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보안'에 해당되는 글 120

  1. 2009/09/25 바람, 그리고 바람 3
  2. 2009/05/25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미화할 일은 아니다 81
  3. 2009/05/23 노무현, 담배 한 대 피우고 가시지 16
  4. 2009/05/11 설경구, 그리고 아는 사람 19
  5. 2009/05/02 하민혁의 통신보안 블로그 새롭게 오픈하다
  6. 2009/04/29 영화 <더 리더>, 깨우친다는 것에 대하여 13
  7. 2009/04/28 구글에서 하민혁을 쳐보세요~? 41
  8. 2009/04/27 비트겐슈타인의 <비망록> 중에서 7
  9. 2009/04/08 블로고스피어와 G20 정상회담 4
  10. 2009/04/05 스땅달의 <적과 흑> 중에서
  11. 2009/04/04 김한길의 <눈뜨면 없어라> 15
  12. 2009/04/03 하민혁을 찾는 사람들 26
  13. 2009/03/29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14
  14. 2009/03/28 헤르만 헷세, 안개 속에서 6
  15. 2009/03/24 하민혁에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 31
  16. 2009/03/19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그리고 다빈치 코드 6
  17. 2009/03/17 이문열의 금시조, 추락하다 - 풍장 風葬 5
  18. 2009/03/17 아픈 우리 젊은날의 사랑,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6
  19. 2009/03/16 휴먼스테인을 보며 인간의 굴레를 떠올리다 4
  20. 2009/03/15 이문구의 <유자소전>, 대천 바다 이야기(2) 4
  21. 2009/03/14 권력의 법칙 48가지, 로버트 그린 4
  22. 2009/03/13 이외수, 선생님 혹시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 12
  23. 2009/03/13 이문구의 <유자소전>, 대천 바다 이야기(1) 4
  24. 2009/03/10 배신자 표현일, 김신의 <쫄병시대> 를 읽다 10
  25. 2009/03/09 차분하면 진보, 화 잘 내면 보수 48
  26. 2009/03/04 지키지 못할 약속 3 2
  27. 2009/03/02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 중에서 6
  28. 2009/02/22 파리대왕과 유신헌법, 그리고 소문에 대하여 2
  29. 2009/02/19 김정훈 유고집,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 8
  30. 2009/02/17 김수환 추기경, 모든 좋은 일은 쉽지 않다 6
바람이 붑니다. 비가 오려나 봅니다. 창문을 넘어 들오는 바람이 거의 작살입니다. 비를 머금은 바람이,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이 시간이 이대로 영원히 멈췄음 한다는 생각을 잠깐 해봅니다.    


바람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지방으로 출장을 갑니다.[footnote]엄밀하게 말하자면 출장은 아니고, 연차 휴가에 가깝습니다. 집안 일로 가는 일이거든요. 다만, 업무는 계속되는 터라 출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을 뿐입니다.[/footnote] 블로그는 당연히 계속 운영합니다. 시간적으로 얼마나 충실한 운영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이라고 널널한 상황에서 하고 있는 건 아니니만큼 블로그에서 표면상으로 나타나는 변화는 크게 없으리라고 봅니다.  


하루 하나씩 블로그에 글 올리기 


하루 하나씩 블로그에 글을 올리겠노라 작정하고 블질을 시작한 게 엊그제인 것같은데, 어제 날짜로 벌써 5개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직은 지나온 날들보다 남은 날들이 더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지금까지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켜왔다는 사실이 내심 뿌듯합니다. 

실은 어제 어떤 선언을 하나 할까 생각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리 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싶습니다. 몇 가지 일 때문에 뭐든 하면 곧 이루어낼 듯싶기도 하고 해서 "앞으로 나는 이렇게 가겠다" 하고 선언을 하려 했던 건데, 그랬으면 클날 뻔 했습니다. 제가 여간 고지식한 게 아니어서 만일 그렇게 선언을 했다면 그걸 지키기 위해 죽을 둥 살 둥으로 매달리다가 아마 기진하고 말았을 것같아서 말이지요.  

제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은 대개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출판사와 인터넷신문에 꽤 오래 있었습니다. 글 쓰는 분야에서 계속 있었던 셈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글을 잘 못 씁니다. 논리적으로 글을 풀어가는 능력도 없고, 무엇보다 기본적인 글발 자체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무려 5년 동안 인터넷신문을 운영하면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글(껄랑 십 수개의 글)을 쓰는 데 그쳤을까요. -_  [footnote]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장담컨대, 오연호 기자만큼의 글발이 있었다면 지금의 오마이뉴스보다 백 배는 더 나은 인터넷신문을 만들고도 남았을 겁니다. ^^[/footnote] 


글재주도 없어 


실제로 저는 글쓰기에는 크게 취미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별로 노력을 못 했습니다. 아예 날 때부터 타고난 사람도 있긴 하지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실제로는 연습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교본으로 삼을만한 책이나 기사를 놓고 기본적인 틀을 익히는 한편으로 각 유형의 글에 필요한 기본적인 어휘와 주요 어휘를 자유자재하게 쓰는 훈련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저는 게을리했습니다. 정확히는 단 한번도 해보질 않았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열심히 하라고 시켰으면서도 말이지요. -_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유행이던 고시 공부를 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기출 문제를 보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footnote]그래서 말인데 미네르바님의 경우 제가 보기에는 딱 고시 체질입니다. 다른 것 다 접고 고시에 매달린다면 아마 수 년 내에 충분히 합격의 영광을 누리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일정한 틀에 맞춰 독학으로 익힌 어휘들로 풀어간 그의 글솜씨를 보건대는 그렇습니다. 미네르바님, 혹시 이 글 보시거든, 이 말 허투로 듣지 말고, 뜻이 있거든 꼭 함 찾아오세요. ^^[/footnote] 

그렇다고 말빨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입니다. 말을 하다가 중간에서 얼버무리고는 한참 지난 다음에 뜬금없이 다시 아까 그 말을 계속하곤 해서입니다. 이건 다른 말로 하면 생각이 딸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글만 못 쓰는 게 아니고 제가 생각해도 저는 사고력도 한참을 떨어집니다. 


말빨도 없어, 생각도 짧아 


블로그를 찾는 이들이 자주 댓글을 왜 그렇게 열성으로 다느냐고 의아해 합니다. 그때마다 제가 하는 대답은 늘 똑같습니다. 댓글을 달면서 배우고 있는 거라구요.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거 그냥 하는 빈 말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글발도 없고 사고력도 떨어지니까 한 방에 가질 못 하고 댓글을 통해 조금씩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가는 것입니다.  

제가 다닌 학과는 학부 때부터 시험은 늘 그냥 백지 한 장이 다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걸 시험 종료 종이 치기 직전까지 거의 매번 백지로 갖고 있습니다. 생각이 정리가 잘 안 되어서입니다. 결국 마지막 몇 분을 남겨두고서야 어쩔 수 없이 허겁지겁 답안을 채워가곤 합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형광등이었습니다. 반응이 한 인터벌씩 늦다고 해서 지인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언젠가는 다른 언론사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데, 으레 그렇듯이 몇 분씩 있다가 겨우 답변을 하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기자가 짜증을 내더라구요. 이런 제게 우리 형은 자주 그럽니다. "저런 넘이 공부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 우리 형은 나보다 공부는 못 하지만, 뭔가 필요한 거를 암기하거나 이해하는 데는 귀신같이 빠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내내 형한테 지청구를 듣고 컸습니다. 


니가 할 줄 아는 게 도대체 뭔데? 


바람


그렇다면 니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는데? 하실 수 있습니다. 

글발도 말발도 없지만, 생각도 살짝 짧지만 저도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몸으로 때우는 일입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뭔가를 도모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조직하는 일에는 자주 불려다닙니다. 물론 조폭같은 조직을 말하는 건 아니고, 그냥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일에는 뭔가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도 그 점은 인정해줍니다. 

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고 가끔씩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 블질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은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못 쓰는 글이지만 1년 동안 할 수 있는 한 애써 내 생각을 전하고, 그런 다음 그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뭔가를 함 해보려 하는 게 그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뭐냐구요? 
저는 그것을 밝혀 전하고 가는 시기를 7~8월로 잡고 있습니다. 아, 오늘 바람이 진짜 지깁니다. 



 
<덧붙이는글> 이 글은 순전히 바람이 불어서 쓰는 글입니다. 어쩌면 바람입니다.
<덧2> 위의 글은 지난 2009/06/02 하민혁의 민주통신에 올렸던 글 http://blog.mintong.org/594 (새 창으로 열기) 입니다. 이곳 메인이 너무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는 터라 옮깁니다.
2009/09/25 22:45 2009/09/25 22:4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몰고 온 파장이 만만치가 않다. 특히 블로고스피어에서 만나게 되는 일부 지지자들의 모습은 흡사 무슨 신흥종교의 부흥성회를 보는 것처럼이나 광적이다.

일부 언론은 네티즌의 이같은 광기를 아예 부추기고 있는 모습이다. "자살은 질병이다"며 "자살은 안 된다"고 부르대던 바로 그 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애도하는 마음으로 추모는 하되, 그러나 노통의 자살을 지나치게 미화하지는 않을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살이 결코 미화할 일은 아니어서다.


오연호

오연호,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노무현을 죽였다


시사인

무슨 공모씩이나를 한다는 <시사인> 광고 화면 VS 슬픔을 이용하여 장사하지 않겠습니다


<덧붙이는글>
'자살'을 미화하다 못해, 이젠 아예 '타살'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오연호,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노무현을 죽였다 <오마이뉴스>" 그러나 '자살'을 '타살'로 몰아가는 이같은 주장은 한마디로 '궤변'이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군이 신문 때려치고 아예 정치판으로 나설 모냥이다. 굳이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2009/05/25 22:44 2009/05/25 22:44

오늘 아침 '투신'으로 유명을 달리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 자꾸 걸립니다.

“혹시 담배를 가지고 있느냐”
“사람들이 지나가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엉이바위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노 전 대통령은 6시40분께 경호원에게 “혹시 담배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고, 경호원이 “없습니다. 가지고 올까요?”라고 하자,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마을 앞길을 걸어가던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지나가네”라고 말하자, 경호원이 잠시 노 전 대통령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이 순간 노 전 대통령은 갑자기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 ··· 502.html


죽음을 작정하고 오른 그 산마루에서 마지막 남긴 말이 '사람들이 지나가네..'였다니..

경호원의 눈길을 돌리게 한 말이라고만 보기에는 뭔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게 담배 있느냐는 말과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 막막함이 가슴에 와닿아서입니다. 

일부 비흡연자들은 담배 피우는 이들을 거의 혐오에 가까운 눈길로 쳐다보곤 하지만, 그래도 힘든 일에 부닥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담배 한 가치입니다. 그건 힘든 일을 끝마쳤을 때나 한없이 외로울 때, 혹은 끝이 없는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때 피워무는 담배 한 가치는 언제나 위안이고 평화함입니다.

투신 직전, 노통이 담배를 찾았다는 얘기는 그래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거 한 대 풋고 가셨으면 어땠을까 싶어서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거 한 대 피우셨다면 또 어땠을까 싶어서입니다. 그거 한 대 피우셨더라면 혹시 생각을 달리 하진 않았을까 하는 하릴없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노통의 죽음에 대해 다른 건 걸리는 게 없습니다. 어차피 하고싶은 것 다 하시고, 죽음까지도 자기 스스로가 선택한 고인에게 내같은 범인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무슨 말을 한다면 그게 오히려 주제넘는 일이겠다는 생각이구요. 그렇지만 담배 얘기만큼은 자꾸 걸립니다. 그거 한 대 피우고 가셨으면 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이지만, 노통.. 담배나 한 대 풋고 가시지 말이지요..


노무현과 담배

2009/05/23 18:53 2009/05/23 18:53
설경구와 송윤아의 결혼 발표를 보면서 내 일처럼 흐뭇해 했는데, 거기에 살짝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설경구 전처의 친언니가 올렸다는 글로 어제부터 인터넷이 시끌벅적합니다. 

설경구가 이혼남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 친구를 보면서 얼굴에 살짝 그늘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저 문제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설경구

설경구, 그 얼굴에 햇살을..


쥔장이 이래뵈도 이런 쪽에 살짝 조예가 있습니다.

아니, 이혼에 대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고 아는 이들이 세상살이에 대해 상담을 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가운데는 당근 이혼에 대한 상담을 하는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크게 넓지 않아서겠지만, 어떤 때는 이혼 당사자 둘 다 각각 조언을 요청해온 적도 있습니다. 무튼, 이 경우에 저는 대개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혼하고 새롭게 시작하시는 게 좋겠다고. 하루라도 빨리 하시라고.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람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그래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한다 해도 그 노력은 계속해서 어긋날 뿐입니다. 이 정도면 일반적인 호오의 감정을 넘어서 있다고 봐야 합니다. 둘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서로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쩌면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그 결과는 더 큰 간극만을 남기기 십상입니다. 이건 선악으로 따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차이의 문제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사안에 대해 제삼자가 나서 누가 나쁘네 마네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삼가야 합니다. 특히 '아는 사람'임을 들어 말하는 건 절대 삼가야 합니다. 그건 당사자들도 정말 죽을 둥 살 둥 애를 쓴 결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선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계속 이어지게 될 이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와 있는 문제입니다. 회복 불능인 사람 사이의 감정을 숨기고 사는 삶이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정리하고 각자 새로운 길을 찾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

힘든 결정을 내렸을 설경구와 송윤아씨도 그리고 씻기 힘든 아픔을 겪었을 전 처 분도 모두 새롭게 열어가시는 길이 내내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일로 얘기꺼리 만드시는 분들.. 제발 좀 참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이미 삭제된 글을 기어이 캡처하여 올려놓고 판관 놀이 하시는 찌질한 블러거 분들.. 개념들 좀 챙기셨으면 합니다. 님들, 그런 말할 자격도 이유도 없는 것같아 보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2009/05/11 13:44 2009/05/11 13:44
열 두 달을 계획하고 리오픈한 하민혁의 민주통신이 이제 4개월을 지났다. 6개월째부터 분리하려던 계획을 앞당겨서 사적인 얘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한다. 이름하여, 하민혁의 통신보안이다.

하민혁의 통신보안에서는 하민혁의 민주통신 블로그에서는 차마 하기 힘든, 말 그대로 보안에 해당한다 해도 좋을 정도의 지극히 사적인 얘기들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건 그냥 떼다 붙이는 말이고, 실제로 여기서는 딴죽 걸기용 글들을 주로 올릴 생각이다.

하민혁의 민주통신이 예상외로 진도가 빨리 나가는 바람에 블로그 글이나 언론 기사 가운데 딴죽 걸 게 있어도 선듯 딴죽을 걸고 있기가 불편한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다.

이게 무슨 가이 소린가 하시는 분들도 당근 있을 수 있겠다.
그런 분들께는 그냥 한마디만 전하고자 한다.

보시면 압니다.


2009/05/02 05:01 2009/05/02 05:01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오랜만에 본 영화다. 아니, 영화는 그동안에도 더러 보긴 했지만 리뷰를 남기는 게 오랜만이다. 그만큼 인상에 남는 영화가 없었다는 의미일 터다.

이 영화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더 리더

영화 <더 리더>


영화 <더 리더>는 우선 장르상으로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 청춘의 한 시기를 짚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성장 영화이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파격적인 노출신에 담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감성을 자극하는 멜로물이고, 한 개인의 행적을 통해 그의 내면 깊숙히 자리한 비밀을 풀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미스테리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또한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혹은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거대 담론으로서의 역사, 곧 한 시대와 그 사회를 통째로 굴려가는 거대한 수레바퀴로서의 역사와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견뎌가야 하는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역사를 영화는 그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은 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은 '깨우침'이다.

영화는 청소년기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대해 혹은 세상을 더 할 수 없이 푸르고 빛나도록 하는 사랑에 대해, 어른이 되어가면서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좌절과 새로운 희망에 관해, 역사를 만들어가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깨우친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다. 늘 약간씩은 때늦은 후회로.

영화를 보고난 다음 가슴이 아리거나 먹먹해오는 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관객 스스로도 늘 그렇게 세상을 때늦게 깨우쳐간다는 데서 오는.  


더 리더

더 리더




<덧붙이는글> 영화의 부제가 '책 읽어주는 남자'다. 원제에도 이같은 부제가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부제는 영화랑은 전혀 겉도는 부제가 아닌가싶다.
<덧2> 아, 중요한 얘기를 빼먹었다. 이 영화 아직 아니 보신 분은 함 보시기 바란다. 추천한다는 뜻이고, 봐서 후회하지 않을 영화라는 얘기다. 한나역을 맡은 케이트 윈슬렛이 참 이쁘게 나온다.
 
2009/04/29 15:43 2009/04/29 15:43
이 블로그에는 하민혁의 연락처가 나와 있다. 이메일 주소, 메신저 주소가 다 공개되어 있다. 전화번호도 당근 공개되어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직접적으로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이 직접적으로 통할 수 있는 창구를 두고 굳이 멀리까지 우회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친구들이 있다. 애써 회사 관계자나 지인 등에게 전화를 하는 친구들이다. 

"구글에서 하민혁을 쳐보세요~"


구글에서 하민혁을 쳐보세요~

구글에서 하민혁을 쳐보세요~?


그런 친구들이 요즘 자주 전하는 메시지가 저 말이란다.
"구글에서 하민혁을 쳐보세요~"

회사 관계자나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무튼 이 친구들이 회사나 지인들에게 전화를 건 다음 다짜고짜 "구글에서 하민혁을 쳐보세요~"라고 한댄다. 

전에는 뭐라고 한참 하민혁에 대한 비난을 퍼붓더니(회사 관계자에게는 주로 회사에서 짤르라는 말이고, 지인들에게는 하민혁이 나쁜 넘이다고 욕하고 하더니) 요즘은 그런 것도 없단다. 그냥 저 말만 하고는 끊어버린단다. 그것도 공중전화를 이용해서(소심하기는.. -_-) 그렇게 말한댄다.  

"블로그에 글 썼다고 안티 당하는 건 아마 선배가 유일할 겁니다."
방금 전에 전화를 받았다는 친구 하나가 농반 빈정거림 반 섞어서 비릿하게 던지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딴은 그렇다. 맞는 말이라는 얘기다. 도대체 변방의 블로거 하나가 블로그에 글 몇 개 썼다고 오프에서까지 욕을 먹는다는 건 내가 듣보기로도 금시초문이다.

당근 반성해야 할 일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일 없다는 말이 있다. 내가 뭔가 저 친구들한테 아픔을 준 게 있으니 그렇게 애써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입수하고 공중전화까지 찾아가서 전화를 했을 일이다. 그런 점에서 반성해야 한다.

나아가, 그러기까지 이 블로그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댓글을 달았을까싶기도 하다. 그리고 나와의 소통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다른 이에게 하소연하는 길을 택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역시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이다.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 몇 배는 더 친절하게 답을 해드리겠다. 그러니 지인들에게 전화하는 일은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 특히 회사로 전화하는 건 안습 그 자체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친구한테까지 그러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무엇보다 쪽 팔린다).

그래서다. 앞으로는 애써 전화할 필요 없다.
그대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내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대신 전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두시라. 

"구글에서 하민혁을 쳐보세요~"


하민혁

블로거 하민혁의 하루




  
<덧붙이는글> 구글에서 '하민혁'을 쳐봤다. 도아산성 쌓은 친구 글부터 시작해서 가관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하민혁이의 비화 내지는 일대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참 할 일 없는 친구들이다. -_ 
 
2009/04/28 14:23 2009/04/28 14:23

1.
나의 이상은 어떤 냉철함이다. 열정을 위한 장소는 제공하되 그 열정에는 관여치 않는 하나의 신전과도 같은.

