니다.
    양비든 양시든 혹은 흑백이라도 자신의 색깔이 중요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민주통신의 논조에 지지를 합니다.

    • 하민혁 2009/02/03 0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방금 위에서도 그런 댓글을 달았지만, 색깔을 갖는 건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지요. 중요한 일이기도 하구요. 도대체 자기 색깔이 없는, 다시말해 자기 정체성을 갖지 않는 언론이란 그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일테니까요.

      문제는 지금 이 나라 언론은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의 성찰 혹은 노력을 통해 키워가려 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 뒷다리 물고 늘어지는 방식으로 만들어가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기껏해야 적대적 공생관계의 패거리가 데칼코마니로 벌이는 한갓된 밥그릇 싸움일 뿐, 정체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거거든요.

      이거 깨뜨려야 합니다. 진실이 아닌 당파적 이익에 따라 기동하는 저 패거리주의를 깨뜨려야 하고, 그 기저에 흐르는 기생의식을 쳐내버려야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에 상관없이 올 한 해 민주통신은 이 일에 신명을 걸 생각입니다. 많이 지지해주세요 ^^

  4. 맑음 2009/02/03 07: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패거리 놀음을 거부하신다고 하시지만 실제로는 님이야말로 가장 편파적인 패거리적 모습을 보이고 계시는 것 아닐까요? 권투시합에서 한쪽 선수는 각목을 들고 설치는데 그를 상대하는 쪽이 고작 벨트 아래를 친다는 점만 문제삼는 심판처럼 말입니다. 어째서 이쪽의 그 작은 반칙만이 눈에 보이느냐, 저쪽이 들고 있는 각목은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 심판은 이렇게 답합니다.
    ㅡ나한테는 벨트 아래를 치는 반칙이 흥미로울 뿐이다. 저쪽 선수의 각목에 대해서는 숱한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지 않느냐....
    그렇더라도 여전히 공정한 시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데 말이죠.

    • 하민혁 2009/02/03 1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님은요, 얘기를 하다보면 무슨 설법사 같아요. 내 글에 자주 등장하는 설법사는 제가 아주 질려 하는 타입입니다. 이 친구들은 무슨 말을 하면서 도무지 상대가 알아먹을 수 없는 자기 혼자만의 '방언'을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지금 님이 하고 있는 얘기를 함 잘 보세요.

      1. 하민혁은 패거리놀음을 거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편파적인 패거리적 모습을 보이는 넘이다.
      2. 이유는 권투시합이.. 선수와 심판이 싸우는데 .. 각목이 아퍼요 .. 벨트가 내려갔어요 .. 공정한 시합이 혼자 놀다가 ..
      3. 그러므로 하민혁은 가장 편파적인 넘이다.

      이게 지금 님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도 님은 계속 그래요. 물론 제가 시간이 남아돌고 해서 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막 열심히 분석까지 해가면서 가, 이런 의미인가요? 나, 저런 의미는 아니구요? 다, 아~ 그러니까 요런 의미로 하신 말씀이셨군요 해가면서 놀 수 있다면 절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근데 옆에 있는 사람도 아닌 님의 글을 가지고 그렇게 스무고개 해가며 놀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_-

      님께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저랑 글 섞을 때는 제발 이상한 비유 좀 쓰지 마세요. 비유하지 마시고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세요. 제가 보기에 님은 논쟁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입론' 과정이 많이 약하십니다. 이건 님이 그런 훈련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 있는데요, 오죽 했으면 제가 님께 '초등학생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까지 했겠습니까? 자주 찾아주시는 분께 말이지요. -_-

      그러니 앞으로 뭔가 주장을 할 때는 이상한 비유 같은 거 쓰지 말고 그냥 직설적으로 말을 했으면 합니다. 비유가 튀어나오려 하더라도 참으시구요. 지금 님은 다른 사람 주장에 딴지 거는 것보다 그 훈련이 더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같거든요. 안타까워서 애써 드리는 말씀이니 너무 고깝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럼.

