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절망상태에 빠져든 대학과 엘리트 지식인, 그리고 개인의 비전|작성자 한기호


<계간 비평>이 사실상의 폐간을 결정했다 하자 두 매체에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기사가 크게 게재됐다. 거기에 나의 멘트도 나갔다. 나는 엘리트중심 사회의 붕괴를 이야기했다. 우리 사회는 이미 망한 지식인을 가지고 개중(개인+대중, 개인은 인터넷에서 다중에게 지혜를 빌릴 수 있다.)을 지배하려든다. 하지만 이미 그런 시도는 망해가고 있다.

 

강명관 교수는 『시비是非를 던지다』(한겨레출판)에서 소인배를 옳고 그름을 알고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지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참는 생계형 소인배, 자기과시의 비판적인 언사는 할 줄 알지만 정작 과감해야 할 경우에는 비판적인 언사를 삼가는 향원형(鄕愿型) 소인배, 오로지 윗사람에게만 충성심만 과시하면서 권력의 단맛만 향유하며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창귀형(倀鬼型) 소인배 등 세 유형으로 나눴다.(이 제목으로 포스팅한 글 참조바람)

 

강 교수는 지식인을 대상으로 이렇게 나눴을 것이다. 그런데 참여정부에서는 주로 향원형 소인배가 정치권력에 빌붙어 기생했다면 지금 실용정부에서는 창귀형 소인배가 창궐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니 정치권력은 갈수록 대중과 유리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계간 비평>을 비롯한 비판적 계간지에 글을 쓴 학자들은 그런 소인배 지식인과는 달리 사회에 대한 냉정한 비판안목을 보여주는 ‘군자’를 지향하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군자형 지식인과 소인배 지식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싸잡아 비난할 정도로 엘리트 지식인에 대한 냉소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다음의 글은 지난 4-5월 내가 이런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통해 개인의 비전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에 대한 책을 펴내기로 하면서 쓴 글의 일부이다. 책은 지금 편집자가 열심히 교열을 보고 있다. 그 글들 중에서 대학현실을 비판하면서 비전을 제시해보려 했던 두 편의 글을 포스팅한다. 다소 길지만 많은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1. 대학교수를 잡상인 취급하는 고등학교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은 이미 절망 상태라고 하면 가혹한 표현일까?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는 “잡상인과 대학교수 출입금지”라는 방이 붙어있단다. 입학생을 모집하러 다니는 교수들의 비애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대학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의 대상이기도 하다. 대학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아놓은 학생들의 90퍼센트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할 것이란 예측이고. 상당수의 졸업생은 취업공황기라 취업 문턱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기업들은 대학졸업생을 믿지 못한다. 출판기업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헤쳐 갈 안목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 늘 경력자만 뽑으려 든다.

 

<중앙공론> 2009년 2월호 특집 ‘대학의 절망’의 대담코너인 「하류화한 학문은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에서 간사이대학 교수이자 교토대학 명예교수인 다케우치 요는 “지금의 대학교육에서 교수는 ‘스승’이 아니라 ‘도구’가 되어버렸다. 매뉴얼화된 수업을 성실히 수행할 뿐인 교육노동자다. 말하자면 ‘프로페서리아트’다. 프로페서에 프롤레타리아트를 합친 것 같은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학교수는 일본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교수가 연구할 시간도 없이 학생모집에서부터 졸업생 취업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을 관리하기에 급급하다. 졸업생이 얼마나 취업하는가가 학교평가의 주요 기준이니 대학은 학교가 아니라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셈이다.