1.
장황한 서문의 위험성 : 한 권의 책이 갖는 정신이란 그 책 자체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1.
비록 어떤 사람이 시대를 앞서간다고 할지라도, 시대는 언제고 그를 따라잡기 마련이다.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


1.
나의 책이 오직 작은 모임의 사람들을 위해서만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내가 이 모임을 인류의 엘리트로 믿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 보다는 이 모임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문화적 환경, 다시말해 내게 낯선 사람들에 반대되는 나의 동료 시민들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
재능이란 새로운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하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 이 원천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

1.
자신이 다만 정신에 의해 부풀려진 속빈 튜브처럼 보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1.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서 기꺼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경우, 사람은 누구나 다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어떤 사람도 부상 당한 개와 마주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친구로서 접근하는 것보다는 끈기있고 관대하게 그를 피하는 것이 훨씬 쉬운 노릇이다.

1.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선량한 기질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요령 또한 지니고 있어야 한다.

1.
자신이 성취한 것이 자기 자신에게 이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거기에 들인 비용이 얼마이건 간에 사람들은 그만큼의 값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1.
멀리 있는 지역의 굉장한 대상들 사이를 유랑하는 일은 얼마나 쉬우며, 바로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그 유일한 대상을 붙잡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1.
오늘날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학생의 기호에 맞출 목적이 아니라 그 기호를 변화시킬 목적으로 자신의 학생을 위한 음식을 내어놓는다.

1.
나는 다만 나의 독자가 그 자신의 사고가 지닌 그 모든 결함을 보고 그리하여 그것을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1.
참회란 새로운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1.
코페르니쿠스나 다아윈 같은 사람이 실제로 이룩한 업적은 참된 이론의 발견이 아니라 풍부한 새로운 관점의 발견이었다.

1.
다른 사람의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희롱하지 말아라! (독문확인요함)

1.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 예술에서 그만큼 좋은 어떤 것을 말하기는 어렵다.

1.
모든 사람들처럼 나의 사고에는 이전의 내 (시들어버린) 관념들의 말라붙은 잔여물들이 남아 있다.

1.
희생을 감수한 사람이 자신의 그 희생에 우쭐해 한다면, 그 사람과 그 희생은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1.
오만이라는 마음 속의 거대한 집은 철거되어야 한다. 그것은 엄청나게 힘든 작업이다.

1.
때로는 채 익기 전에 나무에서 떨어지는 관념들도 있다.

1.
철학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계속하여 자세를 바꾸는 일이다. 한 쪽 다리로 너무 오래 서 있는 바람에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는 높은 산을 등정하는 사람이 짬짬이 뒷걸음질을 함으로써 원기를 회복하고 몇몇 다른 근육들을 풀어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1.
어떤 사람도 자신이 쓰레기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경우, 그것이 비록 어떤 의미에서는 참일 수 있다고 하드라도, 이 말은 그 자신이 바로 거기에 영향을 받는 그런 어떤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그는 미쳐버리거나 그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터이다.

1.
자기를 기만하지 않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1.
철학에서의 승자는 가장 천천히 달릴 수 있는 자이다. 혹은 마지막으로 경주에 참가하는 자이다.

1.
질투는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말해 질투에 고유한 색깔은 깊이 착색되어 있지 않으며, 보다 깊은 곳에는 열정이 다른 색깔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물론 질투가 열정보다 덜 실제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1.
천재에게 다른 정직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빛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천재는 이러한 빛을 연소점으로 모을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렌즈를 지니고 있다.

1.
그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 어떤 사람도 진리를 말할 수는 없다. 진리를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러나 그가 아직 충분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한 때문은 아니다.
진리란 이미 그것을 깨달은 사람에 의해서만 언급될 수 있을 뿐이며, 여전히 거짓 안에 살고 있거나 거짓에서 벗어나 어쩌다 한번 거기에 이른 사람에 의해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다.

1.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순간 휴식에 빠지는 것은 눈보라 속을 걷는 중에 휴식을 취하는 것만큼이나 위험스러운 일이다.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들면 그대로 죽게 되는 것이다.

1.
소망이란 공허한 것이다. 소망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는, 예쁜 공책을 가진 사람이 가능한 한 그것을 빨리 써서 채워 놓으려는 소망에 몸 달아 하고 있는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가 이러한 소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말해, 그가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그런 행위가 자신의 생산성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은 아니며, 그것은 다만 자신에게 익숙한 어떤 것에서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은 갈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가 거기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다시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런 전체적인 일은 여전히 반복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1.
나는 마치 어설픈 기수가 말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삶에 걸터앉아 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곧장 내던져지지 않고 있는 것은 순전히 말의 좋은 품성 덕분이다.

1.
내게 만일 독창성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씨앗에서라가 아니라 토양에서 비롯된 독창성일 것이다. (어쩌면 내게는 내 자신에게 고유한 씨앗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씨앗이 나의 토양에 뿌려지는 경우, 그것은 다른 토양에서와는 달리 자라나게 될 것이다...

1.
용기는 언제나 독창적이다.

1.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학자란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고, 시인이나 음악가는 기쁨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시인이나 음악가가 뭔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1.
천재란 용감하게 발휘된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1.
찬미 받기 보다는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라.

1.
찬미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 극복된 공포이며, 삶을 영위할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 역시 극복된 공포이다. 용기 -- 영리함이나 심지어는 영감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이 용기가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있게 하는 그 씨앗인 것이다.

1.
바로 눈 앞에 있는 올바른 것을 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1.
어떤 것에 대해서도 변명하지 말고, 어떤 것도 빠뜨리지 말며, 실제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고 말하되, 오직 사실에 새로운 빛을 주는 그런 어떤 것을 보아야 한다.

1.
가장 큰 어리석음이 매우 현명한 것일 수도 있다.

1.
끊임없이 '왜'라고 묻고 있는 사람들은, 건물 앞에 서서 여행 안내서를 들여다 보며 그것이 축조된 역사 따위를 읽기에 바빠 정작 그 건물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마는 관광객들과 비슷하다.

1.
누군가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는 경우라면 그 사랑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크다고 할 수 없겠지만, 값을 치르고서 사랑을 사야 하는 경우라면 거기에는 어떤 희생도 크다고 할 수 있다.

1.
과학자들이 쓴 인기있는 과학 책들은 힘든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정상에 서서 휴식을 취하면서 씌어진 것들이다.

1.
깊은 잠과 얕은 잠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상에도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사상과 그저 표면에서 요란을 떨어대는 그런 사상이 있다.

1.
씨앗을 땅 속에서 굳이 끌어낼 필요는 없다. 사람은 다만 거기에 온기와 수분과 빛을 공급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씨앗은 틀림없이 자라게 된다. 그것을 섣불리 만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
어떤 사람이 안쪽으로 문이 열리는 방에 있으면서 그 문을 잡아 당길 생각은 하지 않고 밀기만 한다면, 잠기지 않은 방에 있으면서도 그는 갇혀 있는 셈이 될 것이다.

1.
말은 곧 행위이다.

1.
매우 불행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자격이 있는 법이다.

1.
어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우호적인 관점에서 그의 삶을 보게 된다. 그의 삶은 안개로 원만해진 윤곽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 원만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삶은 들쭉날쭉하고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화해도 없었다. 그의 삶은 쓸쓸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1.
그것은 마치 길을 잃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물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렇게 해 주겠노라고 말하고는 아주 평탄한 길을 함께 동행한다. 그리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그가 멈춰서며 말한다. "이제 당신은 다만 여기서부터 집으로 가는 길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1.
인간은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는 잘 알아볼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잘 알아보지 못한다.

1.
깊이 내려가기 위해 굳이 멀리까지 여행을 할 필요는 없다. 가장 직접적이고 친숙한 환경을 떠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
사람들이 때로 멍청한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면, 이지적인 어떤 작업이 행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1.
투우에서 황소는 비극의 영웅이다. 황소는 처음에 고통으로 미쳐버리고 그런 다음 느리고 무서운 죽음을 겪게 되는 것이다.

영웅은 죽음을 직시한다. 단지 죽음에 관한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적인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다. 어떤 위기에서 당당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무대에서 영웅의 역할을 잘 연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 그 자체를 직시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우란 많은 다른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자신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의 인간으로써 죽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1.
삶이 견디기 어렵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변혁을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변혁인 우리 자신의 태도 내에서의 변혁은 마음 속에 거의 떠오르지조차 않으며, 또한 그런 결심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1.
지혜는 전적으로 차거운 것이다. 그리고 차거운 상태에서는 철을 제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차거운 지혜로써 삶을 바로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혜는 냉정하다. 반면에 믿음은 하나의 열정이다.

종교란 이를테면 가장 깊은 바닷속의 고요한 밑바닥이다. 그곳은 수면의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고요함을 유지한다.

1.
지혜란 차거우며 그만큼 어리석은 것이다. 이와는 달리 믿음은 열정이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삶을 은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지혜는 차거운 회색 재와 같아서 빨갛게 타고 있는 불을 덮어버린다.

1.
우리는 근본에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잊고 있다. 우리는 의문 부호를 충분할 정도로 깊이 던지지 않는다.

1.
"지혜는 회색이다." 삶과 종교는 그러나 색으로 가득차 있다.

1.
나라의 좋지 않은 살림살이가 가족의 살림살이를 좋지 않게 하는 법이다. 항상 파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자 또한 자기 자식들이 질서를 존중하도록 기를 수는 없을 것이다.

1.
삶이란 산등성이를 따라 나있는 작은 길과 같다. 길의 좌우에는 미끄러운 비탈이 있으며, 사람들은 그 어느 한쪽으로 자신을 주체하지도 못하는 채 곧장 미끄러져 내려가게 된다.

1.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가 어렵다.

1.
삶의 문제들은 피상적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며, 오직 심층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피상적인 차원에서는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1.
일을 하고 있을 때,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하자"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적인 욕구이다. 철학을 할 때는 이러한 신체적인 욕구를 무릅쓰면서도 생각을 계속해야 하는 경우가 끊임없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철학하는 일이 그토록 힘이 드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다루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더 미칠듯이 생각하는 것 뿐이다.

1.
사람은 자신이 가진 스타일상의 결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자신이 지닌 용모상의 추함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
영리함의 메마른 고지에 머물러 있지 말고, 어리석음의 푸른 계곡으로 내려가라.

1.
독자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독자에게 맡겨 두라.

1.
야망(명예Ehrgeiz)은 곧 사유의 죽음이다.

1.
씨를 뿌리는 비평(Bemerkungen)이 있는가 하면 거두어 들이는 비평이 있다.

1.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마치 모르고 있는 듯이 행동하기란 어렵다.

1.
평범한 작가는 거칠고 부정확한 표현을 너무 빨리 정확한 것으로 대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신이 애초에 지녔던 독창적인 생각을 죽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 생각은 적어도 그때까지는 아직 살아 있는 어린 나무였지만, 이제 그것은 시들어서 더 이상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그것은 차라리 쓰레기 더미 위에 던져버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그 비참한 어린 나무는 그나마 어떤 가치를 지닐 수가 있었을 것이다.

1.
걱정이란 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며, 거기에 반기를 드는 것은 가장 나쁜 태도이다.

1.
철학자들은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해야 한다. "느긋하게 하시지요!"

1.
사람들이 유머에 관한 동일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서로에게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어떤 풍속 중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공을 던지면 상대방은 그 공을 잡아서 다시 되던져야 하는 게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공을 되던지지 않고 자기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1.
문화란 하나의 관례(Ordensregel)이다. 혹은 적어도 관례를 전제한다.

1.
한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해 있는 문화 또한 좋아해야 한다. 거기에 무관심하거나 혐오감이 든다면 그에 대한 찬미는 곧 식기 마련이다.

1.
말에 그 의미를 주는 것은 실천이다.

1.
한 세대는 다른 하나의 세대를 오해한다. 그런데 어린 세대는 자기 나름대로의 밉상스런 방식으로 모든 세대를 오해한다.

1.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사랑이다.





 

<덧붙이는글> 이 글을 올린 27일에 네이버의 오늘의 역사인물에 비트겐슈타인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글은 이날 거의 비몽사몽으로 하루를 보낸 다음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비밀글로 올려둔 글이었습니다. 자정이 되기 전에 일어나서 글을 하나 쓴다는 생각이었지만, 만에 하나 혹시라도 제 시각에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비적으로 작성해둔 거였습니다. 하루에 한 편의 글을 쓴다는 그 약속 때문입니다. 무튼, 결국 제 시각에 일어나지 못 했습니다. 새로운 글은 당근 쓰지 못 했고 비밀글로 묶어둔 이 글이 4월 27일의 글이 되었습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는 살짝 할 얘기도 좀 있고 했는데 말이지요. 여러모로 안타깝습니다. 요즘 하고 있는 일들이 그렇게 좀 많이 빡빡하네요. 이같은 땜빵용 글 말고, 글 하나를 쓰더라도 맘 먹고 쓸 수 있는 그런 좋은 날이 언능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당근 면피용으로 하는 말입니다.  ^^  
2009/04/27 21:17 2009/04/27 21:17
블로그에 글을 써내려가다보면 이건 아니다 싶을 때가 있다. 뭔가 할 말이 있기는 한데,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 때다. 이런 경우 쓰면서도 그런 거 느낀다. '아, 이거 이 말을 쓰면 틀림없이 한 방 맞지..' 하는. -_

이같은 예감은 거의 한번도 틀리지 않는다. 우려한 부분에서 누군가는 정확히 치고 들어온다.[footnote]나는 이게 집단지성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footnote] 재밌는 건 이때 내가 보이는 반응이다. 당연히, '아이고, 잘못 했습니다. 이거 내가 쓰면서도 살짝 거시기했는데, 딱히 다른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질 않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이렇게 나가는 게 맞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십중팔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월 어찌라고? 그게 뭔 말인지 진짜 모르겠어요?' 뭐 이런 식으로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왜 이럴까? 쪽 팔리서? 아니면.. 여전히 답답해서? 것도 아니면 그거 따지고 드는 게 얄미워서? 그냥 딴죽을 위한 딴죽으로만 보여서? 뭐 모르겠다. 어쨌든 이같은 자세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로 엊그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국정' 어쩌고[footnote]지금처럼 블로거 일반, 혹은 시민 일반이 모두 거대담론에 빠져 있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자신의 전문 분야도 아닌 일에, 그것도 국정을 다루는 모든 일에 블로거 혹은 시민 일반이 나서 일일이 참견을 해야 하는 사회란 도무지 제대로 된 사회, 건전한 사회라 보기 힘든 때문이다.[/footnote] 하는 부분에서다. 여기서 내가 전하고자 했던 말은 '왜 의회 민주주의겠느냐'는 거였다. 한마디로 기나 고동이나 모두 나서 사사건건이 한마디씩 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이겠느냐는 얘기였던 것이다. 당근 연빵으로 이의가 들어왔다. -_  

그런데 이같은 이의는 사실 실제로 내가 얘기하고자 했던 바에 주목한다면, 다시말해 내가 말만 제대로 했다면 굳이 제기될 필요가 없는 터였다. 예컨대, 저기서 내가 하고자 했던 얘기는 이런 것이었다.


세계일보 만평

[워싱턴타임스] "우리가 합의하지 못하는 또 다른 새로운 제안이 있군요.."


G20 정상회담의 무용성 혹은 비효율성을 지적하고 있는 만평이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개최했으나 새로운 제안이 나올 때마다 각국 간 이견차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빈정대고 있는 것이다.

20명만 모여도, 것도 나름대로는 각 나라의 최고 위치에 있는 대표가 모여서 한다는 정상회담에서도 20명 정도의 의견 조율조차 쉽지 않은 게 세상사 이치다. 하물며 4천만이 모두 한마디씩 한다면 거기서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일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없다.

그러니까 나는 '국정' 어쩌고 하는 말을 통해 이 얘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 정권이 맘에 안 든다면 차라리 정권 교체를 위해 노력하는 게 더 바람직한 접근법이지, 모든 일을 사사건건이 트집을 잡는대서야 그걸로 이룰 수 있는 뭐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그렇다면 정권에 대한 견제를 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설레발 치는 사람들 꼭 있다. -_

그런 거 아니다. 내 말은 견제조차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견제를 하더라도 전략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일의 경중을 따져서 정말로 내줄 수 없는 일은 모두의 힘을 거기에 집중하여 확실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만큼 긴급 사안이 아니거나 크게 중요하지 않다 여겨지는 문제는 전략적으로 떨쿠고 갈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블로고스피어를 보면 어떤 때는 진짜 단세포들만 모여 있는 꼭 바보들의 천국 같아서 해보는 얘기다.


 
2009/04/08 20:22 2009/04/08 20:22

- 아름다움이란, 그것이 그 사람의 개성과 일치하고 그 스스로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드러난다.

- 돌멩이가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무겁기 때문이며,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그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 일찍부터 사랑을 배운 바람둥이 아가씨는 사랑의 괴로움에도 이내 익숙하게 되며, 참다운 정열을 알만한 무렵의 나이에 이르면 새로운 것에 대한 매력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게 되고 만다. 그러나 연애 소설조차 한번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경우에 맞게 되는 모든 게 새롭게만 보인다.

- 여자의 마음이란 쉬이 변한다. 이를 믿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 젊음을 오래 유지하는 비결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모든 미움의 감정을 버리는 데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우선 그 표정부터 늙어버리고 만다.

- 결혼 후에 연애에 빠지지 않는 여자란 오직 메마른 감정을 지닌 여자뿐이다.

- 아랫사람의 경우, 훌륭한 추론은 죄가 되기 쉽다. 뛰어난 추론은 늘 상대의 비위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 그대의 눈에 누군가가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거든 그의 모든 계획과 욕망 앞에 장애물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만일 정말 재능이 있는 이라면 그는 그 장애물을 쉽게 극복하거나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 연약한 인간이라면 도태될 것이고, 용감한 인간이라면 혼자서도 곤란을 극복해 갈 것이다.


 

스땅달의 적과 흑

스땅달의 <적과 흑>


- 모든 참다운 정열이란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
겉으로는 그렇게 공손할 수 없는 말과 태도이나 그것이 바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르고 넘어가고, 출세하고 싶은(처세에 능한) 사람은 알고서도 넘어가주는 그런.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이 새로운 동안에만 아름답다.

- 위대한 일 가운데 그것을 시도하려 할 때 극단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 있었던가? 위대한 모든 행위는 그것이 일단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범인의 눈에도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법이다.

- 기병대의 선두에서라면 시퍼런 칼날의 번득이는 위험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혼자서 겪어야 하는 위험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 머리에서 비롯된 사랑은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랑보다 확실히 아기자기한 맛은 더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흥분에 지나지 않는다.

- 천재가 지닌 자질 중의 하나는 평범한 인간들이 걸어간 길을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 소설이란, 큰 길을 가면서 주위의 풍경을 비추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독자는 그 거울을 통해 푸른 하늘을 볼 수도 있고 진흙탕을 볼 수도 있다. 그런 거울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독자들에게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의 거울은 진흙탕을 비춘다. 그래서 독자는 거울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차라리 진흙탕이 된 한길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진흙탕 그대로 내버려 둔 도로 감독을 비난하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 불행은 사람의 마음을 무디게 만든다.

- 자존심이 강하고 팔팔한 사람의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와 다른 사람에 대한 격분 사이에는 대개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경우 미친 듯이 화를 낸다는 것은 강렬한 쾌감이기도 하다.

- 어리석은 짓을 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반드시 악의에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 정치라는 것은 문학의 목에 달아맨 돌멩이 같은 것이다. 반 년도 못 가서 문학을 물 속에 가라앉힐 것이다. 상상력의 흥미에 정치가 뒤섞인다는 것은 음악회에서 총소리를 듣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권총 소리는 결국 아무 힘도 없을 뿐더러 매우 시끄럽기만 하다. 이 소리는 어떤 음악과도 조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정치라는 것에 독자의 반 수즘은 분노할 것이고 조간 신문에 실린 정치기사라면 특별한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도 이 소설 속에서 읽게 되면 그저 싫증이 날 뿐이다.