    • 맑음 2009/02/03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해할 수 없군요. 명확한 애기를 왜 못 알아들으시는 거죠? 전 지금 님이 편파적인 처신을 하고 계시다고 지적한 겁니다. 벨트 아래를 치는 반칙을 문제삼는 심판의 그 행동 자체는 옳더라도, 그런 작은 반칙을 범하는 선수의 상대편에서는 각목을 휘두르고 있다면, 그 작은 반칙을 문제삼는 것은 겉으로는 아무리 공정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각목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힘을 실어 주는 꼴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알아듣기 힘든 얘기가 있는지 제 쪽이 오히려 어리둥절해지는데요?

    • 하민혁 2009/02/04 0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내가 권투에 대한 룰을 잘 몰라서요. 게다가 나는 심판 역할 같은 건 잘 못 합니다. 내가 잘 모르는 일에 공정이니 아니니 뭐 그런 거 판단할 주제도 못 되구요. 이 글은 언론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냥 그것만 갖고 말을 하세요. 벨트 아래 찾고 각목 찾고 하지 마시구요. 난 그런 거 딱 질색입니다. 미안합니다.

    • 맑음 2009/02/04 0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 전반에 대한 님의 접근법을 얘기한 것이지 단지 언론이 어떻고 하는 한 가지 항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 전체가 반칙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런데 님은 이해할 수 없게도 우리 중에서 가장 힘든 사람들의 반칙만을 줄기차게 물고늘어지고 있습니다. 힘센 사람들의 더 저열하고 흉폭한 반칙에 대해서는 거의 분노를 느끼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침묵한 채 넘어가고 말입니다. 전 그 점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 하민혁 2009/02/04 0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맑음/ 나는 내가 컨트롤 가능한 얘기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든 부문에서 일어나는 일을 두루 꿰어차고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들로 차고도 넘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껏 내 경험칙 내에서만 말하고 행동합니다. 지금 님이 하는 얘기들, 나는 모릅니다. 동의고 자시고 할 게 없는 얘기들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 나라 전체가 반칙으로 얼룩져 있다"고 님은 말합니다. 그리고 님은 이게 "명확한 얘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게 명확한 얘기인지 아닌지를 모릅니다. 님께는 명확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내게는 명확한 얘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중에서 가장 힘든 사람들의 반칙만을 줄기차게 물고늘어진다"고 님은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도 뭘 말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중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누군지 나는 모릅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반칙'을 했다는 건지도 나는 모릅니다. 님이 말하는 '줄기차게 물고늘어진다'는 것이 뭘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힘센 사람들의 더 저열하고 흉폭한 반칙"도 마찬가지입니다.

      님, 잘 들으세요!

      님한테 명확하게 여겨진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게 분명한 것이라는 생각부터 버리세요. 내가 모르겠다고 하는데 왜 자꾸 '명확한 얘기'를 모르느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정 그런 주장을 하고싶거든, 그게 왜 명확한 건지를 말하세요. 다시말해,

      어떤 면에서 "이 나라 전체가 반칙으로 얼룩져 있다"는 건지, '우리 중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누구라는 말인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무슨 반칙을 했다는 건지..

      이런 사항들을 님의 얘기로 정리해보여주세요. 님께 이 얘기 지금 5번쯤은 한 얘기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내 뜻을 알리는데도 자꾸 이러시면 님은 지금 거의 스토커 수준에 와 있다고밖에는 보기 힘듭니다. 분명히 전합니다.

      한번 더 이런 식으로 글 섞으면 더 이상은 댓거리 없습니다.

    • 맑음 2009/02/04 0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이 앞에서 지적하였던 '재개발 예정지인 줄 알면서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이 나라에서 특별한 부모 유산 따위 물려받지 않고 그저 자기 힘껏 벌어서 집 장만에 성공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님도 아실 겁니다.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이 집 장만하기가 왜 그렇게 힘들까요? 그 이유도 아실 겁니다. 부동산을 놓고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정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장난들을 막으려 들지 않고, 더러는 경기 부양이니 뭐니 하고 부추기까지 하는 것 같더군요. 이런 요지경 속에서 약하고 그리 똑똑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자들이 계속 부를 축적해 가고 자신들은 그 일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데 만족하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든 자기들도 살아남기 위해 그 요지경 판에 적응하여야 할까요? 님은 용산 사람들이 재개발 예정지에 일부러 들어가 살았다고 비난하시는데, 부동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 전반이 온통 반칙으로 채워져 있는데 서민들이 그런 반칙 속에서도 고고하게 원칙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부자들의 삶을 살찌우게 하는 밑거름으로서의 삶만 살다 가라고 요구하는 게 아닌가요?
      제 질문은 이미 간단하게 요약되었습니다. 어째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교과서대로 살아 줄 것을 요구하느냐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명확하지 못한 어떤 요소도 없습니다. 그저 님이 이해하고 싶지 않아 하실 뿐이지요.