정보공학자인 마쓰오카 세이코에 따르면, IT혁명은 정보의 전후순서 배치법이 달라진 것에 불과하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간다는 것은 손끝으로 정보를 검색했던 것에서 버튼으로 검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디지털은 이미 그곳에 정보가 들어있어 포인트만 짚으면 된다.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정보가 나온다. 처음 누른 것도 원하는 정보이고 그것을 보고 다시 누르면 또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유저는 원하는 순서대로 정보를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읽어낼 수 있다.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구조가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IT 혁명은 이제 겨우 도입기에 들어섰을 뿐이다. 미디어 자체로만 보면 모든 미디어가 위기다. 잡지의 폐간이 줄을 잇고, 신문과 방송도 커다란 위협에 직면해 있다. 종이책 또한 이대로 가면 대부분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꺼낸 이유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으니 대학에서도 달라진 세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디어 컨버전스가 급속하게 진행되듯, 지식을 분절화, 세분화하는 게 아니라 통합된 눈으로 문제의 본질과 대안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은 이런 달라진 세상에서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가르쳐야 할 내용이 변했음에도 과거의 것을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어 누구나 검색하면 알 수 있는 내용을 다시 알려주는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날로그 시대에 가르치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학력저하의 문제만은 아니다. 교육 커리큘럼 자체가 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하지만 가르칠 사람도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바꿀 수가 없다. 기존의 학문의 토대나 체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과거의 학문을 배워 세상에 진출해봐야 무용지물이다.

 

대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인간을 이해하는 기반학문의 기초를 배우는 사람도 별로 없다. 철학자 가운데 가장 기본인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정도라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데칸쇼는 모든 학문의 기초다. 물리학이나 화학, 의학 등 이과계통의 학문에서도 기초라 할 수 있다.

 

대학이 이렇게 어려워진 것은 석박사 학위를 따도 취직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고도 성장기에는 석박사 학위만 따면 취직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기껏 고생해서 박사학위를 따고도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이 대학 저 대학을 누비며 시간강사로 사는 ‘풍찬노숙자’가 6만 명 이상이다. 고급두뇌의 학자들이 ‘워킹푸어’로 전락해서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다. 그들은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이 대학 저 대학을 누비며 강의시간을 늘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도 비정규직을 2년 이상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바꿔주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학교도 자주 바꿔야 한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엄청난 문제이지만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대학의 실적주의도 심각한 문제다. 논문의 질은 생각하지 않고 양만 문제 삼는다. 죽어라고 책을 한 권 써내는 것보다 급조된 20쪽의 논문이 더 평가받는 세상이니 제대로 된 장기간의 연구는 꿈꾸기가 쉽지 않다. 일부 교수는 대강 급조하기에 급급하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지만 보직교수나 원로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시간강사나 대학원생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필과 표절은 다반사다. 논문 쓰기에도 바쁜 대학교수들이나 임시직 강사들은 달라진 세상에 필요한 기초 교양을 새롭게 쌓을 시간과 여력이 없다.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도 쉽지 않다. 사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대중이 읽을 수 있는 글은 달라지고 있다. 그런데도 학술논문 심사에서는 엄격하게 과거에 통용되던 기준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 새로운 유형의 사고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졸업정원제 시행 이후 대학의 인기교양과목 수업은 대부분 강당에서 진행된다. 대중 강연처럼 진행되는 강의에서 토론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학생들은 그저 학점 따는 기계에 불과하다. 요즘에는 소규모의 독서토론모임도 별로 없는 것으로 안다. 그저 외워서 답을 쓰기만 하는 판국이니 바뀐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갈 능력을 키울 수 있을까?

 

앞의 대담에서 오사카대학 총장인 와시다 기요카즈는 “고도성장기까지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윗사람을 제치고 시대의 주역이 되길 바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의식의 배후에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유가 늘어난다는, 혹은 본격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이 인생의 피크이고, 그 뒤로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추락해가는 느낌이다. 엘리트에 대한 동경이 사라졌다. 지금의 시대는 엘리트가 생각하는 것을 다수(메이저리티)도 생각할 수 있는 시대다.

결국, ‘엘리트에 대한 동경’보다도 ‘돌출에 대한 압박’(튀는 인간으로 보이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젊은이들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없고, 돌출된 인간으로만 비칠 경우 상당한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개탄했다.

 

또 다케우치는 “다원화라는 문제와 교양이라는 문제는 세트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말인가 하면, 교양은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는데, 결국 ‘가치의 원근감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교양을 얻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전체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는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어느 것을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좋은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몇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면, 전체 중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바로 알게 된다. 교양은 그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달라진 세상에서 교양의 정의를 정확하게 내리고 있다.