- 말수를 줄이고 행동을 삼가라. 이것이 연애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다.

-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재산이나 신분을 타고난 여자는 항상 자기 자신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그들은 상대방을 바라보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출세한다.

- 여론의 지배가 자유를 보증해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 불합리한 점이 없지 않다. 그것은 때로 불필요한 일에까지 간섭한다. 이를테면 개인의 사생활에까지 간섭하는 것이다.

- 호랑이와 매우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어느 영국 여행가의 경험담이 있다. 그는 호랑이를 기르며 호랑이와 같이 놀기도 했는데, 그는 책상 위에 늘 장전한 권총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 사냥꾼이 숲속에서 총을 쏜다. 목표물이 쓰러진다. 포수가 그것을 잡기 위해 내닫는다. 급히 달리는 포수의 발길에 채어 개미집이 부서지고, 개미떼와 그 알들이 산산히 흩어진다. 그러나 순식간에 일어난 이 상황을 개미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최고의 지성을 지닌 철학자 개미도 방금 자신들에게 닥친 그 시커멓고 거대하고 끔찍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사냥꾼의 장화였다. 갑자기 불꽃이 튀고 벼락같은 소리가 난 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장화가 그들의 거처를 짓밟아 버린 것이다.

죽음이나 삶이나 영원이라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큰 조직을 지닌 존재에게는 그 모든 것은 아주 간단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살이는 한여름 아침 아홉 시에 태어나 저녁 다섯 시면 그 생을 마감한다. 그런 하루살이가 어찌 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다섯 시간만 더 살 수 있더라도 하루살이는 밤을 이해할 수 있으련만.

 

- 사람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도 아직 위선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 사람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나대로의 죽음을 택하고 싶다.

- 너의 많은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 너는 전생에 많은 사랑을 했으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지 알 수 있는 존재이다."
- 스땅달의 "에고티즘의 회상" 중에서

"이 여성들의 대부분이 나의 사랑에 응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여자들은 나의 생애를 지배했다."
- 1835년 9월, 그의 나이52세 때 스땅달이 알바노 호수가를 거닐면서 모래 위에 12명의 여인 이름의 첫글자를 쓴 다음 했다는 말이다. (어느 기사 중에서)

"앙리 베일. 밀라노 사람. 쓰고 사랑하고 살았다."  - 스땅달의 묘비명


2009/04/05 23:28 2009/04/05 23:28

언제부터인가 김한길을 보면 '서울 깍쟁이'란 말이 먼저 떠오른다. 김한길의 일기를 처음으로 접한 건 10여년 전이었다. 문학사상[footnote]'이었는지 한국문학이었는지 확실치는 않다'고 적었는데, 김한길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결과 문학사상이다. - http://hangillo.net/05edition/images/ma ··· b1-1.swf (새 창으로 열기)[/footnote]에 연재되고 있던 그의 <병정일기>[footnote]'눈뜨면 없어라'라는 이 책의 제목은 책으로 펴내면서 붙인 이름이다.고 글을 올리면서 주석을 달았으나. 잘못 적은 것이다. 이정환님이 <눈뜨면 없어라>는 <미국일기>를 펴내면서 붙인 이름이라고 일러주셨기에 바로잡는다. 고맙습니다. (_ _)[/footnote]를 통해서였다.[footnote]근데, 하도 오래 전의 일인 터라 이 부분에서 몇 가지가 막 헷갈린다. 특히 <병정일기>와 <미국일기>를 읽은 시점 등에서 그렇다.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엄밀한 책 소개를 하는 글이 아니고, 책을 빌어 하고싶은 얘기란 다른 데 있으니까. 하면셔.. 담 넘어가듯. -_-
<덧> 지금 보면 이 부분은 그냥 주석으로 처리되었어야 할 내용이다. 하지만 감정이 먼저 나서 건들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_- [/footnote]

<눈뜨면 없어라>를 읽으면서 '서울 깍쟁이'라는 저 말을 떠올렸다. 어느 부분에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일기에는 당시 내가 반감을 갖고 있던 먹물들의 제조건이 여러번 내비치고 있었다. 가식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하여튼 그런.

에니웨이, 당시 그는(혹은 그의 일기에 드러난 그는) 내가 싫어하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그의 저 깍쟁이 기질이었다. 세상의 모든 잇속에는 다 관심없는 듯, 초탈해 있는 듯 하지만 가만 보면 실제로 제 잇속은 다 챙기는, 그런 서울 사람 기질이 그에게는(혹은 그의 일기에는) 다분히 함께 하고 있었다.
 

김한길의 눈뜨면 없어라

김한길의 <눈뜨면 없어라>


김한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가 대단히 선량한 사람으로 여긴다. [footnote]이는 책의 제목으로 살짝만 검색해봐도 이내 알 수 있다. 다음은 출판사의 소개글이다.
김한길이 1981년 6월 미국에 건너간 뒤 첫 한 해 동안의 기록인「미국일기」는 ≪문학사상≫에 2년 간 연재된 뒤 1983년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발간됐다. 이후 1993년에는 『눈뜨면 없어라』라는 제목으로 다시 발간돼 지금까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한길은『눈뜨면 없어라』의 서문에서
「내 젊은 날 가장 힘들고 막막했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밝히면서,「이 일기를 쓰던 동안에는 내가 선택한 삶에 내가 자신이 없었다. 미국 땅에서 쓸데없는 세월을 보내며 망가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괴롭고 불안하였다」고 쓰고 있다.
루머처럼 전설처럼 아직도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이야기들,
수많은 가슴에 감동을 뿌렸던 김한길의 낮은 목소리
「눈뜨면 없어라」는 인생의 거창한 진리나 도덕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김한길은 애초부터 무겁고 거창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김한길은 우리에게 들려주는 애기는 두통과 불면증, 변소, 열쇠, 발톱 없는 고양이, 글씨를 못 쓴다고 핀잔했던 아내의 옛 스승, 콘택트렌즈를 새로 낀 아내가 바라본 세상, 식욕과 졸음, 우울한 이유들, 때로는 비아프라의 기아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느 시인이 "통속 잡지의 표지 같다."라고 비유한 우리들 인생의 저변에 깔려있는 작고 사소한 것들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들의 의미가 작고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그는 작고 사소한 것들의 갈피 속에 깃들인 결코 작거나 사소하지 않은 의미의 발견자이기 때문이다. / 해냄출판사[/footnote]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그는 언제나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는다. 제법 심각한 얘기라도 해야 할 때가 오면 얘기를 돌리거나 가볍게 터치하고 넘어가버린다. 일기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속내는 그렇게 감추고 있다. 정작 중요한 얘기들은 모두 그렇게 호도해버린다.

자신이 나갈 구멍은 다 챙겨놓고 하는 얘기에서 신실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런 얘기들이란 도대체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특유의 가벼운 터치로 세상을 스케치하며 어떤 반론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김한길의 글쓰기가 바로 그런 유형에 속한다.

이른바 잘 나간다는 이들의 행태를 가만히 살펴보면 저들 모두에겐 엇비슷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가벼운 터치로 그리기, 혹은 코믹하게 그리기, 혹은 초연한 척 그리기.. 그런 것들이다. 처세술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즈음 박광수인가 하는 이의 그림이 상당한 인기라고들 한다. 난 동아일보를 보는 터라 조선일보에 연재되는(맞나?) 그의 만화를 볼 일이 거의 전무하다. 하지만 그래도 우짜다 접하게 되는 그의 그림 이야기를 보면  그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쩌면 그렇게 세상 만사에 모두 능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나이에 말이다.

그의 몇 컷짜리 그림 이야기 속 세상은 그렇게 단정하고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다. 순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것인지.. 자주 엄청 헷갈리는 대목이다. 무튼,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요즘은 동아일보에도 그 비슷한 그림이 연재되고 있다. 듣기로는 그것도 상당히 뜨고 있는 모양이고.

암튼, 이런 얘기들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란 뭐냐면..
이것 역시 예를 하나 들어 말하는 게 나을 성싶은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오늘자 신문에, 어느 국어 강사가 하이텔에서 폭력교실이라는 테마로 글을 쓰는데 하여튼 인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기사가 하나 실렸다.  그 인터뷰 기사에서 그 강사는 그런 말을 했다. 심각하게 혹은 진지하게 접근하는 법 대신에 가능한 한 과장되고 코믹하게 그리려 했다고. 이유는 정공법으로 접근하면 즉각적인 반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내 얘기는 그러니까.. 그런 글은 도무지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글은 누군가가 시비를 걸올라치면 그냥 한 마디만 해버리면 된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조크 한 번 해본 거라니까. 에이~ 이 냥반은 유머 감각이 없으시네. 걸 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구랴. 촌시럽게.
 
저들에겐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한없이 열린 담론의 장에 저들은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다시 에니웨이,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는 이 사람의 글에 나타나는 저 가벼운 기교가 싫다. 거기서 자꾸 어떤 '위선'이 읽혀서다. 혹여 김한길의 저런 가벼움에 속는 이가 없기를. 배부른 자의 허영을 좇다가 그 골의 깊음에 절망하게되는 독자가 없기를. 세상을 가볍게 대하고 결정을 내리는 바보가 있다면 그는 필경 가슴에 대단한 피멍 하나를 간직해야 할 것이다. 나와 같이 단순한, 말하는 모든 거를 액면 그대로 믿는 바보는 말이다.
 
서울 깍쟁이들에게 배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저 얄팍한 자기 변명 외에는.
도대체가 어떤 사태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 없다. 그들의 혹은 그의 시각에는.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글로 썼다면 거기에 대한 비판은 없을 수가 없다. 왜냐면 씌어진 글은 그것이 언제나 닫혀 있음을 전제로 하는 때문이다. 그것은 그 한계로 인해 항상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영리한 이들은 이같은 비판의 칼날에서 늘 한켠으로 비켜나 있다. 처음부터 비판 받을 수 있는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때문이다. 전형적인 서울 깍쟁이들의 글쓰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반론을 원천적으로 무력화시켜버리는, 바운다리를 두지 않고, 한없이 열어두고 하는 글쓰기.

이 책과 같은 공개 일기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글에 얼만큼의 자기 진실이 담길 수 있을까?

"이군, 친구들이 소탈한 체하고 털어놓는 연애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게. 정말 소중한 얘기는 그렇게 아무한테나 쏟아놓지 않는 법이야. 설사 하더라도 에누리를 두는 법이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서울내기 정선생이 주인공 이명준에게 하고 있는 말이다. 하물며 이 글의 필자는 그보다 더한 서울 깍쟁이다. 서울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자체 검열에 의한 중략)

하지만 그는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 고백을 한다는 건, 저쪽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그의 함부로 쏟아놓은 젊은 날의 허드렛말을 너무 요란한 치장으로 내놓는 일에는 좀더 신중해야 했다는 생각이다. 하긴 <광장>의 얘기를 한번 더 인용하여 말해 본다면, 이즈음의 사람들은 도무지 '사무치는 이야기 같은 것에는 밥맛없어 하는 사람들'이니 그저 적당히 속내를 감추며 얘깃거리 만들어 가는 재치가 꽤나 흥겨운 것일 수도 있는 것이긴 할 터다.

 

김한길


김 한 길
이렇게/웃기는/슬픈/아름다운/고백은 없었다.

번쩍이는 금박 위에 박혀있는 이 문구는 분명 장사치의 과장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안쓰러움을, 고독을 이해할 수 있을 듯도 싶다. 김한길의 일기에서 그렇게 신실하지 못한 사람의 기교만을 보게 됐다면 그러나 그건 너무 비약되고 악의에 찬 악다구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1997>

[서비스] 눈뜨면 없어라 "에필로그" 보기



덧붙이는 글, 열어보기..

<덧2> 특별히 책 내용에 대한 얘기도 없고 한 터라, 댓글에서 어느 분이 인상깊게 읽었다는 이 책의 '에필로그'를 서비스로 추가했습니다. <내용 퍼온곳> http://blog.timelife.co.kr/ceo/50 (새 창으로 열기)
<덧3> 아래 이정환님이 언급하고 있는 '집시부부 이야기'는 아래 주소에서 듣보실 수 있습니다.
-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 ··· nnew%3D2 (새 창으로 열기)

<덧4> 김한길은 여러 면에서 이문열을 생각하게 하는 이다. 같고 다름 모두에서 그렇다. 두 사람 모두 아버지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한 사람은 북한에서, 한 사람은 남한에서 자기 길을 갔다는 점에서 살짝 다를 뿐이다. 두 사람은 아버지를 기억하고 벗어나는 과정에서 또한 서로 같고 다르다. 특히 아버지를 벗어나는 과정과 거기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태도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아도 충분할 정도로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덧5> 김한길이 2001년 구로을 재선거에 나섰을 당시 선거 기획안을 하나 넣은 적이 있다. 지역구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잘못되었다는 분석을 담아서였다. 그거 받아들였으면 국회에 입성했을 터다. ^^  

2009/04/04 23:56 2009/04/04 23:56
내 엠에센 메신저에는 참 많은 이들이 등록되어 있다. 십 수년을 이 바닥서 먹고살다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일에 휘둘리는 통에 다른 기록들, 예컨대 명함첩이나 노트 등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이 크다. 메신저에 등록된 이들 가운데 지워야 하고 남겨둬야 할 이들을 구분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두고 있어서라는 얘기다.

최근 들어 그런 웹프렌즈 가운데 몇 몇이 띄엄띄엄 말을 걸어오고 있다. 지나가다 들른 블로그에서 내 프로필을 보고서다. 정확히는 거기 있는 내 이메일 주소를 확인하고서다. 그래서 살짝 걱정도 되고 한 터라 하민혁의 민주통신을 찾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함 들여다봤다. 유입 경로를 확인해본 거다. 예상외로 '하민혁'을 치고 들온 이가 적지않다. 몰랐다.

무튼, 유입 경로를 공개하기는 좀 그렇고 해서 하루에 방문하는 이들 숫자만 살짝 공개해본다. 사실 자료를 보면서 좀 놀랐다. 하루에 들오는 숫자가 거의 일정해서다. 방문자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대목이다.


하민혁의 민주통신

하민혁의 민주통신을 찾는 사람들


오늘 오후에 그동안 잊고 지내던 오랜 웹프렌드 하나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하민혁의 민주통신' 블로그 주소를 링크로 띡~ 하나 날리더니, 다짜고짜 '이게 니 블로그 맞냐'면서다.

어제는 밤을 꼴딱 샜다. 그래서 비몽사몽 간을 헤매고 있던 참이었다. 평소에도 뭐 그렇게 싹싹한 성격은 못 되는 데다, 요즘 여기저기서 뒤퉁스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듣고 있던 참이라서 내 답이 살짝 퉁명스럽게 나갔다. 이 친구 역시 한때는 꽤 상당한 쌈꾼 이력을 지닌 친구다. 벌써 감 잡고 전투태세로 돌입한다.

그 전투일지 가운데 일부를 공개한다. 넘 짦은 글에 대한 독자 서비스 차원에서다. ^^[footnote]사적인 대화 창구인 메신저 창에서 이루어진 애기여서 제삼자가 듣보기에 거친 표현들이 더러 있기에 그런 부분은 완화된 표현으로 바꿨습니다. 그밖에는 거의 날 것 그대로의 생중계입니다.[/footnote]

more..


하민혁
<덧붙이는글> 나중에 안 사실인데,
왜 변희재 얘기를 꺼냈나 했더니 저 친구도 변희재 까대는(죄송~) 글을 하나 썼더라구요. ^^
 
2009/04/03 21:37 2009/04/03 21:37

1.
사람들은 자신의 거의 모든 시간을 살아가기 위한 일에 바친다. 그러다가도 약간의 한가한 시간이 생기게 되면 이를 어쩔 줄 몰라 하며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채 기를 쓰고 그 시간을 없애려 든다.

1.
세상의 일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딱 부러지게 결정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인간의 감정과 행동에는 실로 다양한 변화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
무슨 이야기를 하건, 그 이야기 끝에서는 항상 "물론..."이라는 말로 토를 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일반적인 명제라 할지라도 예외란 있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 자신의 말이 반드시 정확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아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조금이라도 경솔하거나 일반적인 말, 혹은 불확실한 말을 했다 싶으면, 먼저 한 말을 새롭게 한정하거나 수정하면서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 놓아서, 결국은 어떤 얘기가 핵심적인 것이고 어느 얘기가 지엽적인 것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게 하고 만다.

1.
인간의 본성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 기쁨이나 슬픔이나 고통 등이 어느 일정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견뎌낼 수 있지만, 그 단계를 넘게 되면 인간은 결국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두고서 인간이 약하다거나 강하다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정신적인 측면에서나 육체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까지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어 버린 사람을 두고 비겁하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이 불행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병상을 지키고 있는 건강한 사람이 병상에 있는 환자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1.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다.

1.
환경의 변화를 추구하는 마음은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조급함은 어디를 가든 나를 뒤쫓아 오는 것이 아닐까?

1.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비교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것과 비교한다. 때문에 행복과 불행이란 결국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어떤 대상과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1.
나는 일 처리가 간결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일단 어떤 일을 종료하고 나면 그것을 다시 꺼내어 뒤적거리지 않는 성격이다.

1.
고지식한 사람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속 상하는 일도 없다. 그런 사람은 대개 모든 행동이 노처녀만큼이나 까다롭고, 자신에게 만족하는 일이 결코 없으며, 누가 도움을 주는 일이 있어도 거기에 감사할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괴롭게 만든다. 

1.
자기 자신의 척도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내 자신의 일만으로도 힘에 벅차서 남의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원한다.

1.
사람들의 정신은 한 자리라도 더 윗자리로 오르려는 생각으로만 꽉 들어차 있다. 그렇지만 가장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최고의 일을 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1.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건강이나 명예나 즐거움이나 휴식 등의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해 기를 쓰고 덤빈다. 그것은 대개가 어리석음이나 무지, 혹은 좁은 생각 등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이런 이전투구의 싸움이 다른 사람을 위한 호의에서 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1.
인간이란 누구나 희망에 속고 기대에 배신 당하는 법. 나라고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1.
하늘은 인간의 운명을 이렇게 정해 놓았다; 이성을 지니기 이전과 이성을 잃어 버린 이후를 제외하고는 행복해질 수 없도록.

1.
막을 올리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단지 그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망설여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안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기 때문일까?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는 사람이 없는 때문일까? 확실한 것을 모르는 경우, 혼돈과 암흑만을 예상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의 정신적인 특징이다.

1.
죽음.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경우, 우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기 존재의 처음과 마지막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인간은 그토록 제한된 세계에 살고 있다.

1.
불가피한 일에 접했을 때는, 험한 산을 넘는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체념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산이 없다면 길을 가기가 훨씬 편하고 거리도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야 하는 길이고 현실적으로 산이 거기에 있다면 그 산을 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more..


 

<덧붙이는글> 음.. 이 글은 어제 의무방어전 하느라 제대로 검토도 못 하고 바로 쳐올려둔 글인데, 지금 정신 좀 차리고 보니, 정신 제대로 박혔을 때 올린 글보더 훨씬 더 주옥같은 얘기들만 있다는. 그래서 보기에 좋다는.. ^^ (이상, 여전히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는 쥔장의 말씀이었습니다.)

2009/03/29 23:51 2009/03/29 23:51
   
      
하민혁의 민주통신
 

안개 속에서

이상하구나,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숲과 들이 모두 외롭고
나무들은 서로를 보지 않으니
모두가 다 혼자이어라.

내 삶이 빛으로 밝을 때에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지만,
그러나, 이제 안개가 드리우고 나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어둠은 조용히 피할 수도 없이
사람들을 격리시킨다.
이 어둠을 모르는 사람을
누가 현명하다 말할 것인가.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삶이란 정녕 고독한 것.
누구도 다른 이를 알 수 없으니
사람이란 결국 모두 다 혼자인 것을.