    • 하민혁 2009/02/04 0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니까 그걸 왜 지/금/ 여/기/서/ 나/한/테/ 묻고 따지느냐는 겁니다. 재개발 문제는 재개발 하는 데나 재개발 얘기하는 데 가서 묻고 따지셔야지요. 지금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얘기는 내가 생각하는 '언론의 문제'입니다. 재개발 문제가 아니구요. -_-;;

    • 맑음 2009/02/04 0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패거리 놀음을 거부하신다면서요? 그렇게 자처하는 사람은 사태를 공정하게 바라보는 냉정한 객관자의 자격을 얻게 되므로 그의 발언은 그렇지 못한 이들의 그것보다 좀더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님은 얼핏 겉으로는 어느 패거리에도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대립들 앞에서 뚜렷한 일관성을 갖고 어느 특정한 한쪽만을 비난함으로써 그 반대편에 힘을 실어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나온 거지요.

    • 하민혁 2009/02/04 04: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 벽창호세요? 아니면, 정상적인 학교 과정을 밟지 않으셨나요(항용 독학을 하신 분들이 이런 막무가내식 경향을 보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진짜 초등학생이세요?

      열심히 설명을 하고 이 정도로 조언을 드리면 그래도 단 한번이라도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을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귀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할 법 한데도 도대체 다른 이 말은 단 한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 말을 멋대로 해석하거나 뜬금없이 어디 산으로 가는 딴소리만 계속 해대고 있으니..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패거리 놀음을 거부한다는 것과 패거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어느 패거리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요. 나도 분명 어느 패거리인가에 속해요.

      내가 하는 얘기는, 패거리에 속해 있다고 해서 내 패거리가 하는 행위는 무조건 옹호하고 다른 패거리가 하는 일이면 그게 무엇이든 비판하는 행태에 대한 것이고 그게 잘못된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걸 '패거리 놀음'이라 칭하고 있는 거구요.

      그런데 그걸 또 어떻게 "니가 왜 패거리에 속해 있지 않느냐" "니가 어떻게 공정하냐" 하면서 애먼 소리만 하고 있으니.. 더구나 열 번도 넘게 나는 공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는데도 계속.. 에효~ 그만 두지요.

      그렇다고 뭐 오시는 것까지 뭐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자주 오세요. 그리고 댓글도 계속 다시구요. 다만 님께 댓글을 다는 일은 앞으로 더는 없을 것입니다.

    • 맑음 2009/02/04 0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단 님이 특정한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셨군요. 일단 그 점은 고맙구요. 그런데 말이죠.
      ㅡ자기 편이 한 짓은 뭐든 옹호하고 상대편이 한 짓은 뭐든 깐다.
      ㅡ자기 편이 한 짓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상대편이 한 고약한 짓만 깐다.
      이 둘 사이에 정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5. sunlight 2009/02/04 0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맑음/ 각목? 왜 이런 비유를 들까 하고 생각해보니..., 아! KBS와 YTN의 사장을 정부 맘대로 바꿨다는 걸 두고 하는 말 같네요. (솔직히 그 부분은 정부에서 무리수를 둔 건 맞겠는데...)
    맑음씨가 공정한 룰을 따지려 한다면, 노시개 정부에서 먼저 각목을 들고 설친 부분은 어떻습니까? 그 때도 분명 낙하산 인사했는데요. 물론 같은 잘못을 되밟는다는 지적은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정권의 주구노릇을 했던 방송사들이 지난 1년동안 얼마나 야당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편파방송을 해댔는지 잊어먹은 모양이군요.
    같은 공영방송이라지만, mbc는 손도 대지 않았고 kbs와 ytn 또한 사장만 바뀌었을 뿐 정부가 직접 방송에 관여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요즘 kbs와 ytn은 보십니까?