 

교양의 개념도 달라지고 있다. 개인에게는 자신만이 보유한 교양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수많은 첨단기술은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를 세분화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영역에서는 저마다의 최고가 존재한다. 인터넷이 발달할수록 세분화된 모든 분야에서 1등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사회’가 구축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어느 영역이든 1등만이 확실한 자기세계를 구축해서 안정되고 빛나는 삶을 꾸려갈 수 있다. 다케우치는 “교양의 힘이란 몰입(專門)을 상대화하고 거리화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내부에 비평가를 두고 언제든 즉각 비평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개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안겨주지도 못하는 대학을 다니는 개인은 어떻게 해야 앞으로 살아남을까? 대학은 학생들이 처음부터 많은 책을 읽으면서 풍부한 지식을 쌓고, 새로운 시스템에 맞는 자신만의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학부터 근본적 혁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취업만을 주 목적으로 삼는 대학이 빠른 시간 안에 그렇게 변할 전망은 없어 보인다. 따라서 개인은 대학교육 시스템을 믿지 말고 자기 나름의 교양, 아니 자신만의 장점이 되는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분야에서만큼은 슈퍼노드나 알파블로거가 되어 어떤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즉각 비평가 이상의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평생 동안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구태여 ‘10차선 도로’일 필요는 없다. ‘오솔길’일지라도 자신이 가장 잘 걸을 수 있고 꼭 걷고 싶은 길이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분야의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또 블로그라도 하나 만든 다음 공동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놀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오프라인 모임도 가져야 한다. 관련 세미나가 있으면 열심히 찾아다녀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정년을 넘겨서도 은퇴라는 것은 없다. 죽을 때까지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인간의 평균 수명이 90세에 가까워지고 있다. 정년인 60세 이후 30년 동안 주야장천 골프, 등산, 낚시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자신의 일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그럴 수 있는 사회적 구조가 마련되고 있다. 개중은 혼자 일하면서 다중을 대상으로 얼마든지 아웃소싱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것을 우리는 크라우드소싱이라고 한다. 그 길은 지금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대학에 입학할 때쯤에는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비판적 안목은 한 권의 책을 완벽하게 소화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을 때에야 저절로 키워진다. 지금 학교교육은 시험성적으로 줄 세우기에 급급하다. 이래서는 국가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1만 개의 초중등학교에 1만 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한 다음 매달 아이들을 유혹할 수 있는 신간서적이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자유롭게 책을 읽으며 자신의 영역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교사는 모든 학생에게 맞춤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만큼은 키워줄 수 있어야 한다.

 

 

2. 대학은 개인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내가 대학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파워포인트’로 수업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대학교재도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책이야 팔리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파워포인트로 요약해주는 정보만 접한 사람이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까? 사실 대학의 교육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는 방법론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파워포인트로 요점정리해서 하는 수업으로는 빨리 지식을 전달할지는 몰라도 그런 방법론을 배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앙공론>의 특집에는 이시다 히데타카 도쿄대 교수의 「빈사상태의 ‘인문지知’를 살리기 위해 - 교양붕괴와 정보혁명의 현장에서」란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정보기술환경이 1990년대 후반 급격히 변화한 사실은 대학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학이 정보혁명의 파도에 휘말려 지적산업사회에 편입된 사실을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는 현재, 다시금 대학의 지가 무엇인지, 교양형성이 무엇인지 하는 근본적 질문이 회귀한 것”이라고 먼저 고민의 요지를 밝히고 있다. 그 글에서 ‘인문학자는 시대에 뒤쳐진 승려인가’라는 중간제목이 달려 있는 다음의 글은 오늘의 대학이 처한 현실을 너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처럼 대학을 둘러싼 환경의 격변 속에서, 변용의 중심에서 뒤쳐진 것처럼 보이는 지적 영역이 있다. 그것도 대학의 지의 근간을 형성하는 뼈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내가 그 부분에 속해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도 과격한 진단이 되겠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대학에서의 인문과학, 인문계 연구의 변방화이다. 문학, 언어문화, 역사, 철학과 사상 등의 분야 및 여기서 파생된, 보다 새롭고 다양한 이름을 가진 연구 분야가 이에 해당한다. 지금 이런 분야에는 활기가 없다. 이것이 대학의 ‘인문지’, 문화에서의 ‘교양’ 의 후퇴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인문지란 문헌과 문화의 연구를 통한 보편적 가치추구라고도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인문과학은 바로 그 직계학문이라 말할 수 있다.