 
    
하민혁의 민주통신
   

방랑의 길에서 (크눌프를 기리며)

슬퍼하지 말아라, 이제 곧 밤이 온다.
그러면 푸르스름한 들판 위에는
차가운 달이 소리없이 미소지으리라.
그 때 손을 맞잡고 가기로 하자.

슬퍼하지 말아라, 이제 곧 때가 온다.
우리는 잠이 들고 우리를 위해 두 개의 십자가는
환한 길가에 나란히 서게 되리라.
그 위에 비 오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그리고 또 가리라.



 
   
하민혁의 민주통신
   

어디엔가

햇볕에 타며 세상의 사막 위를 나는 방황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무거운 짐에 깔려 신음했다.
하지만 어디엔가, 거의 잊혀진 곳
서늘한 그늘이 드리운 꽃피는 뜰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또 어디엔가 꿈처럼 먼 곳에서 몸 풀고 쉴 곳이 기다린다.
이 영혼이 또다시 고향을 갖고,
엷은 잠과 밤과 그리고 별들이 기다리는 그 어디엔가.


 
  
   
하민혁의 민주통신
 

  

    
2009/03/28 23:08 2009/03/28 23:08

곤혹스럽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라니.

엊그제 아웃사이더님으로부터 나에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의 바통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오늘 왼종일 이걸 화두로 붙들고 있다. 마감시한은 눈앞이고, 무엇보다 오늘 잠시 노닥거렸더니 해야 할 일도 산더미다.
 
여전히 글은 단 한 줄도 쓰지 못 했다.

화장실만 몇 번 들락거렸다. 이것도 병이다. 아웃사이더님으로부터 저 바통을 넘겨받기 전에 민노씨.네서 비슷한 얘기를 듣본 적이 있다. 그때 내가 한 답은 이랬다. "내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는 불로고스피어의 거의 모든 이들입니다."

맞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저 답 또한 실은 온전한 답은 아니다. (갑자기 또 떵이 마렵다. 잠시 쉰다)


선지자 하민혁의 민주통신

거미의 지혜


큰 일 보고, 담배도 한 대 풋고.. 그러면서 창문에 턱 괴고 많은 생각을 했다.

이 블로거는 이렇게 말하고 저 블로거는 저렇게 말하고.. 아, 이 블로거 웃기잡는.. 어, 저 블로거.. 음.. 내공이 상당한 거같으.. 그래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데 가능하면 싫은 야구는 빼고 뭔가 그럴싸하게 칭찬할 거 만들어서 그렇게 가면 되겠네.

하면서 들왔는데. 머리는 다시 하얘져 버렸다. 민노씨.네서 말한 저 댓글 아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 훼이크 아닙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그거 훼이크 맞다.

하민혁에게 영감을 주는 블로거, 하낙도 없다. -_

하고 적고 났더니,  
몇몇 블로거가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앗! 저거 잡아야 하는데..  쓰..

올오어낫씽!
이다. -_-


하민혁의 민주통신

하민혁의 민주통신





<덧붙이는글> 흑, 아웃사이더님, 정말 미안합니다. 다음에.. 다음에.. 꼭 하겠습니다.  -_-  
  
2009/03/24 22:54 2009/03/24 22:54
전문가는 비전문가인 일반인에게 전문 영역을 일반적인 말로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빈치 코드는, 다빈치 코드를 쓴 작자는 확실히 해당 분야의 전문가적인 식견을 갖춘 사람이라고 봐도 좋겠다. 이에 비한다면 이문열의 경우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자주 이문열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의 아들'에 대해 장편으로 개작하기 이전의 중편이 훨씬 더 좋다고 이야기해왔다. 바로 위의 전문가론에 의해서다. 개작하기 이전의 중편 사람의 아들은 읽는 데 큰 부담이 없다. 기독교사 일반에 대한 이해가 없이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장편 사람의 아들 경우는 우선 읽는 일이 지겹다.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를 읽었다. [footnote]호모 엑세쿠탄스 - 이문열의 신작 소설을 읽고 있다. 3권으로 된 소설 가운데 이제 막 1권 읽기를 마쳤다. 지난 2002년의 여러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우선 '성민'이라는 주인공 이름이 낯익다. 2003년까지 내가 쓰던 닉이 '백성민'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은 성이 다른 '신성민'이고. 소설에 등장하는 대화와 장소들 또한 낯익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할 얘기가 꽤 있지싶다. 그러나 소설 읽기는 이쯤에서 마쳐야 한다.
도대체 사는 게 팍팍하다. 정리해야 할 일이 있다. 눈까풀은 밀려 내려오고. 일단은 커피부터 쏟아부어야겠다. 버텨야 할테니. -_   2007/02/05 11:17 [/footnote]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이문열의 호모 엑세쿠탄스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작가의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 이 정도였는가 하는 점에서 그랬고, 무엇보다 현학적인 소설 내용을 읽기가 지겨워서였다. 다빈치코드는 단 한 챕터도 쉽게 건너뛰지 못할 정도의 응집력이 있다. 그러나 호모 엑세쿠탄스는 몇 페이지씩 건성으로 읽고 넘어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굳이 애써 읽지 않아도 좋은 내용들이 산더미다. 이건 작가의 현학적 취미를 충족시키는 것 외에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독자는 역사서를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설 읽기를 기대하고 호모 엑세쿠탄스를 택했을 터다. 호모 엑세쿠탄스는 독자의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소설이다. 경향성에 이야기가 잡아먹혀버린 꼴이다. 이에 대해 이문열은 황석영 등을 들며, 참여 아닌 작가가 있느냐고 투정이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황석영 등을 비판해온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이고 보면 이 또한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덧붙이는글> 이 글은 아래 댓글 놀이에서 나온 호모 엑세쿠탄스에 대한 얘기를 보충하는 의미에서 대중없이 적는 글입니다.  http://blog.mintong.org/498#comment4664 (새 창으로 열기)
 
2009/03/19 02:24 2009/03/19 02:24
이문열 책 풍장 風葬

'풍장'을 위해 허공에 매달린 이문열의 책들


지난 2002년 3월 1일, 충북 옥천에서는 이색 행사 하나가 열렸습니다. 이름하여 "삼일절맞이 이문열 '금시조' 동상 제막식". 당시 요원의 불길과도 같이 번지던 안티조선 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날 행사의 포인트는 '이문열 책의 풍장 행사'였습니다.

2001년, 이문열의 사숙 부악문원 앞에서 행해진 '이문열 책 장례식 행사'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이문열 돕기 운동'으로, 옥천신문사 편집주간 오한흥씨의 자택 마당에서 열렸습니다.

오늘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자료를 찾다보니 저 사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당시 행사에 참석한 친구가 일반 카메라로 찍어온 걸 스캔으로 뜬 거라서 사진의 질이 아니 좋습니다. 원판 필름이 있으니 다음에 올릴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깨끗하게 출력해서 올리겠습니다.

즐감하시길.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철사로 꿰인 이문열의 책들




이문열 책 풍장 風葬

'풍장'을 위해 매달린 이문열의 책들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이문열 책 풍장 風葬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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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風葬]
1. 시체를 태우고 남은 뼈를 추려 가루로 만든 것을 바람에 날리는 장사.
2. 시체를 한데에 버려두어 비바람에 자연히 없어지게 하는 장사법. 
 
2009/03/17 18:40 2009/03/17 18:40
젊은 날의, 저 불꽃같이 타오르던 사랑의 홍역을 경험한 모든 이들을 위한

이 소설은 '시대의 후미진 하늘 한 모퉁이를 우리가 알 수 없는 찬연한 빛으로 불타며 져간 한 쌍의 젊음을, 그들의 쓸쓸한 사랑과 그 현란한 추락을,' 그 이야기를 바로 그들 중의 한 사람인 남주인공의 입을 통해 몰아치듯이 전하고 있다.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그라쯔.

알프스가 끝나는, 전형적인 북유럽의 수려한 풍광이 자랑인 그 지방 교외의 한 민박집에서 어떤 젊은이가 사랑하는 여자의 가슴에 총알을 박는다.
그리고 이 소설은 여자의 가슴에 총알을 박은 바로 그 젊은이의 고해와도 같은 이야기로 그 '서장(序章)'을 시작한다.

때는 1969년.

막걸리와 생맥주, 젓가락 장단과 통기타 반주, 목 자른 군화와 청바지, 다방과 고고홀, 가락국수와 라면, 국산품 애용과 수출입국, 개인윤리와 집단윤리, 고전적인 성도덕과 서구적인 성개방, 또는 성적인 편견과 편의주의, 이런 상반된 모든 것들이 어떤 경계선에 위치해 있던 시기였다.

그 해 5월도 거의 다 갈 무렵의 어느 날, 마로니에 잎새가 드리워진 교정의 벤치에서 그들은 만났다.

임형빈과 서윤주.

그들의 만남은 실로 불꽃같은 것이었으나 그것은 또한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이기도 했다. 임형빈은 법대 2학년의 전형적인 시골 수재였고 문리대 신입생인 서윤주는 개방적이고 활달한 도시 여자였다.

'참다운 사랑은 일생에 한번밖에 앓지 않는 홍역과 같은 것'

그러나 환상과 열정으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종내는 시들고 말 '그 해의 화사했던 장미' 한 다발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태양을 향해 하늘로 솟아오르다가 추락하고 마는 젊은 이카루스와도 같이 비극적인 종말을 향하여 앞으로 내달았으니, 그 사랑의 열정은 이미 얼레에서 풀려난 운명의 실이 되어 그들을 질기게 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첫 구멍부터 이미 잘못 끼워진 단추 같은 사랑이었다'.

그들은 그런 언밸런스한 모습으로 "불꽃 속에서의 한 계절"을 살아간다. 잘못 끼워진 단추는 처음부터 다시 끼우면 되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저 운명의 질긴 실을 끊을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광기 어린 열정이 낳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이런 사정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을 휘감고 있는 저 운명에의 불안을 서윤주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모르겠어. 귀한 것을 힘들여 찾아낸 기쁨보다는 무언가 시작해서는 안될 일을 시작한 듯한 불안 뿐이야."


수락산으로 산행을 다녀오던 길에 비뚤어져 혼자 뒤에 처진 임형빈을 만나 달래면서 서윤주가 하고 있는 말이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나는 아까 네가 버스에 오르지 않고 갑자기 돌아서서 그 희고 꾸불꾸불한 시골길로 뛰어갈 때 이런 생각을 불쑥 했었지. '저 애는 참으로 어렵게 살 애로구나. 왜 넓은 길과 편한 버스와 돌아가야 할 도시를 그만두고 좁은 시골길로 낯선 곳을 향해 뛰어 갈까' 그러나 버스가 산굽이를 돌고 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뭐랄까, 갑자기 (....) 너를 혼자 보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같이 길을 잃고 헤매게 되더라도 네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후회 비슷한 감정이 생긴 거야 (....)"
"그런데 불안은 왜 ?"
"너를 만나고 나니, 그리고 다시 큰길을 찾아 돌아 나오는 걸 보니, 갑자기 내가 쓸데 없는 걱정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거야. 애초에 네가 그 길로 뛰어간 것도 나 때문이었고, 또 내가 되돌아오지 않아도 너는 훌륭히 네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앤데, 하는. 거기서 갑자기 앞으로도 언제나 네가 어긋진 길을 가게 만드는 것은 나일 것 같고, 나는 또 그런 너를 제자리로 돌아가게 한다는 게 오히려 함께 길을 잃어 두 사람 모두 어둡고 험한 곳을 헤매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어. 아니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야...."


이같은 예감은 그러나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는 충분한 위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서로 판이하게 다르면서 넉넉하지 못한 두 사람의 열악한 환경과 두 사람이 모두 갖고 있는 격렬하고 성급한 성격, 그리고 한 쪽은 개방적이고 다른 한 쪽은 독선적인 생각 등이 그것이었다. 그 운명의 끝을 서윤주는 이렇게 예감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잘못되는 날에는 둘 다 심각한 상처를 입을 거야. 어쩌면 남은 일생 내내 치유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거나 끝내 그것 때문에 죽고 말...."


그리고 서윤주의 이런 예감은 훗날 그대로 적중한다.
임형빈이 전하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듯 위태위태하게 계속된다.

어설프게 전개되던 그들의 사랑은 어느 날 서윤주가, '성합'을 원하는 임형빈에게, 자신은 동정녀가 아님을 밝히는 것으로 한 전기를 맞게 된다. 올곧고 순진하기만 한 시골수재 임형빈에게 있어 그 고백은 곧 파국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하여 그들의 사랑은 거기에서 일단 끝이 나는 듯 보이고, 그렇게 그들의 불꽃 속에서의 한 계절도 끝이 난다.

이제 서윤주는 (미국으로) 떠나고 임형빈은 귀향한다. 1970년 겨울의 일이다.
1971년. 맹목적인 열정과 집착에서 벗어난 스물 한 살의 임형빈에게는 이제 허탈감과 무기력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형빈의 몸부림이 소설의 행간을 메운다.

아픈 기억을 어느 정도 극복해가고 있던 어느 날, 다시 서윤주의 소식이 그에게로 전해진다. 서윤주는 꿈의 나라 미국이 아닌 '미국 달이 뜨는' 서울의 이태원을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만나지만 거기에는 짐승과도 같은 다툼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이문열 책장례식

이문열 책장례식 풍장


그 불협화음의 시간이 지나간 후, 그들은 이른바 동거생활에 들어간다. 그리고 제법 '사랑의 잔치와도 같은' 안정된 나날을 보낸다. 허나 그 안정이란 온전한 화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또 한번의 파국을 맞게 된다.

파국을 부른 것은 임형빈의 말을 빌리자면 '두 사람의 정신 속에 깃든 악마였다'.

임형빈의 '소년적인 결벽증과 자존심'은 서윤주의 과거에 대한 번민을 낳게 하고, 서윤주의 개방적인 의식에는 그 생활이란 도무지 답답한 것으로만 여겨진다. 그런 감정은 서로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앙금으로 남아, 미국에 있는 언니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가 오는 날, 급기야는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서로가 슬퍼하고 위로해야 할 그 죽음 앞에서 그들은 다시 한 바탕의 다툼을 벌이고 임형빈은 집을 나간다. 때마침 상경한 아버지.

임형빈이 자신의 성마름을 탓하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긴 이별의 시작'이었다. 서윤주는 이제 참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그 방황의 끝에서 '아직 딱지도 앉지 않은 내상을 안은 채'로 임형빈은 입대를 한다.

육군하사 '임하사'.

어느 날, '입대하고 여덟 달인가 아홉 달만에 강원도 어떤 전방사단의 말단소대에서 신출내기 단기하사로 고참 병장들의 텃세에 시달리고' 있던 그에게, '아홉 달 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서윤주의 편지가 날아든다.

형빈

이게 정이랄까. 여러 번을 망설이다 이 글을 쓴다.
나는 그렇게 냉철하게 삶을 재단하려 했건만 아니, 내 앞에 펼쳐진 세월을 사는 게 아니라 채워 가려고 애썼건만,
아무래도 그런 이성의 사람은 못되는 모양이지.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 ---- 새삼스럽지만 나를 용서해 줘.
그리고 잊어 줘.
우리가 그렇게 억지스레 끼워 맞추려 애썼던 것은 첫 구멍부터가 잘못 끼워진 단추 같은 사랑이었어. 그 다음부터 아무리 잘해 보려 해도 바로잡아질 수 없는 그런.
그저 그만큼이라도 둘이서 함께 노력해 봤다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삼기 바란다.

그 집을 나오고 두 번인가 어둔 골목길에서 너를 훔쳐본 적이 있지.
우리를 기다리는 운명이 어떤 것이든 비척거리며 걷는 너를 보고 달려나가 부축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지....(후략)


                                                  1971년  9월   윤주
 


이제 그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 뒤 임형빈은 제대를 하고 어떤 대기업의 계열회사에 입사를 하고 결혼을 한다. 그리고 1982년 5월 회사의 미국지사 설립을 위한 선발대로 한국을 떠난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그는 서윤주를 찾기 위해 애써보지만 그러나 그것은 번번이 무위로 끝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산타모니카 해안으로 차를 몰아나간 임형빈은 거기에서 운명처럼 또 다시 서윤주를 만난다.

잔치와도 같은 그들의 사랑은 다시 시작되고....,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불협화음으로 일그러진다. 이제 그들의 사랑에 종말이 다가온다. 그들은 '우리들의 날개', 추락을 위한 그 날개를 준비한다. 임형빈은 리벌버 38구경 권총을 하나 산다.
 
"아니, 너는 무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죽는다는 게 왜 그리 끔찍 하기만한 끝장이야? 기억해? 옛적에 함께 읽었던 잉게보르크만의 시 ----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추락은 우리가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죽음을 끝 모를 추락이라고 보더라도 ---- 그 때문에 우리의 날개는 더 크고 화려해질 수도 있지. 죽음이 휴식이거나 완벽한 고통의 면제라면 그건 더 바랄 나위가 없고...."


임형빈이 그 권총을 서윤주의 앞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그 권총과 특유의 뻗대기로 이후 두어 번의 진정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런 시위도 이제는 무용한 데까지에 이르고 만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의 그라쯔,

그 풍광이 수려한 시골 마을의 한 민박집에서 그들의 현란하고 광기 어린 사랑은 그 종말을 맞게 된다. 서윤주가 경멸의 말을 쏘아붙이는 순간, 임형빈은 그미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훅, 하는 거센 숨소리 같은 것뿐, 그녀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쓰러졌습니다. 그녀가 두 손으로 싸안은 가슴에서 피가 번져 나온 것을 보고서야 나는 제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황급히 그녀를 쓸어안았을 때 흘깃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눈길이었습니다. 그게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천 번이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그렇게도 만족과 평온에 찬 사랑의 눈길이 있을까요? 거기다가 또 그녀는 정신을 잃기 직전, 안간힘을 다해 내 귀에 속삭였습니다.

"그래.... 됐어.... 실은 나도 하루하루 꺼져가는 촛불 같은 우리 삶을.... 망연히 보고 있기가 괴로웠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바보 같이 너는 왜.... 일찌감치 내게서 달아나지 않았어? 그렇게도 여러 번.... 기회를 주었더랬는데.... 이렇게 함께 추락하는 것이 안쓰러워...."


그들의 불꽃같은 만남은, 그들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난다.
임형빈의 이야기는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설도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more..





<덧붙이는글> 중간에 서비스로 넣어둔 사진은 지난 2002년 3월 1일 충북 옥천에서 있은 이문열 책 장례식 '풍장' 행사 사진이다. 우리는 지금 다름이 허용되지 않는 야만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2009/03/17 05:25 2009/03/17 05:25
영화 <휴먼스테인>을 봤다. 오늘 SBS 영화특급에서 방영한 영화다. 포스터에 적힌 그대로 '초호화 캐스팅'이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수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퓰리처상에 빛나는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란다. 이 정도면 대박을 쳤어야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던 모양이다.


휴먼스테인

휴먼스테인


영화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이 그거였다. 실패한 게 당연했겠다. -_-

원래 영화 보고나서 잼없으면 잘 아니 끄적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몇 글자 적는 것은 나중에 책이라도 함 사봤으면 해서다. 다시 말해, 영화가 웬지 모르게 99% 부족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영화는 상당히 많은 것을 건들고 있다. 단순히 사람은 누구나 감추고싶은 비밀 혹은 오점을 가지고 있다는 따위가 아니라, 인간이기에(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거다. 불완전하기에 인간인 거고) 겪는 여러 갈등과 번민들을 터치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드러내보여주지 못 했다는 인상이다. 기껏 흑인이면서 백인 행세를 해야 하는 데서 오는 번민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비록 성공적이지는 못 하지만, 더 많은 것을 건들고 있다. 예컨대 니콜 키드만이 연기한 퍼니아의 경우만 해도 그녀가 지닌 매력이 무엇인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뿐더러 그녀가 왜 그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도 충분히 설득적이지 못 하다. 또한 끝까지 그의 주변을 맴도는 전 남편의 행동에 대해서도 온전한 설명을 내놓지 못 한다.