    • 맑음 2009/02/04 0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네이버 블로그 이름이 '노무현과 이명박을 감옥으로'입니다. 청와대 블로그에 들어가 노무현을 욕하다가 서너 차례 아이디 차단을 당한 적도 있구요. 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부분을 저 역시 노빠들에게 지적하기도 했더랬습니다.
      저 '각목' 비유는, 부자들이 온 나라 땅을 장난감처럼 굴려서 자기들 부를 축적하고 정부는 거기에 장단 맞춰 대기업들 배를 살찌워 주며 서민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그런 정당하지 못한 풍토를 가리킨 겁니다. 그런 힘센 자들의 반칙 앞에서 약자들의 작은 반칙은 차라리 정당방위이지 그리 욕먹을 거리가 못 된다는 얘기를 한 것입니다.

  6. curio 2009/02/04 0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민혁님, 맑음님 모두 근성가이군요. 두 분의 댓글 대화를 무척 흥미있게 보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습니다. 두 분에게 무용한 논쟁일지 몰라도 구경하는 입장에선 매우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이죠(그게 꼭 싸움 구경이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맑음님의 마지막 질문을 저라면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 이따만한 공장이 강에다 폐수를 몰래 버리고 있는데 그거 욕하는 애들이 공장 담벼락에 오줌싸는 것까지 뭐라하는 건 너무 하는 것 아니냐?

    물론, 대답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 공장 욕하는 애들 너무 많다. 나라도 애들의 무질서를 욕해야 직성이 풀리겠다. 애들이 넘 이쁘게 생겨서 질투하는 건 절대 아니다.

    이게 제가 하민혁님과 맑음님의 댓글 대화를 통해 이해한 하민혁님의 입장인데, 꼭히 욕 먹을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이뻐서 사랑 받는 애들 질투하는 것 아니라면요).

    • 맑음 2009/02/04 0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질문을 그렇게 바꾸면 사태를 왜곡하는 꼴이 되지 싶습니다. 공장에서 폐수를 강에 버리는 일과 아이들이 공장 벽에 오줌을 싸는 일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지만(혹은, 괘씸한 공장에 대한 반감을 표명하기 위해 오줌을 싼다는 정도의 옅은 상관관계밖에 없다고 할까요....), 벨트 아래를 가격하는 짓은 상대편의 각목에 대한 당연한, 그리고 너무 미약하고 흡족치 못한 반작용이니까요.

  7. 쉐아르 2009/02/07 0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연히 들어와 오랫동안 즐기다 갑니다. '당파성'과 '편가르기'에 대한 의견은 20년전부터 줄기차게 들어왔고 또 때로는 제 스스로 주장했던 문제라 별 의견이 없네요. 무엇이든 극한으로 가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지요.

    하지만 극한으로 가는 것을 붙잡기 위해 '극한은 무조건 거부한다'라고 하면, 그 주장으로 인해 이익받는 사람들이 또 생기지요. 예를 들어 지금 사회에서는 돈있는 자가 돈없는 자를 이용해 그들의 부를 더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든다는 것은 정당성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지나쳤느냐 지나치지 않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어느 쪽인가도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한 명확함이 없이 모든 당파성은 다 나쁘다라고 한다면 오해를 살 수 있다 생각합니다.

    하민혁님이 제 글에 대해 '모든 당파성이 다 나쁘다'라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를 포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다고 이해할 겁니다. 아니라면 다시 한번 읽어보시지요. 직접 쓰신 글을요.

    아 그리고 당파성이라도 불러도 좋습니다. 저는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하고 그 쪽에 서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질문을 하실 수도 있겠지요. 저는 상식이 답해준다 생각합니다.

    • 하민혁 2009/02/07 0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글은 인터넷신문의 운영진에 있을 당시 쓴 글입니다. 개인의 위치에 있을 때가 아니고, 또한 당시 언론개혁에 상당한 열정을 쏟아부을 때였습니다. 개혁을 부르대는 넘이 개혁의 대상이 되는 넘과 같은 짓을 해서야 되겠느냐는 원칙론에 매달려 있었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님이 미리 예상하신대로 저 글은 당파성 자체를 비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상대의 문제를 비난하면서 스스로는 더한 문제를 노정하는 그 행태의 저열함을 문제 삼고 있는 글이지요. 그래서는 백날을 부르댄대도 언론개혁은 요원하리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거구요.

      모든 사람이 다 달리 본대도 그 때문에 주장을 철회할 수는 없는 일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