 

외재적 요인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인화한 대학의 인문계에서는 ‘외부자금획득’등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인문학자들은 활자문화에서는 스페셜리스트였지만, 정보기술혁명에서는 약자였다. (노인, 아이, 인문계로 비유되는 사람들이 구글이나 위키피디아와 경쟁해서 어떤 전망을 갖겠는가)

 

하지만 애초부터 인문과학 자체가 보다 내재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지금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탈구축, 문화연구 등의 인문과학이 빛나던 시대가 아니다. 인간의 정신과 문화에 대한 연구는, 인지과학과 뇌 과학, 정보과학에 인식론적 주도권을 빼앗겼고, 인간과학의 자연주의화에 굴복한 느낌마저 든다.

 

인문학자란 시대에 뒤떨어진 승려들인가. 그들이 내향적이고 ‘아름다운 혼을 가진 변증법’에 틀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탓인가. 이 글에서는 ‘인문지의 위기’를 ‘인문학자들의 내적 교양붕괴’를 제기하고 생각해 보는 차원에서 다뤄보자. 단언컨대 때로는 아이러니한 어조를 띨 수도 있겠지만 결코 냉소를 보내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인문학자들이여 자부심을 되찾아라! 대학을, 지성을, 다시 한 번 강하게 상상해라! 이것이 내가 보내는 메시지다.

 

인문학을 살려내야 한다는 인문학자들의 외침이 2006년 가을에 들불처럼 일었다. 학자들이 인문학 위기의 주범과 해결사로 정부를 지목한 것은 일단 주효했다. 당시 교육인적자원부가 인문학 진흥계획을 발표하고 ‘인문한국 프로젝트’를 비롯해 향후 10년 동안 4000억 원을 한국학술진흥재단(지금은 한국연구재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을 통해 투입하기로 결정했으니 말이다. 그중 인문한국 지원사업은 24개 대학 30개 연구단을 선정해 1000억 원을, 인문저술 지원사업은 매년 상당수의 학자를 선정해 연 1000만 원씩 3년간 모두 3000만 원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이런 일이 과연 인문학을 살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직 사업 초기라 성과를 좀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출판생태계를 파괴하는 데는 상당한 기여를 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분야를 살펴보자. 한국역사연구회가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처럼 생활사를 다룬 교양서를 연달아 내놓던 20세기 말만 해도 대중역사서 시장이 곧 만개할 것처럼 여겨졌다. 수십만 권이 팔린 『조선왕 독살사건』의 이덕일처럼 베스트셀러 저자까지 등장하면서 소장학자의 교양서 집필이 잠시 늘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학진의 프로젝트가 작동하면서 ‘프로젝트형’ 학자는 늘어나도 교양서를 펴낼 수 있는 인적자원은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학자가 쓴 교양서는 가뭄에 콩 나듯 하고 있다.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 미처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글 쓰는 능력이 있어 교양서를 펴낼 만한 젊은 학자는 프로젝트에 수렴된 다음부터 어떻게든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해졌고, 따라서 논문형 글쓰기에 바쁘다. 논문형 글쓰기로는 대중독자를 사로잡을 수가 없다. 하물며 펜과 종이보다 마우스와 스크린에 익숙한 젊은층을 유인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학진의 연구지원이 인문학 진흥에 제대로 기여하려면 모든 국민이 성과물을 폭넓게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손쉬운 길은 연구 성과를 책으로 펴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성과물은 글을 다시 쓰지 않고서는 책으로 펴내기 힘든 수준이어서 출판기획자가 출간을 기피한다. 애써 세금을 들여 젊은 학자의 피땀까지 팔아 만든 성과물이 창고에 처박히게 되는 셈이다. 이 사업이 성공하려면 공모할 때부터 출판 계약서를 첨부하도록 요구하고 실제로 책 출간을 의무화해야 한다.