내가 보기에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하나로 담아내기에는 어려운 주제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원작을 읽었으면 한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영화는 차라리 이리저리 얽힌 여러 소재 가운데 몇 가지에만 집중했다면 더 나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싶다.

에니웨이, 영화를 보면서 예쁜 여자의 삶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쁜 여자들은 왜 자주 술집에서만 보이는지에 대한 생각이다(이 얘기 더 하면 안 될 것같기에 여기까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를 생각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인 터라 내 멋대로 각색되어 있기 십상이긴 하지만, 무튼 그 소설에 나오는 필립과 밀드레바가 자꾸 떠올랐다. [footnote]근데, 왜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떠오르지 않았을까? '추락..'을 읽으면서는 '인간의 굴레'가 떠올랐는데 말이다. 이 때문이었을까? 이문열이 '추락..'을 자신의 작품에서 굳이 배제하고싶어 하는 이유가? 다시말해 인간일반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다는? [/footnote]




<덧붙이는글> 영화 보면서 불편했던 거 두 가지 - 더빙의 안습, 무자비한 삭제. 영화를 보면서 즐거웠던 거 - 그래도 니콜 키드먼은 넘 예뻤다. 영화 <디 아더스>의 그 니콜 키드먼이 살짝 비쳤다.
 
2009/03/16 03:34 2009/03/16 03:3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엊그제 이문구의 <유자소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 소설집에는 <유자소전> 말고도 9편의 소설이 더 실려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변사또의 약력>이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이 또한 내 사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터입니다. 언뜻 신난스러워 보이는 변사또의 삶이 이상할 정도로 가슴 아득한 훈훈함으로 닥아오는 것도 이 때문이겠구요.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단편입니다.

작가네 집 머슴이던 최서방의 고적한 삶을 그리고 있는 <명천유사>는 그러나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못합니다. 작가의 고향과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너무 잔잔한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담담한 작가의 시선이 오히려 일말의 거부감을 안겨주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동만필.1.2>에는 우리의 정치사에 대한 작가의 해학과 익살이 희화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자유당 말기에 민주당의 무슨 국장을 잠깐 지냈다는 사실로 문국장이라 불리는, 그렇게 불리는 것을 적잖이 흐뭇해 하는 문승관과 뚜렷한 이념도 없이 국회의원 출마를 꿈꾸고 있는 이만업의 정치꾼(기실 제대로의 정치꾼도 되지 못하는)적인 성향을 통해 작가는 얼룩진 우리 정치사의 이면과 거기에서 살아가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짙은 페이소스가 깔려 있습니다.

<강동만필.3>은 석촌 호수 부근에서 "더울 때 바깥 만큼이나 더웁고, 추울 때는 바깥 만큼이나 추운 이동식 포장마차"를 하며 살아가는 남씨와 "본색이 농투성이었으나 농사치가 저수지로 수몰되는 바람에" 예까지 흘러 온 서씨, 그리고 뚜렷한 직업없이 "입때껏 생무지로" 살면서 "아무데서나 두루춘풍으로 홍이야 홍이야 해 온 맨탕"인 나, 이 세 사람의 세상살이를 그들이 늘상으로 모이는 호수 주변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세태와 놀이 문화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사뭇 시니컬합니다. 작가의 재담이야 이력이 있는 터고, 실제로 소설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재담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기왕지사 옮기는 재미 붙인 마당이니, 호수 주변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는 것 가운데서 두어 개를 골라 직접 한번 들어보기로 합니다.
 

듣보실 분만 클릭~




장곡리 고욤나무



<달빛에 길을 물어>는 현장 답사를 통한 야사의 연구가 목적인 야승회라는 재야 단체의 여행 -- 이름하여 '야승회민정기행'에 따라 나섰던 주인공 이명천이 그 중도에서 떨어져 나와 현대판 노예선이라 불리는 멍텅구리배의 섬, 이를테면 한국적인 수용소 군도 중의 하나인 살섬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언젠가 TV와 신문에서 그 멍텅구리배의 기사를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었던 적이 있습니다. 헌데 그 기사는 그다지 세인들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의 의견이 있었댔는데, 이에 대해 소설의 주인공은 '빈곤의 정서, 다른 말로 하면 빈자소인론' 쪽에다 심정적인 동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기사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것은 곧 "가난에 찌들었던 사람들이 결과론자로 정착하여, 일이 되고 돈이 되는 짓이라면 수단과 방법의 곡직을 묻지 않게 되었으며, 인신매매라는 극단적인 현상조차도 자연스럽게 묵과하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여기에서 보릿고개 세대의 어려웠던 삶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헌데 주인공의 저러한 관점을 살섬으로 팔려가는 다홍치마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한 독자의 억측에 불과한 것일까요.


연평도

연평도


어촌에 관한 몇 가지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이 작품에는, 그러나 그것이 여행길을 그리고 있음으로 당연히 나그네의 감상이나 나그네의 여수(旅愁)가 빠질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는 여행에서 느끼는 주인공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움인.
 

겨울의 여행은 선(線)의 여행이었다. 겨울의 선은 생태적인 비문명성과 생략 처리된 간결미로 하여 한결 호소력이 있었다. 선은 곧 생(生)의 곡절이었고, 보이지 않는 한계의 상징이었다. 그리하여 겨울에 하는 여행은 선의 추적이 그 내용이었다.
차도 낡고 길도 낡았지만 시간은 낡을 시간이 없었다. 낡지 않은 시간 속의 것들은 낡은 것이 없었다. 차는 선상(線上)으로 내닫고, 땟국이 흐르는 세한도(歲寒圖)가 얼비치고 있었다. 굽이마다 폭이 이어지는 그림이었다. 낯익은 그림이었다.

"고기잡어 사는 놈은, 고래등 같던 허우대가 새우등이 돼도록 배를 부려두 바다는 종내 잡지 못허는 벱이닌께."
늙은이는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고래등이나 새우등이나 한 가닥 굽은 선이기는 매일반인걸유."
명천도 눈길을 창 밖으로 돌렸다. 하늘에는 해가 낚싯대 두어 간 남짓하게 남아 있었고, 하늘가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은 저마다 한 가닥씩 선명한 능선을 그어 그 나름의 곡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얼라, 이 아저씨점 봐, 샥시가 슴으로 시집오는 것두 그래서덜 오는 중 아시는가베. 그게 아니유. 샥시덜두 다 선이 있어서 임자 만나 오는 거지, 그런 식으루다가 무식허게 제 발등 밟어가면서 오는 게 아니라구유."
선이 있어서라. 명천은 다홍 치마를 찾아보려고 사방을 더듬다가 문득 한 선을 발견하였다. 차창 너머로 불쑥 떠오른 물마루, 아득하게 그어진 수평선이었다.

바다 가운데서 바라보는 물마루는 해벽(海璧)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보이는 한 줄기의 선, 무한정의 한정이었다. 해는 이미 그곳에 가 있었다. 어둠의 시작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그 한 줄기 부동의 선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어둠을 펴고 구름을 펴는 일이며, 바람을 보내고 물결을 보내는 일이 모두 물마루의 일이었다. 배가 노래를 부르며 놓아가기 시작했다.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저문 바다를 바라본다.
설익은 햇살이 따라오고
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 간다.
나는 무심한 바다에 누웠다.
어쩌면 꽃처럼 흘러가고
바다처럼 사라진다.
이승의 꽃이랴 싶다.


연평도

연평도


다홍 치맛자락이 다시 눈결에 띄었다. 어쩌면 그 다홍 치마도 바다에 흘러가는 이승의 꽃일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홍 치마가 정녕 여린 소녀풍(少女風)에도 부질없이 눈뜨는 파란(波爛)과 더불어서 바다에 흘러가는 꽃이라면, 어느덧 속절없이 좌초하여 표류를 마감하는 곳은 또 어디일까. 꽃은 바닷물에서도 자라는가. 꽃은 자라지 않는다. 다 자란 것이 꽃이니까.

석양은 나그네의 하늘인지도 몰랐다. 다홍 치맛자락은 낙조의 물이 두 벌 들어서 다홍빛이 단홍빛으로, 단홍빛은 선홍빛으로, 선홍빛은 다시 자홍빛으로 거듭 피어나고 있었다. 꽃은 역시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피는 것이었다.

날이 풀려서 그런지 바다 가운데에서도 바람이 차지 않았다. 바닷새가 멀리 나가면 날씨를 믿을만하다고 들었으나 바닷새가 보이지 않는데도 물결은 비단이었다. 해파리가 연안으로 몰리면 태풍이 오고, 달무리나 햇무리에 바람기가 있으면 비가 올 조짐이며, 뱃고동소리가 멀리서 똑똑히 들려도 날이 궂을 징조라고들 하였으나, 해파리도 없고, 먼 뱃고동소리도 없고, 바다는 다만 다홍빛도 같고 자홍빛도 같은 낙조만이 소리없이 짙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해가 들어가고 있네유."
"니열 아침에 나올라면 시방쯤 들어가야 헐테지유."
해가 들어간 뒤에도 물마루께는 여전히 붉덩물이 가시지 않고 있었으나, 바다는 바야흐로 동녘 하늘과 함께 잉걸이 사윈 잿빛으로 바뀌면서 숙연한 표정으로 결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홍 치맛자락도 적갈색으로 어두워가고 있었다.

배에 불이 들어왔다.
"살슴은 아직 멀었지유?"
"멀었지유."
"멍텅구리배는 남어있겠지유?"
"배야 남어있지유."
"약내 나는 사람은 없더라면서유?"
"벌써 달이 떴네유."
아낙이 달을 가리켰다. 달이 밝았다. 


그리고 기타 여러분



좀 장황하다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소설 얘기를 옮겨봤습니다. 우선은 이문구 하면 떠오르는 게 그의 입당이어서입니다. 가능하면 그의 이야기 하는 양을 좀 많이 들려주고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집의 주무대인 대천 지방과 나 사이에 있는 인연입니다.

저 남녘이 고향이었던 내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무작정 상경하여(여기서 '상경'이라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의 기착지는 서울역이 아니라 인천항이었으니까요) 첫 외지 생활을 한 곳이 바로 대천 지방이었습니다.

어느 월요일 등교길에 마음이 동하여, 입고 있던 교복과 가방에 든 교련복 한 벌로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대략 1년 반여를 지냈습니다. 만리포와 연포 사이에 있는 한 작은 포구에서 멸치 잡이 배와 거잇(게잡이)배와 삼치 잡이 배를 탔습니다. 때론 서산이나 대천 등지로 들어가서 농사일을 거들기도 했구요.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시절의 일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강산이 몇 번을 바뀐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곳에 대한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골길,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시골길,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more..

그래서입니다. 이문구의 <유자소전>을 읽고 나서 이래 주절이주절이 소설 얘기를 읊어대고 있는 까닭이요. 지금도 내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그곳에 대한 정서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이 도무지 소설인지 내 지난 시절인지를 모를 정도인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천 지방에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대천의 해변가에다 땅을 좀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 남녘에서 하고 있던 조선소의 제 2공장을 세워볼 요량에서였는데, 그러나 그 계획은, 갑작스럽게 발표된 정부의 서해안 종합 개발 계획으로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용도가 변경된 그 자리에는 이제 공장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입게된 경제적 손실은 상당했습니다. 우리로선 그 땅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해서 받은 그 땅값이란 게 시쳇말로 똥값 만도 못한 것이어서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날강도를 당해도 유분수지, 참으로 절통할 노릇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일이 다 내가 우겨서 비롯된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대천 땅에 대해 갖게 되는 감정이 남다를 수밖에는요.

에니웨이, 정리합니다.

내가 처음 접한 이문구의 소설은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관촌수필>이었습니다. 군 입대를 수십여일 앞둔 시점이었는데, 다 읽지 못한 채 군엘 갔습니다.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관촌수필> 읽기를 그만 둔 것은 순전히 그 소설에 대한 모종의 거부감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생래적이라 할 수 있는 이 거부감은 그러니까 작가가 보여주는 '군자연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다른 글에서 전하고 있는 내 유년 시절 얘기와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 내 청소년 시절을 보면 아시겠듯이, 나는 생래적으로 '~체' 하는 거를 잘 견디지 못 합니다. 특히 그것이 상대의 대가리에 잘못 박힌 고정관념에서 나온 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당시 <관촌수필>을 읽으면서 그런 거를 강하게 느꼈다는 기억입니다. 확실히 관촌수필에서는 작가와 작중 인물들 사이에 거리감이 있었고 그게 영 밥맛이었고 그래서 끝내 그 거부감을 못 이긴 채 팽개쳐버렸더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유자소전>은 작가의 저런 비릿한 경향성을 벗어나 있습니다. 작가 자신이 중심에서 사라지고 작중 인물이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하긴 지금 관촌수필을 다시 본다면 또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저때야 내 의식 수준 또한 모 아니면 도 식의 덜 떨어진 막가파 수준이었으니요).

그나저나, 참 장황한 이야기인 셈인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까지 제대로 읽으신 분은 아마 없지 싶습니다. 나부터도 다른 이가 쓴 긴 글은, 게다가 지 경험담 늘어놓는 글들은 도무지 읽지 않는 터니까요. 무튼, 그런 의미에서 여기까지 읽으신 어떤 이가 있다면 그 이에겐 분명 신의 은총이 함께 할 거라는.





 <덧붙이는글> 없습니다! 더 하면 몰매 맞을 거 같으서.. ^^
   
2009/03/15 04:36 2009/03/15 04:36
오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 인터넷서점 YES24 '오늘의 책'으로 소개되고 있는 책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광고 카피도 죽입니다. 
"당신이 차지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쥐고 당신을 조종할 것이다!"

그래서 목차를 함 훑어봤습니다.
 

1부 권력의 원천

Law 1 자신을 재창조하라: 자기 혁신
Law 2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라: 조력자와 먹잇감
Law 3 적의 평정심을 흐트러뜨려라: 감정의 맹점 공략
Law 4 이미지와 상징을 앞세워라: 권력의 아우라
Law 5 목숨을 걸고 평판을 지켜라: 대중의 지지


2부 권력 획득의 법칙

Law 6 무슨 수를 쓰든 관심을 끌어라: 루머와 신비화 전략
Law 7 덫을 놓고 적을 불러들여라: 주도권 장악
Law 8 말이 아닌 행동으로 승리를 쟁취하라: 논쟁의 부작용
Law 9 정직하고 아량 있는 태도를 보여라: 경계심 풀기
Law 10 자비나 의리가 아니라 이익에 호소하라: 협상의 기술
Law 11 돈의 노예가 되지 마라: 공짜 점심의 함정
Law 12 친구처럼 행동하고 스파이처럼 움직여라: 정보전
Law 13 상대보다 멍청하게 보여라: 의심 회피 전략
Law 14 힘을 집중하라: 집중과 분산
Law 15 신앙심을 이용해 추종자를 창출하라: 메시아 전략
Law 16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짜라: 전략적 수 읽기
Law 17 별다른 노력 없이 성과를 달성한 척하라: 능력 포장하기
Law 18 사람들의 환상을 이용하라: 대중의 기대심리
Law 19 왕 대접을 받으려면 왕처럼 행동하라: 왕관의 전략


3부 권력 유지의 법칙

Law 20 주인보다 더 빛나지 마라: 신중한 아부
Law 21 불행하고 불운한 자들을 피하라: 불행 바이러스 차단하기
Law 22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존하게 만들어라: 네트워크 만들기
Law 23 적은 완전히 박살내라: 잠재적 위험 제거
Law 24 품격과 신비감을 높여라: 부재와 존재의 법칙
Law 25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쌓아라: 적정 교란
Law 26 자신만의 요새를 짓지 말라: 고립의 위험성
Law 27 어느 누구에게도 헌신하지 마라: 관계의 기술
Law 28 완벽한 궁정신하가 되라: 우회 조종술
Law 29 적당한 때를 기다려라: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
Law 30 본심은 감추고 남과 같이 행동하라: 동화 전략
Law 31 후광에 의존하지 마라: 정체성 쇄신
Law 32 중심인물을 공격하라: 추방과 고립
Law 33 너무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지 마라: 질투심 원천봉쇄
Law 34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라: 성공공식의 진화


4부 권력 행사의 법칙

Law 35 친구를 멀리하고 적을 이용하라: 라이벌 활용법
Law 36 의도를 드러내지 말라: 유인책과 연막술
Law 37 최소한의 말만 하라: 침묵의 효과
Law 38 일은 남에게 시키고 명예는 당신이 차지하라: 성과 가로채기
Law 39 싸워서 질 바에야 항복을 선택하라: 전략적 후퇴
Law 40 더러운 일은 직접 하지 말라: 앞잡이와 희생양
Law 41 대담하게 행동하라: 자신감의 힘
Law 42 당신이 돌린 카드로 게임하게 하라: 선택권 통제
Law 43 사람들의 약점을 공략하라: 심리적 무장해제
Law 44 가질 수 없는 것들은 경멸하라: 무시 전략
Law 45 한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말라: 급진적인 개혁의 부작용
Law 46 상대의 마음을 유혹하라: 은밀한 설득
Law 47 상대를 허상과 싸우게 하라: 거울 전략
Law 48 승리를 거두면 멈출 때를 알라:
승자의 저주


그리고 다 봤다는 느낌입니다.

도대체 저 주옥같는 저 말들 말고 이 책에서 더 봐야 할 내용이 있을까싶어서입니다. 혹시 이 책 읽으신 분 가운데 그런 대목 있으면 '책을 사보시오~' 권해주시길 바랍니다. 함 사보겠습니다.

 
48가지 권력의 법칙

48가지 권력의 법칙





<덧붙이는글> 아무리 의무방어전이라지만,
그래도 너무 날로 먹는 글인 것같아서 법칙 가운데 밑줄 몇 개 그어봅니다. ^^
 
2009/03/14 19:03 2009/03/14 19:03

이외수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저 평화하게 하느적거리던 군대시절이었다. <꿈꾸는 식물>이라는 소설이었다. 'xxx' 정성들여  읽고나서 내뱉은 소감이 그것이었다. 하나 더 봤다. <칼>이든가 하는 제목을 가진 소설이었다. 그게 끝이었다. 이후 나는 그가 쓴 책이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여담이지만 그때 함께 근무하던 7명의 군발이 중에는 이외수와 절친한 육군 상병 하나가 있었다. 춘천 교대 후배인 그는 당시 내 직속고참이었다(그에게 야구 방망이로 몇 대 맞은 기억이 새롭다. 게기다가 잘못 맞은 탓에 - 사실 나는 내가 잘못 했을 때는 찍소리 안 하고 잘 맞아준다. 그 빈도가 넘 잦아서 탈이긴 했지만 -  제대를 하고서도 한참 동안 힘들었다. 날궂이를 했다는 뜻이다). 별명은 토미(말괄량이 삐삐에 나오는)였고,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칭구였다. [footnote]그도 곧 소설가가 되었는데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그는 이미 시인이기도 했다 - 재미는 없는(죄송.. ?) 그의 소설을 그래도 나는 꼬박꼬박 챙겨 읽는 편이다(이 글 쓰면서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전문 분야에서는 많이 유명한 분이신 듯하다. 필명으로만 활동한 탓에 몰랐다. -_-). [/footnote]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외수의 벽오금학도

이외수의 <벽오금학도>

어쩌다 들르는 서점에서 <벽오금학도>에 눈길이 미치면, 그 겉표지를 보게되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나의 턱없던 도전과 좌절의 기억이다.

<벽오금학도>를 처음 보게 된 것은, 그래도 시작한 일인데 한 권의 책이라도 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함께 일하던 이들의 얼굴이 있어, 그때는 이미 의욕만으로 시작했던 출판사 일(인문학총서기획)이 더이상 꾸려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뚝딱하게 책 한 권을 만들어 그 첫 배본을 나갔던 교보문고 앞에서였다.

거기에선 <벽오금학도>의 출간을 알리는 전단이 꽃가루처럼 뿌려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벽오금학도'(그림)를 지겹도록 보게되었고, 그 얼마 후에 우리는 문을 닫았다.  소설 <벽오금학도>는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러고도 18개월여가 지난 어젯밤, <벽오금학도>를 읽었다. [footnote]이 글은 1994년에 쓰인 글입니다.[/footnote]

어느날 친구와의 약속을 위해 전철을 기다리거나 우연히 들른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중에 문득, '선생님, 혹시 도道에 관심 있으십니까'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의 황당함이란 참 당혹스럽다 할 수 있는데, <벽오금학도>를 읽으면서 가진 느낌이 바로 그런 황당함이었다.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소설은 대체 어떤 부류에 속하는 소설인가. 진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구도소설인가, 아니면  어른을 위한 동화인가, 아니면 사회의 위악적인 요소들을 고발하고 질타하는 세태소설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대중을 깨우치기 위한 계몽소설인가.

구도소설이라기엔 너무 안이하다.
이 소설에는 구도소설에서 요구되는(?) 어떤 치열함도 없다.

동화라기엔 너무 되바라져 있다.
동화의 한 미덕이랄 수 있는 해맑은 순수함이나 희망을 이 소설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요소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에도 거기에 해맑은 미소로 답하기가 쉽지않다.

왜일까.
 

- 아이가 오줌이 마려워서 눈을 뜨게 된 것은 새벽녘이었다.
- 불현듯 바깥에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전신을 휩싸고 있었다.  
- 싸늘한 냉기 한 모금이 폐부 깊숙이 스며 들어와 아직 잠에서 덜 깨어난 감각들을 소스라치게 만들고 있었다.
- 어둠이 어슴푸레하게 걷히고 있었다.
- 시간이 침잠하고 있었다. 침잠하는 시간 속으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소설의 어느 곳에서고 만나게 되는, 유치하다는 것 말고는 다른 표현을 찾기 힘든, 이런 류의 미숙한 언어구사가 어쩌면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을 동화로 받아들이기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footnote]이 글의 어디가 뭐이 어쨌다고 난리냐? 이 글이 통신에 올려졌을 때, 한 두 사람에게서 이런 질책성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위의 글은 이 글의 주체인 어린아이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휘들로 다.만. 치.장.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 줄에 나오는 오줌이 마렵다는 표현을 빼고는, 불현듯, 예감이 전신을 휩싸고, 냉기, 폐부, 감각들을 소스라치게, 침잠하는 시간 등.. 도대체 어느 것 하나 아이의 시선이라고는 볼 수 없는, 다만 작가의 '덜 떨어진' 의식을 보여주는 그런 표현들 뿐입니다.
여기저기서 감각적인 표현들을 줏어다 떼어붙인 여고생의 시구같은 이런 글들이란, 말 그대로 여고생의 시구에서라면 몰라도 소위 작가라는 타이틀을 내건 사람의 글에서 취할 바는 아닐 터입니다.[/footnote]

세태소설이라기엔 그 예봉이 너무 무디고 느리다.
이 소설에서 제기하는 현실의 문제들은 우리 모두가 이미 공감하여 그 해결책을 찾고 있는 문제들이다. 진부한  얘기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방식으로 재연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다시 또 지켜봐야 한다는 건 역겨운 지겨운 일이다.

계몽소설이라기엔 너무 배타적이다.
대중에 대한  어떤 애정도 이 소설은 담고 있지 못하다. 너와 나, 내 편 네 편으로 금 그어놓고 편가르기 놀음을 하는 양이 딱 그러하다. 우리 편은 선이고 다른 편은 악이다. 아, 이 우라질넘의 편가르기라니.   

다른 한편 이 소설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도 몇가지 약점을 안고 있다.
 

이외수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미숙한 문장력이다.

이 소설의 작문 수준은 아마추어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소설엔, 그 중요성을 한참 떠들어대던, 대학입시 문장강화용  훈련 텍스트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어색한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작가의 전략적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작가의  미숙함 내지는 불성실한 태도 이상은 안 보인다.

작가의 전략이 소설에서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의 소설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요건까지를 희생시켜도  좋을만큼은 아니다. 더구나 작가의 숨겨진 의도 따위가 도무지 없는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나는 이 소설에 뭐 그리 대단한 전략까지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이같은 생각에는 나의 미처  덜 뜨인 '심안'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무튼 그렇다.

지나치게 잦게 사용된 비유법은 덜떨어진 문학 소녀의  유치 찬란한 글을 연상시키고, 요령부득인 어미 활용에다 막무가내인 시제 처리는 작가의 성실성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소설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피동과  사동의 어색한 사용은, 교열과정에서 그 오용이 충분히 인지될 수 있는 것이고, 게다가 이 소설을 내고 있는 출판사가 다름아닌 출판계의 명문이랄 수 있는 곳이기에 그 아쉬움을 차라리 출판사에 돌리고 싶을 정도다.
 

- 시간이 침잠하고 있다.
- 침잠하는 시간 저쪽에서 희뿌연 새벽 미명이 몰려와 문창호지를 적시고 있다.
- 자물쇠를 풀자 나지막한 비명 소리를 발하며 대문이 열렸다.
- 불이 꺼진 한옥 한 채가 어둠 속에 웅크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 소설의 두번째 약점은 그 넌센스적 내용들이다.

이 소설은 도무지 넌센스로 일관하고 있다. 하도 알아듣기 힘든 헛소리를 하는 터라, 그렇다면 이를 정신병적 관점에서 함 봐봐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를테면, 정신병원의 기원을 다루면서 미셀 푸코는 '정신병자도 실은 그의 논리 체계 속에서는 지극히 정합적이고 일관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걸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하는 건가 싶어서디

그러나 소설은 여전히 일상인의 기본적인 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접수해야 할까? 현자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몽상가로 봐야 할 것인가.

이 소설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있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세계이다. 작가는 현실을 금 안의 세계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금은 (이하 생략)

일상인의 세계는 이를테면 이런 세계다. "사람들은 대개 활자화된 내용이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맹점들을 간직하고  있다"거나, 이들의 "자존심을 적당히 이용할 경우 더욱 구매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거나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세계다(이하 생략).  

세번째는 도피적인 결말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 짜증이 나는 것들이 있다. 작가가 끝내 그 의도를 숨긴 채 독자로 하여금 그 의도를 읽어달라고 말하는 경우다. 쥐뿔 그런 게 안 보이는 모호한 글(아무리 봐도 작가 자신조차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헷소리)을 던져놓고는 독자보고 그걸 읽어달라고 요구하는 건 가이소리다.

포커 판에서 이런 경우 많다. 일부러 상대가 내 패를 읽어주게 유도하며 승부수를 띄우는 경우다. 이같은 승부수는 잘만 하면 상대에게 카운터 블로를 먹여 일거에 판을 뒤집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부담 또한 크다. 히든 카드가 뜻대로 먹히지 않는 경우 이제까지의 전략적인 희생보다 더 큰 카운터 블로를 내가 얻어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대개 이도저도 아니다싶을 때 마지막에 던진다.

모호한 방식으로 글을 써두고 거기서 대단한 어떤 뭔가를 독자더러 생각해 읽으라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 이외수는 지금까지 이런 방식의 승부수에서 성공적이었다. 번번이 독자가 먼저 나가 떨어진 덕분이다.

이외수는 과연 독자가 넘볼 수 없는 좋은 패를 가졌던 것일까?


이외수의 하악하악

힘든 일이겠지 하악하악 - 이외수와 정신병자들


아, 썰을 풀다보니 소설의 줄거리가 빠졌다. 한 줄로 요약하자.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러니까 '편재' 불능의 시공 속에서 '편재' 가능한 세계로의 이행을  꿈꾸던 주인공이 마침내 때(?)가 되어 저 선계로 가게되었더라는 이야기다. (이보다 더 자세한 줄거리를 알고싶은 분은 여기서 보시길.)

이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마음공부'다.

작가는 "세상만물 중에서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스승 아닌 것이 없으며", "아주 작은 먼지 한 점조차도 우주의 절대적인 요소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허나 그런 사실을 실감하려면 우선 마음으로써 모든 사물들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그리고 되도록이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낮추어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음을 닫아 걸고 사물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좋은 얘기다. 참으로 공자같은 말씀이시다. 그러나 작가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마음을 닫아 걸고 현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작가가 마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지극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란 적어도 이 소설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금 하나 그어놓고 그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차단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작가 쪽이다. 어지러운 현실만을 나열하여 비난할 뿐, 그 현실을 수용하려는 어떤 지극한 태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편재'를 시도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노력도 작가는 소설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작가는 도피만을 꿈꾼다. 그러므로 작가의  이런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은 따로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에서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대개 활자화된 내용이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맹점들을 간직하고  있다"거나, 이들의 "자존심을 적당히 이용할 경우 더욱 구매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거나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대목들이다. 그래서 말인데,

어게인,

"선생님, 혹시 도道에 관심 있으십니까."

서점에서 책을 고르거나, 지하철에서 전철을 기다리다 종종 듣게 되는 소리다.

이 소설은 어쩌면 그런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람들은 대개 활자화된 내용이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맹점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독자의 "자존심을 적당히 이용할 경우 더욱 구매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작가의 "각본대로" 독자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기를 바라고 쓰인 책은 행여 아닌 것인가?


모를 일이다. [footnote]젠장, 이건 뭐.. 이외수 말대로 정신병원에나 함 가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_-[/footnote]



 

<덧붙이는글> 블로고스피어에 하민혁이 안티 팬이 수만이라는 말을 듣고(실은 그 말 듣기 이전에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는 참입니다) 자중 모드에 들어갑니다. 원래 새가슴인 터라 살짝 겁도 나고 해서 앞으로는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듣보기 좋은 글만 올리도록 할 생각입니다. -_-
 http://www.youtube.com/watch?v=AZRd8av4Leo

2009/03/13 22:02 2009/03/13 22:02

이문구의 소설 <유자소전>을 읽었다.

최수철이 쓴 <얼음의 도가니>를 읽느라고 기진해 있었다. 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 베갯머리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었다. 한숨에 읽고, 그리고 일어나서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지금 새벽 기도를 나가야 하는 아내의 잠을 망쳤으면서도, 기분은 쾌하다.

<유자소전>은 실전소설이다. 작가가 한 친구의 생애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 친구의 이름은 '유자'이고 그는 길지 않았던 자신의 일생을 온몸으로 살다 간 사람이었다.


유자소전

이문구의 <유자소전>


실로 그의 생애는 뚜렷하고 우뚝한 것이었다. 이 소설은 질곡이 많았던 우리의 현대사에 관한 기록이면서 친구 유자를 애도하는 작가의 조사이고 그를 기리는 찬사이다.

유명이 갈렸건만 아직도 그대를 찾음이여
오롯이 더불어 살은 진한 삶이었음이네.
수필이 되고 소설이 되고 시가 되어 남음이여
그 정신 아름답고 향기로웠음이네.
아아 사십 중반에 만년이 되었음이여
남보다 앞서 살고 앞서 떠났음이로다.
붓을 놓으며 다시금 눈물 젖음이여
그립고 기리는 마음 가이없어라.

이 소설은 친구가 부르는 사모곡이다.

이 소설에는 감동이 있다. 여기에는 예의 저 최수철이 시간과 힘의 무익한 낭비고 소모일 뿐이라며 폐기 처분해버린 그런 이야기가 주는 감동이 있다. 최수철의 소설에서와 같은 강팍한 감정이나 지나친 긴장을 이 소설은 넉넉한 세상보기와 구수한 이야기로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진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세상살이가 팍팍할수록 아쉬어지는 것은 어쩌면 저러한 구수함과 넉넉함일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행여 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친구 하나는 이런 내 생각에 분명한 경계의 눈길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더하게 호도하는 것은 바로 저 지나친 강박 관념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허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자의 생각에는 여기에서 다 드러낼 수 없는 나름대로의 배경이 놓여 있겠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 인물의 생애를 하나의 짧은 이야기 속에서 이만큼이나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그리하여 이만큼이나 생생한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작가의 탁월한 이야기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최수철이 말한 바, 소설이 하나의 압축 파일이라는 표현은 역설스럽게도 이 소설을 두고 볼 때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그때를 아십니까!

유자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는 소설의 초반부는 그 시절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작가의 이야기 능력은 한낱 글에 지나지 않는 소설을 가히 아름다운 한 편의 영상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주인공 유자의 어린 시절을 읽는 일은 마치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그 영화의 주인공은 비단 유자만이 아니다. 때로는 가슴 아리는 서글픔으로 때로는 달뜬 흥분으로 안겨오는 유자의 어린 시절은 바로 우리 자신의 어린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 무렵은 바로,
성냥 하면 천안 조일표, 고무신 하면 군산 만월표밖에 몰랐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은 우둥퉁한 노파가 되어 십중팔구 하염없이 추억이나 되새기고 있을 조미령이 일쑤 새파란 과부로 분장하고 나와서, 밥만 먹고 잠만 자던 촌사람들의 무딘 가슴을 이리 집적 저리 집적하여, 육백을 치면서 조인다고 조여도 국진 열 끗이 목단 열 끗으로밖에만 안 보였던 어수룩하던 시절

이었으며, 또한 직업적인 선거꾼이 유세장마다 몰려다니며 민주당 후보의 확성기 줄부터 끊어놓고 난장판을 벌이던 그런 자유당 말기의 시절이기도 했다.

주인공 유자는 육이오 난리 이듬해에 작가가 다니고 있던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리고 전학하고 며칠이 되지 않아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낸다. 어린 시절의 그는 확실히 우리와는 다른, 그래서 우리의 추억 속에서 쉬이 그 존재를 기억해낼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아무데서나 주워대는 그 입담이 밑천이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아이들이 밥 먹을 때 모이를 먹고, 다른 아이들이 죽 먹을 때 여물을 먹었는지, 나이답지 않게 올되고 걸었던 그 입은, 상급생이나 선생님들 앞에서도 놓아먹인 아이처럼 조심성이며 어렴성이라곤 없이 넉살좋게 능청을 떨어대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물은 되잖게 입만 되바라졌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숫기가 좋고 붙임성이 있었다. 예컨대,
그는 보매보다 반죽이 무름하고 너울가지가 좋아 붙임성이 있었고, 싸움난 집에서 누룽지를 얻어먹을 만큼이나 두룸성이 있었으며, 하다못해 엿장수를 상대로 엿치기를 해도 따먹은 엿토막이 앞에 수북할 정도로 눈썰미와 손속이 뛰어난 터수였다.
나이가 한참이나 위인 중학생들과 예사로 너나들이를 하고, 가는 데마다 시덥지 않은 성님과 대가리 굵은 아우가 수두룩했던 것이 다 그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던 일이었다.

여기서 그의 어린 시절을 다 더듬고 있을 수는 없다. 써커스와 가설 극장의 국민학교 시절과 "어금니 꽉 다물어, 안 그러면 이빨 안 남어나"로 겁을 주고는 두 볼을 사정없이 처돌리던 호랑이 실업 선생의 중학 시절을 거치면서 그의 학창 시절은 끝이 난다.

주인공 유자의 청년기와 장년기, 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추억하는 소설의 중반부와 후반부를 읽는 것 역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다. 주인공 유자가 살아가는 삶은 바로 우리 자신이 살아온 그 삶이고 그가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가 바로 우리가 부대끼며 겪어온 그 역사인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과연 우리가 그가 살아온 것만큼이나 그렇게 치열하고 올곧게 살아왔는가 하는 점 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것 또한 각자의 삶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영사기사의 꿈으로 시작된 그의 사회 생활은 유세장의 확성기 줄을 손보아 주면서 야당 붙이가 되고 사월 혁명의 여덕으로 반짝 경기를 누리기도 한다. 정치 식객 생활은 그러나 오월의 군사 정변으로 마감되고 그의 길은 군대 생활로 이어진다.

당시 '군대는 가면 숟가락도 놓기 전에 꺼지는 배로 하여 허천들린 듯이 먹어대던 시대였지만, 그의 병영 생활은 훈련병 시절부터 배를 곯아 본 일이 없었다. 입이 벌어먹인 덕이었다.' 입영 열차에서 우연히 얻게 된 당사주책과 천세력이 그의 타고난 입담을 바탕으로 그를 유도사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해서,
입소 동기생들이 땡볕에서 낮은 포복이다, 높은 포복이다 하고 군살을 빼는 동안, 그는 도사답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군살이 찔 것 같은 그늘에 앉아서 졸(卒)을 함부로 죽여가며 초한전(楚漢戰)으로 실전 훈련을 쌓았고, 궁이 면줄에 몰릴 지경으로 다된 판을 붙들고 늘어져 빗장을 부르는 흘떼기 장기와, 보리바둑 주제에 반집짜리 끝내기 패로 시간을 끌면서, 남들이 다들 어려워 했던 신병 시절을 유감없이 마쳤다.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자동차 운전까지를 배운 그는 제대를 하고 난 얼마 뒤에 재벌 그룹 총수의 승용차 운전대를 잡는다. 그의 열정적인 독서 생활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그의 승용차 기사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는 총수의 사생활에 대한 불경죄로 좌천되어 노선 상무로 근무케 된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이 노선 상무 시절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보여 주고 있는 그의 남다른 노력은 실로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엿보는 일은 오로지 독자의 몫일 터다.

다만 그의 운전 윤리에 대한 댜음과 같은 전언은
꼭 이즈음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 이 자리에 그대로 옮겨 본다.
그는 운전자의 운전 윤리에 누구보다도 반듯하였다. 그러므로 운행 중에 때아닌 곳에서 과속으로 앞지르기를 하거나, 옆에서 끼어들어 진로 방해를 하거나, 차선을 함부로 넘나들거나, 신호등이 바뀌기 전부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거나, 운전 상식이나 도로 질서에 도전하는 자를 보면, 매양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기를 잊지 않았다.

"츤한늠.... 저건 아마 즤 증조할애비는 상전덜 뫼시구 가마꾼 노릇허구, 할애비는 고등계 형사 뫼시는 인력거꾼 노릇 허구, 애비는 양조장 허는 자유당 의원 밑에서 막걸리 자즌거나 끌었던 자식일겨. 질바닥서 까부는 것덜두 다 계통이 있는 법이니께."

그리고 이제 유자는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열정적이고 올곧았던 그의 삶을 뒤로 한 채.
이에 그의 불꽃 같은 삶을 기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는 두 편의 시가 이 소설에는 실려 있다. 그 가운데 한 편은 이미 이 글 허두에서 소개한 이문구 씨의 것이고 아래에 있는 산문시는 시인 이시영 씨의 것이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유자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기에 그 전문을 옮겨 적는다.

제목은 '유재필 씨'이다.

비가 구죽죽이 내린 날, 유재필 씨의 시신은 영구차에 실려 답십리 삼성병원 영안실을 떠났습니다. 그 뒤를 호상 이문구 씨가 따랐습니다. 번뜩이는 익살과 놀라운 재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었지만 자신은 이 지상에 한 편의 소설도 시도 남기지 않은 채 새파란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갔습니다.

오늘은 또한 벗 채광석의 일백 일 탈상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일백 일 전 오늘 유재필 씨는 채광석 장례의 지관이 되어 이산 저산을 뒤지며 터를 잡고 돌집에 내려와서는 '시인 채광석의 묘'라고 새긴 돌값을 깎았습니다. 돌값을 깎고 내려와선 양수리 한강변에서 장어를 사먹었던가요.

햇빛에 그을은 새까만 얼굴과 단단한 어깨, 넘치는 재담에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길지 않은 생애의 대부분의 직업이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사고 처리반 주임이었으니까요. 죽음은 어쩌면 그와 가장 친숙한 길동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않은지요. 그는 우리들을 잠시 놀라게 하려고 이웃 마실에 간 것만 같습니다.