 

학진의 다른 진흥사업이 지닌 문제점도 지적해 보자. ‘명저번역지원사업’은 목록선정의 공정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책 출판을 한 출판사로 몰아주는 방식이어서 명저 번역에 뜻을 가진 출판사나 번역자의 자발적 참여를 원천적으로 막는다. 학술지를 골라 ‘등재지’라는 레테르를 안겨주는 사업도 대부분의 등재지가 내용의 참신함보다는 논문형 글쓰기만을 암묵적으로 강제하므로 발랄한 글쓰기를 봉쇄한다.

 

인터넷 등장 이후 무료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대중은 누구나 알아야 할 상식을 소재로 하되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이 결합한, 매우 설득력 있는 글을 필요로 한다. 오랜 연구로 농익은 글을 쓸 줄 아는 학자들이 대중서 집필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은 학자가 프로젝트라는 참호에 숨어 대중과 거리두기에 더 열중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인문학자의 외침은 인문학 진흥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눈먼 돈’을 뜯어내는 데 있었음을 증명해 보인 셈이다. 이러고서야 결코 인문학이 진흥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루빨리 지원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혁신해야 마땅하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학자들이 이렇게 ‘프로젝트’형 학자로 변신해 즐기는 사이에 과연 학생이라는 소비자에게는 만족을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소비자 중심의 사회에서는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대학의 인문학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그런 현실을 애써 외면해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교육의 효과는 오랜 세월 뒤에 나타난다. 그러니 당장 학생들의 입맛에 맞는 ‘물건’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보다 학생들에게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강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승려처럼 철지난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대학은 차라리 사라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오늘날 학생들이 처한 환경은 어떤가? 이시다 교수는 “현재 학생들은 너무 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있다. 게다가 교양의 서열화가 무너진 세계이기 때문에 어떤 길을 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우리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대학 4년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 자체가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학은 당장의 취업에 목숨을 걸고 있다. 상위 클라스는 국가고시, 공무원시험, 대기업으로, 나머지는 인턴이라도 좋으니 아무 곳에라도 일단 밀어 넣는 혈안이 되어있다. 이시다 교수는 대학생활에 앞당겨 취직활동에 여념이 없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기업과 사회에도 커다란 손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해서 일단 취업이 됐더라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은 커다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에서 평생을 사는 지혜를 모두 전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정표는 확실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시다 교수는 “‘교양’이란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사물을 생각하고, 인생의 합리적으로 판단을 내리기위한 인생의 ‘밑천’과 도 같은 것이다. 그 지적자산을 충분히 축적하지 않은 채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면, 자기 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에 한계가 닥쳐올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산업구조의 변화가 극심하고, 계속해서 혁신이 일어나는 현대세계에서 ‘일회용 물건’이 되지 않도록 일정의 기본적 ‘지적 패키지’를 갖춰서 세상에 나가기”를 권장한다.

 

그렇다면 대학은 제 역할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이시다 교수는 “대학은 결코 ‘전문적 영역지’만을 전수하는 장소는 아니다. 좀더 유연하고 유용한 지식이 요구된다. 지의 매체가 될 수 있는 힘이다. 사회의 지를 대학의 지로 바꿔 읽는 힘, 대학의 지를 사회의 지와 만나게 할 수 있는 일종의 ‘프로듀스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고도의 지식 리터러시’ 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인문지’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대학생들은 졸업을 유예하면서까지 취업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그렇게 해서 취업이라고 해보아야 90퍼센트 이상이 비정규직에 종사하면서 새로운 고통에 시달린다. 이제 대학은 소비자인 학생들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대학은 자신들의 역할부터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이전투구의 장이 아니라 ‘고도의 지식 리터러시’를 제공하는 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정부나 기업의 당국자들과 충분한 대화, 그도 아니라면 투쟁을 해서라도 언젠가는 획득해야 할 명분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학생들에게 평생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에 따라 학생들 개개인은 따로 자신만의 미션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대학은 새로운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대학은 스스로의 무게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절반 정도의 임시직 강사들은 ‘워킹 푸어Working Poor’의 늪에서 헤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이 비전을 찾는 것은 스스로의 몫일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2009/08/09 12:28 2009/08/09 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