오늘은 일백 일 전에 세상을 떠난 광석이와 그를 묻고 돌을 세운 유재필 씨가 한강변의 이산 저산에서 만나는 날입니다.

"잘 있었나?"
"예, 형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이 곳에 좀 먼저 온 죄로 터를 닦아놨습니다.
야, 얘들아 인사드려라, 재필이 성님이다. 소설가 이문구 씨 친구."
"이문구 씨가 누구요?"
"야 씨팔놈들아, 저세상에 그런 소설가가 있어!"

유재필 씨는 아직 아무말이 없습니다. 남들이 묻힐 자리를 찾기 위해 수차례 오갔지만 아직은 좀 서먹한 산천과 무엇보다도 세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슬픔이 뼈끝에 시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구는 잘 갔는지, 그 자식은 내가 없으면 어려운 일 당했을 때 뉘를 찾을지도 궁금하여 안심이 안됩니다.

"형님, 제 교통 사고건 맡아 처리하시느라고 수고 많으셨다메요. 저번 사십구재 때 내려가서 가족들이 얘기하는 것 들었습니다. 술도 한 잔 못 받아 드리고....."

그러나 유재필 씨는 아직 말이 없습니다. 저 세상에 비가 내리는지 누운 자리가 좀 끕끕합니다. 그리고 강물소리가 시원히 들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덧붙이는글> 진짜 재밌는 얘기는 2편에 있습니다. -_-
<덧2> 김기자님, 앞으로 이런 글만 올리면 되나요? -_-;;
 
2009/03/13 01:16 2009/03/13 01:16

김신의 쫄병시대

김신의 <쫄병시대>

김신의 <쫄병시대> -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저 '솔직한 이야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인공 표현일을 통해 작가가 발가벗겨놓고 있는 저 쫄병들의 행태는, '그가 사회에서 어느집 자식이었든지 얼마나 교육을 받았건 간에 턱없이 졸렬해지고 유치해지고 야비해지기까지 하는', 그리고 비굴해지기까지 하는 저 행태는 바로 <쫄병시대>를 경험한 우리 모두의 비애로써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한다.

굳이 작가가 변명하지 않더라도 그가 신병시절 이한길 소령의 뒤를 쫓아가 용무없는 용무로 다짐했던 충성을, 그리고 신병교육대 교관이었으며 사단장 전속부관인 장교 조일훈 중위에 대한 까닭모를 비하를, 그리고 사회깡패 모춘배와 배건수, 한경열에 대한 저 단순무쌍한 성원을, 여섯 살 소영이에 대한 저 애틋한 감정을 우리는 이해한다.

분명 일탈된 것에 다름아닌 저 표현일의 행위들을 우리는 이해한다. 저 충성이 다름아닌 아부의 한 표상이었으며, 장교에 대한 저 턱없는 비웃음이 자신의 치열한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저 성원이 또다른 형태의 비굴에 다름아니었으며 저 애틋한 사랑(?)의 감정 역시 인정받고 싶어하는 쫄병들의 굴절된 감정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아직은 채 깨어나지 못했고('나는 충분히 깨어 있었다' 말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이하는 고교를 갓 졸업하고 군대에 가야 했던 '우리'로 읽어주시길) 그러기에 지금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쓰디 쓴 자조의 웃음을 짓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해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우리가 있노라고,

우리는 그같은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 비로소 성찰의 한 계기를, 다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절절한 체험으로 인해 가지게 되었노라고 우리는 자위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의 훌륭한 설교보다도, 어떤 책의 가르침보다도 더한 절실함으로 가슴에 담겨 있는 것이다.

문득, 어느날 문득, 젊은 날의 그 부끄러운 기억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멋있는 병영생활을 했는지를 더한 소리로 읊으면서 우리는 기실 우리의 저러한 과거를 애써 잊으려 하거니와 바로 이 소설은 그러한 허장성세를 그대로 담고 있고 거기에 바로 이 소설의 강점이 있겠더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설의 뒤에 붙어있는 김태현의 말은 무시해도 좋았다.

'분단조국의 실상에 대한 좀더 깊은 안목'을 이 소설이 보여 주지 않아도 좋고,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저 악독한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라는 것까지를 생각해서 '그런 현실에 대한 이렇다 할 언급이나 암시를 하지 않는 것'이 김태현과 같이 그렇게도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좋았으며, 하기에 '안보를 정권 유지에 악용하는 못된 버릇에 빠져 있는 일부 이기적인 군인들이 병영을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권력기반으로 생각하고 병영을 철저하게 타락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여 굳이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크다'고 안타까워 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병영생활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비역 병장 표현일이가 아직도 저 막사 안에서의 짓거리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데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아직도 남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데에 화가 난다. 아직도 저 비굴을 청산하고 있지 못한 데에 가슴이 아프다.

그는 사족을 달아서 말한다.

이 작품이 등단을 위해서 쓰여졌던 탓이라서 내용에 많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구체제의 폭압과 역사적 안목에 대한 통찰의 결여가 그것'이라고. '다시 쓰겠다'고.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고문관 하민혁

'고문관' 하민혁의 쫄병시대


그는 지금 우리를 놀리고 있는 것인가? 저 혼자서 빠져 나가겠다는 말인가? 자신은 저 비굴한 쫄병의 늪에서도 홀로 고고한 연꽃 한 송이를 피우고 있었노라고, 가열찬 투쟁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이제 모든 쫄병을 배신하고 저 저널리즘의 힘에 아부를 하려 하는가.

그러나 쫄병을 버리고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도대체 학사 출신 쫄병의 전형인 저 표현일이를 그는 또 얼마나 더한 거짓말장이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이 점에서 작가와 표현일은 닮았다.

그리고 우리의 우려하는 바 다른 한 가지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표현일이는 철저한 쫄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젊었으며 그것은 그가 성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값비싼 하나의 통과의례라 여길 수도 있을 터이므로.

그러나 작가는 그렇지 않다. 예비역 병장 작가 김신은 이제 더 이상 쫄병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당당해야 한다. 아직도 비굴함과 아부 근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저 쫄병의 멍에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러한 징후는 이미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안타깝다.

이 소설을 상재하며 내뱉고 있는 그의 변명을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 그의 가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등단을 위해' 이 작품이 쓰여졌기 때문에 많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이 작가를 우리는 믿을 수가 없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당시에도 그러한 제약을 뛰어 넘으려는 작가들의 노력은 가열차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변명이라니? 이것은 제도권에 빌붙으려는 작가의 저열한 의식과 행태를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는 가열차게 싸웠던 이들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병영 안에서도 병영 밖 사회에서도 작가는 시대의 폭압과 싸우지 못한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비굴하지 않은 사람이면 병영에서도 비굴하지 않을 수 있다. 십분 양보해서 그때는 아직 사회 의식이 확고히 정립되지 않았고, 그 시기를 거침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다시말해 자신의 행태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 그 시기의 전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작가는 이제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쫄병시대>를 그 부끄러운 시기의 한 참회록으로 상재해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쫄병시대>를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변명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아직도 그가 쫄병의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걸로 보이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쓰겠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화가 난다.

우리는 병장 표현일이를 따라 무덤을 묻으며, 우리의 부끄러웠던 한 시기도 이제 묻어 버리고 싶어 한다. 헌데 그 시점에서 그는 돌연 다시 쓰겠다고 말한다. 쫄병들을 향해 '니네들은 형편없는 넘들이'라며, '시대에 대한 아무런 의식도 없는 식충이들'이라 말하면서,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시대를 아파하고 있었다'면서 '다시 쓰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배신자이다.

이런 배신자 같으니!

표현일, 너는 마, 사실 쫄병을 거론할 자격도 없어. 그래도 우린 너같이 덥게 붙어먹지는 않았어 색햐. 소설 쓰지 맘 마!  같은 쫄병이었던 탓에 너의 소설 쓰고 앉았는 꼴을 눈감아주고 있던 우리가 바보다 색햐.

이 소설은 자신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솔직한 고백을 소설을 낳은 작가 자신이 부끄러워함으로써 그 고백이 지닌 진정성에 회의를 갖게 만들며, 그리하여 이 소설에 대한 우리의 신뢰성을 제로화시켜버린다. 그리하여 소설을, 기껏 재담으로 버티고 있는 말놀음으로 격하시켜버린다. 

작가는 작가 자신의 가장 큰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통찰하여 흔들림없이 그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길이 시대와 역사에 대한 통찰보다 더한 신고의 길일른지도 모른다.
 
번뜩이는 재담. 그것을 추구하여 순간적인 재미가 아닌 촌철살인의 무기로 만드는 것, 그것을 온전히 다듬는 길이 이 작가가 작가로 남는 길이 아닐까 싶다. 건투를 빈다.



 

<덧붙이는글> 이 글은 십 수년 전에 쓰여 피씨통신에 올린 글입니다. 당시 거의 한 달음에 쳐내려간 글이어서 날 것 그대로입니다. 혹여 김신님이 이 글을 보시더라도 이 점 널리 양해바랍니다. ^^
 
2009/03/10 21:22 2009/03/10 21:22
얼마 전에 '차분한 사람은 진보적이고 흥분을 잘하는 사람은 보수적이다'는 내용의 외신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일리 있는 분석입니다. 이 분석은 주목만한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터넷서 자칭 진보연하는 아해들이 실은 지극히 보수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가 그 실제적 동력을 공급받는 곳이 보수라는 사실입니다.  아이러니하달 수도 있는 이같은 사실은 주위의 이른바 보수적인 혹은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을 일견해보는 것만으로도 쉬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좌파 우파

왼쪽에 있는 사람, 오른쪽에 있는 사람



보수적인 사람들은 확실히 유연하지 못합니다. 사고의 폭이나 행동 모두에서 애오라지 똥고집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섰다면 이들에겐 다른 이의 생각 따위는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특정 지역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숨이 꽉 막힐 정도의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건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진보적인 이들은 그 말과 행동이 우선 유연합니다. 유연함을 넘어 유들유들하다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사고의 폭도 훨씬 더 넓습니다. 홍세화가 말하는 이른바 '똘레랑스'론과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무튼, 그래서 말인데 어떤 보수적인 꼴통보다 더 꼴통스런 짓을 하면서도 스스로 진보연하며 방방 뛰는 이들은 저 분석에 한번쯤 자신을 비춰보는 것도 좋은 일이겠습니다. 스스로를 함 돌아보았으면 한다는 얘기입니다.  





<덧붙이는글> '진보의 동력원이 실제로는 보수'라는 얘기에 대해서는 일단 패스합니다.
 
2009/03/09 17:16 2009/03/09 17:16

지키지 못할 약속 그 세 번째

새해 들면서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블로그에 하루에 하나씩 포스팅을 하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습니다. 지키지 못 할 것이라 여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업무의 특성상 1년에 몇 번은 지방 출장을 가는 일이 생기는데, 이때 과연 블로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을 살다보면 예상치 않은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 올 한 해라고 해서 그런 일이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연례 행사로 치르는 독한 계절병입니다. 계절이 한번 바뀔 때마다 이상하게 한번씩 독하게 앓곤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때론 거의 기절할 정도로 심합니다. 어제부터 몸이 이상합니다. 지난 며칠 동안 무리를 한 터라 계절병이라 단정하긴 이르지만, 확실히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몸이 아프니 블로그도 아프다

더 하여 오늘은 블로그까지 말썽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태에서 뭔가를 이것저것 만졌고, 그 이후는 어떻게 된 건지를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플러그인까지 사라지고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백업본까지 사라지고 안 보이구요. 문제가 없을 때는 백업도 착실하게 잘하지만, 문제가 생기고 나서 찾아보면 꼭 그때는 백업에도 문제가 있곤 합니다.  

무튼, 어제 날짜로 텍스트큐브 rc2 버전이 발표된 터라 일단 판갈이를 하고, 최대한 원 상태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 작업을 시작하면서 가까스로 마감시한에 맞춰 제목만 작성해둔 이 포스팅을 올립니다. 편법인 셈입니다.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뭐 내 블로그니까. 무엇보다 약속은 약속인 거니까.. 하고 생각하렵니다.  -_-

사나이는 바꾸지 않는다

다음 그림은 이번에 중학교에 들어간 얼라 블로그서 업어온 그림입니다.
이 친구도 뭔가 마음을 먹긴 먹은 모양입니다. 뉘집 아들 아니랄까봐 살짝 불안도 한 모양이구요. ^^



약속

니나 잘 하세요~

 
2009/03/04 23:50 2009/03/04 23:50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 세상 사람들은 나를 특별한 행운아라고 말한다. 나 역시 거기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지나온 행로를 불평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고난과 노력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75년 동안의 내 삶을 통해 진정으로 즐거웠던 때는 단 한 달도 없었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나를 지탱하게 했던 것은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서 계속하여 밀어 올리려는 시도였다.  

1. 우수한 사람이면서도 무슨 일이든 즉석에서 적당히 해치우지 못 하고 늘 심사숙고를 거듭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조급한 우리를 자주 답답하게 만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즉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상의 일은 그렇게 침착하게 숙고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성취되는 법이다.  

1. 고대인은 위대한 뜻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 손으로 실현하였다. 반면에 우리 근대인은 큰 뜻은 갖고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자기 생각대로 힘차고 생생하게 창작하는 일은 거의 없다.

1. 큰 결과가 나타나는 곳에는 늘 그 바탕에 큰 원인이 잠재해 있다.

1. 순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자세로 항상 현재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상태, 어느 순간에나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영원한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1. 젊은 여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젊음, 익살과 의존심, 그리고 성격이나 결점, 또는 변덕 등등이지, 그녀의 이성이 아니다.

물론 그녀의 지성이 빛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경할 것이며, 그녀는 우리에게 매우 귀중하게 보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지성은 우리를 붙잡아 두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지성이 우리를 매혹하거나 정열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1. 위대한 작품이란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순수한 창작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위 환경은 이제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현대의 재능 있는 작가들은 모두가 대중 앞의 쟁반 위에 놓여 있는 신세다.

여기저기서 발간되는 비평적 신문 잡지의 수는 하루에도 수 십 종을 헤아린다. 그 결과 대중들 사이의 풍설만이 난무하고, 이로 인해 건전한 작품이 나오지 못한다. 현대 저널리즘은 그 대부분이 부정적이고 사이비 미학적인 중상을 일삼는다. 하지만 여기서도 일종의 미숙한 문화가 대중 사이에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악성의 짙은 안개이자 쏟아지는 독소다. 이것은 창작력이라는 나무의 푸른 잎은 물론이고 깊이 박혀 있는 고갱이와 섬유질까지 파괴해 버린다.

1. 시인은 모든 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해야 한다. 외부에서 오는 것은 모두 시인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이다.

1. 세상 사람들에게 도를 넘지 않도록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권세가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는 못 견뎌 하고, 군중은 점진적인 개혁을 기대하거나 절도 있는 상태에 머무르지 못 한다.

인류가 완전하다면 완전한 사회 상태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재와 같아서는 인류는 영원히 동요를 계속할 뿐이다.  한 편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반해 다른 한 편에서는 안이한 생활에 젖어 있다. 이기주의와 시샘이 악마와 같은 장난을 계속하며 당파간의 분쟁은 끝이 없다.

어떤 경우든 가장 현명한 일은 각자가 타고난 직업과 터득해야 할 일에 힘을 쏟고,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의 직분을 행하는 걸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구두장이는 구두 곁에 머물고, 농군은 쟁기 뒤에 있으며, 지도자는 통치하는 요령을 알고 있어야 한다.

1. 틀에 박힌다는 것은 늘 완성만을 바라는 것이며, 제작하는 과정 그 자체는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진실로 위대한 작가의 최고 기쁨은 제작하는 그 과정에 있다.

1.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예술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작품의 완성으로 얻게 될 이익만을 염두에 두게된다. 그렇지만 그런 세속적인 목적과 성향으로는 어떤 위대한 것도 성취되지 않는다.  

1. 작가의 문체는 대개 그의 내적 생활을 보여주는 충실한 거울이다. 명료한 문체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마음이 청결해야 하며, 웅장한 문체를 구사하고 싶은 사람은 우선 웅장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1. 뭔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가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

1.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의 수 역시 무수히 많다.
그들을 유형에 따라 분류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괴테와의 대화

괴테와의 대화


첫째는 무지하여 적대자가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나의 삶을 매우 우울하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이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내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획득한 행복과 지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나의 명성을 꼬집고 나를 없애고싶어한다. 내가 불행하고 비참하게 되어야만 직성이 풀릴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까닭에 적이 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는 재능이 풍부한 사람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나로 인해 그 자신이 빛을 보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이를 참지 못한다.

세번째는 이치를 따져서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 역시 한 인간이고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결점과 약점이 없을 수가 없다. 이것은 내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면할 수 없는 결점과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교양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인격의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적대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내가 시정한 결점을 두고 자주 나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은 별로 해로울 게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이미 수십 리를 가고 난 뒤에 대고 활을 쏘아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미 끝낸 작품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거기 머물러 연연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과 다른 뭔가 새로운 걸 생각하는 때문이다.

네번째는 사고 방식과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적들이다.

같은 나무에 달린 이파리들 가운데도 아주 똑같이 닮은 것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신념과 사고 방식이 딱 들어맞게 일치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사정이 이런대도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그렇게 많다는 것보다 오히려 친구와 지지자들이 이만큼이나 많다는 사실이 나는 더 놀랍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나를 반대하는 이들이 뭐라건 거의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관심있어 하고 모든 걸 결부시켜 생각하는 성공 같은 것에도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조용히 나 자신의 길을 나아갈 뿐이다.

1. 75살 쯤 되고 보면 때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는 때도 나는 전혀 불안해지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때문이다. 정신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계속하여 활동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저 태양과 같다. 우리 눈에는 태양이 서산으로 가라앉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태양은 결코 가라앉는 것이 아니며 계속해서 빛나고 있다.

1. 세상에서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명석한 두뇌를 가져야 하고, 둘째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아야 한다.

1. 학문을 함에 있어 어느 한 종파에 속하게 되면 그 즉시 자유롭고 성실한 해석은 불가능해진다. (중략) 단 하나의 배타적인 경향성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이론가의 세계관은 순수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 대상이 자연스럽고 순수한 모습으로 보일 수가 없다.  

1. 부당한 편견은 관찰에 방해가 될 뿐이지만, 이와 달리 정당한 지식은 오히려 관찰에 도움을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우리는 보고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진리다.

전문적인 음악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면서 모든 악기와 그 개별적인 음향을 식별하여 들을 수 있지만 문외한들은 전체의 집단적인 소리에 파묻히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초록빛 풀밭을 즐기기만 하는 사람은 단지 그 풀밭의 초록색을 평면적으로 볼 따름이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식물학자는 거기서 제각기 다른 수많은 초록의 세밀한 부분을 보게 된다.

1. 사람이란 물 위에 떠 있는 단지들과 같이 서로 부딪치며 지낸다. 사람은 아침에 가장 현명하고 가장 조심스럽다. 조심성은 소극적인 한편으로 현명한 것이기도 하다. 바보는 조심성이라는 것 것 자체를 아예 모른다.

1.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군주에게 그것을 하지 말라고 충고해서는 안 된다.

1. 여기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것이다. 내가 그것을 인생에서 취했거나 아니면 책에서 취했거나 간에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문제는 그것을 어디서 취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 자신이 어떻게 적절히 구사했는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1. 바이런은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열정에 이끌려서 멋대로 나날을 살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도 못했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자신은 온갖 짓을 다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허용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을 파멸시키고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을 뿐이다.

1. 단지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좋은 걸 나쁘다고 말한다면 그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 올바른 영향을 주고자 하는 사람을 결코 비방해서는 안된다. 부당한 일이 있어도 거기에 개의치 말고 오직 선만을 행해야 한다. 파괴하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인류가 순수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뭔가를 건설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 엄격함으로도 많은 효과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사랑으로는 더욱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통찰력과 공정성으로 개인적인 차별을 두지 않는 일이다.

1. 나라의 불행은 사람들이 서로 즐겁게 살려고 하지 않고, 누구나 서로를 지배하려고 하는 경우에 생긴다. 예술계의 불행은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즐기려 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새로운 걸 만들어 내고자 하는 데 있다. 기존의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진작시키려 하기 보다, 각자는 자기 스스로가 얼른 동일한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려고만 하고 있다.

사회 전체를 위해 투신하려는 진지한 태도도 없고, 사회 전체를 위해서 무엇인가 공헌하고자 하는 의향도 없으며, 다만 자기 자신을 사람들 눈에 띄게 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세상에 선전하려고만 애쓰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잘못된 경향은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사람들은 최근의 대가를 모방하는 듯 하면서도, 대가들이 연주 곡목을 고르는 경우 청중에게 순수한 음악적인 즐거움을 주기 위해 선곡을 하는 반면, 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연주 솜씨를 청중에게 뽐내기 위한 곡을 선택한다.

자신을 화려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인물은 여러 곳에 있으나, 전체를 위하거나 대의를 위해 자신을 억제하려는 성실한 노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게 이즈음의 현실이다. 이런 사정으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엉터리 창작 활동에 발을 들여 놓는다.  

1. 결국 무슨 일에 종사하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에 자신을 제한하고 고립시키는 일이다.

1. 사람이 세상의 여론에 대해서 쉬이 불리한 입장에 빠지게 된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는 이전에 한번도 민중에 반대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전혀 민중의 벗이 아니다.  물론 나는 혁명을 부르짖는 저 천민의 벗은 결코 아니다.

이 무리는 약탈과 살인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공공의 복지라는 허위적인 간판을 내건다. 그리고 그것을 방패 삼아 비열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눈을 붉히고 있다.

나는 이같은 폭도의 편은 결코 아니다. 루이 15세의 편은 더욱 아니다. 나는 어떤 폭력적 혁명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또한 그에 못지않은 파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혁명을 행하는 사람이나 그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나는 증오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민중의 벗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개혁이라면 나는 그것을 언제나 환영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한 것처럼 그것이 폭력적이거나 돌발적인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그래서 불편하기 때문이다.

1. 사실 나를 정당하게 보았다 싶은 사람은 이름난 사람들 가운데는 거의 없다. <베르테르의 슬픔>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들은 여러가지 비난을 퍼부었다. 만일 내가 그들이 비난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삭제하였다면, 그 책은 단 한 줄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비난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관적인 몇몇 사람들의 비판이란, 설사 그들이 아무리 유명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대중에 의해 정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우수한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며, 그런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한 줄의 글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1. 비평가나 창작가를 막론하고 개성이 없다는 것이 최근의 문학에 나타나는 모든 병폐의 원인이다. 특히 평론에 있어 이러한 결함이 심하게 나타나서 해를 끼치고 있다. 비평가는 진리 대신에 오히려 그릇된 것을 전파하며, 나이브한 진리를 설파한다. 그래서 우리를 정화할 위대한 진리마저 빼앗고 있다.

1.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결과가 있다. 그러나 현명하고 정당한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잘못한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항상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모두 그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서적상과 상담을 하다 실패한 적이 있다. 나는 몹시 고심하였는데, 지금은 사정이 변해 만일 그때 내가 그 상담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더 큰 실수를 하게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이는 일생에 몇 번이고 계속되는 일이다.


책 소개

책 소개 페이지


1. 충고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가장 현명한 일이 실패하기도 하고, 가장 시덥잖은 일이 좋은 결과를 거두는 수도 있다. 이렇듯 조언이란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조언을 바라는 사람은 어리석고, 조언을 하는 사람은 주제넘는다 할 것이다.  

조언은 협력할 의사가 있는 일에 대해서만 하는 것이 좋다. 다른 누군가가 내게 충고를 바란다면, 나로서는 기꺼이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단, 그가 나의 조언에 기대어 행동하지 않겠다는 조건 아래서만 할 것이다.

1. 노래를 배우려 할 때, 자기 목청에 맞는 소리를 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목청과는 다른 소리를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어떤 소리도 자유자재로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세계를 자신의 손에 쥐고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만 무궁무진 늘 새로울 수 있다. 주관적인 감정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이내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이 이내 바닥을 드러내는 때문이다.

1. 사람이 고립되어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고립된 상태에서 일하는 건 최악이다. 뭔가를 제대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협력과 자극이 절대 필요하다.

1. 독학으로 공부한 것을 두고 반드시 칭찬만 할 일은 아니다. 거기에는 오히려 나쁜 점이 더 많을 수 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자신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우수한 작품이나 훌륭한 스승을 따라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 육성하도록 해야 한다. 최근 읽은 모짜르트의 편지에 이런 귀절이 있다. 곡을 만들어 보낸 어느 남작에게 보내는 글이다.

"당신과 같이 예술을 애호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두 가지의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독창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것을 베껴내는 게 그 하나고, 독창적인 것이 있는 경우에도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게 그 둘입니다."

얼마나 기발한 말인가.
모짜르트가 음악에 대해 하고 있는 이 말은 다른 모든 예술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다. 

1. 사람은 인생에서 잘못된 경향으로 인해 많은 낭패를 겪는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될 때까지는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1. 재능이 없으면서도 창작에 종사하려는 사람들이나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기술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런 미망에 사로잡히기가 쉽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문화가 대단히 널리 보급되어 있고, 젊은이들은 바로 그 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걸 마치 자신의 소유물로 여긴다. 또한 그것을 자기 것인 양 표현한다. 하지만 그들이 시대로부터 받은 것을 반환하고 나면 그들에게 남는 건 거의 없다. 그들은 마치 분수와 같아서, 끌어온 물을 한참 동안은 내뿜겠지만, 끌어들인 물이 동이 나면 그것은 이내 중단되어버린다.

1. 문학이란 항해와 같은 것이다. 돛이 바람을 가득 안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정도 노를 저어 해안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발단 같은 것에는 아예 마음을 두지 않는다. 3막에 가서야 마침내 거둘 수 있는 효과를 제 1막에서 당장 일어나도록 하고싶어한다.

1. 우리는 각자 하나의 집합체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적다. 우리 모두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나 혹은 동 시대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위대한 천재라고 해도 모든 걸 자기 내부에서만 얻으려 한다면 그에게서 큰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1. 진리는 곧잘 다이아몬드에 비유된다.
다이아몬드는 한 쪽으로만 빛을 내지 않는다. 여러 면을 통해서 빛을 내는 것이다.
 



 
<괴테와의 대화> 소개
독일 루에 강변 소도시 빈젠에서 태어난 에커만은 1823년 독일 동부 지역의 바이마르에 살던 괴테를 찾는다. 그는 괴테 집 근처에 살면서 9년 동안 괴테와 1000번 정도의 대화를 나눴고 이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는 이를 토대로 책으로 정리해 괴테 사후인 1836년 제1부와 제2부를, 1848년 제3부를 출간했다.

<덧붙이는글> 어제 밤샘을 하고 오늘 거의 하루종일 외근은 한 터라, 집에 들어오자 마자 씻지도 못 하고 나가 떨어졌습니다. 인났더니, 자정. 마감시한에 쫓겨 새로운 포스팅을 할 새가 없어 이 글로 대신합니다.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밑줄 긋기한 대목들입니다. 좀더 요약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일이어서 그냥 올립니다.  
 
2009/03/02 23:55 2009/03/02 23:55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이라는 소설이 있다. 198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전세계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다음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이 소설의 줄거리다

핵전쟁의 위험을 느낀 영국은 25명의 어린 소년들을 핵전쟁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로 옮기려 했으나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가 그만 바다에 추락한다. 부상당한 조종사와 랠프·잭·피기 등의 소년들은 무인도에 상륙한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며 랠프의 지휘에 따라 조종사를 보살피고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구조되려면 바닷가에 오두막을 지어야 한다는 랠프와 사냥을 강조하는 잭은 사사건건 대립하고, 결국 잭과 로저는 갱단을 만들어 무리를 이탈한다. 짐승을 찾아나선 사이먼이 잭 일당에게 살해되고, 섬에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소년들은 안전을 위해 잭의 갱단으로 들어가고 결국 랠프와 피기만 남는다.

문명세계의 사회관습은 붕괴되고, 인간 본성에 잠재한 권력욕과 야만성이 드러나 섬은 지옥으로 변한다. 광기에 찬 잭과 로저는 점점 더 포악해지고 피기마저 죽임을 당한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랠프와 소년들은 가까스로 영국 순양함에 의해 구조된다.
 
  
우리가 만일 저 소설 속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느쪽에 서게 될까?

사람들은 자주 박정희를 이야기한다. 비판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당게판에서도 가끔 박정희를 비판하는 분이 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소설에 빗대어 단순화한다면, 박정희가 바로 '잭'의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터닝포인트는 사이먼이 죽는 부분이다.
보다 정확히는, 사이먼의 죽음을 통해 ' 섬에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대목이다.

박정희는 군중을 다스릴 줄 알았다. 소설 속의 잭처럼. 박정희는 끊임없이 '소문'을 만들어냈고, 그 소문이 두려워서 군중은 박정희에게 순치되어갔다. 박정희나 잭이나 둘 모두 그것이 '필요악'임을 내세웠다(중략). 그러나 모든 군중이 그 소문에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소문의 진실성에 회의하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박정희가 기초한 것이 제4공화국 헌법, 즉 우리가 '유신헌법'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헌법이다. 유신헌법이 비난 받는 이유는 여러가지(과정상-내용상)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헌법상에 있는 '긴급조치 조항(제53조)'은 대표적인 비판 대상이다. 이 조항은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막고 사고와 행동까지를 제약하는 유신헌법의 독소조항이다.

다음은 제4공화국 헌법상의 긴급조치 조항(제53조)이다
① 대통령은 천재 ·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 ·외교 ·국방 ·경제 ·재정 ·사법(司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② 대통령은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③ 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를 한 때에는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④ 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는 사법적(司法的)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⑤ 긴급조치의 원인이 소멸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⑥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긴급조치의 해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으며,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
 
이 긴급조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당시 유신체제에 저항하던 국민들을 탄압하는 데 활용되었다.

당게판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는 당원들의 목소리가 높다. 나 또한 그 주장이 나오고 있는 배경에는 공감을 표한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나는 당게판 폐쇄 주장에 반대한다.

첫째, 지금 당게판의 문제로 꼽고 있는 '당게판 황폐화' 문제는 엄밀하게 말해 당게판의 문제가 아니라 당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게판을 없애거나 옮긴다고 해서 해소되거나 사그라질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둘째, 게시판은 자체적인 정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때문이다. 게시판이 정화 기능을 갖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게시물 자체가 하나의 공개적인 기록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당게판에서 몇 가지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해온 것은 그것이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당내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어서다. 지금 당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누가 뭐를 어쨌다더라' 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누군가'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를 못 하다.

소문을 들은 반응은 이내 '글마 나쁜 넘이네'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방식으로 확대재생산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두가 믿는 '사실 아닌 사실'이 되어버린다. 당사자는 변명 한번 못 해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하의 나쁜 넘'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당원간 반목 및 당내 분란이 일어나고 있는 방식이다. 이건 정상적인 시스템이 아니다. 당사자에게 한번 확인만 해도 금세 확인될 일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소문이 유통되는 통로 자체가 이해관계에 따른 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적인 통로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당게판을 폐쇄하자니..

목전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혹은 목전의 유용함을 위해 더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고 해서, 바르지 않은 일에 동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제안] 당게시판을 지키기 위해 게시판 폐쇄를 제안합니다
[동의] 당을 죽이고 있는 게시판 당분간 패쇄합시다
[결정] 다수의 폐쇄 동의를 받아들여 게시판의 한시적 폐쇄 안건을 수렴하겠읍니다

 
하지만 아는가? '긴급조치'를 포함하고 있는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찬성(91.5 %)으로 확정되었으며, 대통령 취임일에 전 국민의 경하를 받으며 공포·시행되었다는 사실을. <2004-03-02>




<덧붙이는글> 참고로, 당을 살리기 위해 당게판 폐쇄가 불가피하다고 부르대던 이들은 당게판 폐쇄 후 같은 논리로 곧 당 홈페이지를 폐쇄해버렸다. 그런 다음 그들이 비판하던 이들과 함께 당 자체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저들이 필요로 한 것은 당 그 자체 혹은 당의 정신이 아니었다. 그 정신이 새겨진 간판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적인 영달을 위해 그 간판이 필요했고, 결국 그걸로 한 자리씩을 얻어 떠나갔다. 그 출발점이 소통의 차단과 소문의 유통이었고.

<덧붙이는글>
블로고스피어가 소문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최근 들어 부쩍 그 속도를 더하는 성부르고. 정보가 유통되는 방식이 투명하지 않은 탓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블로고스피어의 근간은 블로그다. 블로그의 힘은 그 투명성에 있다. 블로그는 라이프니쯔가 말한 '모나드(단자)'와 같다. 블로그 각각은 서로 독립하여 존재하지만, 그 투명성으로 인해 상호 소통한다.

블로그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가 유통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블로고스피어의 일이 아니다. 투명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문'의 형태로 작동하며, 편가르기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늘 듣보잡는 바로 그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굳이 블로그라는 타이틀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블로그의 가장 큰 특성 가운데 하나-어쩌면 본질이라 할 수 있는-를 저버린 곳에서 굳이 블로그 운운할 이유는 없는 일이겠다.
 
2009/02/22 23:53 2009/02/22 23:53
흘러간 옛 노래 하나를 듣다가도 문득 어떤 기억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고,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뒤적이거나 때로는 그 책의 표지만 봐도 불현듯, 이젠 세월의 한 켠에 묻어버린, 그래서 사뭇 잊고 지내던 아득한 지난 시절의 기억들과 만나 새삼 거기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어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들으면서도 그랬습니다.

모든 것이 빛나기만 하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견뎌냈다'는 것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을 듯싶은 어떤 시기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그 시간들이 바로 눈앞에 선연히 떠올라 끝없이 이어져갔습니다. [footnote]나이가 들었다는 명징한 증거일 터다.[/footnote]

그리고 그 어느 어름에 김정훈의 유고집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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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혹은 이 책에 얽힌 얘기를 다 하자면 몇 날 며칠 밤을 새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시쳇말로 소설을 써도 몇 권은 됨직한 사연이 있어서입니다. 우선, 이 책은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footnote]내가 10권 이상을 선물한 책이기도 하다.[/footnote] 그래서 이 책을 보면 먼저 그 선물 준 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슴 한켠이 싸아하니 아파옵니다. 아픈 일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 시절의 누구나가 그렇듯이 많이 방황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하 략)  

이 책은 사제 서품을 3개월 앞두고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노르 케테 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에 바로 어제 영면한 김수환 추기경이 있습니다.


김정훈 부제는 -사제품을 불과 몇 달 앞둔 그였는데-오스트리아 인스부루크 어느 산에서 불의의 조난으로 돌아오지 않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훈이와 내가 각별한 친분을 맺은 것도 아니다.단지 오스트리아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외국 여행 중에 국내에 있는 신학생들보다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기회가 한두 번 더 있었을 뿐이다.그러나 정훈이는 말이 적으면서 인상을 깊게 남기는 젊은이였다. 그는 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었고,언제나 참된 것을 찾는 철학도로 보였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한 법이다. 그러기에 그는 남달리 산을 좋아했던 것 같다.오스트리아 티롤(Tirol)지방의 눈 덮인 산들, 알프스의 높이 솟은 줄기는 정말 아름답다. 맑은 인품에다가 고독과 사색 속에 진선미를 찾는 사람은 그 수려한 산들과 대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곧 그의 일주기를 맞이하게 된다.우리들 눈 앞에서 그는 갔으나 우리들 마음 속에는 오히려 더욱 깊은 의미로 그는 살아 있다. 비록 김 부제는 사제품을 받지 못했으나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그 산에서 스스로를 깨끗한 제물로 바쳐졌으니 보다 값지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 김수환 추기경 서문 중에서


김정훈이 누구길래 추기경이 직접 서문까지 썼을까?

여전히 까칠한 성격이었는 데다가, 하늘 아래 것들은 모두 눈 알로 보고 살짝 시건방 떨기에 한창이던 내가 저 책을 선물로 건네 받으며 삐딱하게 내뱉은 첫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저 행동은 얼마나 치기어린 행동이었는지요. 그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저런 내 허세는 이내 무너져내리고 말았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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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는 김정훈이 생전에 쓴 일기와 메모들, 그리고 주고받은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즘은 일기도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일기는 한 사람의 가장 내밀한 기록입니다. 하물며, 자신이 사고사할 지도 모르는 이가 구도의 길에서 쓴 일기임에랴.

일기에는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 왜 이 땅에 사람으로 왔는지, 신앙인으로서 갖는 인간적인 갈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몸짓들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서 만나는 것은 한 인간의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예컨대, 이런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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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법한 내용입니다. 신부행을 택한 이기에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 정리에서 힘들어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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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을 이어지고 있는 이같은 모습에, 이를 지켜보다 못한 신부가 한마디를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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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이런 메모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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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책에는 고 김정훈이 직접 그린 여러 장의 수채화가 있습니다. 그림은 고인을 그대로 닮은 듯이 하나같이 수채화 특유의 담백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음은 어제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이 책에 서문으로 실은 4쪽 분량의 글 가운데 처음과 마지막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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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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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글> 이 포스트는 원래 어제 올리기를 예정한 글이었으나, 다른 글이 대신 올라가는 바람에 뒤로 밀렸습니다. 점심 후에 곧 외근을 나가야 하는 터라, 쓰다가 만 글을 그냥 올립니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글이 계속 떠 있는 게 뵈기 싫어서입니다. 미처 정리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얘기는 오늘 밤에 계속해볼 생각입니다. 인스브르크와 오지리는 개인적으로도 연이 있는 터라 하고픈 말이 꽤나 많은 포스팅입니다.  

<덧2> 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베텔불프 산 정상에 올라 눈밭에 남긴 "산, 바람, 하느님과 나, 그리고 김 베드로"에서 딴 것이라고 합니다.

2009/02/19 11:38 2009/02/19 11:38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는군요.
그러고보니, 이제부터는 故김수환님이시네요. 오늘 떠났어도 '이미 옛사람이 된'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림/네이버)


향년 87세.

같은 한 세상을 지내면서도 참 많은 걸 남기고 가는 분입니다.
뉴스를 뒤적이다보니 남긴 발자취를 더듬는 것만으로 한 두 지면으로도 벅차 하는 모습입니다.

내 기억에도 김수환 추기경이 있습니다.

"모든 좋은 일은 쉽지 않은 법입니다."


자신을 지켜가는 일이 너무 힘들어 그만 포기하고싶기까지 하던 어느 해,  
티비로 중계되는 신년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한 말입니다.

저  발언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 말 한마디에 힘을 입고, 그 시절을 견뎌냈던 기억만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고맙다."


오늘, 김수환 추기경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오랜동안 가슴에 담고, 되뇌이게 될 작별 인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며칠 전에 우리집 아이가 물었습니다.

- 아빠, 아빠가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야?
- 없어.
-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 없어.
- 그럼, 인상깊은 사람은?
- 칸트,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
- 누군데?
- 세 사람 모두 철학자야.
- 그게 다야?
- 아니. 세 사람 모두 혼자 살다 죽었고, 죽을 때 모두 같은 말을 남겼지.
- 그게 뭔데?
- 에스 이스트 굿. "좋다"는 말이야.
- 응.. 멋지구나.
- 그건 멋지다고 하는 게 아니야. 아름답다고 하는 거지.


<덧> 만일 저 세 사람이 철학자가 아니고 종교인이었다면
저들이 남긴 마지막 말 또한 '좋다'가 아니라 '고맙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봅니다.

2009/02/17 17:36 2009/02/17 17:36